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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빨간 맛

2017.07.27 00:4307.27

빨간 맛

 – 이나경 –

학교 밖에서 그 애를 본 건 그날이 처음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날 나는 사촌언니한테 편지를 부쳐야 해서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청과물 가게에 들러 자두를 3천원어치 사기도 했다. 아침나절을 부산히 보냈더니 꽤 충실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지난봄부터 엑스포가 한창이라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반은 관광객이고 반은 관광객을 구경하러 나온 주민이었다. 나 역시 엑스포 자체보다 사람 구경에 더 관심이 있었던 터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 보니 어느새 제법 먼 데 있는 상가에 이르렀더랬다.

 상가는 허름하고 볼품없었다. 그러나 상가 내에 유독 외지인에게 각광받는 식당이 있다 보니 다른 가게들도 전반적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끄트머리 사탕가게 같은 곳은 외지인들마저 외면해 인적이 드물었는데 바로 그 사탕가게 직전 골목에서 그 애를 본 것이었다.

 그 애는 자기 살결만큼이나 하얀 티셔츠에 감색 반바지를 입고 알록달록한 샌들을 신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밀짚으로 짠 여름 모자가 들려 있었다. 나는 뒷모습만 보고도 그 애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서도 내가 그 애보다 뒷자리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봤더라면 아마 몰라봤을지도 모른다. 아니, 절대로 그럴 리 없지.

 아무튼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에 그 애가 있었다.

 거기서 웬 남자를,

 부둥켜안은 채로,

 격렬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봉지를 떨어뜨렸다. 자두 몇 알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그러자 그 애가 스르르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수업시간에도 그 애는 나를 슬쩍슬쩍 곁눈질하곤 했다.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

 그만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 애가 아니라 내가. 정작 그 애는 태연했다. 내심으로는 어땠을지 내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겉보기로는 아주 태연자약했다.

 내가 물러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애의 붉은 입술이 유난히 더 붉어 보여서였다. 입술 본연의 색깔에 인위적인 무언가가 덧입혀져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피였다. 당장 확신한 건 아니고 ‘피일까?’ 하고 의심하던 차에 그 애가 상대하던 남자가 털썩 쓰러지니 자연히 ‘피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니 주춤주춤 물러선 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 애는 내게 다가오더니 미처 뿌리칠 겨를도 없이 팔을 당겨 자기 팔에 엮었다. 그늘에 오래 있었는지 그 애 살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 애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제 머리에 사뿐히 얹고는 팔짱 낀 채로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깡마른 팔뚝에서 무슨 힘이 그리도 솟는지 나는 속수무책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간 곳은 상가 반대편 끝에 있는 빙수 가게였다. 예전에는 막과자를 파는 가게였는데 복권 판매업으로 업종을 바꾼 뒤로도 여름에는 특별히 컵빙수를 팔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빙수 가게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냉방이 시원찮은 걸 보니 파리 날리는 사정을 알 만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에 몇 번 왔을 때에도 포장만 해갔지 들어와서 먹지는 않았었다.

 그 애는 컵빙수 두 개를 사오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나는 얼이 빠져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자, 여기 멜론맛.”

 그 애가 컵빙수 하나를 내 쪽으로 슬쩍 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커피컵에 수북하게 얼음을 담고 색색의 시럽을 뿌리는 심플한 빙수였다. 멜론맛이라더니 과연 갈린 얼음 위로 연두색 시럽이 뿌려져 있었다.

 나머지 컵빙수는 빨간색이었다.

 “아님 이거 먹을래?”

 내가 쳐다보자 그 애가 말했다.

 “이것도 맛있어.”

 “…딸기맛이야?”

 어렸을 적에 먹었던 게 딸기맛이었는지 수박맛이었는지 헷갈렸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만.

 “이거? 아닌데. 피 맛이야.”

 그 애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교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온 그 애는 늘상 조금쯤 불만스러워 보였더랬다. 여수가 아주 촌구석은 아니라도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그냥 둘 다 나눠 먹자.”

 그 애가 컵빙수 두 개를 테이블 중간에 나란히 놓았다. 연극이라도 하듯 동작을 큼직하게 얼음이 든 컵을 스푼으로 슬슬 휘저었다. 투명한 얼음 조각들이 각각 시럽 색으로 물들었다.

