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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길윤 시간의 공백

2017.08.29 02:5108.29

시간의 공백

엄길윤

조인웅은 달리기가 빠르다. 예전 고등학교 체육 시간 때 친구가 잰 100m 기록이 무려 10초29였다. 우사인 볼트와 비슷한 기록이다. 어쩌면 더 빨리 달릴 수도 있다. 그럼 육상 선수였냐고? 아니다. 그는 그 시절에도 평범한 학생이었고, 현재에도 초등학생 딸을 둔 평범한 아빠다.

 그는 육상 선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될 수가 없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100m를 6초대로 통과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무거워진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가 육상 선수를 하지 않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달리면 몸이 아프다거나 남모를 병에 걸린 건 아니다. 주목을 받으면 안 된다. 달리기 기록이 그렇게 나오면 분명히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테고, 카메라에 뛰는 모습이 잡히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

 달리기만 빠른 게 아니었다. 그걸 좀 더 응용하면 무슨 축지법 비슷한 것도 쓰고, 닥터후에 나오는 우는 천사처럼 움직일 수도 있다. 아마 사람 놀리기에 딱 좋을 것이다. 어쩌면 물건이나 돈도 훔칠 수 있다. 그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초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제3의 눈이 뜨였다고 할까? 조인웅은 언제부턴가 그걸 느꼈다. 흘러가는 시간 사이사이에 찾아오는 무수히 많은 빈틈. 즉, 시간의 공백들을. 그는 매 순간 시간의 공백을 느끼고, 인식했다.

 보통 생각하기에 시간은 막힘없이 쭉 흘러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리 느낄 수밖에 없다. 조인웅도 어렸을 때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일상생활이 뭔가 매끄럽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고 뭔가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시간이 끊긴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저 눈앞이 깜빡깜빡 멈춘다는 생각에 눈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꾸 끊긴다는 걸 느꼈고, 그게 시간이 중간중간 비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시간의 공백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엄두조차 못 냈다는 게 맞을 거다.

 조인웅은 시간이 흐른다는 게 마치 애니메이션 원리와 비슷하다는 걸 알아챘다. 초등학생 때 교과서 페이지 귀퉁이마다 뼈대만 있는 사람을 그려놓곤 했었다. 조금씩 다른 행동을 하는 그림들을 그려놓은 후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면 장풍도 쏘고, 발차기도 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겨 그림의 모양이 바뀌기 전의 공백. 그게 시간의 공백이었다. 그는 시간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멈춘 세상을 목격했다.

 목격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간과 공백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 사이에서 맘대로 행동하고, 언제든 공백을 떠나는 게 가능했다. 조인웅은 그래서 늘 조심스러웠다. 시간의 공백 상태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황이 오히려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늘 자기를 지켜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공백이 있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었다. 공백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몸을 이리저리 틀어대다가 점차 몸을 움직이게 됐다. 나중에는 아예 공백의 시간까지도 조절 가능해졌다. 일종의 자유를 얻은 거였다. 뛸 듯이 기뻤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엄청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시간의 공백이 유지되는 시간은 3초 내외였다. 즉, 시간의 공백이 생기고, 3초 후에 다시 멈춘 시간이 흐르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또다시 공백이 생기는 형식이었다. 시간이 빈 공백 안에서 시간을 잴 유일한 방법은 어림짐작이었다.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면 된다.

 조인웅은 그 3초의 시간을 마음대로 늘리고 줄였다. 시간의 공백에 오래 머물고 싶으면 5분으로 늘렸고, 빨리 보내고 싶으면 0.5초까지 줄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냥 조절된 거였다. 또한, 시간의 공백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5분 넘게 늘릴 수 없었다. 그게 한계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5분이라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공백의 지속 기간을 맘대로 조절하는 건 꽤 유용했다. 하지만, 그 일을 겪은 후 모든 게 달라졌다. 5분은 너무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빠른 달리기나 축지법 같은 건 재롱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내 후회했다. 공백이 좀 더 길었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아내와 딸을 뒤로한 채 그는 아직까지도 시간의 공백을 늘리는 일에 매달렸다. 공백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참사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당시의 장면이 한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시간, 적어도 30분이라도 시간의 공백을 늘릴 수 없을까? 혹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평소, 시간의 공백을 최대한 줄여 생활했다. 남들보다 더 길어진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매번 지루함을 감수하며 시간의 공백 안에서 맴돌았다. 주로 집 앞 공원이 그의 연습 장소였다. 공원에 올 때마다 의자에 앉아 시간의 공백을 기다렸다. 공원 이용자들에게는 그저 할 일 없는 백수 아저씨로 보였을 터였다. 그리고 공백이 오면 벌떡 일어나 어떻게든 시간을 늘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시 공원을 찾은 그는 시간의 공백이 찾아오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서성거렸다. 30분이 안 되면 20분이라도. 아니, 10분이라도. 그렇게 공원을 헤매며 온 신경을 공백에 집중하다 순간, 이 모든 게 보이지 않는 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공백 자체가 일종의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 문이 열리면 공백에 머물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문제는 문으로 연상한 것 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열 수 있느냐는 거였다.

