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도연 뱀을 위한 변명

2019.05.01 00:0005.01

뱀을 위한 변명

해도연


에베는 나뭇가지 끝에 걸린 자기 머리만 한 먹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사료만 먹었으니까. 진짜 음식이라는 걸 처음 봤으니 신기해 할 수밖에.

"이상한 거 아냐. 어서 먹어봐. 두 번 다시 사료 따위는 먹고 싶지 않을 거야."

내가 먹이를 머리 위에서 흔들자 에베는 가늘고 긴 몸을 위로 뻗고 얼굴을 내밀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나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에베를 바라봤다. 에베는 그것도 모르고, 순수하고 교활한 눈빛으로 먹이만 바라봤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넌 아무 잘못 없어."

에베는 내 말이 면죄부라도 된 것 마냥, 빨간 혓바닥을 내밀어 먹이의 표면을 핥았다. 에베의 눈이 밝아졌다. 맛도 보기 전에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에베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에베의 벌어진 입속에선 새하얀 이빨들이 조용히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잔인한가.
자연 속에서 그들만의 평화와 사랑, 경쟁을 겪으며 살아가던 동물들을 이용하기 위해 잡아 와 기른 것에 모자라, 강제적인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고 가격을 부른다. 그렇게 팔려나간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인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일이다. 그들의 기술과 사회가 만들어낸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멀쩡히 살던 동물들을 잡아 와 취향에 따라 품종을 개량하면서 마약처럼 삶 속에 주사하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는 그런 사업의 최전방에 있으니까. 내가 일하는 회사는 유전자 편집 기술과 단백질 합성 기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공급되는 애완동물들의 종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우리가 만들어낸 지금까지 없었던(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동물들은 기존의 애완동물들에게 질린 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지는 동물들은 자궁이나 알 속의 따뜻한 어둠을 깨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눈부시도록 밝은 조명을 받으며 차가운 단백질 진흙 속에서 태어난다. 그들에게 부모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엔 이렇게 태어난 동물들을 멸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몸값이 높아지자 오히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귀한 대접이라고 해봐야 결국 주인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하는 운명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런 불행한 삶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내 일이다.

그렇게 태어난 동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팔, 다리, 촉수, 꼬리 뭐든 떼고 붙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추가 가공된 동물들은 값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기괴한 동물들을 좋아하는 변태들도 있었다. 없던 신체를 붙인다면 모를까, 있던 팔다리를 떼어내는 건 동물들의 원래 운명을 잘라내는 것 같아 꺼림칙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 일은 동물들을 만드는 것이고 신체를 자르고 편집하는 일은 다행히 다른 부서에서 한다. 적어도 내 손에서 벗어날 때의 동물들은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 회사의 고객들은 대개 외롭고 거만한 부자들이다. 모든 걸 손에 넣고 의도대로 움직여야만 만족하는 그들은 애완동물 역시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어지길 원했다.
에베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그가 요구한 디자인은 매우 꼼꼼하고 철저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문은 일반적인 주문서 몇 장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회사 간부들을 통해 직접 전달되었다. 나와 내 동료들이 그 주문을 해석하고 실현 방법을 검토하는 데만 3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또 그것을 이행하는데 다시 3개월이 걸렸다.

그의 주문은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독특하기도 했다. 고객의 대부분은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짧고 작은 몸에 큰 눈, 애교와 장난기 많은 동물을 주문했지만, 에베의 주인은 몸이 가늘고 길며 털이 없고 교활한 동물을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교활함이 눈빛에 담기기를 원했다. 우리는 6개월간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동물을 만들었고 에베의 주인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에베는 이때 태어난 것이 아니다.
에베는 그의 두 번째 주문이었다. 첫 번째 제품이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그때 나는 첫 번째는 죽은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는 사소한 디자인만 조금 바꾼 주문을 다시 넣었다. 그리고 에베가 태어났다.

