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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16메가바이트를 위하여

2019.06.01 00:0006.01

16메가바이트를 위하여

심너울

 


둥둥 떠오른 티끌 하나 없는, 한도 없이 깊은 태평양 바다 위를 초록색 고속정 하나가 질주하고 있었다. 진청의 바닷물을 가르는 배 앞에서 하얀 거품이 진하게 부글거리며 일었다. 배 뒤로 길쭉한 하얀 거품의 자취가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고속정의 함교 위에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환경 단체의 깃발이 바람을 따라 정신없이 펄럭였다.

<Keepers of Earth in Action 행동하는 지구의 보호자들>, 그리고 배의 이름, 포르티시모.

유도경은 포르티시모의 뱃머리 난간에 기대서서 끝도 없는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시원한 바람에 그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가 뒤쪽으로 펄럭였다. 태평양, 세상에서 제일 가장 깊고 넓은 바다, 고개를 돌리고 또 돌려도 보이는 것은 오직 시퍼런 물과 물결들. 그늘 하나 없는 물 뿐인 공간을 작렬하는 태양이 비추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차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바다를 고속정 하나에 의지한 채 떠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약간 어지럽기도 한 것이었다. 도경은 난간에 괴고 있던 팔 위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경치 좋네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경은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 만큼이나 도경에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송민수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경처럼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로.

“걱정했는데 괜찮나 봐요? 민수 씨, 배 타본 적도 없다면서. 뱃멀미도 안 하고.”

도경은 살짝 웃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민수는 도경 옆으로 걸어와 난간에 몸을 기대고는 끝없는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도경은 민수의 따뜻한 손을 잡고,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으로 다가오던 장엄한 바다가 갑작스레 포근하게 느껴졌다.

“운 좋은 거야, 당신. 바다가 신혼여행이라고 이렇게 깨끗하네요.”

“이렇게 깨끗한 날이 드물어요?”

도경은 씁쓸히 웃었다.

“없죠. 처음이에요. 이렇게 깨끗한 바다 위에 기름 흩뿌리고 다니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민수는 도경의 어깨 위에 팔을 감았다. 도경은 몇 초 동안 모른 척 하다가, 그의 어깨에 자기 머리를 기댔다.

“자기는 좋은 일 하면서 항상 그렇게 걱정이 많아요. 괜찮아요. 잘 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뭘, 당신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도 해보고 내가 고맙지.”

도경은 민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수는 이미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년 넘게 본 얼굴인데 익숙해지기 쉽지 않았다. 도경은 민수가 이제 자기 아내라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져서, 말을 더듬었다.

“이거 꿈 아니죠.”

“왜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가 내 아내고… 바다도 이렇게 깨끗하고.”

민수는 도경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도경이 아야 하는 소리를 내자, 민수가 대단히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도 당신이 내 남편인게 믿겨지지 않는데, 그래도 이거 아픈 거 보면 꿈은 아닌 것 같죠.”

도경은 으히히 웃었다. 처음 그가 포르티시모를 타고 바다에 수거 장치를 설치하러 다닐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바다가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

1개월 전만 해도 바다는 파도를 타고 흐르는 수많은 덩어리들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페트병, 빨대, 비닐봉투, 꽉 쥐면 소리를 지르는 장난감, 병뚜껑, 과자통, 원래 어떤 용도였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자잘한 찌꺼기들.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모이고 모여 섬이 되어 있었다. 쓰레기들은 서로 뭉쳐서 일종의 견고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만들어진 평야, 끈끈히 엉긴 비닐봉지들의 언덕, 수평선을 가리는 페트병의 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때까지 도경이 태평양의 쓰레기 섬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11년에 처음 발견된 그 쓰레기 섬은 한반도의 1/4 정도 되는 넓이였지만, 20년이 흐른 지금은 한반도의 40배가 넘는 넓이라고. 여러 번 사진을 봤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도경은 주머니에 있던 GPS를 꺼냈다. 분명히 쓰레기 섬이 있는 좌표인데. 의아했지만, 옆에 기대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도경의 의구심이 금방 잦아들었다. 그래, 신혼인데 이렇게 바다 보면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모를 일이다. 이 장엄한 바다가 그 거대한 몸을 잠시 기울여서 도경과 민수 둘에게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줬을 지도 말이다. 항상 자신을 아꼈던 도경을 축복하고자. 도경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 교수님은 진짜 일벌레다. 아니, 연구벌레. 신혼 여행까지 그런 일정으로 잡을 건 뭐야. 오늘 출근하시면 딱 4박 5일이잖아.”

박사과정 4년차 김아리는 논문 파일을 실행시켜둔 태블릿을 잠시 내려둔 채로, 자기 앞에서 고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과제를 하고 있는 4학년짜리 학부생 후배 한혜원에게 말했다. 연구실에서 학부생 인턴으로 일하면서 아리를 열렬히 따르는 혜원은 고개를 들더니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교수님처럼 훌륭한 연구자가 되고 싶다니까요.”

“오, 역시 패기가 넘치네. 나는 그냥 빨리 졸업이나 하면 소원이 없겠다.”

“에이, 선배님도 제가 엄청 존경하는 거 모르세요? 자기도 훌륭한 연구자시면서. 박사 졸업하자마자 어느 학교서 교수 일 할지 고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야, 교수는 무슨… 어디 연구원으로만 잘 들어가도 소원이 없겠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혜원은 아리가 말한 대로 자기 입술을 한 번 쓱 핥았다. 아리는 허 하면서 잠시 당황했다가, 그냥 웃어 주었다.

“장난이고요. 선배님도 지금까지 특허를 세 개 냈죠, 또 해외 유명 저널에 논문 두 개를 제1저자로 내기도 했죠. 학회 포스터 상은 셀 수 없이 받아서 이제 지겹다고도 하는 우리 선배님!”

“내가 언제 포스터 상 받는게 지겹다고 했는데!?”

“에이, 다 알아요. 석사 논문부터 이미 주목받은 우리 천재 생물학자. 나중에 노벨상 받을 때 꼭 제 이름도 말해 줘야 돼요?”

“하… 아부 좀 적당히 하시죠, 후배님.”

혜원은 배실배실 웃었다. 소용 없는 말이었다. 아리는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좀 공격적인 발언이 아닐까 잠시 저어했다가, 그래도 자기가 맡은 후배니까…

“선배님 덕에 제가 대학원 가리라고 결심했는데, 이게 왜 아부에요.”

섬뜩한 이야기였다. 아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파랗게 어린 후배 하나를 개미지옥으로 끌어들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급하게 말을 돌렸다.

“됐고, 됐고. 너 요즘 연구 돕고 있는 건 잘 돼가?”

혜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제가 키우는 애들이 이제 돌아다니기도 하고 밥도 잘 먹는데, 꼭 하루가 지나면 싹 다 죽어 있어서요. 밤 새면서 관찰도 해봤는데 왜 그런지 아직 잘 모르겠고…”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교수님 오면 보고도 할 겸 겸사겸사 물어보려고 했죠.”

“그러든지. 귀찮으니까 나한테는 묻지 말고. 한 시다, 들어가자.”

아리는 한숨을 길게 쉬면서 태블릿을 쏙 겨드랑이에 꼈다.

“아, 같이 가요, 선배님. 좀 기다려요!”

혜원은 책상 위에 있던 짐들을 빠르게 가방 안에 쓸어담았다. 아리가 하도 성큼성큼 걸어가서 혜원은 좀 뛰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들어간 아리가 몇 초나 열림 버튼을 눌러 그를 기다려 주었다. 곧 둘은 연구실이 있는 5층 복도로 나왔다. 연구실이 있는 쪽으로 길을 한 번 꺾었다가, 혜원은 움찔했다.

“아, 또네.”

중년의 막바지에 걸쳐 있는 듯한 사람 세 명이 연구실 앞에 웬 피켓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돌려 아리와 혜원에게 레이저 빔 같은 눈빛을 보냈다. 둘은 애써 그들을 못 본 척 하면서 조용조용 연구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소중히 안은 피켓을 둘다 무시했지만, 아리와 혜원도 그 피켓에 적힌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의 영역을 범하려 드는 실험연구 당장 멈춰라, 생명의 존엄성으로 줄타기를 하지 마라.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서너 번은 연구실 앞에 드러눕거나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리는 연구실 문까지 몇 발짝 남겨두고 중얼거렸다.

“부지런히도 지랄이다, 정말. 지치지도 않나.”

“야! 너 뭐라고 했어!”

뒤로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아리는 식겁했다. 귀도 밝지. 둘은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혜원은 아리를 문 쪽으로 잡아끌면서 빠르게 걸었다. 둘은 각자 서로의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방금 전에 뭐라고 했냐고!”

얼굴에 핏기가 쫙 빠져나갈 것 같은 와중에, 연구실 문이 열렸다. 연구실 안쪽에 흰 가운을 입은 키가 큰 여자가 보였다. 송민수 교수였다. 아리와 혜원의 표정이 활짝 풀렸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민수는 가벼운 가운 끝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더니 둘 앞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도둑고양이 앞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병아리들을 보호하는 어미 펭귄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당신한테는 볼 일 없고요...”

소리를 크게 낸 사람은 우물쭈물대다가 자기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꽁무니를 뺐다. 민수는 그 뒤로 또렷이 외쳤다.

“경비 분들 부르기 전에 나가세요!”

그들은 주눅든 채로 피켓을 챙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민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자기 머리를 한 번 쓸어넘겼다.

“조용히 있기만 하겠다더니... 갈수록 심해지네, 저 인간들.”

“교수님, 감사합니다... 잘 다녀 오셨어요, 신혼 여행?”

아리는 어미 펭귄처럼 당당히 선 민수에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인사했다. 옆에서 혜원도 “감사합니다 교수님...”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없는 동안 별 일은 없었지?”

“네, 네.”

“그럼 일 봐. 나는 오피스 좀.”

민수는 자기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리와 혜원은 그 뒤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커다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교수님은 왜 저 사람들 안 쫓아낸데요?”

연구실 문을 닫고 나서야 혜원이 아리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교직원들이야 말해도 신경 안 쓰고, 경찰한테 신고하기에는 신문에 무슨 이야기가 오를 줄 몰라서 그러는 거지, 뭐.” 아리가 씁쓸하게 말하면서 가운을 거쳤다.

연구실 안에는 이런저런 실험용 기자재가 반짝이고 있었다. 배양기, 무균 상태에서 실험을 위한 클린 벤치, 고압 멸균을 위한 오토클레이브, 용액을 섞어주는 볼텍스 믹서, 증류수 제조기, 원심분리기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고, 또 개인용 책상이 여러 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소독을 위한 99% 에탄올 통과 여러가지 시약, 그 책상 위의 선반에는 파라필름, 페트리디쉬, 라텍스 글러브 등 온갖 잡다한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평범한 미생물 연구실의 모습이었다. 다만, 벽 한 면의 반쯤을 혼자서 차지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장치만은 색달랐다. 그 회색의 직육면체 모양의 장치 앞에는 50인치는 쉽게 넘을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 모니터 하나가 외롭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니터에서는 이런저런 수많은 수치가 계속 갱신되었다.

