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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 실장님 우리 실장님

by amrita

“오늘은 카피머신 고장 안 냈어?”
“네!”
“뭐 전화 온 건 없고?”
“네!”
“이번 달은 조용하구먼.”
박 실장은 신입이 수면부족 때문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며 다른 손으로 32층을 꾹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매끄럽게 닫혔고, 평화로운 하프 음악이 흘렀다. 
신입은 엘리베이터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만 숨죽여 기침을 한두 번 했다. 박 실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크흠흠, 저, 그런데요 실장님….”
“어 왜?”
“중요한 건은 아닌데 장미 정원에서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나 대리가 아까 자기가 해결하겠다며 갔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고, 콜에도 답도 없고요.”
“나 대리? 그 다크서클 키위새? 그쪽은 직속 상관이 있잖아? 그 메아리치는 애 허구헌날.”
“네 김에코 팀장님 소속인데요, 아직 시간도 이르고 왠지 느낌이 안 좋아서 미리 말씀드리려구요.”
자기야 당직이 걸려서 이런 시간에 회사에 있는 거래도, 맨날 맨날 허구헌날 출근을 네 시간씩 일찍 하는 워코홀릭 상관은 가뜩이나 미쳐 돌아가는 이런 보살회사 천지에도 너밖에 없다는 말을, 송사슴 신입은 세련되게 할 줄 아는 센스가 있었다. 
“마침 오늘은 저희도 별 스케줄 없고요, 그런데 오후에 장미 정원에서 회장님 행사 있잖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면 어째요.”
“그래 그럼.”
박 실장은 32층에 도착했다며 열리는 문을 다시 닫고, 108층 버튼을 눌렀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에서 로봇 정원사들을 고용한 것은 불과 작년의 일이었다. 회사 옥상에 조성된 자동개폐 돔 지붕의 장미 정원은 거대한 복층 규모도 규모지만, 배색까지 철저히 고려해가며 모던하게 변주된 아르누보 패턴으로 디자인한 아름다움이 무척 훌륭할 뿐더러, 정원의 거의 모든 요소가 자동으로 조절되기에 꽃을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이나 바람, 온도, 습도, 조명, 영양 상태까지 모두 인공지능이 알아서 하긴 하지만 청소나 가지치기 등 직접적인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있기에, 인간형 로봇 정원사를 도입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시범 삼아 한 채만 들였다가, 일을 잘 하기에 두 채를 더해서 모두 셋이서 각자 다른 시간대를 맡아 정원을 관리해 왔다.
“문제될 게 뭐가 있는데? 로봇이 무슨 연봉 협상을 해달랠 것도 아니고.”
“그러게 말입니다. 저번에 광화문 이무기처럼 공장 건설 날짜를 미뤄달랠 것도 없을 텐데요.”
신입은 어깨를 오소소 떨었다. 그 건은 정말이지 언제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
“아 그거? 사연이 절절했잖아, 한달만 채우면 천년인데 딱 그 막바지에 도로아미타불이면 누군들 눈이 안 돌아가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광화문 일대에 배 까고 드러누워서 시위해 버리면 입사 첫날 가뜩이나 왕긴장 상태였던 전 어떡하란 거죠. 신입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때 아연자실해서 뭐 어떻게 일단 회사에 전화라도 하려던 참에, 양복 주머니에 넣어뒀던 친정보살 앤 컴퍼니 직원 아이디가 느닷없이 오색찬란하게 반짝 반짝거리더니만, 저 멀리서부터 이무기 대가리가 부우우웅 일어나더니 그가 들어있던 호버버스 창 앞까지 와서 떡 하니 멈췄었다. 
이무기의 모가지가 그렇게 길 수가 있다니.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 아니 이게 아니고.
‘여기서 뭐해? 빨리 튀어 나와!’
그때 이무기 대가리 위에 위풍당당하게 버텨선 채 자신을 호출했던 분이 바로 지금의 박 실장이었다. 빨간 하이힐이 인상 깊었다. 어떻게 저런 걸 신고서 저기에 저렇게 버티고 설 수가 있는 거지? 저 저저저저저전 전 저전 오늘 출근이 처음인데요. 그래? 보살쯩 받았으면 된 거야. 
호버버스의 비상 뚜껑이 펑 열리더니 몸이 제멋대로 둥실 떠올랐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데 눈 뜨고 보니 양발이 이무기 대가리 위에 얹혀 있었고, 도로와 빌딩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정신이 눈부시게 때로는 흐릿하게 뺨을 스치어 갔었다. 사 사사사사사 사 사사 살려주세요! 안 죽어. 화장은 지워지겠네. 우리 회사는 메이크업 안 해도 되는 거 몰랐어? 전 코덕이라구요! 아 그럼 하든지. 나도 킬힐 좋아하거든. 전 높은 굽 못 신어요! 끄아아아악! 불이야! 이 무기 새끼가! 아가리 닫으랬지! 이무기 승천권 보장하라! 도 닦을 권리! 봉기하라! 전국의 무기들은 마침내 일어나! 쟁취하리! 우리는- 기어이 승천하리라- 워우워어어-!
“그런데 그 이무기 말입니다.”
“어.”
“만약에 사람들이 그… 이무기의 콜을 끝까지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 산사태, 용오름, 태풍, 홍수, 화재, 뭐 많아.”
[장미 정원입니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으로 무심코 걸어 나가려던 신입의 얼굴을 박 실장의 손등이 쩍 하고 후려쳤다. 
