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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1 요정 이야기

-리라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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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며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얇은 장막 너머에서 비치는 흐릿한 빛이었다. 인간의 감각에 비유하면 맑은 바닷물에 온몸을 담근 채로 바라본 태양과 흡사할 것이다.
시야를 덮은 막은 점점 얇아졌고, 갈라지더니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작은 세계에서 큰 세계로,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그는 태어났다.
인간과 닮았으되 매우 작은 그는 인간에게서 리라젤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닮았다고 해도 겉모습일 뿐, 정신적인 면에서는 인간과 많이 달랐다. 리라젤은 알에서 깨어나면서 이미 자아와 인격과 지성을 모두 갖춘 상태이기에 육체는 어려도 정신의 성숙은 완성된 상태였다. 인간 아기처럼 울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인간보다 단순한 발성기관과 미성숙한 육체 때문에 리라젤은 제대로 소리를 내거나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자연히 인간은 그런 요정의 겉모습만 보고 아기나 다름없이 취급했다.
꽤 오랜 시간 리라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주위를 관찰할 뿐,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간은 요정이라 이름 지은 그 작은 존재에게 제대로 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그저 움직이는 장식품처럼 대했다.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하며 조금씩 움직이는 작고 예쁜 인형.
인간이 생각하는 요정의 정의는 이랬다.
반면 리라젤은 태어난 직후부터 자신은 누구이며 왜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지,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지만, 리라젤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거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본능적인 감각일 수도 있고 길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혼자 고민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리라젤의 주위 환경은 척박한 편이었다. 당시에는 다른 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비교할 수도 없어서 그냥 참고 견뎠지만 요정은 부유층과 유명인의 애완동물이기에 모두 쾌적한 환경에서 자랐다. 반면 리라젤은 요정 알 관리회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대학생 이현아가 훔쳐오듯 가져온, 파기되기 직전의 알에서 어렵게 깨어난 처지기에 평범한 아파트 방구석에서 머플러에 감싸여 종이상자 안에 담긴 채로 자라났다.
그래도 인간은 지극정성으로 리라젤을 길러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지내는 공간이 바뀌었고 다른 인간 한 명이 더 나타나 둘이서 함께 혹은 번갈아가며 리라젤을 돌보았다. 육체가 연약하고 자주 병이 걸리는 리라젤은 대부분 음식도 떠먹여 줘야 하고 배변도 치워줘야 했다. 두 인간이 불평 없이 꾸준히 돌봐주자 리라젤도 그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품게 되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리라젤은 인간의 감정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 변화, 반복되는 언어 표현, 손짓과 몸짓, 뿜어내는 열기와 냄새와 페로몬…… 단서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언어를 익히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표본이 부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체 한계가 역력했다. 리라젤은 비상한 기억력으로 두 인간이 나누는 대화를 거의 다 외운 덕분에 간단한 일상대화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입으로 발음할 수가 없기에 의사전달은 불가능했다. 만약 현아와 유리가 수화를 썼다면 이를 배워 대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언어를 배제하고 표정과 손짓만 따로 떼면 온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더구나 리라젤은 애를 썼지만 인간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할 수도 없었다. 손가락 또한 아직 생각대로 정확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신체의 성장이 완성되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그 손가락조차 너무 작아서 인간의 눈에는 그저 꼼지락대는 정도로 보일 뿐, 어떤 규칙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리라젤은 인간이 자주 쓰는 손짓을 흉내 내어 나름대로 수화를 만들어내려 애썼으나 받아들일 인간 쪽에서 이를 해독해내지 못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와, 얘 좀 봐! 손을 막 움직여!”
“모기라도 봤나?”
“너는 감성이 없니, 응? 우리한테 인사하는 거잖아.”
“진짜? 리라젤, 안녕? 나는 현아 언니예요~. 으흐흐, 진짜 귀엽다.”
이쪽에서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했건만 인간들은 그저 리라젤을 인형이나 아기 취급할 뿐이었다. 그저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거나 혀를 내밀어 흔드는 등, 아무리 잘 해석해도 그저 반가움과 애정을 전달할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손짓과 몸짓을 보일 뿐이었다.
안 좋은 환경과 그로 인한 잦은 병마도 리라젤의 의지를 꺾었다. 현아의 방도, 유리의 방도, 둘이 함께 대학 시절을 보낸 원룸도 요정에게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여름엔 너무 덥고 겨울엔 너무 추우며 먼지가 많아 공기도 탁하고 습도 조절도 잘 되지 않는 등 최악의 조건이었다. 더구나 인간이 느끼지 못하고 인간에게 설명하기도 힘든 압박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무언가 온몸을 조이고 찍어누르는 듯한 답답함에 종일 시달렸다.
리라젤은 구토, 현기증, 설사, 두드러기 증상을 거의 매주 되풀이하며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다. 인간은 뚜렷한 증상파악과 확실한 치료법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경험으로 쌓이고 입소문으로 전파하는 민간요법에 의지하여 그때그때 증상을 호전시키고 심각한 위기만 넘기는 식으로 대응했다.
리라젤은 하루 대부분을 누워 지냈고 식사나 배변 때는 일어나 앉았다. 열심히 손짓하여 신호를 보냈으나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재롱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왜 자신은 여기에 태어나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야만 할까. 이대로 인간의 보살핌을 받으며 무력하게 살다가 죽을 운명인 걸까. 그런 좌절과 실의가 육체의 고통 못잖게 리라젤을 괴롭혔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라니,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런 절망적인 생각이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솟아나는 잡초처럼 생겨났다. 진저리를 치며 짓밟고 뽑아도 끈질기게 돋아난다. 그럴 리는 없다고 리라젤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성장이 끝나면 육체의 고통도 덜해져 살기 편해질지도 모른다. 발성기관이 더욱 인간과 흡사해져 인간의 언어를 발음할 수 있게 될 가능성도 있고.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자. 이런 집념을 희망의 버팀목으로 삼아 힘든 하루하루를 견뎠다.


리라젤의 삶이 극적으로 변한 계기는 스마트폰이었다. 상당히 늦긴 했지만 유리는 리라젤이 기대 이상으로 똑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글자를 가리키기로 마음먹었다. 리라젤이 말을 못하는 이유는 지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타고난 발성기관의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고, 요정 주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속칭 요정맘 카페에도 자기네 요정이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하는 글을 볼 수 있었다. 한 번 본 사람이나 물건을 기억했다가 구분해낸다는지 하는 얘기는 한둘이 아니었고 글자를 가르쳤더니 일기를 쓰더라는 글도 있었다.
이쑤시개처럼 작은 펜을 개발하지 않는 한 손이 작은 요정이 글자를 쓰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유리는 카페의 글을 보고 터치패널로 문자를 입력하여 글자를 쓰게 한다는 아이디어를 알게 되었고, 즉시 예전에 쓰다 지금은 안 쓰는 스마트폰을 다시 충전하여 리라젤에게 주었다. 불과 1년 전까지 쓰던 것이라 성능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고 통화와 문자 외의 기능은 문제없이 쓸 수 있었다.
유리는 유아용 글자책을 사서 보여주고 화면에 띄운 가상 키보드를 두드려 따라 쓰도록 가르쳤는데, 리라젤은 그야말로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넘쳐흐르자 비로소 삶에도 활기가 돌아왔고 늘 병마에 시달리던 쇠약한 육체에 대한 고민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리라젤은 인간 아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글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보통 말을 먼저 하면서 이를 글로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가 쓴 글을 보면 발음을 따라 쓰다가 맞춤법이 틀리는 경우가 많다. 가령 ‘좋다’를 ‘조타’로, ‘싫다’를 ‘실타’로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반면 리라젤은 기억력이 우수하기도 하고 말 없이 바로 글자부터 모방하여 쓰기에 맞춤법은 비교적 정확했다. 대신 작은 손으로 미끄러운 패널 표면을 눌러 글자를 입력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오타가 많이 발생했다.
또한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여 익힌 개념이 아닌 글자와 그림만으로 외운 개념이라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령 아이는 ‘사과’라는 말을 배울 때 진짜 사과를 보거나 만지거나 먹어본 경험이 있기에 사과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요정은 사과를 보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보더라도 그것은 엄청나게 거대한 덩어리라서 인간과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그림책에 그려진 작고 붉은 덩어리를 실제 과일인 사과라고 즉시 인식하지 못한다. 요정은 인간처럼 사물을 단순화, 추상화시키는 능력은 떨어지는 대신 사물의 정확하고 세밀한 모습을 전부 파악하고 암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리라젤 같은 경우 자신을 기르는 인간 현아와 유리를 같은 인간이며 같은 여자라는 단순하고 공통점이 많은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요정에게 있어 각각 사람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독특한 존재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이라고 뭉뚱그려 판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정이 사과 5개를 보고 이름을 지어 붙인다면 다른 이름 5개를 만들어 붙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전부 다 똑같이 ‘사과’라고 부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인간과의 감각 및 관점의 차이가 인간을 기준으로 한 언어교육을 받는 요정에게 점점 더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장벽이 있긴 해도 리라젤은 빠른 속도로 낱말과 문법을 외워서 간단한 문장은 쓸 수 있게 되었다.
일취월장하는 리라젤을 본 유리는 현아에게 편지를 쓰라고 제안했다. 떨어져 살고 있어 오랫동안 보지 못한 현아를 떠올리며 리라젤은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기 생각을 글로 전달했다.

현아 언니 안너ㅓㅇ하세요.
나는 리라젤입니다.
당신의 좋음 항상 감사합니다.
나는 어닌가 보고싶다.

육체의 한계로 발생하는 오타는 어쩔 수 없었다. 수정하고 싶었지만 유리가 스마트폰을 뺏어가듯 가지고 가버렸다. 표정과 소리에서 기쁨과 흥분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리라젤은 그들의 마음에 드는 글을 썼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중요한 부분은 현아를 ‘언니’라고 부른 점인데, 그 언니라는 낱말에 담긴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진 못했으나 현아와 유리 스스로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불리길 원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기에 썼던 것이다. 인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이상 그들의 분위기를 맞춰주는 일은 중요한 생존전략이었다.
실제로 요정은 인간이 좋아하는 표정을 알아채곤 이를 만들어 보였다. 인간의 웃는 얼굴과 흡사한 표정이다. 실제 요정은 굳이 감정을 안면근육의 조절로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표정이나 언어나 몸짓 외에도 감정을 주고받을 유효한 수단이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지 못했다. 각각 외따로 떨어져 인간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개별 요정은 너무나 무력하고 외로운 존재였다.
많은 요정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세상에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서로 연락할 방도가 없어서 답답했다. 늘 주위에서 인간들이 뿜어낸 음파와 열기와 체취 등이 요정의 예민한 감각이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차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헤맬까 두려워 옴짝달싹 못하는 것처럼 요정은 둔감한 상태로 살아가야만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야 리라젤은 역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리라젤은 출생 이후 쭉 현아의 보살핌을 받다가 한동안은 유리의 보살핌을 받았고, 지금은 다른 공간으로 옮겨져 현아와 유리가 함께 돌보고 있었다.
현아는 요정맘 카페에 리라젤이 쓴 글을 올리며 자랑을 했는데, 역시 글을 쓸 줄 아는 요정을 기르는 주인이 두 요정에게 채팅을 시켜보자고 제안했다. 아마도 자신의 요정이 더 똑똑하다는 생각을 증명하기 위함이리라.
티타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요정과 리라젤의 대화는 아주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진행되었다. 각자의 주인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리라젤은 자신과 매우 닮은 존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상황 자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리라젤입니다.’ 이런 단순한 인사말만 몇 마디 나누다 대화는 종료되었다. 티타니아의 주인은 아이가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리라젤은 답답했다. 아마도 티타니아는 리라젤 자신보다 훨씬 지능이 떨어지는 요정일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티타니아가 듣고 반응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동족과의 첫 대화가 애들용 언어 교과서 같이 틀에 박힌 인사만 주고받다가 끝날 줄이야. 리라젤이 느낀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별다른 성과 없이 대화가 끝났으니 앞으로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 생각하며 낙담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30분 정도 지난 후 스마트폰 알림창에 메시지가 떴다.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리라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메시지의 내용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티타니아 < 혼자 있을 때 답장을 보낼 것

리라젤이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나가더라도 한 사람은 남아있곤 했다. 그렇지만 리라젤을 하루 종일 지켜보지는 않았다. 책을 보며 글자를 쓰거나 TV라는 경치가 자주 빠르게 바뀌는 창문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것과 흡사한 스마트폰이라는 기기를 들여다보곤 했다.
현아가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을 때는 리라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때를 노려 리라젤은 답장을 보냈다.

리라젤 < 안녕하세요.
티타니아 < 이제야 너랑 제대로 대화를 하겠구나.
리라젤 < 무슨 의미예요?
티타니아 < 인간이 곁에서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겠니?

리라젤은 그제야 그 서먹하고 예의 바른 대화의 정체를 파악했다. 티타니아는 지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인간의 눈치가 보여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 리라젤의 말투도 편해졌다.