나는 지금까지 만든 어떤 동물들보다 에베를 사랑했다. 첫 번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름을 붙여 부른 것도 에베가 처음이었다. 에베는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고, 가느다란 몸놀림은 사막의 아지랑이보다 섬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내 손에서 먹이만 빼앗아 도망가는 에베의 능청스러운 교활함이 어린 시절의 나를 닮았기 때문일까? 교활하기는 첫 번째도 마찬가지였지만, 에베는 그 속에 우아함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에베를 내 진짜 자식처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에베를 떠나보내던 날, 나는 차마 실험실로 출근하지 못하고 회사를 쉬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에베에 대한 그리움이 마르기도 전에 회사에서 출장 명령이 났다. 첫 번째와 에베가 자꾸만 나무에 기어오르는데 에베의 주인은 그것이 싫으니, 나무에 오르지 못하도록 훈련을 시키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첫 번째가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에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출장을 떠났다. 에베의 주인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에베를 볼 수 있다면 그런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살고 좋은 곳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에베의 주인이 저택이 있는 곳은 바로 그곳일 테니까. 물론 저택이 마을의 모든 자원을 끌어썼기 때문에 지금 저택 바깥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였다.
그는 저택이 있는 마을을 떠날 일도 없으면서 인근에 있는 일곱 개의 마을과 지역 최대의 핵융합 발전소를 통째로 매입해 시종 몇 명만 데리고 살고 있었다. 오늘날엔 이런 고립과 외로움이 부의 상징이었다. 에베의 주인은 그 고독에서조차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상에 있었다. 그리고 여느 부자들처럼 값비싼 애완동물들을 통해 그런 외로움을 메꾸려는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자,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얀 옷을 입은 하인들이 나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관상용 나무로 장식된 화려한 통로를 통과하자마자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넓이를 따진다면 홀이라기보다는 광장에 가까웠다).
첫 번째와 에베가 사는 우리(cage)는 홀 정중앙에 있었는데, 나는 우리 안을 들여다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유리로 둘러싸인 우리 속에는 작은 숲과 초원, 호수, 심지어 언덕까지 재현되어 있어서 마치 낙원의 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지금까지 회사에서 만들어온 동물 중 절반 가까이가 그 우리 안에 있는 모습이었다. 에베의 주인이 다른 고객들에게 사들인 것이 분명했다. 동물들은 우리에 갇힌 낙원 안에서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고 있었다.

"조화로워야 하거든. 난 애완동물 따위를 원한 게 아니야. 내 손 안의 세상을 원한 거지."

소리 없이 나타난 에베의 주인은 빨간 포도알이 담긴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무섭게 생겼을 것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도 없는 중년의 부자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선 불타는 별보다도 오만한 미소가 목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네가 마지막으로 만들어준 건 우리 종족의 상징이야. 순수한 세상을 지배할 교활한 자들 말이야."

나는 그의 켈켈거리는 웃음소리를 억지로 들은 체 만 체하며 우리 속에서 에베의 흔적을 뒤졌다. 에베의 주인은 내 눈빛을 알아채고는 술잔을 든 팔을 뻗어 우리 속의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 한 놈은 나무 위에 올라있고 한 놈은 밑에서 몸을 꼬고 낮잠이나 자고 있어. 세상과 동물들을 지배하랬더니 저러고 놀고만 있지."

에베의 주인은 나를 노려봤다. 제품이 충분히 교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교활하기를 바랐던 걸까? 다행히 에베는 나무 밑에서 얌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반면 첫 번째는 나무에 올라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조망하고 있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에베에게는 없는 공격적인 모습이었다.

"재밌는 걸 보여주지."

에베의 주인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튕겼다. 맑고 힘찬 소리가 퍼져나가자 에베가 슬며시 눈을 떴다. 에베의 시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술잔을 향했다. 에베의 입술 사이로 빨갛고 기다란 혓바닥이 날름하고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지만 첫 번째는 나무에 매달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두 번째 녀석 말이야, 호기심이 많아. 특히 이 포도주만 보면 아주 환장을 하더구만."

회사에서 만든 동물들은 일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고객들에게 제공되는 정보였지만, 사실 사료를 뽑아내는 프린터를 판매하기 위한 정책에 불과했다. 사료의 원료는 꾸준히 판매될 거고 그럼 지속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까. 에베의 주인이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베의 모습을 보면 적어도 포도주나 그 속의 포도알은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비싼 건 아는 것 같아. 내가 제일 아끼는 술이거든. 얼마 전엔 이걸 보더니 유리벽에 머리를 쿵쿵 박더라고. 건방지게 말이야. 그래서 술잔을 저놈 눈앞에 두고 귀가 멀도록 소리를 질러줬지. 알아듣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은 중요하니까 말이야. 아, 교육하니까 생각이 났는데…"

에베의 주인은 켈켈거리며 돌아섰다. 그는 2층 난간을 향해 소리쳤다. 굵은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이클! 마이클! 어디 있나?"
"네, 주인님. 2층에 있습니다."

