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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이 아니라 삼각기둥이라고 수민은 말했다

갈원경

 


 

학교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배운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가면 그중에 자신이 싫어했던 것, 그럼에도 해야만 했던 것은 유난히 기억에 남지만 전혀 애정을 쏟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것들은 때로 그걸 배웠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시험에 나오지 않았거나 애초에 시험 범위가 아니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매우 좋아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싫었던 경험이란 그보다 훨씬 강렬해서 그 기쁜 순간이 찰나였던 것처럼 기억될 뿐이다. 

그래서 수민은,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한 달간 바느질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듣는 순간에, 아니 중학교에선 뭘 이렇게 많이 배워야 하는 거냐고 속으로 궁시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누가 손바느질을 한단 말인가. 핫트랙스 1300K 같은 수많은 팬시점에 원하는 물건이 넘쳐나고 조금 매니악하게 아이디어스 같은 온라인몰에서 주문한다고 해도 1주일 정도면 손에 넣는 시대에 자신이 만들 물건의 도안을 제출하고 그 도안을 첨삭 받고, 도안에 따라서 물건을 만들라니. A, B, C 3단계 절대평가이고 실력보다 노력을 높이 반영할 테니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에도, 어릴 때 뭔가 만들기만 하면 놀림을 피할 수 없었던 수민에게는 끔찍한 일정일 뿐이었다. 정 안되면 엄마에게 부탁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생각해봐도 엄마가 손바느질을 할 수 있을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단추 떨어진 걸 다는 건 봤지만 지퍼가 떨어지자 수선집에 맡겼었던 걸 보면 엄마도 아빠도 손바느질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질 않았다. 

수민은 며칠동안 인터넷에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검색했다. 천으로 만들 수 있는 건 꽤 많았지만 얼른 보기에도 수민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도안까지 만들어서 내야 하는데 게다가 그 도안에서 또 수정안을 낸다고 했으니. 그러다가 열린 엄마 가방에 새빨간 화장품 파우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면 천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퍼만 달면 되겠네. 수민은 파우치를 다시 검색했다. 좀 더 만들기 쉬울 것같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저것 넣으려면 10센티 정도면 되겠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고 수민은 끄적끄적 대략의 치수를 적었다. 

 

다음날 3교시, 기술 가정 수업 시간을 앞두고 웬일로 소이가 신나서 말을 늘어놓았다.

“예전엔 재봉틀로 블라우스를 만들었대. 치마도. 1학년 때 치마, 2학년 때 블라우스 만들었대.”

소이의 어머니는 이 학교를 졸업했다. 여자중학교였던 시절이었다. 귀밑 몇센티라는 복장 규정, 치마가 무릎을 덮었다는 당시의 교복 사진을 소이가 보여준 적도 있었다. 

“자기 치수로 만들었대. 다 만들면 입고 패션쇼 했다던데.”

소이가 덧붙인 말에 태영이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공순이 될 일 있냐. 웬 재봉틀.”

태영은 외고나 자사고를 가서 서울대에 갈 거라고 어릴 때부터 말하고 다니던 애였다.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은 태영과 한 반이 된 애들에게 위로의 눈빛을 건넸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큰데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서 초등학교 때도 중학생 고등학생들과 시합해서 이긴 적이 있다고 했다. 기분이 나쁘면 잽을 날리는 시늉을 하면서 얼굴 바로 앞까지 주먹을 들이대곤 했는데, 주먹이 얼마나 빠른지 바람소리가 날 정도였다. 실제로 맞히지는 않았지만 큰 덩치만큼 큰 소리로 야, 하고 화를 내면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선생님들에게는 늘 싱글싱글 웃고, 몇 번인가 지적받을 때마다 잘못했다고 운동하는 버릇이 들어서 그렇다고 사과하곤 했다. 

“1990년대니까.”

“우와 20세기. 답 없어.”

큰 소리로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문이 열리자 잦아들고 기술가정 담당 이수현이 교실로 들어섰다. 

“자아, 어제 자정까지 도안 제출 잘 받았어요. 늦게 낸 사람들 있던데, 새벽 3시까지 메일 쓰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오늘 수업 제대로 듣겠어? 다음부터는 제대로 맞춰서 내고 잠도 자고 그럽시다.”

