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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지룡의 성

2013.03.01 00:5203.01

지룡의 성
-The Citadel of Earth deity-

 

 


그 도시는 원래부터 전해지는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누구나 다 지룡(地龍)의 성이라고 불렸다. 긴 세월동안 당연한 듯이 불리다보니 지금은 시민들조차 ‘우리 도시’라는 의미로 부르고 있었다.
지룡의 성은 다른 많은 도시국가들이 그렇듯 절반은 쓰러지고 절반은 겹쳐진 건물들의 무더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커다란 흙과 돌, 철과 시멘트 산으로 뒤덮인 거대한 흰개미집 같이 보였다.
주요 산업은 광업으로 아누몬 세계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철광석 제련소로 명성이 높았다. 거대한 탑과 다리, 건물과 요새의 뼈대로 인기가 높아 건축업자들 사이에서는 지룡의 성에서 만든 것이라는 의미는 곧 최고 품질의 자재를 의미하는 관용어가 될 정도였다.
또한 지룡과 철근 다음으로 유명한 요소는 그 폐쇄성이었다. 외부와 열려 있는 출입구는 오직 하나. 그 나마도 대부분은 철근을 나르는 철로와 트레일러들이 드나드는 널찍한 도로가 차지하고 있어 외부에서 온 방문자나 교역을 하고자 하는 소규모 상인들은 일렬로 줄을 서서 육중한 경비소를 통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상인들은 이곳과의 교역을 지룡의 왕릉 참배라고 비아냥거렸다.
상인들은 성 안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출입구 바로 뒤에 위치한 도매시장에 하역을 하거나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과 간단한 경매 등의 거래를 통해 물건을 넘기고는 곧바로 성을 나와야만 한다. 성을 거의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자는 수송 트레일러 운전수 정도였다. 철광석의 채취 및 제련 이외에는 농업을 비롯한 모든 산업이 마비되어 자급자족이 안 되고 있는 상태이기에 매일 같이 철근을 실은 열차와 식료품과 포목 등을 실은 트레일러가 스쳐 지나며 부지런히 성을 드나들었다.

줄을 지어 늘어선 소규모 상인 행렬의 뒤편에 묘인족(猫人族) 여성의 차량도 자리하고 있었다. 전면은 라브로사우루스가 끌고 후면엔 후륜구동의 내연기관이 장착되어 있는 전형적인 하이브리드 동력 트럭이다.
그날따라 정체가 길어지고 있어 운전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보였다. 행렬은 길어지고 차들의 꽁무니에서 내뿜는 짙은 매연, 엔진이 툴툴대는 소리, 수레를 끄는 짐승들의 으르렁 소리가 도로 위를 가득 메웠다. 안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운전대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자꾸만 심심하다, 답답하다 칭얼거리는 아이가 성가시기만 했다.
“엄마, 아직 멀었어?”
칭얼대는 목소리가 등을 간질였다. 어머니는 뒷자리로 손을 뻗어서 어느덧 털이 풍성하게 자란 딸의 머리며 목을 긁어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니까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 알았지?”
아이는 지금의 생활이 싫지 않았다. 모녀 단둘이서 집도 없이 떠도는 처지였지만, 세상의 다양한 경치와 많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만 거의 유일하게 싫어하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멀리서 보면 온갖 잡동사니가 불쑥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도 보였고, 높은 산 위에서 보면 무언가 놀라운 보물이 숨겨진 동굴의 입구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험상궂은 병사들이 창을 치켜들고 무슨 나쁜 장난이라도 치려고 온 사람 취급을 하며 검사를 하고 따져묻는 것이다. 어머니도 오래 머물기 싫은지 가져온 물건을 금과 화폐로 바꾼 후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엄마, 여기 말고 다른 데 가면 안 돼?”
“엄마도 좋아서 오는 건 아냐. 물건 값을 여기만큼 잘 쳐주는 데가 없으니까 최소한 일 년에 서너 번씩은 와야 해.”
이 묘인족 여성은 먼 길을 다니기 때문에 보존 기간의 제한이 없는 의류나 장신구를 주로 취급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오래 보관할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는 몇 가지 술도 팔곤 했다.

이젠 잠도 안 온다. 더는 세어볼 사람이나 나무도 없다.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다. 이 주위는 온통 맵싸한 연기밖에 없다. 심심해진 아이는 예전에 했던 질문이라도 던져본다.
“엄마, 저 안에 지룡이 살고 있어?”
“그렇다더구나.”
“어떻게 생겼어? 얼마나 큰데?”
“그건 엄마도 모르겠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머리가 집채만 한 커다란 뱀이라고도 하고, 우리가 탄 수레 같은 건 한 입에 삼킬 만큼 거대하다고 그러더라.”
“우와! 보고 싶다.”
“안 돼. 지룡은 저 성 안에서 잠들고 있는데, 사람들이 귀하디귀하게 모시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무나 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대. 딱 한 사람, 제사장(祭祀長)이라는 사람만 지룡을 접할 수 있대.”
“제사장? 뭐하는 사람인데?”
“저 도시에서 왕처럼 떠받들고 있대.”
“그럼 제사장이 저 나라의 임금님이야?”
“아니, 도시를 관리하는 시장이 따로 있는데, 제사장은 그러니까 저들이 신으로 모시는 지룡에게서 마법의 힘을 얻어서 도시를 번영시키고 있대. 그래서 사람들은 시장보다 제사장을 따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너한테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야기겠다.”
역시나 아이는 이미 흥미를 잃고 돌아누워 있었다. 이 근처는 온통 폐허라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화석과도 같이 지면에서 튀어나온 철골 구조물의 흔적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생명력을 지룡의 성이 빨아들인 듯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차량은 조금씩 전진하다 다시 멈춰 섰다. 정체는 굉장히 오래 지체되어 앞뒤에선 벌써 차에서 내려 간단한 음식을 해먹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자리를 깔고 앉아 도박판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어디에도 끼일 수 없는 작은 아이는 그저 반쯤 열어놓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침 묻힌 손가락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따뜻한 공기에 취해 깜박 잠이 들었던가, 문득 눈앞을 스쳐 지나는 불빛에 놀라 눈꺼풀을 살짝 들었다. 처음엔 환시(幻視)인가 했으나 자세히 보니 움직이고 있었다. 반딧불치고는 너무나 크고 환한 불빛이 분명히 있다. 둥그런 네 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조금 비틀대는 듯 둥실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에 아이는 혼을 빼앗긴 듯 잠시 멍하니 보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묘인족다운 유연한 동작으로 좁은 틈새를 금방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져 두 바퀴를 굴렀다. 아이는 전혀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빛의 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술을 마시며 껄껄대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다. 게걸스럽게 술을 들이키는 뚱뚱한 호거, 좌판을 늘어놓고 소리치며 호객 행위를 하는 오르크, 늘어선 차량의 창문을 촉수로 두드리며 먹을 것을 파는 엘둔 행상인 등 갖가지 종족들.
주위를 유심히 보던 아이는 바다 위의 빙산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콘크리트 덩어리 그림자 아래에서 반짝이는 움직임을 찾아내곤 네 발로 달려가 뒤쫓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편이 더 빠르고 편했다.
불빛은 콘크리트 덩어리 안쪽으로 사라졌고, 그 위를 쫓으니 우물 덮개처럼 보이는 둥근 철제 뚜껑이 열려 있고 그 아래로 어둡고 좁은 통로가 땅 아래로 향해 있었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를 만나면 우선 엄마에게로 돌아와 물어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지금껏 엄마 말을 어겨본 적이 없는 아이였지만,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영롱한 불빛의 흔들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 * * * * * * * * *