새하얀 정장을 입은 마이클은 2층 난간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 녀석한테서 연락은 왔나?"
"네, 그런데 아직도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이제 겨우 제2 구름마을이라고 하네요."
"미치겠구만."

에베의 주인은 혀를 차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제2 구름마을은 그가 매입한 마을 중 하나였는데, 황폐하기 그지없었지만 자연경관 자체는 끝내주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둥근 마을을 둘러싸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고리 모양의 건조물이 그 지역의 명물이었다. 에베의 주인이 그곳 주민들을 모두 쫓아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들놈이 너무 물려 터졌어. 사춘기가 온 건지 뜬금없이 여행을 가질 않나. 좀 교육을 해야해. 아, 그래. 아무렴, 교육 해야지.”

이쯤 되니 이제 그가 나를 부른 이유를 물어도 될 것 같았다. 제품들이 나무에 올라서 문제라고 했지만, 상황을 보니 그게 진짜 이유 같지는 않았다.

“자넬 부른 이유? 그래, 잘 물었어. 말하려다 이야기가 새어버렸군.”

그가 손짓하자 2층에 있던 마이클이 재빠르게 내려왔다. 마이클은 조용히 에베의 오른쪽 뒤로 조용히 걸어와 멈췄다.

"내가 아들놈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파. 마음이 너무 약해서 저러다간 언젠가 하찮은 것들한테 당하고만 살 거 같거든. 그래서 내가 며칠 동안 데리고 교육을 좀 시킬 거야. 그놈한테 진짜 세상이란 얼마나 거칠고 자비 없는 곳인지 알려줘야지."

어느새 에베가 우리 가장자리까지 다가와 우리를 바라봤다. 에베의 주인은 에베를 보더니 다시 켈켈거리며 말했다.

"저놈, 저놈의 눈은 참 마음에 들어. 저 교활하게 찢어진 눈은 다른 동물들에게선 볼 수 없거든."

에베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포도주로 옮겨가자, 그는 술잔을 우리에서 떨어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에베는 아쉬운 듯 혀를 날름날름거렸다.

"말이 또 끊어졌군.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이거야. 내가 없는 동안 이놈들을 좀 관리해줘. 빌어먹을 나무에 오르지 좀 못하게 하고. 보기 안 좋아. 필요한 건 마이클이 제공해 줄 거야. 아니, 뭐, 사실 마이클이 자네를 감독하는 거지만."

마이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회사엔 미리 얘기해 놨어. 뭣하면 자네를 전속 관리인으로 쓸 수도 있으니까, 잘해봐. 나한테 고용되면 평생 돈 걱정은 없을 거야."

에베의 주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베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마이클에게선 주인에게는 없는 정중함이 묻어나서 오히려 안심되었다.
그렇게 나는 에베의 곁으로 돌아왔다.


동물들이 지내는 우리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인공 바람과 햇빛이 딱 좋을 만큼 온도를 유지했고, 나무 위로 오르지만 않는다면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사료 프린터가 각각의 동물들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정확하게 배합된 음식들을 쏟아냈다. 프린터가 만들어내는 음식에는 과일은 물론 육식동물들을 위한 합성 생고기도 있었다. 동물들은 그걸 먹고 인공 초원을 거닐다가 아무 곳에나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야말로 동물들을 위한 낙원이었다.

하지만 에베는 그렇지 않았다. 첫 번째가 만복감에 하얀 배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을 때도, 에베는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 바깥을 응시했다. 실제로 내게 주어진 일은 나무에 오르려는 첫 번째와 에베를 말리는 것 정도였기 때문에(인공번개를 일으키면 깜짝 놀라서 내려온다), 시간의 대부분을 에베를 돌보는 데 썼다. 에베도 그것을 아는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을 종종 보내고는 했다. 에베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릴 때마다 에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짜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아. 여기서 꺼내 줘.