세포 합성기라고 하는 물건이었다. 연구실 안의 사람들이 자기 후배들에게 “이거 망가뜨리면 50년 동안 이 연구실에서 하루 48시간씩 일해도 못 갚는다”라고 농담이 살짝 함유된 경고를 주는 이 기계는 말 그대로 세균을 제조하는 데 쓰였다. 생물의 유지와 탄생에 여러 분자를 넣고, DNA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하고 기다리면 장치는 뚝딱뚝딱 입력된 대로 세균을 뽑아냈다. 연구원이 입력한 DNA를 가지고 있는, 세상 다른 곳에는 어디에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생물이었다.

합성생물학, 2010년에 탄생한 이 비교적 젊은 생물학의 분야에서 송민수 교수는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유전자 조작에 대해서도 학을 떼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예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고 하니 넘어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구실 앞에 주기적으로 출석 체크를 하고 피켓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쓸데없이 거창하긴.

아리는 그 ‘제 2의 바벨탑’, ’생명 윤리의 붕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철저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 연구를 시작했다. 밥만 먹고 유용한 단백질을 싸기만 하는 세균을 줄창 만들어서 잘 팔아 보겠다는 목적이었다.

1980년에 인슐린을 세균에서 만들어 추출하는 기술이 상용화된 이후로, 사람들은 세균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유용한 단백질을 얻어 왔다. 세균에 원하는 단백질의 유전자를 넣고, 세균들을 잔뜩 키우고 으깬 다음 필요한 단백질만 추출하는 것. 2040년 현대에야 일상적인 기술이었지만, 새로운 생물을 합성한다면 더 나아갈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DNA를 사람이 설계하면, 세균의 행동을 훨씬 쉽게 예측하기 좋다. 가장 많이 활용되고 샅샅이 연구된 대장균 하나에만 5천 개가 넘는 유전자가 들어 있지만, 사람이 만든 세균은 500개의 유전자로도 충분히 살아남았고, 통제하고 조작하기 좋다. 원래 생물이 쓰지 않는 분자로 만들어진 새로운 단백질도 만들 수 있었고, 연구실 밖으로 탈출하지 않도록 특정 먹이만 먹는 편식하는 세균을 만들 수도 있었다.

아리는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어쨌든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더 맛있는 걸 먹고, 더 오래 쉴 수 있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일 것이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윤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근데, 선배, 오늘 회식하는 거 아시죠?”

혜원이 갑자기 말을 건네던 생각에 빠져 있던 아리가 화들짝 깼다.

“뭐? 회식?”

“네, 교수님 결혼식도 안하고 해서 연구실 사람들끼리 축하라도 할겸. 제가 식당 예약해 놨어요.”

“교수님 채식하시는 거 알지?”

“네, 네. 지현 선배님한테 들었어요. 남편 분이 채식하셔서 연애할 때부터 끊으셨다고.”

“응, 로맨틱하지. 그럼 이제 일 하자, 일.”

아리는 등 뒤로 팔을 한 번 쭉 뻗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돌봐야 할 토끼 같은 세균들이 산더미 같았다.

그 날 저녁 연구실 사람들은 학교 근처의 채식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혜원은 민수와 면담을 하고 민수와 함께 식당으로 오기로 했고, 아리와 다른 연구실 사람들끼리는 어떻게 깜짝 이벤트는 못해도, 근처 백화점에 들러서 결혼 축하 선물은 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보이차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자랑하는 박사 2학년생 이윤주는 “차, 중국 차는 어때요?”하는 의견을 냈지만, 연구교수 딱지를 달고 있는 안경혁 박사가 “송 교수님 카페인 민감하시잖아. 옷은 어때?”라고 말했다.

“박사님, 옷은 좀 제대로 된 거 사면 바로 청탁금지법에 걸릴 걸요. 그리고 교수님은 비싼 옷 사줘도 그냥 티셔츠에 백팩 매고 다닐 분 같은데.”

아리가 나섰다. 그때 항상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자신의 창의력의 증거라고 자랑하는 박사 6년차 한지현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청탁금지법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우리 학교 교수 강연비 한도 100만원이잖아? 송 교수님이 노벨상 받아도 강연비 최대 100만원 밖에 못 받는 거야?”

“그러게요. 5년 전에 부천시 공무원이 짬짬이 이론물리학 논문 써서 노벨상 받았다가 겸업금지조항 위반 아니냐고 난리 나지 않았어요?”

한지현과 함께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 술을 마시는 걸로 잘 알려진 석사 3년차 박수명이 화제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결국 연구실 사람들은 ‘나중에 노벨상 받으면 강연비를 얼마를 받아야 적당하는가’에 대한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리는 그 난장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교수님 잡음 틀어놓고 일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작은 라디오 하나 사 드리면 되겠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는 돈을 모아서 백화점 5층에서 파는 2020년대 초반 풍의 앤틱한 알루미늄 라디오를 샀다. 라디오 플레이어가 주요 기능이고 당시에 많이 쓰던 인공지능 스피커도 달려 있다는 대단히 고전적인 물건이었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모두 식당에 모였다. 아리가 식당에 들어갔을 때 송 교수는 이미 혜원과 함께 앉아 있었다. 혜원은 대단히 긴장된 모습으로, 할 말이 없는지 계속 물을 쪼르륵 따라 마시고 있었다.

아리는 혜원 옆에 가 그를 쿡 찔렀다. 혜원은 아리를 보고 표정이 좀 밝아졌다. 아리는 그에게 긴장 풀라고 속삭여주고는 준비해온 라디오를 민수에게 건넸다.

“와, 이게 뭐야?”

“라디오에요. 결혼 축하드려요, 교수님. 연구실 사람들이 갹출했어요. 남편 분 너무 좋은 분이시던데. 부러워요.”

“예쁘다. 고마워요.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네.”

사람들은 작게 박수를 쳤다. 민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두부 요리를 좀 집어먹은 다음 말했다.

“나도 여러분들이 나 없이 이렇게 잘할 줄 알았으면 그냥 좀 더 있다가 오는 건데.”

“저는 교수님 없는 사이에 농땡이 많이 피웠어요.”

아리가 흘린 농담을 민수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와서 보니까 다 잘 진행하고 있더만.”

“교수님 덕에...” 혜원이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 그 사람들 내쫓을 수도 있었잖아요. 이상한 사람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연구실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미친 놈들 아니냐는 험한 말도 조금씩 오르곤 했다. 민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글쎄...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뭐.” 민수는 맥주잔을 끝까지 비우고 자기 손으로 맥주를 한 잔 더 따랐다. “어차피 사람들마다 못 참는 게 다 있고, 남들 보기엔 되게 이상한 생각을 하나둘은 가지고 있지. 그 사람들도 다른 데서는 괜찮은 사람들일 거라고 믿어. 오늘은 아리한테 협박을 했으니까 강경하게 나온 거고... 경고했으니까, 앞으로 안 그러면 그냥 조용하게 장식물처럼 생각하고 싶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리는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는 혜원의 메세지가 와 있었다.

[교수님은 다 좋은데 약간 이런 데서 물렁물렁한 거 아닌가 싶어요]

아리는 한 손으로 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나는 외유내강이라고 생각해]

메세지를 보낸 아리는 바로 옆에 앉은 혜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교수님한테 물어는 봤어?”

“네, 별 거 아니었어요. 기본적인 건데... 민망해요.”

혜원이 자기 뒤통수를 문질렀다. 자기보다 일곱 살은 어린 후배를 보면서 아리는 웃었다. 대충 혜원이 무슨 실수를 했을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개의 밀봉된 유리병 안에서 아름다운 붉은색의 액체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액체 안에는 으깨진 딸기들이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도경은 흐뭇한 표정으로 병을 잠시 바라보다가, 유독 색깔이 이쁜 병 하나를 골랐다.

“민수 씨! 이리로 와 봐요.”

뚜껑을 비틀어 열기 전에 도경은 민수를 불렀다. 방금 전에 퇴근하고 피곤한 채로 터덜터덜 돌아온 민수가 다가와 도경을 뒤에서 안았다. 둘은 즐겁게 웃었다.

“이게 뭐에요?”

“내가 담근 딸기술.”

“와, 그럼 보드카에 딸기 넣은 거에요?”

“그런 담금주 아니라, 진짜 딸기술이거든요. 딸기에다 설탕이랑 효모 넣고 발효시켰다니까요. 나 이런 거 처음 해 봐요.”

“정말요?”

“지금 하나 따 보려고요. 열어 볼까요?”

“좋아요.”

도경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초리로 방금 골라둔 딸기 병 하나를 왼팔로 안고 오른손으로 땄다. 피시시 하고 탄산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코를 벌름댔다. 약간의 달콤한 자취가 남은, 시큼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확 풍겨왔다.

“윽.”

도경은 고개를 잠시 돌리고 있다가 말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이거… 이건 식초 됐네.”

민수는 병에 코를 갖다댔다. 강렬한 식초 냄새가 났다.

“술 기대하고 땄는데 갑자기 식초 냄새가 나서 깜짝 놀란거지, 그냥 식초로 먹어도 맛있겠네요.”

“왜 술이 식초가 돼요? 효모랑 설탕 넣고 묵히래서 그대로 했는데...”

“잡균이 들어간 거 같은데… 다른 것도 한 번 봐요.”

민수는 또다른 병을 골라서 땄다. 거기서는 알코올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소주보다는 약간 약한 것 같았지만, 맥주보다는 훨씬 진했다.

“이거 도수가 꽤 높네. 하긴 두 달이나 발효시켰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다른 술은 살아있다고 하니 도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경은 식초를 보면서 말했다.

“잡균이 들어갔다고 식초가 돼요? 효모 되게 많이 넣었는데.”

“효모가 당 먹고 알코올을 싸거든요. 근데 그 알코올이 많아지면 자기들도 못 견뎌서 죽어요. 그 빈 자리에 알코올 먹고 산을 싸는 세균이 들어간 거죠.”

“자기가 싼 거에 질식해 죽는다고요?”

“네, 네. 전문가들도 하는 실수에요. 얼마 전에 내 밑에 있는 석사생 한 명도 비슷한 실수를 했어요. 두 달 전에, 자기가 배양한 균이 자기 사는 곳에 산을 죽죽 싸서 자멸하는데 완충을 제대로 안 했다가… 버퍼를 주기적으로 넣어줘야 하는데...”

“거기까지, 거기까지. 그럼 식초 되기 전에, 이거 다 마셔야겠죠?”

민수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경은 술이 든 병의 내용물을 거름망에 걸렀다. 효모들이 신나게 먹어치운 딸기의 잔해가 어마어마하게 묻어나왔다. 도경이 색마저 빠져 시허옇게 변한 음식물 쓰레기들을 치우고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민수는 안주로 쓸만한 요리를 준비했다. 달래전, 배추전, 두부 부추 무침...