통로 안은 어둡고, 지독한 냄새가 나고, 발밑으로는 질척거리는 기분 나쁜 촉감이 있고, 무언가 조그만 생물이 지나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무서운 마음에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싼 후 엄마를 부르고 싶었으나 발을 멈추진 않았다. 저 앞에서 나풀거리는 불빛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면, 팔을 쭉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쫓아가자, 조금만 더. 그런 생각에 빠진 아이는 저도 모르게 지룡의 성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정말로 눈을 깜박이는 어느 한 순간 빛은 사라지고 아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 다행히도 머리 위에 비치는 희미한 빛은 출구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녹슨 철제 사다리가 달린 굴뚝처럼 높은 통로를 통해 아이는 들어올 때와 비슷한 하수구 통로를 거쳐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성 내부는 그야말로 철근과 콘크리트의 숲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들이 겹겹이 쌓이고 뒤섞인 가운데 굵은 철근이 그 사이사이를 기둥 혹은 나사처럼 지탱하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주위엔 가느다란 전선이 칡넝쿨처럼 엉켜 있었으며, 성채의 외부도 그렇듯 두텁게 말라 굳은 점액질의 투명 도료가 잔뜩 발라져 있었다. 거대 거미가 토해낸 거미줄을 엘둔족이 자신들의 점액과 합성하여 만든 접착제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지나가는 군중들. 대부분 키가 작고 피부가 검은 드베르그 종족이었는데, 어깨를 움츠리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바쁘게 걸어 다녔다. 특이한 것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길쭉한 못 비슷하게 생긴 침이 꽂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에 손바닥보다 좀 더 길었고, 약간의 은빛을 띤 검은색 침의 끝부분이 둥글고 넙적하게 튀어나와 있어 꼭 못을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낯설고 위압적인 광경에다가 못이 박힌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이는 겁을 집어 먹었다. 어린 마음에도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고,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너 뭐냐, 꼬마야?”
“호랑이 종족인가? 처음 보는데?”
아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말했다. 등에 약간의 얼룩 무늬가 있긴 했으나 모녀는 분명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 종족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털의 색깔도 갈색이 약간 섞인 회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해명을 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벌써 몇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신기한 아이를 구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외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머리에 침이 꽂혀 있지 않다는 점이 이상했다. 벌써 경찰을 부르라는 거친 목소리도 있었다. 아이는 더 꾸물거릴 것도 없이 몸을 날려 다시 네 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렇게 날쌜 줄을 예상치 못했기에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얼른 경찰에 알리자고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뭘 잘못 했는지, 왜 도망쳐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따질 틈이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분노와 이질감이 가득한 시선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본능은 즉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벌써 뒤에서 사이렌 소리와 붉은색 조명등이 점멸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꼬마야 어쩌고 하는 확성기 소리도 들렸다. 아이로써는 더더욱 멈출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지리도 모르는 낯선 도시의 한복판을 마냥 달리고 있어서야 곤란했다. 어딘가 저들이 쫓아오지 못할 곳에 숨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이 있다한들 처음 와본 아이가 찾아낼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장소가 있기나 할까.
아이는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의 물결 틈에서 날갯짓을 하는 작은 불빛을 언뜻 보았다. 그리고 그 작은 빛이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기라도 하는 듯 그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마침내 숨이 차고 지쳐서 더 달릴 기력도 없다 싶을 즈음, 아이는 어느 작은 집 앞에 다다랐다. 골목 사이사이를 뒤흔드는 붉은 빛과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이는 문 앞에 달린, 우유나 신문 등을 넣는 투입구에 작은 몸을 집어넣었다.