마이클은 하루에 한 번 우리가 있는 홀로 내려왔지만, 우리의 상태를 점검하고 사료 프린터의 원료를 공급하고는 금방 사라졌다. 가끔 동물들이 다치거나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싸움이 일어나거나 물에 빠지거나), 마이클이 재빠르게 나타나 우리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상황을 해결했다. 우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우리의 천장에 있었는데 바로 위에 조명이 달려있어서 마이클이 입구를 열고 들어가면 우리 안으로 눈 부신 빛이 쏟아졌다. 마이클의 새하얀 옷과 어울리는 극적인 연출이었다.
그렇게 저택에서의 생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양심은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꿈틀거리며 가슴에 균열을 만들었다.


회사에서 만들어진 동물들은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들이다. 그들도 먹고 자고 싸고 호흡한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객에게 출고되기 전에 호르몬 변형을 통해 생식기능을 잠가 버린다. 물론 만들 때부터 생식기를 없애버리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러면 불량이 나올 가능성이 급격히 늘어났다. 아마 생식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에 대해 생태계 교란이니 뭐니 하며 핑곗거리는 대고 있지만(애초에 지킬 만한 생태계 자체가 이미 남아 있지 않다), 사실 생식기능을 제거한 진짜 이유는 회사가 동물들의 공급을 완전히 통제해야 수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뒷돈을 주며 생식기능을 유지해달라고 부탁하는 고객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한두 세대 만에 다시 생식 기능을 잃도록 만든다. 생명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그렇게 박탈당하고 있었다.

에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베의 몸은 자손을 만들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생식을 위한 호르몬은 분비되지 않았다. 내게 있어 에베의 불임은 에베에 대한 거대한 죄책감의 원인 중 하나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나는 회사를 떠나면서 호르몬 캡슐을 몰래 챙겼다. 캡슐 안의 약물은 회사에서 만든 모든 동물의 생식 기능을 부활시킬 수 있는 일종의 열쇠였다. 그리고 에베가 자손의 씨를 품을 수 있도록 해주는 생명의 열매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 깊이 감추고 있는 내 양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나는 저택에서 지내는 모든 순간 속에서도, 호르몬 캡슐을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

내가 우리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에베는 하얗게 빛나는 몸을 내밀고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에베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 바깥을 향했다. 가짜 바람과 가짜 햇빛과 가짜 음식이 쏟아지는 우리 속 세계는 에베에겐 더이상 낙원이 아니었다. 생명의 씨앗을 품지 못하는 운명 역시 에베의 진짜 운명이 아니었다. 에베의 희고 가늘고 길고 매끄러운 몸이 노닐 곳은 프린터로 찍어낸 가짜 풀밭 위가 아니었다. 에베도 알고 나도 알았다.
에베의 애원하는 눈빛은 내 양심을 어루만졌고, 에베를 향한 내 사랑은 그 눈빛을 마시며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나는 결국 어겨서는 안 될 금기를 깨트리고 말았다. 양심과 사랑이 갈라놓은 틈새 사이로, 뜨겁고 무모한 충동이 흘러내렸다.


에베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날 아침, 나는 그가 아끼는 포도주의 병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새빨간 포도알이 병의 움직임을 따라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나는 병을 기울여 포도알 하나를 손바닥 위로 꺼냈다. 포도주가 같이 흘러나오면서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었고, 빨간 술방울 몇 개가 발등에 뚝뚝 떨어졌다.
호르몬 캡슐의 한쪽 끝에는 약물 주입을 위한 바늘이 감춰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바늘을 꺼내 포도알에 꽂고 캡슐을 힘껏 쥐어짰다. 모든 일은 마이클이 점검을 위해 내려오기 전에 끝내야 했다. 나는 먼저 사료 프린터의 전원을 껐다. 에베가 다른 거로 배를 채워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사다리를 타고 우리 위로 올라가 입구 옆에 앉아 에베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에베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세 입구 아래로 천천히 다가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천천히 입구를 열고 포도알을 잡은 손을 입구 안으로 집어넣었다. 직접 들어가 먹이고 싶었지만, 우리 안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꺼내기 위해서는 마이클의 열쇠가 필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팔은 너무 짧았다. 나는 에베의 아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우리에서 내려와, 홀 입구에 있는 관상용 나무의 가지를 하나 꺾고 그 끝에 포도알을 꽂았다. 그리고 다시 우리 위로 올라가 에베를 향해 포도알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에베, 이게 진짜 먹이야. 이게 진짜 음식이야. 이걸 먹으면 너의 진짜 운명을 만날 수 있어."

