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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미정아파트

2021.05.31 22:4305.31

 

7월 29일 수요일 새벽 2시

찬용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걸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동시에 두통 때문에 신음소리가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이 무언가에 막힌 느낌이었다.

찬용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손과 발을 비롯해서 온몸이 마치 미라처럼 흰 천에 칭칭 감겨 있는 바람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소파에서 바동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음! 음! 음!”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찬용은 몇 번이나 더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몸에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흰 천이 워낙 팽팽하게 몸을 감고 있어서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었다.

찬용은 머리 뒤쪽으로 집 베란다로 통하는 커다란 유리문을 보았다.

유리문 너머는 깜깜했다. 방 안 공기도 조금 차가웠고. 그래서 새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겁에 질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찬용은 다시 한번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제야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려 있기도 했고 볼륨을 워낙 작게 해놔서 텔레비전 쪽으로는 미처 시선이 가지도 않았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걸 보고는 허겁지겁 거실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남자 한 명이 바닥 한쪽에 모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아침에 출근할 때 입었던 갈색 면바지에 하늘색 계열 체크무늬 남방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찬용은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서 남자를 불렀다. 비록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남자를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몸을 들썩이면서 소파를 튕겼다. 쿵쿵 소리에 남자가 잠에서 깨기를 바랐다. 하지만 몸에 기운도 없었고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소파를 세게 튕기지 못했다.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소파 아래로 떨어질 작정이었다. 팔과 다리를 구속당했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질 때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걸 걱정한다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잠에서 깼는지 머리를 들어 소파에 누워있는 찬용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아유, 제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네요. 텔레비전 프로가 하도 지루해서 그만. 죄송해요. 그런데 언제 깨셨어요?”

 

 

7월 11일 토요일

찬용은 낮에 서울 대학로에서 있었던 기후 변화 위기를 경고하는 집회에 DH 연대 자광장음지회 회원들과 참석했다. 자광장음지회라지만 회원들은 모두 자광시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 나서 회원 중 한 명인 춘봉의 제안으로 을지로3가에 있는 어느 맥줏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DH 연대는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들의 연대와 투쟁을 지지하는 단체로서 전체 회원은 오백 명 가까이 된다. 그중 자광장음지회 회원은 찬용을 비롯해서 전부 아홉 명이었다. 하지만 이번 집회에는 두 명이 빠진 일곱 명만 참여했다.

“이번 집회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DH 연대 자광장음지회 회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정은이 생맥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정은은 1년 동안 휴학한 뒤 올해 복학한 스물네 살의 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회원인 박기호와 동갑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음,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춘봉이 노가리 한 마리를 먹기 좋게 뜯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정은의 물음을 곱씹었다. 서른일곱 살 춘봉은 덩치에 걸맞게 힘이 장사였다. 20kg짜리 쌀 포대를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5층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갈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영길 회원과 동갑이면서 연인 사이이기도 했다.

“영길씨가 한번 얘기해 봐.”

역시 쉽지 않은 문제는 전부 연인이자 DH 연대 자광장음지회 간사이기도 한 영길에게 떠넘기는 게 춘봉의 주특기였다. 그러면서 노가리를 다시 먹기 좋게 뜯어 영길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음, 기후 변화에 침묵하는 정부와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기업들에 대한 경고! 뭐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될 것 같은데요.”

“역시 내 남자가 최고라니까! 영길씨, 노가리 하나 더 줄까?”

춘봉의 말에 영길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집회에는 저희 디에이치 연대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도 정말 많이 참석한 거 같아요. 집회 참석 인원이 한 삼천 명은 된 것 같더라고요.”

기호가 춘봉의 손에서 노가리를 낚아채더니 얼른 입 안으로 가져갔다.

“어머, 기호씨 지금 뭐하는 짓이지? 감히 내 남자가 먹을 노가리를 그렇게 중간에서 인터셉트해 버리다니. 용서 안 할 거야!”

그러면서 춘봉이 기호의 어깨를 장난으로 툭 밀었다. 그 바람에 기호가 아무런 대비 없이 노가리를 먹다 옆으로 휘청했고, 앉아 있던 빨간색 플라스틱 간이의자 다리 하나에 온 체중이 실리면서 급기야는 의자 다리가 반으로 꺾여버렸다. 동시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기호는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그만 야외용 간이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야외용 간이 테이블까지 기호를 따라 쓰러졌다. 접시에 담긴 노가리는 다 쏟아졌고, 잔에 담겨 있던 생맥주도 다 쏟아졌다. 생맥주 잔이 안 깨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테이블을 일으켜 세운 기호가 맥줏집 주인에게 의자를 부러뜨려 죄송하다고 말한 뒤 안주와 생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다들 안 다치셨어요? 죄송해요. 무방비로 노가리를 먹다가 그만.”

“괜찮아. 다들 다친 데 없으면 됐지. 기호씨도 어디 다친 데 없어?”

경례가 그렇게 물었고, 기호는 괜찮다고 말했다.

춘봉이 툭 치고, 아무 대비 없이 앉아 있던 상대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일은 일상다반사라 찬용을 비롯해서 회원들 모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주최 측 말로는 사천 명 정도 참여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오늘이 토요일이라지만, 그래도 집회에 사천 명이면 정말 많이 참여한 거죠.”

한수가 어느새 가게 안에서 냅킨을 가지고 와 열심히 테이블을 닦으면서 말했다. 한수와 경례는 부부였다.

“특히 가족들이 많이 참여를 했더라고요.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과 함께 참여한 부부가 많았다는 게 신기했어요.”

경례가 한수의 말을 거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집회 주제가 기후 변화 위기를 경고하는 거였잖아요. 지금 당장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미래가 더 걱정이니까, 아이들의 참여가 굉장히 의미 있는 집회였던 거 같아요. 지금의 기성세대가 잘하지 못하면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걸 집회 참가 인원만 봐도 알 수 있었어요.”

찬용도 집회에 아이들이 참여한 게 인상적이었던지 한마디 했다.

자광장음지회 회원 일곱 명은 생맥주와 노가리를 즐기며 오늘 있었던 집회에 관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찬용씨는 여기 서울 살다가 자광시로 이사 오신 지 이제 얼마나 됐죠?”

집회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갑자기 영길이 화제를 바꿔 찬용이 언제 자광시로 이사를 왔는지 물었다.

자광시는 충청북도에 있었다. 서울 양재역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다들 한수 소유의 9인승 승합차 신세를 지고 있었다. 자광시에서 서울 올 때 모두 승합차를 타고 왔다. 갈 때도 마찬가지로 찬용만 빼고는 전부 승합차 신세를 질 예정이었고. 찬용은 일요일인 내일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날 계획이라 자광시에는 혼자 기차 타고 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 바람에 한수는 오늘 술을 입에도 못 대고 있었다.

“삼년 정도 됐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로 벌써 삼년이나 됐네요.”

“삼년이면 이제 자광 시민에 좀 적응이 되셨겠어요. 어떠세요? 본인이 자광 시민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아직도 서울 시민이라고 생각하세요?”

“음, 글쎄요.”

“와, 흥미로운 질문 같은데요. 찬용씨 혹시 고향은 어디세요?”

영길의 질문에 찬용이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자, 춘봉이 일부러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고향은 서울이에요. 서울에서 태어나서 쭉 서울에서 살았고요. 그러다 삼년 전에 자광시로 이사 온 거예요.”

“그럼 아직은 자광 시민보다는 서울 시민이라는 생각이 좀 더 강하겠어요.”