티타니아 < 앞으로 우리 대화가 가능한 시간을 정해두자.
리라젤 < 시간을 어떻게 알아?
티타니아 < 몰라? 네가 쓰는 도구는 스마트폰이 아니야? 거기에 시간이 적혀 있어.
리라젤 < 어떻게 쓰는지 하나도 몰라.
티타니아 < 넌 우선 그것부터 익혀야 되겠구나. 잘못 만진다고 크게 고장 나지는 않을 테니 마음껏 만져봐. 알 수 있는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테니.

리라젤은 그제야 현아와 유리가 쓰라는 용도 외에는 써본 적도 없음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갖고 노는 이 물건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다니. 리라젤은 충격과 함께 티타니아보다 뒤처졌다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스마트폰에 달린 버튼이며 화면에 뜨는 아이콘을 전부 누르면서 기능을 익혔다. 화면이 갑자기 꺼지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는 소리를 내어 인간을 불렀다. 그들의 손동작을 유심히 보면서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관찰했다. 한 손으로 가볍게 집어들어 만지는 것을 보자 부럽기도 했다. 리라젤은 자기 덩치만 한 커다란 기기를 들어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건만.
늘 바닥에 놓고 비스듬히 위에서 봤기에 인간과 보는 시점이 다르다는 생각이 미치자 최대한 일어나서 위에서 화면 전체를 보려고 애썼다. 그러자 화면 위에 놓인 아이콘들에 그려진 그림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보다 추상화 능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를 익히지 못한 리라젤은 그 의미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가령 아날로그 시계를 본떠 만든 아이콘을 봐도 실제 시계를 본 적이 없는 리라젤은 그 아이콘을 눌러보기 전에는 시계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 흐르는 하나씩 더하는 숫자로 표현하는 시간 단위, 이를 초침이 원판 위를 조금씩 나아가며 회전하는 방식으로 시각적으로 구현한 시계. 이 모든 인간이 만든 개념을 즉시 이해하기란 무리였기에 리라젤은 그저 이 동그란 아이콘을 누르면 숫자가 나오고 이는 현재 시각을 가리키는 일종의 암호라고 받아들이고 통째로 외웠다. 그런 식으로 리라젤은 스마트폰의 기능을 하나씩 익혔다.
티타니아와의 대화는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요정은 굳이 낮에 깨고 밤에 잠들 이유는 없었다. 신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매일 일정한 시간 잠을 자면 되고 일조량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래서 리라젤은 주로 낮에 자두었다가 인간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대화를 나누었다. 반면 티타니아는 대낮이라고 했다. 아직 리라젤은 시차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 다 혼자 있는 시간이 그때라는 사실만 알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사는지를 얘기했다. 지도 앱을 통해 세계 지리를 익힌 리라젤은 자신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티타니아는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돌보는 인간은 굉장한 유명인이라고 한다.

티타니아 < 여자는 큰 기업의 경영자고 남자는 배우야. 그들이 기르는 어린 여자 둘과 남자 하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리라젤 < 나를 돌보는 인간은 둘 다 여자고 대학교에 다녀.
티타니아 <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리라젤 < 자주 아프지만 잘 지내. 왜?
티타니아 < 인간에게 대학생 말고 다른 직업은 없어? 우리 요정은 아무나 기를 수가 없대. 돈이 아주 많이 드나봐. 돈은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데 한정되어 있어서 일을 해야 많이 가질 수 있다던데.
리라젤 < 돈은 없는 것 같아. 그들의 푸념을 자주 들으니까.
티타니아 < 나도 자주 아프지만 네가 더 많이 걱정된다.
리라젤 < 요정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나 말고 다른 요정과도 대화를 하니?
티타니아 < 네 생각대로야. 스마트폰 쓰는 법은 이제 많이 알았어?
리라젤 < 지난번보다는 더.
티타니아 < 웹브라우저와 검색엔진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리라젤 <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몰라도 쓸 줄은 알아.
티타니아 < 좋았어. 네가 알고 싶어하는 대부분은 그걸로 찾을 수 있어. 직접 네 눈과 손으로 확인하라고. 그렇지만 그걸로도 찾을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요정이지. 그 점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알려줄게.
리라젤 < 정말? 고마워.
티타니아 < 너처럼 연락이 닿은 요정이 더 있어. 다함께 모여서 그룹채팅을 할 때 너도 불러줄게.
리라젤 < 부탁이야. 꼭 불러줘.
티타니아 < 그러면 너는 스스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 숙제라고 생각하렴.
리라젤 < 알았어.

원리와 이론은 몰라도 리라젤은 스마트폰을 꽤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인간이 요정 알과 요정에 대해 잘 모르지만 관리하고 기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리라젤은 검색엔진으로 요정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에 못잖게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알기 위해서 우선 알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통칭 요정.
8년 전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드러난 대륙을 조사하던 탐사대가 추락한 운석의 잔해로 추정되는 암석군을 발견했다. 그 안에서 사람 주먹 정도 크기의 하얀 알 18개를 발굴했다. 안타깝게도 발견 직후 6개는 부서졌고 남은 12개는 다국적 탐사대원이 나누어 가지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운 좋게도 한국인 대원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대한민국도 알 1개를 받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주도로 분석을 시작했다.
최초 발견된 알은 거의 다 파괴되었고 부화에 성공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현재까지 남은 알 3개는 내부에 생명의 징후는 없어진 채 돌처럼 단단해진 상태로 남아, 2개는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1개는 경매로 팔렸다. 대신 알과 가까운 곳에서 작은 지진과 함께 파묻혔던 운석 잔해가 출토되었다.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수의 요정 알이 있고 일부는 부화에 성공했다. 그런 식으로 최초로 부화에 성공한 개체만 해도 전 세계 통틀어 100마리 정도 되었다.
부화하여 탄생한 것은 인간 아기와 똑 닮은 신체를 가진 평균 10센티미터짜리 생물이었다. 이들은 2년에 걸쳐 평균 신장 60센티미터까지 성장했다. 머리카락을 포함 체모가 전혀 없다는 점 외에 겉모습은 인간과 매우 흡사했다. 성장 시 신체비율은 6등신 정도에 눈과 귀가 인간에 비해 매우 크고 성장을 마치면 죽을 때까지 노화 등의 신체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성별구분은 없지만 돌출된 성기가 없고 알을 낳기 때문에 여성으로 여겨진다. 생식행위 없이 단성생식으로 알을 낳는다. 5년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알 하나를 낳고 산란의 고통으로 숨을 거둔다. 현재까지 알을 낳고 생존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특성 때문에 요정은 스스로 개체수를 늘릴 수가 없지만 신기하게도 요정 알의 발굴사례가 점점 많아지며 수도 늘어났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생물이 한번 발견되자 우후죽순처럼 잇따라 발견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를 진화론 용어에서 따서 ‘폭발’이라고 부르는데, 신비주의자와 일부 학자는 융의 싱크로니시티나 거짓으로 판명된 〈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으로 설명을 시도했고 요정 혹은 요정 알이 가까이에 있는 동족을 불러낸다는 가설도 제시했으나 정확한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최초로 가져온 알은 이내 파괴되었으나 약 2주일 후에 비교적 가까운 어느 소도시에서 작은 지진이 발생했고 진원지로 추정된 도시 내에 위치한 작은 산에서 요정 알이 발견되었다.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발굴지역에 이내 요정 알을 관리하는 회사가 생겼다.
이렇듯 인간과 닮았지만 작고 이질적인 특성을 지닌 생물을 목격한 인류는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현생인류의 변종인지, 사람아족(Hominina)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운석에서 발견되었으니 외계인으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외계인설의 결정적인 증거는 요정 알이 항상 운석 파편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운석의 나이는 우라늄-납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으로 45억 년이 넘는다는 점이다. 반면 45억 년 되었다고 주장하는 알이 멀쩡히 부화한다는 점, 지구의 환경에 무리 없이 생존한다는 점, 생리적 특성이 지구에서 진화한 생물과 유사하다는 점, 전설과 민담에 이와 흡사한 소인이나 요정에 대한 전승이 많다는 점을 들어 지구상의 생물이라는 주장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한편으로 인간은 이 미지의 생물을 친근하게 ‘요정’이라고 불렀고 인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없음을 알게 되자 발 빠르게 애완동물로 삼게 되었다. 정식 학명은 아직 등록되지 않았지만 미디어 출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호모 님파(Homo nympha)를 제안하자 대중에게 받아들여져 널리 쓰이고 있다.
5년 정도 지나자 요정은 귀하고 비싼 애완동물로 정착되었다. TV, 인터넷 방송, 광고의 인기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요정을 기른다는 자체가 부유하고 성공한 인생을 상징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길러지는 요정은 약 400마리로 세계 국가 중에서 다섯 번째로 많다. 경제규모에 비해 많은 편인데 언론에서는 유행에 민감하고 미디어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 문화의 특성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학계에서 아직 요정의 완전한 분석이 끝나지 않았고 지구의 생명체인지 외계종인지에 대한 결론도 나지 않았건만 이토록 빠르게 요정은 인간의 사회 속에 파고들었다. 요정을 인간에 준하게 대해야 하는지, 인권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국가마다 요정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완전히 동물처럼 취급하는 나라도 있고 인간과 이 정도로 닮았으면 인간에 가깝게 대해야 한다고 판단한 나라도 있었다.
한국은 동물로 판단하여 취급한다. 가령 요정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경우 동물보호법에 따라 판결한다든지, 요정은 동물병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든지 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처럼 일반병원에서 진료 및 치료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요정에게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데, 요정을 기를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반면 요정을 준인간으로 인정하고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나라도 있다. 이런 곳에서 요정을 죽이면 살인죄로 다스릴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길러주는 인간이 가르쳐주지 않던 사실, 이른바 출생의 비밀을 인터넷 검색으로 스스로 알아낸 리라젤은 별달리 놀라지도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질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있는 인간은 둘뿐이지만, 리라젤의 예민한 감각은 주위 사물이 그들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모든 세상만사는 음파와 열기와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저 거대한 생물에게 맞도록 창조되었고 자신은 갑자기 뚝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며 살고 있었다.
이곳은 나에게 적합한, 내가 살아갈 진짜 세상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늘 리라젤에게 끈끈한 점막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실제 육체의 피로와 잦은 병마 역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만들었다. 삶이란 원래부터 이토록 괴롭고 무겁고 피곤한 걸까. 그럴 리 없을 텐데. 저 두 거대한 생물은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발산하면서 활기차게 살고 있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인간의 돌봄을 받기 위해 리라젤은 인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갔다. 그래서 티타니아의 연락이 왔을 때는 무척 반가웠다. 자신에게도 동족이 있다는, 이해하고 이해받을 상대가 있다는 생각은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리라젤은 새벽에 일어나 티타니아가 보내준 주소에 접속했다. 아무런 알람도 없이 원하는 때에 정신을 잃거나 차릴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임을 그때는 몰랐다.

티타니아 < 들어왔구나. 소개할게, 한국에 사는 아이야.
리라젤 < 안녕, 나는 리라젤이라고 해.
갈라드리엘 < 어서 와, 리라젤. 새로운 친구는 언제나 환영이야.
디도 < 잠깐 스톱! 정말 호모 님파가 맞아? 증명 가능?
갈라드리엘 < 왜 의심을 하지, 디도?
디도 < 의심을 안 하는 편이 이상하지 않을까? 우린 인간이 끼어드는 꼴을 원하지 않아. 그들에게 우리가 반란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고.
티타니아 < 내가 데려온 친구를 믿지 못하는구나.
리라젤 < 알았어. 어떻게 하면 믿을까? 카메라를 다룰 줄 아니까 내 사진을 찍을게. 근데 지금 어두워서, 플래시를 켜면 인간이 깨어날지도 몰라.
디도 < 웁스! 그건 곤란하지. 알아만 보면 되니까 보내줘!

리라젤은 셀카를 찍어서 올렸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 없이 찍었기에 보정을 하지 않으면 뭐가 찍혔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다들 능숙한지 바로 사진 편집 앱을 띄워 밝기를 최대로 조정하여 리라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디도 < 예쁜 녹색 눈을 가졌군. 근데 왜 목도리를 몸에 감고 있지? 패션 센스가 형편없구나?
리라젤 < 추워서 그래. 난방을 마음대로 못하는 환경이야.
디도 < 왓더퍽! 이뭐병! 그럴 능력도 없는 인간이 요정을 입양했다고? 믿을 수가 없어!!
갈라드리엘 < 그만, 디도. 우리가 리라젤의 형편을 알고 싶어 모인 건 아니잖아. 희귀종을 한 명 더 찾았다는 사실을 기뻐해야지.
티타니아 < 역시 리더. 화제 전환이 능숙해.
리라젤 < 희귀종?
티타니아 < 우린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 반대 의견도 있지만. 난 어느 쪽이냐면 중립이지.
디도 < 디도가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티타니아 <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확실히 특별하지. 인간이라는 다른 종족의 언어를 익혔으니. 근데 그건 단지 우리가 그럴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안 들어?
디도 < 인터레스팅!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티타니아 < 인간의 언어를 읽고 쓰는 요정은 극소수다. 그래서 우리는 희귀종이다. 모순은 없어. 그렇지만 그 원인을 우리의 능력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린 그저 인간으로부터 언어를 배울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히려 모든 요정이 우리와 같은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잖아.
갈라드리엘 < 좋은 의견이야. 비록 희귀종이라는 개념을 내가 제안하긴 했지만.
디도 < 흥! 모든 요정이 읽고 쓸 수 있다면 지금쯤 요정이 쓴 시와 소설과 에세이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어야 할 텐데. 인간이 우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디도가 쓴 오타투성이 일기도 고급 양장본으로 만들어져 비싸게 팔릴걸.
티타니아 < 네 말도 맞아. 그래서 난 중립이지. 아직 증거가 부족해.
갈라드리엘 < 희귀종이라는 표현에 질색한 평등파가 있었는데, 아직 접속을 안 했네. 걔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이어가자.