“아아악!” 내 마스카라! 속눈썹! 섀도우!
박 실장이 손을 흔들자 장미 가시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신입은 바지 주머니에서 손거울 꺼내 눈화장 확인하고픈 마음을 가까스레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뭐뭐 뭡니까?”
“보면 몰라? 넌 내 덕에 실명을 면했고 이건 장미 정원 관리봇의 반란이다.”
“네?”
“이건 좀 신기한 일이긴 한데, 왠지 그러면서도 익숙한 느낌이랄까? 모던한 클래식 패턴 같은?”
“네?”
“화장은 멀쩡하네? 하긴 이 정도로 번진다면야 보살의 메이크업일 자격이 없지.”
그때였다. 잉글리쉬 티 로즈의 벽 너머에서 정원사 로봇이 거친 호버링 커브를 그리며 나타나 이렇게 외친 것은.
-이 더러운 사파의 졸개들아! 
“뭐?”
박 실장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로봇에게 커피를 집어던졌고, 커피컵은 허공에서 무형의 뭔가에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절하게 터져나갔다. 커피는 방울방울 장미 꽃잎과 이파리로 영롱히 흩뿌려졌고, 바리스타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으로 핸드 로스팅했다던 코나 마운틴 커피의 범상치 않은 향기 역시 새벽 강가의 안개마냥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장미 가시를 표창처럼 쓰고 있잖아? 굿 아이디언데?”
“네?”
-스승과 의자매의 원수! 이 강호에서 너희 어둠의 무리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쓸어낼 것이야!
“쟤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죠? 앗 실장님! 손 찔리세요!”
박 실장은 재빨리 가까운 곳의 장미를 한 줄기 꺾어 들었다. 한 손으로 줄기의 끝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위에서부터 주욱 훑으니 가시가 초겨울 김장에 무청 썰리듯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장미 가시 몇 개가 미처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한 손으로 낚아 채고서 곧바로 정원사 로봇을 향해 퉁겨 날렸다. 로봇에게 일말의 시간적 여유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동작이었다. 그러는 모습에 신입은 뒤늦게 자신은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신입 보살이며, 박 실장은 사장이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최고 능력자 보살 트리오 중 한 명이며, 사흘 전에도 불길이 훨훨 날리는 식칼을 맨손으로 쥐고서 용산의 눈알 좀비를 파무침 떡갈비 냈- 제압했음을 기억해냈다. 
‘그래, 하다 하다 저 인간, 아니, 보살의 피부 건강을 걱정하는 내가 바보지….’
정원사 로봇은 인간형으로, 둥근 머리와 기둥형 몸체, 네 개의 팔과 세 개의 호버링 디스크의 구성이었다. 말이 인간형이라지만 팔다리가 달렸다 뿐이지 딱히 사람과 비슷한 모양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아직 감가상각도 끝나지 않은 회사 물건을 망가뜨릴 수도 없는 일이라, 박 실장은 제일 효율적이고 안전한 선택을 내렸다. 
“신입아?”
“네?”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니, 말해봐?”
“뭐 뭐뭘요? 어째야 하는데요? 어어 실장님! 쟤 왜 저래요?”
신입은 정원사 로봇의 전원이 갑자기 삐리리 꺼지더니 슬그머니 땅바닥에 주저앉는 광경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말로 영문을 모르기도 했고, 시도때도 없이 신입 교육을 시키려 드는 실장의 질문 퍼레이드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박 실장은 또각 또각 정원사 로봇 쪽으로 걸어갔다. 
“팩토리 리셋이다.”
몸통 중심의 전원 버튼과 머리의 안구 센서 버튼에 미세한 기스가 나 있었다. 박 실장은 장미 가시를 날려서 두 버튼을 동시에 때림으로써 공장 리셋을 시킨 것이다. 그는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방금 전 자신이 퉁겨 날려보냈던 장미 가시를 찾아 주웠다. 그런 다음 로봇을 반 바퀴 굴려서 머리 뒤쪽의 데이터 칩을 수동 재생했다. 
“역시.”
허공에 입체 재생된 홀로그램의 내용은 [장미정원 관리 데이터 베이스]가 아니라, 명월당 저 [월녀검법 완전판] 이었다. 
“이건 무협 소설인데요?”
“관리자가 칩을 잘못 껴 놨잖아. 말해줘얄텐데 누구지? 암튼 난 간다, 나 대리나 찾아 봐. 그게 오늘 네 과제다?”
“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얼마나 빨리 찾나 시간 잰다?”
“그런 게 어딨어요! 실장님! 아니 실장님!”
신입이 불평하든 말든 박 실장은 나머지 장미 가시와 너덜거리는 커피컵을 주워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후 엘리베이터로 혼자 휭 하니 내려갔고, 홀홀 바람이 불었다. 
“왜… 나더러 어쩌라고…….”
22세기 서울의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옥상에는 한동안 침묵과 바람과 장미 향기와 커피 냄새만 허망하게 떠돌았으며, 동상처럼 그저 섰던 신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실장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고, ‘단서는 책에 있을 걸,’ 과연 그러했다. 나 대리는 혼절한 상태로 다마스크 로즈가 육각형으로 심긴 만월의 신전 한가운데에 머리만 내놓고 묻혀 있었다. 문제는 월녀가 온갖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드디어 원수들에게 복수를 시작하는 부분이 3권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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