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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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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세상이다.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잔인하다.

전쟁도 그렇지만 무슨 이유와 명분을 들이대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걸 합법화한다는데 어떤 표현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세상의 일부분. 거대한 톱니바퀴의 구석에 낀 기름때만도 못한 존재임을 안다. 어쩌면 시키는 대로 하고, 튀지 말고 얌전히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아 온 대가를 지금 치르는 걸지도 모른다. 냄비 속의 개구리가 이제 서서히 뜨거운 맛을 보고 있나 보다.

어릴 때 쓰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찾아내었다. 너무 낡고 볼품이 없어서 손잡이에는 검은색 절연 테이프를 감고 몸통에는 담요를 잘라서 덧댄 위에 알루미늄 테이프를 감았다. 제법 두꺼워져서 폼이 난다. 스포츠 가방에 방망이와 멍키스패너, 장도리를 넣었다. 식칼은 칼집이 없어서 골판지로 만들어서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위험에 대비해야 하니까 초가을이지만 내복도 입었다. 너무 많이 입으면 움직임이 둔해지니까 하의는 겨울용 두꺼운 바지만 입었다. 대신 위에는 스웨터에 조끼까지 껴입고 점퍼의 지퍼를 잠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제법 덩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발은 예비군 훈련 때 외에는 신지 않던 군화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손가락 끝을 자른 목장갑을 끼고 며칠 전에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산 낡은 헬멧을 쓰면 장비는 마무리다. 바이저도 깨지고 칠이 다 벗겨져서 웬만하면 버릴 정도의 고물이지만 새것보다 비싸게 샀다. 주인 개새끼가 무슨 옥션도 아니고 경매식으로 팔아 처먹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오토바이 헬멧은 지금 불티나게 팔려서 씨가 마른 상태라 부르는 게 값이다. 열 받지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만한 아이템이 없으니 참아야 한다. 안 그러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용 헬멧처럼 조금 떨어지는 거라도 쓰든가, 그것마저 못 구하면 파카에 달린 모자라도 뒤집어써야 한다. 인체의 가장 취약점인 머리와 얼굴은 단단히 보호해야 하니까.

무기를 넣은 스포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니 벌써 거리에서부터 흉흉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셔터가 내려진 복덕방과 음식점의 유리창이 깨져서 엉망이 된 모습이 보였다. 철제 셔터도 구부러지고 심지어 불에 그슬린 부분도 있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양아치 둘이서 스쿠터 한 대를 타고 한적한 주택가를 달리고 있었다. 뒤에 탄 놈은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있다. 세계멸망 이후를 그린 만화를 보고 흉내를 내는 또라이들이었다. 지금 내가, 그리고 저놈들이 하려는 짓은 무질서한 광란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란 걸 알기나 하는 건지.

당연하지만 거리는 조용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인이라면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잘 잊어버리고 눈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렇지도 않나 보다. 평소에는 버스 정류장이나 구멍가게 앞에서 곧잘 눈에 띄던 할배, 할매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하긴 목숨이 걸린 일인데 지들이라고 넋 놓고 있을까. 어쩌면 안 보이는 노인네들은 이미 당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궁상맞게 사는 가난한 노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내 목표는 좀 더 큰 먹잇감이거든.

차림새도 그렇고 해서 버스를 타기가 꺼림칙했고 택시도 잘 안 보여서 그냥 걸어서 구청까지 갔다. 멀리서 건물 꼭대기만 보이는데도 벌써 소란스러워졌고,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확성기를 통해 마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규모 시위라도 벌어진 줄 알겠다.

구청 앞에는 닭장차가 몇 대나 서있고 시커먼 방패를 든 전경들이 구청을 거의 둘러싸듯 진을 친 광경이 보였다. 전경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무리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깃발이 보인다. 무슨 향우회, 무슨 노인연합, 무슨 요양소까지 있다. 노인들이 이렇게 많은지 나는 처음 알았다. 지금껏 세상 속에 꼭꼭 숨어 살던 늙은이들이 ‘저글링 러시’라도 하듯 쏟아져 나온 모양이었다.

입구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경들이 둘러싸고 있어 자동차 출입은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고 민원인을 포함한 온갖 남녀노소가 세일 날 백화점처럼 서로 먼저 들어가려 밀치고 당기며 뒤엉켜 있었다. 바로 옆에서 시위대와 전경의 싸움까지 벌어지니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침착하게 기다릴 상황은 아니었다.

나 역시 앞을 가로막은 아줌마, 아저씨들을 가차 없이 밀쳐내면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경찰 한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반쯤 쉰 목소리로 사회상속 신청자는 자신한테 오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 그 똑같은 소리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겨우 그에게 당도했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동사무소에서 우편으로 보내준 신청서였다. 경찰은 고개만 내밀어 대충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튕기듯 종이를 툭 치면서 말했다.