* * * * * * * * * *


“이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려고 그래!”
톱으로 통나무를 긁어대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을 든 육중한 덩치의 호거족(族) 병사가 호통을 치고 있었다. 머리에 쓴 투구 위로 가느다란 철침이 비쭉 솟아 있었다. 아이 어머니는 떼를 써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엎드려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애가 안 보여요. 아무래도 저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그래요. 제발 찾아보게 해주세요, 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지룡의 성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아?”
병사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아이가 정말 성 안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경비가 허술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위에서 그걸 알게 되면 문책을 당할 것이 뻔하니 어머니를 들여보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창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갑옷에 커다란 계급장을 단, 고위 간부로 보이는 드베르그가 다가왔다.
“뭔데 이리 시끄러워? 지금 제사장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중이야. 시장이랑 줄줄이 데리고 민생 시찰 중이셔. 청소 말끔하게 다 해놨지?”
“아, 근데 그게 말입니다. 이 여자가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생떼를 써서……”
“야, 시간 없어! 지금 오고 계신다고! 당장 쫓아버리고 정위치 해!”
간부는 귀찮다는 듯 내뱉었지만, 파리 쫓듯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병사는 어쩔 줄 몰랐다. 다급해진 마음에 도둑놈 개 쫓듯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아줌마, 들었지? 시찰 끝나면 들여보내 줄 테니까 일단 저 문밖에 있다가 나중에 와요, 나중에!”
사실 들여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급하니까 마음에 없는 소리도 나온 것이다. 순진한 아이 어머니는 그 말에 안심하여 알았다고 말하곤 순순히 물러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경비를 서는 병사완 비교도 안 되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직속 경호대를 이끌고 제사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뒤로 시장과 고위 관료들이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 제사장은 절도 있게 경례를 하는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말을 건넨 후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상인들에게 다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물건을 사고파는지 물어보았다. 상인들은 사전에 외웠던 모범답안을 열심히 내놓았고, 제사장은 흡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일하라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
아이 어머니는 기둥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사장은 몇 겹이나 되는 두텁고 화려한 법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의는 치마와 같이 펼쳐져 거의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그래서 얼핏 보고 여자인가 싶었는데 성별은 알 수 없었으나 하의가 긴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다리 대신 하나의 긴 꼬리가 바닥을 부드럽게 쓸면서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몸에서 유일하게 맨살을 드러낸 머리와 양손은 파충류와 같이 작은 비늘로 촘촘히 덮혀 있었고, 동그란 눈에 쌀알처럼 길쭉한 눈동자, 뾰족한 입모양은 뱀과 꼭 닮았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희귀종족 라뮤로스임에 틀림없었다.
묘인족인 그에게는 소름끼치는, 본능적인 공포를 일깨우는 외양이었지만 시민들의 인기와 병사들의 충성도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마음 깊숙이에서 공포를 이겨내는 모성 본능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앞뒤가 꽉 막힌 말단 병사보다는 높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더구나 그가 소문대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제사장이라면 필시 인자한 사람일 테고, 자신의 작은 부탁쯤이야 들어줄 것이다.
“어, 어, 이봐!”
한발 늦게 발견하고 놀란 병사가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 질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묘인족 다운 재빠른 움직임으로 긴장한 채로 굳은 병사의 옆을 지나 시찰중인 제사장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물론 경호대원이 앞을 막아섰지만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였다.
“제사장님!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경호대가 이미 거동 수상자를 양쪽에서 붙잡았지만 지지 않고 외쳤다.
“제발요! 제 아이가 이 도시 안에 있어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거예요! 제발 찾아주세요! 절 들여보내주세요……!”
그 말이 분명 제사장의 마음을 움직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방향을 돌려 어머니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그가 손을 들어 경호원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말했다.
“너는 이 도시의 시민이 아니로구나.”
머리에 침이 없는 것도 그렇고, 소수종족인 묘인족은 이 도시 안에 없다. 이는 라뮤로스가 자신 혼자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그렇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장은 이어서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네 아이가 이 도시 안에 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주위를 아무리 찾아보고 상인들에게 물어보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순간 독사와 같은 날카로운 안광이 경비를 서는 병사들을 향했다. 어머니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 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 건으로 경비원들과 책임 장교까지 줄줄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생각하던 제사장은 다시 시선을 돌리며 예의 차분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곤 말했다.
“좋아, 나를 따라오너라. 아이를 찾게 해주지.”
“고맙습니다, 제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사장은 경호대에게 이 여자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한 후 시찰을 계속했다.


* * * * * * * * * *


“아버지, 대체 뭘 어쩌시려고 그랬어요?”
아들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신문 투입구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 먼지투성이의 낯선 아이. 그리고 뒤이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수상한 꼬마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는 경찰들. 하지만 노인은 아이를 잠시 살펴보더니 찬장에 숨기고는 아무것도 못 봤다고 대답한 것이다. 찾아야 할 집이 많았기에 경찰 하나가 대충 구둣발로 집 안에 들어와 휘휘 둘러보곤 무언가 발견하면 즉시 신고하라는 상투적인 지시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이후에야 아들과 며느리, 아이들까지 나와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다.
“발각나면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까지 덤터기를 쓰는 거라고요!”
“조용히 해. 이 아이를 잘 봐라.”
아이는 지금 식탁에 앉아 노인이 준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중이었다. 심통이 났던 아들도 금세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어…… 머리에……?”
“너는 아마 처음 보았겠지. 머리에 침이 꽂히지 않은 사람을. 네가 태어나기 전, 내가 너보다 어릴 적부터 시민들은 모두 머리에 침을 박았으니까. 이후로 태어난 아이들은 출생 직후 시술을 받았지. 왜 그런지 아니?”
“그거야 지룡 큐인님의 마력을 나누어 갖기 위함이죠. 그 덕분에 우리는 노동력도 올라갔고 철근을 수출해서 지금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는 거 아닌가요?”
“이 도시에서 머리에 침을 박지 않은 이는 단 하나뿐이야. 누군지 말 안 해도 알겠지?”
“그야……”
얼핏 생각하면 좀 이상한 듯 싶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대제사장만은 머리에 침 대신 스스로 금관을 쓰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내가 어린 아이였던 그 시절에, 여기는 지붕이 하늘로 열렸고, 사방에 문이 달려서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백성들은 지룡님을 숭배하며 농사를 짓고 광석을 캐면서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었지. 그때 홀연히 나타난 마법사가 사람들에게 말했지. 왜 지룡을 가만히 내버려 두냐고. 지룡의 막대한 마력을 이용하면 모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 말이다. 설득당한 사람들은 지룡을 꽁꽁 묶어 가두고 마법사가 짜낸 지룡의 마법으로 지금의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지. 이후로 마법사는 제사장이 되었고 성 자체가 하나의 도시국가로 성장한 거야. 마법의 힘을 얻자는 명목으로 제사장은 사람들의 머리에 침을 꽂고 가혹한 노동으로 내몰았지. 지금 너나 네 주위의 사람들을 봐라.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느냐? 모두 시간에 쫓기며 하루 종일 일하고, 연장에 야근에 시달려도 늘 쪼달리고 있지. 너희들이 힘들게 일해서 만들어낸 부(富)는 다 제사장이 가져가고 있질 않냐. 그 뱀 같은 입으로 이 도시의 모든 걸 집어삼키고 지배하고 있단 말이다!”
아들은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장에서 직장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이 들이닥칠 터였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체념이 담긴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괜찮다. 난 살만큼 살았고, 나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늙은이들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어. 시민들은 제사장의 횡포와 지배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지. 나도 지금껏 단념하며 살고 있었지만, 이 아이를 봐라. 어째서 여기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머리에 침이 꽂히지 않은, 이 도시의 존재가 아니야. 자유로움 그 자체다.”
“그래서 어쩌실 건가요?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경찰에게 붙잡힐 게 뻔한데요. 괜히 숨겨진 죄로 우리까지 처벌받는다고요!”
“친구들을 모아볼 작정이다. 이 아이가 도시를 드나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거다. 일단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면 지룡님을 구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든지, 방법은 그 후에 생각하면 돼.”
“아버지, 제발! 우리 모두 다 죽는다고요!”
“말했지 않느냐. 어차피 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야. 이대로 너랑 손주들에게 나와 같은 인생을 물려주고 싶진 않다.”
아버지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아들은 그저 자신과 아내, 아이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봐 전전긍긍이었다. 밖에서는 아까부터 안내방송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켜놓은 TV에선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돌연 낯선 얼굴이 나타나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다. 고양이를 꼭 닮은 여성의 얼굴이었다.
“아가, 우리 아가, 어디에 있니? 어서 오렴.”
정신없이 먹던 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엄마의 목소리다. 그 소리를 쫓아보니 엄마가 TV 안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찾음, 인상착의는 지금 보는 어머니와 닮았으나 어리고 체구가 작음, 발견하여 시청으로 데리고 오면 후사하겠음 하는 내용의 안내문이었다.
“시청? 할아버지, 시청이 어디에요?”
아들이 대신 대답했다. 한시라도 빨리 아이를 쫓아버리고 싶은 심정인지라 기쁜 마음에 얼른 가르쳐주었다.
“길을 따라 동쪽으로 죽 가면 차들이 지나가는 대로가 나올 거야. 거기서 시계 방향으로 계속 가면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있는데, 그걸 건너서 죽 가면 호수가 나와. 호수를 우회해서 대로를 따라 계속 가면 건물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 중에서 앞에 광장이 있는 커다란 청록색 벽돌 건물이 있거든. 그게 시청이야.”
“고맙습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아이는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노인이 황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 얘야!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함정인 것 같아. 아까 넌 도시 밖에서 왔다고 했지? 어머니랑 둘이서 장사를 하면서 떠돌아다니고?”
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아까 먹을 것을 주면서 물어보기에 솔직하게 대답했었다.
“지금 저 화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네 어머니 머리에 침이 꽂혀 있는 것 같더구나. 네 말대로라면 너희 모자는 여기 시민이 아닌데, 어째서 머리에……? 이거 아무래도 수상해. 내 생각엔 제사장이 널 잡으려고 함정을 판 것 같구나.”
“그래도 난 엄마 만나러 갈래요!”
함정이니 뭐니, 아이는 그런 복잡한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엄마를 만나 포근한 품 안에 몸을 던지고 싶을 뿐이었다. 노인이 붙잡으려 했으나 아이는 미꾸라지처럼 다리 사이로 빠져나와 손을 뻗쳐 문고리를 돌렸다. 뭐라고 외치는 노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이는 가로등이 늘어선 어두운 거리 사이를 정신없이 달렸다.