일주일에 세 번은 철릭치마에 저고리를 입고 출근하는 기술가정 교사 이수현은, 기한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수면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일로 제출하는 과제는 원래 10시까지였는데 학원이 10시에 마치는 학생들이 그 시간까지 내지 못한다고 해서 자정으로 바꾸었다. 적어도 하루에 일곱 시간은 자야 되지 않겠냐고 하는 말에 학생들은 그냥 웃었다. 일곱 시간을 자는 학생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수민을 포함해서 아이들 대부분에게 자정은 그제야 뭔가를 해 볼 만한 시간이었다. 그게 좋아하는 아이돌의 스밍을 돌리는 시간이든, 외국의 축구 경기를 실시간이나 녹화로 관람하든, 게임을 하든, 혹은 좋아하는 개인 방송을 틀어놓고 멍하니 보고 있든. 학원을 마치고 과제를 끝내고 나면 자정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자 그럼 3반은 스물 다섯 명 전원이 정상적으로 제출했으니까, 각자의 도안을 먼저 살펴봅시다.”
“악 쌤 그런 말 안 하셨잖아요.”
“나 완전 그림 안 예쁘게 그렸는데.”

“오늘 도안은 아마 대부분 수정이 될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낸 것들 보고, 사람들 의견들 듣고, 참고해서 수정에 반영하면 좋겠지요? 대신 누구 건지는 말 안 할 테니까, 순서는 번호 순서대로 아니고 랜덤으로 섞었으니까, 모두의 의견을 잘 들어보도록 합시다.”

교실 앞 화이트보드 위로 컴퓨터 화면이 뜨고, 누군가의 도안이 떴다. 얼핏 보면 돌멩이같이 생긴 모양이었다. 가로는 6센티, 세로는 5센티. 치수에 다들 놀랐다. 조그만 주머니였는데 가운데보다 조금 위쪽으로 지퍼가 가로질러서 반쯤 열리는 모양이었다. 

“되게 작다.”

“아, 이거, 에어팟 케이스 넣는 거구나!”

누군가가 말했다. 이수현은 빙긋 웃었다. 

“에어팟 쓰는 사람 거네, 이거 배소이 아니야?”

“아냐 나 파우치 있어 나 아니야. 쌤 저 아니잖아요, 그쵸.”

“누구 건지 추측하는 건 금지. 그럼 이름을 가리는 이유가 없잖아요. 자기 거라고 밝히고 싶은 사람은 말해도 되는데,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기로 합시다. 자, 추측한 대로 이건 에어팟 케이스 파우치라고 되어 있어요. 지퍼가 열리는 건 뚜껑을 열어야 해서죠. 늘 들고 다니는 물건이니까 소중히 해 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네요. 다만, 작은 크기를 잘 맞춰서 바느질을 하는 게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유선 충전도 되게 아래에 구멍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구멍 바느질이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바느질을 귀찮다고 투덜거리던 학생들은 진지하게 모두의 도안에 대해서 의견을 냈다. 이수현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는 조금 더 의견을 덧붙였다. 스물 다섯 명의 아이디어는 다들 다양했다. 파우치가 제일 많이 나왔지만 지퍼형 파우치도 있고 조리개식도 있었다. 바닥면이 있는 것과 납작한 것도 있었다. 지갑이라고 묶을 수 있는 것에도 동전지갑이나 교통카드 지갑, 아크릴을 댄 학생증 지갑도 있었다. 필통도 여러 명이 나왔다. 어깨에 둘러서 고정시킬 수 있는 끈을 단 무릎담요는 너무 커서 시간은 많이 걸릴 것 같지만 자기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반응을 받았다. 앞치마도 나왔는데 요리할 때마다 옷을 버린다는 어머니에게 선물할 거라고 윤태영이 말해서 다들 웃었다. 미세먼지에 민감해서 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영호는 마스크 보관 파우치 도안을 냈는데 도안이 올라오자마자 모두 영호를 쳐다봐서 말수 적은 영호의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수민의 파우치는 스물 네 번째에 나왔다. 납작하고 위쪽에 지퍼가 달린 보통 디자인이었는데, 비슷한 디자인이 벌써 두 번이나 나온 뒤라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어서, 수민은 사진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말했다.

“쌤 저 다른 걸로 바꾸려고 하는데요.”

“수민이도 자기 거라고 바로 밝히네. 좋아요. 납작한 파우치는 불편할 수도 있다고 벌써 앞에서 말했으니까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어떤 걸로 바꾸고 싶을까?”