한수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영길이 조심스럽게 동의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서울에서 삼십년 이상을 사시다가 자광시로 이사를 가신 거니까, 자광시에서 삼년 사셨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서울이라는 곳이 더 편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어요.”

“네, 영길씨 말씀대로 확실히 그래요. 아직은 솔직히 자광시에서 제가 이방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적인 차이도 조금은 느끼고 있고요. 서울하고는 좀 다르다, 그런 생각 들 때가 종종 있거든요.”

“문화적인 차이요? 그게 뭘까요? 궁금한데요.”

찬용의 말에 정은이 관심을 보였다.

“당장 생각나는 건, 음, 운전하는데 길이 좁아서 제가 마주 오는 차한테 길을 양보해 줬어요. 그랬더니 빵! 하고 경적을 울리고 가잖아요. 그런 반응을 몇 번이나 겪었어요. 그때는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기껏 먼저 지나가라고 양보까지 해줬는데 왜 경적을 울리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양보해 줬는데 왜 화를 내지!’ 그런 생각뿐이었거든요. 나중에야 자광시에서는 경적이 감사 인사라는 걸 알았어요. 서울이라면 보통은 운전하면서 감사를 표할 때 경적을 울리지 않고 깜빡이를 켜거든요.”

“시골은 뭐 그냥 빵! 하는 게 경고도 되고 인사도 되고 그래요. 자광시도 시내 말고 수살면이나 오덕면처럼 시골로 들어가면 어르신들이 1톤 트럭 몰고 다니시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분들이 마을 다니면서 서로 아는 차들 지나가면 빵! 하고 경적을 울려요. 인사를 나누는 거죠. 그런 게 버릇이 돼서 시내 나와서도 인사할 때나 주의를 줄 때 빵! 하고 경적을 울리시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영길의 말에 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전에 누구한테 그 얘기 들었어요. 듣고 났더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요즘엔 저도 간혹 감사 인사할 때 깜빡이 대신 경적 울리고 그래요.”

“그럼 자광 시민 다 되셨네요. 호호호.”

경례가 자기도 그런다면서 찬용에게 자광 시민 된 것을 축하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서울 오면 기분 정말 이상해요.”

“왜요?”

정은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그래도 제가 서울에서만 쭉 삼십년을 넘게 살았잖아요. 행당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는 십년을 넘게 살았고요. 그래서 실은 아직도 이렇게 서울 오면 다시 자광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좀 낯설 때가 있어요. 분명히 내 집은 아직도 행당동에 있는 그 아파트인 것 같은데, 왜 내가 다시 자광시로 가야 하지! 그런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어요. 심지어는 제가 십년 넘게 살던 그 행당동 미정아파트 백삼 동 백사 호에는 지금 누가 살까 궁금할 때도 있고요. 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 그런 충동도 느끼고 그래요. 좀 무서운 얘기죠? 흐흐.”

“우와, 정말 약간 소름 돋는 얘긴데요. 십년 넘게 살다가 이사 간 사람이, 전에 살던 집도 궁금하고 누가 살고 있는지도 궁금해서 찾아가 본다! 실제로 그런 사람 있으면 전 바로 신고할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찬용씨가 정말로 그 집에 찾아가시겠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아주 가끔 그런 충동을 느끼신다는 거잖아요. 제 말은 진짜로 누가 그렇게 찾아가면요.”

기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하다가 왠지 자신의 말에 찬용이 기분이 상했을까 봐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기호의 말에 찬용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진짜로 그렇게 찾아가면 그 사람은 완전 사이코죠.”

그러면서 찬용은 앞에 있는 생맥주 잔을 들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정말로 궁금하기는 해요. 저기가 원래는 내 집이었는데, 지금은 나 대신 누가 살고 있을까! 왜 내가 다시 자광시로 가야 하는 거지! 저 집으로 가야 하는데 왜 다시 자광시로 가야 하는 거야! 서울에만 오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일부러 서울 잘 안 와요. 이게 기분이 묘하거든요.”

찬용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잔에 남은 생맥주를 마저 마시고 나서 얼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7월 12일 일요일 오전 6시

찬용은 갈증을 느껴 잠에서 깼다. 깨고 보니 그제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게 느껴졌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끄응! 아이고, 머리야.”

찬용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힘껏 눌렀다. 그러면서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다음에야 찬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곳이었지만 아무튼 자광시에 있는 집은 아니었다. 찬용은 딱딱한 바닥이 좋아서 침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서울에 살 때도 그랬고 자광시에서 사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방에는 침대가 있었다.

“내가 호텔에 온 건가! 그런데 여기가 호텔 같지는 않은데. 디에이치 연대 사람들하고 헤어지면서 바로 호텔로 가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호텔 앞까지 갔다가 다시 택시 기사한테 행당동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 것 같은데. 으, 머리 아파. 그래서 행당동에 내려서 잠깐 투다리 왕십리점 들어가서 술을 더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투다리 왕십리점에서 나와서 내가 어디로 갔더라. 그런데 여기는 이상하게 공간이 익숙하네.”

찬용은 다시 한번 손으로 세게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리고 바닥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시로 된 창문 너머로 베란다가 보였다. 밖은 환했다. 방 안 공기가 차서 이른 아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에는 퀸 사이즈 침대가 있었고, 맞은편으로 화장대가 보였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방 문이 열려 있어서 찬용은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확실히 호텔은 아니었다. 찬용은 자광시로 이사 간 뒤 서울에 약속이 있어서 왔다가 자고 가야 될 때면 늘 토요코인호텔 강남점을 이용했다. 그곳과는 구조가 너무 달랐다. 이곳은 그냥 가정집 구조였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곳이었다.

거실은 넓지 않았다. 한쪽 벽에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었고, 맞은편에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새시로 된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베란다가 보였다. 밖은 환했고. 바람이 부는지 밖에서 나뭇가지가 베란다 쪽에 있는 새시 문을 때렸다.

바람이 불 때면 늘 그랬다. 집이 아파트 1층이라서, 화단에 심은 대추나무 가지가 새시 문을 때렸다. 그래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대추나무 가지가 새시 문을 때리는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깨기도 했다.

나뭇가지가 새시 문을 때리는 소리에 찬용은 저절로 그런 생각을 했다. 대추나무가 새시 문을 때려 아침 일찍 잠에서 깼던 순간들을.

동시에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새시 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찬용이 있는 곳은 1층이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는 대추나무도 보였다.

그 순간 찬용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어제 일이 떠올랐다.

DH 연대 회원들과는 을지로3가 맥줏집에서 헤어졌다. 회원들은 한수가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 자광시로 가기로 했고, 찬용은 다음 날 약속이 있어서 혼자 서울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서 평소 서울에서 잘 때면 늘 이용하던 토요코인호텔 강남점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하지만 택시가 호텔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찬용은 택시 기사한테 다시 행당동까지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전철역 근처에 있는 투다리 왕십리점에 들어가 소주를 마셨다.

거기까지 떠올린 찬용은 여전히 베란다에 몸을 기댄 채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열쇠꾸러미가 손에 잡혔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자광시에 있는 아파트 열쇠와 전에 서울에 살 때 지내던 행당동 미정아파트 열쇠도 있었다.

 

찬용은 투다리 왕십리점에서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투다리 왕십리점 주인은 찬용더러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면서 반겨주었다. 서울 행당동에 살 때 가끔 들르던 술집이었다.

찬용은 호텔까지 갔다가 단골 술집 생각이 나서 택시로 다시 행당동까지 온 것이었다. 소주 한 병 정도만 마시고 나서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주말인데도 투다리 왕십리점에 손님이 없었다. 덕분에 찬용은 투다리 왕십리점 주인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됐고, 결국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둘은 술을 마셨다.

