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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탄생

– pilza2 –

(꿈에서 본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옛날 저 멀리 산으로 둘러싸인 나라가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흔들린 앙상한 나뭇가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메마르고 단단한 땅.

 작은 봉토의 영주님은 요즘 아주 신이 났습니다. 자신의 아이 하나가 왕으로 뽑혔기 때문이지요. 곧바로 영주님의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엎으려는 이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 선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늘어난 재산 덕에 벽돌이 무너지고 지붕에서 물이 새던 낡은 저택도 새로 짓기로 했고, 매일 오는 손님들 덕에 달이 붉을 때나 먹을 거나한 만찬을 저녁마다 즐겼지요. 달콤한 음식과 말이 영주님의 귀와 혀를 간질였답니다.

 그래, 나도 이제 첩을 들여야겠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영주님은 왕의 어미로서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젊은 아이를 데려다 새 배필로 삼고자 했습니다.

 시골이라고밖에 부를 길 없는 영지 곳곳으로 하인들을 보내어 젊고 털이 풍성하고 골반이 큰 아이를 찾도록 시켰습니다.

 나처럼 피부가 분홍색이고 털빛이 개암색인 아이를 찾아오너라.

 그런 영주님의 명을 받들어 수소문하던 하인들은 마침내 원하던 아이를 찾았습니다. 어미 셋이서 사는 집에서 자라는 일곱 아이 중의 하나였는데, 영주님의 어린 시절을 빼닮아서 분홍색 피부에 길고 북실한 갈색 털이 온몸을 덮고 있었죠.

 어미들은 왕의 어머니가 된 영주님에게로 보내진다면 살림에 보탬에 될 거라는 기대에 순순히 아이를 보냈습니다. 낳은어미는 조금 망설이다가 하인에게 말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아이가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한답니다.

 하인은 몸만 건강하면 큰 문제가 안 된다며 아이를 데리고 영주님의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주님도 크게 반기며 맞았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다른 때보다 더 성대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손님도 많았고 이웃 영지에서 온 영주님까지 참석한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영주님은 새로운 배필을 좌중에게 소개했습니다.

 자, 귀여운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이는 입술을 입 안으로 밀어넣을 뿐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웃 영주님이 혀를 끌끌 차자 조바심이 난 영주님은 아이에게 재촉했습니다.

 입을 더 크게 벌리도록 해라. 우리 가문이 될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해야지 않겠느냐.

 주위의 시선과 영주님의 무서운 말투에 겁이 난 아이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소리에 귀를 덮고 몸을 웅크렸습니다. 몸을 너무 심하게 떨어 털이 꼭 물결처럼 흔들렸습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누가 소리를 지르라고 했느냐.

 영주님이 채근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홀린 것처럼 속삭였습니다.

 혹시 주문을 외운 거 아닐까요? 저 아이는 마법을 부린 것입니까?

 그러자 영주님을 모시던 젊은 시종장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봉토에 불경한 마법의 혈통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아이는 여기 오느라 오랜 시간 찬바람을 쐬어 목이 쉰 것입니다. 하룻밤 푹 자고나면 말끔히 나을 겁니다.

 시종장은 아이를 잡아끌듯 데리고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영주님은 당황한 손님들을 달래느라 털이 땀으로 푹 젖고 말았죠.

 그러나 시종장은 아이를 따뜻한 잠자리가 아니라 어둡고 축축한 감옥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이를 가둔 시종장이 물었습니다.

 너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두려움에 질린 아이는 그저 몸을 웅크리고 떨고만 있었습니다. 시종장이 재차 다그쳤습니다.

 감정을 소리에 담지 말라, 이는 대대로 이어진 가르침이다. 함부로 소리를 내지 말고 마음으로 말을 걸어라, 이는 대대로 칭송받는 미덕이다. 시골에서 자랐다고 이런 것조차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네 어미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소리에 감정을 담으면 상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천박하고 요사스런 주문이 된 소리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지 아직 어려서 모르는가 보구나. 뱃사람을 물에 빠뜨리고 나무꾼을 산에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단 말이다. 너는 아직 영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여기서 정숙을 더 배우도록 해라.

 시종장은 말을 마치고 감옥을 나갔습니다. 영주님이 아이를 찾았지만 매몰차게 거절했고요.

 나를 닮아 참으로 아름다운 아이였는데. 좋은 아기를 낳아줄 수 있을 텐데.

 영주님은 시종장의 설명을 듣고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며칠이 흐르자 이상한 소문이 흘렀습니다. 새와 들짐승이 낡은 벽돌건물 주변으로 모여든다고 하네요. 그곳은 표면적으로는 창고지만 실은 지하에 감옥이 숨겨져 있답니다.