“저 필통 할래요.”
“필통도 여러 개 나왔는데?”
“안 겹치는 걸로 만들게요. 한 주 더 고민할게요. 다른 애들처럼.”
“오케이 좋아요.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네요. 봅시다.”

스물 다섯 번째 도안이 뜨자, 잠시 모두 말문이 막혔다. 얼른 봤을 때 물건의 용도가 확실하지 않아서였다. 길쭉하고 납작한 디자인인데 설명에 의하면 두 개의 천을 맞물려 솜을 넣어서 세 겹이 된 것을 맞붙여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길게 세로로 칸막이 바느질이 되어 있고 위쪽의 두껑은 커다란 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단추는 아래에서 이어지는 끈으로 여며지게 되어 있었다. 

“만년필 필통, 이라고 하네요.”

이수현이 말했다. 

“되게 만들기 어렵겠어요.” 
“솜도 넣어서 만들어도 돼요?”
“만년필을 누가 쓰지?” 

몇 명이 웅성거렸다. 이수현은 교탁을 조금 톡톡, 두드려 학생들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말을 이었다. 

“만년필 세 자루를 들고 다니는 가족에게 그 만년필에 딱 맞는 필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해요. 지퍼나 똑닥단추를 쓰면 금속 때문에 만년필이 긁힐 수 있다고 하네요. 그렇구나. 모두의 말대로 손이 많이 가는 디자인이지만 완성되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뒷면에 고무줄을 길게 넣은 것도 좋네요. 책에 끼워서 쓸 수 있게.”

“이거 자기가 한 거 맞아요?” 

태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올 수 있을 법한 말이었다.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볼 수 있는 도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절대평가로 10% 만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평가를 위해서 도안까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그 도안으로 완성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자신일 텐데. 학생들은 누가 그런 바보같은 일을 하냐며 웅성거리고, 또 누가 과학고나 외고 가려고 내신에 목숨 걸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다. 2단위 과목의 고작 10%. 꼴찌를 하더라도 학년말 점수로는 3점 차이,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한 문제만 더 맞으면 뒤집힐 점수 차이를 위해서. 

“음, 쌤은 자기가 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본인이 한 게 아니라면 물건을 만드는 동안에 바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이 정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디자인 한 걸 테니까. 복잡한 만큼 조금만 실수해도 결과물이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 도안은, 쌤은, 완성된 걸 보고 싶네요.” 

이수현이 말했다. 모두들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말았다. 수민은 이수현의 말을 듣는 내내 교실 맨 앞줄, 수민의 바로 옆에 앉은, 짝지지만 서로 말을 나눠 본 적이 거의 없는 정원을 보고 있었다. 정원은 매번 도안이 나올 때마다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내 거 언제 나올까 하는 기대감이 계속 무너지다가 마지막 이 도안이 올라왔을 때 정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의상으로도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보통인 아이가 정원이었다. 체육 시간에도 꼴찌는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고 수학과 국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이 평균점 근처인 아이. 국어만은 유난히 거의 매번 1등을 해서 윤태영의 화를 돋우는 아이. 수학만은 늘 반의 끝에서 5등 안에 드는 정원이 국어는 자신의 성적보다 잘 나온다는 걸 윤태영은 못견뎌했다. 수민은, 수학은 1등을 놓친 적이 없지만 국어는 늘 한 두 개를 틀려서 윤태영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수민을 보는 걸 몇 번이나 겪었기 때문에 윤태영을 화나게 하는 정원에게 호감이 갔다. 정작 짝이 된 뒤에는 별로 말을 나눠보지도 못했지만. 

수업이 끝나고, 정원이 주섬주섬 책을 정리하는 걸 보고 수민이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허정원, 아까 그거 네 거지?” 
“어, 어? 어…, 어.”

수민이 얼굴이 붉어지는 정원에게 말을 이었다. 

“너 바느질 잘 해?”
“어……, 어.” 

어 만으로 말을 할 수 있구나. 수민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들 시선을 피해 말했다.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필통 도안 만들어야 되는데. 아주 복잡한 거 말고. 나는 바느질 잘 못 해. 응? 다른 애들 많이 안 만드는데 만들기 안 어려운 걸로.”

“원통만 아니면 통으로 된 건 만들기 별로 안 어려워. …이런 것도 있고.”

