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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라,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갈원경

 


수도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생은 총 20명 남짓이지만 제대로 졸업하는 경우는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빠듯한 학과 과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모두 이름난 가문의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카데미를 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최대한 5대 가문 중의 한 가문이어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곧장 왕실 학자로 임용될 만큼의 천재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졸업식의 대표 인사를 맡은 것은 검은 머리의 소녀였다. 아직 1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작은 키의 소녀가, 오크로 만든 단상 앞에서 건조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도해 주신 많은 선학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인사를 하는 사람만큼이나 이례적이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거의 매번, 대륙 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왕의 업적과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영웅의 이름을 논하고,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후학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바로 그 왕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이러한 인사말이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졸업식은 무사히 끝났고, 붐비는 사람들을 지나 졸업인사를 한 소녀는 아카데미의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얘야.”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소녀, ‘서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왕이었다. 노골적으로 옆에 서있는 남자들은 없었지만 수풀 사이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5년 만이냐.”

“예.”

왕은 소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는 가볍게 헛기침했다.

“마법학부에서는 네가 개교 이래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하더군.”
“입에 발린 칭찬입니다.”

소녀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처럼 표정의 변화를 보이거나 눈을 빛내거나 하는 대신에, 마치 아주 나이많은 마법사들처럼 무덤덤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왕에게 대답했다.

“처음 한센에게 너를 맡겼을 때는, 저 애가 자라서 성인이 될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쓴웃음을 지으며 왕이 말했다. 소녀는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할 생각이냐?”
“아직은 특별히 정한 것은 없습니다.”

왕은 계속해서 무표정한 소녀의 대답에 조금 지쳤다.

“한센을 왕성으로 불렀다, 너도 같이 가겠느냐?”
“집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왕은 돌아섰다.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15년 전의 일이었다. 정복왕 타에르그가 세계를 통일하겠다고 선언한 뒤 20여년 만의 일이기도 했다. 왕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방에서 항상 검을 들고 직접 지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목상 3대 대국이었던 다른 두 나라가 하나씩 복속되어가는 동안에도 유일하게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던 나라, [단]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여섯 개의 나라 가운데 강대국 세 개와 국경이 닿아 있고, 영역 면에서는 여섯 개의 나라 중 최소였던, 큰 나라의 도시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을 나라 [단]은, 최후의 독립국이자 신성국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단]의 한 가운데, 대륙의 중심에 ‘서리’라는 산이 있었다. 세 강대국들이 크지도 않은 [단]을 복속시키려 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 산 때문이었다. 세계의 창조신화의 중심에 있는 영산靈山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산에 올라 산 정상에서 감[神]을 만난 사람만이 무사히 산에서 내려올 수 있으며, 그 사람이 다음 대 [단]의 왕이 되었다. 많은 왕족들이 기대를 품고 산에 올랐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단]은 용의 수호를 받는 나라라고 말했다. [단]의 왕을 결정하는 것은 산에 깃들여 있는 용이라고. 그 의문을 증폭시키기라도 하는 듯이, [단]의 왕은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왕의 집무 현장에서는 항상, 베일을 드리운 장막 너머에서 왕 외의 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을 가리켜 용의 나라라고 했다. 전설이 깨어진 것은 15년 전, 타에르그 왕은 직접 단을 공격해, 왕성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전설과는 달리 왕을 수호하는 제2의 인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왕은 너무나 힘없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 날 처음으로 왕의 얼굴을 보았고, 그 때부터 단의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서리는 집으로 돌아와 집앞 호위병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카데미와 같이 경비가 삼엄한 곳 외에는 호위병을 대동하고 다녀야 한다고 한센은 늘 이야기했지만 서리는 늘 혼자 다녔다. 집 안에는 사용인 두엇이 있어야 할 테지만, 어쩐 일인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카데미의 문양이 수놓아진 로브를 벗고 자기 방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문 뒤에서 부스럭 낮은 소리가 났다.

“레이디 자렐, 문은 열려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이 열렸다.

“황태자께서는 왕성에 가셨습니다만.”
“그건 알고 있어. 만나고 왔으니까.”