* * * * * * * * * *


“으흐흐흐……. 이 꼬맹이가 도시를 들썩인 그 애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제사장 성하.”
제사장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육중하고 단단한 육체를 가진 거구가 경찰청장이다. 아이는 열심히 시청을 향해 달렸지만 중간에 경찰들이 던진 그물에 포획되어 청장에게 보고되었고 이렇게 제사장의 앞에 대령시킨 것이다.
“무슨 시위라도 일어난 것처럼 경찰들이 몰려다니고…… 수배 방송을 띄우고…… 아주 난리법석을 떨었어. 흐흐흐흐…….”
“송구스럽습니다, 성하. 아이가 워낙 작고 날쌔서 혼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실없이 웃고 있던 제사장이 돌연 싸늘한 눈초리로 청장을 쏘아보았다.
“여기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직무태만으로 처벌을 받을 줄 알아!”
거구의 청장도 눈에서 뿜어나온 기운에 감전된 듯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엎드려 선처를 호소했다. 그가 물러나자 제사장은 옆에 대기하던 신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관은 수술도구를 건네는 간호사처럼 민첩하게 그의 손바닥 위에 침을 얹었다. 제사장은 포박된 채로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가느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네 어미에게도 말했지만, 난 내 도시에 침입자가 어슬렁거리는 꼴은 못 본다. 이물질이 들어가면 언젠가는 이상을 일으키고, 균열이 일어나고, 무너지고 말지. 나의 도시는 완전무결해야만 해. 이 손 안에 모든 것을 쥐고 조종하는 완벽한 세상! ……너 같은 고양이 새끼가 훼방을 놓게 놔둘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어! 그러니까 너도, 자랑스러운 지룡의 성의 시민으로 만들어주마.”
제사장은 말을 하며 왼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얼핏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침을 꽂을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어머니도 그랬듯 털이 너무 풍성하고 길어서 약간 애를 먹었지만, 제사장은 이내 적절한 자리를 찾아 두피가 보이도록 손가락으로 털을 눌렀다. 그리고 오른손에 든 침을 머리에 꽂고, 가만히 엄지와 검지를 비비듯 돌리며 깊숙이 박았다. 아이는 머리에서부터 온몸으로 전해지는 아찔하고 처절한 고통에 가늘게 떨다가 그대로 혼절했다. 시술이 끝나자 제사장은 대기하던 신관에게 옥에 가두라 명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떴다.

그와 비슷한 시각에, 노인의 집에는 무장을 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렇다 말도 없이 다짜고짜로 노인을 흉악범이라도 되는 양 에워싼 후 단단히 포박을 하여 끌고 갔다. 당황하는 가족들에게 남아 있던 경찰 하나가 이렇게 말하고 갔다.
“사상범으로 즉결 체포 명령이 떨어졌소. 당분간 면회 및 연락은 불가요. 재판일시가 정해지면 통보해줄 테니 그리 알고 있으시오.”
휑하니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던 아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그러게 내가 뭐랬어!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아들은 속으로 외쳤다. 이 침이 머리에 박혀 있는 이상, 시민들의 언행은 물론 생각조차도 모두 제사장의 손바닥 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재를 빼돌리거나, 파업을 시도하거나, 제사장과 정부에 반대하는 내용의 전단을 돌리고 집회를 하는 등의 모든 행위가 오래가지 않아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머리의 침이 마치 송신기와 같이 그들의 생각과 말을 정부로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이미 영원이나 행복처럼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낱말이 된지 오래였다.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침을 움켜잡았다. 빠지지 않는다. 빼려고 하면 너무나 아프다. 이걸 빼면 죽을지도 모른다. 무섭고 겁이 난다. 그러니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모두 마찬가지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심지어 지룡조차도 제사장의 지배하에 있다. 반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자신의 아버지도, 그 작은 꼬마도 결국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저 죄 없는 나무 바닥만 두드리며 그렇게 웅크린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 * * * * * * * * *