“통과!”

그게 신호였는지 옆에 있던 방패 든 전경이 옆으로 슬쩍 물러났고 나는 무사히 구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 내 뒤를 바짝 쫓아오던 배 나온 아저씨는 전경에게 가로막혔다. 아저씨는 구청에 급한 일이 있다며 반쯤 애원하고 반쯤 꾸짖듯 말했지만 경찰은 옆의 민원인 전용 입구로 가라는 매몰찬 말만 되풀이했다.

구청 앞에는 원래 널따란 주차장이 있고 담벼락 쪽엔 벤치와 나무로 조그만 공원처럼 꾸며 놓았는데 오늘은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었다. 청사에 바짝 붙여서 주차한 차 몇 대만 보일 뿐이다. 대신 그 공간에 시위대 혹은 용역 깡패를 방불케 하는 험상궂은 젊은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여자도 있긴 했지만 절대 다수가 남자였다. 물론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점퍼와 군화 차림에 스포츠 가방 밖으로 알루미늄 배트가 비쭉 튀어나온 나 역시 그 험상궂은 놈들 중의 하나로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줄을 서! 순서대로 오라니까! 안 그러면 안 준다고! ……그래 좋아, 여기 줄 설 때까지 배부는 중지합니다. ……내 맘대로다! 왜?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확성기를 통해 단단히 화가 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 안 듣는 예비군을 다루는 장교 같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존댓말을 쓰는 최소한 존중조차 없다는 정도랄까.

“야! 이제 왔냐?”

무리들 틈에서 친구 동석이가 나를 알아보고 가까이 왔다. 나는 대답 대신 스포츠 가방을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씨팔, 너무 늦게 왔나 보다. 좋은 건 벌써 다들 채 간 모양이다. 남은 건 경로당이나 들락거리는 돈 없는 영감들밖에 없어.”

동석이는 씩씩대며 임시로 설치된 게시판을 가리켰다. 나도 그를 따라 둘러봤는데 과연 그랬다. 어딜 가나 선착순 아니면 운빨로 결정된단 말인가. 허탈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우리의 모습은 구인광고를 살펴보는 취업 준비생처럼 보이겠지. 여기는 무슨 취업 박람회고. 옆에선 계속 줄을 서라고 악을 쓰는 중년남자와 새치기를 하려고 기를 쓰는 청년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저건 뭔데?”

내가 그쪽을 가리키며 묻자 동석이는 고개를 뻗어 슬쩍 둘러보았다.

“구청에서 따로 뽑은 관리명단이야. 일명 월척들. 부양하는 자녀가 없고 부동산이나 사업체를 일정 규모 이상으로 소유한 소위 부자 노인들 있잖아.”

“그런 놈 있으면 나라도 잡고 싶겠다.”

동석이는 내 말을 듣더니 바닥에 가래를 뱉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씨팔, 월척 잡아가려면 그것도 자격이 있어야 해. 너 신청서 써 왔지? 거기에 뭐라 써 놨는지 봤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상속 제도〉라, 명칭만 그럴싸하지 내 주위에선 다들 신 고려장 법이라고 불렀다. 신청 자격은 20세에서 30세까지, 부모 및 본인의 재산 및 수입을 포함한 자격요건 심사를 거쳐야 한다. 대상자는 60세 이상 중에서 마찬가지로 심사를 거치되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게 차이점이다. 노인의 재산을 청년에게로 강제 상속하여 재화를 순환시키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자는 게 사회상속 제도의 요점이다. 물론 노인이 얌전히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반발이 일어나고, 우리라고 가만히 있다가 모처럼 온 기회를 차 버릴 수야 없으니 이렇게 야구방망이에 테이프라도 감아서 들고 나올 수밖에.

주차장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두 남자가 싸우고 있다. 한쪽은 빨간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플라스틱 파이프를 들고 있고, 다른 쪽은 스키점퍼를 입고 양손에 각각 장난감 총과 프라이팬을 들고 있다. 총은 그래 봬도 실제 총을 본뜬 모델건이라 BB탄이긴 해도 가까이에서 맞으면 제법 아플 것 같았다. 빨간 헬멧이 접근하면 스키점퍼가 총을 쏴서 막는 형국이었다. 빨간 헬멧이 피하면서 뒤에서 지켜보던 엄한 놈이 총알을 맞고 허벅지를 움켜쥐면서 펄쩍 뛰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낄낄대며 비웃었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빨간 헬멧이 파이프를 목도처럼 휘두르며 스키점퍼의 팔이며 머리, 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마침내 쓰러진 스키점퍼가 항복이라 소리치자 빨간 헬멧은 공격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에 놓아 둔 벽돌로 다가갔다. 그 밑에는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저게 바로 월척의 신원정보가 담긴 서류였다.