에베는 나뭇가지 끝에 걸린 자기 머리만 한 포도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알코올의 뜨거움, 과일의 달콤함, 진짜 음식의 생명력이 에베의 몸속에 퍼져나갔다. 호르몬 캡슐의 약물은 에베의 혈관을 타고 내려가며 모든 생명의 문을 열었다. 에베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모든 감각이 그 어느 때 보다 생생한 듯, 작은 바람과 소리에도 반응했다. 체온이 오르고 땀이 흘러내렸다.
에베는 달아오른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첫 번째를 향해 달려갔다. 첫 번째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에베를 바라보자, 에베는 입에 물고 있던 포도알을 첫 번째의 얼굴에 들이박았다. 첫 번째는 당황하면서도 매혹적인 향기를 이기지 못하고 포도알을 입에 물었다. 빨간 포도즙이 첫 번째와 에베의 창백한 몸 위로 흘러내렸다.

첫 번째의 몸에도 에베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둘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자신과 서로의 몸에 대해 알게 된 첫 번째와 에베는 정신없이 서로의 몸을 감싸고 뒹구르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얽힌 가늘고 긴 몸들이 가짜 풀밭 위를 가로질렀다. 에베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이클이 2층 난간에 서 있었다는 걸 안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마이클은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에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손바닥을 적신 붉은 포도주가 마르기도 전에, 마이클은 조용히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저택으로 돌아온 에베의 주인은 동물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는 분노를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없던 분노도 마구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기를 타고 퍼져나간 호르몬 약물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뜬 동물들은 우리 여기저기서 암수의 몸을 섞고 있었다.

“저놈들의 주인은 나야! 저놈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그런데 뭐가 어째?”
“동물들은 그저 스스로 존재할 뿐입니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나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용기를 최대한 쥐어짰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하!”

에베의 주인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아니, 저놈들이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존재는 나야. 그걸 중간에서 가로채는 건 용서 못 해.”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네놈이 다 망쳐놨지. 저놈들의 몸 안엔 서로의 더러운 체액으로 가득 차 버렸어. 내 앞에서 감히 서로의 몸을 섞고 있다고. 내게 아무런 감사도 경외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내 허락도 없이 생명을 품고 있어. 저놈들을 위해 사 모은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에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내 목을 붙잡았다.

“에베? 내 동물에게 네놈 마음대로 이름을 붙였어? 흠, 어느 놈인지 알 거 같아. 가장 나중에 들어온 놈이지? 그놈이 제일 수상했거든.”

그는 내 목을 부여잡은 채 우리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목이 부러지기 싫어서라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와 에베는 나무 그늘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에베의 주인은 에베의 몸을 노려봤다.

"저 음탕한 것, 저 더러운 것. 저 교활한 것. 저런 게 감히 내가 만든 세상 안에 있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구만. 게다가… 다른 동물을 먹었군."

살아있는 과일의 맛을 알게 된 그들은 더이상 프린터로 뽑아낸 사료를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오늘 아침엔 토끼 두 마리를 잡아먹었다. 에베의 하얀 살갗에 아름다운 모양을 그리며 검붉게 말라붙어있는 액체가 포도즙인지 토끼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부 네놈의 사악한 장난 때문이야. 잘 봐둬.”

에베의 주인은 우리 바깥의 벽에 달린 모니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인공 햇빛이 줄어들더니 우리 안이 어두워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자 동물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놈들이 더러운 욕정을 알고 핏덩이의 맛을 알게 된 이상,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지.”
"뭐 하시려는 거죠?"

나는 내 목에서 그의 손가락을 힘겹게 끌어내며 말했다. 에베의 주인은 얼굴에 서늘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죄지은 것들을 씻어 내리는 거야. 깨끗하게. 이런 걸 속죄라고 하지.”

빗물은 우리의 바닥을 조금씩 채우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에베와 첫 번째는 나무 위로 올라가 서로를 껴안으며 체온을 아꼈다. 빗줄기는 거세지고 고인 물은 이제 출렁거리며 거친 물살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베의 주인은 낙원을 물로 뒤덮어 버릴 생각이었다.

"안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들은 잘못이 없어요!”