어두운 밤, 아이는 갑자기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또렷하고 몸이 개운했다. 얼른 주위를 살펴보니 짚이 깔린 차갑고 딱딱한 육면체 공간의 정면만 뚫려 있되 굵은 쇠창살이 늘어서 있고 나머지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 안이었다. 옆에는 웅크린 채 잠든 어머니가 있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건만 지금은 그런 애절한 감정이 사라지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머리에 꽂혀 있는 길쭉한 침이 보였다. 아이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해냈다. 어머니의, 그리고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리에도 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새삼 제사장에 대한 미움이 더해갔다.
하지만 무심코 머리 위를 휘저으니,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는다. 더듬어보아도 마찬가지고,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만지니 아픈 부분이 있다. 하지만 딱딱한 쇠침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건 내가 뽑아두었어.”
갑자기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따스한 빛이 뺨에 닿았다. 정신없이 쫓아다녔던 빛 덩어리가 거기에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공중에 뜬 채로 네 겹의 날개를 부드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크기는 작아도 몸통은 사람과 흡사한 사지(四肢)를 갖추고 있었다.
“넌 누구니?”
“난 지룡의 부름을 받고 도와주기 위해 온 전령이야. 하지만 막상 와보니, 상황이 너무 끔찍해.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론 지룡을 도와줄 수가 없겠어.”
샘물이 졸졸 흐르는 듯한, 반쯤은 노래하는 듯한 가늘고 맑은 목소리였다.
“저기, 그럼 넌 요정이니?”
“다른 종족들은 우릴 그렇게 부르곤 하지. 편한 대로 부르렴.”
“요정아, 우리 엄마도 도와줄래?”
요정은 흔쾌히 어머니의 머리맡으로 다가가더니 무언가 중얼거리며 손으로 침을 끌어안고 몸을 비볐다. 침에 반짝이는 미세한 가루가 묻은 듯이 보였다. 요정이 손짓을 해서 아이를 불렀다. 뽑으라는 시늉을 하기에 시키는 대로 했더니 침은 너무나 쉽게 빠져나왔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요정은 얼굴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아. 하지만 이 도시 사람들을 다 구해주기엔 무리야. 더구나 이 짓을 한 마법사가 있는 한 허사지. 침이야 또 꽂으면 그만이니까.”
“아까 만난 할아버지가 그랬어. 사람들이랑 지룡이 전부 그 제사장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대.”
“내가 온 것도 그 때문이야. 너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지룡이 우리에게 보낸 일종의 구조신호를 얼마 전에 잡아냈어. 그래서 일단 대표로 내가 가서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기로 한 거야. 근데 지금은 너무 안 좋아.”
“얼마나 심한데?”
“저 마법사가 지룡의 마법이랑 생명력을 거의 다 빨아먹은 상태야.”
“어떻게 하면 지룡이 기운을 차릴 수 있을까?”
“일단 내가 나가서 흙을 구해 와야겠어. 천연의 흙에 내가 분비하는 마법의 분말을 섞어서 먹이면 기운을 차리는 응급처치 역할은 할 수 있거든. 그 다음에는 지룡이 하기 나름이지만. 아니면 가서 동료들을 더 불러오는 수도 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오래? 얼마나 오래?”
“글쎄. 너희들 인간들 시간으로 저 아누몬이 서른 바퀴 돌 정도? 그쯤 될까나?”
태양을 가린 신들의 별 아누몬. 아누몬이 한 바퀴 돌면 하루다. 그렇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다. 너무 길다.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못 기다려! 엄마랑 나랑 이렇게 붙잡혀 있는데 언제 기다려? 내일이라도 들키면 우린 또 머리에 침이 꽂히게 된단 말야! 지금 당장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아까 말했듯이 흙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이 도시를 죽 둘러봤지만 천연의 흙은 없었어. 나무도 꽃도 없는 삭막한 도시인 걸. 사방이 온통 철과 시멘트 투성이야. 이런 곳에선 지룡이 제 힘을 쓸 수가 없어.”
아이는 어쩌면 좋을지 고민했으나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여길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했다. 겨우 눈을 뜨나 싶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아이를 찾더니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령의 설득도 있고 해서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일단 혼자만이라도 먼저 나와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빠져나오려고?”
“여기 사람들은 우리 묘인족에 대해 잘 몰라. 그래서 이런 곳에 가둔 거야. 헤헤, 잘 봐.”
정령의 물음에 아이는 자신 있게 대답하곤 좁은 쇠창살 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얼핏 반도 안 들어갈 듯 보였으나 그건 몸을 덮은 풍성한 털 때문이었고, 실제로 얼굴은 창살의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굴만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온몸을 통과할 수 있는 이 유연성이야말로 묘인족의 최대 강점이었다. 병사들은 이런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보란 듯이 멋지게 감옥을 빠져나온 아이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조심스레 걸었다. 복도에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지하 감옥에서 오직 요정의 몸에서 나오는 빛만이 의지가 되었다. 무심코 지나가던 아이는 지쳐서 잠이 든 노인을 알아보고 멈추어 섰다.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마침 노인이 창살 바로 앞에 누워 있어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요정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침을 뽑고 노인을 깨웠다. 다행히 독방이라 들킬 염려는 없었다. 아이를 알아본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이 요정이 도와줬어요.”
노인은 요정을 처음 본 듯 무척 놀랐지만 자기 머리의 침을 빼주었음을 알고는 고마움을 표하곤 물었다.
“그래, 어머니는 만났니?”
“만났는데 같이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전 몸이 작아서 빠져나왔지만, 엄마는 힘들 것 같아요. 지금 요정이랑 같이 지룡을 도와주러 가려고요.”
“지룡을 도와줘?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하지? 제사장이 마법으로 묶어놓고 있을 텐데.”
아이는 요정이 가르쳐준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흙이 없어서 구하러 나간다고 하자 노인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거라면 방법이 있지!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우리집이 어딘지 기억하니? 찾아갈 수 있겠어?”
아이는 조금 망설였다. 노인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시멘트 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거듭하여 지도를 보며 설명을 듣고 겨우 지리를 외우자 노인은 그 다음에 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참, 절 숨겨주고 밥도 주셨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깜박했네요. 그것도 지금 인사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괜찮다. 그때 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정신이 없었잖느냐. 그것보다 서두르거라. 날이 밝으면 병사들이 순찰을 돌러 올 거다. 그때 네가 없어진 걸 알면 소란이 일어나겠지. 내 머리에 침이 뽑힌 것도 알게 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미안하지만 네가 고생을 해야겠다.”
“이래봬도 달리는 데는 자신 있어요! 금방 갔다 올게요.”
아이는 쾌활하게 말하곤 좁은 복도를 달렸다. 잠에서 깬 이후로 몸이 개운하고 기운이 넘쳤다. 사실 그것도 모두 요정의 마법 덕분이었음을, 아이는 나중에야 알았다.