자렐은 조금 얼굴을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대륙 통일이 되기 전부터 이 나라의 귀족이었고, 지금은 대륙 최고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렐 가의 외동딸이었다. 황태자가 왕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황태자 한센의 짝으로 자렐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렐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황태자는 자렐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는 벌써 30대 중반이야. 결혼할 나이가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박또박 말하며 서리는 의자를 내어 자렐에게 권했다. 자렐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황태자 덕분에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도 했고, 네 나이도 이만큼 되었으니 이제 여기서 사라져 주는 게 예의 아냐? 왕의 명령으로 너를 맡았지만, 왕께서도 이제 널 신경 쓰고 계셔.”

“왕위 계승권 때문에 신경 쓰고 계신거라면, 저는 그 순위에서 빠져 있습니다. 황태자께선 누이도 많이 계시고.”

“왕위 계승권 같은 건 문제도 아니지, 황태자를 손에 넣는다면 말이야.”

자렐의 말에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황태자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하는지, 딸이라곤 하지만 입양도 하지 않은 채였다. 뒷소문이 나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다.

“레이디 자렐, 황태자비가 되고 싶으신 거라면 제게 찾아오실 게 아니라 황태자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서리의 말이 멈추었다. 서리는 붉게 달아올라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지도 않고 자렐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하나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냐! 어디서 건방지게-”
“그럼 마음대로 하시죠, 레이디 자렐?”
“…못할 것 같아!”

자렐의 손이 서리의 목을 감싸 쥐었다. 서리는 눈을 감았다. 여자의 손이지만 무장武將 가문의 딸이어서인지 손끝의 힘은 약하지 않았다. 언뜻언뜻 호흡이 힘들어지는 것을 서리는 남의 일인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몸에 힘을 뺐다. 죽는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15년 전, 처음 한센을 만났던 그 해 전의 기억은 하나도 없다. 한센은 서리의 피붙이를 찾기 위해 많은 곳을 수소문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누구도 아는 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천한 핏줄이거나, 혹은 죄인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수근댔었다. 15년동안 서리는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수많은 의사들과, 심지어 마법사들까지 불려와 서리를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에 둔감한 마음, 모든 것이 새로운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무심함.

-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다면 조금씩 돌아오는 법입니다만….

- 무슨 뜻인가?

- 누군가가, 아주 강한 마법사가 마법으로 기억을 막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 무엇 때문에?

- 글쎄요, [단]에서는 범죄자를 처형한 다음에는 그 후손에게 그런 처치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알 수 없습니다. 기록에도 남기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 서리에겐 말하지 말게.

- 물론입니다, 전하.

죽음이 스치는 순간에 왜 이런 대화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센의 집무실 앞에서 우연히 들었던 대화가, 듣고 넘긴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범죄자의 핏줄. 이미 죽었어야 했을 목숨. 고국도 없고 핏줄도 없고 기억도 없고, 감정조차 없는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이 있을까. 서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무슨 짓이요?!”

문소리와 높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스르륵, 목을 조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한센…, 이, 이건 얘가…”
“서리가 먼저 공격했다고 말할 셈이요? 서리는 지팡이도 갖고 있지 않소!”

거칠게 한센이 자렐을 서리에게서 뗴어냈다.

“괜찮으냐? 숨 좀 쉬어보렴. 어서.”
“…괜찮아요.”

아버지, 라는 호칭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센이 서리의 목에 남아있는 손자국에 손을 대려는 것을 흠칫, 서리가 물러섰다. 한센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손을 떼었다. 15년을 함께 살았어도, 언제든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어도, 황태자의 딸의 자격으로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주었어도, 서리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깎은 듯이 단정한 얼굴과 지긋이 다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어도, 웃음 한 번 띄우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한센이 가깝게 다가설 때마다 물러서 버리는 그였다.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센 자신이 서리를 더 이상 딸로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졸업 축하한다. 식에 가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바마마께서 왕성으로 부르시는 바람에…….”
“아카데미에서 뵈었어요.”

이미 왕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문에 노크소리가 나며 사용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한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용인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레이디 자렐이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 한센이 느꼈던 불안감은 적중했다. 방 안으로 곧장 달려와 자렐이 서리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손 안에서 축 늘어진 서리가 반항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알고 있지만, 언제든 죽어도 좋다는 것 같은 얼굴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왕성에 들어와서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구나."