나는 에베의 주인에게 매달렸다. 그제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내가 아니었다면 에베와 첫 번째와 다른 모든 동물이 낙원에서 평화롭게 살았을 텐데. 현명한 에베는 불만을 품겠지만, 진실에 눈을 뜬다고 하더라도 삶의 고달픔은 사라지지 않을 건데(내 삶이 그 증거다). 모든 건 내 이기심 때문이었다. 에베의 운명이 내 손에서 벗어난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에베의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날, 호르몬 캡슐 따위는 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그의 작품에 상처 하나라도 내면 그가 모든 걸 뒤집어 버릴 것이 분명했는데.

"…제발 부탁드릴게요."

에베의 주인은 나를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켈켈거리며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는 지금의 내 꼴을 즐기고 있는 걸까? 아니면 차오르는 빗물에 몸을 떠는 동물들의 모습이 보기 좋은 걸까?
…둘 다 아니, 그는 자신의 손길에 따라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들의 운명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에베…, 에베만이라도…"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말이 내 입에서 나왔기에 에베의 주인이 내를 더 크게 비웃었겠지.

"자넨 위선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동물들도했으면서. 이젠 에베만 구해달라고 하고 있어. 미안하지만 난 아무도 차별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난 만물의 아버지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차별하면 안 되지."

나는 에베를 바라봤다. 에베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나무에 매달려 몸을 떨고 있었다. 빗물은 이미 그들의 발아래까지 차올라 무겁게 파도쳤다.
내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물들을 저택 바깥으로 추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언제나처럼 새하얀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어차피 바깥세상은 황무지니까요. 여기서 깔끔하게 죽이는 것보다는, 그쪽이 오히려 그들에겐 더 힘든 운명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드님이 돌아오셨을 때 바깥세상 관리를 맡기시는 것도 괜찮겠지요. 제법 넓은 세상이니 좋은 교육이 될 겁니다."

마이클의 몸에선 빛이 났다. 아마 내 착각이겠지만 마이클의 모습은 눈부실 만큼 빛이 나서, 나는 그의 윤곽밖에 볼 수 없었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에베의 주인의 팔을 붙들며 마이클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말없이 빌었다.
에베의 주인은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고약한 포도주 냄새가 풍겼다.

"내가 마이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저 동물들, 에베를 살려준다면, 자넨 그 대가로 무얼 희생할 텐가?"

나는 고민했다. 에베를 위해서라면 난 무엇을 희생할 수 있을까?

"… 제 몸의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이제 전 당신이 말씀하시는 대로만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아."

에베의 주인은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비를 멈췄다. 눈을 뜨니 어느새 다시 인공 햇빛이 우리 속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에베와 첫 번째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출렁거리던 수면은 조금씩 낮아졌다.

"하지만 전부는 필요 없어. 머리와 몸뚱이만 있으면 충분해."

머리와 몸뚱이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에베가 나무 아래로 내려와 젖은 풀밭을 걷는 모습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에베의 가냘픈 팔다리가 하늘하늘 춤췄다.

"마이클! 이놈을 데려가게. 약속대로 해야지. 팔다리는 잘라버려."

에베의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켈켈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이클은 아무말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부축해 계단으로 이끌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마이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왜 에베의 주인을 위해 일하는 걸까? 어울리지 않았다. 에베의 주인과 달리 마이클은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으로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에베의 주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에베와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동물들을…, 에베를 구해줘서."

나는 힘없이 말했다. 마이클은 나를 바라보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 그분의 뜻입니다."
"네?"
"당신이 이곳에 처음 오기 전부터, 당신이 에베를 사랑하기 전부터, 모든 건 결정되어 있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마이클은 그제야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받아들이세요.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니까요."
"…이제 전 어떻게 되는 거죠"
"팔과 다리를 절단할 겁니다. 그분의 말씀은 절대적이니까요. 당신 회사 사람들이 이미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다음엔 어떻게 되나요?"
"당신의 일이 주어질 겁니다. 어제 당신이 에베와 동물들에게 한 것처럼, 추방당한 동물들을 본능적 쾌락으로 유혹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 될 겁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분은 유혹에 넘어간 동물들을 심판하시겠지요. 물로, 때로는 불로."
"…왜 저인가요?"
"그분은 당신의 위선을 마음에 들어 하셨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베에 대한 나의 이기적인 사랑과 양심의 가책을 모든 동물을 위한 선의로 포장해왔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니…"
"…그분 뜻이니까요."