투다리 왕십리점 주인이 찬용더러 혹시 미정아파트에 살지 않느냐고 했고, 찬용은 자광시로 이사 갔다는 말을 못하고 미정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그래서 투다리 왕십리점 주인도 집이 미정아파트 방향이라 같이 걸어가다가 찬용이 먼저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자광시로 이사 간 뒤 찬용이 행당동 미정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3년 만에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찬용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자광시에 있는 아파트 열쇠 사이로 행당동 미정아파트 열쇠도 보였다. 문손잡이 열쇠와 보조자물쇠 열쇠.

찬용은 부동산 주인한테 열쇠를 넘기기 며칠 전에 일부러 열쇠가게에 가서 문손잡이 열쇠와 보조자물쇠 열쇠를 복사해서 자신이 챙겼다. 10년 넘게 살던 집이라 열쇠라도 복사해서 갖고 있으면, 자광시로 이사를 가더라도 미정아파트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찬용은 한참 동안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로 향했다.

이미 미정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찬용은 술에 완전히 취한 상태였던 것이다.

“백삼 동 백사 호. 음 여기네.”

찬용은 열쇠를 꺼내서 문손잡이에 넣고 돌렸다.

철컥! 철컥!

현관문이 열렸다. 문손잡이가 열렸고, 보조자물쇠가 열렸다.

찬용이 갖고 있는 열쇠로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 현관문이 열렸다. 이 집 주인은 3년 전에 이사 와서 지금껏 문손잡이와 보조자물쇠를 안 바꾸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용은 문을 열고 들어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뒤 거실 왼쪽 안방으로 가서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아침 일찍 눈을 뜬 것이었다.

 

찬용은 베란다에서 나와 허겁지겁 안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 자신의 소지품이 떨어진 건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2리터짜리 백산수가 들어 있었다. 삼분의 이 정도 담겨 있어서 양도 충분했다.

찬용은 백산수를 꺼내서 입에 대고 마시려다가 얼른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냉장고 안에 넣은 뒤 서둘러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를 나왔다.

 

 

7월 12일 일요일 오전 11시

찬용이 자광시에 도착하자마자 영길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전 열한시가 막 넘은 시각이었다.

“찬용씨, 속은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술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요 뭐. 다들 어제 잘 가셨어요?”

“네, 저희 어제 다들 무사히 왔어요. 한수씨가 운전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혹시나 싶어서 어제 늦게 자광에 도착해서 찬용씨한테 전화했더니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걱정 돼서 지금 또 전화해 본 거예요.”

DH 연대 자광장음지회 간사답게 영길은 회원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을 졌다.

“아, 어제 전화하셨어요? 회원 분들하고 헤어진 뒤에 택시 타고 호텔 와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바로 잠이 들었었나 봐요. 전화 온 것도 모르고 계속 잤어요. 괜히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찬용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호텔까지 갔다가 다시 택시로 행당동까지 갔었다는 얘기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죄송하기는요 무슨. 별 일 없으시면 된 거죠. 그럼 아직 서울이신 거죠? 친구 분들은 지금 만나고 계신 거예요?”

간혹 영길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회원들을 챙겼다. 한번은 기호가 금요일마다 모이는 지회 모임에 불참한 적이 있었다. 감기 때문에 회사도 조퇴하고 숙소에서 쉬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길은 지회 모임이 끝나자마자 회원들을 데리고 기호의 숙소까지 가서 안부를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회원들은 가급적 영길 앞에서는 몸이 아프다는 말을 삼가기로 암묵적으로 약속을 했다.

오전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각. 찬용은 오늘 원래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당연히 서울 어느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찬용은 아침에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잠이 깨자마자 곧장 고속터미널로 가서 자광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친구들한테 전화해 일이 생겨서 다음에 만나자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영길한테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실은 지금 자광시에 왔다는 얘기도 할 수가 없었고.

“네, 저는 이제 막 약속 장소에 왔는데요, 친구 녀석들이 아직 한 놈도 안 왔네요. 얘들이 원래 약속을 하면 조금씩 늦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그러더니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쳐요.”

“아이고, 그럼 다음부터는 그 친구 분들 만나실 때 찬용씨도 약속 장소에 일부러 조금 늦게 가세요. 그럼 공평하잖아요.”

영길은 그런 고지식한 얘기를 한 뒤 돌아오는 금요일에 있을 지회 모임 때 보자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찬용은 전화를 끊고 나서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자광시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는 이제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말자며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영길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새벽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아침까지 잠을 자고 나왔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찬용은 마음이 편해졌다.

 

 

7월 18일 토요일 오전 10시

찬용은 서울 행당동 미정아파트 103동 앞에서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지난주에도 토요일 아침에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눈을 떴는데 아무도 없었다. 집 주인이 일이 많아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잤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토요일에 쉰다면 대게는 늦은 밤이나 새벽에라도 집에 오기 마련이다. 찜질방이나 기숙사에서는 안 잔다. 새벽에라도 집에 와서 늦게까지 편히 자면 되니까. 하지만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 주인은 토요일 아침에도 집에 없었다.

찬용은 그때 일이 생각나서 마침 토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사진작가 만날 일도 있고 해서 아침 일찍 미정아파트에 한 번 더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에도 집 주인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찬용은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 주인이 토요일에도 출근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만일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안에서 누가 나온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찬용은 열쇠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104호 앞까지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눌렀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찬용은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열쇠를 꺼내 문손잡이와 보조자물쇠까지 열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집 구조는 지난주에 왔을 때랑 똑같았다. 크지 않은 거실, 그리고 거실 왼쪽으로 큰 방, 오른쪽으로 작은방이 하나씩 있었다.

찬용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오른쪽 작은방 문이 열려 있기에 안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벽 한쪽으로 책장이 꽉 차 있었고 책도 빼곡했다. 그리고 매우 긴 철제 책상이 하나 있었고, 책상 위에 노트북과 프린터가 있었다. 그리고 필기도구들. 그게 다였다. 한눈에 봐도 서재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수 없는 공간이었다.

책장과 책상만 있는 걸 보면서 찬용은 집 주인이 전문적인 일을 하는 매우 바쁜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예를 들어 목동에 있는 어느 대학병원 부설 연구실에서 제약회사와 공동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늘 지친 상태라 집에 오면 편히 쉬기만 한다. 음식을 해먹지도 않기 때문에 집안에 음식 냄새도 배지가 않는다. 그러니 집안이 지저분해질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애초에 집에서는 푹 쉬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아예 치울 일이 없게 만든다. 서재라면 서재에 필요한 것들만 갖다놓는 식으로 말이다.

작은방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전부 리핀코트 약리학이나 의약품 합성학처럼 보기만 해도 약학 전공 서적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책들과 임상통계학이나 임상시험 같은 제목이 들어간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다 간간히 유전자 변형 관련 서적, 기후변화 대응 서적 같은 게 눈에 띄었고.

찬용은 작은방을 한번 더 둘러본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도 작은방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오른쪽 벽 구석에 스탠드형 LG 휘센 에어컨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LG전자 65인치 OLED TV가 걸려 있었고, 맞은편으로 4인용 민트색 패브릭 소파가 있었다. 그 사이에 흰색 계열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카펫 위로 인테리어용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 위쪽에는 흰색 벽걸이 시계가 걸려 있었고, 소파 위쪽에는 텔레비전보다 작아서 60호짜리로 보이는 캔버스에 그린 과일 정물화가 걸려 있었다.