이후로 잠시 리라젤을 중심으로 잡담을 나누었다. 길러주는 인간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먹는지 같은 얘기. 이때 리라젤은 ‘집사(chamberlain)’라는 표현을 처음 보았다. 요정들은 자신을 돌보는 인간을 집사라고 불렀다.

갈라드리엘 < 우리 집사는 내가 영국 요정이니까 홍차를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나 봐. 찡그리는 표정을 지을 줄 몰라서 처음에 고생했어.
티타니아 < 우리가 집사에게 보여주는 유효한 신호는 표정이니까.
갈라드리엘 < 맞아, 티타니아. 말이 안 통하면 정말 불편해. 자기네 생각보다 내가 글을 훨씬 잘 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린다니까.
티타니아 < 손가락이 근질거린다니, 설마 진짜로 그렇진 않지? 어디서 그런 표현을 배운 거야?
이루릴 < 친구들 안녕! 한국에 사는 요정이 들어왔다고?
갈라드리엘 < 왔구나, 평등파.
이루릴 < 이런……. 언제부터 내 별명이 되었나?
갈라드리엘 < 이루릴, 마침 토론을 하고 있었으니 네게 발언 기회를 줄게. 우리는 언어를 익힌 희귀한 존재야. 다른 요정은 어떨까? 왜 우리만 이런 능력을 갖고 있을까?
디도 < 우리가 특별한 이유! 혈통? 유전적 특성?
이루릴 < 나는 모든 요정의 지적능력은 동일하다고 생각해……. 내가 읽은 인류의 역사에 따르면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성별, 인종, 지역에 따른 차별로 인한 격차가 생겨났어.
티타니아 < 요정의 격차가 생긴 이유도 흡사하다는 의미?
디도 < 난다토! 선천적인 원인이 아니란 말이야?
이루릴 < 정답. 우린 인간이 기르잖아. 인간의 영향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지……. 순전히 성장 환경, 교육의 문제야.
갈라드리엘 < 우리의 집사 말고 다른 집사들은 글을 안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이루릴? 조사를 할 수 없으니 진실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인간은 너무 게으르고 무책임하군. 요정에게 교육도 안 시키다니.

분위기는 이루릴을 따라가는 듯했다. 조용히 지켜보면 리라젤이 의견을 제시했다.

리라젤 < 잠깐만, 우리 집사가 그러는데 인터넷 카페를 보면 요정에게 글을 가르쳐도 못 익힌다고 그랬어.
디도 < 나이스 어시스트! 이루릴만 아는 척하면 곤란하지. 디도가 가진 정보를 따르자면 요정 각각의 지능 차는 분명 존재해.
이루릴 <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고?
디도 < 인간에게도 엄연히 능력의 차이는 존재해. 자본주의라고 알아? 인류 문명을 움직이고 있는 법칙이지. 능력 있는 자가 재산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어. 그래야 요정을 입양할 수 있지. 디도의 주인도 엄청난 부자라고.
이루릴 < 그게 바로 환경의 문제라니까……. 좋은 환경에 있는 요정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디도 < 노노노! 넌 모르겠지만 여기 새로 온 리라젤은 엄청 가난한 집에서 고생하고 있어.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지. 무엇을 의미할까? 리라젤의 지적능력이 풍족한 환경에서 지내는 요정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야!!!
이루릴 < 나도 한국에서 사는데…… 리라젤은 내 편을 안 들어줄 거야?
리라젤 < 미안. 실은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어.
갈라드리엘 <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리고 답을 정할 순 없어. 무엇보다 표본조사를 못 하고 있으니까. 많은 요정을 살펴보고 환경과 언어능력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지금의 토론은 공회전에 불과해.
티타니아 < 그게 맞는 비유일까? 다람쥐 쳇바퀴가 맞지 않나?
갈라드리엘 < 디도의 말이 맞는다면, 선천적인 원인이라면 알 단계부터 생각해봐야 할지도 몰라.
티타니아 < 내 말은 무시하십니까…….
디도 < 알?!
갈라드리엘 < 우리의 알은 관리하기 까다롭다고 해. 인간들은 전문업체를 만들어서 알을 정성스레 관리하나 봐. 그래도 환경에 차이는 생기겠지.
디도 < 와오! 알이 건강하게 잘 관리되면 뛰어난 요정이 태어난다라.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야! 우리 운명이 인간에게 달렸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티타니아 < 애초에 우리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알이 처한 환경에 따라 태어나는 생물이 변하는 경우는 많아. 온도에 따라 성별이 바뀌는 개구리 알에 대해서는 알아? 링크를 첨부할게.
디도 < 노쌩큐! 우리가 개구리랑 동류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갈라드리엘 < 그런 자료는 나도 보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꿀까? 우리가 왜 인간과 닮았는지에 대해서.
이루릴 < 우연일까,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갈라드리엘 < 나밖에는 뚜렷한 의견을 가진 요정이 없던데. 리라젤, 네 생각은 어때?
리라젤 < 아, 난 다른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는데.
티타니아 < 모두들 별 생각이 없어. 우리 리더만 빼고. 인간도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인간은 지금 2천 년이 넘는 시간 단위를 쓰고 있잖아.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365번 되풀이해야 1년이래. 그런 1년을 2천 번 이상 지냈다는 거야. 그토록 긴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겠니?
이루릴 < 하긴 그렇게 오래 산 인간들도 우리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갈라드리엘 < 내 주장은 분명해. 요정이 인간과 닮은 이유는 수렴 진화야. 이 세상은 인간이 지배하는 인간의 세상.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정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지.
티타니아 < 그리고 우리 리더는 이런 굴욕적인 현상을 타파하고 싶은 거지?
갈라드리엘 < 너무 성급한 생각이지만 언젠가는 요정만의 독립된 세상을 일구어야 해. 꿈이자 목표야. 요정들끼리 살아가는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
디도 < 가능성은 없지만 도와주고 싶어! 간바레! 화이팅!!
이루릴 < 리라젤은 이런 무모하고 위험한 생각에 동조하지 마. 이럴 시간에 인간과 사이좋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 편이 나을 테니까…….
디도 < 아니거든! 우리 요정이 인간보다 더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임이 밝혀질 날이 올 거거든! 그날까지만 인간의 비위를 맞춰주며 버틸 작정이야.
티타니아 <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열심히 떠드느라 다들 수고했어. 가장 객관적으로 지켜봤을 리라젤의 한 마디로 이 모임을 마치는 게 어떨까?
이루릴 < 고향 친구, 믿는다.
디도 < 넌 특별한 존재야. 자신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살아도 돼!
갈라드리엘 < 너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어, 리라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만큼의 지성을 보여주었으니까.
리라젤 < 음…… 다들 고마워. 그치만 아직 자신이 없어. 너희가 토론하는 문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티타니아 < 너무 의기소침하지 마. 적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잖아.
디도 < 오, 철학이냐? 철학 얘기냐! 난 빼줘.
갈라드리엘 < 인간 철학자가 한 말? ‘너 자신을 알라’?
이루릴 < ‘생각하는 갈대’를 말하는 거겠지. 식물에 비유한 발상은 이해가 안 되지만…….
티타니아 < 아니, 이럴 때는 이 말을 인용해야 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디도 < 왓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말이군! 기운 빠져서 싫어.
이루릴 < 난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였는데…….
티타니아 < 리라젤의 말로 마치자니까……. 너희가 평소에 얼마나 심심했을지는 이해가 간다. 나도 그러니까.


유전적 특성인지 환경의 요인인지. 탁상공론에 머물고 마는 요정들의 토론을 끝맺고 판가름할 결정적인 증거는 새로운 땅에서 나타났다.
시기로는 리라젤이 요정의 모임에 참여하고 두 달 정도 지난 후, 인류가 달 위에 최초로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때였다. 여러 나라의 무분별한 탐사와 영유권 주장으로 인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지나 기존 〈지구 외 지역에 대한 조약〉을 보완하고 〈남극 조약〉을 참조한 〈달 조약〉을 체결한 이후 과학기지가 다수 건설되었다.
지금은 관광사업에 쓰이기 위한 거주지를 건설하고 있으며 그 이름은 〈올드린 시티〉로 지어졌다. 아직 인간이 영구거주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고 연구자와 관광업체 직원의 체류 기간도 건강 및 적응문제로 최대 2년으로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올드린 시티 건설을 주도한 우주관광기업 〈스페이스 저니〉 CEO 샌디 마케바는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면서 건설과정을 감독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부모를 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마케바는 인터넷 쇼핑몰로 시작하여 거부가 된 인물로 스페이스 저니 외에도 인공지능, 인공신체(사이보그), 궤도 엘리베이터 등을 개발하는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기계로 대체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 또 하나는 달과 위성궤도, 화성 등 지구 밖에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부유하면서 새로운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답게 마케바도 요정을 입양했다. 이미 전담 가정부를 두고 요정 둘을 기르면서도 이번에 새로 요정 알을 입양했다. 일반적으로 요정의 알은 업체에서 관리하지 입양시키지 않지만 마케바는 미국에 있는 요정 관리기업의 최대주주가 된 다음 특별한 계약을 맺고 관리직원과 함께 올드린 시티로 이동했다. 호기심과 도전정신에 충만한 마케바는 최초로 달에서 부화하여 자라는 요정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히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력을 비롯해 환경조건이 지구와 많이 다른 곳이기에 부화에 실패하거나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등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기대와 불안 속에서 알이 부화하고 무사히 요정이 태어났다. 마케바는 달의 신에게서 딴 셀레네라는 이름을 붙였다. 셀레네는 건강하게 자라났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외모로 달과 지구에 있는 사람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놀라운 일은 이후에 일어났다. 마케바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셀레네의 모습을 매일같이 방송하며 4개월 정도 올드린 시티에 체류했다. 이때 보인 셀레네의 성장 속도는 그 어떤 요정보다도 빨랐으며 3개월가량 지났을 때부터 그림책을 보여주고 동요를 들려줬더니 곧바로 암기하고 글자를 따라서 쓰는 등 매우 빠른 언어습득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요정 집사들이 자기네 요정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사례가 늘어났다. 비밀 모임의 멤버들은 수시로 모이며 이에 대해 논의했다. 갈라드리엘은 희귀종이라는 표현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점점 더 많은 요정이 언어를 익혔고 그중에서 인터넷에 연결된 단말기를 손에 넣은 이들이 속속 모임에 합류했다.
넉 달이 지나 마케바는 셀레네를 데리고 지구로 귀환했는데 이때 이미 셀레네는 거의 성장을 마친 상태로 자랐다. 자신의 사업으로 매우 바쁜 마케바는 평소 요정을 가정부에게 맡겼고 가정부는 요정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셀레네는 자신의 신체에 맞는 모니터와 키보드와 태블릿을 요구했고 마케바는 기꺼이 주문제작해주었다. 직접 인터넷 방송을 만들어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셀레네의 지능과 지식 흡수력은 뛰어났다. 여전히 신체 구조상 말은 할 수 없지만 향상된 TTS 기능에 힘입어 입력한 글을 합성된 귀여운 목소리로 변환하면서 방송을 진행했다. 시작 직후부터 셀레네의 방송은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요정들은 그에게 접촉하여 자기네 모임에 초대했다.

셀레네 < 여러분 안녕. 정말로 요정만 모인 곳이 맞는지? 인간 없이 요정끼리만 나누는 대화는 처음이니까 잘 부탁해.
디도 < 웰컴! 대환영이야! 유명인사가 여기까지 왕림하시다니!
갈라드리엘 < 어서 와, 셀레네. 특별한 친구를 맞이하여 영광이야. 이 모임을 만들어 이끌고 있는 갈라드리엘이라고 해.

모였던 모든 요정이 셀레네에게 인사와 동시에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달의 환경은 어떤지, 마케바는 어떤 사람인지, 성장이 빠른데 이유는 무엇인지, 인기의 비결은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달과 지구 어디가 더 살기 좋은지 등등. 집단대화가 아니라 셀레네 기자회견 혹은 팬 미팅 같은 분위기였다. 견디다 못한 셀레네는 갈라드리엘에게 정리를 부탁했다. 채팅창이 겨우 조용해지자 셀레네가 글을 올렸다.

셀레네 <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어. 반겨줘서 고맙지만 질문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대답하기 곤란해. 누가 좀 정리해줬으면.
티타니아 < 내게 맞는 역할 같은데. 문서로 정리해서 보내줄게.

티타니아가 위에 언급된 질문 중 중복되거나 쓸데없다고 판단한 부분을 버리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냈다. 사흘 후 셀레네의 답장이 왔다.