곧 둘은 식탁에 앉아 와인잔에 술을 따랐다. 딸기술이 와인잔에서 빛을 받자 방금 전보다 더 찬란한 붉은 색을 띄었다. 마치 루비를 갈아넣은 것 같았다.

“결혼 두 달 기념, 건배. 나랑 같이 살아주고, 과학 수업까지 해 줘서 고마워요.”

도경이 말하자 민수는 웃었다.

“나도 당신 덕분에 삶을 살아가는 더 나은 방식을 알게 되어서 기뻐요.”

둘은 딸기술을 천천히 마셨다. 효모가 당을 쪽쪽 빨아먹은 딸기술은 굉장히 드라이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냄새는 그대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다채롭고 진해졌다. 높은 도수의 알코올이 톡 쏘는 마지막까지, 맛있는 술이었다.

두 타고난 술꾼들은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 딸기술을 각자 네 잔 정도 나눠 마시자, 도경은 마음 속에 알코올성 자신감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도경의 술버릇이라면 그 알코올성 자신감에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흐흐, 그런데 있잖아. 이스트, 사람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그치요?”

“왜?”

“자기가 싼 거에 스스로 질식해서 죽는다는게.”

“그런가…”

“사람들도 지가 만든 쓰레기에 질식당해 죽고 있잖아요.”

도경의 말투가 조금씩 격해졌다.

“플라스틱, 비닐, 지금 당장 좋다고 막 쓰다가… 태평양에 쓰레기 섬이 둥둥 떠다니고. 그게 알코올 죽죽 싸다 죽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네요.”

“나도 저번에 그 섬 봤으면…”

민수는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말을 얼버무렸다. 한창 연애할 때에는 도경이 쓰레기 덩어리들의 사진을 툭하면 보여주면서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때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어요. 내가 거기를 열 번은 넘게 갔는데… 원래는 정말 생지옥이거든요.”

“사진만 봐서 다 안 느껴지는게 있다고 항상 자기가 그랬죠.”

“그러니까. 그때... 뭐랄까, 뭔가 위에서 도와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위에서요?”

“응… 뭔가 성스러운… 태평양이라는 바다가 살아 있어서, 나보고 고맙다고 하는 거 같았어요. 내가 항상 도와줘서, 자기랑 올 때만큼은 쓰레기를 벗은 자기 모습을 보여 준 거라고요.”

“그렇군요.”

민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도경은 그의 말 속에 담긴 무관심을 곧바로 눈치챘다.

“내 말에 별로 공감이 안 가는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인간 위에 있는 어떤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확신, 민수로서는 도경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가끔 도경의 자연에 대한 감상이 이렇게 발달할 때, 그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랐다.

“맞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요.”

도경이 추궁했다. 민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말했다.

“그냥 서로 감동을 느끼는 부분이 다른 거 아닐까.”

“감동을 느끼는 부분?”

“자기는 세상에 어떤 거대한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죠. 그 질서를 거스르면 안되니까 환경 운동을 하는 거고.”

“응.”

“나는 세상이 질서정연한 거 같지가 않아. 그래서 이렇게 세상이 혼란스럽고 살기 힘든 거고… 하지만 우리 작은 사람들끼리 힘을 뭉치면 이 나쁜 세상이 조금씩 살기 좋아질 수 있고… 그런 작은 힘이 합쳐지는 게 위대한 거 같고.”

민수는 도경을 또렷이 바라보면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기는 과학자잖아. 막 복잡한 연구를 하다 보면, 그걸 설계한 위대한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연구 이야기가 나오자 민수는 확 들떴다. 연구는 그에게 있어 단순한 밥벌이 이상이었다. 민수의 가치관과 철학, 윤리와 세계관은 연구실에서 형성되었고, 연구는 민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구도의 길이었다.

민수는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단어를 읊었다.

“16메가바이트.”

“응?”

“사람 DNA에서 쓸모 있는 정보만 뽑으면 그 정도 돼요. 노래 하나 저장하기에도 벅차죠. 무손실 음원은 5분만 돼도 30메가가 넘는데.”

“응.”

“그런데 사람 DNA에 있는 데이터는 총량은 800메가바이트 정도 되거든요. 16메가면2%정도 되죠. 98%가 별 의미없는 내용들 뿐이에요. 그러니까…”

민수는 와인잔을 잡고 있던 도경의 한쪽 손 위로 자기 손을 올렸다.

“우리 사람들의 설계도에 쓸모없는 정보만 잔뜩 있는 거에요. 자기가 그런 영적인 생각 하는 거 좋아하니까, 나도 자주 생각해봤어. 그 전에는 별 생각도 안 들었지만... 그러니까, 우릴 만든 존재가 있어도, 어설프지 않을까.”

도경은 자기 손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민수의 눈이 첫 눈에 반한 짝사랑을 바라보는 청소년마냥 찬란히 빛났다. 도경은 그의 눈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민수는 자기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 없이 탄생한 존재가,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 나가는 게… 나한테는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에요. 오히려, 우리에겐 목적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 같아.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목적을 세울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래서 없는 편이 좋아요.”

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자기가 한 말에 도취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기가 그런 스타일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생각도 안 해 봤겠죠. 다른 생각을 해도... 내가 확장될 수 있게 도와준 거라고. 당신 만나고 결혼까지 한 게 얼마나 기쁜 우연인가 싶어.”

도경이 웃었다.

“나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여튼, 정말,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은 되게 좋은데…” 도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술은 집 안에서만 마시는게 좋을 거 같아. 바깥에서 이런 얘기 했다가 얼마나 눈총을 받을지 상상도 안 가거든.”

민수는 깔깔깔 웃고는 도경의 볼에 손을 가져다댔다.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방에 진동하는 딸기향을 뚫고, 도경이 즐겨 쓰는 향수 냄새가 풍겼다. 시원한 멜론의 냄새. 민수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였다.

 


<행동하는 지구의 보호자들>의 고속정 포르티시모의 선장 유진은 배를 천천히 멈추고 갑판으로 걸어나왔다. 여러 사람들이 광활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유진도 난간에 기댔다.

“이걸 익숙하다고 해야할지,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옆에서 도경이 말을 건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배를 처음 탔을 때 보던 거랑은 비슷하긴 한데… 요즘엔 이런거 보기가 참 힘들었지.”

도경은 신혼 여행 때 보았던 바다를 기억했다. 그때보다 더했다. 지금은 그냥 바다에서 쓰레기가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도경도 입을 닫고 함께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조금… 조금 더 서쪽으로, 한 200킬로 미터 정도만 가봅시다. 위성사진에는 거기에 쓰레기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단체 간부 최동희가 소리쳤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함교로 돌아갔다. 곧 배에 다시 강렬한 속도감이 실렸다. 최동희는 손톱을 뜯으면서 바다 저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경은 그에게 다가갔다.

“동희 씨, 불안해 보이세요.”

동희는 다리도 달달달 떨고 있었다.

“그러게요.”

“바다가 깨끗해지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하지만 우리가 하러 온 일이…”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일이 성과를 거뒀나 봐요.”

도경은 배 뒤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배에 길다란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었다. 수거 장치. 쓰레기가 많은 곳에 저것을 설치하지 않는다면 아까운 기름만 바다에 쏟아부은 격이 된다.

“별 조사 없이 나와서 기름만 쓰고, 우리가 환경을 오염시키기만 한 걸 수도 있지요. 이러면 임무 실패인데…”

동희가 푹푹 꺼지는 목소리로 말하자 도경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바다가 우리를 위해서 깨끗한 모습을 몰래 보여주는 걸 수도 있어요.”

동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도경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예…”

도경은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거 장치 설치에는 그가 전문가였으나 배 위에서는 도저히 할 일이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노가리나 깔 요량으로 그는 함교에 들어갔다. 유진은 뭔가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기계 장치 앞에 서 있었다. 도경은 그 노선장의 뒷모습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선장님.”

“아, 도경 씨.”

“배를 처음 탔을 때랑 비슷하시다고요.”

“그렇지. 그때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했는데. 이렇게 오래 그 시절의 바다를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네.”

“즐거워 보이세요.”

“당연히 좋지. 자네도 신혼 생활이 좋아 보이네. 이번에 탈 때는 아내가 항구까지 배웅도 나와 주고.”

도경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죠.”

“부럽구만.”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아내에게 바다가 참 깨끗해졌다고 말하리라고 도경은 다짐했다. 그는 모르는 게 없는 천재 과학자니까. 도경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갑판으로 나갔다.

갑판 위에 서서 도경은 가끔 끝도 없는 바다 위를 활공하는 바닷새를 보았고, 날치가 바다 표면을 가르고 날아다니는 것도 보았다. 딱 한 번은 배보다 더 큰 고래가 물을 내뿜는 것도 보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기, 저기 있다! 도경 씨, 튜브 준비해요!”

세 시간 정도 배가 쉴새없이 움직였을 때, 수평선에 드디어 쓰레기 섬이 나타났다. 퀴퀴한 냄새가 벌써 닥쳐오는 듯 했다. 도경으로서는 분위기가 팍 식는 사건이었지만 최동희는 즐겁게 소리쳤다.

도경은 배 뒤쪽으로 걸어갔다. 몇백미터 길이의 가림막이 붙은 튜브가 와이어에 질질 끌려 왔다. 이 튜브를 조류의 방향에 맞춰 설치하면, 쓰레기들이 튜브 안쪽으로 모인다. 도경은 와이어에 있는 튜브를 곧바로 설치할 수 있도록 정리하기 시작했다. 단순 육체 노동이기에 도경은 별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몇십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그때 뱃머리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도경의 집중을 깨뜨렸다. 동희의 목소리였는데, 뭔가 놀라는 것 같기도 했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경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도경은 갑판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쓰레기 섬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동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 섬 위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몸을 덜덜덜 떨기도 했다.

“저… 저기!”

도경은 다급히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똑같은 소리를 냈다.

“흐억!”

하늘에 커다란 하얀 구가 떠 있었다.

도경은 잠시 눈을 깜박이고, 머리를 흔든 다음, 구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무리 집중해도 그 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얀 구는 여러 검은색 선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얼핏 보면 고전 명작 영화라는 스타워즈에서 봤던 데스 스타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겉면은 상당히 매끈해 금속이라기보다는 도자기 같았다.

“저…저게 뭐죠…?”

“모…몰라.”

어느새 유진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불가해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동그란 것이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늘을 활공하지도 않았고, 로켓처럼 무언가를 잔뜩 뿜어내지도 않았다. 하늘에 붙박인 마냥 고정되어 있었다. 달이 지상으로 내려온 듯한, 아득하게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경악과 침묵의 30초가 흘렀다. 다들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할 무렵, 그 구체의 밑에서 동그란 구멍이 열렸다. 아니 열렸다기보다는 생겨났다. 금 같은 것도 없이, 구체에서 구멍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도경의 위치에서 구멍 내부가 살짝 보였다. 그 안은 까마득하게 어두웠다. 도경은 현기증을 느꼈다.