“이젠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박질까지 하네, 씨팔. 이러다가 우리 다 죽이는 게 원래 목적 아냐?”

동석이가 담배를 피우며 비아냥거렸다.

결국 확성기를 들고 악을 쓰던 중년남자는 건장한 사내들에게 떠밀려 바닥을 뒹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하고 소총까지 둘러멘 군인 서넛이 상속 대상자 명단을 나눠 갖는 모습이 보였다. 군복은 무슨 미군 해병대처럼 보였고 견장이나 계급장도 외국 군대의 것처럼 낯설었다. 동석이가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서바이벌 게임 하는 놈들인가 봐. 복장에 돈 좀 처발랐나 본데?”

모델건이겠지만 그래도 워낙 진짜처럼 생겨서 보고만 있어도 무서워서 접근하기 꺼려질 지경이었다.

“야, 우리도 쟤네들처럼 같이 다니자, 응? 서로 힘을 합쳐야 유리하지. 혼자서 한 놈 처리하는 것보다 둘이서 두 군데 처리하는 게 쉽잖아?”

그 말엔 나도 동의였다. 하지만 게시판에 걸린 집 한 채 없는 가난한 노인들은 전혀 탐이 나지 않았다. 상속은 한 번만 인정이 되는 건데 기왕이면 재산이 많은 놈을 찾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 상태에게서 문자가 왔다.

〈할매 처맄ㅋㅋㅋ본인명의로 시골에 땅ㅋㅋㅋㅋ이젠 내거〉

보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친구의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 나를 제치고 한몫 잡은 녀석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앞섰다. 즉시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물었다.

“상태냐? 너 인마, 어디서 그런 할매를 낚았냐?”

“왜? 크크큭. 묻는 걸 보니까 신통치 않은 모양인데, 형님이 비결 하나 가르쳐 주랴?”

“뭐, 무슨 비결? 그런 게 있어? 있으면 좀 빨리 가르쳐 줘야지, 자식아!”

“……새끼가 물어보는 놈 태도가 뭐 이따위야? 싫으면 마라.”

상태가 돌연 냉정한 태도를 보이자 나는 안달이 나서 양손으로 휴대폰을 붙잡고 즉시 저자세를 보였다.

“잠깐, 잠깐만! 내가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올라갔나 봐. 상태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잘 되면 크게 한 번 쏠게. 좀 가르쳐줘. 너도 알잖아? 나 지난번에 알바 짤려서 지금 돈 한 푼도 없고……”

“알았어, 자식아! 이 형님이 특별히 비법을 알려 주마. 너 〈하이에나 전법〉이라고 들어나 봤냐?”

“하이에나……? 그게 뭔데?”

“구청에서 월척들 정보 아무한테나 안 주지? 신청서 막 따져 보고 주거든? 그거 받은 놈 중에서 혼자 가는 놈이 있거든. 그놈 뒤를 살살 따라가. 가서 늙은 놈이랑 싸우든 어쩌든 지켜보다가 늙은이 뒈지면 그때 방심한 그놈을…… 확! 해치우는 거야.”

내 입에서 반쯤 비명이 나왔다. 동석이가 내 팔을 잡고 마구 흔들며 뭐라고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늙은이랑 싸우다가 지치거나 다쳤으면 더 좋고, 아니면 뒤에서 몰래 공격해야지. 한 방에 보내는 게 제일 좋아. 살려 두면 골치 아파지니까 칼로 찌르고 그 칼을 늙은이 손에 쥐어서 지문 묻히면 땡이지. 크크크. 내가 그렇게 했거든.”

너무나 잔인하고 비겁한 비법이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나 같은 놈에게는 그게 제일 확실하고 걸맞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었다. 재산 많은 노인에 대한 정보는 제한되어 있다. 그걸 선점한 놈에게 너 잡아 잡수시오 하고 내버려 두고 있다간 당할 뿐이다. 내 인생이 늘 그래 왔듯이 말이다. 공부도 운동도 외모도 하위권인 나는 늘 인기 많고 주목받고 칭찬받는 잘난 애들을 멀거니 보면서 살아왔다. 결국 그런 놈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가고 좋은 상대 만나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살기 마련이다. 반면 나는 서른이 넘도록 취직도 못하고 대학 졸업 이후로 연애도 못하는 루저로 살아가야 한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평생 루저 꼴을 못 벗어난다. 기습공격이든 반칙이든 해야만 했다.

“야이, 씨팔, 안 들려! 빨리 튀라고!”

그때 동석이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미 구청 입구에서 사람들이 물밀 듯 몰려오고 있었다. 오다가 봤던 노인 단체의 연합 시위대였다.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노인들은 군복을 입고 소화기를 뿌리며 달려왔다.