찬용은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보았다. 편했다. 쉬는 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기에 매우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 게 뻔했고.

찬용은 소파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왼쪽에 있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한 번 자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거실이나 작은방보다 이상하게 편안했다.

큰방 역시 별 다른 장식이 없었다. 흰색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가 있었고, 맞은편으로 역시 흰색 화장대가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당연히 거울이 걸려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 역시나 흰색 벽걸이 시계.

찬용은 큰방을 둘러보면서 이 집 주인한테 흰색 페티시가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말 그대로 큰방에 있는 물건들은 거울만 빼고 모두가 흰색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도 흰색이었다.

“아무리 봐도 흰색 페티시가 맞는 것 같은데.”

찬용은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큰방을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화장실은 찬용 자신이 살던 3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하긴 화장실에 있는 욕조나 세면대 위치를 일부러 바꾸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것도 아파트에서 말이다. 흰색 욕조와 흰색 세면대도 그때 그 제품 그대로였다. 단지 칫솔이 찬용이 쓰는 것과는 달랐고, 샴푸도 다른 제품이었다. 찬용이 유일하게 쓰지 않는 우르오스 샴푸를 이 집 주인은 쓰고 있었다.

찬용은 화장실을 나와 물기 하나 없는 주방 싱크대를 살펴보았고, 냉장고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음식물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정말로 이 집 주인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 먹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싱크대 위에 있는 그릇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골뱅이나 꽁치 같은 통조림이 네 개, 다양한 종류의 치즈, 캔맥주, 타이레놀, 광동쌍화탕이 다였다. 그리고 2리터짜리 백산수 세 개. 두 개는 새 거였고, 하나에는 물이 삼분의 일 정도 남아 있었다.

찬용은 한숨을 쉬면서 냉장고 문을 닫았다. 냉장고에 음식물도 별로 없고, 집안에는 불필요한 장식품들도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집이 삭막하다는 인상이었다.

‘여기가 원래는 내 집이었는데. 집을 이렇게 삭막하게 만들어놓다니.’

찬용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씁쓸했다. 왠지 집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찬용은 기분전환이라도 할 셈으로 신발장 옆에 세워져 있는 청소기를 집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집안 전체를 구석구석 청소했다.

시간은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진작가와 만나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정오가 되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토요일이라 혹시 집 주인이 일찍 집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용은 물이라도 한모금 마신 뒤 집을 나가려고 했다.

찬용은 집안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백산수를 꺼내서 한모금 마시려다가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얼른 물을 집어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조심조심 걸어가서 현관문에 귀를 갖다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 휴대전화기로 통화를 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찬용은 어금니를 꽉 깨문 뒤 혹시나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심호흡을 했다. 만일 집 주인이 현관문을 열면, 동시에 자신이 문을 확 열고는 밖으로 뛰쳐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면 아마 집 주인은 한동안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겠지! 나를 뒤쫓아 올 생각은 못 할 거야.’

머릿속으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본 뒤 찬용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여기는 1층이다. 아파트 복도로 나가서 쏜살같이 달리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말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급기야 발소리가 104호 바로 앞에서 들렸다.

찬용은 문손잡이를 노려보았다. 손잡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방금 했던 시뮬레이션대로 본인이 문을 얼른 낚아채서 휙 열고는 복도로 뛰쳐나갈 참이었다.

이미 엉덩이를 반쯤 들어 복도로 거의 뛰쳐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발소리가 이번에는 점점 멀어졌다. 말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소리가 작아졌다.

발소리와 말소리가 점점 작게 들리자 찬용은 비로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 이따가 옆집 어딘가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와 말소리의 주인은 104호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옆집 어딘가에 사는 사람이었다.

찬용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한번 현관문에 귀를 갖다댔다.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찬용은 집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집안을 둘러본 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손잡이와 보조자물쇠도 잠근 뒤 아파트 복도를 지나 103동을 빠져나왔다.

103동 뒤쪽으로 가서 주차장을 막 지나치는데 누가 검정색 K7에서 내렸다. 그는 갈색 면바지에 하늘색 계열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시골 아주머니들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흉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곱슬곱슬했다.

그가 찬용과 마주치면서 자신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빠르게 걷고 있는 찬용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

 

 

7월 26일 일요일

오전 열한시가 조금 넘었을 때 DH 연대 자광장음지회 간사 영길한테서 전화가 왔다.

찬용은 휴대전화기에 표시된 인영길이라는 이름을 보면서 마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찬용은 이틀 전 금요일에 있었던 지회 모임에 불참했다. DH 연대 사람들과 만나 토론하고 식사하는 자리가 귀찮아서였다. 지회 모임뿐만이 아니었다. 찬용은 7월 18일 토요일에 서울 행당동에 있는 미정아파트에 갔다온 뒤로 일상생활에서도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매일 아침 여섯시면 일어나서 삼십분 간 명상부터 하던 찬용이었지만, 7월 18일 이후로는 여덟시가 넘어서도 한동안 이불 위에 누워 있기만 했다. 잠이 완전히 깨서 더 이상 졸리지도 않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홉시 전에 집을 나와서 누나 박미경이 운영하는 한식집으로 가 청소를 하던 찬용이었다. 하지만 아홉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 양치만 간단히 하고 추레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한식집에 가서도 의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정오부터 영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서둘러 청소를 끝내놓아야 해서 평소에는 두 시간이면 바닥 쓸고 닦고 테이블 소독하고 가게 앞 청소도 마쳤다. 하지만 7월 18일 이후로는 바닥 쓸다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고, 바닥 닦다가 다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시간은 고사하고 어쩔 때는 정오를 넘겨서까지 가게 청소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미경이 멍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찬용을 보며 혀를 차기 일쑤였다.

청소 끝내고 체육관 가서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준비운동을 하면서 똑같은 동작만 십분을 넘게 했고, 러닝머신에서는 두 시간 동안이나 시속 4km의 느린 속도로 걸었다. 평소라면 시속 4km로는 십분만 걷는다. 그리고 속도를 시속 6km로 올려 이십분을 걷고.

미정아파트에 갔다온 뒤로 찬용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딴 생각을 했다. 딴 생각을 하느라 늘 하던 일상들이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틀 전 금요일에 있었던 지회 모임에 불참했던 것이다. 미정아파트에 다시 가서 민트색 패브릭 소파에 앉아 있고 싶은 생각뿐이라, 지회 모임에 가서 사람들과 토론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틀 전 금요일에 영길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내 오늘 몸이 안 좋아 지회 모임에 불참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길이 생각하기에 오늘 정도면 찬용이 다른 사람과 통화할 만큼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까 싶어 전화를 한 것이고.

찬용은 이제 막 가게 바닥을 닦다가 마지못해 영길의 전화를 받았다.

“네, 영길씨.”

“안녕하세요, 찬용씨!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네, 많이 좋아졌어요. 별 것도 아닌데 괜히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죠. 다른 회원들도 금요일에 찬용씨 걱정 많이 했어요. 특히 경례씨는 언제 날 잡아서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고요. 그래서 제가 며칠 이따가 전화 한번 해보고 생각해 보자고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정도면 전화 통화하는 데 무리가 없으실 것 같아서 전화 한번 드려본 거예요.”

“아이고, 병문안은요 무슨, 몸살 기운 조금 있는 것 가지고 제가 너무 수선을 떨었나 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번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모임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네, 많이 안 아프시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그럼 지금은 집에 계시는 거예요, 아니면 가게에 계시는 거예요?”

“가게 나왔어요. 지금 청소하고 있어요.”