정원이 책상 서랍 안에 있던 길쭉한 필통을 꺼내서 내밀었다. 허정원이 형광펜만 모아서 넣고 다니는 필통이었는데 모양은 이제야 수민의 눈에 들어왔다. 삼각기둥 모양이었다. 길쭉한 모서리 한 면이 지퍼로 된. 정원은 필통의 형광펜을 다 빼내고는 뒤집어서 안쪽을 수민에게 보여주었다. 

“이것도 손으로 만든 거야? 니가 만들었어?”
“어……, 응, 아니, 내가 만든 건 아냐. 난 박음질 이렇게 예쁘게는 못해.”

수민은 초등학교 때 배웠던 박음질을 떠올리며 필통을 돌려보았다. 박음질 뒷면이 실이 나뭇잎처럼 얽혀 있었다. 1학년 때 배웠던 프랑스자수에 이런 방법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이, 이 자수는 뒷면이 박음질처럼 나온다며, 샘플을 돌려 보여줬던 모양과 같았다. 그 자수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웃라인스티치였나, 아니 그건 뒷면이 반박음질 모양이었다. 시험범위에서 빠진 건 오래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 범위라고 해도 시험이 끝나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들도 많았지만. 손바느질이 재봉틀로 한 것보다 단단하고 예쁠 수 있다고, 그래서 핸드메이드로 제작된 옷이나 가방이 더 비싸고 품질이 좋은 것들이 많다는 말을 이수현은 수행평가 전의 수업 시간에도 한 적이 있었다. 왜 손바느질을 해야 하냐고 윤태영이 투덜거릴 때, 이수현은 다른 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던 듯 얼굴을 찌푸리지도 놀라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이건 뭐야? 필통 안에 또 주머니가 있어.”

조그만 주머니, 끈으로 당겨서 여미는 조리개식 주머니가 필통 지퍼 끝자락에 달려있는 것을 보고 수민이 물었다.

“그거 USB 넣는 거. 조그매서 자꾸 흘러서, 나중에 만들어서 달았어.”

수민은 필통을 유심히 살피고는 연습장에 쓱 쓱 그림을 그렸다. 필통은 큰 게 좋았다. 수민은 정원처럼 필통을 두 개 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샤프, 볼펜, 컴싸, 형광펜, 포스트잇, 지우개를 다 편하게 넣고 다닐 큰 크기를 생각했다. 구석에는 정원의 필통처럼 작은 주머니를 달기로 했다.

“근데 그거, 만들기 어려울 거야. 끈 구멍에 넣기도 힘들고 끈 끝 처리도 힘들어. 작을수록 힘들거든.”

정원은 수민에 필통의 주머니 부분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조리개식 주머니를 만들 때는 끈 넣는 부분을 여유 있게 할 것. 끈은 기성품을 쓰거나 얇거나 가는 것으로 만들어야 만들기 쉽다고. 작으면 그만큼 힘들어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고무줄을 안에다 넣을까? USB 넣고 뺄 때만 열고 보통 때는 조여서 안 흐르게.”
“…너 머리 좋다.”

정원이 말했다. 수민의 아빠는 자주 수민에게 자기를 닮아서 머리가 좋은데 자기를 안 닮아서 게으르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싫던 머리 좋다는 말이 이렇게 들으니 전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나도 이거 고무줄로 바꿔야겠다.”
“니가 만든 거 아니라며.”

“이 부분은 내가 만든 거거든. 만들 때 힘들었어. 작아서 바늘도 퀼트 바늘 10호…, 가는 거 썼어.”

바늘에 호수가 있는 걸 처음 들은 수민은 정원이 바느질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수민의 두 번째 도안은 이수현에게서 O.K.를 받았다.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도안을 수정했고 처음과 바뀌지 않은 학생은 정원뿐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도안을 쉬는 시간에 보여주기 시작해서 ‘만년필 필통’이 정원의 도안이라는 걸 모두 알게 되었고, 학생들은 더 이상 그게 정원의 솜씨든 아니든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1학년 때 정원이 제출한 프랑스자수가 지금 1학년들이 보는 샘플 자수로 남았다는 것도 다시 학생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실 이제 와서 어떻게 성적을 올리더라도 정원이 특목고에 갈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 모두의 흥미를 떨어뜨린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정원과 수민은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지만 정원은 수민이나 수민의 부모 어느 쪽에게도 관심을 가질 아이가 아니었을 정도였으니.  

