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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본작은 연작 단편 〈우주선 임라나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뚜공! 우리의 지구

“지구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 극장 애니메이션 〈은하전설 테라〉(1983) 헤드카피



우리가 속한 은하계에는 고도의 지성체들이 하나로 뭉친 〈은하 연방〉이 존재한다. 당시 지구도 연방의 일원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뤄지지 못했다. 하나의 행성 위에서 번성했다가 사그라지는 지성체의 역사 속에서 한 번밖에는 오지 않을 천재일우, 아니 억재일우의 기회를 그들은 왜 놓친 걸까.

뒤늦게 알았지만 지구는 운도 따르지 않았고 상황도 영 좋지가 않았다. 여러 복합 요소가 하필 안 좋은 쪽으로만 작용해버린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누굴 탓할 수도 없고 후회나 반성을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재도전의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런 나쁜 기억 따위는 깔끔하게 잊었으면 참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라는 정보-의식체에 영구적인 삭제란 없다. 이것도 육체에서 벗어난 대가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다. 망각과 치매, 죽음까지 극복한 대신 빛바랜 추억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번 생겨나 입력된 정보는 은하계에 가득 퍼진 정보-의식 네트워크 어딘가에는 남아 있는 법. 엔트로피에 맞서는 은하 연방의 위업에 경의를.

오르트 구름을 지나오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 지구인과 가장 닮은 육체를 입었다. 지난 〈우주 비눗방울 사건〉에서 능력을 발휘한 부관도 똑같은 육체를 입고 나를 따라 브리지로 나왔다.

태양-지구 시간대로 환산하니 19년 정도 지났다. 하지만 지구에서는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은하계 규모에서 활동하다보면 상식으로 여겨야 할 지식이 하나 있다. 공간의 이동은 곧 시간의 이동이기도 하다는 것. 내가 종종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레고리 역법에 따른 태양력을 쓰긴 하지만 연방의 공식 단위는 시공간을 동시에 측정한다. 아마 플랑크 단위가 비슷할지 모르겠다.

지구처럼 작은 행성 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안에서 제아무리 이동해봐야 날짜변경선을 기준으로 하루 이틀 정도의 시차가 생길 뿐이다. 하지만 초광속 비행으로 몇 천, 몇 만 광년 단위로 이동하며 살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이동하고 있음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 자신은 떠난 지 겨우 1700년 만에 지구로 돌아가고 있지만 지구는 지금 몇 백만, 몇 천만 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연방의 선택받은 자유민이 되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향별의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하나의 작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별을 떠나야 함은 물론이고 이전의 생활과 삶, 육신과 생명까지도 버려야 한다.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돌아온다 한들 그를 맞아줄 상대─개체만이 아니라 심하면 자기 종족 자체가 멸종하거나 퇴화한 경우도 있으니까 말 다했지─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고향별에서 지내며 얻은 기억만 디지털 정보-의식체 속에서 원본 그대로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기억만이, 오직 기억만이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다.

* * * * *

태양계 내부로 들어오면서 급격히 감속을 실시했고 우리는 내릴 준비를 했다. 그래봐야 입은 육체를 지구인의 외모와 비슷하게 조절하는 정도였지만…….

“선장님의 원래 모습이 이랬나요?”

부관은 진심인지 예의로 그러는 건지 지구인의 모습에 부쩍 호기심을 보였다.

“이랬으면 외설죄로 감방에 갇히고 말지. 진짜 지구인은 털도 났고 주름도 잔뜩 졌다고. 눈은 두 개, 코는 하나인데 콧구멍은 둘, 귀가 두 개에 입이 하나야.”

“의복을 갖추고 외모를 치장할 정도의 문화를 이뤘다는 말씀이군요.”

“너 은근히 내 고향을 무시한다?”

“실례했습니다. 지구인은 상급 문명권에 진입함과 동시에 멸종한 걸로 알고 있어서 그만.”

틀린 말이 아니어서 분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우린 입을 다물고 문화적인 외모 치장에만 집중했다.