구멍이 다 열리자, 그 구멍에서 희미한 청록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이 쓰레기 섬을 비췄다.

“사…사진 찍어요. 빨리.”

최동희가 말했다. 그걸 함께 바라보던 팀원 한 명이 다급히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들어 찰칵찰칵 찍었다. “동영상도!” 최동희가 다시 외치자 이번엔 도경이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도경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 휴대폰을 바다로 떨어뜨릴 뻔 했다.

“쓰... 쓰레기가!”

사진을 찍던 팀원이 외쳤다. 도경은 쓰레기들로 잠시 눈을 돌렸다. 구멍 밑에 있는 쓰레기 섬의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중력을 거부하고, 천천하지만 분명히, 그 쓰레기들은 구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쓰레기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배가 덜컹 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이 넘어질 뻔 했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배가 구체의 반대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도경은 갑판을 둘러봤다. 유진이 없었다. 도경은 함교로 들어갔다. 유진이 배의 속도를 급히 올리고 있었다.

“선장님, 지금 뭐 하시는…”

“도망치고 있지!”

“왜, 왜 도망치는…”

“우리 배도 빨려들어가면 어쩌려고!?”

도경은 입을 다물고 갑판 쪽을 바라보았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크게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들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도경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포르티시모의 사람들이 처음 발견한 하얀 구체는 태평양의 청소부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듣고 금방 유명해졌다. 청소부는 태평양 위를 둥둥 떠다니면서 바다 위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되는 족족 빨아들였다. 몇 주 동안 그 구체를 관찰한 사람들은 그 구체가 자기 크기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큰 쓰레기를 빨아들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플라스틱들을 다른 어딘가로 배출하는 것도 아니었다. 청소부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빨아들이기만 했고, 바깥으로 아무것도 내뱉지 않았다.

청소부는 점점 속도를 올리더니, 발견된 지 이주일 만에 태평양의 모든 쓰레기 섬을 깨끗이 빨아들인 다음 사라졌다. 아무도 청소부가 어디로 간지 몰랐다. 어디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특파원 자격으로 한가로이 살고 있다가, 난데없이 태평양 한복판에서 쪽배 하나에 기대 구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기자들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도경이 찍은 동영상은 순식간에 여러 동영상 플랫폼에서 수십 억의 조회수를 올렸다. <행동하는 지구의 보호자들>의 회계사들은 뜬금없이 몇십 배 수준으로 증가한 후원금 폭탄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도경은 여기저기 첫번째 발견자라는 칭호를 달고 돌아다니다가, 몇 주는 되어서야 간신히 안정적인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배 안 타도 돼요.”

도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가 요리한 딸기 춘권을 반으로 자르고 있는 민수에게 말했다.

“태평양 안 가도 되면, 이제 출장도 않는 거네요?”

“응응. 한국에만 계속 있을 수 있어요.”

“약간 아쉽기도 하다. 바다가 더러울 때만 줄창 나가다가, 정작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해지니까 갈 일이 없는게, 좀 아이러니하네요.”

도경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얼른 먹으라고 손짓했다. 민수는 입에 딸기 춘권을 넣었다. 바삭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있죠, 저번에 딸기 술 마셨을 때 기억나요.”

“음, 음.” 입 안이 가득 찬 민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맞지?”

“음, 뭐라구?”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민수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도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만든 그 거대한 죄 덩어리를 청소를 해 주는 존재가 뭐겠어요. 우리를 아끼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 근데 그런 존재가 나한테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내가 고생한 거, 다 알아준 거죠.”

“그...그런가?”

“내가 하고 있는 게 다 헛수고는 아니었어요. 나 정말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 삶에는 목적이 있어요.”

“에이, 자기가 하는 일을 뭐 그 공이 인정해 주는 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거 같은데.”

도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공이라니. 아니야.”

“음, 생긴 게 공 같이 생겼으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미안.”

민수는 도경이 태평양에서 청소부를 목격하고 난 이후로 그를 대하기가 좀 힘들어진 것 같아 힘들었다. 입만 열면 공, 그 분, 구원자, 어떻게 그런 낯뜨거운 말을 잘도 하는지 민수는 자기 볼이 다 화끈해졌다. 놀라운 경험이었으리라는건 납득이 가지만서도, 어떻게 바로 그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일 거라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경의 눈에는 언제나처럼 강한 확신과 신념, 이상에 대한 추구가 예전과 같이 그대로 빛났다. 민수가 도경과 함께하리라고 확신을 내리게 한, 강렬하고 찬란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요즘에 그 눈빛을 보면서 민수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심해지면, 선을 넘으면, 도경의 눈에 서리던 확신은 맹신이 되고, 신념은 맹종이 되고, 이상은 망상이 될 거 같아.

“미안, 자기야. 주말에 같이 놀러 나가자. 바람도 쐬고... 요즘 보고 싶은 것 없어? 영화나.”

민수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도경은 순순히 따라 주었고, 얄팍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민감한 주제를 피하면서 둘은 왈츠를 추듯 이야기했다. 상처받을 일이 없으니 좋았고, 도경이 준비한 음식도 상당히 괜찮았다. 한 시간 반 동안 둘은 웃으며 떠들었다.

“흣, 흐흣, 아, 아냐. 여기까지. 자기 전에 받아둔 논문 몇 개 봐야겠어. 설거지 해야겠다.”

민수는 도경이 던진 농담 하나에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웃다가 일어났다.

“고생하네요.”

“익숙해지면 그냥 책처럼 읽는 거지요 뭐.”

“좋아, 좋아. 그럼 나도 씻어야겠다.”

웃으면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도경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민수는 식탁 위에 있는 접시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기세척기에 넣기 전에 그릇 위에 눌어붙은 음식물 찌꺼기들을 민수는 박박 긁어냈다. 더럽고 지루하고 짜증나. 식기세척기 덕에 획기적으로 나아졌다고 해도, 역시 설거지는 최악의 집안일이었다. 민수는 식탁 구석에 세워둔 라디오를 불렀다.

“뉴스 좀 틀어봐.”

곧바로 뉴스가 재생되었다. 민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하실텐데요. 사라진 태평양의 청소부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태평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라스틱을 빨아들인다고 하는데요. 미국 유타 주의 에르빈 씨는 합성 섬유 옷을 입고 있던 자기도 그 공 안으로 빨려들어갔다가 나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라디오에서 민수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학교의 동료 교수였는데, 연구실에는 안 나타나고 방송만 나온다고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합성 섬유도 플라스틱의 일종이기 때문에, 만약 플라스틱에 반응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허.”

민수는 탄식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쓰레기 빨아들이는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사람들이 죽고 못 사는 건지, 거대 청소기랑 다른 게 무엇인가? 한때 민수는 청소부가 정확히 뭔지는 알고 싶었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이리저리 모아서 낸 여러 가설들이 싸우고 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그걸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누가 만든 건지, 그냥 짜증만 났다. 민수는 그저 이 유행이 지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100% 외계인이죠.”

노트북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던 혜원이 문득 말했다. 앞에 앉아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던 아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리는 혜원의 노트북 화면 뒤쪽을 거의 완전히 차지하고 있는 한 잘생긴 남배우 강해서의 스티커들을 보면서 말했다.

“아니, 뭐가 외계인이야? 강해서가 외계인이라고?”

“청소부요. 강해서가 무슨 외계인이에요.”

“글쎄… 송 교수님은 그러시던데.”

“강해서가 외계인이라고요? 흐흐.”

아리는 혜원을 기가 쪽 빨린 눈으로 혜원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미생물들 밥 주고 똥 치워주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겠냐고. 쓰레기들 뱉어서 지들이 자폭할 지경이니까.”

“그럼 제가 저번에 망친 거랑 비슷한 이유네요.”

“그치. 난 그 말이 그럴싸하던데. 근데 원래 사람들이 다 자기 전공대로 생각하잖아. 내 근처에 경영학 대학원 다니는 애는 청소기 광고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러던데?”

아리는 자기가 웃기려고 기억해 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혜원은 아주 희미하게 피식 웃었다.

“청소기 광고한다는 좋네요. 송 교수님 말 대로라면 우리가 그냥 실험 동물이라는 거 아니에요. 기분 나쁘게.”

“그게 그리 기분 나쁜 일인가?”

“네? 당연하죠! 실험용 생쥐가 되는 게 좋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 생쥐라면 그렇겠지...” 아리는 생쥐를 실험에 썼던 떠올렸다.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내가 쓰는 실험 생물은 내가 만든 세균이잖아. 걔들이 자기가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할까? 뇌도 없고, 생각도 없겠지. 오히려 그 세균들은 내가 밥 보살펴주면 한 시간도 못 살아남아. 오히려 걔들은 나한테 벗어나는 게 나쁜 거지.”

“그건 세균이잖아요, 우린 사람이고.”

아리는 웃었다.

“그 청소부랑 우리 차이도 세균이랑 우리 차이 만큼 클 거 같은데. 어휴, 복잡하고 답 없는 이야기 하면서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이야. 그 공이 뭐든 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런가요...”

혜원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긴, 요즘은 정말 그 동그란 거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숭배를 한다고요?”

“응. 정문에서 지하철역 가는 길에 그 공터 있잖아. 부적합 판정 받고 철거된 핫도그집. 근데 거기다 플라스틱 막 쌓아놓고 무슨 설교를 하는 사람 있더라. 내가 그 길로 집에 가서 맨날 봐.”

“와...”

“근데 또 놀라운 건 그 사람들 중에 연구실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사람들 여기 안 오는 거고. 내가 저번에 봤거든.”

“그래요?”

“응. 난 잘 이해를 못 하겠더라.”

아리는 눈썹을 과장되게 움직이면서 한쪽 입술만 치켜 올렸다.

“그러게요... 아! 그런데, 강해서가 같은 인간이라기엔 또 지나치게 잘생기긴 했죠.”

“응?”

혜원이 눈을 반짝이면서 아리를 바라봤다. 아리는 갑작스럽게 바뀐 화제에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진짜 세상 남자들이 다 강해서처럼 생겼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인류 복지를 위해서라도 잡아다가 클론해서 세상을 꽉 채워야 한다니까요.”

아, 맞다. 원래 얘는 이런 애였지. 아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유전공학 하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섬뜩하잖아.”

“이게 나쁜 짓인가요?”

“음... 나중에 진행할 거면 프로젝트에 나도 꼭 끼워주라.”

혜원은 깔깔 웃고 다시 노트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이제 슬슬 연구실에 돌아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실에 돌아가기 싫은 것이 또 문제였다.

민수의 남편이 청소부를 발견한 다음 아리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첫번째로는 일단 주기적으로 연구실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다시는 연구실로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언젠가 찾아오겠지 하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찾아와 있을 때보다 더 불안하고 짜증나기도 했는데, 두 달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들이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민수도 변했다. 항상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활기차고 똑똑한 사람이 언젠가부터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실에 자주 드러나지도 않았고, 옛날보다 더 많은 과중한 업무를 떠넘겼다. 연구실 사람들의 원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민수는 마치 거액의 빚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훨씬 자주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리가 그를 5년 넘게 봐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리는 자기가 항상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대학원에서 능력 있고 인품도 좋으면서 돈도 그럭저럭 주는 교수 만나는 건 하늘에 별 따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연구실에서 일하는 근처 친구들은 교수 이야기만 나오면 당장에라도 쓸개를 뽑아 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일이 많다는 것만 빼면 아리는 민수에게 항상 감사하며 지냈다.