“그러세요? 잘 됐네요. 저 지금 찬용씨 누님네 한식집 근처거든요. 학교 선생님이셨다가 지금은 해임되신 분이 있어요. 그분 잠깐 만났다가 이제 막 헤어지고 찬용씨한테 전화드리는 거고요. 아직 좀 시간이 이르기는 한데, 같이 점심이라도 드시면 어떨까요?”

찬용은 미정아파트 생각에 빠져서 의욕 없이 가게를 청소하던 중이었다. 시간이 일러서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의욕이 없었다. 도저히 점심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길한테 다음에 먹자고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영길이 그런 찬용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했는지, 찬용이 이제 막 말을 하려는데 도중에 가로챘다.

“누님네 한식집 근처에 초밥집 새로 생겼던데, 찬용씨 혹시 거기 가보셨어요?”

“아, 아니요, 아직 안 가봤어요.”

“안 가보셨구나. 저 며칠 전에 춘봉씨하고 갔었거든요. 가서 회비빔밥을 먹었는데요, 그러니까 보통은 초밥집에서 회덮밥을 팔잖아요? 그런데 그 집은 회덮밥이 아니라 회비빔밥이더라고요. 그래서 신기하기도 해서 춘봉씨랑 같이 회비빔밥 시켜서 먹었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 회덮밥을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을 시켰다고 해야 할까요. 고추장 양념도 그렇고 비빔밥에 얹은 야채도 그렇고, 양도 푸짐하지만 처음 먹는 사람한테도 전혀 부담을 안 줄 만큼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색다른 맛이었어요. 물론 저나 춘봉씨 입맛에도 딱 맞았고요. 거기 가서 회비빔밥 같이 먹어요.”

영길의 거듭되는 권유에 찬용은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다.

찬용은 서울 미정아파트에 살 때 일요일이면 정오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 겸 점심으로 비빔면이나 짜파게티 한 개를 삶고 냉장고에서 베이컨도 꺼내 프라이팬에다 노릇노릇 구웠다. 그리고 컵에 우유도 한 가득 따른 뒤 식탁에 앉아 만화책을 보면서 여유 있게 먹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미정아파트에서 비빔면이나 짜파게티를 삶아먹었던 게 생각나자 찬용은 가게 바닥을 닦으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미정아파트에서 지내던 또 다른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그런 찬용의 모습을 보면서 미경이 또 한번 혀를 찼다.

 

 

7월 28일 화요일

찬용은 지난번 7월 18일에 다녀간 뒤로 정확히 열흘 만에 다시 서울로 왔다. 이번에는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지 않고 자가용을 이용했다.

자광시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고속버스는 첫 차가 여섯시 십분에 있었다. 그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 여덟시 정도. 다시 전철을 타고 행당동 미정아파트까지 가면 아홉시가 넘는다. 찬용은 미정아파트에 일찍 가서 103동 앞 놀이터에서 104호에 사는 사람이 출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싶었다. 출근은 몇 시에 하는지, 출근할 때의 옷차림은 어떤지 그런 걸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찬용은 3년 전까지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살 때 종로1가에 있는 불교출판사까지 출근하기 위해서 아침 여섯시 삼십분에 집을 나섰다. 찬용은 단지 그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아침에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서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를 나서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러자면 적어도 오전 여섯시 정도에는 미정아파트 103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자광시에서 출발하는 고속버스는 첫 차가 여섯시 십분. 당연히 불가능했다. 기차도 마찬가지였다. 자광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기차는 첫 차가 네시에 있었다. 그리고 청량리역 도착 시간은 오전 여섯시 이십분이었고. 그럼 청량리역에서 다시 행당동 미정아파트까지 가면 일곱시가 넘을 수도 있었다.

실은 일곱시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기는 했다. 청량리역에서 행당동까지 전철 타고 가서 다시 미정아파트까지 쏜살같이 달려가면 일곱시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104호에 사는 사람이 일곱시 넘어서 집을 나설 수도 있고. 그러면 104호에 사는 사람이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기차를 타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만일 104호에 사는 사람이 정말로 신약 개발 연구원이라면 자기처럼 불교출판사에 다녔던 평범한 회사원보다 늦게 집을 나선다는 건 어딘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찬용은 결국 기차 타는 것까지 포기하고 새벽 세시 삼십분이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고속도로 휴게실 한 번 안 들렸고, 서울에 진입해서부터는 새벽이라 도로에 차들도 없고 해서 신호등도 무시해 가며 목적지까지 내달렸다. 그리하여 미정아파트 단지 내로 진입했을 때는 다섯시 삼십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새벽이라 주차 차단봉도 개방되어 있어서 찬용은 자동차를 103동 앞 주차장까지 몰고 가 적당한 곳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곧장 놀이터로 가서 벤치에 앉아 104호를 주시했다.

7월이라 서울 일출시간은 다섯시 십오분 정도였다. 그래서 여섯시도 안 된 시각이었지만 주변은 환했다. 게다가 장마도 끝난 터라 공기가 눅눅하지도 않았다.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서 이른 새벽 야외에 나와 있는데도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찬용은 손에 쥔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다. 103동 1층에 사는 사람들은 여섯시가 넘어서까지 단 한 사람도 집을 나서지 않았다.

103동 103호에 사는 사람은 50대 후반의 부부였다. 남편은 과천에서 명품 구두 수선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내는 수학학원에서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둘 다 여덟시가 넘어야 출근을 했다. 특히 아내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설 때도 있었다. 딸이 하나 있는데 결혼해서 강남구 일원동에 살고 있었고.

105호에 사는 사람은 40대 초반의 부부였다. 남편은 세종시 조치원에 있는 하나은행 직원인데, 평일에는 은행 임직원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주말에만 행당동 미정아파트로 왔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이 집 역시 딸이 하나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래서 전업주부인 아내는 오전 여덟시가 다 되어서야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106호에 사는 사람은 50대 초반의 부부였다. 남편은 서울 양재동에 있는 매일우유 대리점 소장이었는데, 매일 여덟시가 넘어서 출근했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대학교까지 졸업한 아들은 1년 넘게 백수였고. 아주 가끔 자기 아버지가 소장으로 있는 매일우유 대리점으로 가서 새벽에 우유를 배달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1년에 서너 번밖에 안 됐다.

적어도 찬용이 보기에 103동 1층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104호에 사는 사람이 가장 일찍 집을 나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찬용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오전 여섯시 삼십분. 103동 1층에 있는 집들 가운데 처음으로 현관문 열리는 집이 있었다. 당연히 104호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남자였다. 갈색 면바지에 하늘색 계열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헤어스타일은 시골 아주머니들도 요즘은 촌스럽다며 잘 하지 않는 전형적인 아줌마 파마였다.

찬용이 보기에 헤어스타일이 좀 의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관리하기 쉽다는 측면에서 납득이 가기도 했다. 그만큼 신약 개발 연구원의 삶이라는 게 자신을 꾸밀 시간조차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피곤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보니까 104호 남자의 헤어스타일이 어딘가 익숙한 듯도 했다.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헤어스타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찬용은 남자가 주차장 쪽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놀이터에 계속 있었다. 혹시나 남자가 집에 지갑이라도 빠뜨리고 나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남자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갈 것이고, 찬용이 서둘러 베란다에 숨는다고 해도 들킬 위험이 컸다.

찬용은 이십분 가까이 놀이터에 있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103동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104호 문손잡이와 보조자물쇠를 열었다. 여전히 104호 주인은 자물쇠를 바꾸지 않았다.