우선 표피색을 황갈색으로 바꾸고 얼굴까지도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다만 털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고 얼굴의 경우 귀나 코는 만들면 되지만 효율적인 시각정보 수집을 위해 눈만은 재현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리 비슷하게 보이려 애써봐도 살아있는 생물이라기보다 움직이는 마네킹으로만 보였다. 눈 부위에 파랗게 빛나는 띠가 머리를 한 바퀴 두르며 감싼, 털 한 올 없는 알몸 마네킹을 상상하면 대충 맞을 거다.

이럴 바엔 차라리 피부를 초록색으로 바꾸고 외계인 느낌을 강조할까 고민했지만 어느새 지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미 충돌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비행궤도의 계산을 마친 우리의 우주선 임라나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중간에 소행성대가 있긴 해도 태양계는 무척이나 깨끗한 편이어서 비행하기에 편했…… 윽!

깜짝이야. 경고음인가? 묻기도 전에 부관이 보고했다.

“미세 데브리가 근접했습니다. 크기는 20㎝ 미만, 거리는 17m로 위협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충돌했어도 피해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우주 규모에서 보면 달라붙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지구의 짓궂은 환영 인사 같았다. 주위에는 죽은 인공위성과 우주기지, 로켓의 잔해들이 망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녀석들이 사람 만난 강아지처럼 반가워서 달려든 건지, 아니면 시골 개처럼 침입자를 쫓아보겠다고 덤벼든 건지 몰라도 아무튼 데브리가 한두 번 더 스친 다음에야 임라나는 대기권을 지났다.

약간의 진동과 압박감이 지나자 시야가 연한 푸른색으로 가득해졌다.

당연한 사실이라 무시하기 쉽지만 직접 보니 역시 지구는 물의 별이었다.

근데 물이 많아도 너무 많군. 이거 육지가 안 보이는데? 태평양 쪽으로 들어온 건가? 아니 그래도 이 정도 높이면 대륙이 보여야 할 텐데…….

“조타수─이 고전적인 호칭은 우주선의 비행, 탐지를 맡은 인공지능의 별명이다─가 행성 표면 스캔을 진행중입니다. 25% 가량 완료했다고 하는데 보실까요?”

“그래, 오랜만에 보는 고향 지도인데 봐야지.”

부관은 즉시 작은 스크린을 하나 띄워 널찍한 부채꼴 모양 지도를 표시했다. 푸른색 캔버스에 에어브러시로 하얀 구름을 흩뿌리고 아래로 황토색, 갈색, 초록색 덩어리와 점을 찍어놓은 그림이었다. 예상대로 우리는 바다 쪽으로 진입했던지라 50% 이상 스캔을 해야 겨우 대륙이라 부를 만한 땅덩이가 드러났다. 두뇌 속 서랍을 뒤져서 내가 살던 무렵의 지구 지도를 꺼내어 대조해봤다.

아프리카 대륙은 통통한 닭다리 같던 예전 모습은 어디가고 살을 다 뜯어먹고 뼈만 남은 듯 길쭉한 형상이었다. 장화 신은 유럽 할머니는 그새 노환으로 별세하신 건지 자잘한 섬만 잔뜩 남았다. 스캔을 완료하고 전체 지도를 평면으로 표시하니 전체적으로 물에 잠겨 육지의 크기가 줄었고 남극이 북상해 호주와 합쳐져 대륙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많던 땅 다 어디로 팔아먹고 이것밖에 안 남은 거야?

그나마 커다란 대륙이 두 개 있는데 과거 중앙 아시아와 인도로 보이는 북쪽 대륙과 남극과 호주가 합친 남쪽 대륙이었다.

“좋았어, 그렇담 이 두 개의 땅에 이름을 붙여야겠군!”

“또 이름 붙이기입니까…….”

부관이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린 거 다 안다 이놈아.

“행성이든 대륙이든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이름을 붙이는 건 탐험가의 엄연한 권리라고!”