주말에 수민과 정원은 의류도매시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직 시험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주말에 친구를 만난다는 것에도 수민의 부모님은 잔소리를 크게 하지 않았다. 

“네 필통 같은 천 사고 싶다. 약간 빳빳하고 매끈매끈한 거 그거.”
“라미네이트 원단이야. 나도 그걸로 살 거니까 잘 됐다.”

요 며칠 수민은 정원과 짝이 된 이래로 가장 많은 말을 했다.

“어머나, 정원이 오랜만이야. 아버지 심부름 왔니?”

정원이 상가 내부 골목골목을 거침없이 앞장서서 도착한 천 가게 주인이 반갑게 정원을 맞았다. 

“학교 과제로 재봉할 천 보러 왔어요. 아빤 지난번 거 작업 사흘 정도는 더 걸리실 거래요. 와플 원단 다 되어 간다고 하시던데요. 청회색.” 

“그래? 오시기 전에 전화 달라고 전해드려. 필요하신 거 찾아놓게.” 

정원은 학교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수민은 두 사람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천정까지 선반을 만들어놓은 매장에는 빼곡하게 원단들이 커다란 기둥처럼 롤에 말려 있었고 몇 개는 가로로 걸려 잘라내기 쉽게 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투명한 서랍장에 마치 한약방 서랍장처럼 작은 칸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라미네이트 원단으로 필통 만들려고요. 저희 둘 다른 색으로 할거고요. 각자 한 마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반 마 파는 거 있어. 소품용으로 나가는 거. 보자……, 필통이라고 했지? 보통 많이 나가는 건 이런 건데. 무늬가 자잘해서 맞추기 편해. 이거 리버티 원단이라고 하는데, 꽃무늬가 원래 불규칙하게 들어서 안 맞춰도 표가 안 나고, 은은하고 고상하고.” 

주인이 천을 펼쳐 보였다. 정원의 필통같이 은은한 광택이 나는 원단으로 옅은 색 바탕에 자잘한 꽃과 이파리가 흩어져 있었다. 상앗빛 바탕에 아이들 낙서 같은 집이 이것저것 작게 그려진 원단, 옅은 하늘색에 양이 이리저리 그려진 원단, 다들 귀엽고 깜찍하고 무난했지만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수민의 마음에 쏙 들어오진 않았다. 

“큰 꽃이 있으면 좋겠어요. 수국이나, 모란 같은 거요.”
“그런 거 무늬 맞추기 어려울 건데?”
“괜찮아요.”

수민이 말하자, 주인은 흠, 하고는 뒤쪽에서 원단 하나를 다시 꺼냈다. 푸른색과 분홍색 수국이 연녹색 이파리가 흩뿌려진 배경에 그려져 있는 원단이었다. 

“이건 소품으로는 가방 만들 때 가끔 쓰는데. 무늬 맞추기 힘들지만, 포인트는 예쁘지.”
“이걸로 할게요, 그럼. 혹시 실패할지도 모르니까 두 마 정도 할까요?”

주인이 조금 웃었다. 

“아유, 두 마면 180cm인데 이 원단이 폭이 110cm야. 너무 많을걸? 불안하면 한 마 정도 해도 넉넉할 거야.”

“저는 버건디 색, 체크나 타탄 무늬가 있으면 좋겠는데요.”

정원이 말하자, 주인은 일어나서 위쪽에 놓인 원단 롤을 내렸다. 짙은 버건디 색의 자잘한 타탄체크가 들어간 원단은 수민이 보기에도 선을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은 무늬였다. 

“정원이니까 이것도 괜찮겠지. 무늬 잘 맞추면 예쁠걸. 이거, 최 작가님 가방 무늬랑 같아. 체크 크기는 작은데 색 구성이 완전히 같거든. 세트 같을 거야.”

“좋은데요…, 네,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아요.”

지퍼는 주인의 말대로 부드러운 플라스틱의 대지퍼로 골랐다. 금속지퍼는 길들기 전까지는 뻑뻑해서, 소품에는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수민은 정원이 나무로 된 커다란 단추를 산 가게에서 작은 주머니에 쓸 페브릭 고무줄을 사고, 정원의 권유로 그럴싸한 와펜과 가느다란 바늘도 샀다. 다이소에서 파는 바늘과 뭐가 다른지 수민은 알 수 없었지만, 정원이 사라는 덴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을 가방에 담고 둘은 시장 입구 맞은편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고르는 사이에 3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기름떡볶이와 폭탄 김밥에 어묵까지 시킨 후에 수민은 정원을 보았다. 