 

필원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자마자 휴대전화기로 집안 CCTV를 관찰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휴대전화기를 차량용 거치대에 꽂고, 차를 출발시켰다. 휴대전화기 화면에서는 여전히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 거실이 보이고 있었다.

필원이 운전하는 차가 미정아파트를 빠져나와 이십분 정도를 달린 뒤 막 성수대교를 진입할 즈음 휴대전화기 화면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필원은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휴대전화기 화면에서 보이는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휴대전화기 화면에서는 찬용이 민트색 패브릭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보더니 금세 일어나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CCTV는 103동 104호 거실만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찬용은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필원의 휴대전화기에서도 찬용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찬용은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연 뒤 소파 대신 흰색 카펫이 깔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그대로 누워 거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거실 천장에 달린 전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필원이 생각하기에 마치 찬용이 전등 옆에 단 초소형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찬용은 한동안 카펫이 깔린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라도 났는지 다시 거실에서 사라졌다.

“남의 집에서 혼자 잘도 돌아다니시네.”

필원은 휴대전화기에서 찬용의 모습이 사라지자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찬용은 갑자기 화장실 앞에서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를 삐죽 내밀어 거실 텔레비전 위에 걸린 흰색 벽걸이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일곱시가 조금 넘었다.

찬용은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3분 만에 끝마친 간단한 세수였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지만, 얼굴에 칠한 도브 비누가 물로 헹구는 시간이 다른 비누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세수를 마친 찬용은 화장실에서 나와 곧장 큰방으로 갔다. 큰방에 있는 화장대에서 얼굴에 바를 만한 화장품을 찾았다. 역시 바쁜 신약 개발 연구원답게 화장품도 스킨과 로션이 하나로 합쳐진 올인원 제품 우르오스 스킨로션을 쓰고 있었다.

얼굴에 화장품도 바르고 머리 모양도 매만진 찬용은 화장실 앞에다 벗어놓았던 웃옷을 떠올리고는 가서 웃옷을 입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게 없나 살펴보았다.

찬용은 3년 전 미정아파트에 살 때 출근하기 전에 늘 바나나나 견과류를 챙겨먹었다. 우유 한 잔하고. 하지만 지금 신약 개발 연구원의 냉장고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골뱅이 통조림과 꽁치 통조림이 합해서 네 개, 캔맥주 다섯 개, 타이레놀 등이 전부였다. 그리고 2리터짜리 백산수가 여전히 세 개. 두 개는 새 거였고, 하나에는 물이 삼분의 일 정도 남아 있었다. 어느 집에든 있을 것 같은 그 흔한 우유조차 없었다. 소포장된 견과류도 없었고.

찬용은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면서 역시 바쁜 신약 개발 연구원답게 아침조차 먹을 시간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회사 근처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대신하면서 휴대전화기로 신문 기사들을 훑어볼 수도 있겠고.

찬용은 우유 대신 물이라도 마실까 했지만, 막상 백산수를 들고 마시기가 귀찮아서 그만 두었다.

시간은 일곱시 삼십분이 다 되어 갔다.

찬용은 카펫 위에 누워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출근 준비를 해보았던 것이다.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3년 만에 해보는 출근 준비였다. 물론 그 당시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준비를 시작했고, 그 때문에 준비가 끝났을 때도 전에 집을 나서던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었지만, 오랜만에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출근 준비를 할 수 있어서 설레고 즐거웠다. 그래서 혼자 피식 웃다가 거실로 돌아왔다.

“그럼 청소나 해볼까. 비록 청소는 늘 일요일에 했지만, 이제 일요일에는 내가 집에 없으니 앞으로는 청소를 화요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 전에 일단 피곤하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일 것 같고.”

그러면서 찬용은 소파에 누웠다. 새벽 세시도 안 된 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나오느라 피곤했다. 게다가 자광시에서 서울까지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서 왔으니,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가게에 나가 청소하고 체육관 가서 운동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인 삶을 3년 째 하고 있는 찬용으로서는 갑자기 하루에 마라톤 풀코스를 세 번 달린 것과 맞먹을 만큼 정신과 육체가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오분 정도가 흘렀을까. 찬용이 작게 코까지 골다가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대로 잠을 자면 오후 두세 시나 돼야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늦게 일어날 수도 있고.

아무리 바쁜 신약 개발 연구원이라 하더라도 꼭 밤늦은 시간에 들어온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밤을 새가며 연구한 탓에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찬용의 생각에 여섯시 전에는 집에서 나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여섯시 전에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 잠을 잔다면 열흘 만에 미정아파트에 와서 가장 오랫동안 한 거라고는 잠을 잔 게 고작일 것 같았다.

결국 찬용은 억울해서 잠자는 걸 포기했다. 잠은 나중에 자광시 내려가서 푹 자도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 거실 한쪽에 있는 청소기로 먼저 집 청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성수대교를 지나서도 계속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던 필원은 찬용이 청소기를 들고 집안 청소하는 걸 보면서 휴대전화기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더니 곧 모바일용 홈카메라 애플리케이션에서도 빠져나왔다.

필원은 시계를 들여다본 뒤 자동차 속도를 올려 고산자로를 빠르게 달렸다.

 

 

7월 29일 수요일 새벽 2시

“아, 방금 깨셨나 보네요. 참,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죠?”

필원의 말에 찬용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미라처럼 온몸이 흰 천으로 감겨 있는데다가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그렇게 몸이 완전히 결박당한 상태에서 찬용은 필원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자신이 미정아파트에 두 번째 왔던 7월 18일 토요일이 떠올랐다.

그날 찬용은 오전 열시에 미정아파트에 와서 집안 구경을 하고 청소를 하고 정오가 돼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103동 뒤쪽 주차장을 지나가다가 검정색 K7 승용차에서 내리는 필원을 보았다. 시골 아주머니들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흉내 내기라도 한 것처럼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 그런 머리 모양 때문에 찬용도 잠깐 그에게 시선이 갔다.

필원은 찬용과 마주치면서 자신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매만지다가,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찬용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비록 찬용이 그때 빠르게 걷고는 있었지만 방금 마주친 곱슬곱슬한 머리의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았다. 하지만 그때 찬용은 필원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척 빠르게 걷기만 했다.

몸이 결박당한 지금 찬용은 그날 자신과 마주쳤던 남자가 거실 바닥에 앉아 있는 저 남자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 남자는 그때 이미 주차장에서 나하고 마주치면서 내가 이곳 미정아파트 103동 104호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전에 내가 7월 11일 토요일에 디에이치 연대 사람들과 대학로에서 기후 변화 위기 경고 집회에 참석한 뒤 혼자서 투다리 왕십리점에 갔다가 다음 날 새벽 술에 취해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왔던 것도 알고 있었을지 몰라.’

그래서 찬용은 더 더욱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에 재갈이 물려 있는 탓에 찬용의 외침은 필원의 귀에 “음! 음! 음!” 하는 말로만 들렸다.

“이게 약효가 열 시간 정도 지속돼요. 지금이 두시니까, 찬용님이 물을 드신 시간이 오후 두시 정도였나 봐요? 제가 아침에 찬용님이 제 집 청소하는 것까지는 출근하면서 CCTV로 봤거든요. 아, 성함은 지갑에 있는 신분증 꺼내서 봤어요. 죄송해요. 멋대로 남의 지갑을 뒤져서.”

그러면서 필원이 손으로 거실 천장에 달려 있는 전등 옆을 가리켰다. 그제야 찬용의 눈에 전등 옆에 달려 있는 탁구공만 한 크기의 검은색 카메라가 보였다.