* * * * * * * * * *


노인의 집 대문은 여전히 열려 있는 채였다. 조심스레 들어가니 거실의 의자 위에 노인의 아들이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날이 밝는 대로 경찰청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의 석방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무단결근으로 받을 처벌은 각오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얕은 잠에 들었다가 악몽 비슷한 것을 꾸고 깨기를 반복하던 아들은 자기 집에 왔다가 사라진 작은 아이가 어깨에 작은 등불을 얹은 채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처음엔 꿈으로 여겼으나 이내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너는, 아까 그……!”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 아버지는 어떻든? 다치신 데는 없고?”
“괜찮으세요. 그것보다, 할아버지의 부탁 말씀을 전하러 왔어요.”
“오, 그래. 말해봐, 얼른. 뭐가 필요하시다니? 먹을 것? 모포?”
“‘우리집의 비밀 밭으로 이 아이를 데리고 가거라.’라고 전해달래요.”
아들은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이름 그대로 정말 비밀이었다. 이 도시 안에서 허가 없이 동물을 기르거나 채소를 재배하는 등의 행위는 밀주를 담그거나 마약을 거래하는 것에 못지않은 중죄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고집스레 조상이 남긴 과수원과 밭의 마지막 일부분을 아직껏 살려놓고 있었고, 이 사실은 며느리와 손자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와 아들, 단 둘만의 비밀로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제사장에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 체포까지 당한 아버지의 부탁을 아들은 외면할 수 없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위험한 상황에서 전하는 부탁이라면 필시 의미가 있을 터. 아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부엌 바닥의 비밀 문을 통해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작은 문을 열고 나왔다. 그곳엔 낡은 우물이 있고, 옆으로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 안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어 사라진 줄 알았던 나무와 채소가 있었다. 아이는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우와, 당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가득해요!”
“여기는 우리만의 비밀이란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다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가져온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크기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질겨서 잘 새지 않을 거란 생각에 골라온 것이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도시엔 없는 진짜 흙이 있었다. 유기물이 가득 든 부엽토. 밟으면 푹신하고 손에 쥐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아이는 비록 며칠만이지만 흙을 보며 새삼 반갑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질리도록 봤던 그저그런 시커먼 흙이 이토록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 오래 즐기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이는 양손으로 흙을 가득 쓸어모아 주머니에 담았다. 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 흙이 도시를 구할 거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긴 채 왔을 때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들은 여전히 영문을 몰랐지만 그래도 무언가 희망의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만은 아버지와 저 아이를 믿어보자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 길로 아이는 곧장 시청으로 돌아왔다. 숨이 턱에 차고 지쳐서 비틀거릴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참다못한 요정이 외쳤다.
“얘, 잠깐만 멈춰봐!”
아이는 커다란 우체통 뒤에 몸을 숨기고 벌렁 누웠다. 조그만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요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충고하듯 말했다.
“사실은 아까 네가 감옥에서 잠들 때 내 힘을 조금 나누어줬어. 그래서 그렇게 기운차게 뛰어다닐 수 있었단 말야. 이렇게 먹지도 쉬지도 않고 계속 움직이면 그 힘도 바닥나서 넌 아마 기절해버릴 걸. 지금 도와주는 게 마지막이야. 또 무리를 하면 힘이 다 빠져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고마워…… 요정아.”
“그나저나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너한테…… 그만두자. 너 같은 어린애가 뭘 알겠니. 일단은 일이 급하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요정이 아이의 몸 주위를 날아다니며 몸에서 작은 빛가루를 떨어뜨렸다. 아이의 털 사이를 지나 몸에 흡수된 그 마법의 알갱이들이 아이에게 놀라울 정도의 힘을 주었다. 푹 자고 난 후에 목욕을 하고 밥을 잔뜩 먹은 것처럼 기운이 솟고 몸과 마음이 개운했다. 아이는 너무 좋아서 제자리에서 덤블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곧장 시청을 향해 달렸다.
요정의 말에 의하면, 지룡은 시청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건물에 잡혀 있었다. 제사장의 명령으로 지은 크고 화려한 그 건물은 지룡의 신전이라 불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입구에 돌로 조각한, 기둥을 감싼 용의 형상을 보고 절을 하며 앞에 놓아둔 헌금함에 돈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참배의 전부일 뿐이었다.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이는 제사장과 그의 시종인 신관 몇몇밖에 없다.
당연히, 거대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요정은 자꾸 무리를 하는 바람에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자물쇠를 풀었다.
신전의 내부는 굵은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는 넓고 휑뎅그렁한 공간이었다. 가장 안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넓고 얕은 계단이 있고 그 아래엔 또 문이 있었다. 이 문은 바깥의 것과는 달리 잠겨 있진 않았으나 제사장이 만든 마법의 차단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요정에게는 불타는 밧줄로 칭칭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솟아오르는 불길이 문을 휘감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큰일 났어. 저길 통과하려면 나도 힘들겠는데.”
“그냥 철문처럼 보이는데? 문에 뭔가 조각이 새겨져 있고, 그게 전부인데.”
“너야 마법을 감지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멋모르고 다가갔다가 너 정도는 그냥 불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 마법사 혼자 이런 능력을 부릴 리가 없어. 당연히 이건 전부 지룡에게서 뜯어낸 힘일 거야.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럼 못 들어가는 거야?”
“당연히 그건 아니지! 힘들다고 했지 누가 못 한대? 다만 저 안에서는 너 혼자 해야 해. 그 흙을 지룡에게 먹여. 그게 전부야. 어려울 거 하나 없지?”
“응. 문만 열어줘. 그 다음엔 내가 할게.”
“좋아, 간다!”
요정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 나와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노란색, 청록색, 분홍색…… 눈을 감아도 화려한 색이 느껴졌다.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한 화원 한 가운데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지금이야, 꼬맹아! 서둘러!”
실눈을 뜨고 보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요정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문짝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는 얼른 그 틈으로 달려갔다. 그 안에,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던 지룡이 있었다.