“아빠가 의상 일 하셔? 엄마는 작가시고?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나?”

수민이 머쓱해 하자 정원이 조금 웃었다. 

“아까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 듣고 그러지? 응, 아빠는 특수의상 주문 제작하셔. 가게는 리폼 전문이긴 한데 엄마가 많이 바빠서 가게는 오래 못 열어 두고, 집에 작업실에서 손바느질로 작업하시는 경우가 더 많아. 엄마는 소설 쓰셔서, 일주일에 두 번씩 연재하셔서, 그냥 두면 밥도 자꾸 안 드시고 해서, 아빠가 가게 마치고 집에 가면 아침에 차려놓은 게 그대로 식탁 위에 있고 그렇대.”

“필통, 아빠가 만드셨구나.”

“응. 아마 오늘은 원고 올라가는 날이라서 두 분이 집에서 점심 드시고 쉬고 계실 거야. 내가 좀 비켜드리는 게 맞아.”
“사이 좋으신가 보다.”

정원은 대답 대신 웃었다. 어쩐지 정원이 국어를 잘하는 이유를, 바느질을 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전에 게임 동호회에서 만나셨대. 엄마는 거기서 소설 올리고, 아빠는 자기가 만든 옷으로 코스프레 하고. 학교 졸업하자마자 엄마가 결혼하자고 그랬대. 아빠가 엄마 팬이었다는데, 언제쯤 고백해야 하나 끙끙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했다고 아빠가 요즘도 이야기해.” 

“안 사귀는 사이였는데 결혼하자고 그랬다고?”

주문한 기름떡볶이가 탁자 위에 놓이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민은 냉큼 떡볶이 하나를 찍어서 입 안에 넣었다. 주문한 것 모두 집에서는 못 먹게 하는 것들이어서, 유난히 더 맛있었다. 

“썸 타는 관계라고 그래야 되나? 엄마 말로는 자기 좋아하는 거 티 엄청 났는데 말도 안 하고 그래서 우리 사귈까요 한다는 게 우리 결혼해요 라고 해버렸대. 근데 말하고 나서는 그래 결혼해도 괜찮겠네 싶으셨다고. 아빠가 얼굴 새빨개져서는 사귀기부터 해야 하지 않냐고 그래서, 한 육개월 정도 연애하다가 결혼하셨대.”

“너네 엄마 멋있다. 어, 아빠도. 너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안 해 줬어? 우리 반 애들 들으면 되게 재미있어할걸? 1학년 때도 말 거의 안 하고. 나는 너 진짜 말 안 하는 앤 줄 알았어.” 

“…성격은 아빠 닮아서 그래. 안 묻는 말에 먼저 말하는 거 잘 못 해.” 

“지난번에 바느질 가르쳐달라고 그랬던 거 기억나지? 아직 그거 유효한 거다?”

“기억해. 걱정하지 마. 쉬우니까.”

수민은 폭탄 김밥을 오물거리며 먹는 정원의 입이 참 조그맣다고, 정원의 뿔테 안경 너머 눈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고, 포크를 쥔 손의 손가락이 참 길고 가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늘 만나는 애가 누군지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원래 도안 통과 후에 3주 동안 소품을 만들고, 수업 시간 외에는 집에 들고 가서 만들 수 있다는 규칙은 2주 후에 갑자기 바뀌었다. 학교로 민원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바느질만 하고 있다며, 특목고 갈 애들까지 바느질에 힘 빼게 해야겠냐는 말이었다. 그 민원인 중에 수민의 부모님과 태영의 부모도 있었다. 지퍼를 잘못 달아서 뜯어내서 새로 달려고 하다가 갑자기 방문을 연 어머니 눈에 바로 띄었고, 필통을 만들 거라는 말에 어머니는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 영재학교 가려면 내신 한 번 한 번이 얼마나 중요한데, 너 지금 전람회 계획서 마감도 다 되어 가는데 지금 이거 할 때냐고, 어머니가 하도 큰 소리로 이야기해서 아버지까지 방으로 들어왔다. 이거 수행평가라고, 내신에 들어간다고 수민이 항의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악화했다. 비슷한 장면이 몇몇 집에서 똑같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수현은 결국 수업 시간이 끝나면 바로 제출하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만드는 걸로 규정을 바꾸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서로의 작품 가운데에서 눈에 띄게 완성이 가까워지고 있는 정원의 솜씨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래봤자 인문계 가서 겨우 지방대나 가겠지. 저거 국어 빼고 다 평균이잖아. 아, 수학은 것도 안 되지? 전교에서 C 받은 열 명 중의 한 명 아냐?”