“그래서 청소를 하시기에, 아 오늘도 청소만 하다가 가시려나 보다, 하고 체념했어요. 그래서 그 타이밍에 저는 모바일용 홈카메라 애플리케이션에서도 빠져나왔고요. 평소처럼 그냥 출근길 자동차 운전에나 집중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와서 보니까 찬용님이 주방에 쓰러져 계시잖아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지만 찬용님이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기 때문에 마냥 기쁨을 만끽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서둘러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두었던 압박용 붕대를 가져와서 찬용님의 몸을 결박했어요. 물론 압박용 붕대는 7월 12일 이후에 바로 구매를 해서 차에 보관해 두었던 거고요.”

필원은 어느새 바닥에서 일어나 소파 옆으로 다가왔다.

찬용은 필원을 올려다보면서 계속 죄송하다고 애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은 필원의 귀에 “음! 음! 음!” 하고 들릴 뿐이었다.

“찬용님은 7월 12일 일요일 새벽에 처음 제 집에 들어오신 날을 전혀 기억 못하시죠? 18일 토요일 낮에 주차장에서 저와 마주쳤는데도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역시 기억을 못하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 그때 혹시나 찬용님이 저한테 아는 체를 할까 봐 상당히 긴장했거든요.”

그러면서 필원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까지 취했다.

“찬용님이 처음 오신 12일 일요일 새벽에 저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잖아요. 분명히 제가 전날 밤에 들어오면서 현관문을 잠갔는데, 전 제가 한 행동은 절대 안 잊어버리거든요. 늘 행동이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새벽에 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겠어요? 그때 제가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찬용님이 들어오셔서는 멋대로 화장실로 가셔서 볼일도 보시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전 그때까지도 공포에 질려서 몸이 완전히 얼어가지고 소파에서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어요. 만일 찬용님이 저를 보고 달려들면 저는 그냥 죽은 목숨이구나, 그런 생각만 했다고요. 제가 싸움을 정말 못하거든요. 겁도 많고요. 그래서 초중고 12년 동안 아이들한테 매일 맞고만 다녔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같은 반에 있는 한 애가 의자로 제 머리를 때렸는데요, 너무 세게 맞아서 머리가 크게 찢어진 적도 있었어요. 덕분에 흉터도 크게 남았고요. 그래서 아직도 제가 그 흉터 가리느라 머리를 이렇게 곱슬곱슬하게 하고 다녀요. 흉터 있는 곳은 머리카락이 안 자라거든요. 이 흉터 좀 보실래요? 여기요, 여기. 보이세요?”

필원이 고개를 숙여 찬용한테 머리에 난 흉터를 보여주었다.

“자꾸 말이 옆으로 새서 죄송해요. 사람들하고 대화를 잘 안 나누다 보니까 좀 서툴러서 그래요. 혼자서만 대화를 나누다보니까 제멋대로 막 이 얘기 하다가 저 얘기 하고, 저 얘기 하다가 이 얘기 하고,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도 이 얘기 하다 저 얘기 하고 그러네요. 이해해 주세요. 아무튼 그런데 다행히 찬용님이 술이 완전히 취하신 채로 화장실에 갔다가 곧장 안방으로 가시더라고요. 그러고는 한동안 안방에서 아무 기척이 없으시기에 용기를 내서 저도 안방으로 가봤어요.”

필원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왔다.

“혼자 마셔서 죄송해요. 찬용님께서는 지금 상황이 맥주 드실 상황은 아니시잖아요.”

필원은 말없이 캔맥주를 마셨다. 아무리 355ml짜리 작은 캔이라지만, 그래도 소주도 아니고 탄산이 들어간 맥주를 필원은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러고는 작게 트림을 하고 나서 빈 캔을 주방에 있는 싱크대 위로 휙 던졌다가, 얼른 달려가서 빈 캔을 주워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휙 버리면 찬용님이 화내실지 모르니까 조심해야죠. 아참,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부터 먼저 드려야 했는데요. 제가 출근해 있는 동안에 이렇게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필원이 찬용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 기척이 없으시기에 저도 안방으로 갔거든요. 그랬더니 침대 위에서 아주 편히 주무시더라고요. 마치 찬용님 집 침대인 것처럼요. 그래서 한동안은 제가 다 혼란스러울 정도였어요. 실제로 복도로 나가서 현관문에 붙어 있는 호수까지 다 확인을 해봤다니까요. 104호가 아닌가! 105혼가! 내가 집을 잘못 들어온 거였어!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104호가 맞더라고요. 하긴 집 안에 있는 가구들이 다 제가 산 것들인데 104호가 아닐 수가 없죠. 그래서 다시 안방으로 가봤어요. 그제야 제가 이 집 계약할 때 부동산 중개인 분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전에 살던 남자가 저보다 서너 살 아래인데, 이 집에서 십년 이상 살다가 지방 소도시로 내려가게 됐다고요. 자광시라고 했을 거예요. 질풍호수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자살명소로 이름 난 최고대교도 있고. 그 생각이 나자 조금 감이 잡히더라고요. ‘아, 전에 여기 살던 분이신가 봐. 술에 완전히 취해서 여기가 자기 집인 줄 알고 찾아오셨나 보네’ 하는 생각도 했고요. 이곳에 오래 사셨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혹시 몰라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이름을 확인해 봤어요. 찬용님이 맞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죠. 왜냐하면 이사 가신 지 삼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제 집에 찬용님한테 오는 우편물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전에 여기 살던 분이 맞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어요. 집 열쇠는 아마 부동산 중개인 분한테 드리기 전에 미리 복사를 해두셨을 테고요. 어떻게, 제 얘기가 맞나요?”

필원의 말에 찬용이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음! 음! 음!” 하고 외쳤고.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까 새벽 내내 궁리했어요. 당장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면 흔들어 깨워서 자초지종을 들어볼까! 그러다 결국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날도 서서히 밝아오는 것 같고 해서 그냥 저는 밖으로 나왔어요. 일요일이었지만 회사에 볼일도 있고 해서 출근을 해야 했거든요. 어차피 뭐 무서워서 찬용님 깨울 용기도 없었고요, 경찰 부르는 건 좀 번거로울 것 같으니까 피하고 싶었고요. 게다가 이상하게 찬용님 혼자 두고 가도 걱정이 되지가 않았어요. 이사 간 지 삼년이 지났는데도 본인 집이라고 착각해서 찾아왔다면, 이 집에 대한 애착이 저보다 훨씬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분이시라면 잠에서 깨서도 자기 집처럼 정리정돈을 말끔히 해놓고 나가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찬용님 혼자 놔두고 저는 그냥 일요일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왔던 거예요. 아 참, 죄송해요. 차에서 잠깐 뭘 좀 가지고 올게요.”

필원은 경쾌한 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 그리고 괜히 저 나간 사이에 압박 붕대 풀려고 몸부림치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래 봐야 소용없으니까요. 그거 절대 안 풀려요. 그냥 얌전히 계시는 게 나아요. 괜히 몸부림치다 소파에서 떨어지면 다치실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혹시나 가구 같은 게 망가질 수도 있고요. 그러니 얌전히 계세요.”

필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밖으로 나간 뒤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갔다.

필원이 나간 걸 확인한 찬용은 몸을 옆으로 굴려 거실 바닥으로 떨어질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매우 정교하게 온몸을 압박 붕대로 칭칭 감아놨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바닥에 떨어져 봐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면서 필원이 화를 낼 수도 있고.

찬용이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어느새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필원의 손에는 가죽으로 된 검정색 작은 손가방이 들려 있었다.