 답답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시간의 공백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문득, 사방이 아득히 멀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주위가 흔들렸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시간이라는 어두운 공간을 밝게 수놓는 빛줄기를 봤다. 빛의 기둥들이 사방을 가득 채운 채 위로 뻗었다. 이게 공백의 실체일까? 마치 아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신기했다. 

 눈을 감은 그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빛의 기둥들을 살폈다. 하나하나 수를 세다가 곧 포기했다. 공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 한참 수를 세다가 끝부분에 다다를 때쯤이면 어느샌가 시야가 더 넓어지면서 다른 빛의 기둥들이 나타났다. 이 정도 양이라면 적어도 시간의 공백이 일정 시간마다 찾아오는 게 아니라 1초마다 한 번씩은 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는 건 상당수의 공백이 현재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시간의 공백을 다시금 훑다가 사이사이에서 어둠에 가려진 듯한 빛줄기들을 발견했다. 보이고, 인식이 되는데도 어둡다. 이제껏 보지 못한 거였다. 먼 곳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다. 그걸 살펴보자니 머리가 아팠다. 어쩌면 하나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사물을 눈으로 좇듯 정체불명의 공백들을 인식하고자 했다. 잘 보이지 않았다. 두통이 심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듯 어두운 공백들에 눈을 떼지 않았다. 두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 전체가 펄펄 끓을 정도로 열을 내며 그 시간의 공백들을 살폈다. 그리고 전혀 뜻밖의 사실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했다. 바로 시간의 공백이 현재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공백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동시에 존재했다. 잘 보이지 않던 공백들은 바로 과거와 미래에 흩뿌려진 거였다. 그래서 흐릿하고, 어둠 속에 있는 빛줄기처럼 불분명했다. 과거와 미래의 공백들은 현재와 멀리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조인웅은 실망스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시간의 공백이 있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거였다. 말 그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진행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그때로 돌아간다거나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시간은 오직 하나였다.

 그는 이제 포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걸까?

 다시 시간의 공백이 찾아왔다. 조인웅은 자신을 달랬다. 어쩌면 일상으로 돌아갈 가장 좋은 타이밍일지도 몰랐다. 비겁하더라도 상관없다. 할만큼 했으니까. 이제 이런 건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다. 멈춘 시간이 지겹기도 했다. 

 그는 공원 의자에 앉은 채 공백을 0.5초로 줄였다. 그래도 뚝뚝 끊기는 느낌은 막을 수 없었다. 좀 더 줄여야 하나? 그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꼈다. 조금 불편하다고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시간의 공백이 지나고, 얼마 후 다시 공백이 찾아왔다. 그는 공백을 0.5초로 줄였다.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 1초. 2초. 3초. 이상하다. 공백이 줄어들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주위를 살폈다. 시간의 공백이 어느새 1분을 넘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조절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늘 자신의 의지대로였다.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공백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끙끙대도 소용없었다. 공백의 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다. 세상이 멈춘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벌써 5분째였다. 뭔가 잘못됐다.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시간의 공백이 5분 넘게 유지된 적은 없었다. 당연히 그게 한계라고 생각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눈만 굴리다가 벌써 30분이 지났다. 시간이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더는 시간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 벌을 받는 걸까? 이유를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시간의 공백을 조절한 것 때문일까? 얼른 머릿속으로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수많은 빛의 기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유를 모르겠다. 시간의 공백이 지속한다면 모든 게 아무 소용없게 되는 거였다. 멈춘 세상에 혼자 살아남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인웅은 딸을 떠올렸다. 딸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았다.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왜 하필 지금에서야 시간의 공백이 늘어난 걸까? 억울했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때,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시간의 공백이 지나가고, 세상이 움직였다. 어딘가에서 솜사탕 냄새가 났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공원 산책로를 걷는다.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깔깔대며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1시간이나 공백이 늘어났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 공백을 기다렸다. 다시 세상이 멈췄다. 1초. 2초. 3초. 공백이 끝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흐른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시간의 공백이 찾아오길 기다려 유지되는 시간을 줄였다. 0.5초. 공백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 의지대로였다. 이번에는 시간의 공백을 늘렸다. 역시 5분이 한계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그럼 아까 일은 그냥 자연적으로 벌어진 현상일까? 아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뭔가가 어긋났다. 시간의 공백에 혼돈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애써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피 이제 다시는 시간의 공백을 조절하지 않을 거였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는 도망치듯 공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조인웅은 다시 회사와 집을 오가며 평범히 생활했다. 최대한 시간의 공백에 손대지 않으려 애썼다. 공백이 지루해도 다른 생각을 하며 참았다. 잘못 건드리면 시간의 공백이 영원히 지속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별 탈 없이 지난 며칠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시간의 공백뿐이었다.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시들해졌다. 먹고 사는 게 더 급했다. 일 때문에 자기 시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상사 비위 맞추랴, 듬직한 남편과 좋은 아빠 노릇 하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피곤해도 에너지로 가득한 삶이었다. 조인웅은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느꼈다.

 그는 회사 사무실에 앉아 느긋이 동료들을 살폈다. 바로 앞 책상에는 어제 밤샘을 했던 김대리가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대놓고 졸았다. 팀장님도 묵인하는 눈치였다. 입사 동기인 박대리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은 졸린 눈을 비비며 열심히 카톡 중이었다. 조인웅도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온몸이 나른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했다.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었다. 다시 시간의 공백이 찾아왔다. 1초. 2초. 3초. 4초.