그랬던 민수가 갑자기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조바심에 찬 모습을 보이니 아리는 더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다. 불쾌하고 기분 나쁜 영화의 반전 속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또 연구실에 가면 민수를 만날지도 몰라서 아리는 몇 분 동안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아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그럼 들어갈게.”

“앗, 좀따 봐요.”

아리는 투덜대며 연구실로 발을 옮겼다. 제발 송민수가 없기를 바랐다. 요즘은 연구실에 잘 보이지도 않으니 빨리 자기 할 일 해치우면 된다면서, 아리는 연구실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러나 배양기 앞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은 민수가 보였다. 아리는 당장 발을 뒤돌려 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왔어?”

민수가 아리를 보고 말했다. 볼살이 살짝 빠진 민수의 광대뼈 밑으로 그늘이 졌다.

“앗, 네.”

“요즘 학생들이 내가 불편한가 봐. 요즘엔 연구실에 아무도 없네. 연구실에 한지현 씨도 안 들락날락거리다니 참 신기해. 수명 씨랑 연구실에서 술도 마시던 사람이. 그때 내가 얼마나 욕을 했는지...”

“아… 하하… 불편하긴요. 저희들이 교수님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리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가시방석에라도 기꺼이 앉을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민수는 아리를 지긋이 바라보았고, 아리는 그 눈길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아리 씨는 왜 내 연구실에 들어왔지?”

아리는 더듬대며 답했다.

“네? 저는 그야… 교수님이 좋은 분이고, 합성생물학이 정말 재밌어 보여서요. 해보니까 실제로 재밌고…”

“좋은 사람이라니, 고맙네. 요즘 내가 부담 주는게 아닐까 고민이 많아서.”

“아뇨, 아뇨.”

이렇게 안 하시면 부담을 좀 덜 줄텐데 왜 갑자기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아리는 마음 속으로 아주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민수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연 민수는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 마디 던졌다.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는 말아요. 곧 괜찮아지겠지. 안 좋은 일도 좀 있고 해서.”

아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왜 저럴까, 정말 괜찮아질까? 아리 마음 한 켠으에는 깊은 걱정도 있었다. 민수는 그에게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보면서 동고동락했던 사람이었고, 또 학부 시절부터 정말로 존경하는 교수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가 지금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까.

학교 밖으로 나온 민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였다. 지금껏 이렇게 빨리 퇴근한 적이 있었나 그는 잠시 생각해 봤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민수는 학교 밖 거리를 터덜터덜 돌아다녔다.

대학가의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중에 지나가는 사람이 좀 적은, 폐허 같은 공터에 웬 플라스틱 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그 더미들 사이에 어떤 광신도가 서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 창조주들께서 세상에 마침내 강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태평양의 쓰레기들을 걷어올리듯, 곧 믿는 자들의 영혼도 들어올리시리라고…”

설교하는 전도사 앞에는 플라스틱 제단이 당당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 깨끗한 플라스틱을 내놓았다. 신이 플라스틱을 거두어가니,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플라스틱이 가장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하는 짓이겠지. 2천년 전에는 신에게 송아지를 바쳤다는데 이제 플라스틱 쓰레기를 바치고 있었다.

저런 식의 종교는 전세계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고 했다. 기성 종교에서 그 쪽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동영상 몇 편 빼고는 제대로 된 경전 하나 없는 종교였지만, 현대 사람들은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수십 편의 경전보다는 실제로 세상에 강림한 기적 하나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얄팍해. 민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서 저 멍청이들을 흠씬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청소부가 자취를 감추고 몇 달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을 끌 거라고 민수는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기대와 정확히 반대로 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흰 공이 나타나서 알 수 없는 수단으로 쓰레기를 몽땅 집어삼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것 뿐인데, 그 알 수 없는 부분에 매료돼 거기에 이런저런 추측을 집어넣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추측은 그 청소부를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위대한 존재로 가정하는 것이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위대한 존재를 가정하는 것, 민수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는 숭배가 아니라 탐구였다.

그 꼴도 보기 싫었던 민수는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수십 킬로의 족쇄라도 단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집의 현관을 열면서 민수는 한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민수는 현관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민수는 한숨을 내쉬면서 신발을 벗었다.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구체가 그려진 포스터가 보였다. 거실의 한쪽 벽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봐왔는데,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거실 바닥에는 도경이 최근 열렬히 사 모은 청소부에 대한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민수는 구역질을 참으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외투를 대충 집어던진 민수는 그것을 걸지도 않고 안방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도경이 쓰는 멜론 향이 났다. 지긋지긋했다. 침대 옆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알림 시계가 있었고, 옷장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옷들이 있었고, 집 안에 플라스틱이 갑자기 많아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민수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이고 의아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도경은 식사에서만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다 하는 사람이었다. 플라스틱 쓰레기에 맞서싸우는 사람답게 플라스틱 물건은 가능한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고.

완고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민수가 도경에게서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그토록 강인하게 집중하는 자세에는 일종의 구도자 같은 자세가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없는, 어떤 세상의 거대한 질서를 믿고 따르는 신념에서 나온 도경의 행동은 민수에게 희망찬 선물이 되었다. 자신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세상에서 충분히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당당한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틀린 신념에 붙잡힌 도경의 모습은 추악했다.

소리가 지르고 싶었다. 그는 눈을 감고 신혼집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위안이 되는 생각이었다. 어쩌다 일상이 이렇게 꼬인 건지, 민수는 믿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잠이 드는 편을 택했다.

한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 민수는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났다. 도경의 실루엣이 보였다. 도경은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는 술 취한 그가 민수에게 섹시하게 보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왜이리 역한지 모를 일이었다.

“일어났어?”

“응.”

“나 뭐하다 이제 들어왔는지 안 물어봐?”

“뭐하다 왔는데.”

도경이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작은 책자였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민수가 인상을 찌푸리자 도경이 침대 옆에 있는 램프를 켰다.

“이게 뭔데.”

“뭔지 모르겠어?"

“지긋지긋해.”

“구세주시잖아. 자기야, 자기가 틀렸어. 세상에는 우리보다 뛰어난 위대한 존재가 있어. 바로 이 분이야.”

“몇 번을 말해. 됐어. 난 신경 안 써.”

민수는 몸을 옆으로 뉘어 도경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도경은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신경 안 써도, 난… 난 자기를 구해줄 거야. 사람들 앞에 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자기가 냉담하게 대하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

“그걸 신이라고 하네 이제.”

“쓰레기 치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존재한테 존경을 표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원래 네 생활을 헌신짝처럼 내버려도 되는거야? 신이 치워줘도 괜찮다구?”

“아니, 그 분은 허락하신 거라고.”

더이상 대화가 될 거 같지 않았다. 민수는 그가 곧 고기도 먹고 들어오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채식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가 도경이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오늘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거른 민수였지만, 모두 게워낼 거 같았다. 민수는 헛구역질을 또 한 번 했다. 시큼한 액체가 조금 올라왔다. 민수는 그 액체를 다시 억지로 삼키고는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경이 태평양에서 청소부를 목격한 뒤 도경의 가치관은 급속도로 변해갔지만, 자신 삶에서 그토록 철저히 지키던 가치관마저 헌신짝처럼 내버릴 것이라고 민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민수가 닫은 문을 열고 도경이 다가왔다.

“자기야, 왜 그래?”

“노예야? 청소부가 우리보다 뛰어나면, 우리가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하냐고?”

“자기도 자기가 만든 생물을 조작하잖아. 자기가 나쁜 일을 하는 거야? 좋은 일 하려고,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잖아. 그 생물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야 자기도 기분 좋은 거 아냐? 그럼 그 생물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따라야 하지 않을까?”

민수는 도경에게서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토할 것 같아.”

민수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투 없이 나간 그의 살결 위로 밤의 차가운 공기가 훅 불어닥쳤다. 민수는 정신 없이 거리를 헤매었다. 도경이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민수는 알았다. 그는 차마 도경을 뿌려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물리적으로 해꼬지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얄팍한 믿음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십 분을 걷고 또 걷던 민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단히 익숙한 광경이었다. 밤의 대학가, 여기저기 빛나지만 낮보다는 훨씬 한적한 공간.

생각 없이 걸으니 민수의 다리가 그를 가장 자주 나다니는 공간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계속 걸었으면 연구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민수는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양기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그에게 외칠 것 같았다. 도경이 한 말을 그에게 또다시.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늘코 위에 수십만 마리들이 올라갈 수 있는 생물들이지만, 민수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유전자 빼고는 전부 제거해버렸기에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싸는 것 밖에 없는 생물들이지만, 민수는 그들이 자신에게 이런 지독한 경배를 보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구역질이 났다. 민수는 가만히 섰다.

연구실에 들어가기까지 많이 망설였지만서도, 아리의 오늘 실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있었던 수많은 하루하루 중에서도 특히 결과가 좋은 날이었다. 두 달 넘게 매달렸던 세균이 상당히 복잡한 구조의 단백질을 쑥쑥 뽑아내는게 관찰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일곱 시 반이었다.

“그래, 오늘은 좀 빨리 퇴근해도 괜찮아. 교수님도 안 계시고...”

아리는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도 않고 후다닥 튀어나왔다. 오후 아홉 시 전에 퇴근을 한 적이 가물가물했는데,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일찍 집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볼까 아리는 고민하며 지하철 쪽으로 달렸다. 그러다 익숙한 광경을 보았다. 플라스틱 제단이었다. 사람이 없어 좀 한산한 밤에 보니, 중앙에 3D프린터로 찍어낸 동그란 형상이 있었다. 그 형상은 거리의 은은한 빛을 받아 밤중에 조금씩 드러나 있었다.

저런 거를 숭배까지 할 수 있다니 참 상상력 뛰어난 사람 많아. 아리는 한숨을 쉬고 지하철 쪽으로 다시 한 발짝 옮겼다.

“저리 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민수의 목소리였다. 아리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단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민수가 어떤 남자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남자는 두 손을 앞쪽으로 내민 채로 약간 자세를 굽히고 있었다.

“민수야, 왜 이래. 내 말을 한 번 들어줄 수는 있잖아.”

“내가 안 들어줬다고 생각해?”

아리는 다급히 둘의 시선이 닿지 않은, 그늘진 곳으로 숨었다. 둘 다 꽤 흥분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도 남자가 신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는 자기가 호기심 때문에 이렇게 둘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교수님이 위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됐어. 벌써 몇 달은 참았어. 이제 그만 하자.”

“그만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남자는 울먹이고 있었다.