후미에선 주로 몸이 약한 노인들이 깃발을 흔들거나 주전자와 의료도구를 들고 뒤따랐고 목청 좋은 노인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질러 대었다.

“자기네들 살겠다고 노인을 탄압하는 정부는 물러나라!”

노인들이 ‘물러나라! 물러나라!’ 외치며 달려들었다. 젊은이들은 우왕좌왕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도 황급히 전화를 끊고 무작정 달렸다. 하얀 연기가 뒤쫓아 왔다.

“도덕도 없고 예의도 없는 젊은 놈들은 혼쭐을 내야 해!”

확성기 목소리가 넓은 주차장 안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뒤늦게 전경들이 몰려와 진압을 시도했다. 군복 입은 노인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곳곳에서 에구구, 끙끙, 하는 노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 나라를 일으켰고, 누가 네놈들을 먹여 살렸는데, 응? 이 배은망덕한 놈들이……”

갑자기 삐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아마도 전경이 확성기를 빼앗은 모양이었다. 일대는 노인들이 던진 화염병 불길과 소화기 연기에 전경이 쏘는 물대포까지 섞여서 엉망이었다. 전경들은 노인과 청년을 가리지 않고 전부 쓰러뜨리고 연행했다.

나는 동석이와 헤어진 상태로 구청 뒷문 쪽으로 갔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담벼락에 비하면 잡고 기어오르기가 훨씬 수월했다. 나 말고도 벌써 몇 명이 철문을 통해 구청을 빠져나갔다. 후문에는 시위대는 없고 전경만 가득했다. 그들에게 들어왔을 때처럼 사회상속 신청서를 보여 주고 무사통과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를 찾았는데 안 보인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두고 왔나 보다. 뭐 이리 되는 일이 없나. 입에서 절로 욕이 새어 나왔다.

옆에 있던 내 또래 남자에게 한 대를 얻어 피웠다. 자고로 남자들끼리 담배와 담뱃불은 군말 없이 나눠 주는 게 불문율이다. 빌어먹을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남은 미풍양속이라고나 할까. 불을 붙일 때 빨간색이 눈에 띄어서 무심코 보니 빨간 헬멧이 길 건너에서 어딘가로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상태의 말이 떠올랐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나는 담배를 빌린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고 황급히 달려서 뒤를 쫓았다.


빨간 헬멧은 가파른 경사를 올라 단독주택이 밀집한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미행하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지만 다른 수상한 기색은 없었다. 저놈을 쫓아가는 건 나 혼자밖에 없음이 분명했다.

빨간 헬멧은 담이 높고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서 멈췄다. 이 집의 주인이 목표물인 모양이었다. 이만한 호화 저택을 손에 넣는다니 그야말로 땡잡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품 안에 든 식칼을 만지며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빨간 헬멧은 우습게도 초인종을 눌렀다. 개가 짖는 사나운 소리가 들렸다. 빨간 헬멧이 인터폰으로 뭐라고 말하니 순순히 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가면서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몰래 숨어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당당히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간 놈도 이상하지만 저 집 주인은 자신을 죽이고 집과 재산을 빼앗으러 온 사람을 천연덕스레 집 안으로 들였단 말인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담 위로 올라갔다. 높이가 3m는 되어서 뛰어내리기가 겁이 났다. 양팔을 펴고 담 위의 가짜 기왓장 위를 걸으면서 봤는데 도둑을 우려했는지 담 주위에는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그때 저택의 열린 창문으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서 얼른 몸을 수그렸다. 분명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 집의 주인, 사회상속의 대상자일 터였다. 자신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으러 온 사람을 보고 크게 웃는다?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무언가 속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속으로 셋을 세고는 뛰어내렸다. 나름 낙법을 쓴답시고 착지와 동시에 잔디 위를 굴렀지만 왼쪽 발목을 접질렸는지 미칠 듯이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반쯤 기듯이 해서 1층 거실 쪽으로 접근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어디 그 서류 좀 보세. ……이것 봐라. 내 신원이랑 재산 목록이 다 나와 있구먼. 내 사생활이나 인권 같은 건 어찌 돼도 상관없다 이건가?”

노인이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순수하게 사장님과 사모님 재산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자녀분이나 형제, 친지 등의 것은 완전히 분리되어서 별도로 취급하고 있죠.”

아마 빨간 헬멧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대답을 했다.

“이놈의 정부는 재작년부터 상속세도 확 올리고 편법 상속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더니 이 짓을 하려고 그랬나……. 그래서? 만약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놈팽이한테 맞아 죽으면 그놈이 내 재산을 어떻게 가져가는데?”