 잠이 확 달아났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의 공백이 지속됐다. 어느새 20초가 지났다. 그때처럼 공백이 줄여지지 않았다. 문득, 하늘 높이 뜬 풍선을 잡으려고 손을 휘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멀어진다. 아니, 너무 많아져서 그게 풍선을 밀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두 번째로 겪으니 확실해졌다. 머릿속으로 시간의 공백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조인웅은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했다.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공백의 시간은 이제 30분이 지났다. 사무실 안은 멈춘 상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공백이 조절되지 않았다. 그때와 같은 패턴이다. 머릿속에서 빛 기둥이 수없이 박힌 공백의 전체 모습도 그대로였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멀어진다. 풍선. 지속하는 시간의 공백.

 그는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일종의 실마리였다. 이걸로 뭔가 찾아야 한다. 이대로 시간의 공백이 영원히 지속하게 놔두면 안 된다. 세상은 늘 보던 공백 상태 그대로였다. 모든 게 멈췄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상하다. 맞은편 하늘이 조금 어둡다. 밤하늘이다. 분명히 1시간 전에 점심을 먹었었다. 낮이어야 맞다. 자세히 보니 둥그런 밤하늘이 마치 구멍이라도 난 듯 구름이 많이 낀 하늘 한쪽에 자리 잡았다. 아파트 한 동 정도의 크기였다.

 조인웅은 이게 시간의 공백이 지속되는 이유임을 직감했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사방을 살폈다. 이제 보니 여기저기에서 둥그런 시공간이 현재의 공백에 액자 걸리듯 걸쳐졌다. 도시 한복판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주위에 넘쳐났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저녁 해변이 빌딩 중간에 떡 하니 박혔다. 항구에 정박한 여객선들이 눈을 맞으며 인도와 도로 사이에 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항구였다. 관광지로 유명한 남해바다였다.

 시공간의 크기도 다양했다. 4차선 도로를 다 합친 크기부터 작은 건 경차 정도였다. 모두 둥그런 모양이었고, 그 안으로 다른 시공간의 풍경이 보였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리 없다. 저절로 시공간이 걸쳐지다니.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가 앞으로 내달렸다. 유흥가의 좁은 길목에 들어서자마자 둥그런 바다가 펼쳐졌다. 위에는 헬기 몇 대가 떴고, 해양경찰의 배들과 구명조끼를 입은 취재진의 배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닷물이 넘실거리지 않았다. 헬기와 배들도 모두 멈춘 상태였다. 날리는 눈발이 공중에 그대로 머물렀다.

 조인웅은 다시 걸쳐진 시공간들을 살폈다. 저녁 해변과 항구에 정박한 여객선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공백이라는 이야기였다. 공백 상태에서 다른 시공간의 공백들이 끌려온 거다. 그래서 공백이 유지되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왜 빛의 기둥들이 그대로였는지 알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아까부터 자꾸 걸쳐진 공백들이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 위에 뜬 헬기와 배들. 겨울. 유난히 정박한 배들이 많았던 항구. 그리고 침몰하는 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많이 본 장소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진 현장. 바로 몇 년 전 겨울에 벌어진 여객선 침몰 사고현장이었다. 틀림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분명히 참사 현장 근처였다.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느닷없이 그때 그 일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마치 누군가가 그때의 끔찍한 사진들을 불시에 눈앞으로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가슴 한쪽이 쓰리면서 아팠다.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쳤다.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이미 공백의 지속 시간이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걸쳐진 시공간의 공백은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일 터였다. 

 그는 주차된 자신의 차를 몰아 여객선 침몰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도로에 멈춘 차들 때문에 오히려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약 한 시간 반 정도 달렸음에도 시간의 공백은 여전히 지속됐다. 조바심이 들었다. 모든 게 자신의 탓만 같았다.

 그가 사고 현장 근처의 항구에 도착했다. 등대가 보이는 길목에 차를 세우자마자 배들이 정박한 항구 앞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은 시간의 공백 상태다. 차에서 내려 항구를 살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긴장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저게 이 모든 일의 원흉일 터였다. 조심해야 한다.

 식별 가능한 지점까지 접근한 조인웅은 표 끊는 건물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확실히 보인다. 두 다리와 두 팔. 동그란 머리. 움직이는 물체는 사람이었다. 조인웅과 비슷한 또래의 30대 중반의 남자. 그는 항구 주변을 홀로 서성거리며 먼바다를 바라봤다.

 조인웅은 놀랐다. 이제껏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만 공백을 보고, 느끼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다른 누군가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야 맞다. 저 남자가 공백에 공백을 걸치는 일에 깊숙이 개입했을 터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그 참사일까?

 조인웅이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바다를 살피던 남자도 조인웅이 가까워지자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남자도 시간의 공백을 아는 건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의 공백 안에서 움직이는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긴장한 얼굴의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봤다.