 사정을 들은 시종장은 하인들을 시켜 아이의 어미를 잡아오도록 시키는 한편, 직접 감옥으로 내려갔습니다.

 내일 달이 파랗게 물드는 날에는 왕이 된 영주님의 아이가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불길한 주문을 왕에게 들려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칫 영주님과 자신까지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시종장은 무거운 돌문을 여는 순간 몸을 떨었습니다.

 아이는 돌벽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높낮이가 있고 감정이 실린 그 소리는 감옥 천장에 있는 숨구멍을 통해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동물들은 이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던 것이죠.

 시종장은 귀를 단단히 접고 몸을 떨며 단도를 뽑아 쥐었습니다.

 끝장을 내야 한다. 안 그러면 나도 영주님도 우리 마을도…….

 시종장은 몸을 떨며 조금씩 다가갔습니다.

 다가가면 갈수록 소리는 털과 피부 사이를 뚫고 그의 마음속을 뒤흔들었습니다. 들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숨을 헐떡이며 시종장은 감옥의 문을 열고는 휘청거렸습니다. 문에 몸을 기대고 겨우 쓰러지지 않은 채 버텼습니다.

 아이는 그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이어졌습니다. 한층 깊고 부드럽게……

 어미 뱃속에서부터 배웠던 그 태초의 소리를, 마음을 담은 소리를 바람에 실어서 보냈습니다.

 아아, 마음이 전해집니다.

 어미가 보고 싶은 마음.

 고향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 그 마음이.

 새들이 그에 화답하듯 지붕 위를 날아다닙니다.

 바람도 이해한다는 듯이 함께 울어줍니다.

 상대의 마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전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햇살에 녹아 냇물이 되어 흐르는 눈을 다시 되돌릴 수 없듯이.

 시종장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네요. 그는 힘없이 칼을 떨어뜨리고는 바닥에 엎어져 울었습니다.

 아이는 천천히 그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둥그렇고 묵직한 짐승들이 이끄는 마차가 영주님의 저택 앞에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시종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바로 임금님입니다.

 아이는 아름다운 장식으로 털을 수놓은 아름다운 모습에 숨을 들이켰습니다. 푸른 달빛을 받은 왕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습니다.

 저절로 벌어진 입에서 환희와 찬사와 감동과 사랑이 흘러나왔습니다. 바람을 타고 달빛에 물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주위를 흥건히 적셨습니다.

 모두들 기겁하고 두려움에 질렸으나 단 한 명, 왕만은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손을 뻗어 만류하려던 시종을 물러나게 하고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빨려들듯이 아이에게로 다가간 임금님. 한동안 두 사람은 소리를 타고 흐르는 감정을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스런 아이야, 이 주문을 어디에서 배웠느냐?

 아름다운 임금님, 주문이 아닙니다. 제 어미가 어미에게서, 그 어미가 어미에게서 배웠습니다. 소리로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에요.

 그럼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시종장이 보냈던 병사들이 아이의 낳은어미를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밧줄에 묶여 짐승처럼 끌려오는 모습을 본 임금님이 명령했습니다.

 당장 멈추라.

 병사들은 왕을 보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너는 일어나 밧줄을 풀어라.

 어명에 따라 즉시 풀려난 어미와 아이는 서로를 끌어안고 털을 쓰다듬고 핥아주었습니다. 왕이 어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소? 방법을 가르쳐주시오.

 존경하는 임금님,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우리에게는 입이 있잖아요.

 입은 말을 하고 음식을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한 가지 더 있답니다. 지금은 잊혔을 뿐. 오랜 옛날 사악한 마법사의 주문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이 금지시킨 후로 우리는 감정이 없는 말을 하도록 배웠지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저의 어미의 어미가, 그 어미의 어미로부터 배웠답니다. 우리는 잊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문을 외웠던 사람들이니까…….

 왕은 두 사람을 영주님의 저택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이의 어미는 얇은 천에 소리를 그렸습니다. 이 역시 오래 전에 잊혔던 능력이었죠.

 왕은 자신의 시종들에게 소리를 그리는 방법과 소리에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그 자신도 함께 배웠음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달이 색을 두 번도 더 바꾸기 전에 나라 안은 새로운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답니다. 기쁨과 사랑, 때로는 슬픔과 그리움을 담은 소리는 바람을 타고 세상 멀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노래’라고 불렀답니다.

 
댓글 2
  • No Profile
    곽재식 16.12.02 18:31 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종족은 실제로 어떤 동물을 나타내는 건가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 곽재식님께
    No Profile
    pilza2 16.12.30 23:31 댓글

    명확히 정해놓진 않았습니다. 원래 꿈에서 어떤 모습인지 생각이 안나서 마음대로 정했어요.

    그냥 인간과 닮았지만 털이 많다는 정도? 막연하게 콜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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