“우선 사회상속 집행서라는 서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건 동사무소에서도 그냥 나눠 주는 건데요, 여기 보시면 상속하는 자와 받는 자를 쓰고 아래에 서로의 지장을 찍도록 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증거물 첨부라고 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시신의 사진을 찍어서 붙이라는 것이고요. 상속은 한 사람에게 한 번씩만 인정됩니다. 둘이 서로 차지하려고 할 때는 먼저 구청에 접수한 쪽이 차지하는 거죠.”

“미쳐 돌아가는구먼. 이래서 내가 사회상속 제도가 시작된 날부터 이 총을 손에서 뗀 적이 없어. 잘 때도 늘 이렇게 곁에 둔다네.”

“노인의 정당방위도 인정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사장님의 대상자 신원서류를 가져왔으니 한동안은 잠잠할 겁니다.”

나는 창문 너머로 슬쩍 고개를 들었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 노인과 키가 큰 청년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 옆에는 긴 사냥용 엽총이, 청년 옆에는 빨간 헬멧과 파이프가 놓여 있는 살벌한 풍경이었다.

“그래도 언제 또 대상자를 발표할지 알 길이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젠장, 빌어먹을 놈의 세상! 한평생을 열심히 일해 나라를 지탱해 온 사람들에 대한 대접이 이거냐?”

“말씀은 바로 하셔야죠.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 자기 잘살자고 일한 결과로 나라가 발전한 거죠. 그렇게 돈과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이 안 내놓고 틀어앉아 있으니까 결국 나라 꼴이 이렇게 된 겁니다. 정부는 나름대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 거죠. 인구대비 노인비율이 50퍼센트를 넘어선 건 아시죠?”

“그러면 정년을 더 늘리든지 해서 노인의 활동을 늘려야지 노인을 제거하는 정책을 쓰는 게 제대로 된 나라란 말인가?”

“어르신, 뉴스는 제대로 보고 계신가요? 몇 년째 공무원 신규채용을 60세 이상으로 하고 있어서 지금 역차별이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4대보험 관리공단이 디폴트 선언한 건 아십니까?”

“입 다물어! 내가 자네랑 논쟁이나 하자고 부른 줄 아나?”

“어르신이 먼저 말씀을 꺼냈잖아요. 지금 청년들은 부담할 노인이 많아져서 세금은 늘지, 복지혜택은 엉망이지, 노인의 정년 연장으로 취직은 안 되지, 그러니 결혼을 못하고 아이를 못 낳아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이게 악순환이 되니까 노인 비율이 늘어나고……”

“됐네, 됐어! 약속한 돈을 줄 테니 얼른 갖고 사라지게! 젊은 놈들 사고방식이 이 모양이니까 신 고려장이니 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를 하는 게지…….”

“저도 여기서 말도 안 통하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인의 거친 말에 청년 역시 조금도 지지 않고 빳빳하게 맞섰다. 결국 노인은 툴툴대며 총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등을 돌린 노인을 향해 증오가 담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나는 두려움도 잊고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잠시 지나자 노인이 큰 갈색 가죽가방을 하나 들고 왔다. 청년은 지퍼를 열고 안에서 지폐 뭉치 하나를 꺼내어 책장을 빠르게 넘기듯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도로 넣고 지퍼를 잠갔다. 이제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빨간 헬멧은 처음부터 저 노인의 의뢰를 받고 신상이 게재된 서류를 가져다주기로 했다. 그래서 결투까지 불사하면서 서류를 손에 넣은 거였다. 그러니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당당히 들어간 것도 당연한 일.

내막을 알고 나니 허탈한 마음에 이어 분노가 끓어올랐다. 결국 돈 많은 노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편하게 목숨과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바깥세상에선 노인들은 살기 위해, 청년들도 나름대로 살아 보겠다고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정작 사회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늙은이는 이렇게 편하게 지내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빨간 헬멧이 집을 나가는 즉시 저 노인을 공격하리라 결심했다. 이미 상속 대상자임은 확인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난 또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낮은 비명이 들려 다시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노인이 내게 등을 보인 채로 몸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노인은 몸을 거의 비비꼬듯이 하면서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빨간 헬멧이 발을 높게 올려 노인을 걷어찼다.

넘어진 노인의 가슴팍 위로 식칼의 손잡이가 튀어나온 게 보였다. 빨간 헬멧은 늘 나보다 한 발 앞서 나갔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커다란 저택, 그리고 서류에 기재되었을 더 많은 재산이 자신에게로 굴러 들어올 텐데 고작 돈가방 하나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댁이 고용한 영감들이 왜 안 오는지 궁금하지? 내가 미리 해치웠거든.”

빨간 헬멧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까 저택에 들어올 때 보니까 전기 충격기랑 삽자루를 든 노인 둘이 있더군. 표정이랑 폼을 보니까 내가 돌아갈 때 덮치려는 심산이었겠지. 지금쯤은 저 잔디 위에 뒹굴고 있을 거야. 내가 찍 소리도 못하게 숨통을 끊어줬거든.”