안비현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몇 년 전 남해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 사고 때문이었다. 생때같은 아이들이 침몰하는 여객선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아무도 그 참사를 막지 못했다. TV를 통해 침몰 현장을 지켜보던 수많은 시민의 염원과 바람이 물거품이 됐다. 어떻게 그 많은 아이가 손도 못 쓰고 허망하게 죽었을까?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화물을 더 싣기 위한 무리한 증축. 기준치보다 2배 넘게 과적된 화물. 급속한 변침까지. 원인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몇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거였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속절없이 아이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부모는 또 어떤 심정일까?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아이들을 잃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참사 당시를 떠올렸다. 침몰하는 여객선과 그걸 보고서도 어쩌지 못한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여객선 주위에 모여든 해양경찰의 배와 헬기는 일부의 아이들만 구할 수 있었다. 여객선이 침몰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건 온 국민의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안비현은 처음 능력이 생겼을 때 뭔가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신이 그때 일을 되돌리라는 계시를 내린 것만 같았다. 일종의 죄의식이자 책임감이었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안비현은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의 공백을 느꼈다.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느닷없이 시간이 멈춘 공백에 서 있었고, 또 그 속에서 움직였다. 공백은 규칙적으로 찾아왔다. 공백이 유지되는 시간은 3초. 그는 공백을 조절할 수 없었다. 공백이 시작되면 무조건 3초를 기다려야 했다. 그건 짧은 시간이었다. 공백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3초 안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공백을 느낀 후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앞뒤 공백의 순서를 바꾸는 것뿐이었다. 공백은 마치 시간의 흐름 속에 박힌 빛기둥과 비슷했다. 현재와 멀어질수록 공백들이 점점 작아졌다. 머릿속으로 그게 보였고, 어느 정도 조절 가능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혀 쓸데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별 차이 없었다. 지금 올 공백과 조금 나중에 올 공백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객선 침몰 참사를 떠올리며 슬퍼했다. 그리고 그 사고가 점점 머리에서 잊힐 무렵, 머릿속 깊은 곳에서 다른 것들보다 훨씬 어두운 시간의 공백을 느꼈다. 마치 먼 곳에 있는 듯한 빛줄기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그림자에 가려진 어두운 공백들을 살폈다. 그건 현재의 공백이 아니었다. 바로 과거의 공백들. 그것도 여객선 침몰 참사 때의 시간의 공백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 아니었나? 분명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때의 공백과 현재의 공백 전체를 동시에 본다는 사실이었다. 공백이 있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것.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진행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안비현은 생각했다. 아직 그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어쩌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백의 순서를 바꾸는 것처럼 그때의 공백을 가져와 현재의 공백에 넣는다면? 그럼 현재의 공백에서 과거의 공백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면 과거를 바꿀 수도 있다. 현재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공백 안에 자신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다시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과거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의 공백은 미래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3초라는 시간이 지나면 걸친 공백 안에 있다고 해도, 현재의 공백으로 튕겨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따지던 그는 최대한 많은 과거의 공백을 가져옴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백에 공백을 더하면 분명히 공백의 지속 시간이 늘어날 터였다. 그 상태로 그때의 공백들을 오가면서 조금씩 과거를 바꾸자고 생각했다. 작은 행동들이 모여 결국은 배가 침몰하는 걸 막을 터였다.

 희망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쁜 것도 잠시, 그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 사고를 머리에서 지우려고 했던 것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도 안 된다.

 안비현은 눈을 감고 여객선 참사 때의 빛기둥으로 손을 뻗었다.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걸 잡아야 하는 거라 손을 어떻게 놀려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반응이 반 박자 느린 타자를 치는 기분이었다. 현재의 공백 순서를 바꾸는 것과 직접 과거의 공백을 가져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머릿속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겨우 공백을 쥐어도 미끄러워 몇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아예 두 손으로 억지로 움켜쥐고 잡아 끌어도 공백은 어느 정도 끌려왔다가 금세 고무줄처럼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조그마한 카페 하나를 운영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는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미끄럽다면 손을 닦을 게 아니라 차라리 장갑을 끼는 게 낫다.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거다.

 그는 아예 그때 시간의 공백을 현재의 공백이라고 인식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계속 그때의 빛줄기로 손을 뻗었다. 오랜 공들임 끝에 그때의 공백을 꽉 잡은 채 현재에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다음으로 나아갈 차례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아예 카페 문을 닫았다. 적어도 여객선 침몰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 전까지의 공백들을 가져와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공백의 순서를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지 힘을 더 들여 현재의 공백에 액자를 걸 듯 거는 것뿐이다.