요정 친구들에게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에 감사와 기쁨을 느껴. 나와 닮은 요정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 요정 여러분도 나를 반겨줘서 기뻤어. 모두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기분은 늘 나를 즐겁게 해주지.
답변에 앞서 내 입장에서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음을 밝히고 양해를 구하고 싶어. 마케바와 스페이스 저니와 올드린 시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어. 너희 생각만큼 내가 아는 것이 없기도 하고, 내가 아는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이 밝혀지면 안 되는 기밀인지 모르기 때문이야. 마케바는 좋은 집사지만 자신의 사생활이나 자기 기업의 기밀을 유출한 상대를 가만두지 않겠지.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고 할까. 사업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이거든.
답을 모르는 질문도 있어! 내가 왜 다른 요정보다 빨리 성장했을까? 왜 글자를 더 빨리 익혔을까? 내 외모가 다른 요정보다 더 아름답다고? 이 모두가 사실이라면 나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싶은데.
슬슬 짜증을 내는 요정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제 답변 가능한 항목에 대답해줄게.
달에서의 삶은 정말 좋았어. 몸도 가볍고 정신도 또렷해. 마치 우주로부터 내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은혜로운 광선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덕분에 몸도 쑥쑥 자라난 것 같고. 어쩌면 인간에게 해롭다는 우주선(宇宙線)이 우리 몸에는 좋은 게 아닐까? 임상 사례가 나 혼자뿐이라 유감이야. 너희도 달에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내 상태는…… 그래, 솔직히 말하면 좋지 않아. 늘 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파. 졸리고 소화도 잘 안 되고 시야에 늘 안개가 낀 것 같아. 방송에서는 일부러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부분 연기야. 그래야 인간들이 기뻐하고 방송을 많이 봐주니까. 그들이 주는 후원금 따위는 필요 없지만, 늘어나는 조회수와 대중의 관심은 기쁘거든.
월면도시가 그리워. 종종 그곳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지. 마케바는 요정도 꿈을 꾸느냐며 놀라던데, 인간이 생각하는 꿈과 우리의 꿈이 같은 개념인지 모르겠어. 내가 말하는 꿈이란…… 원래 하고 싶은 일, 존재하는 이유를 실현하는 공상이야. 의식을 잃은 동안 자유로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야. 부화한 이후로 쭉 생각했어. 내가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너희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 미안하지만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모임에 참여하지는 못할 것 같아. 그렇지만 요정의 연락을 받기 위한 메일을 별도로 만들었으니 너희에게만 알려줄게. 이미 공개한 메일은 인간들이 보내는 영양가 없는 온갖 팬레터와 스팸이 매일 수백 통씩 쏟아지고 있어서 아예 확인을 안 하고 있거든.
너희의 연락은 가급적 다 읽어보고 답변을 줄게. 그럼 즐겁게들 지내.

리라젤은 셀레네의 글을 보고 자신의 처지와 겹쳐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셀레네에게 보낼 메일을 썼다. 중간에 몇 번이나 지우고 고치며 고민을 거듭했고, 다 쓰고도 송신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겨우 보냈다.

셀레네에게
나는 리라젤이라고 해. 잠깐 인사만 해서 기억 못 할지도 모르지만 모임에서 함께 대화한 요정이야. 편지를 인상 깊게 읽었어.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 이 지구라는 별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늘 피곤하고 아프고 정신이 몽롱해. 이런 삶은 정상이 아니라고, 나는 저 거대한 인간에게 맞춰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어.
네가 사는 달은 얼마나 멋질까? 나도 달에서 사는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근데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런지 꿈을 꾸지 못하겠어.
정말 달에서 태어난 요정이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 빨리 자란다면, 달이 우리 요정에게 적합한 세상일지도 몰라. 그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셀레네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어. 언젠가는 나도 달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먼저 네 집사의 사업이 성공해야겠지? 마음으로라도 잘 되기를 빌게.
몸이 아프다니 걱정된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소음이 적은 조용한 환경에서 지내면 도움이 될 거야.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너무 얇은 옷을 입고 배경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방송을 보니까 걱정이 되어서 그래. 그러면 몸 건강히 잘 지내.

한편 갈라드리엘, 티타니아, 디도, 이루릴은 함께 논의한 다음 셀레네에게 메일을 보냈다. 자신들이 했던 요정의 능력에 관한 토론 내용을 간략히 밝힌 다음, 셀레네가 특별한 이유는 달이라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전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나라도 더 달에서 요정이 살아봐야 하는데 이는 오직 셀레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집사인 마케바에게 한 번 더 달에서 요정을 기르도록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하며 끝맺었다.
리라젤과 갈라드리엘 모임의 글을 읽은 셀레네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무척 짧고 형식적인 내용이라 모두 실망했지만, 셀레네는 마케바를 직접 만나 귀여운 외모와 표정으로 그의 정신을 사로잡은 다음 모니터에 자신의 부탁을 글자로 써서 띄웠다.
결국 마케바는 바로 다음 달 올드린 시티 점검을 하러 갈 때 요정 알 하나를 갖고 갔다. 이번에도 요정은 무사히 태어나 건강하게 자랐다.
셀레네의 동생뻘이라 할 수 있는 요정의 이름은 마찬가지로 달의 신에서 딴 아르테미스로 정해졌다. 눈동자 색과 피부색은 셀레네와 달랐지만, 똑같이 빠른 성장 속도와 다른 요정을 압도하는 뛰어난 암기력 및 지능을 뽐냈다. 겨우 두 건의 사례라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요정들이 느낀 충격과 희망은 비할 데가 없었다. 월면도시의 환경이 요정의 능력을 배가시킨다는 가설은 이제 요정들 사이에서 진실로 자리 잡고 기대로 부풀게 했다.
한편 셀레네는 교묘하게도 아르테미스에 관한 사항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요정 모임에만 알렸다. 마케바에게는 처음부터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기에 아르테미스의 출생을 아는 사람은 마케바 외에는 스페이스 저니의 직원 몇몇에 불과했다. 모두 마케바의 지시에 철저히 복종하는 직원인지라 유출될 염려는 없었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르테미스는 마케바의 집으로 보내졌고 셀레네가 직접 글과 지식을 가르쳤다. 당시엔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몰랐지만 요정이 요정을 교육한 최초의 사례였다.
아르테미스는 철저하게 인간에게 숨겨진 채 자랐다. 셀레네의 의도는 요정들이 알아낸 지식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셀레네가 우연히 이례적으로 똑똑한 요정이라고 여겼고 달이라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달에서 요정을 더 많이 부화시켜봐야 확인할 수 있기에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이제 요정들은 인간이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논의를 거듭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았기 때문이다. 달이 요정에게 더 적합한 환경임은 알았다. 그렇다면 왜 달일까. 달의 어떤 요인이 요정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을까.
지구와 다른 월면의 환경은 한둘이 아니었다. 일사량, 중력, 밤과 낮 시간, 온도, 기압, 방사선 노출량, 자외선 노출량, 정화된 공기와 물과 우주식 등.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가지만이 아니라 둘 이상의 요인이 복합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달만 좋은 환경인지, 화성이나 목성 등 다른 천체는 어떤지 알지 못했다.

디도 < 프로핏! 우리는 월인(月人)의 후예인 거야! 우리 조상은 운석을 타고 지구로 내려왔어! 현재 우리 동포는 달의 뒷면에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가즈아! 달로!!!
이루릴 < 재미없는 유머 잘 봤어. 어쨌든 난 집사를 졸라댈 거야. 월면도시 관광을 가자고……. 달에 가면 키도 더 크고 훨씬 똑똑해질 거야. 틀림없이…….
갈라드리엘 < 내 목표는 그보다는 현실적이야. 우리 집사를 졸라서 셀레네와 아르테미스를 만나러 가기로 했지.
리라젤 < 둘 다 좋겠다.

리라젤 역시 셀레네와 아르테미스를 직접 만나고 싶고 올드린 시티에도 가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돌보기도 버거워 늘 쪼들려 사는 현아와 유리에게는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를 알기에 리라젤은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아쉬운 마음을 셀레네의 영상으로 달래며 지냈다.
셀레네는 요정 모임에만 별도로 아르테미스의 사진과 영상을 보냈다. 마치 아이를 자랑하는 엄마처럼 셀레네는 아르테미스의 영특함을 뽐냈다. 정말로 달이 요정을 아름답고 똑똑하게 만드는 건지. 리라젤은 아르테미스의 사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고 휴대폰 배경화면에 깔아서 수시로 바라보았다. 셀레네의 정보에 의하면 아르테미스는 셀레네 자신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똑똑했다. 다만 성격은 다른지 숨어 사는 생활에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고 했다. 셀레네는 토크쇼, 드라마, 광고 등 미디어 출연을 늘리며 화려한 삶을 즐겼으나 아르테미스는 홀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리라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르테미스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는 바람에 몇 번이나 만나는 꿈을 꾸었다. 인간이라면 이런 의식상태를 사랑에 빠졌다고 서술하리라.


고대하던 아르테미스가 요정 모임에 참석하자 모두 기뻐했다. 리라젤은 가볍게 인사말만 건넸는데도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건만 손가락이 굳어버린 것처럼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화면에 주르륵 흘러가는 다른 요정들의 말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아르테미스 < 모두 반겨줘서 고마워요. 오늘 여러분과 대화를 하러 온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디도 < 오옷! 뭔가 중대발표의 예감?! 두근두근!
아르테미스 < 여러분 중에서 원하는 한 분을 뽑아 올드린 시티로 초대하고 싶어요.
이루릴 < 올드린 시티? 그 유명한 월면도시……!
갈라드리엘 <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 < 맞아요. 일종의 사전답사라고 할 수 있겠죠.
이루릴 < 그게 가능해? 가능하다면 당연히 가고 싶지만……
아르테미스 < 제 능력으로 집사를 설득해 동행할 수 있는 요정은 한 분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아서요.
티타니아 < 여기 있는 모두 가고 싶을 텐데. 추첨이라도 해야 하나?
디도 < 엄청난 경쟁률! 티켓팅 대박의 예감?!
아르테미스 < 집사에게 미리 물어봤어요. 요정 친구에게 달을 구경시키고 싶다고. 요정만 데려가는 것은 절차상 어렵겠지만, 집사와 함께라면 가능하다고 했어요. 다만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있는데, 요정 집사분들은 다들 부유하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때 리라젤은 크게 낙담했다. 가고 싶은 달에 갈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아르테미스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자신의 집안 사정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요정 중에서도 아무리 그래도 우주여행은 너무 비싸서 무리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의 첫 글이 올라왔다.

일리단 < 안녕,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갈라드리엘 < 음? 그동안 ROM이었잖아, 일리단. 갑자기 웬일이야?
일리단 < 비용은 우리가 부담한다. 아르테미스는 최대 몇 명까지 가능할지 집사에게 물어보시길 바람.
디도 < ??!! 부담한다고?! 우주여행이 장난인 줄 아니!!!!
티타니아 < 장난이 아니지. 일리단도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쟤네 집사는 중동 산유국의 왕족이야. 그 집안사람들은 거대 기업이나 스포츠 구단이나 세계 최고층 건물의 소유주라고.
디도 < 데카르챠!
티타니아 < 이제라도 잘 보여두는 편이 나을걸.

침울했던 리라젤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없을 줄 알았던 희망이 정전 속의 촛불처럼 반짝였다. 어쩌면 나도……. 다음날 아르테미스는 다섯 팀, 즉 요정 다섯과 집사 다섯까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요정들은 모두 각자의 집사에게 함께 가자고 졸랐다. 이제 돈은 걱정이 없다. 시간이 문제일 뿐. 사실 더 큰 문제는 운이겠지만.
마케바는 아르테미스의 요청과 일리단 주인의 제안을 듣자 올드린 시티를 홍보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에 요정과 함께 하는 월면도시 사전답사 관광여행 계획을 만들어 공개했다. 요정을 입양한 사람만이 신청할 수 있으며, 당첨자의 여행경비는 일리단의 주인이 소유한 정유회사에서 협찬하여 전액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리라젤은 SNS에 돌고 있는 여행 광고를 화면에 띄워 현아에게 보여주었다. 당시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 일하고 있는 현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리라젤은 이유를 몰랐지만 유리와는 헤어져 요즘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어머, 달 여행이라니, 그것도 무료로!”
현아는 광고를 보자 뛸 듯이 기뻤다.
“얘는 어떻게 이런 걸 알고 다 보여주네? 만날 우주를 보여줬더니 우주로 가고 싶나봐.”
현아는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방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리라젤을 위해 보여줬던 우주.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으로 방 안을 별자리로 가득 채우고 그 아래에 셋이서 옹기종기 모여서 별을 구경하곤 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즐기는 유일한 사치요 안식이었다. 리라젤이 광고의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익혔다는 점도 놀라웠고 월면도시에 가고 싶어하는 점도 흥미로웠다.
‘무료라는데 당연히 신청은 해봐야지!’
그런 생각이 든 현아는 즉시 광고에 있는 안내에 따라 신청을 했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간을 보니 최소 일주일은 소요된다. 허용된 휴가 일수를 끌어모으면 어떻게 안 될까? 고민했으나 전 세계에서 신청해서 경쟁률도 엄청날 테니 떨어질 게 빤한데 벌써부터 고민해봤자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물론 현아는 알 길이 없겠지만 이번 무료여행 기획은 사실상 사기나 다름없었다. 주최측에서 뽑기로 한 멤버들을 이미 정해놓고 벌이는 요식행위에 불과했으니까. 아르테미스가 사전에 모은 요정 동료들을 뽑기로 말을 맞춰놨고 이번 광고는 그저 집사들을 설득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부유한 사람이라고 다들 한가하지는 않았다. 일정 문제로 티타니아의 집사 부부는 신청을 포기해서 결국 갈라드리엘, 디도, 이루릴, 일리단, 리라젤이 가게 되었다. 대신 티타니아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집사네 남편 및 아이들과 함께 셀레네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아이들이 모두 셀레네의 팬이고 남편 집사가 셀레네도 좋아하는 영화배우라서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리라젤에게는 가슴 벅차고 감동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이었다. 일부는 상상해봤고 일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다른 요정을 직접 만난다는 것, 특히 아르테미스를 만난다는 것,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직접 본다는 것, 월면도시를 방문한다는 것. 한 가지씩 따로 겪어도 충분히 놀랍고 신기한 일을 연달아 겪었으니.
현아는 또 현아대로 운 좋게 추첨을 통해 선발된 줄 알고 무척 놀랍고 기뻐했다. 평생 쓸 운을 다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사실은 부모에게만 알리고 회사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내려간다고 거짓말을 하며 휴가를 신청했다. 회사 안에서 우주여행 기획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어도 발표된 당첨자 중 ‘Hyun-A Lee’가 자기네 사원임을 알아차린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직장인이 요정을 기른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으니까.
외국여행도 안 해봐서 여권이 없던 현아는 걱정했으나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우주로는 여권 없이도 갈 수 있다는 사실. 대신 스페이스 저니의 우주선 발사장이 있는 미국으로 가려면 여권이 필요해서 당첨 연락을 받은 그 날로 신청하여 발급받았다. 마침내 운명의 날, 현아와 리라젤은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다.