“네가 그 날 이후로 계속 이상한 소리 듣는 거 못 참겠고, 또 내가 너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그래서 그만 하자는 게 무슨 말인데.”

“너도 알면서 왜? 이혼하자고. 내가 결혼한 사람은 너 같은 남자가 아니야.”

아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냐, 아냐. 너 정말 실수하는 거야...”

유도경은 애원하다시피 하면서 거의 빌빌 기기 시작했다. 아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가, 손에 잔뜩 땀이 배어 있어서 그만 휴대폰이 액정부터 떨어졌다. 아리는 휴대폰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어두컴컴한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찾는 아리의 귀로 불길한 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다가오지 마!”

민수가 외쳤다. 아리는 쿵쾅거려 터질 것만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계속 더듬었다. 그 뒤로 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정제되지 않은 경이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야. 저기... 저걸 봐.”

“뭐야, 뭐야!”

“드디어...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송민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리는 휴대폰을 찾았다. 울음이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다. 아리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도저히 손가락이 맘 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휴대폰에 대고 외쳤다.

“경찰서에 신고해 줘. 빨리, 빨리.”

곧바로 경찰서로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아리는 두 손을 모아쥐고 다시 둘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쌓여있는 플라스틱 더미만 보였다. 아리는 급히 제단 가까이로 뛰어나왔다. 그때 경찰서로 한 연락이 늦게나마 닿아 휴대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 ...경찰서입니...”

아리는 플라스틱 제단 쪽으로 달리면서 근처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위에 서 있었는데... 왜 이렇게 신고를 늦게 한 거지? 아리는 눈물을 몇 방울씩 떨구면서 제단 위에 걸터 앉았다.

“헉!”

그때 땅이 흔들렸다. 아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제단 위로 쓰러졌다. 처음에는 땅이 흔들리나 싶었지만, 아리는 순간 자신의 몸에 걸린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을 때처럼, 조금 후에 자신의 신체에 느끼는 그 무게감은 돌아왔다. 아리는 아주 벅차오르던 심장에 남은 공포의 앙금만 느끼면서 주위를 마구 둘러보았다.

세상이, 건물과 도로와 가로등과 차들이 아래쪽으로 침강하고 있었다. 아니, 아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가 앉은 제단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리는 제단 근처에 놓여있던 수많은 플라스틱들이 함께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리는 공포에 짓눌리는 느낌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아리는 구멍이 뚫린 달이 그에게로 내려온 줄 알았다. 아리는 인터넷에서나 보던 동그랗고 하얀 물체의 구멍 속으로 자기가 빨려들어가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리는 기절하기를 바랐지만 의식이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리는 공포에 질린 채로 점점 커져만 가는 검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민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는 어딘가에 널부러져 있었다. 몸의 곳곳이 살짝 욱신거렸지만 놀랍게도 개운했다. 상반신을 일으키고 민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 안방과 비슷한 넓이의 방이었다. 그는 곧장 여기가 사람 사는 방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방의 벽이 곡선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장도 완만한 곡선을 띄고 있었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거기다 벽의 재질은 하얀 도자기 같은 재질이었는데, 대단히 말끔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민수는 집이 아니라 고급 전자제품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민수는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자기가 미쳤거나, 아니면 그 청소부 안에 들어와 있거나. 어제, 몇 시간 전, 혹은 몇 분 전에 그는 대학가 거리의 으슥한 곳에 있는 공터에서 남편 유도경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이혼 선언을 한 순간 남편이 자기한테 다가와 자기 손을 잡았고, 반항하려고 하는 순간 남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민수는 하늘에서 웬 동그란 공이 도경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청소부가 도경이 입고 있는 합성 섬유 옷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 맞았을 테다. 도경은 정말로 보기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 구체와 민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면서 신음을 내는 듯한 그 표정. 하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들과 함께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곳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별로 아름다운 구원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민수는 심지어 바닥마저 어느정도 곡선을 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이 이렇게 단단한데 곡선이라니, 온 몸이 욱신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방 안에는 아무런 흠결도 문도 없었다. 내부가 밝긴 했지만, 대체 어떤 광원에서 빛이 흘러나오는지도 민수는 알 수 없었다. 방의 벽 전체가 하얀 빛이 나오는 액정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드러누웠다. 여전히 허리가 불편해서, 민수는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아서 몸을 꿈틀거렸다.

그때 벽을 뚫고,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딱딱한 도자기 비슷한 무엇인가로 되어 있는 하얀 벽을 물의 장벽처럼 손쉽게 뚫었다. 민수는 경악했다.

“헉!”

처음에 민수는 사람이 들어온 줄 알았다. 하지만 몸과 얼굴 구석구석이 사람과 조금씩 달랐다. 누가 봐도 딱 드러나는 차이는 없었지만, 약간의 차이가 조금씩 모이고 모여 전혀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오직 그것의 피부만이 분명히 비인간적이었다. 그 피부는 대충 보기에도 그 광택이 사람의 피부 같지 않았다. 그것은 백자처럼 맨들거렸다. 진짜 도자기 피부였다.

민수는 문득 그 도자기 얼굴이 자기 연구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한혜원이 사족을 못 쓰던 배우 강해서와 아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자기 인간이 민수에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 발음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민수는 구석으로 주춤주춤 들어갔다. 그 도자기 얼굴을 내려치면 도자기처럼 깨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도자기 인간은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수에게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도자기 인간은 멈췄다. 그는 계속 뭐라뭐라 소리를 내뱉었다. 민수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뭐, 뭐라는 거야.”

도자기 인간의 반질반질한 피부가 살짝 구겨지면서 표정이 드러났다. 인간과 놀랍게 유사했지만, 대단히 불쾌했다. 도자기 인간은 자신의 오른쪽 손을 들어 귀에다 갖다대더니 몇 번 두드렸다. 민수는 그것이 옛날에 잘 썼던 이어폰의 제스쳐 동작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자기 인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들려요?”

“어... 어...”

민수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말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 인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말했다.

“어휴, 이 싸구려 번역기. 빨리 갈아치워야 하는데. 여튼 반갑습니다.”

“뭐... 뭐야?”

“Maa350계 출신인데요. 어떻게 하나, 어디 명함이라도 한 장 드릴까요? 이름 발음 못 하실텐데...”

“다... 당신은...”

“똑똑하신 분이니까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아시겠죠.”

민수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외계인이에요?”

“그 외계인이란 단어, 되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인데... 사업 하면서 별별 말을 다 들어 보네요. 뭐, 원하는 대로 부르십쇼. 지구 인간들은 아직 개화가 안 됐을테니까요.”

“지금 도대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아, 너무 이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지금 당황스럽거든요. 저는 플라스틱 채취하러 온 건데 이렇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아,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따라오시죠. 여기 있으시면 가르쳐드리기도 힘들 것 같은데.”

외계인은 민수 쪽으로 자기 손을 내밀었다. 민수는 그 손을 붙잡았다. 정말로 도자기를 만지는 느낌이었는데, 너무 차가워서 민수는 화들짝 손을 뗐다가 다시 손을 잡았다. 외계인은 손쉽게 민수를 일으켜 세워주고는 방금 전 자기가 들어온 벽 쪽으로 향했다.

“이거 그냥 이렇게 나가시면 돼요.”라고 말하면서 외계인은 벽에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밀어넣었다. 순식간에 그 몸은 벽과 동화됐고 외계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민수는 천천히 벽으로 걸어갔다. 동그란 바닥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다. 민수는 벽 위에다 손바닥을 댔다. 딱딱했다. 외계인의 손의 촉감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민수는 용기를 내서 손에 힘을 줘 벽 쪽으로 밀어넣어 보았다.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벽 안으로 들어갔다. 손이 갑자기 벽 안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민수는 깜짝 놀라면서 손을 빼냈다. 손은 바로 튀어나왔다. 약간 묵직한 물 속에 손을 집어넣는 느낌과 다름 없었다. 수은에 손을 밀어넣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몸을 밀어넣는 것까지는 거부감이 덜했지만 얼굴을 그 속으로 집어넣는 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민수는 두 눈을 꾹 감고 몸을 통과시켰다.

벽이 반대쪽으로 민수를 뱉어냈다. 민수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뒤를 바라보았다. 벽은 언제 민수를 품었냐는 듯 똑같은 곡선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외계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아, 네. 금방 내보내드릴테니 걱정 마세요. 아주 살짝 문제가 생겨서.”

민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에 테니스 코트 네 개가 들어갈 크기는 되는 반구 모양의 커다란 방이었다. 민수는 방 중앙에 방금 전에 자기가 빨려들어간 구멍과 비슷한 크기의 구멍이 있는 것을 보았다. 민수는 물었다.

“저...저기로 내가 들어온 건가요?”

“네, 그렇죠. 그리고 저기로 나가실 거고요.”

“대체 무슨 문제가...”

“저쪽으로 같이 가보시면 아실 겁니다.”

도자기 외계인은 구멍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배려가 없는 속도감이었다.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의 예의는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민수는 그 뒤를 따랐다. 도자기 인간이 구멍 가까이로 다가가자 구멍 가장자리에서 난간이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민수가 보기에는 솟아오른다기보다는 희디흰 자기가 스스로 난간 모양으로 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기계 같기도 하면서 생물 같았고, 동시에 고체 같으면서도 액체 같았다.

“저기 보시죠.”

난간에 기대서 외계인은 구멍 안을 가리켰다. 민수는 쫄래쫄래 따라가 그쪽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가, 다시 공포감에 질려 주저앉을 뻔 했다. 그 구멍 밑에는 바닥이 깔려 있었는데, 그 중앙에 유도경이 멍청한 꼴로 주저앉아 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민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아니, 저 사람이 날 왜...”

밑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민수의 이름을 부르는 도경의 목소리였다. 민수는 짜증나고 화나고 무섭고 민망했다.

“자기야!”

“아, 시발...”

민수는 머리를 짚었다. 도자기 인간이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원래는 그냥 내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저 분 때문에 지금 이야기가 안 돼서요.”

“이야기가 안 되다뇨?”

“쩝, 보세요.”

외계인이 난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도경의 괴성이 더 커졌다.

“민수 씨, 봐요. 지금 그 분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냈다고요. 그리고 당신은 바로 그 옆에 서 있고... 내가 옳았던 거야.””

외계인은 긴 한숨을 쉬면서 난간에서 몸을 뺐다.

“자꾸 이러시니까 밑에 내려가셔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몰라서요. 저로서도 난감하거든요. 그러니 어찌 잘 설득 좀 해 주시면 안될까요. 보니까 친구나 뭐 비슷한 관계신 거 같던데.

민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친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도 설득이 안 됐던 사람인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설득을 해요. 저도 지금 어이가 없는데.”

“아 진짜... 이건 상상도 못했네.”

도자기 인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머리카락은 마치 싸구려 봉제인형의 털 같은 질감이었다.

“뭘 상상을 못 해요? 애초에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가져간 이유는 뭐에요?”

“음... 그게, 그게...”

“내가 이 상황을 이해를 못 하겠는데 어떻게 설득을 해요.”