 그 애는 먼저 연두색 빙수를 한 입 떠먹었다. 고운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방금 전까지 저 입으로 남자랑 키스를 했단 말이지…. 멀뚱히 보고 있으려니 그 애는 내게 빨간색 빙수를 한 입 넣어주었다. 귓속이 쨍하고 코가 맹해졌다. 빨간색은 딸기맛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빙수를 먹었다.

 빙수 바닥이 보일 즈음 그 애가 말했다.

 “안총명, 아까 본 것 말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아.”

 “내가 뭘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이랑….”

 “키스한 거? 됐어, 못 본 척해줄게.”

 “으응,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다 봤거든.”

 “그러니까 보는 거랑은 달라. 총명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래두.”

 그 애는 진지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냥 키스를 한 것뿐이라면 입술의 피는 무엇이고, 남자는 또 왜 쓰러졌던 거지? 예전에 키스를 오래 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쓰러진 연인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피를 마시고 있었어.”

 그 애가 말했다.

 “그 사람 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그 애가 한 번 더 말했다.

 “피 말이야.”

 그 애가 자꾸 자꾸 말했다.

 “피를….”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듣다 못한 내가 목소리를 살짝 높이니 그 애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나도 지지 않고 그 애를 쏘아보았다. 그 애가 입술을 옴짝거렸는데 아까처럼 빨갰다. 아니,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에 묻은 건 딸기 시럽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뱀파이어나 뭐 그런 거라는 얘기야?”

 “으음….”

 그 애가 난처한 듯이 말했다.

 “그런 셈이긴 한데….”

 “셈은 무슨 셈? 제대로 설명해봐.”

 “글쎄요오.”

 “존댓말은 집어치우고. 너, 뭐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피를….”

 “왜 남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냐고.”

 “굳이 설명하자면… 역시 뱀파이어라고….”

 “하.”

 마침내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뭐 고스족 같은 건가? 그렇다고 생피를 막 마시고 그러는 건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니니? 잘못되면 죽을지도 몰라.”

 “그보다는 오히려 피를 못 마시면 죽어.”

 “하.”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는 단정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다른 세계에 정신을 반쯤 걸치고 있는 애였다.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래, 오케이. 사정은 잘 알았어. 빙수 고맙다. 나는 이만 가볼게. 안녕.”

 내가 일어서자 그 애가 다급히 내 손목을 잡았다.

 “저기, 저기! 안총명! 이거 비밀로 해줄 거지?”

 “…너 입술에 피 묻었다.”

 “히엑!”

 바보 같아.

 돌아오는 길에 자두를 두고 온 게 생각나서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자두는 그대로 있었는데 쓰러졌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자두를 씻지도 않고 우물거렸다.

 열흘쯤 지나서 다른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떠는데 불쑥 그 애 얘기가 나왔다.

 “참, 나 그 애 봤다.”

 “누구?”

 “그 애 있잖아.”

 “어, 그 애. 실은 나도 얼마 전에 봤는데.”

 “나 깜짝 놀랐잖아.”

 “왜… 왜?”

 “대낮부터 어떤 남자랑 키스하고 있더라니까!”

 “나, 남자?”

 “그래! 한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말이지! 더러워 정말!”

 내가 본 남자는 그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었다.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였을까. 즉 그 애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애가 너한테 뭐래?”

 “아니, 그 애는 내가 본 거 모를걸. 보자마자 도망쳤거든. 어휴 지금도 닭살이 돋는다. 그게 그 원조교제라는 거겠지?”

 “너 이거 소문내지 마.”

 “왜?”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글쎄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보는 거랑은 다를지도 몰라. 알았지?”

 나는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반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상연락망에 있는 그 애 전화번호를 물었다. 자다가 전화를 받은 반장은 다시 잠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에야 문자로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에 그 애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여덟 번 울리고 내 속이 여덟 번이나 타들어간 끝에 그 애가 받았다.

 “누구세요?”

 “나 안총명.”

 “어, 어…. 안녕. 웬일이야?”

 “너 조심 좀 해야겠더라. 내 친구가 그러는데 네가 웬 아저씨랑 있는 거 봤대.”

 “누가?”

 “비밀이야. 이만 끊는다. 안녕.”