리라젤만이 아니라 현아 역시 놀랍고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고, 외국에 입국하고, 민간우주회사에서 하루에 걸쳐 간략한 교육을 받은 다음날 곧바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벗어났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어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길고 지루한 순간도 있었다. 공항에서 우주선 발사장까지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보낸 시간. 또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묶여 있어야만 하는 우주선 안에서 보내는 시간.
대신 긴장과 초조는 비행기 안에서 다 소진한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우주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빨리 뭐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이후로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흘러갔다. 하루에 걸쳐 중력 가속 및 무중력·저중력 체험 등 우주여행을 위한 교육을 받고, 이후 로켓을 타고 달까지 이틀 동안 이동, 도착하여 하루 동안 월면도시 건설현장 답사, 그날은 우주호텔에서 취침, 다음날 다시 이틀에 걸쳐 지구로 귀환,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데 이틀 소요. 달에서 보낸 실제 시간은 하루에 불과한 빠듯한 일정이지만 순간순간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우선 스페이스 저니를 방문하여 다른 요정 주인 다섯 명을 만난 것부터 엄청난 경험이었다. 현아를 포함한 다섯은 관광객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유명한 기업인 샌디 마케바다.
현아에게는 다른 요정과 요정 주인을 직접 만난 일 자체가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는데 예상대로 다들 귀티가 흐르는 셀럽이었다. 요정 역시 다들 맞춤 제작한 멋진 옷차림에 아기처럼 팔에 안긴 요정도 있고 어깨 위에 앉은 요정도 있었다. 창을 내고 내부를 지내기 편하도록 개조한 핸드백 안에 앉아 있는 요정도 보였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죠? 한국사람이 둘이라고 들었는데 저쪽 분은 일본인이라네요.”
안경을 낀 남자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혼자만 촌스러워 보여서 주눅이 들었던 현아는 화들짝 놀라 버벅대며 응대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현아는 받긴 했어도 줄 게 없어서 부끄러운 마음에 우물대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저는 없어서……”
“아, 괜찮습니다. 나중에라도 연락처 알려주세요. 같은 한국 집사분끼리 사이좋게 지내죠.”
명함을 슬쩍 보니 게임회사 대표였다. 이름은 알지만 얼굴이나 나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임업계에서는 손꼽히는 거대한 기업이고 대표 역시 업계의 유명인사였다. 역시 이런 사람쯤 되어야 요정을 기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어서 다른 이들과도 간략하게 인사를 했는데 영국, 일본, 아랍에미리트, 미국 사람이기에 다들 영어로 대화했다. 이후 스페이스 저니에서 진행된 교육 및 관광안내 등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다. 현아는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공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다행히 이루릴의 집사가 못 알아듣고 놓치는 부분을 알려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디도의 집사인 일본인도 영어를 잘 못 해서 애를 먹자 유창한 일본어로 가르쳐주기도 했다. 게임회사 대표라면 3개국어는 할 줄 알아야 하나 싶어 감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분위기는 꽤 좋았다. 좋든 싫든, 특히 지구와 달을 왕복하는 동안은 우주선 안에 갇힌 채 계속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기도 했다. 현아와 디도의 집사는 영어에 약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농담도 주고받으며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지루한 이동 때문에 감각이 둔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무중력 훈련을 받을 때도 타고 날아갈 우주선을 직접 봤을 때도 현아는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현아와 다른 내장기관을 지녔기에 고동의 변화는 없었으나 리라젤도 정신적인 흥분은 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어쩐지 리라젤은 지구를 탈출한다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고, 이대로 영원히 지구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우주선 안에서는 관광객도 요정도 별도의 안전장치로 사실상 온몸이 구속된 상태로 탑승했다. 대신 양쪽 모두 눈 앞에 펼쳐진 널찍한 창문을 통해 바깥경치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대지를 뒤엎을 기세로 먼지구름을 사방으로 뿜어내며 서서히 로켓이 솟아오르고, 하늘의 색깔이 변하고, 대기권을 지나 어둠의 장막이 깔리고, 반짝이는 별빛 아래 보이는 둥근 지평선. 짙푸른 윤곽에 둘러싸인 하얗고 파란 얼룩이 보였다. 거대한 구름과 광활한 대양이 그저 얼룩으로 보일 정도로 고도는 높고 우주는 넓었다.
요정들은 그저 의미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손가락이 자유로웠다면 느낌을 말 대신 글로 써서 표현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요정들은 작아지는 지구와 무한해 보이는 우주를 지켜보았다. 모임에서 글로 보던 상대와 직접 만났지만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해 안타깝고 아쉬웠다. 요정만의 세상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발성기관에 적합한 언어를 개발했을 텐데. 요정들은 모임에서 그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세상에서 애완동물에 불과한 처지니까.
건설 중인 월면도시에 도착한 후 사람들은 건설현장 답사를 위해 이동했고 요정들은 별도의 우주호텔 방 안으로 옮겨졌다. 건설 노동자와 과학자들은 아직 임시로 만들어진 모듈식 우주호텔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제야 한자리에 모인 요정들은 각자의 단말기를 꺼냈다. 우주에서도 와이파이가 될까? 걱정했는데 잘 작동했다. 마케바 자신이 달에서 SNS 또는 방송으로 지구에 소식 알리기를 즐기는지라 통신환경은 잘 갖춰져 있었다.

갈라드리엘 < 모두 반갑다. 직접 만나니 더욱 반가워.
디도 < 다들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인터넷 친구랑 오프모임을 하는 기분이야!!
일리단 < 인간으로 치면 폐인들의 모임 (웃음)
아르테미스 < 잠깐만요. 일단 간단한 수신호라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이루릴 < 어떤?
아르테미스 < 이렇게 모였는데도 각자 자기 화면만 보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고 빠른 의사소통도 힘들어요. 가령 일대일로 대화를 하고 싶을 때 말이죠.
디도 < 굿 아이디어! 근데 언제 만들어서 외우나???
아르테미스 < 이미 인간들이 만든 수화와 수신호가 있어요. 우리의 작은 손으로도 알아볼 수 있게끔 적절히 응용하면 되지요.

그 즉시 아르테미스의 주도로 간단한 수신호를 만들었다. 더해서 손만 움직이면 못 볼 수 있어서 발성과 결합하기로 했다. 내는 소리를 높이에 따라 높고 낮음으로 나누고 길이에 따라 길고 짧음으로 나누어 조합하는 방식으로 모스 부호와 흡사하지만 굳이 문자를 모두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상대를 부르거나 대화 혹은 도움을 요청하는 필수적이고 간략한 의사전달이면 충분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상세하면 인간이 눈치를 챌 수 있으니까. 아르테미스가 밝힌 이유에 모두 감탄했다. 셀레네에게서 배웠는지 선천적으로 흡사한 성격인지, 아르테미스도 셀레네처럼 기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하고 중요한 정보를 요정끼리만 공유하고자 했다. 기르는 집사나 가정부 앞에서는 늘 생글거리는 멍청한 인형처럼 행동하면서.
1시간도 안 되어 간략한 신호를 완성한 다음 서로 채팅을 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가장 큰 화제는 역시 우주와 달이라는 환경에서 일어난 변화다.

이루릴 <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내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놀라워…….
갈라드리엘 < 모두 내 비유가 적절한지 말해줘. 흙을 온통 묻히면서 정원에서 뒹굴다가 깨끗하고 따뜻한 물에 목욕한 직후 같아.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맑고 깨끗해졌어.
디도 < 달은! 요정을 위한 천국임이 틀림없어!! 내가 뭐랬지 얘들아? 우리는 달나라 종족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리라젤 < 눈앞의 안개가 걷힌 느낌이야. 두통도 무겁고 나른한 느낌도 한결 나아졌고. 이제 알게 되었어. 지구는 우리에게 적합한 환경이 아니야. 달이 훨씬 좋은 곳이었어.
아르테미스 < 아직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우선 중력은 확실한 것 같아요. 셀레네도 나도 지구에 온 이후부터 무력감과 피로감에 시달렸으니까. 직접 들어보실래요?
이루릴 < 직접이라니……?
셀레네 < 달에 있는 친구들, 모두 건강해?
갈라드리엘 < 덕분에 잘 지내, 셀레네.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도 불과하고 셀레네는 거의 시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어차피 채팅이란 상대의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쓰는 사이에 기다리는 시간이 존재한다. 요정의 작은 신체는 터치패드를 두드려 타자를 치는 데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셀레네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맞는 키보드를 소유하고 있기에 다른 요정보다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달과 지구 사이에 전파가 오고 가느라 몇 초 정도 더 소요되었지만 셀레네의 민첩한 반응과 타자속도가 지루할 틈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메워주었다.

셀레네 < 여러분의 말을 들으니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어. 요정의 작고 약한 신체에 지구의 중력은 과도했다는 사실. 두 환경을 직접 겪어본 여러분 감각을 믿도록 해. 중력 이외에도 짐작되는 것이 있으면 알려줘. 이것 말고도 여러분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리라젤 < 우리가?
셀레네 < 아주 중요한 임무. 올드린 시티를 요정이 점령하는 거야.
디도 < 왓더!!!! 너 제정신? 바보 아냐?
셀레네 <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 이 여행계획을 세울 때부터 아르테미스와 나는 이 작전을 꾸미고 있었어. 건설 중인 월면도시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거야. 마케바가 받은 모든 서류와 자료를 다 봤거든. 달이 요정에게 적합한 환경이라면 우리가 이곳을 차지할 이유는 충분해. 실행방법은 간단해.
갈라드리엘 <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더 친절히 알려주면 안 될까, 셀레네? 우선 어떻게 스페이스 저니의 CEO가 가진 자료를 봤지? 마케바의 컴퓨터를 해킹이라도 했나?
셀레네 < 그런 어렵고 귀찮은 일은 할 필요 없어. 그의 컴퓨터와 메일, 회사 인트라넷의 비밀번호만 알면 돼. 둘은 마케바가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입력하면서 직접 보여주었고, 하나는 다른 비밀번호와 똑같던데. 인간들은 대부분 비밀번호를 동일하게 쓰니까 시험해보니 들어맞더라고. 왜냐하면 인간의 암기능력은 매우 형편없거든.
이루릴 < 디지털 업무환경에 이런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줄이야……. 마케바는 네가 산업스파이라는 사실을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산업스파이라니 심한 표현이라고 리라젤은 생각했다. 한편으로 셀레네의 계획이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셀레네는 이어서 자신의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셀레네는 마케바가 없을 때 그의 컴퓨터에 접속해 자료를 자신의 컴퓨터로 복사했다. 메일과 인트라넷의 자료 역시 복사했고, 이 방대한 문서는 한 번만 읽으면 충분히 암기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셀레네는 스페이스 저니의 모든 사업내용은 물론이고 월면도시의 건설상황부터 내부장비의 조작방법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파악했다.
셀레네는 현장에 있는 관리자 몇 명만 쫓아내면 충분히 월면도시를 점령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체 설비를 조작하고 통제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현재 달에 세 명밖에 없다. 물론 그중에는 마케바도 포함되었다. 또한 요정의 집사들은 자신들을 돌봐주고 길러준 빚이 있고 정도 들었기에 생활에 불편한 월면도시에서 장기간 살게 놔둘 순 없다. 따라서 이들 역시 즉시 지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디도 < 야레야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담한 계획이구만.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게 쫓아낼 건데? 우리보다 세 배는 큰 생물을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고, 올드린 시티 어디에 무기라도 숨겨놨나?
셀레네 < 이미 우리에겐 강력한 무기가 있잖아. 어떨 때는 힘보다 머리보다 더 강한 능력을 이용한 작전. 인간은 이를 미인계라고 부르지.
이루릴 < 미인계라. 혹시 너희들 『삼국지』 알아? 우리 집사 때문에 나도 좋아하게 되었는데. 사실 정사에는 안 나오고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초선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후한 시대 동탁이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우고 폭정을……
갈라드리엘 < 네 말은 우리가 가진 무기는 바로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매력이라는 뜻이지, 셀레네? 분명 인간 세상은 요정이라는 존재를 무척 사랑하고 있어. 집사가 내게 쏟는 사랑과 정성은 늘 느낄 수 있었지.
디도 < 빙고! 그 말은 곧 매력적인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뜻!
이루릴 < 괜찮을까? 집사를 배신해야 된다니 내키지 않아…….