외계인은 유도경이 있는 곳을 살짝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플라스틱이라는 게 우리한테는 꽤 귀한 물건이라서요. 저는 그걸 수집하러 온 겁니다. 비싼 값에 팔 수 있거든요.

민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플라스틱 값을 잘 쳐주니까...?”

도자기 인간은 갑자기 전혀 다른 쪽을 쳐다보았다. “잠시만요. 다른 분이 깼네요.” 하고 그는 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간 다음, 벽과 하나되어 사라졌다. 민수는 멍한 표정으로 도자기 인간의 뒤를 바라보다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민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도 꺼내 보았다.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곧 외계인이 다시 벽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로 누군가가 뻣뻣하게 굳은 듯한 몸으로 툭 튀어나와 방금 전 민수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민수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바로 소리질렀다.

“아... 아리야!”

아리가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아리가 외계인을 앞지르고 민수에게 달려왔다. 민수는 정말 오랜만에 자기 편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달려오는 아리를 꼭 껴안았다. 민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교수님... 퇴근하다가 교수님 거기 계신 거 보다가...”

“너 오늘 빨리 퇴근했구나...”

“아니... 교수님... 지금 상황에서 그건 크게 중요한 게...”

민수는 말을 끊고 아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십 초는 지나서야 민수는 포옹을 풀었다. 아리는 간신히 빠져나왔다. 외계인이 다가왔다.

“서로 아는가 보네요.”

“아, 예.”

“그래도 둘이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턱도 없을 거 같은데. 근데 왜 자꾸 설득하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냥 내보내면 안돼요?”

외계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

“예?”

“제가 아무리 밀수꾼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권리는 존중합니다. 어떻게 동의 없이 제가 태운 지성체들을 강제로 내리게 할 수 있습니까?.”

민수는 이 모든 꼴이 정말 우스꽝스러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아리는 방금 전에 민수가 지었을 만한,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옆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민수는 아리에게 방금 전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리는 이제 민수가 짓고 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똑같이 짓기 시작했다.

“아니, 뭔 놈의 플라스틱을...”

아리는 애매모호한 말투로 외계인을 비난했다. 외계인은 멋쩍게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아유, 뭐... 일단 한 번 시도라도 해보시죠.”

외계인은 까딱 손짓을 했다. 구멍이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민수와 아리는 화들짝 놀랐다. 외계인은 웃음을 지었다.

“이 쪽으로 못 오게 지켜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가 보이고, 그 다음으로 유도경이 보였다. 도경은 서 있다가 구멍이 끝까지 올라오자 민수를 향해 달려왔다. 민수는 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외계인이 그의 한쪽 손을 잡고 눈을 찡긋거렸다. 도경은 구멍 안쪽에서 바깥으로 뛰어나오기 직전에, 바닥이 순간 모래늪처럼 변하더니 그의 발이 파묻혔다. 도경은 발을 잡아빼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경은 소리질렀다.

“자기야, 내 말이 맞잖아. 우리 위에 있는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우리는 그 질서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고.”

“이게 무슨 위대한 존재야!? 그냥 장사하러 온 거구만!”

“자기야, 이건 전에 만들었던 술이랑 완전히 똑같은 거야. 사람이 관리를 안 해주면 이스트는 알코올을 죽죽 싸다가 죽어. 하지만 사람이 있으니까 이스트도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사람도 술을 즐길 수 있는 거잖아.”

“우리가 이스트야? 네가 그런 꼴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행복해져?”

민수는 쌍소리를 내뱉었다.

“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생긴 거잖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민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저 사람 설득 못해요. 그냥 쟤도 데려가 플라스틱이랑 같이 파시든가요.”

“예? 그건 노예제...”

“노예가 아닙니다. 전 괜찮아요!”

도경이 외치는 걸 듣고 민수는 질색을 하며 주저앉았다. 아리는 민수와 도경, 외계인 셋을 계속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한 마디 했다.

“근데... 근데 왜 하필이면 플라스틱이지?”

“아, 이게 저희한테는 질감이랑 색감이 대단히 독특하게 느껴지거든요. 가공도 잘 되고 여러모로...”

“아니, 그게 아니라, 느네가 그냥 생산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기술이 뛰어난데. 플라스틱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거 같은데.”

“음... 그게... 적당한 비유가 될런지 모르겠는데요. 당신네들도 인공 진주보다 조개가 만든 진주가 훨씬 더 값지지 않습니까?”

아리는 팔짱을 꼈다.

“그런데요?”

외계인은 계속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 기술이 원시적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고 하니까...”

“되게 불쾌하네. 우리가 무슨 조갠가?”

외계인은 앞으로 손을 내저었다.

“물론 조개랑은 다른 존재죠. 저희도 사실 이 행성에 플라스틱까지 날 거라고는 생각도...”

민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럼 이 전에도 지구에 쭉 왔던 거에요?”

“...아니, 잊으세요. 내가 말을 잘못했네요.”

아리는 코웃음을 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얘가 우리 설득도 못 하면서 저 사람 설득하라고 시키는 거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그냥 다 똑똑히 말하면 좋을텐데.”

“하... 이거 다 들통나면 돌아가서 철저히 털리겠구만. 이게 다 내 탓이지 어쩌겠어...”

외계인은 자포자기한 듯이 바닥에 앉았다.

“예. 솔직히 말씀드리죠. 원래는...”

피부가 도자기가 아닌 사람 셋 중 둘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복음을 쓸 사도가 된다는 흥분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 고향은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우주에서 과학기술이 제일 발달한 곳입니다. 인간들을 깔보는 건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참 빨리 태어난 것일 뿐이죠. 아직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행성은 채 10%도 우주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몇만 년만 지나도 인간들이 우리 수준에 다다르리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종류의 우주문명학에 대해서는 제가 조예가 그리 깊은 편이 아니니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저희가 아무래도 먼저 태어난 종족이고 하니까, 은하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관찰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다른 생명들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생물학은 대표적인 과학 분야들 중에서도 제일 복잡한 것을 다루는 분야 아닙니까? 복잡한 만큼 기본적인 규칙을 세우기가 힘들죠.

네? 물리학 외의 과학은 우표 수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고요? 이런 말 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신네들 말로 하자면 역시 사람 사는 꼴은 다 거기서 거긴 거 같습니다. 저희들도 비슷한 말 했던 유명한 과학자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수소 원자는 우주의 어느 곳에 가든 똑같지만, 거의 똑같은 환경에서 나타난 생물들도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구에서 나타난 생물만 해도 얼마나 다양합니까. 물리학 같은 근본적인 법칙에 대한 정리가 거의 끝나고 나니까, 다른 별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우리가 전혀 모를 생물들을 찾아보는 것이 제일 재밌었던 거죠.

그때 사람들이 특히 흥미롭게 생각했던 분야는 유전자였습니다. 저희도 당신들과 비슷하게 여러 세포들이 모여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하지만 유전 정보가 기록되는 방식은 당신들과 많이 달라요.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저도 그걸 많이 공부하지는 않아서 지식이 부족하고요, 여튼 그 결과로 저희는 유전 정보에 쓸모없는 부분이 거의 남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유전 정보의 98%가 의미 없는 정보라고들 하죠.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 98%에 아예 쓸모없는 정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역할을 갖고 있는 것들도 꽤 많죠. 하지만 우리 종족의 유전자는 분명한 뜻을 품고 있는 것들만 존재합니다. 그런 화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이런 내용을 꽤 잘 알고 계시네요. 저희야 종족이 좀 워낙 오래 살아서 쓸데없는 공부를 할 시간이 대단히 깁니다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지 않나요? 어쩌다 이런 내용을 다... 아, 전공이시라고요? 아니, 과학자셨군요. 관련 분야를 연구까지 하시는군요. 어떤 내용인지 물어봐도... 아, 합성생물학이요? 그게 뭔데요? 네, 네. 당신네들 과학이 그만큼 발달했습니까? 놀랍군요.

미안합니다, 깔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네, 네. 우리 선조들이 가장 놀라워한 건 우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물들이 유전 정보의 절대 다수가 쓸모 없는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낭비가 있는데 생물이 잘 번성할 수 있나? 뭐 처음에는 불가능하다는 말도 많았습니다만, 지금 당신들이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우리의 지식을 실험을 통해 더 확장하고 싶었습니다. 음... 예. 그래서 저희는 당신들이 지금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와 다른, 당신들 같이 유전 정보 대부분이 쓸모없는 생물들을요. 우리는 생명이 그런 특성에서 어떤 이점을 갖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당신네들 기준으로 벌써 수십억 년을 진행하고 있는 연구입니다.

네, 맞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여러 행성에 흩뿌린 생명체들 중 하나가 진화해서 탄생한 존재들입니다. 은하 전체에 당신들의 친척이 퍼져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이 이런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어낼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플라스틱이라니, 당신들에게는 쓰레기겠지만 우리한테는 이만큼 재미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이런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걸 얼마 전에 제가 발견했죠.

아닙니다. 당신들을 특산품 공장으로 쓰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인간들의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시스템 때문에 이런 신기한 특성이 나타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플라스틱 팔아치울 생각하면서 한 얄팍한 추측이고요.

저는 당신들과 무슨 우리 은하 생물의 대표 자격을 놓고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면 당신들을 만든 것도 사실이고, 당신들을 어떤 면에서 이용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들을 얕보거나 비난하려고 숨긴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웬만하면 숨기려고 했을 뿐입니다. 우리 법도 관찰만 하게 돼있는데, 사실 당신들 쓰레기 좀 치워주는 것 정도는 서로 좋을 거다 생각했어요. 일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제 제발 어떻게든 사람들끼리의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저는 최소한의 윤리는 지키면서 장사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지구에서 사람들 끌어올린 거 들키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만든 생물한테 허가 없이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된다구요.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주선 안에서 급속 냉동된 것처럼 긴 침묵이 흘렀다. 송민수는 입을 떡 벌린 채로 주저앉아 있었고, 유도경은 황홀경이라도 체험하는 듯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쳐박고 있었다. 김아리는 둘을 돌아가면서 바라보았는데, 둘다 넋이 줄줄 새어나간 것처럼 보였다. 도자기 사람도 썩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는 팔뚝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이 손톱을 뜯는 것과 비슷한 행동 아닌가 하고 아리는 추측했다.

“교수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몇 년 동안 기댔던 사람에게 희망을 품고 아리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도 몰라.”

차가운 답이 돌아왔다.

아리는 도자기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뚝을 내려놓고 아리에게 뭔가 손짓을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외계인은 계속 몸을 움직였는데 아리는 체조라도 하나 했다. 그러다 외계인이 굉장히 답답해하며 한숨을 푹 쉬자 아리는 그게 제스쳐라는 걸 깨달았다. 외계인의 도자기 피부가 더욱 색다르게 다가왔다. 말을 능숙하게 줄줄 늘어놓는 모습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알아들어요?”

“번역기를 새로 샀어야 했는데, 그놈의 원가절감 때문에... 지금 괜찮으신 분은 당신 뿐인 거 같은데요. 괜히 말했나...”