“이미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지성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저 땅을 봐라. 예전엔 세 배는 넓었어. 이 정도로 뒤집어엎어졌으니 지구인은 멸망했을걸? 남아봐야 미개한 애들일 거야. 지구가 평평하다든지 커다란 두꺼비 등에 얹혀 있을 거라 믿고 있겠지.”

근거 없는 허풍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타수는 이미 지형만이 아니라 대기의 조사도 끝마쳤는데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소수의 전파나 음파를 제외한 인공적인 파장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선통신, 라디오 같은 건 물론이고 확성기조차 없는 수준일 게 분명했다. 건물, 철도, 운하 같은 거대한 인공물도 찾지 못했다.

“지하나 바다 밑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부관의 지적은 타당했고 조상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도 떠올랐다. 엄연히 거주민이 있는 땅을 신대륙이라고 부른다거나 전혀 엉뚱한 지역의 이름을 붙인다거나 하는 자잘한 바보짓 말이다. 무지와 근거 없는 자부심에 탐욕과 호승심을 양념으로 곁들여 나온 결과 아닌가. 나까지 그걸 되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생명체의 자세한 조사를 마칠 때까지 명명은 보류해야겠군. 미개하다 해도 토착 생명체의 의지를 존중하는 게 은하 연방의 방침이니까 말야. 그렇다고 해도 일단 편의를 위해 임시 명칭을 붙일 필요는 있겠지? 따라서 북쪽에 있는 큰 쪽을 ‘내 땅’, 남쪽의 작은 쪽을 ‘네 땅’으로 부르겠어.”

“작은 대륙을 저에게 주신단 말인가요.”

“왜, 불만이야?”

“아뇨, 저야 지구와 아무 관련이 없으니 상관이 없지요.”

“없다면 섭섭하지. 넌 지구 출신인 내 부관이잖아. 이만하면 은하계 규모에서 어마어마한 인연 아니겠어?”

부관은 대꾸가 없었다. 지구인과 닮은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근육도 없는, 그냥 점토를 뭉쳐서 만든 거나 마찬가지의 쓸모없는 얼굴이었다. 표정이 없는 상대의 기분을 알아낸다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름은 이제 됐고, 이제 누가 지구의 주인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대륙 위를 훑자 개체수가 과밀하게 집적된 부분이 몇 군데 드러났다.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 도시일 거란 추측이 가능했다. 당연히 그곳으로 우주선을 몰고 곧바로 나타났다간 대혼란이 벌어질 게 분명하니 조심스레 접근하기로 했다.

마침 바다에 접한 큰 산맥 너머에 도시로 추정되는 지역이 있어 해안 쪽으로 내렸다. 확대한 사진에 격자무늬에 가까운 구조물이 드러났던 것이다.

부관이 창고에서 2인승 자동차를 호출하는 사이에 나는 오랜만에 지구의 땅을 밟고 묵직한 중력을 느끼며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실…… 수는 없었다.

콧구멍을 안 만들었으니까!

시시한 농담인가? 사실 이 육체는 호흡이 필요없어서 호흡기관 자체가 없다는 게 정확한 설명이지만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잖아.

육체를 버렸을 때 나는 지구인의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지금 지구는 떠났을 때와 너무나 달라져 있다. 이미 여기는 낯선 외계 행성일 뿐이다.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그토록 그리워할 정도로 지구와 인류를 사랑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떠난 곳이다. 미련도 없다.

단지 아주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먼 옛날 헤어진,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가에 온 것 같다고나 할까.

부관은 차의 바퀴를 톱니바퀴와 흡사한 모양으로 바꾸었다.

“거친 바위산을 올라야 합니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십시오.”

우리는 차를 타고 산을 올랐다. 차는 앞에 조종석, 뒤에 조수석이 있으며 지붕이나 덮개 같은 건 없이 사방이 트인 모양이다. 몸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바퀴 세 개가 달렸다. 조종석 앞에는 광전지 코팅 덮개로 싸인 엔진이 있다.

