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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만 케부는 누구인가

노말시티

 

뛰어난 연기를 보여 준 배우에게 상을 수여할 때 그 배우의 성별을 구분해 상을 준다고 하면 요즘에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만일 남성 배우가 여성 배역을 연기했다면 그 배우에게는 어떤 상을 주어야 하는가. 단 두 개의 성별로 인간을 구분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의 구분을 없앤 건 불과 십오 년 전의 일이다. 그나마 영화계는 이처럼 인간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이었던 편이다. 그런 영화계가 또 다른 선택에 직면해 있다. 묘하게도 질문은 같다. 만일 남성 배우가 여성 배역을 연기했다면 그 배우에게는 어떤 상을 주어야 하는가. 

이번에는 물론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관점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배우와 배역의 차이에 있다. 영화제의 연기상은 배우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배역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이제까지의 관점은 아무래도 배역보다는 배우에 치우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기상은 그 배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 배우에게 준다. 배역 그 자체는 배우와 연출 그리고 각본과 분장 등 영화를 만들어 낸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종합된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올해부터 배우가 아니라 배역에 상을 수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을 두고 오가는 논쟁은 복잡하지만 대체로 영화제가 논란의 핵심을 비껴가는 소극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연기상에 성별 구분을 없애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비슷한 의견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의 결정이 불필요한 논란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더 큰 의문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렇다. 과연 누가 배우인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창조된 배우에 대한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체로 그래픽이 하는 역할은 배우의 연기를 보조할 뿐이라고 여겨졌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을 연기한 배우 앤디 서키스는 영화 내에서 본인의 모습이 일절 등장하지 않고 모션 캡처로만 연기했음에도 그에게 연기상을 줘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실제로 당시에도 몇 개의 상을 받기도 했다. 요즘이라면 그가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라가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해 최고의 영화로 극찬받고 있는 <유령 행성>의 주인공인 라만 케부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다. 우선 라만 케부의 얼굴은 국제영화제에서 다수의 연기상을 받은 바 있는 유명 배우 에릭 듀랜트다. 듀랜트는 단순히 외모 합성을 위한 사진 몇 장을 제공한 게 아니다. 다양한 감정 표현을 위해 수천 가지 종류의 표정을 촬영했으며 실제로 영화 내의 몇몇 장면에서는 사용할 표정을 고르는 데 직접 참여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앤디 서키스의 경우처럼 주인공의 모션 캡처를 제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고든 스트롱이라는 액션 전문 배우다. 요즘에는 골룸을 연기할 때처럼 온몸에 마커를 부착할 필요도 없다. 촬영장에서 전통적으로 배우에게 요구되었던 연기를 수행한 건 전적으로 스트롱이다. 그렇다면 스트롱에게 연기상이 돌아가야 할까. 일단 스트롱 본인이 거부한다. 스트롱은 관객이 최종적으로 마주하는 배우의 연기에 있어 자신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임을 잘 알고 있다. 

'전 제가 연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연기상을 받아 왔던 배우들은 주로 자신의 표정을 통해 배역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던 사람들이죠. 제가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액션 연기를 합니다. 제 몸 전체를 감독이 요구하는 형태로 움직여 내는 일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액션 연기가 표정 연기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년 전부터 영화제에 액션 연기에 수여하는 별도의 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제가 연기하긴 했지만 라만 케부는 액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배역이 아닙니다. 그런 라만 케부를 통해 연기상을 받는다면 그건 오히려 그동안 제가 그동안 주장했던 액션 연기의 중요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 되겠죠.' 

이게 끝이 아니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만일 라만 케부를 통해 누군가가 상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낸시 스탠튼이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낸시 스탠튼은 영화의 아트 디렉터 중 한 명이다. 그중에서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되는 배우의 모습을 최종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가상 배우가 실제 배우를 대체하는 것은 언젠가는 올 미래겠지만 낸시 스탠튼은 개인의 능력으로 그걸 십 년은 앞당겼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스탠튼이 손대지 않은 다른 배역들은 아직 연기상은커녕 평범한 연기의 수준조차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배역의 시각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목소리 연기도 마찬가지다. 음색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 성우는 숀 윌리엄스고 실제 발성 연기를 한 성우는 섀넌 아자르다. 그리고 합성된 목소리를 최종적으로 조율한 것은 역시 낸시 스탠튼이다. 

<유령 행성>에서 라만 케부가 보여 준 연기가 최근 십 년 동안의 영화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의 명연기였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배역의 배우는 과연 누구인가. 전통적인 배우의 역할이 여러 사람에게 분할되고 있는 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얼굴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람과 액션 연기를 하는 사람 그리고 그 모습을 조율하는 사람 모두 영화를 완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누가 라만 케부를 통해 상을 받느냐를 통해 그동안 뒤에 숨어 있던 이러한 역할들이 전면에 드러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다. 배우가 아니라 배역에게 상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그런 논의에서 빠져버린 영화제의 결정이 비난받는 이유다. 

아울러 이처럼 여러 개로 나뉘어 버린 배우의 역할이 하나씩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연주자가 필요 없는 음악이 등장한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배우가 필요 없는 영화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영화제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배우상을 배역상으로 대체한 이번 사건은 왠지 그런 미래의 전조로 보인다.

댓글 2
  • No Profile
    플럼 22.01.16 12:54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기존에 알던 것들을 거의 뜯어내듯 분해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는거 같아요

  • 플럼님께
    글쓴이 노말시티 22.01.24 09:30 댓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디까지 무너질지 걱정되면서도 기대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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