 그는 카페 테이블에 앉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머릿속 느낌에 집중했다. 차근차근 그때의 공백들을 현재의 공백에 가져왔다. 처음에는 서로 밀어내던 과거의 공백과 현재의 공백이 손에 힘을 주자 천천히 겹쳐졌다. 둥그런 시공간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완벽히 걸쳐진 거였다. 곧이어 공백의 지속 시간이 더 늘어났다. 3초에 3초를 더하니 예상과는 달리 6초가 아니라 10초였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그는 정신없이 그때의 공백들로 손을 뻗었다. 그에 따라 현재의 공백 지속 시간도 더 늘어났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안비현이 공백을 가져오는 걸 멈췄다. 이곳저곳에 걸린 과거의 공백을 살피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까마득히 높은 낭떠러지가 있는가 하면, 아프리카 초원이 보였다. 어떤 공백은 도쿄 디즈니씨 입구였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잘못 끌어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여객선 침몰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공백들이었다. 시간은 맞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아주 기본적인 실수를 한 거였다. 그는 시간만 떠올렸을 뿐, 공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때의 시간만 떠올리고 공백을 가져오니, 당연히 그 시간대의 공간이 아무렇게나 딸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를 되돌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제는 시간뿐만 아니라 여객선 침몰 사고 때의 공간도 생각해야 한다. 그에게는 너무 복잡한 문제였다.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이 넘은 공백이 지나가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안비현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공간에 대해 생각했다. 공백에 공백을 걸어 과거 안으로 들어가려면 적어도 공백 안이 발을 디딜만한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침몰 사고 때와 연관이 깊은 장소여야 했다. 원인을 알아야 과거를 바꿀 수 있다. 사고를 예방할만한 곳. 아니면 적어도 침몰한 여객선이 출항하는 걸 막아야 한다. 문제는 그가 가진 능력으로는 시간의 공백만 정확히 가져올 수 있을 뿐이었다. 공백의 공간까지는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그건 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여객선 참사 현장으로 가는 거였다. 그곳에서 참사 때의 시간의 공백을 가져오면 공간도 같이 딸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곳의 공간 자체를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었다.

 침몰한 배가 출항했던 항구로 온 안비현은 그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렸다. 그리고 공백이 오자마자 정신없이 참사가 일어나기 전 공백들로 손을 뻗었다. 최대한 많아야 한다. 가능성을 더 높여야 했다. 시간의 공백은 무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은 후 현재의 공백에 그때의 공백들을 걸쳐 놓으면 분명히 알맞은 시기와 장소의 공백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여객선이 출항하는 걸 막는 게 목표였다.

 사방으로 그때의 공백들이 현재의 공백에 걸쳐졌다. 여기저기에 여객선 참사 하루 전뿐만 아니라, 침몰하기 직전까지의 시공간도 펼쳐졌다.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너무 많은 공백을 가져온 탓이었다.

 여기에서 안비현은 두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현재에 걸린 과거들을 볼 수 있으니 당연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가 걸쳐진 과거로 다가가자 공백이 일렁이며 흩어졌다. 당황해서 물러서자 공백은 다시 나타났다. 마치 호수 표면에 비친 달을 보는 것 같았다. 용기를 내 과거로 뛰어들었다. 눈앞에 보이던 공백 안의 풍경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왔다. 과거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몇 번이나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공백에 접근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안비현은 여객선 침몰 사고가 일어났던 바다를 보며 절망했다. 그래서 공백의 지속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타난 조인웅을 보고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분명히 자신과는 다른 능력을 갖추고, 뭔가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안비현은 조인웅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 과거 안에 들어갈 방법이 없겠느냐고, 그래야 몇 년 전 벌어진 여객선 침몰 참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조인웅도 전적으로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기나긴 공백이 두 차례나 지속됐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그때 일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능했다면 벌써 수십 번 그러고도 남았다.

 조인웅은 걸쳐진 공백들을 훑었다. 모두 여객선 참사가 일어나기 전 시간대의 공백을 끌어온 거다.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능력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그 공백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여객선이 침몰하기 전으로. 적어도 침몰이 막 시작된 시점으로.

 공백이 지나가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에 따라 이제껏 안비현이 끌어모은 과거의 공백들이 현재의 공백과 함께 사라졌다.

 조인웅은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어두운 빛줄기들이 많지 않았다. 한쪽만 듬성듬성 빈 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객선 침몰이 일어난 때의 공백들이었다. 무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공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공백의 지속 시간을 늘리는 것만 가지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야지 시간을 늘려 좀 더 여유롭게 행동하는 게 가능했다. 5분이 긴 건 아니라도 3초보다는 나았다. 일단 들어가야 한다.

 안비현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방법을 찾아내길 바랐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 했다. 같은 어른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조인웅은 다시 공백이 찾아오자 5분으로 지속 시간을 늘렸다. 가만히 생각했다. 공백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건 현실에 발을 내딛는 거다. 느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다른 세상이 아니다. 지금도 공백 안에 서 있다.

 조인웅은 알 것 같았다. 안비현은 오직 과거만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에 걸친 공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거였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 현재라고 믿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그는 안비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갈 방법을 찾았어요. ”

 안비현이 뛸듯이 기뻐했다. 되돌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정신없이 과거의 공백들을 현재의 공백 안으로 가져왔다. 그에 따라 공백의 지속 시간이 늘어났다. 사방에 걸린 과거가 보였다. 조인웅은 적절한 공백을 찾아 주위를 돌아다녔다. 안비현은 그런 그의 앞으로 계속 공백들을 끌어와 붙이는 것에 열중했다.

 조인웅은 주변을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긴장됐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때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됐다. 그는 여객선이 침몰할 때 현장에 있었다. 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객선의 선원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반쯤 물에 잠긴 여객선을 빠져나와야 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남겨둔 채로.

 그는 둥그런 공백들 사이를 걸으며 다짐했다. 이번엔 다르다. 어차피 다 같은 공백이다. 다 같은 현실일 뿐이었다.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들어가면 어떻게든 여객선이 출항하는 걸 막아야 한다. 정 안되면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 쪽지라도 써 붙여야 한다. 그럼 대대적인 수색을 통해 여객선이 바다로 나갈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였다.