 끊고도 싱숭생숭해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선풍기 앞에서 냉차를 들이켜고 얼음을 씹어 먹었다. 그런 뒤에 그 애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신호 두 번 만에 통화가 이루어졌다.

 “근데 그거 진짜야?”

 나는 궁금한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애를 쓰며 물었다.

 “피 빨아먹는다는 거 말이야.”

 “그래. 말했잖아.”

 “안 하면 죽는다고 한 것도 진짜야?”

 “응.”

 “알았어.”

 나는 혀끝에서 맴돌던 말을 기어코 내뱉었다. 입 안의 냉기로도 식혀지지 않은 뜨거운 말을.

 “내가 도와줄게.”

 “뭐? 뭐를?”

 “네가 골목에서 식사하는 동안 사람들 오는지 망 봐주겠다고.”

 “아니 나는 딱히… 괜찮은데.”

 “원조교제 소문나도 괜찮아?”

 “그런 소문이 있어?”

 “얘가 진짜… 경민이가 지금 벼르고 있거든! 엣… 아니, 경민이 아니야. 유경민 말고 너 모르는 경민이 있어. 하여튼 그 부분은 취소.”

 “흐음….”

 그 애가 말했다.

 “근데 네가 무슨 상관인데?”

 “뭐?”

 “소문이 나는 건 안총명 너랑 상관없잖아. 평소에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도와주려는 거냐고.”

 “기가 막히네. 내가 선량해서 그렇다면 어쩔래?”

 “그럼 다행이고. 나는 혹시 네가 내 약점을 잡고 뭔가 요구하려나 싶었거든.”

 “너 진짜 얄밉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믿어서 그래.”

 “그래서 도와줘 말아?”

 “그럼… 내일 볼래? 시간 안 돼도 이해할게.”

 다음날 나는 사탕가게 앞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에서 20분이 경과했을 즈음 그 애가 나타났다. 자주색 민소매 셔츠에 발목이 드러나는 흰색 치노 팬츠 차림이었다. 모자 대신 아이보리색 양산을 쓰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그 애라서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 애 옆에는 당연하게도 남자가 있었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다. 또래 고등학생으로 보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 관광객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 애와 남학생이 나를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갔다. 남학생이 나를 의식한 듯 뒤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면한 행운을 마다할 계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골목 안쪽에서 둘이 뭔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잠시 후에 그 애가 혼자 나왔다.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럴까봐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건넸다. 남자애는 실신해 있었다.

 우리는 컵빙수 집으로 갔다. 엄밀히 말하면 복권 가게지만. 이번에는 오렌지맛과 포도맛을 주문했다. 스푼이 얼음 속을 서걱거리며 파고들었다. 혀가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너 정체가 뭐야? 인제 나한테는 말해줘도 되잖아.”

 그 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밀로 할게. 이래봬도 나 입 무거워.”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뭐야? 진짜로 뱀파이어야?”

 “음… 큰 틀에서 뱀파이어랑 비슷하긴 해. 어쨌거나 피를 마시니까.”

 그 애가 말했다.

 “그치만 사람을 해치지는 않아. 생각해봐, 네댓 모금 마시려고 죽이는 건 아깝잖아.”

 “아까워?”

 “감옥에서 허송세월할 내 인생이.”

 “네 인생이?”

 “농담이야.”

 그 애는 한 번에 많아야 수혈팩 한 봉지 정도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죽이는 대신 실신시키는 편이 서로에게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공생이랄까.”

 나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농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기절시키는 건 그… 포르말린으로?”

 “클로로포름이겠지. 근데 아니야. 약물은 따로 필요 없어. 내 침이 마취제거든.”

 복권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복권을 사러 오는 손님조차도. 심지어 주인아주머니는 요 앞에 신발가게에 있을 테니 누가 오면 알려달라고 부탁하더니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그 애는 안심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구강을 통해 이루어지는 불공정 무역에 관한 일장연설이었다.

 첫째로, 그 애는 적당한 대상을 물색해 키스를 제안한다. 자기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대상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요점은 자기 스스로 잘생겼다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내 쪽에서 키스하자고 했을 때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거든. 그런 사람들은 얼굴에 꼭 표가 나더라.”

 물론 숙달된 헌팅 고수가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했다.