머릿속의 불안감을 지워버리려 애쓰며, 한센은 사용인이 가져다 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서리는 대답 대신 자신 앞의 찻잔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너도 이제 졸업도 했고 말이야."
"좋을 대로 하세요."

서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처음 발견된 때부터 그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커다란 나무색 눈으로 물끄러미 한센을 쳐다보았을 때에도, 이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름. 대륙 중앙에 있는 영산의 이름과 같은 그 이름이 그때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늘 한결같음이, 그러면서도 누구도 침입할 수 없을 그 얼굴이, 정말로 산의 모습과 같다.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서리는 어느새 찻잔을 비우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마라. 경호원을 데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탁 소리나게 닫혔다.

 

바깥에는 드물게도 두 개의 달이 모두 떠 있었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서리는 로브를 단단하게 여미고 걷기 시작했다. 왕은 자신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어른이 된 이후로는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사람이었다. 한센이 왕성 바깥에 있는 것도, 다른 많은 왕족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그런 때문이었다.
한센에게 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는 것은, 역시 왕이 물러날 생각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왕은 건장하다고는 했지만 이미 늙어 있었다. 87세에 있었던 대륙 정벌이 사실상 그때 막 스무 살이었던 한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단]의 왕궁을 습격했던 일도.

-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
- 뭐냐? ……이런, 어린아이잖아.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때였다. 무너져버린 왕성 벽에 기대어 자신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했다. 스무 살의 한센이 자신을 쳐다보곤 얼굴이 굳어 버린 것을, 그때의 그 굳은 표정을 서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데려오고, 양녀라는 이름으로 같이 살기 시작한 지 15년.
아마도 그는 멀지 않아서 자신에게 청혼을 해 올 것이라고, 서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서른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독신인 그가, 얼마나 많은 귀족 여성들을 뿌리쳤었는지 서리는 알고 있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리 자신을 가리켜서 검은 머리의 마녀라고도 부른다는 사실도, 한센이 종종 자신을 훑어보는 것도. 한센이 몇 번이나 청혼을 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그 때마다 서리는 모른 척 그 자리를 피해 버렸던 것이다.

어느새 꽤 으슥한 곳까지 접어들었다. 서리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았다.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센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마음먹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최대한 후원해 주었다.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찾아주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왔다. 그렇지만, 한센과의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마음 한쪽에서 치미는 위화감은 무엇 때문일지.

문득 오한이 들었다. 서리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두 개의 달이 크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더니, 먼 곳에 있는 '서리'산이 바로 지척인 듯 가깝게 보였다.

[ 드디어 찾았구나, 나의 신부. ]

머리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산속의 메아리같은 음성이 들렸다. 서리는 자신도 모르게 바위에서 일어났다.

"누구……?"

스르륵, 밝아진 달빛 아래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의, 새까만 옷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 나다, [단]. 이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랫동안 힘들게 했구나 나의 신부여. 용서하라. ]

"……뭐라고요?"

남자는 스르륵,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 동작으로 서리에게 다가왔다. 서늘한 한기의 시작이었다. 그가 조용히 손을 뻗어 서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 가엾게도, 내가 막아둔 것을 아직도 깨지 못했구나. 그래, 인간의 힘으로는 힘들었을 테지. 나 역시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야 했을 만큼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내가 왔으니. ]

"손…대지 말아요."

서리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 너는 내 신부, 내 영혼의 동반자, '서리'의 아침을 함께 맞은 자. 믿어라,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순간, 모든 것이 머리 속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막아둔 둑이 무너지며 호수의 물이 쏟아지듯이 일순간에, 기억과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그리움, 애정, 평온함, 그리고… 죽음과 상실의 공포.

"…단."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주루룩 눈물이 흘렀다. 아아 한센, 가엾은 사람.

 

한센은 혼자서 왕성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한센의 양녀 서리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온 나라를 떠돌았다. 멸망한 나라의 저항 세력이 개입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왕은 한센이 왕성에 들어 온 다음 날, 마치 잠들 듯이 죽었다. 유일한 아들인 한센이 왕이 되는 것은 누구의 반대도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이 승하한지 일주일 뒤, 장례가 끝나고 한센의 즉위식이 열렸다. 각 계 각 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대한 행사가 시작되었다. 식은 순조로울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즉위식이 열리는 신전의 문이 격하게 열리며 근위병이 한센에게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단]의 왕이 왔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괴이한 옷을 입고 두 사람이.”