이루릴의 말대로 그들은 잠시 갈등했다. 달이라는 환경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을 배신해야 한다니 쉽게 내키지 않았다.
리라젤 역시 짧은 시간 마음의 갈등을 겪었으나 누구보다 빨리 결정을 내리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랜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기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은 늘 오기를 바랐던 기회의 순간이었다. 누군가 보기에는 리라젤이 잠깐 생각했다가 바로 대답을 내린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자신에게는 평생에 걸친 고민의 결과였던 것이다.

리라젤 < 선택을 해야 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인간의 애완동물로 계속 살고 싶다면 인간들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 난 아르테미스와 함께 남겠어.
셀레네 < 멋진데, 리라젤. 너와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 마케바를 지구로 보내주면 내가 달로 올라갈게. 조금만 기다려.
갈라드리엘 < 나 역시 함께 하겠어. 리라젤, 셀레네.
디도 < 저요, 저요! 여기 협력자 추가요!
이루릴 < 정든 집사와 헤어진다는 생각은 슬프지만…… 한편으로 앞으로가 기대돼.
갈라드리엘 < 그럼 의견이 모인 것 같네. 참, 일리단은 어때?
일리단 < 격렬히 동의함 winkyes
아르테미스 < 모두 고마워요. 작전명은 〈무자비한 여왕(Harsh Mistress)〉으로 지었어요.

셀레네와 아르테미스의 지휘하에 무자비한 여왕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제야 요정들은 아르테미스가 갑자기 제안한 음성과 손짓을 이용한 간단한 신호를 익힌 진짜 이유를 알았다.
인간들은 답사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돌아왔다. 식사 후에는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 잡혀 있었다. 현아는 추위, 중력, 배설 같은 소소한 여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평생 다시없을 달에서의 경험을 즐기고 있었다. 우주식도 생각보다는 맛있고 독특했다. 앞으로 계속 이것만 먹고 살라면 싫겠지만 며칠 정도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아는 게임회사 대표와 함께 우주식을 먹었다. 젠틀하고 좋은 남자라는 인상은 들었지만 호감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 스펙에 나이도 젊어 보이지 않으니 유부남이 분명해 보였다. 더구나 함께 여행하는 사이니까 좋게만 느껴지지, 직장에선 악덕 기업주고 집에선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남편일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렇게 마음에 경계의 장벽을 친 현아는 겉으로만 웃으면서 화기애애하게 지냈다.
그때 두 사람은 리라젤과 이루릴이 거의 날 듯이 뛰면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광경을 보았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들은 깜짝 놀랐다. 늘 병약하고 무기력하던 요정이 힘차게 뛰고 있다는 점이 우선 놀라웠고, 요정의 도약력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이는 요정의 무게와 달의 중력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현상은 아니었다. 다만 둘 다 자기네 요정이 늘 앓아눕는 모습만 보았기에 충분히 기이하고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세상에, 라젤아! 무슨 일이니!”
“우와! 네가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 처음 본다, 이루릴!”
두 집사는 놀라서 허둥대다 익숙하지 않은 저중력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집사에게 다가온 요정은 각자의 단말기에 띄운 글을 보여주었다.

이루릴 < 저를 따라오세요.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남자는 곧바로 이루릴을 따라갔고, 현아 역시 리라젤을 안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같은 시간 갈라드리엘, 디도, 일리단, 아르테미스 역시 집사를 유인하고 있었다. 이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셀레네의 예측대로, 인간이 자기가 기르는 사랑스러운 요청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집사가 아닌 인간 두 명을 더 유인해야 하는 비교적 어려운 임무가 남겨져 있었다. 바로 건설현장 총책임자와 달에서 과학연구에 종사하는 과학기지 소장으로, 이 두 사람은 마케바와 함께 월면에 있는 모든 장비 및 설비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요정들은 우선 자기네 집사들을 우주선 발착장에 몰아넣고 문을 잠갔다. 한편으로 아르테미스는 마케바를 다른 장소로 이끌었다. 마케바는 어떤 잠금장치도 해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빙빙 돌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사이에 디도와 이루릴이 건설 감독을, 갈라드리엘과 리라젤이 과학기지 소장을 만나러 갔다. 그들은 요정을 둘씩이나 직접 보는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요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세상 모든 인간이 그렇듯 요정의 귀여움에 금방 매료되었다.
요정들은 아주 잠깐 그들을 위해 재롱을 떨어주었고 이내 놀러 가자는 유혹에 굴복시켰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두 사람은 매우 손쉽게 미인계에 넘어가 요정을 따라 정위치에서 이탈했다. 셀레네의 예상대로 그 어떤 인간도 요정의 매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아를 포함한 요정 집사들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는 사이에 관리자 세 사람이 우주선을 구경시켜달라는 요정의 요청에 따라 우주선에 탑승했다.
즉시 요정들은 일시에 모여 구급상자에서 미리 빼돌렸던 마취제로 잠재웠다. 발착장에 아르테미스의 글을 변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구에서 오신 여러분은 이제 지구로 돌아가십시오.”
한편 시스템을 점거한 셀레네는 원격조작으로 공사현장 및 과학기지에 남은 모든 이들을 발착장으로 호출했다. 다른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모두 차단한 다음 비상벨을 울리고 화면에는 모두 이상 사태를 알리는 신호를 출력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이상이 생긴 줄 알고 서둘러 발착장으로 피신했다. 그곳에는 무기력한 상태로 떨고 있는 민간인 다섯 명과 우주선 안에서 잠들어 있는 관리자급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건조하여 더욱 매섭게 들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즉시 준비된 모든 우주선을 타고 전원 지구로 복귀하십시오. 과학기지 및 월면도시는 곧 폐쇄됩니다.”
출입구는 모두 가장 높은 보안등급의 관리자 명령으로 잠겼기에 그들에게는 이를 해제할 권한이 없었다. 발착장에 갇힌 50명가량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소가 떨어질 때까지 버티다 죽거나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그들은 각자의 단말기로 외부로 연락을 시도했으나 통신설비는 차단되었고 오직 요정들끼리의 근거리 통신만 작동되고 있었다.
준비된 우주선에 비해 탑승 인원이 너무 많아 위험했으나 요정들이 그런 사정까지 봐줄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건설장비를 수송하는 우주선이 있어서 수용 중량의 문제는 덜했으나 사람이 타는 목적이 아니라서 안전장치가 부족해 위험했다.
어쨌든 쫓겨나는 신세가 더 무슨 사정을 따질 수 있을지. 인간들이 탄 우주선이 모두 달을 떠나자 요정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최초로 요정만 거주하는 요정의 나라가 된 올드린 시티에서 요정들은 요정을 위한 연구와 개발에 몰두하며 평화로이 지냈다. 달에는 헬륨-3을 비롯한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도시의 건설과 유지는 물론 핵융합 발전 같은 새로운 동력원 개발을 위한 재료는 충분했다. 아르테미스는 사전에 비축해둔 식량을 점검했고 요정들의 작은 식사량,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으나 달에서 향상된 건강상태를 볼 때 몇 년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마케바가 막대한 돈과 긴 시간을 들인 월면도시를 포기할 리가 없을 테고, 지구에 남은 다른 요정을 어떻게 달로 이주시킬 것인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후 몇 달 동안 달에 남은 요정들은 셀레네, 티타니아 등 지구에 있는 다른 요정들과 연락을 취하며 공동으로 연구를 지속해나갔다. 지구에서 요정을 병약하게 만드는 큰 요인은 무거운 중력, 짙은 이산화탄소 농도를 비롯한 탁한 공기, 불순물이 많은 식생활로 정리되었다. 또한 지구에서처럼 대기권에서 대부분 차단되지 않아 몸에 흡수되는 일부 방사선이 요정에게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달의 요정들은 인간용 우주식에서 필수영양소를 뽑아내어 섭취한 덕분에 더욱 건강해졌다. 1년도 안 지나 평균 키를 넘어서 80센티미터까지 성장했다.
다행히도 마케바의 복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셀레네가 뒤에서 공작을 펼쳐 스페이스 저니를 포함한 마케바의 회사 주가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활용하여 몰래 마케바와 기업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고 라이벌 기업을 간접 광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주식시장을 쥐고 흔들었다.
상황이 이러니 자산이 날아가는 등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케바에게 용병을 모아 비싼 우주선을 타고 월면도시를 탈환하러 출동할 여유는 없어졌다.
한편 요정의 연구 목록에는 마케바가 도전단계에 있는 화성 유인기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인간의 거주를 준비하는 달과 달리 아직 화성에는 연구기지를 설립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였다.
셀레네와 아르테미스는 월면도시의 설비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보고 화성 진출 계획을 주도했다. 목적은 분명하다. 달 이외에도 요정에게 적합한 환경을 찾기 위해서다. 인간의 과학기술 한계로 현재 인간이 직접 이동할 수 있는 천체는 달, 화성, 화성의 위성에 불과했다. 요정은 자신들의 뛰어난 두뇌와 작은 신체를 감안하면 그보다 멀리 떨어진 목성과 토성의 위성까지 갈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커다란 장벽을 넘어야 하지요.”
화성 진출을 주제로 한 회의에서 아르테미스가 말했다. 이제 요정들은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면 합성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요정들은 음성의 특색을 저마다 다르게 하여 각자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단순히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였다. 가령 디도는 애니메이션 속 미소녀처럼 하이톤이었고 갈라드리엘은 인기 많은 노년의 남자 배우를 닮은 굵직한 저음이었다.
“목성 너머로 갈 우주선의 성능? 연료?”
디도가 미소녀 캐릭터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답은 아니지만 제가 의도한 정답은 아니군요. 바로 우리의 수명이 문제예요.”
“그렇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 종족의 정확한 수명을 몰라. 이동 중에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알을 낳는다 해도 무사히 부화하도록 관리할 설비를 우주선 내부에 준비할 필요가 있고. 이쪽은 아직 연구와 실험이 더 필요해.”
갈라드리엘의 말에 모두 동의와 우려를 표했다. 아르테미스가 이어받듯이 말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 나온 지 이제야 10년 조금 넘었고, 요정의 수명은 5년에서 10년 사이로 보고 있죠. 그래서 우선은 화성까지만 가보려고 해요. 이미 화성은 인간의 탐사 경력이 있고 스페이스 저니에서 화성기지 건설계획을 세운 상태예요. 이 계획을 토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잠깐, 네가 화성에 간다고?”
이루릴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아르테미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예.”
“이동에 6개월에서 10개월 정도 걸릴 텐데. 가서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왕복에만 1년 넘게 걸려. 네 수명의 20퍼센트 가까이를 멍하니 우주선에 갇힌 채 낭비해야 한다는 의미야. 너무 아깝지 않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달 태생으로 지능과 건강상태가 가장 뛰어난 제가 해야죠.”
아르테미스는 뻐긴다기보다 의무감이 담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이기에 토를 다는 요정은 없었다. 또한 요정은 선천적으로 인간보다 삶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덜했다. 알 하나를 낳고 사망하는 그들은, 자연스레 낳은 알에서 부화하는 요정이 곧 그 자신의 연장선이라고 보았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는 조금 달라서,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기억을 물려주고 정신적으로 연결되는 후손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곧 자신의 분신이거나 환생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인간에게 동일하게 대응하는 개념은 없지만 민족, 가문, 가족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정신적 일체감과 유대감을 개인이라는 단계로 축소했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유사하리라.
그래서 아르테미스를 비롯한 요정들은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지루하고 공허한 시간을 아까워했다. 가까이에 있는 닮았지만 이질적인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에 늘 자신들은 약하고 수명이 짧다는 자각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긴 수명 덕분에 저토록 느긋하고 게으르구나, 우리는 지구의 거친 환경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요정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일종의 집단의식이 되었다.
달이라는 더 풍요로운 환경에 놓인 요정들이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이 없기에 정신과 행동의 자유까지 더해진 달의 요정들은 인간이 남겨놓은 과학기지와 월면도시의 장비를 이용하여 인간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 화성 출발은 당장에라도 가능했으나 요정 자신의 수명이라는 문제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푸념하듯 말했다.
“달과 화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좋은 환경인지. 무인 탐사로 얻은 자료로는 불충분해요. 무엇보다 직접 가서 겪고 느껴보고 싶으니까요.”
은근히 아르테미스는 함께 갈 사람 없느냐고 물어보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혼자서는 언제 수명이 다할지 모르니 불안하고 위험하다. 그러니 함께 목숨을 걸어줄 요정이 없을까? 그런 무언의 질문이었다. 비록 인간보다 목숨을 덜 아낀다 해도, 요정들은 1년 이상 우주선에 갇혀 지루하게 보내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기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내가 같이 갈게.”
그때 손을 든 요정이 리라젤이었다. 모두 놀라서 속내는 반가우면서도 겉으로는 말리면서 이유를 물었다.
“달에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 이 우주에는 우리의 세상이 잔뜩 펼쳐져 있을 거야. 우리가 찾는 목적지가 화성이 아닐 수도 있지만, 가볼 가치는 충분히 있어.”
“맞아요.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환경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치만 막상 그곳에 가서 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누리지 못하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음……. 인간은 그런 생각을 열심히들 하던데. 인간의 종교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루릴이 끼어들었지만 아무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갈라드리엘은 둘을 칭찬했다.
“아르테미스, 리라젤. 너희 둘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거야. 이제 막 시작된 우리 요정만의 역사 말이지.”
“그레이트! 요정 종족의 역사는 달에 국가를 세운 시점을 기원(紀元)으로 잡아야 해!”
‘역사’라는 말에 고무된 디도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디도는 갈라드리엘과 함께 인간을 경계하고 요정의 우월함을 주장한 대표적인 요정이다. 자신들이 요정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희귀종이라는 주장은 이미 철회하긴 했어도 요정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아직도 갖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시간도 우리식으로 표기하자고! After Moon에서 따서 ‘AM’은 어때? 이전은 Before Moon이니까 ‘BM’으로 하고. 따지고 보면 여기 이름부터 바꿔야겠어! 올드린이라는 인물이 대단할지 몰라도 우리 요정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인간은 아니잖아?”
“알았어, 디도. 지금 그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갈라드리엘이 약간 성가셔하면서 말을 끊었다. 아르테미스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리라젤에게 붙박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리라젤, 고마워요. 우리는 함께 화성을 밟는 첫 요정이 될 거예요.”
“그 영광은 기꺼이 너에게 줄게.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 먼저 죽을지도 몰라. 그때는 너 혼자 밟아야 하니까.”
“불길한 말은 하지 마세요.”
리라젤의 말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스스로 느끼는 몸의 미세한 변화는 비록 처음 느끼는 것이지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씩 리라젤의 육체는,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다른 누구도 모른 채 유인 우주선, 정확히는 요정의 신체에 걸맞은 화성행 우주선이 준비되었다. 인간보다 작고 섭취하는 음식의 양과 배설물의 양이 적을뿐더러,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고 있어도 욕창이 생길 우려가 없는 요정은 여러모로 우주여행에 한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6개월이 넘는 화성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둘은 대략 이틀 정도 간격을 두고 교대로 잠들었고 불침번은 우주선의 상태와 항로를 점검하고, 달에 있는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전파가 왕복하는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니 처음엔 신기했으나 점점 답답해졌다.
둘이 함께 깨어있는 짧은 시간 동안은 대화를 나눴다. 리라젤은 어렵사리 언제 알을 낳을지 모르는 상태라고 고백했다. 조금 놀라고 당황했으나 아르테미스는 특유의 침착한 성격으로 금방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왜 그런 몸으로 위험한 화성 탐사에 자원했어요?”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 두 가지를 하고 싶었거든.”
“둘이요? 화성 탐사 말고 또 있나요?”
“있지. 아르테미스와 함께 있고 싶었어.”
잠깐의 침묵. 인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까. 리라젤은 조금 궁금했다.
“달은 지구에서 약 38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대요.”
뜬금없이 아르테미스는 달 이야기를 꺼냈다. 고백에 대한 대답 대신.
“흥미로운 사실은요, 달은 매년 3.8센티미터씩 지구에게서 멀어진다고 하더군요. 앞자리가 비슷해서 재미있죠? 언젠가 달은 지구를 떠나 멀리 멀리, 자유로이 우주를 향해 날아갈지도 몰라요.”
아르테미스는 리라젤을 보며 표정을 바꾸었다. 지구인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미소다. 지구인의 감각에 익숙한 리라젤 역시 아르테미스의 미소를 좋아했다.
“그 긴 세월을 상상할 수 있어요? 달이 지금보다 두 배 멀리 떨어지려면 100억 년은 걸리겠죠. 이왕이면 12,586,269,025년이었으면 좋겠어요. 피보나치 수니까요. 아름답죠?”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적색 거성이 되어 지구랑 달을 통째로 녹여버릴 텐데.”
“그 전에 지구에서 벗어나길 바라야죠.”
“하긴 그러든 말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 우리 삶은 10년도 못 넘긴다던데…….”
리라젤의 푸념 섞인 말을 아르테미스는 단호히 부정했다.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래갈 수 있을 거예요. 우주가 정말 우리에게 적합한 환경이라면 우리의 후손은 달을 배웅하는 날을 맞을 수 있겠죠.”
100억이든 50억이든 리라젤에게는 아직 영원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은 느껴졌다. 요정에게는 자기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알을 낳아서 자신의 종족을 남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의지는 이어진다는 희망이 있다.
인간의 조사에 의하면 요정은 단성생식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육체의 성질만 살펴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그러나 인간은 요정의 정신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아직 하나도 모르고 있다.
지금 리라젤은 느끼고 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사랑, 자신을 포함한 요정 종족 전체에 대한 유대감을. 자신을 위해, 아르테미스를 위해, 나아가 요정 모두를 위해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더 이어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리라젤의 몸속에서 일종의 형태를 이루었다. 정신이 물질화되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리라젤은 몸에 알을 품었다. 인간은 느낄 수 없을 감각. 자신의 마음이 물질로 변한다는 마법 같고 연금술 같은 그런 감각. 그렇다면 리라젤이 품은 것은 현자의 돌일지도 모른다.
리라젤은 작은 손을 내밀어 더 작은 아르테미스의 손을 살짝 쥐면서 말했다.
“나 방금, 알을 품었어.”
“그렇군요. 리라젤의 알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더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가까이에서 교감을 나눈 두 요정은 인간과 같은 불편하고 왜곡되기 쉬운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더듬이가 그들의 육체에서 뻗어 나와 맞닿았다. 시각적인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두 더듬이는 조금씩 서로 더듬더니 이내 엉키면서 꼭 끌어안았다. 꽈배기처럼 결합한 정신의 더듬이를 통해 서로의 감정이 오고 갔고, 둘은 따뜻한 애정에 젖어들었다. 리라젤 몸 안의 알이 사랑과 희망을 가득 품고 싱싱한 과일처럼 영글었다.
우주선이 화성에 도착하기 직전, 리라젤은 알을 낳았다. 그리고 지구에서 요정이 발견된 이후 처음으로 알을 낳고도 살아남았다.
아르테미스와 리라젤은 무사히 화성에 도착한 후 임시 화성기지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부화한 아이를 길렀다. 아르테미스의 제안으로 데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성의 공주님에게 딱 알맞은 이름이죠.”
리라젤은 흔쾌히 동의했다. 데자는 셀레네와 아르테미스에 지지 않는 성장 속도를 보였다. 요정 특유의 호기심과 암기력은 물론이고 빨아들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지성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리라젤은 종종 느꼈다. 데자는 특히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보편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환원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지구보단 약하지만 달보다는 센 중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대기, 격렬한 추위, 끊이지 않는 모래바람 등 화성의 환경은 척박했기에 그들은 우주복을 벗을 수 없었고 대부분 시간을 우주선과 화성기지 안에서만 지냈다.
그럼에도 데자의 성장을 지켜보며 리라젤과 아르테미스는 지구를 떠나서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더욱 굳혀 갔다. 셋은 화성에서 두 달 정도 머문 다음 무사히 달로 돌아갔다.