어느 날, 모두의 물건이 거의 마무리를 향해 갈 무렵, 매점에 갔다 왔던 수민은 태영이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정원보다 아마도 성적이 더 나쁠 아이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덩치도 큰 데다가 아버지가 학부모회 임원인 태영이 거들먹거리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더 목소리를 높이곤 해서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길 바라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걔보다 국어 못 친 게 말도 잘해.”

수민이 말했다. 

“뭐? 야, 김수민, 너 뭐라 그랬어?” 

태영이 주먹으로 잽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수민의 바로 앞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피하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는 걸 아는 수민은 굽히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1학년 때부터 계속 국어는 허정원한테 졌잖아. 참, 수학 이야기했지? 수학, 너는 수학 참 잘 하나 봐? 그래서 나한테 수학 한 번도 못 이겼어?”

“난 외고 갈 거거든? 너처럼 수학 안 중요하다고!”

“어 그래, 외고는 국어 잘 못 해도 되나 봐? 우리 학군에서 반에서도 만년 2등인 애도 외고 갈 수 있나 보네. 난 국어는 너보다 못해도 수학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점 놓친 적 없는데.”

“야 김수민 너…!”

태영의 목소리가 교실을 울리고, 태영이 수민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어깨도 십 센티는 더 클 덩치가 그 덩치만큼 큰 손으로 멱살이 잡혀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자 수민은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너 죽고 싶어? 어디서 까불어, 내가 너 못 칠 줄 알아?”
“그만해! 야, 수민이 내려놔! 윤태영!” 

정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과 함께 담임이 교실로 들어섰다. 윤태영은 깜짝 놀라면서 수민의 멱살을 놓았다. 수민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담임이 수민과 태영을 교무실로 불러 내렸다. 수민이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말했지만, 태영은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자신은 그냥 아이들이랑 기말고사 걱정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우겼다. 수민이 전부터 자신을 무시했다고, 참다 참다 자신이 폭발한 것뿐이라고 했다.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주먹은 안 들었고, 멱살을 잡긴 했지만 때리거나 한 것은 아니지 않냐고. 수민이 했다는 말은 훨씬 더 강한 말로 바뀌었다. 나보다 공부 못하는 새끼가 깝치고 xx이야. 욕설이 반이 넘는 말들은 태영이 금방 지어낸 말 같지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수민의 평소 말투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서 그만큼 태영이 화가 났다는 말도 되었다. 두 사람이 쓴 반성문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의 어머니가 모두 학교로 달려왔다. 수민의 어머니는 어떻게 같은 반 친구 멱살을 잡을 수 있냐고 태영을 비난했다. 태영의 어머니는 태영이가 잘못했지만 수민이가 화를 돋운 게 아니냐고, 태영만 잘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수민이 쓴 말이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며, 저런 애가 어떻게 영재학교에 갈 수 있냐고, 만약 학폭위를 열게 되면 자신도 수민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했다. 학폭위가 열리면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은 두 집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태영은 외고와 자사고를 모두 노리고 있었고 수민은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노리고 있었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가해자로 학폭위가 열리게 되면 고등학교 입시는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담임에게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태영이 정원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부터 담임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담임은 누가 찍은 것인지 알려주지 않고 부모님과 두 사람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동영상을 재생했다. 수민이 했던 말도, 태영이 주먹으로 치는 시늉을 하면서 수민의 눈앞까지 주먹이 왔던 것도 모두 생생하게 담겼다. 

“이거 어떤 새끼가 찍은 건데요? 허정원 그 새끼? 그거 그때 분명히 없었는데, 몰래 숨어서 찍었어요?”