 둘째로, 그런 뒤에 그 사람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한다. 먹잇감 선정에 비해 장소 선정은 공을 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길어야 5분 이내로 끝나는 작업이니 얼른 빠져나올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셋째로, 키스를 하긴 한다. 입을 사용하는 만큼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오래지 않아 상대방의 몸이 마비되므로 그 애는 먹잇감의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를 빨아먹을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애가 갈증을 해소할 즈음에는 마취의 효능이 상대방의 전신에 퍼져 쓰러지는 것이라고 했다. 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중을 생각하면 뭔가 조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나중이라니?”

 “너한테 당한 사람들이 해코지하러 온다든지…. 요새는 막 염산도 뿌리고 그런다던데.”

 “그래서 무슨 조치를 해?”

 이 대화가 재미있는 듯 그 애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주, 죽여야지….”

 “와, 안총명 무섭네. 잔인하네. 나는 그런 거 상상도 못 해봤는데.”

 “웃겨. 상상은 해봤잖아.”

 내가 발끈하자 그 애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애는 자기 침이 단순히 마취의 작용만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키스한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나 문과잖아.”

 “이과면 알 수 있는 거야?”

 “아니.”

 우리가 키들거리자 지나가던 관광객이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그는 곧 흥미를 잃고 가던 길을 갔다.

 “그럼 키스한 일을 기억 못한다고?”

 “맞아.”

 “너는 기억하고?”

 “나는 당연히 다 기억하지. 지금까지 한 사람들 다.”

 “몇 명이랑 해봤어?”

 “그건 노코멘트.”

 “아!”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 설마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랑도 한 거 아냐?”

 “으웩.”

 “아니야?”

 “매일 볼 사람들이랑 어떻게 해.”

 “그, 그야 먹고사니즘 때문이라면….”

 “그래 뭐, 급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으웩.”

 우리는 또 한동안 말없이 플라스틱 컵의 바닥을 긁었다. 벽걸이 선풍기가 습한 바람을 뿌렸다.

 “근데 있지.”

 내가 말했다.

 “남자 피만 먹어?”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여자 피도 먹어?”

 “남녀 성별은 관계없어. 키스하자고 했을 때 따라오는 사람이 주로 남자일 뿐이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수염 거뭇한 남자들보다는 여자랑 입술 포개는 게 훨 좋아. 부드럽고.”

 “잘됐네. 내 피 줄게.”

 “뭐?”

 “성가시게 사람 찾아다니지 말고 내 피 먹으라고. 나는 괜찮으니까. 헌혈증은 못 받아도.”

 “그래도 그건 무리야.”

 “왜?”

 “원래 헌혈하면 다음에 헌혈할 때까지 한 달은 있어야 하잖아. 몸에서 피를 만들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나는 사흘에 한 번씩은 갈증이 난단 말이야. 시간이 안 맞지.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뭔데?”

 “처음 한 번은 키스하는 순간만 기억 못하는데, 두 번째 키스 때는 아예 내가 누군지조차 잊게 돼.”

 “왜?”

 “문과라서 모르겠어.”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았어. 한 번은 괜찮다는 거지?”

 “으응.”

 “그럼 한번 해보자 우리.”

 “싫은데.”

 “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너더러 키스하자는 게 아니잖아. 피를 먹으라고.”

 “너는?”

 “나? 나 뭐?”

 “너한테는 키스잖아.”

 “웃기셔. 나는 예전부터 전신마취 해보고 싶었거든!”

 억지도 이런 억지가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 애가 깔끔하게 거절했다.

 “아니야. 너랑 나는 안 돼.”

 그 날 이후 그 애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도 몇 번이나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관두었다.

 그렇게 방학이 끝났다.

 교실에서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교실에서 만난 그 애는 단정하고 차분하고 우아했다. 나는 그 애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그리로 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수업 중에 그 애가 내게 곁눈질할 때마다 나는 울적해졌다.

 하루는 그 애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 전에 그 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여서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그래도 나는 신호가 꼭 여덟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았다.

 “안녕.”

 “안녕.”

 “자고 있었어?”

 “아니, 이제 자려고. 왜?”

 “얘기 좀 할까 해서.”

 “해, 그럼.”

 수화기 너머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내가 전에 얘기를 제대로 안 해줬어.”

 “무슨 얘기?”