* * * * * * * * * *


이게 지룡? 아이는 순간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저게 정말 전설에 나오는 거대하고 위대한 용, 사람들의 숭배를 받던 땅의 신이라던 지룡 큐인이란 말인가?
지룡은 굵은 쇠사슬로 친친 감긴 채로 벽에 매달려 있었다. 짙은 갈색의 피부 곳곳에 무수한 침이 꽂혀 있고, 침의 끝에는 전선이 달려서 천장이며 바닥을 가로질러 방 한쪽에 있는 거대한 마력 저장고로 이어져 있었다.
힘을 빼앗긴 지룡의 모습은 처참하고 초라했다. 빼빼 마르고 이리저리 뒤틀리며 피부가 바짝 말라 곳곳에 금이 간 모습은 부러진 채 썩어가는 나뭇가지처럼도 보였고 햇빛 아래 말라 죽은 지렁이처럼도 보였다. 다만 그 크기만은 거대하여 몸을 쭉 펴면 100미터는 족히 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는 천천히 큐인의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눈은 감겨서 보이지 않았고 머리는 주름투성이라서 눈과 코가 어디에 붙었는지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저 살짝 열린 입 사이로 바싹 마른 혀가 살짝 보일 뿐이었다. 입가에는 커다란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여기로 먹이를 주는 모양이었다. 접시 안에 서서 아이는 생각했다. 아픈가요, 지룡님? 고통스럽죠? 이제 곧 자유롭게 해줄게요. 그리고 허리춤에 단단히 매어둔 가죽 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네놈이로구나.”
돌연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은 아이는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작지만 음산한, 한 번만 들어도 평생 잊지 못할 사악한 증오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았다.
제사장은 꼬리를 재빨리 휘저으며 다가와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이 꼬맹이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저 요정 덕분에 들어온 모양인데, 저런 하급 요정 따위를 앞세워 나에게 덤비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지. 흐흐흐흐…….”
이미 요정은 그 사이에 제사장의 공격에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목숨을 거두기 위해 신관이 마법으로 담금질한 단도를 들고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고! 너 따위가 어딜 감히…… 크악!”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제사장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아이가 주머니에서 꺼내 쥔 흙을 제사장의 얼굴에 뿌린 것이다. 마법사의 말에 담긴 힘을 스스로 간과했던 것인가, 본인이 말한 대로 눈에 흙이 들어가는 꼴에 처한 제사장은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고함을 빽 질렀다.
“저 새끼를 죽여! 잡아 죽이란 말이다! 당장!”
그 소리에 놀란 신관들이 요정을 처리하려다 말고 일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얼른 손을 들어 불덩어리나 빛 화살을 쏘아 아이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이미 제사장의 손에서 빠져나와 지룡의 입 바로 앞에 있었다. 섣불리 공격하다 행여 지룡에게 상처를 입히기라도 하면 대제사장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그들은 동요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지? 이를 어떡하지? 지룡이 다치면, 설혹 죽기라도 하면 우린 다 죽을 거야! 하지만 대제사장 성하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잖아?
고민하던 신관들은 결국 지룡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를 손으로 잡기로 결심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미 그들이 절반도 오기 전에 아이는 주머니 안에 든 흙을 전부 지룡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삼키게 하려고 혀를 쥐고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뭐, 뭘 한 거냐?!”
간신히 실눈을 뜬 제사장이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자신의 얼굴에 뿌린 것, 아이의 주머니에 있던 것……. 그것은 흙(그것도 정령의 마법을 섞은). 흙은 지룡이 몸을 담그던 것. 지룡이 만들어내는 것. 지룡을 상징하는 것!
잠들었던 용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전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즉시 침들이 몸에서 뽑히며 화살처럼 튀어 날아갔다. 신관들은 허둥대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제사장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룡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를 분노에 떠는 제사장이 낚아채 벽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온갖 욕설과 함께 내가 어떻게 만든 도시인데! 어떻게 이룩한 위업인데! 하며 한탄과 분노가 섞인 고함을 토해내었다.
신전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쇠사슬을 모두 끊어낸 지룡 큐인은 그동안의 구속과 억압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려는 듯 요동치며 건물을 무너뜨렸다.
“안 돼! 넌 못 간다! 어디도 못 가! 넌 내 것이야!”
제사장이 그동안 모은 마력을 끌어 모으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의 힘은 본래 지룡의 것이었다. 지룡은 무심한 눈길을 한 번 쓱 보내더니 입을 쩍 벌려 제사장을 한 입에 꿀꺽 삼켰다. 이어 자신의 마력을 뽑아내던 저장고까지 집어삼키고 힘을 되찾은 후 신전의 지붕을 뚫고 솟구쳐 올라 도시의 천장에까지 날아올랐다. 이제 균열과 붕괴는 도시 전체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 * * * * * *