빨간 헬멧은 서류를 죽어 가는 노인의 얼굴에 대고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 실수는 날 고용한 거야. 이렇게 재산정보가 훤히 드러나는 문서를 내게 보여 주다니, 고양이에게 멸치 대가리나 주면서 생선가게를 잘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나의 분노와 적의는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아픈 발목을 이끌고 최대한 소리를 안 내려 애쓰며 모퉁이를 돌았더니 대문 옆과 저택 앞에 쓰러진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부자 노인이 경호원으로 고용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담을 넘어 들어갈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렸는데 그 짧은 시간에 소리도 안 내고 둘이나 죽이다니, 빨간 헬멧이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한 솜씨를 가진 청부업자나 킬러인 모양이었다.

“어이, 거기!”

갑자기 아주 가까이에서 빨간 헬멧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온몸의 땀구멍에서 동시에 땀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팽창한 눈으로 슬그머니 돌아보니 빨간 헬멧이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고 나를 보고 있다.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다 봤지? 내게 덤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얌전히 물러나면 나도 내버려 두겠지만 그래도 덤비겠다면 구청에서처럼 봐주는 짓은 안 할 테니까. 그냥 서로 못 본 체하는 게 제일 원만한 방법인 것 같은데, 어때?”

내가 봐도 그게 제일 좋은 길이었다. 지금 나는 발목도 삐었고, 빨간 헬멧의 실력을 보아 온 터라 도저히 맞서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절룩거리며 대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끈이 묶인 커다란 개가 마구 짖어 댔지만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제 저 개도 빨간 헬멧의 차지가 되는 걸까? 개는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뀐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알기나 하는 걸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한숨 자고 싶었다. 어차피 나 같은 놈에게 노인 하나 잡아서 일확천금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나 보다. 동석이는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했지만 성공하기 전에 먼저 연락하는 건 암묵적인 금기가 되어 있는지라 문자라도 보내려다 참았다.

방에 들어가 점퍼를 벗어 던지자 주인아줌마가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문을 반쯤 열고 물어봤다.

“그래, 한 사람 잡았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공쳤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줌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오늘이 내 생일이야. 그것도 환갑날.”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주인아줌마는 머리도 검고 얼굴 주름도 적어서 좀 더 젊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오늘부로 60세가 되었다면 구청에서 배부한 사회상속 대상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을 터였다. 6개월을 단위로 발표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따져 보면 명단에 없어도 자격요건에 맞는 사람은 상속대상으로 인정이 된다. 따라서 주인아줌마도 오늘부터 대상자가 된 셈이다. 그 정보를 아는 사람은 아줌마 가족을 제외하면 지금 나밖에는 없겠지만. 그런데 가만, 왜 그런 알려져선 안 될 정보를 지금 나에게 말해 준 거지?

아줌마를 돌아보는 내 눈빛은 아마도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자의 것처럼 번뜩였겠지. 분명히 예전에 남편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럼 이 하숙집은 분명 아줌마 소유겠지?

아줌마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한숨을 쉬더니 손짓을 해서 나를 불렀다. 나는 즉시 아줌마의 방으로 따라갔다. 아줌마는 누가 훔쳐 듣기라도 할 듯 창문을 닫더니 말했다.

“우리 아들이 곧 온다고 그러데. 지 에미 환갑이라고 그래도 뭐라도 해 줄 모양이지…….”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는 예순, 아들은 서른다섯. 자격요건에 딱 턱걸이를 한 모자였다. 자녀의 나이가 서른다섯 이하일 경우 사회상속 제도를 통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게 가능하다. 서른다섯을 넘기면 자격이 안 되니까 다른 놈이 부모 재산을 빼앗아 가는 걸 막을 수도 없고 법적으로 막아서도 안 된다. 노인은 본인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자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거야 법이 그렇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자녀 및 친척이 보호하거나 아까 본 부자 노인처럼 고용인을 쓰는 경우도 많다. 서른이 넘은 자식은 부모를 지키겠다고 덤비고, 서른이 안 된 자식은 남의 부모를 때려잡겠다고 덤비고 있고. 웃음도 안 나오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하려면 서둘러야 돼…….”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상속 제도의 비정함이 여기서 드러났다. 서른 이하의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건 가능하지만 별도의 예외규정이 없었다. 부모를 죽이는 수밖에. 상속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아줌마는 입술을 떨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프지 않은 방법이 없을까?”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상태에게 전화를 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보건소에서 사회상속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약을 나눠 준다는 정보가 있다. 시안화수소인가 뭐라는데 절차가 좀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약을 받으면 사흘 안에 시신의 부검을 통해 제대로 사용을 했는지 확인절차를 거치고 약봉투도 반환하는 등 번거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긴 독약을 그냥 나눠 줬다가 다른 용도로 쓰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겠지.