우리가 입은 육체의 외피와 마찬가지로 차는 외부의 빛을 흡수하여 에너지로 사용한다. 지구처럼 모항성의 빛으로 충만한 행성이라면 활동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밤이 길거나 광원이 부족한 행성이라면 보조 배터리를 휴대해야겠지만 지구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 낮에 충전하는 분량으로 밤에도 충분히 활용 가능할 것 같다.

산을 넘자 실망감이 밀려왔다. 한 마디로 도시는 과거에 사라진 문명의 흔적에 불과했다. 건물은 길게 자란 풀과 벽을 덮은 덩굴에 뒤덮였고 주위에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미개한 동물들만 돌아다닐 뿐이었다. 작은 덩치에 다리가 길고 머리에 구부러진 뿔 두 개가 난 포유류─일단 이놈들을 ‘뿔쥐’라고 부르자─가 수십 마리씩 떼를 지어 여기저기로 몰려다녔다. 그들에게 이 건물은 마침 집으로 삼기 딱 좋게 생긴 바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서서히 다가가자 다들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풀이 무성한 들판엔 온갖 종류의 커다란 곤충이 날거나 기거나 달리거나 굴러다녔다.

“압도적인 개체수의 정체는 곤충류였군요. 딱히 뛰어난 지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포유류 역시 군집생활을 하지만 문명을 이룬 흔적은 없습니다.”

뿔쥐들은 사회성이 높고 영리했다. 건물 안에 돌벽을 쌓아 방을 만들고 짚을 깔아서 잠자리를 마련하며 별도의 방에 먹을 것을 보관할 정도긴 했으나 지능이 프레리도그를 넘지 못하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럼 이 건물은 다른 종족이 만든 걸까요? 그들은 여길 버리고 떠난 걸까요, 아니면 멸종이나 퇴화를 한 걸까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풀과 덩굴, 돌과 흙벽이 가득한 건물 내부를 조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 종족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마리를 잡아낼 순 없었으나 출입구와 창문의 크기를 볼 때 평균 키가 4m는 되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제법 큰 편인데. 인간 다음으로 공룡의 후예가 부활해서 지능을 갖춘 건가?”

“지구의 주인은 몇 번 정도 바뀐 겁니까?”

“내가 인간이라 부른 직립 포유류였고, 그 전엔 공룡이라고 있었는데 덩치는 엄청 커다랗지만 지능은 떨어졌지. 뿔쥐들과 별 차이가 안 날 거야.”

부관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벽면을 살짝 눌렀다.

“제법 강인한 구조로군요. 금속 재질입니다. 연대 측정을 해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콘크리트처럼 보였는데 흙과 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긴 그랬다면 오래 못 버티고 무너졌겠지.

“……2만 년 정도 된 걸로 보입니다.”

“그리 오래도 아니잖아?”

“다른 곳에 이들의 후예가 존속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군요.”

“흐음.”

아무래도 찾아봐야 하나. 우리가 고고학이나 외계 문화 탐사를 목적으로 온 건 아니지만 이왕 온 김에 대화가 통하는 수준의 지성체가 있다면 만나보는 게 순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주선으로 돌아가 비교적 낮은 고도를 유지하고 ‘내 땅’ 대륙 해안가를 돌았다. 아무래도 강이나 바다 근처에 도시나 군락이 존재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무리를 짓고 살며 특정한 음성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듯이 보이는 동물 몇 종을 발견했다. 날개가 거의 퇴화되고 굵은 다리로 뛰어다니는 새와 닮은 종족, 등딱지가 없고 다리가 긴 거북이처럼 생긴 종족, 긴 촉수를 서로의 몸에 휘감고 뒤엉킨 채로 강 위를 떠다니는 젤리 덩어리처럼 생긴 종족……. 하지만 그들도 뿔쥐와 엇비슷한 수준에 그칠 뿐 확실하게 언어가 있다든지 불이나 도구를 쓴다든지 하는 지성의 증거가 보이지 않았다.