 “너 예전에 부산 살았었지?”

 “부산?”

 나는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까지 부산에 살았었다. 그러다 중학교 입학하고부터 여수로 전학을 왔더랬다.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부산에서 잠깐 살았거든. 그때 우리 친구였어.”

 “우리가?”

 “응.”

 그 애는 더 말이 없었고 나는 멍하니 그 애의 말을 기다리다가 방금 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럼 너 예전에 내 피를 빨아먹었던 거야? 두 번이나?”

 “맞아.”

 “헐….”

 그 애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전학 와서 네 이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내가 기억 못할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너는 나를 자꾸 쳐다봤지. 왜 그랬어?”

 “내가 보긴 뭘 봤다고.”

 “아, 됐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너, 세 번 키스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세 번째는 너도 나처럼 되는 거야. 평생 남의 피 빨아먹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너랑은 절대로 못해. 이제 이해하겠지? 그러니까 그냥 친구로 지내는 거야.”

 “그래, 알았어.”

 내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안녕.”

 “안녕.”

 전화를 끊고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설핏 잠에 들었다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깨닫고 말았다. 가히 보리수 아래 부처의 깨달음과 견줄 만한 것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불을 켜고 전화를 걸었다.

 “안총명?”

 “어, 나야.”

 “너 지금이 몇 신데….”

 “네 번째는?”

 “응?”

 “네 번째는 어떻게 돼?”

 “네 번째는 없어. 세 번째에 이미 우리는 똑같아지니까. 그때는 그냥 키스야.”

 “역시 그랬어. 그거 확인하려고 전화했어. 안녕.”

 새벽 내내 나는 그 애와의 지난 두 번의 키스를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막연히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애가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그 까맣고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쩐지 코끝이 가려워져 피식 웃었다. 그 애도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나는 손을 어디 둘지 고민하다가 그 애 허리를 살짝 감쌌다. 문득 그 애가 나를 끌어당겨 내 입술을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촉촉한 입술이 닿자 내 입술이 적당히 벌어졌다. 이윽고 그 애의 혀가 내 입속으로 넘어왔다.

 곧 나는 나를 물들여버릴, 내 모든 기질을 변화시킬, 또한 내 미래를 영영 바꾸어버릴, 마침내 그 애 곁에 영원히 머무르게 해줄, 진하고 강렬한 키스의 맛을 느낄 것이다. 그 맛은…. ▧

 
댓글 6
  • No Profile
    pupil 17.08.01 12:30 댓글 수정 삭제

    발상의 전환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pupil님께
    No Profile
    글쓴이 이나경 17.08.02 13:58 댓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No Profile
    kyoko 17.08.02 00:36 댓글 수정 삭제

    와 어떡하지 너무 좋아요 진짜ㅠㅠ 이 사이트를 어쩌다 들어오게 돼서 처음 본 글인데 너무 좋네요. 자유롭게 댓글을 달아도 되는 거겠죠? 너무 맘에 들어서..제목이 '빨간 맛'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알록달록하고 밝은 이야기이려나 하고 있었는데 달콤살벌 새빨간 이야기네요. 채도가 높고 선명한 핑크 섞인 빨강 같아요. 딸기 향이 날 것 같은. 스토리가 진짜 너무 매력있어요..마지막에 키스로 끝나는 것도 너무 좋고요.. 길이로는 아주 짧은 단편인데 굉장히 흡입력 있고 여운이 남네요. 최근에 집중력 부족으로 어떤 것에든 집중할 수 없었는데, 이 글은 초장부터 아주 잘 읽혔던 것 같아요. 딱 인상적인 단편영화를 본 기분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kyoko님께
    No Profile
    글쓴이 이나경 17.08.02 14:01 댓글
    아이고.. 너무나 과찬이고 그래도 사양하고 싶지는 않고요ㅎㅎ 덕분에 이번주 내내 우쭐거릴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No Profile
    gnat 17.08.02 14:37 댓글

    지나가려다 주저앉은 레드벨벳 팬입니다. '상상 그 이상'의 결말이네요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gnat님께
    No Profile
    글쓴이 이나경 17.08.03 08:35 댓글
    고맙습니다. kpop의 인기에 편승하는 기분은 마치 저 자신이 아이돌이 된 것 같은..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읽어주셔서 거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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