마이클이 2층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눈 부신 빛과 함께 평화로운 음악 소리, 그리고 달콤한 향유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황홀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진짜 낙원은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에베의 주인은 나와 에베, 그리고 모든 동물을 저택 바깥의 세상으로 보냈다. 바깥세상은 때로는 무서울 만큼 춥고 어두웠고, 때로는 괴로울 만큼 뜨겁고 눈부셨다. 먹을 것이 부족해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먹었고, 에베와 첫 번째 역시 살기 위해 잡아먹고 또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동물들이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들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나갔다.
에베와 첫 번째 사이에서는 두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이 에베와 첫 번째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로 성장했을 때 즈음, 마이클이 그늘 속에 숨어 지내는 내게 찾아와 말했다.

"그분께서 당신이 일해주길 원하십니다."

내게 주어진 일은 한 아이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욕망에 충실하도록,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도록.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를 죽였다. 에베의 슬픈 표정을 보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게 내가 만들어낸 운명이었고 내게 내린 벌이었다. 그때 그 빨간 과일을 에베에게 준 대가였다.

나는 에베의 죽음을 보았다. 에베의 후손들이 에베의 피를 이어가는 것도 지켜봤다. 때때로 마이클이 나타나 에베의 주인이 내린 명령을 알려줬고, 나는 그것을 따랐다. 나는 에베의 후손들을 유혹했고, 에베의 주인은 그들을 벌했다.
한 번은 에베의 후손 여덟 명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유혹하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렇게 했다. 그리고 에베의 주인은 에베의 후손 여덟 명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물로 휩쓸어 버렸다. 나는 아연실색하며 저택 안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이번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마이클이 나타나 구원해주지도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에베의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내게 누구보다도 두려운 존재였다. 내 죄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아들이 바깥세상에 나타났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자비와 사랑을 말하고 또 실천했다. 그는 에베의 후손들과 동물들을 벌하기보다 용서하고 사랑했고, 시험하기보다 먼저 참된 진실에 눈을 뜨게 했다. 마이클이 내게 그를 시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유혹했지만, 그는 넘어오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에베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진심 어린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저분이라면 나를, 나의 죄를, 에베의 후손들을 유혹하고 비극에 빠트렸던 과거를 용서해 주실지도 모른다. 나는 때가 되었을 때,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자비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가 나를 위한 변명이다. 지금의 나는 비록 팔도 다리도 없이 차가운 땅에 배를 대고 기어 다니며 에베의 후손들을 유혹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시작은 이렇지 않았다. 내겐 에베를 향한 사랑, 어리석은 판단, 그리고 너무나도 무거운 참회의 길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속죄를 위해 나는 그분께 다가갈 것이다.

어젯밤, 마이클이 내려와 내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마이클은 당분간은 다른 명령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재빠르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분을 따르는 열두 제자 중 하나를 은화 30개로 유혹하라는 것이었고, 일은 손쉽게 끝났다. 제자 하나가 배신한다고 해도, 그분은 굳건하실 것이다. 내가 그분을 직접 시험해봤으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차가운 안개가 자욱한 밤, 그 분은 지금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분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그분의 발치에 용서를 빌러 갈 것이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pilza2 2041 요정 이야기 -리라젤편- 2019.08.01
너울 카카오톡 시대의 사랑법 2019.08.01
노말시티 천둥 아이 2019.08.01
amrita 개천절 블루스 2019.08.01
곽재식 가장 무서운 집 사건4 2019.07.31
pilza2 2041 요정 이야기 -현아편- 2019.07.01
이나경 누나 노릇 2019.07.01
너울 작명의 어려움2 2019.07.01
amrita 비내리는 2호선 2019.06.30
곽재식 멋쟁이 곽 상사6 2019.06.30
해망재 죽은 사람의 관 위에 열 여섯 사람 2019.06.01
이나경 16개월 동안 2019.06.01
너울 16메가바이트를 위하여 2019.06.01
유이립 샤먼랜서 2019.06.01
amrita 미 이사의 조촐한 16번째 결혼식 2019.06.01
pilza2 피해대책위원회 16차 후속조치 결과보고 2019.06.01
곽재식 신라 미남해적전 - 십육미남병풍 2019.05.31
해도연 뱀을 위한 변명 2019.05.01
너울 행운고객님, 축하드립니다! 2019.05.01
amrita 실장님 실장님 우리 실장님 2019.04.30
Prev 1 2 3 4 5 6 7 8 9 10 ... 35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