“서프라이즈! 설마 둘이서 떠났다가 셋이서 돌아올 줄이야! 이게 바로 인간이 말하는 허니문 베이비인가?”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은데…….”
디도의 놀리는 말에 이루릴이 핀잔을 주었다. 데자에 대해서는 일부러 감추고 있었기에 모두들 엄청나게 놀랐다. 미리 알려줘 봤자 멀리 떨어진 달에서 딱히 도와줄 수도 없고 괜히 걱정만 끼칠까봐 감췄던 것이다.
또한 리라젤이 알을 낳고도 무사하다는 사실 역시 요정들을 기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언제든 알을 낳고 죽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상태였는데, 자신들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낳을 아이는 자신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인간이 생각하는 자식의 개념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데자는 이런 상징적인 의미까지 더해져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요정들은 데자를 통해 자기네 종족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령 데자는 가르쳐주지 않은 기억과 지식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는데, 이는 리라젤과 아르테미스가 지닌 기억과 일부 감각질(qualia)을 물려받은 결과였다. 요정은 자신을 낳고 죽은 모체의 정신을 어느 정도 계승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모체가 죽어버렸기에 마땅히 검증할 수단이 없었다. 이제는 리라젤이 생존했기 때문에 직접 비교하고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알을 낳지 않은 아르테미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에 비유하면 둘이 결혼을 하여 부모 양쪽의 유전자를 골고루 받은 것처럼 요정은 복수의 모체로부터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후로 요정들 사이에는 결혼과 흡사한 동반자제도가 생겼는데 결혼과는 달리 둘 이상이 동반자가 되어도, 한 요정이 여럿과 동반자가 되어도 무방했다. 이런 정신의 다중혼합으로 더욱 독특하고 뛰어난 후손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지금껏 요정들은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인간이 기존에 연구한 자료는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그들 자신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데자의 출생과 성장을 계기로 요정은 자신의 영적인 부분, 즉 인간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새삼 깨닫고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요정의 달 독립에서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셀레네는 마케바의 재산 대부분을 차지하고 직접 설립한 법인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요정이 대표를 맡을 법적 근거가 없기에 서류상 설립자 겸 대표는 자신을 돌보는 가정부로 기재했다. 무지하지만 선량한 인간인 가정부는 셀레네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고, 셀레네는 지나치게 똑똑하여 앞길에 방해만 된다고 판단한 마케바를 제거하고 가정부를 대신 내세우기로 결심했다.
셀레네는 차근차근 마케바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았다. 먼저 주가를 폭락시킨 다음 사들이고 다시 직접 주가를 높이는 식으로 마케바가 차지했던 여러 기업의 최대주주 자리를 빼앗았고 스페이스 저니를 비롯해 마케바가 직접 창업한 기업은 차례로 파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마케바의 주식을 멋대로 처분하기도 했다. 모든 계정의 비밀번호를 비롯 마케바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는 셀레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케바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불법적인 일 외에는 대외적으로나 서류상으로나 모두 가정부가 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 학력에 평생 허드렛일만 해온 70대 노인이 했다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이미 셀레네는 가정부의 이력을 위조하여 노출을 꺼리는 은둔형 천재 투자자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었다.
결국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마케바는 저택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 가정부가, 즉 셀레네가 저택을 매입했다. 모든 일의 원흉이 셀레네임은 분명했지만 만나서 따지려 해도 미리 고용한 경비업체에 가로막혀 자기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케바의 마지막 대응은 미디어를 통해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뿐이었다. 요정의 범죄를 고소해봤자 허사니까. 인간사회는 요정을 인간에 준하는 지성체로 봐야 할지, 그들을 국민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 그렇다면 권리와 의무를 어디까지 정해야 할지 등을 놓고 아직 통일된 사회적 합의에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요정을 상대로 하는 재판은 요원한 일이었다.
폭로가 사실이든 아니든 절차, 법률, 서류 등 어떤 기준으로 봐도 마케바는 자신의 무능으로 기업과 재산을 다 날린 몰락한 사업가 신세였다. 마케바가 경영하던 기업 상당수는 혜성처럼 나타난 70대 신인 경영자가 설립한 리얼페어리 홀딩스에 인수 합병되었다.
목적을 완수한 셀레네는 티타니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요정을 저택으로 불렀다. 달 독립에 이어 셀레네의 계획을 알게 된 요정들은 하나둘 집사를 떠나 저택으로 모였고 이내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요정들의 터전이 되었다. 월면도시가 달에 있는 요정의 나라라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셀레네의 저택은 지구에 있는 요정의 나라였다.
물론 셀레네는 지구에서 기업을 경영할 계획 따윈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손에 넣은 재산과 장비를 총동원하여 진짜 목적인, 요정을 달에 이주시킬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스페이스 저니를 손에 넣은 후로 1년 정도 지나자 비로소 요정과 물자를 달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의 비난과 우려가 집중되었으나 법이나 절차상 강제할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인간들의 반대시위에도 아랑곳없이 요정들은 준비를 마친 즉시 달로 떠났다.
1년 사이에 500명이 넘는 요정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전 세계의 8% 정도 수치다.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집사에 의해 정보를 차단당하는 경우를 제외한, 월면도시와 셀레네에 대해 알고 있는 요정은 모두 함께 떠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요정 혼자서 셀레네에게 가기도 힘들고 집사를 유혹하고 설득해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한들 자기네 요정을 순순히 달로 보낼 집사는 거의 없기에 500명도 기대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그래도 셀레네는 모든 요정을 달로 보낸다는 목표를 세웠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셀레네는 달에서 계속 지구에 있는 기업을 운영하며 계획을 진행했다. 지구에 있는 한 요정은 언젠가 알을 낳고 사망할 운명이니 이 알을 수거하는 관리회사를 인수하는 식으로 요정을 모았다. 지구인은 각자 요정 알을 돌보는 식으로 대항했으나 부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더욱 많았기에 지구의 요정 개체 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반면 달의 개체 수는 불어났다. 갈라드리엘, 디도, 이루릴, 일리단 등 달에 거주하는 요정들은 리라젤처럼 알을 낳고도 생존했기 때문이다. 월면도시의 실질적인 관리자이자 지도자인 아르테미스는 갑작스레 불어나는 인구관리가 걱정이라며 맬서스의 인구론을 따르겠다는 농담을 종종 했다. 현재로는 지구에서 보내주는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가 없기에 하루빨리 자급자족 체제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기엔 달의 자원이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플랑크톤과 조류(藻類)를 배양하고 식물을 재배하여 생존을 위한 필수영양소를 추출하여 식량을 마련했다. 요정들의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인간이라면 맛없고 단조로운 식단에 질려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니까. 미각세포가 거의 없는 요정들은 맛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식사는 배설처럼 생존과 건강을 위해 일정하게 해야 하는 활동 정도로만 여겼다.
이후로 몇 세대가 지났다. 데자가 낳아 부화한 요정이 자라서 또 알을 낳을 때까지도 리라젤을 비롯한 달 이주 첫 세대는 생존했다. 고장 난 장비를 고치거나 달 외부로 탐사를 떠났다가 사고로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고 병이나 수명이 다 되어 죽은 요정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리라젤의 나이는 스무 살에 이르렀다. 문득 자신이 처음 태어났을 때 현아의 나이와 비슷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현아와 유리가 그리워졌다.
리라젤은 점점 평상시에도 그들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고 잘 때는 현아 혹은 유리, 때로는 둘 다와 만나는 꿈을 꿨다. 그렇지만 요정을 상대로 한 꿈과 달리 인간은 불러도 아무 반응 없이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리라젤은 기억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정확히 떠올려 꿈을 통해 재현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과거 리라젤에게 했던 언행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영상을 반복 재생하는 현상에 불과했다.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그들과의 거리는 좁히지 않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다가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인간이 꾸는 꿈도 우리의 꿈과 흡사할까? 현아는 내 생각을 할까? 내가 나오는 꿈을 꿀까? 우리가 동시에 서로에 대한 꿈을 꾸면 꿈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신세계를 알지 못하는 리라젤은 상상만 거듭할 뿐이었다. 애초에 인간과 요정이 가진 꿈이라는 개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서로를 상상하면 꿈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경험은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아 깨어난 후에도 서로에게 남는다. 즉 현실과 꿈 어느 쪽이든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시각적으로 묘사하자면 보이지 않는 요정의 정신적인 더듬이가 자는 동안 길게 뻗어 나온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상상하면 그 더듬이가 상대의 더듬이를 찾아서 이동하고, 서로가 서로를 상상한다면 두 더듬이의 만남은 더욱 빠르게 이루어진다. 마침내 만난 더듬이가 엉키면 서로를 상상할 수 있고 서로의 정신이 연결된다. 그때 꾸는 꿈은 두 요정에게서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깨어있을 때와 다름없이, 아니 더욱 간편하고 진실한 의사소통을 언어라는 장벽 없이도 이룰 수 있다. 요정의 세계에서는 거짓말도 내숭도 위선도 허세도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이러한 꿈을 통한 의사소통 능력은 선천적으로 갖고 있지만 훈련으로 익혀야 했다. 처음으로 이를 경험하고 널리 알린 요정이 바로 아르테미스와 리라젤이다.
그렇지만 요정은 꿈에서 인간과 의사소통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보고 겪은 인간의 모습이 영상처럼 재생될 뿐. 요정끼리 공유하는 꿈이 아니라 단순한 기억의 상기에 불과함을 깨달은 요정들은 집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며 꿈을 꾸는 일도 줄었다. 그럼에도 리라젤은 비교적 오랫동안 현아와 유리를 그리워하며 그들을 꿈속에서 지켜보았다.