장내는 금새 낮게 술렁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일단 어떤 작자들인지 보기나 해야겠다. 들어오게 하라.”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섰다. 15년 전 멸망한 나라의 예복을 입고,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베일을 드리우고 들어선 두 사람의 주변에 이상한 빛이 감도는 듯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그대들은 누군가?”

한센이 물었다.

“[단]의 성스러운 땅이 부당하게 점령당했으니, 새로운 왕은 전왕의 과오를 수정해주시기 바라오. 나는 왕의 대변인이며 왕의 힘이오.”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기 저 여성이 왕이라는 말이겠군. 나라와 나라의 우두머리가 만나는 자리에 얼굴을 보이지 않음은 무슨 경우인가? 게다가 [단]의 왕은 이미 죽었다.”

“그날 죽은 것은 왕이 아니오, 왕의 배다른 오라비일 뿐이지. 당신들은 [단]의 왕이 결코 혼자 있지 않음을 모르는가? [단]의 왕이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궤변이군.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들이 왕이라는 것을 믿겠는가?”

한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믿어라.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

돌연 신전 전체에 메아리처럼 음성이 울렸다. 한센의 얼굴이 굳었다. 울림이 더해지고 조금 더 굵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서리의 목소리였다. 한센은 베일을 쓴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위기는 조금 다르지만,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는 있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것은 분명 서리였다.

<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은 [단]의 수호자인 용님의 힘을 보아야 믿을 것인가? 나는 15년 동안 기다렸다. 나는 내 백성을, 내 땅을 찾을 것이다. 나는 허락을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왔다. >

“폐하, 이런 미친 자들을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비켜서십시오!”

근위대장이 검을 빼 들었다. 한센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서리의 옆에 서 있는 흰 옷의 남자가 손을 조금 들었다. 사람들은 신전 안이 돌연 어두워지며 한 줄기 은색 빛줄기가 땅으로 내려꽂히는 것을 보았다. 검을 들고 있던 근위대장은 그 자리에 검게 타들어 쓰러졌다.

“…이런 이유로, 나를 따라왔었던 거냐?”

한센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주변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급하게 신전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밀어젖히며 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리가 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한 거지.”

남자가 대답했다.

“누가 서리를 발견하든지 서리를 데리고 가도록, 내가 돌아올 때까지 보호해 주도록 해 놓았다. 서리의 눈동자에.”

한센이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는 농락당한 거군. 서리에 대한 감정도, 다 네 농간이었단 거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라, 어차피 의미 없는 땅덩이다. 왕이 되는 것도 바란 적 없고 그 땅을 다스리는 것도 바란 적 없다. 어차피 서리에게 주려 했었다. 서리의 고향 땅을 서리에게 주는 것이 내 결혼 선물이었으니까.”

한센은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한기가 일었다. 한센이 놀라 몸을 도로 돌렸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즉위식은 다음날 다시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한센은 ‘서리’산의 주변, 옛 [단]의 영토를 두 사람에게 양도했다. 그들은 즉위식엔 참석하지 않았다. 단의 영토에 있었던 사람들은 단의 왕성이 예전처럼 은은한 안개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단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왔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왕의 명령이 있기도 전에 한센의 병사들은 단을 떠났다.

목소리를 잃은 [단]의 새 왕은 예전의 왕과 마찬가지로 베일 너머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은 늘 서리의 옆에 있었다. 베일 너머의 그림자로. 그러나 그는 서리의 딸이 태어나고 새로운 용이 서리의 딸을 신부로 맞을 때까지, 서리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서리의 눈동자에 새긴 각인은 단지 그를 지켜주도록 하는 주문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서리 또한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센을 결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진짜 이유를.

댓글 2
  • No Profile
    한때는나도 21.08.10 17:50 댓글

    여운이 있는 이야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글쓴이 갈원경 21.08.13 16:12 댓글

    성스러운 것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의 부딪힘을 좋아합니다. 여운을 느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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