태영이 말했다. 태영의 어머니는 사색이 되었다. 담임은 아이들이 몰래 신고한 내용을,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말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눈앞까지 주먹을 날립니다. 피하면 쫓아와서 때리고, 자긴 안 맞게 했는데 피하다가 맞은 거라고 우깁니다. 뭐든 자기보다 잘하는 거 하나라도 있으면 욕하고,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누구 지목해서 칭찬하면 그날은 주먹 날아가는 날입니다. 자기 말하는 거 알아도 모른 척하면 그냥 두고, 아는 척하면 주먹 날아옵니다. 안 피하면 맞진 않아요. 말을 엄청나게 잘해서 듣고 있으면 꼭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저 말고 우리 반에 비슷하게 당한 사람 많습니다. 1학년 때는 수학 빼곤 다 1등이라서 수학 1등인 민성규를 엄청나게 갈궜습니다. 민성규가 갑자기 전학 간 거 그 때문입니다. …윤태영, 이런 신고가 몇 건이나 들어왔다. 이거 다 맞는 말이야?”

“아씨, 어떤 새끼냐고요!” 

태영이 쾅, 학생부 상담실 책상을 내리쳤다. 

 

윤태영은 꽤 오랫동안 교무실과 학생부를 들락거리다가, 기말고사 직전에 급하게 이웃 학군으로 전학을 갔다. 학폭위를 열지 않는 조건으로 전학을 간 거라는 소문이 한참 돌았지만, 사실이 어떻든 많은 사람에겐 그저 기쁜 일이었다. 동영상을 보낸 건 영호였고 몰래 신고를 한 건 소이와 정원과 영호와 그 외 많은 아이들이었지만 끝내 동영상을 보내고 투서를 쓴 것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짐작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서로가 비밀을 지켜주는 분위기였다. 1학년 때 갑자기 급식을 못 먹고 조퇴를 계속하다가 전학 간 민성규는 윤태영의 소식을 전해주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모두한텐 잘된 일이라고 했다. 전학 간 학교의 학생들이 안됐다고 했지만,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도 있는 학교에서 소문이 먼저 퍼져서 태영이 똑같은 태도로 지내기는 어려울 거라고들 했다. 

수민은 부모님에게 꽤 오래 잔소리를 들었다. 동영상을 보낸 아이가 없었으면 정말 과학고든 영재고든 끝난 일이라고 부모님은 수민이 잊을만하면 계속 이야기했다. 수민은, 학원에서 돌아와 숙제가 끝나는 열두 시가 되면, 조용히 두 사람의 수업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수민이 늦게까지 수학 문제를 푼다고 기뻐했지만, 사실은 수민의 수학 풀이는 그대로 정원의 화면과 공유되고 있었다. 정원은 수민의 풀이 곳곳에 태블릿으로 메모를 넣었다. 이거 잘 모르겠어. 수민은 그걸 보고 답을 달았다. 이거 1번 식을 2번 식에 대입한 거야. 여기 이거, 1번 식. 연립방정식은 계수가 간단한 식을 정리해서 복잡한 식에 대입하면 쉬워. 두 사람은 그렇게 하루에 한 시간씩 같이 공부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수민의 필통은, 삼각으로 예쁘게 완성되었다. 정원은 필통 내부가 깔끔해지도록 바이어스테이프를 두르면 좋겠다고 조언했는데, 그게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무줄로 조여진 주머니도 귀엽다는 평이었다. 완성한 애들 대부분 A를 받은 과제였지만, 수민은 푸른 수국이 한 면의 절반을 채우는 필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걱정과는 달리 천을 다 쓰지도 않았다. 정원은 기말고사에서 평균 근처의 점수가 나온 과목이 한 과목 늘었다. 

“최 작가님은 만년필 필통 좋아하셨어?”

“응, 여태 받은 선물 중에 두 번째로 좋대. 첫 번째는 못 되는 거니까.”

성적표가 나온 날 수민의 물음에 정원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아마도 첫 번째 선물은, 최 작가님이 사귀기도 전에 청혼해 버린 사람이 선물한 같은 무늬의 가방일 거라고, 수민은 생각했다. 그리고 수민은, 책가방을 챙기며 자기가 처음으로 만든 필통을 가방 안에 챙겼다. 

“삼각형 모양, 필통 어렵지 않았지?”

정원의 말에, 수민은 픽, 웃었다.

“삼각형이 아니라 삼각기둥.” 

수민이 말했다. 정원은 어, 어.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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