성 주위의 땅은 지진에 휩싸인 듯, 천식환자가 내뱉는 기침처럼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근처를 지나가던 상인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이것은 모두 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성의 표면 곳곳에 금이 가더니, 태풍 앞의 기왓장마냥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껍질이 깨지며 속살을 드러낸 성은 그저 철근과 콘크리트의 폐허였다. 지룡이 솟아났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성채를 산산조각으로 쪼개고 있었다. 한편에선 놀라고 겁먹은 시민들의 탈출 행렬이 쉼 없이 이어졌다. 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너지는 개미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개미들의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성 밖으로 나온 시민들은 또 하나의 사실에 놀랐다. 머리에 꽂혀 있던 침이 힘없이 빠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뿔처럼, 신체의 일부처럼 굳건히 자리 잡았던 침이 이토록 가볍게 떨어지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한편으론 지룡의 힘을 얻을 수 없음에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그것은 부유했던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지룡의 성이 지룡에 의해 무너지다니……!”
시장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한탄했다. 그 옆에 서있던 경찰총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이 도시는 이제 끝이요. 간신히 살아남은 신관의 말로는 제사장이 지룡에게 잡아 먹혔다던데,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람들이 여기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거지. 뭐, 원래 이곳의 주인이 큐인이니까,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생각하면 좀 편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이제 어떡하나. 어디 가서 용병 노릇이나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밖으로 도망쳐 나와 살아남은 사람도 많았지만,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잔해에 깔려서 죽었거나 다친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구하러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지룡이 화가 덜 풀린 듯 도시를 완전히 자근자근 가루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 들어간 철근이며 콘크리트 덩어리는 길고 긴 몸통을 통과하며 부서지고 발효되더니 항문을 통해서 뿜어 나올 때는 검고 거친 흙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노인은 북받쳐 오르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었다. 마음 한편에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도 싶고 깔깔 웃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육신은 너무나 메말라 있었고, 지금은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이제야 모두 기억해냈고 새삼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지룡의 능력, 지룡의 영험함, 신처럼 숭배를 받던 이유. 지룡은 이 세상에 가득 남아 있는 이물질들, 지금은 사라진 지구의 전 주인 인간 종족이 남긴 철과 금속,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먹어서 모래와 흙으로 바꾸어주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아누몬의 모든 종족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었고, 지룡은 땅의 신으로 숭배를 받아 마땅했었는데, 마법사의 유혹과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지룡은 힘을 빼앗기고 동력의 연료가 되는 신세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셈이었다.
신음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엎드려 있던 여성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노인이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으신지?”
그 아이랑 꼭 닮은 얼굴이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이 모자(母子)는 세상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이 어머니와 딸임을 알아보리라. 감옥이 무너질 때 노인은 함께 탈출하는 죄수들 가운데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발견하고 데려왔다. 다행히도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주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다급히 말하며 억지로 일어섰다.
“우리 애를 찾아야 해요!”
“잠깐 기다려요, 아직 위험하니까. 큐인님이 성난 상태요.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노인이 붙잡으며 말렸지만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졌고, 아마도 생명이 위험한 상태일 텐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을까. 노인의 손을 뿌리치고 막무가내로 달렸다. 망설이던 노인은 뒤를 쫓았으나 늙고 지친 몸으로 네 발로 달리는 묘인족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신전이 있던 자리는 거의 흙더미로 바뀌어 있었다.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와봤지만 너무나 막막했다. 망연자실하여 서있던 어머니의 앞에 반짝이는 빛의 날개가 팔랑거리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이를 찾고 있나보죠? 내가 도와줄게요.”
“누구시죠……?”
“음…… 친구, 라고 해두죠. 따님의 친구예요. 저도 그 아이를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 살아만 있다면 기척을 감지하는 건 금방인데, 역시 흙이 너무 두텁게 쌓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 애는 살아있겠죠? 그렇죠?”
그건 요정도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누구에게든 희망적인 답변을 들어 마음의 안도를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박하고 간절함을 담은 그 물음을 요정은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살아있을 거예요. 함께 찾아봐요.”
어머니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이후로 둘은 수색을 계속했다. 주로 요정이 여기다 싶은 곳을 가리키면 어머니가 흙을 파헤치는 식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노인이 곡괭이나 삽과 같은 자루를 챙겨들고 다가왔다. 그 뒤에는 몇몇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건 여러 사람이 해야 수월한 법이요.”
노인이 싱긋 웃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말했지. 지룡을 구하고 제사장의 폭정에서 우릴 구한 영웅을 찾게 도와달라고. 뭐 대부분 무시하거나 믿지 않았지만 말야, 최소한 어린 아이가 흙더미에 깔려 죽어가고 있다는 호소를 듣고 따라와 준 친구들은 있더군.”
어머니는 워낙 다급하고 아이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노인과 청년들은 즉시 삽을 들고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무 곳이나 닥치는 대로 파헤쳤으나 요정의 지시로 점차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고, 지룡의 접시 위에 누워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안아들고 손바닥으로 뺨을 가만히 쓸었다. 품에 꼭 안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려 했다. 입을 맞추고 코와 입에서 나오는 들숨과 날숨을 느끼려 했다.
너무 늦게 발견한 탓이리라. 아니면 처음부터 부질없는 수색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어머니의 슬픔을 달래줄 순 없었다. 아이를 꼭 안은 채로 주저앉아 숨죽인 채 울먹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노인과 청년들은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잠시 후에, 아이의 시신을 흙더미 위에 살며시 내려놓은 어머니가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우리 모두 잊지 않을 거요. 내가 이 도시의 모든 이들에게 말해줄 테니. 영원히 기억되고 칭송받도록 만들 거요. 결코 헛되게 잊히지 않도록 말이오.”
“저흰 이 도시 사람이 아닌 걸요.”
“지금부터라도 되면 되잖아요. 어때, 우리랑 같이 여기서 살지 않겠어요? 아마도 다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할 텐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계속 공장에서 일했으니 농사짓는 법을 알까 모르겠지만, 다함께 노력해봐야지. 그나저나 나도 아들이랑 가족들을 찾아야 할 텐데…….”
노인은 중얼거리며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아누몬의 가호 아래 어스름에 뒤덮여 있었다. 늘 그랬듯 태양은 아누몬에 가려진 채로 반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검은 하늘을 장식하듯 하얀 코로나가 후광처럼 일렁였다.

지룡은 이제 분이 풀렸는지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돌과 철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앞으로 이 일대는 거대한 논과 밭이 될 것이다. 그러면 노인도 어릴 때처럼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아가야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를 되찾기는 했으나 삶의 터전을 잃어버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지룡을 가리켜 도시를 파괴한 악마라고 성토하는 무리도 있었다. 노인과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에서 자란 이들에게 전원생활은 낯설고 힘겨울 것이다. 갑작스레 닥친 자유로움도 어색하고 이상할 것이다. 어쩌면 이 혼란을 이용해 또 다른 누군가가 왕이나 지배자가 되려고 나설지도 모른다.
오랜 구속에서 풀려난 지룡은 이전보다 위험하고 사납게만 느껴졌다. 도시를 재건하고 전답을 일구어도 언제 또 성난 지룡이 부숴버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노인은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어릴 적 느꼈던 그 풍요로움을 떠올리며, 다가올 미래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화가 나 있겠지만 예전처럼 지룡을 성심껏 모신다면 분명 자애로운 땅의 신으로 되돌아와 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제사장이 지배하던 폐쇄된 도시를 그리워하는 일만은, 그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자들의 난동만은 막아내자. 억압된 질서정연함보다는 혼란스러운 자유로움 속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열매가 여물 것이다. 노인은 언젠가 다함께 그 과실을 나눠 먹을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또 확신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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