 그는 어떤 공백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안비현이 공백들을 너무 급하게 가져왔다. 걸쳐진 과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주위에는 여객선 침몰 시간대보다 훨씬 전과 나중의 공백들도 보였다. 슬슬 걱정됐다. 과거 시간대의 공백들이 듬성듬성 빈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괜찮을까?

 조심스레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지금은 어두운 빛줄기들이 아까보다 더 줄어든 상태였다. 안비현은 지금도 참사 때의 공백들을 손으로 움켜쥔 후 현재로 끌어오는 중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에 과거의 공백이 없다면, 과거든 미래든 어느 한쪽이라도 아예 시간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시간의 흐름은 어찌 되는 걸까?

 설마. 그가 안비현을 보며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일단 멈춰야 한다. 당연한 생각을 이제껏 하지 못했다. 공백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즉,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시간은 하나이므로 그때의 시간이 멈추면 지금도 멈추게 되는 거다. 공백이 한 시간 넘게 지속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바로 세상의 종말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조인웅이 머릿속으로 다시금 시간의 공백을 살폈다. 어느새 어두운 빛기둥이 몇 개 남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 시간이 멈출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공백들을 가져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다급한 외침에 안비현이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그가 안비현을 설득했다.

 “공백들을 계속 가져왔다간 시간이 멈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공백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고요.”

 안비현이 시간의 공백들을 살폈다. 말그대로 어두운 빛기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공백들을 향해 손을 뻗는 걸 멈추려다 허망하게 죽어간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때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 거였다. 조인웅을 바라봤다. 화가 났다. 왜 아이들을 다시 죽게 놔둬야 한단 말인가. 자기는 한 게 뭐가 있다고.

 “여객선이 침몰할 때 당신은 뭐했어요? 아이들이 죽어갈 때 뭐 하고 있었느냐고요? TV로 현장 중계나 보고 있었겠죠. 지금도 그럴 거예요?”

 조인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여객선 침몰 당시 비명과 고성이 오가는 현장에 있었다. 그곳에서 주변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시간의 공백이 너무 짧은 게 문제였다. 적어도 한 시간이었다면, 보는 눈에 상관없이 갇힌 아이들을 구하거나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딱 5분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의 공백은 5분 이상 늘릴 수 없었다. 공백 상태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게 조인웅이 공백의 지속 시간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조인웅은 안비현의 다그침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일단 멈춰요. 다른 방법을 찾자고요. 네?”

 조인웅이 뒤로 물러섰다. 안비현은 충격을 받은 듯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른 방법을 찾자는 건 이 상황을 회피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방법이라니. 시간의 공백을 통해 들어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것만이 참사를 되돌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안비현이 조인웅에게 매달렸다.

 “그럼 어떻게 참사를 막을 건데요? 아시잖아요. 몇백 명의 아이가 죽었다는 걸. 온 국민이 아직도 피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부탁할게요. 제발.”

 조인웅은 안비현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시간이 멈추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미안해요. 만약 여객선 침몰을 막았다고 쳐요. 근데 시간이 안 흘러요. 사람들이 멈췄어요.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자는 거예요.”

 안비현은 화가 났다. 왜 멈추라고만 하는 걸까? 슬퍼하는 건 지금껏 해온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말 안 도와줄 거예요?”

 조인웅이 난처해 하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된다고요.”

 안비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적어도 당신처럼 손 놓고 있지는 않겠어요.”

 조인웅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들어가지 않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일단 멈추자니까요?”

 안비현이 싸늘히 대답했다.

 “늘 말뿐이죠. 그럼 이건 어때요?”

 안비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을 내며 손을 마구 휘둘러 공백들을 움켜쥐었다. 과거뿐만이 아니었다. 미래의 공백들도 모조리 현재의 공백으로 끌어왔다. 사방에서 걸쳐진 공백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마치 성대한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현재에 걸친 공백이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나타났다.

 “뭐 하는 짓이에요!”

 조인웅이 소리치며 안비현에게 주먹을 날렸다. 얼굴을 얻어맞은 그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쿨럭거리며 조인웅을 올려봤다. 조인웅이 씩씩대며 말했다.

 “미쳤어요? 정신 나갔어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빨리 멈춰요!”

 안비현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고 했죠?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고 멈추니까. 그럼 반대로 생각하면요. 여객선 침몰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멈추면, 벌어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죠. 사람들이 더는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안비현이 얼얼한 턱을 매만지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는 침을 퉤! 뱉고는 조인웅을 노려봤다.

 “말해봐요. 다른 방법 있어요?”

 조인웅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렇다고 시간을 멈춰요? 다같이 죽자는 소리랑 뭐가 달라요?”

 안비현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나 나나 한 게 뭐 있어요? 우리가 책임져야죠. 어떤 대가를 치르든간에.”

 조인웅이 더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좀 멈추라고요!”