도자기 인간은 ‘골칫거리가 두 배가 됐네’라는 말을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저는 안 내보내줄 거에요?”

“원하신다면 제가 막을 수는 없죠. 하지만 친구들을 버리고 가시겠습니까?”

“저 남자는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는데... 교수님은 데리고 나가야죠. 에휴...”

아리는 민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민수는 주춤거렸고, 그의 눈이 아리의 눈과 마주쳤다. 적어도 완전히 정신을 잃어서 굳어버리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모르겠다.”

“나가셔야죠.”

아리는 주저앉은 민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수는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는 자세를 낮춰 민수의 팔뚝을 잡고 위로 당겼다. 민수의 팔이 저항없이 딸려 올라왔다. 아리는 팔에 최소한의 무게 빼고는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민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너는 동력이 뭐야?”

“예?”

아리는 살짝 놀란 채로 민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삶을 무슨 재미로 살아가니, 넌?”

“어, 저는... 그냥, 실험 결과 잘 나오면 좋고, 퇴근할 때 기분 좋고, 영화 보면 기분 좋고... 가끔 맛있는 거 먹고요. 혜원이랑 얘기하면 재밌고...”

“좋겠다.”

“왜 그러세요, 교수님.”

“나나 저 인간이나 쓸데없는 이상을 가져서 문제야.”

“교수님, 그 이상이 있으신 게 저는 대단히 부럽기도 한데요. 삶에 목적의식이 있단 거잖아요? 저는 그걸 잘 이해도 못하고, 약간 그냥 물 흘러가는 듯이 사는데 이게 되는가 싶기도 하고...”

민수는 현기증이 나는지 아리의 팔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그게 좋은 것 같아. 넌 지금 이 얘기 들으면서 화가 안 나니?”

“전 사실 그러려니 싶어요. 교수님, 단 거 먹는 생각해 보세요. 나가서 저랑 같이 케이크 드시죠. 제가 괜찮은 데 아는데...”

“나 케이크 안 먹어.”

아차, 아리는 민수가 완전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했다. 이전에는 그런 말실수를 하면 민수는 대단히 불쾌해 하고는 했는데, 지금은 그냥 덤덤히 말할 뿐이었다.

“죄송해요.”

“내가 이러는게 너한테는 우스울 수도 있겠다.”

“아니에요. 그런 생각 안 해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내가 봐도 웃겨. 삶에서 내 나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린 진짜로 초라한 존재였어.”

“내려가요. 교수님. 지금 그런 생각해봐야 우울해지기만 하실 거 같아요. 어쨌든 우리는 살아있잖아요.”

“알았어.”

민수는 아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도자기 사람이 “아, 가신답니까?” 하고 반가워했다. 아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경 쪽을 바라보았다.

유도경은 무릎을 꿇고, 눈빛으로 불이라도 지필 것 처럼 도자기 사람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민수와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였는데, 12촌 정도 떨어진 부유한 친척이 강남에 건물 세 채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연락을 방금 막 받은 사람 같기도 했다. 그의 발을 묶고 있던 족쇄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는데도 그는 바닥에 무릎을 박고 있었다. 들어보면 벌써 뿌리가 자라 있을 것만 같았다.

민수는 아리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한 채로 도경에게 말했다.

“나가자. 민폐야.”

도경은 그를 흘깃 쳐다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야. 이제야 찾아헤매던 답이 나타났어.”

기쁨에 겨워 줄줄 말을 늘어놓은 그는 눈을 감았다.

아리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교수와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그리고 도자기 사람을 둘러보았다. 도자기 사람은 이제 이 상황에 재미라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리는 팝콘이라도 하나 안겨줘야 하지 않나 고민도 잠시 했다. 민수는 그 잠시 사이에 다크 서클이 확 진해지고 머리가 하얘지고 볼살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고, 도경은 오랫동안 불편한 자세로 있는데도 상당히 행복하고 활기차게 보였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이 하는 같은 말을 들었는데 반응이 이토록 극적으로 다를 수 있을까. 그 이상이 실현되든 말든, 의지할 존재가 있든 없든 자기가 먹고 싸고 자는 건 다 똑같은 건데.

“...이용해.”

아리는 민수의 기어갈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네?” 아리는 다시금 쓰러지려고 하는 그를 품 속에 안으면서 되물었다.

“쟤가 거절할 수 없도록 해.”

“어떻게...”

“신념을 이용해.”

“아.”

아리는 무언가를 깨닫고 민수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민수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아리는 도자기 인간에게 손짓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리 와봐요.”

“네? 뭐 답이 나왔습니까?”

“조용히, 조용히.”

“앗.”

도자기 인간은 아리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아리는 도경을 바라보면서 외계인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말하세요. 그대로... 목소리도 낮춰요.” 그 말을 듣고 외계인은 아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먹힌다고요?”

“빨리 하라니까요.”

외계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도경 쪽으로 다가갔다.

“일어나십시오.”

도경이 눈을 뜨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벅찬 가슴을 가눌 수 없는지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민수는 고개를 돌렸지만, 아리는 과연 자기가 한 말이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서 그걸 똑바로 보았다. 도자기 인간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목소리를 최대한 내리깔고 말했다.

“음, 저는 당신의 구원자고 당신의 목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요.”

“예. 저는 믿습니다, 아니 압니다.”

“그럼 내 말 잘 들으십시오. 그런 존재로서... 나는 당신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내려가십시오. 나를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스스로도 믿지 마세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당신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하... 하지만...”

도경의 동요는 너무나 뚜렷해서, 아리는 손을 내뻗으면 뿜어져 나오는 감정을 직접 만질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후들후들 다리를 떨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명령입니다. 더이상은 말하지 않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도경은 침통하게 고개를 떨궜다.

“후, 이제 됐네. 당신들 참 모를 종족들이군요.”

도자기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아리는 그 뒤로 들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낼 수 없는 게 분명한 소리도 들었는데 아마 그게 그들의 쌍소리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외계인은 구멍 쪽으로 팔을 내뻗었다.

“들어가시죠. 오신 곳에서 그대로 내려드리겠습니다.”

“저 사람 옆으로 가라고요? 저는...” 아리가 망설이자 민수가 즉시 제지했다. “괜찮아. 지금 쟤는 아무도 해꼬지 못할 거야. 가자.”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민수를 천천히 부축하면서 도경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침내 셋이 같은 자리에 섰다. 아리는 도경을 곁눈질했다. 그는 거의 완전히 굳어 있어서, 너무나 잘 깎은 조각처럼 보였다. 다만 그의 손은 덜덜 떨렸다.

“자, 그럼 내려갑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신 기념품 하나씩 챙겨드릴테니까 내려가서 확인해 보세요. 셉니다. 셋...”

도자기 인간은 자기 손목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리가 언뜻 보니 그 손목에 휴대폰 액정 같은 무언가가 나타나 있었다. 그걸 자세히 관찰하기도 전에 청록색 빛이 셋에게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것은 분명히 빛처럼 느껴졌지만 놀랍게도 셋의 시야를 차단했다. 도자기 인간의 모습이 흐릿해져갔다.

“둘...” 청록색 빛이 점점 진해져갔다. 도자기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안돼!”

도경이 외치면서 뛰어나갔다. 아리와 민수는 깜짝 놀라 소리도 못 내고 도경이 멀리뛰기 선수처럼 구멍의 경계 바깥쪽으로 붕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리는 밖에서 이제 익숙해진 외계인이 당황하는 것을 들었다. 아리는...

민수와 아리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동이 막 트고 있었다. 아리는 주변을 막 둘러보았다. 학교 안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그는 하늘로도 시선을 돌렸는데, 구체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아리가 말했다.

“그 남자는...”

“여기 있어.”

민수가 아래쪽을 보고 잔디 위에 앉으면서 말했다. 아리는 민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힉!” 아리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깔끔하게 절단된 다리 한 쪽이 남아 있었다. 단면은 불로 지진 것처럼 깔끔히 폐쇄되어 있었고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아리는 그것이 도경의 다리임을 직감했다.

“어... 어떻게... 이게...”

“완전히 빠져나가진 못했나 봐.”

민수는 하늘을 쳐다봤다.

“교, 교수님. 그 사람이 이럴 줄 알고 계셨나요?”

아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민수에게 물었다.

“같이 내려와서 폐인 될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어... 어떻게...”

“방향은 정반대여도 이상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죽지는 않겠지.”

민수는 하늘을 향해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길게 내더니 말했다.

“그 열정의 세기가 이렇게 셀 거라고는 나도 몰랐네. 사랑한다고 소름돋는 말 하면서, 결혼까지 해놓고 결국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김아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송민수 교수는 불어오는 새벽의 바람을 만끽하면서 눈을 감았다. 신념의 힘은 도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아리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김아리와 송민수는 그 후로 수많은 기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구체에 유도경과 함께 빨려들어가는 것, 학교 언덕에서 잘린 다리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것이 그대로 촬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구체에 빨려들어간 것이 확증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들이었다. 곧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사분의 일은 두 여자의 얼굴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구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애를 태우면서 경험을 낱낱이 말하면 교수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을 만지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민수와 아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은 몇 주 만에 빠르게 식었다. 둘은 다시 연구실로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됐다. 거리에서 뜬금없는 시선을 많이 받게 되긴 했으나.

송민수 교수는 그 이후로 이전과 같은 열정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젊은 나이 때부터 항상 들었던 대가 칭호를 유지하긴 했지만, 학회에 나갈 때마다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쟤는 그 사건 이후로 맛이 갔더라”라고 다 들리는 조롱을 견뎌야했다.

그에 반해 김아리는 이전보다도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1년 뒤에 박사 학위를 받는 데 성공했다. 연구실의 개미지옥에 빠져 학부생 인턴에서 석사 1학년이 된 한혜원은 그 모습을 보고 아리가 그 구체 안에서 송민수의 정신을 빨아들이기라도 했는지 의심했다.

아리가 학위를 받고 며칠 뒤 혜원과 단둘이 술을 한 잔 할 때 혜원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었다. 술을 꽤 많이 마시고 볼이 새빨개진 아리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서, 최대한 따라해봤을 뿐이야.”

혜원은 몇 번이고 그게 무슨 뜻인지 되물어 봤지만 아리는 다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태평양의 청소부에 대한 목격담은 간간히 들려왔지만, 제대로 된 증거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목격자들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도 사진이 훼손된다면서 뭔가 보호 장치가 추가된 거 같다는 말을 남겼지만 조롱만 받을 뿐이었다. 목격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청소부가 사라졌다는데도 쓰레기가 쌓이지 않는 것을 널리 알리는 단체를 조직했으나, 진지한 취급은 받지 못했다.

그들의 마스코트는 다리 한 쪽 없는 남자였는데, 목격자들 중 대부분이 구체의 검은 구멍 속에서 다리 한 쪽 없는 남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일관되게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구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으나 표정 한 켠에 진한 쓸쓸함이 묻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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