귀찮아서 약국 몇 군데를 돌며 수면제를 사 모았다. 죽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지만 하루 종일 잘 정도는 되었다. 아줌마에게 물이랑 약을 주니 넙죽 받아먹고 자리를 펴고 누웠다.

나는 아줌마가 잠들기를 기다리며 동사무소에서 받아 온 사회상속 집행서를 작성했다. 용어만 번드르르하지 노인 하나를 죽이고 재산을 다 빼앗는다는 선언문에 다름 아니다. 이 집도 아줌마 것일 테고, 평소 옷차림 같은 걸 봐도 돈 쓰는 걸 못 봤다. 분명히 모아 놓은 재산도 꽤 있지 않을까. 아줌마의 희생을 대가로 드디어 나도 한 방에 인생 역전하는 순간이 오는 걸까?

아줌마 방에 가니 조용한 숨소리만 들렸다. 열 손가락의 지장을 찍고 나서 옷을 다 벗겼다. 욕실로 데려가 욕조에 더운 물을 받아 그 안에 눕혔다. 그나마 이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 아프게 죽이는 방법이었다. 과도와 커터를 갖고 와서 아줌마의 손목 동맥을 끊었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생채기를 낸 끝에 겨우 성공했다. 다행히도 약효가 잘 들었는지 아줌마는 깨어나지 않았다.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집문서라든가 예금통장도 찾아야 했다. 상속절차가 끝나면 아줌마 명의의 통장도 전부 내 것이 되겠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뒤지고 있는데 경박한 대중가요 한 소절이 반복되며 들렸다. 아줌마의 휴대폰이었다. 받으니 다짜고짜 내 또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엄마?”

“댁의 모친은 사회상속이 집행되었습니다.”

내가 최대한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아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분명 충격이 크겠지. 나처럼 부모 돌아가신지 오래된 놈이라도 그 심정이 이해는 갈 것 같다.

“그럼 당신이……?”

“뭐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일어날 일이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너무 원망은 마쇼.”

“아, 그래요? 이제 집에 다 왔으니까 직접 만나서 얘기합시다.”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어머니를 죽인 놈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 끝난 일이다. 제깟 놈이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아마도 화가 나서 나를 몇 대 때릴 것 같은데, 집값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야 기꺼이 맞아 줄 용의가 있다. 그것보다 날 붙잡고 징징대면 그게 더 번거롭다. 하지만 전화 목소리가 침착한 걸로 봐서 의외로 깔끔하게 끝낼지도 모르겠다. 늘 한 발 늦고 뒤처지던 내가 이렇게 신속하게 목표를 얻어 낼 줄이야. 상태에게 자랑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그때 자동차가 정지하는 소리가 들렸고, 미리 알았는지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열쇠가 있는지 잠긴 대문을 바로 열었다. 그는 현관에 선 채로 나를 잠시 째려보더니 말했다.

“당신이야? 보아하니 여기서 하숙하는 모양이지?”

“그렇지요. 이젠 뭐 내 집이 되겠지만…….”

나는 최대한 거만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도 난 댁의 어머니를 정중하게, 안 아프게 모셨다 이거야,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터뜨렸거나 칼로 가슴을 찔렀다면 아들을 볼 면목이 없어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면목 이전에 분노한 아들이 법이고 뭐고 없이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 테니까.

돌연 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히거나 같잖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듣는 사람이 심히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종류의 비웃음이었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기가 막혀서 얼굴이 벌게졌다. 아들은 ‘내 집? 내 집?’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마구 웃었다.

“아, 씨팔…… 좆나 웃었네. 내 집? 누구 맘대로?”

“누구 마음이냐니……? 내가 사회상속 처리를 했는데, 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지만 실제 나이가 많기도 하고 어쩐지 위축이 되어서 존댓말이 나왔다. 반면 아들놈은 내게 초면부터 반말지거리였다.

“이봐, 이 집 명의는 내 앞으로 되어 있어. 뭘 알고 사회상속을 한 거야?”

“뭐?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입에서 멍청한 삼류악당이나 할 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은 깔보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다분히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쉬고는 설명해주었다.

“명의를 내 앞으로 옮긴지 벌써 10년도 넘었어. 나라에서 사회상속 어쩌고 하기 한참 전에 옮겼지. 엄마가 쓰는 통장도 다 내 이름이고. 그러니까 댁이 한 짓은 헛수고…… 아니, 헛수고는 아니구만. 내가 할 일을 덜어 주었으니 내 입장에선 고맙지. 흐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어머니를 죽인 사람에게 고맙다니?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혼란과 의문을 읽은 아들이 말을 이었다.