 안비현을 덮친 조인웅은 그를 쓰러뜨리고 주먹질을 했다. 안비현이 머리 여기저기를 얻어맞았다. 정신이 없을 텐데도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걸쳐진 공백들이 계속 늘어났다. 물리적인 타격으로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조인웅이 다급히 빛의 기둥들을 살폈다. 과거와 미래의 공백 대부분이 현재의 공백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시간이 없다. 이러다가는 모든 공백이 현재에 걸친다. 그는 딸을 떠올렸다. 급한 마음에 안비현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며 안비현은 피를 토한 채 웃었다.

 “나야말로 미안하네요. 당신이나 나나 이 공백에 오래 있어야 할 거예요. 아마 영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래도 상관없어요.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가 될 거니까.”

 조인웅이 헐떡이며 되물었다.

 “진짜가 아니잖아요? 진짜 여객선 침몰이 되돌려지는 게 아니잖아요?”

 안비현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더는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할 말을 잃은 조인웅은 절망하며 안비현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멈추지 않을 거였다. 오직 참사를 막는다는 사실에만 급급해 눈과 귀가 멀었다. 조인웅은 그의 몸 위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걸쳐진 공백뿐이었다. 과거와 미래가 몽땅 현재에 쑤셔 박힌 꼴이었다. 쓰러진 안비현이 밑에서 콜록대며 말했다.

 “포기해요. 이미 공백들을 다 가져왔어요. 포기하고, 받아들이라고요. 나라고 이곳에서 편할 것 같아요?”

 조인웅이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과거와 미래 어디에도 어두운 빛의 기둥은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끝났다. 시간이 멈췄다. 이제 보지 못할 것이다. 딸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는 자기 딸을 위해 다른 아이들을 버렸다. 미래를 꿈꿨다.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걸지도 몰랐다.

 그때를 떠올렸다.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배가 바닷속 깊이 가라앉는 진동을 느꼈을 때를. 반쯤 열린 문이 보였다. 여객선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객선 안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열린 문 주위에서 서성이다 끝내 발걸음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딸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구하다가 죽으면 딸은 아빠 없는 아이가 되는 거였다. 딸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침몰하는 배 위에서 애타게 현장을 바라보다가 구명정을 타고 비겁하게 참사 현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조인웅은 우두커니 서서 안비현을 내려다봤다. 어쩌면 자신도 그와 같을지 몰랐다. 시간의 공백을 늘리는 것에 집착한 이유는 그때로 되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조인웅은 여객선 참사를 되돌리지도 못했고, 시간이 멈추는 걸 막지도 못했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위를 살폈다. 이제 영원한 공백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건 영원한 현재였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빛을 내는 작은 흔적. 시간의 공백이었다. 분명히 안비현이 공백들을 모조리 가져왔었다. 남았을 리가 없다. 조인웅은 눈물을 닦고, 눈을 감았다. 그 작은 빛줄기를 찾아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디에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뜻밖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찾았다. 바로 과거 한쪽 구석, 여객선 침몰 참사가 일어난 직후였다.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때. 충격에 빠져 온 국민이 모든 일을 내려놓고 슬퍼할 때. 그때 그 시간대에 존재하는 작디작은 시간의 공백이었다.

 조인웅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왜 안비현이 이걸 지나쳤을까? 여객선 침몰 참사가 일어난 후 온 국민이 절망감에 허덕여야 했다. 그건 세상이 멈춘 것과 같았다. 마치 시간의 공백처럼.

 안비현은 그 안타까운 상황과 공백을 구분하지 못했던 거였다. 뻔히 빛의 기둥이 보이는데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그것만 남겨둔 채 다른 모든 공백을 현재로 가져왔다.

 조인웅은 시간의 공백이라는 게 왜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간단한 이치였다. 멈춤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멈춤이 있음으로써 움직인다는 의미가 생긴다. 여객선 침몰 참사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기에.

 할 수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했다. 그는 머릿속을 통해 남은 단 하나의 공백을 늘리기 시작했다. 5초. 30초. 1분. 어쩌면 공백이 늘어난만큼 시간이 흐를지도 모른다. 문제는 5분이 한계라는 거였다. 더 늘려야 한다.

 조인웅이 조심스럽게 안비현에게서 물러났다. 들키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안비현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 남은 시간의 공백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놀랐다.

 “대체 어디에서?”

 화들짝 놀란 조인웅이 온 힘을 다해 시간의 공백을 늘렸다. 딱 5분. 거기에서 더 늘지 않았다. 전에 느꼈던 감각이 다시 온몸으로 느껴졌다. 공백 자체가 문이었다. 열려야 들어갈 수 있는 문. 아무리 노력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안비현이 눈을 감고, 5분으로 늘어난 공백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가만히 놔둘 것 같아요?”

 안비현은 손에 쥔 빛줄기를 현재의 공백으로 잡아당겼다. 조인웅은 포기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공백의 지속 시간을 더 늘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가 힘을 준 덕분인지 빛의 기둥이 흔들리면서도 제자리에서 버텼다. 끌어내려 힘을 주자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안비현은 처음 공백을 끌어오던 당시를 떠올렸다. 미끄럽다면 장갑을 껴라. 그가 정신을 집중하며 공백을 쥐고 흔들었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실함이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조인웅의 노력에도 빛의 기둥은 현재를 향해 서서히 끌려왔다. 조인웅은 계속 생각했다. 문을 열어야 한다. 공백으로 들어가려면 현재라고 인식하듯 지속 시간을 더 늘리려면 맞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문을 연다. 열어야 한다. 자꾸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을 여는 건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주도적으로. 문을 열게 아니라, 문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5분. 6분. 10분. 한 시간. 여객선 침몰 참사 때의 공백이 풍선처럼 늘어났다. 벌써 3일 정도의 크기다. 팔뚝만한 빛의 기둥이 어느새 허벅지만큼 커졌다. 그사이 손에서 공백을 놓친 안비현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설마 진짜로 공백의 지속 시간이 늘어날 줄은 몰랐다.