필원은 검정색 손가방을 주방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찬용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그래서 제가 일요일 이른 아침에 찬용님 혼자 놔두고 출근을 했잖아요. 차를 몰고 성수대교 지나서 고산자로를 막 달리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찬용님이 이번에 제 집에서 무사히 나가시면, 찬용님은 조만간 제 집에 또 찾아오시겠구나. 그런 생각이요. 왜냐하면 실은 저도 그런 유혹을 느꼈던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유년시절을 서울 공릉동에서 보냈어요. 그렇다고 해서 공릉동이 고향은 아닌데요,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 때 공릉동으로 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냈으니까 유년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에요. 애들한테 매일 맞고 지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추억은 추억이잖아요. 그런 공릉동엘 몇 년 전에 우연히 갔다가 예전에 살던 집이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서 한번 찾아가 봤거든요. 신기하게도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집 가는 길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주변 건물이며 모든 게 변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집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었어요. 다행히 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요. 많이 낡았지만 아직까지는 잘 버텨주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년 시절 살던 그 집 앞에 서서 들어가 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돌아섰어요. 그 뒤로 한동안은 그 집 생각 때문에 힘들었고요. 평일 낮에라도 몰래 한번 그 집에 들어가서 내가 지내던 방에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이 강했거든요. 그래서 몇 번이나 그 집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는지 몰라요. 아무튼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찬용님도 틀림없이 다음에 또 제 집에 찾아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찬용님은 그때의 저와 달리 제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자 갑자기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더라고요. 물론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게 납치고요. 고문이나 납치 뭐 그런 거요. 사람은 역시 좀 잔인한 쪽으로 흥미를 느끼나 봐요. 그래서 이런 압박 붕대나 찬용님이 오후에 드신 수면제 같은 거요, 그런 걸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 아, 자꾸 죄송해요. 이번엔 맥주를 마셨더니 소변이 마렵네요. 저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필원이 역시나 경쾌한 걸음으로 화장실에 간 사이 찬용은 싱크대 위에 놓인 검정색 가죽 가방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 안에 끔찍한 게 들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찬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찬용은 어떻게든 남자 몰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자신을 이곳에서 무사히 풀어주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이렇게 결박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간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찬용은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이 집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아니, 쉽게 남의 집에 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집 주인의 함정이 아니고서야 왜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한심했다. 한심하고 불쌍했다. 불쌍해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필원이 화장실에서 나와 찬용의 모습을 보더니 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는 소파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휴지로 찬용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필원의 행동을 보면서 찬용이 다시 한번 외쳤다. 멋대로 들어와서 정말 죄송하다고 외쳤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찬용의 말은 여전히 필원의 귀에 “음! 음! 음!” 하고 들릴 뿐이었다.

“울지 마세요. 슬프시겠지만, 그래도 울지 마세요. 지금 죄송하다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중이시겠지만, 더 이상 그렇게 외치실 필요도 없고요. 그래 봤자 방법이 없잖아요. 이제는 찬용님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을 거예요.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거, 아니 어쩌면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거 느끼셨을 거예요. 그러게 왜 자꾸 남의 집에 그렇게 멋대로 들어오세요. 만약 제가 첫 날에 집에 없어서 눈치를 못 챘다고 하더라도 찬용님처럼 그렇게 자주 오시면 누구든 눈치를 채게 된다고요. 베개 위치만 조금 바뀌어도 집 주인은 눈치를 채요. 그런데 찬용님은 어쩜 그렇게 자기 생각에만 사로 잡혀 사시는지, 참. 그러니 결국에는 이렇게 돼버리잖아요.”

필원이 또 휴지를 뜯어 찬용의 눈 주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래도 이왕 남의 집에 들어오셨다면 얌전히 소파에나 앉아 있다가 가셨어야지요. 왜 멋대로 남의 집 청소도 하고, 심지어 냉장고 열어서 물까지 마시고 그러셨어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데요. 찬용님, 냉장고 안에서 물 꺼내 드셨지요? 백산수? 제가 거기에 수면제 탔어요. 제가 떠올린 게 그거였거든요. 그래서 12일 일요일에 회사 가서 수면제랑 다른 약물도 좀 챙겼어요.”

필원이 다시 휴지를 뜯었다.

“일요일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바로 백산수에다 수면제를 탔어요. 플루니트라제팜이라고 하는데요, 일종의 데이트 강간 약물이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그거 엄청 쏟아부었다고요. 물론 찬용님이 언제 또 제 집에 오실지는 알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제 집에 와서도 물을 안 드실 수도 있고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물을 안 드시면, 찬용님은 그냥 무사히 제 집을 나가시는 거니까요. 18일 토요일처럼이요. 그리고 언젠가 또 제 집에 오시겠죠. 저 역시 몇 번이나 공릉동에 갔었으니까요. 물론 저는 그 집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요. 그리고 찬용님이 제 집에 오셔서 또 물을 안 드실 수도 있고요. 그럼 그때도 찬용님은 무사히 제 집을 나가시는 거고요. 그래도 역시나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제도 출근길에 차 안에서 CCTV를 보는데 찬용님이 청소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 이번에도 그냥 청소만 하시다가 돌아가시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음을 기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찬용님이 주방에 쓰러져 계시잖아요.”

찬용은 필원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구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쳤다. 하지만 아직 몸에 수면제 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힘 있게 몸을 비틀지도 못했다.

“소용없어요. 제가 워낙에 칭칭 감아놔서 빠져나오시는 건 불가능해요. 음, 이제 그만 찬용님과의 대화는 마무리를 할게요. 그게 좋겠어요. 찬용님이 계속 우시니까 제가 마음이 아프네요.”

그러면서 필원은 주방 쪽으로 가서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검정색 가죽 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반쯤 담긴 작은 병과 주사기가 세 개 들어 있었다.

“이제 이 약물을 주사할 거예요.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신경세포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약물이에요. 이 약물 덕분에 찬용님은 이제 일주일 정도 잠에 푹 빠지실 거고요. 그리고 깨어나셨을 때 찬용님은 과연 어디에 계시게 될까요? 기대해 주세요. 아 참, 어쩌면 영영 못 깨어나실 수도 있고요, 후후. 제가 이 약물 한 병을 다 주사할 거라서요, 후후후.”

그러면서 필원은 가방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내 손가락으로 한두 번 톡톡 쳤다. 그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찬용이 필원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보면서 겁에 질려 몸부림 쳤다. 동시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어떻게든 입에 물린 재갈이라도 풀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재갈을 풀어서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도 재갈은 풀리지 않았다. 대신 눈물과 콧물이 사방에 흩뿌려져 소파를 더럽혔다.

순간 필원이 발을 번쩍 들어 뒤꿈치로 찬용의 명치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찬용이 컥! 소리를 내면서 극심한 호흡 곤란을 겪었다.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괜히 소파만 더럽히시고. 가만히 계세요. 이제부터 움직이시면 안 돼요. 움직이실 때마다 제가 명치를 가격할 거예요.”

필원의 말에 찬용이 더 크게 살려달라고 외쳤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에서 식도가 찢어질 정도로 고함을 지르며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찬용의 애원은 필원의 귀에 “음! 음! 음!” 하고 들릴 뿐이었다.

찬용이 그렇게 애원하는 사이에 필원이 왼손으로 찬용의 머리를 꽉 눌렀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주사기를 재빨리 찬용의 목에 찔러넣었다.

약물은 빠르게 찬용의 뇌를 자극했다.

필원이 목에서 주사기를 빼낸 뒤 가방에서 또 다른 주사기를 꺼내는 모습이 찬용의 눈에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필원이 새로 꺼낸 주사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찬용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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