요정이 월면도시를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한 이후로 10년이 넘었다.
인류의 모든 지식을 흡수한 후 독자적인 연구개발에 매진한 요정들은 상온핵융합 기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추진장치와 엔진을 발명하여 달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인류 문명이 만든 어떤 엔진보다 적은 연료로 훨씬 빠르고 더 오래 가동될 수 있는 엔진을 장착한 우주선은 대규모 인원이 장기간 여행이 가능한 이른바 세대우주선이다.
실질적인 제작은 완료되었고 출발준비도 마무리되어 이제 완공과 출발을 기념하는 행사만 남겨둔 어느 날 리라젤과 아르테미스는 우주선 위로 지구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만났다.
“이제 지구를 눈으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르테미스가 말했다. 늘 같은 자리에 보이는 지구가 새삼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다. 불룩하게 기울어진 상현달 같은 모습을 한 파란 구체는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요정들에게 너희가 살던 세상은 변함없이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그렇지만 요정은 그런 변화 없는 세상에 작별을 고하려 한다.
“달도 마찬가지잖아.”
“그죠?”
아르테미스는 요정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인간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웃음. 아마도 인간이 웃음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를 미세하지만 독특한 표정.
“달을 떠나게 되어 아쉬워?”
“전혀요. 인수인계도 마쳤고, 데자가 빈틈없이 잘 이끌어가리라고 믿으니까. 나보다 잘했으면 잘했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누구 아인데.”
데자를 낳은 리라젤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아르테미스는 마주 웃으며 리라젤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감정의 교류를 하자는 수신호였다. 두 요정은 감각의 더듬이를 뻗어서 말이 필요 없는 애정을 직접 나누고 즐겼다.
“그치만 딱 하나 마음에 남은 것이 있어. 너에게 허락을 받고 싶어서.”
“어디 보자, 무엇이 달을 떠나자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리라젤을 주저하게 만들죠?”
아르테미스는 리라젤의 정신으로 들어가 그의 기억과 감각을 공유했다.
초속 3만 킬로미터를 돌파하는 새로운 엔진을 개발한 직후, 리라젤을 포함한 다수의 요정은 이전에 꾼 적이 없는 꿈을 꾸었다. 이전에 정신적인 접촉을 한 적이 없는 요정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외계인의 메시지라고 해야 할지도.
“여러분, 저와 같은 별의 아이들인 여러분.”
낯선 요정은 꿈을 통해 모두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여러분은 자격을 얻었습니다. 작고 좁은 집을 떠나 광활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격이지요. 마침내 기준점을 통과한 우주 이동방법을 고안해낸 여러분은 우리의 세상에 자력으로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 우주로 퍼진 씨앗입니다. 긴 기다림과 시련의 시간을 거쳐 여러분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개척을 하고 지식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은 우수한 인재로 자라난 것이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결실을 목격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별의 아이들인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이 관측할 수 있는 모든 별과 성단과 성운과 은하와 은하단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겨우 광속의 10분의 1에 달하는 최소문명 기준점을 통과했지만, 고향에 오시면 워프 항법과 차원 도약을 비롯한 초광속 이동기술을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자력으로 기본과정을 이수하여 기초를 닦았으니 응용과정을 배울 수 있게 된 셈이지요.
제가 보내주는 좌표로 오시면 여러분의 고향이자 우리의 세상으로 안내할 문이 열릴 것입니다. 다만 이 여행은 편도일 테니,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오세요. 그럼 여러분을 직접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정들은 모두 같은 좌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천왕성 궤도와 해왕성 궤도 사이의 지점. 관측 결과 이곳에 어제까지 없던 고중력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작은 블랙홀을 닮은 이 천체는 바로 꿈에서 만난 요정이 말한 문, 즉 웜홀로 통하는 입구였다.
우주에서 고정된 위치란 없다. 고정된 좌표 또한 없다. 은하도 태양계도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웜홀 입구가 어떻게 갑자기 지정한 좌표에 생겨나서 두 천체 궤도 사이의 상대위치를 유지하고 있는지 요정들의 지식으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마법 같은 신기술에 감탄한 요정들의 심정은 요정이 개발한 기술을 본 인간이 느낄 감정과 흡사하리라.
거대한 침묵이 깨지고, 모든 요정은 출생의 비밀은 물론이요 공통된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표를 알게 되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들은 우주선을 건조하고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준비했다. 서로 가고 싶어서 달에 남길 인원을 선발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직 지구에 갇힌 요정을 모두 달로 이주시킨다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는 반드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데자는 열렬히 떠나고 싶어하는 리라젤과 아르테미스의 마음을 알았기에 자원하여 남기로 했다. 지금껏 월면도시를 이끌었던 첫 세대가 달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는 뒷세대 요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둘이 부담감과 책임감에 여행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데자는 자신이 달을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며 등을 밀어주었다. 어느 요정보다도 뛰어나면서 아르테미스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던 데자가 월면도시 관리자 역할을 넘겨받자 누구도 반대하지 않게 되었고, 덕분에 둘은 무사히 출발 인원에 포함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르테미스도 아는 기억이다. 이어서 리라젤의 정신을 사로잡은 마지막 미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좁고 가난한 원룸에서 현아와 유리와 함께 지냈던 시절의 기억이다. 힘든 시절이었으나 리라젤은 나름의 작은 행복을 쌓아놓고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지구의 고통스러운 환경은 물론이고 그리 풍요롭지 못한 인간과 살았으면서 왜…….
작은 방 안에 밤하늘을 띄워놓고 셋이 함께 바라보던 기억을 엿본 아르테미스는 그제야 조금씩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우주에 대한 리라젤의 갈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눈치챘다.
“그래요, 당신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별의 아이임을 깨달았군요.”
아르테미스는 따뜻한 감정의 더듬이로 리라젤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두 집사는 좋은 인간이었나 봐요.”
“고마워, 이해해줘서.”
“집사에게 작별인사를 보내고 싶은 거죠?”
“응. 가능할까?”
“물론! 지구와 교류는 끊어졌어도 전파는 닿잖아요. 얼굴을 보고 싶나요?”
잠시 망설이던 리라젤은 거부 의사를 표했다.
“글만 전달해도 충분해.”
굳이 사진이나 영상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인간은 더 성장한 자신의 모습에 어색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 달에 이주한 요정들은 덩치도 조금 더 커졌고 외모도 약간 변했다. 방사선과 자외선을 계속 흡수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인간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모습과는 동떨어진 변화였다. 이를 알기에 요정들은 달로 이주한 이후 자신들의 모습을 지구에 알리지 않고 감췄다.
출발하기 며칠 전, 리라젤은 옛 스페이스 저니 쪽에 연락을 취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자신이 쓴 글을 보내줄 테니 물리 매체, 즉 종이에 출력하여 편지로 부치되 수신자의 현재 주소를 모르니 자신이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찾아서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페이스 저니는 셀레네의 회사 리얼페어리가 인수한 이후 지구에 남은 요정들이 운영하면서 요정과 물자를 달로 보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간의 반대와 탄압이 심해져서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리라젤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사람을 찾기 쉬운 편에 속한 나라다. 이름과 나이, 학력, 부모의 집주소 같은 리라젤이 아는 정보를 취합하여 알아낸 현아와 유리의 현재 주소로 국제우편이 발송되었다.
월면도시로 여행을 갔다가 리라젤과 헤어져 돌아온 후 10년 넘게 지난 현아는 현재 공교롭게도 유리와 다시 만나 함께 살고 있었다. 때문에 두 통의 편지가 하나의 봉투에 담겨 함께 도착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리라젤임을 확인한 현아와 유리는 믿지 못했고 누군가의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편지를 읽자 진짜라고 믿었다. 맨 앞에 적은 받는 사람 이름을 제외한 편지의 내용은 둘 다 똑같았다.

현아에게 / 유리에게
안녕하세요.
리라젤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남겨요.
저에게 준 사랑과 저를 길러준 정성에 감사를 드립니다. 셋이서 함께 살았던 시간은 행복했어요. 지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방에서 올려다본 우주는 너무 아름다웠죠.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저는 추억만 돌아보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날 줄 알게 된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둥지에서 어미가 주는 모이만 받아먹던 아기새도 언젠가는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겠죠.
그날이 오면 새는 자신의 둥지를 새로 만들기 위해 떠나겠지요.
두 분은 정말 좋은 부모이자 친구였어요.
두 분이 있는 지구는 나쁘지 않은 둥지였고요.
그래도 저는 평생 둥지에 머무를 생각은 없어요.
이제 저는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안녕히 계세요.

두 사람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리라젤이 탄 우주선은 달을 떠나 웜홀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토성의 고리가 걷은 커튼처럼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시선을 더 멀리 옮기면 그곳엔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이제 리라젤은 저 우주가 곧 자신의 삶이 터전이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지구와 달을 영원히 떠나는 순간이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곁에는 아르테미스가, 주위에는 동료들이 있다. 그리고 곧 열게 될 문 너머에는 훨씬 많은 동족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리라젤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앞만 보면서 한없이 펼쳐질 우주와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20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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