 조인웅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공백을 늘렸다. 한 달. 두 달. 1년.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지럽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그는 생각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는 아주 긴 멈춤이 필요하다. 그것뿐이다.

 다급해진 안비현이 성인 어른 크기로 커진 공백을 살폈다. 여객선 참사 직후나 지금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는 똑같다고 생각했다. 둘 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시간일 뿐이었다.

 안비현이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손이 아니라 아예 빛의 기둥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잡아당겼다. 3년으로 불어난 공백이 현재의 공백으로 맥없이 끌려왔다. 조인웅이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걸쳐지는 공백을 지켜봐야 했다. 데자뷔였다.

 조인웅은 지금이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울어진 갑판 위에 서서 열린 문 앞을 서성이던 때. 어쩌면 간단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용기를 내야 한다. 그때처럼 다시 무력해질 용기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시간을 흐르게 할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10년으로 늘어난 공백이 현재의 공백에 고정되기 직전, 조인웅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비현이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쳤다. 공백 안에 들어온 그는 마치 빨려 들어가듯 흡입력을 느꼈다. 몸이 흔들리자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어느새 노란 리본을 든 수많은 추모객 사이에 섰다. 뒤를 돌아봤다. 자신이 들어온 둥그런 공백 너머로 안비현이 긴장한 채 지켜봤다.

 안비현은 그를 이대로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 공백은 현재에 걸리지 않고, 서로 엇갈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새 조인웅이 들어간 공백이 10년에서 20년으로 훌쩍 늘어나 트럭 한 대 크기로 커졌다. 안비현은 깜짝 놀랐다. 저 안에서 조인웅은 20년의 지속 시간을 그대로 체험할 터였다.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대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

 상관없었다. 안비현은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버텨도 마찬가지였다. 행동해야 변화한다. 가만히 있는 걸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안비현은 계속 공백을 현재에 고정하려고 시도했다. 조인웅이 들어간 공백은 이제 20년에서 50년으로 벌어졌다.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안비현이 혀를 차며 자꾸 허공을 맴도는 공백을 바라봤다. 참사 직후의 공백과 현재의 공백은 걸쳐지지 않은 채 엇갈리는 상태였다.

 50년이던 공백은 100년으로 늘어나더니 200년을 훌쩍 뛰어넘어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졌다. 이층집 한 채 정도의 크기였다. 그가 들어간 공백이 마구 떨렸다. 사방으로 튕기듯 춤을 췄다.

 안비현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공백이 마구 흔들리면서 계속 커졌다. 분명히 그 안에서 조인웅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무한대의 시간이라니. 살아 있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안비현이 뒤로 물러서며 씁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어느새 공백이 상가 건물 크기로 부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시간이 흐를 방법은 없었다. 그저 최후의 발악이었다. 시간이 멈추는 것. 그것만이 여객선 참사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견디지 못 할 것이다.

 그 순간, 무한대의 공백이 뻥 터지면서 커다란 공백 자체가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마치 쉴 새 없이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조각 조각난 수많은 빛줄기가 여기저기로 뻗었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감싼 안비현이 머릿속으로 시간을 더듬었다. 갈 길을 잃은 공백들이 텅 빈 시간의 틈으로 찾아 들어갔다. 현재와 걸친 과거와 미래의 공백들도 그 여파에 모조리 찢어졌다. 조각난 상태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비현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얼른 시간의 공백 전체를 살폈다. 먼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전보다 더 많은 빛의 기둥들이 시간마다 빼곡히 박혔다.

 안비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를 악물고, 괴성을 내질렀다. 이제까지 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안비현의 눈에 현재의 공백에 가만히 선 조인웅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의 공백이 찢겨져 나갔음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비현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미쳐 있겠지. 안비현은 확신했다. 적어도 정상은 아닐 것이다.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안비현이 다가오자 조인웅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미친 것 같지 않았다. 지나치게 차분했다. 미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안비현은 조바심이 들었다. 시간의 공백들을 다시 끌어와도 미치지 않은 이상 언제든 막아설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떤 상태일까? 안비현이 조인웅에게 물었다.

 “어떻게 버텼죠? 분명히 영원이라고 느낄 정도의 시간이었을 텐데.”

 조인웅은 안비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제껏 해왔던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안비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웃음의 의미는 뭘까? 어째서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는 걸까?

 어느새 멈춰있던 공백이 지나가고, 시간이 흘렀다. 조인웅은 고개를 돌려 살아 움직이는 주위를 살폈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이 길을 오갔는지 몰랐다. 늘 보던 멈춘 사람들. 이제는 다를 거였다. 앞으로 보게 될 건 새로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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