“내가 벌써 상복 입고 온 거 보면 아시겠지? 어차피 오늘 엄마를 보낼 생각이었어. 이 집 허물고 새로 지으려고 했는데 하도 반대를 해 가지고 말이야.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손댈 생각도 말라나? 그런데 나라에서 예순이 넘으면 부모를 죽여도 된다고 법을 만들어 주시니 이렇게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 하하하! ……빠르면 내일부터 당장 철거 들어갈 거야. 이제 돈도 안 되는 하숙 따위는 때려치울 거니까, 그리 알고 준비하쇼.”

이 하숙집에는 나를 포함해서 세 사람이 살고 있다. 그들이 전부 아무런 사전 예고나 통보도 없이 오늘부로 짐을 싸서 나가라는 소리다. 이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인가. 하지만 난 비정한 아들의 차가운 웃음소리에 온 정신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빼앗겨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가라니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얼굴을 하고 있군, 흐흐. 그럼 한 이삼 일 정도는 여유를 줄 테니 당장 지낼 곳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요. 댁이 우리 엄마 재산을 받았으니까 집에 있는 건 다 가져가쇼. 값나가는 거라고 해도 텔레비전이랑 냉장고랑 세탁기 정도 될까 모르겠지만. 까짓 거 어차피 고물상에라도 갖다 팔 생각이었는데 수고비로 그냥 주지, 뭐! 하하하……!”

아들은 웃음을 그치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어머니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흙먼지만 날리며 사라졌다. 멍하니 있던 나는 욕실 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 안에는 수증기로 가득했다. 이미 욕조의 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의학에 대해 무지하지만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나는 거실로 나와 집 안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재산이라고 해 봤자 손때 묻은 가구랑 가전제품이 전부였다.

다시 방을 뒤진 끝에 통장 몇 개를 찾아내었다. 전부 아들 명의인데 하나만 아줌마 이름이었다. 펼쳐보니 300만 원 정도 들어 있었다. 아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어머니의 전 재산인 셈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개의 묵직한 저금통이 있고, 가계부 안에 끼운 지폐를 몇 장 찾았다. 그러다 앞장에 굵은 글씨로 써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목표 : 한 달에 5만원씩 저축. 우리 아들 장가갈 때 뭐라도 해줘야지〉

나는 잠시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아들을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재산을 미리 자기 앞으로 돌려놓고 희희낙락하는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소리 높여 웃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통장의 명의를 보니 아줌마도 재산 이전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 상속 집행을 부탁한 건 날 골탕 먹이려는 심산에서였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들 손에 죽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아들에게 부모를 죽이는 죄를 짓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안타까운 건 아들이 그런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줄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부모를 위한 나라는 없는 모양이었다.

같이 하숙을 하던 다른 두 사람은 연락을 받고는 그날 저녁으로 짐을 싸들고 집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는 간단하게 가방 두 개만 챙겨 들고 집을 나서려다가 대문 옆에 가방을 놓고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달리듯 지하실로 내려가 등유통을 들고 올라왔다. 겨울에 난로를 떼기 위해 마련해 둔 걸 지금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거실 한가운데에 방에 있던 요와 이불을 옮기고 욕실에 있던 아줌마의 시신을 꺼내어 그 위에 눕혔다. 이불로 전신을 둘둘 감았다. 그러고 나서 기름을 그 위에 뿌렸다. 방에도, 부엌에도, 책상과 의자에도, 집 곳곳에 기름을 뿌렸다. 모자라서 지하실에 있던 남은 두 통까지 다 들고 와서 몽땅 다 뿌렸다.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점퍼와 장갑은 이미 핏물과 기름으로 엉망이 되어 안에다 벗어 던지고 집을 나왔다.

마지막으로 주머니에서 사회상속 집행서를 꺼내 공처럼 구기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열어 놓은 문 안으로 던졌다. 집 안으로 퍼렇고 노란 불길이 확 퍼져 나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열기가 몸을 덮치는 바람에 몸을 수그리며 얼른 가방을 집어 들고 대문을 나섰다.

바람 선선한 초가을이라 그런지 불은 활활 잘도 타올랐다. 어둑한 밤을 배경으로 벌겋고 노란 불길이 창문 밖으로 새까만 재를 뿌리며 일렁였다. 그 모습은 긴 소매를 하늘로 흔드는 춤사위 같기도 하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붉은 깃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아주 잠깐 그 광경을 지켜봤지만 이내 몸을 돌렸다. 등과 어깨에 와 닿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다친 발목을 억지로 이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마음속에서는 차가운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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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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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 12.06.04 22:44 댓글 수정 삭제
    으시시하네요.
    뒷 세대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나라라는 생각을 평소 하던 차라 더 무서웠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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