* * * * *

며칠이 지나고 큰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마침내 지금까지와 확연히 다른 종족을 발견했다. 5m는 넘을 듯 높이 솟은 갈대숲을 조심스레 헤치는 10명 정도의 무리가 감지되었다. 얼른 우주선을 바위 뒤로 숨겼다. 말은 숨겼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큰 바위가 없어서 채 절반도 못 가렸는데 그래도 임기응변은 되었다. 저들에게 탁월한 시각과 높은 지능이 있다면 들키겠지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무리는 직립했고 손에 창과 도끼를 닮은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친숙한 외모와 발달한 사냥도구를 보자 가슴 뭉클한 반가움이 밀려왔다. 지구에는 여전히 우리의 후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강에서 물을 마시는 뚱뚱한 네발짐승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짙은 분홍색 짐승은 소리를 들었는지 얼른 고개를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무리 중 하나가 커다란 새총 비슷한, 활을 눕혀서 쏘는 듯한 원거리 무기를 발사했다. 빗맞은 화살에 놀란 짐승이 황급히 반대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노림수는 이쪽이었다.

이미 무리 다수는 놈의 이동 방향을 예상하고 이동한 후였다. 갈대를 헤치며 달려들어 창으로 짐승을 공격했다. 쫓고 쫓기는 짧은 순간이 지나고 사냥감은 몸에 몇 개의 창이 꽂힌 채로 넘어졌다. 무리는 주위로 몰려들어 양팔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며 기쁨을 표현했다.

“선장님, 저들은 확실히 원시적이지만 지성체가 맞군요.”

도구의 사용, 집단행동, 작전에 입각한 사냥 등 모든 면에서 지금껏 본 생물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그래, 나의 조상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럼 선장님도 지구인 시절엔 저렇게 생기셨다 이거군요.”

“무슨 헛소리야!”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난 저 녀석들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었어! 털도 머리 꼭대기 외에는 거의 없었다고!”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다리가 길었다면 이동은 더 빨랐겠군요. 털이 없다면 기온변화에 취약한 대신 옷을 만드는 솜씨는 그만큼 발달했겠지요. 제가 볼 때 그 두 종족의 우열을 당장 가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의 명예를 훼손할 셈이야? 당시의 나와 저놈들은 2백만 년 정도 수준 차이가 난단 말이다.”

괜히 나만 흥분하는 것 같군. 진정하자. 부관은 인공지능, 육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녀석이다. 미학적으로 인간과 원시인과 원숭이를 구별하지는 않을 거란 얘기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일단 내려서 걸어서 쫓아가보자. 놈들도 다른 이동수단은 없는 것 같으니 마을이 멀리에 있진 않을 거야.”

무리는 죽은 짐승을 다함께 짊어지고 돌아갔다. 이들을 임시로 ‘단인(貒人)’이라고 부르자. 전체적인 인상이 오소리와 제일 닮았기 때문이다.

단인은 평균 키가 120㎝에 전신에 황갈색 줄무늬가 그려진 회색 털이 난 직립 포유류다. 귀는 머리 위쪽으로 튀어나왔고 머리는 오소리나 족제비를 닮았다. 다리가 짧은 반면 팔은 무척 길어 침팬지와 흡사한 체형이다. 천천히 걸을 때는 다리만 쓰지만 빨리 달릴 때는 팔도 이용하는 걸로 보인다. 몸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천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천에는 뼈로 만든 장신구가 몇 개씩 붙어 있다. 모양과 크기가 저마다 다른데 신분을 표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창과 도끼는 나무로 자루를 만들었고 날은 깎은 돌로 추정된다.

그동안 몇 개의 종족이 거쳐 갔는지 모르지만 비교적 인간과 닮은 생물이 지능을 갖추고 주인으로 군림한 모습을 보니 괜히 반갑고 기뻤다. 솔직히 블로브피시나 벼룩을 닮은 놈들이 돌아다닌다면 조금도 기쁠 것 같지가 않았다. 부관 녀석이야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마을이 시야에 들어오자 꽤 실망스러웠다. 산비탈에 굴을 파고 나무와 잎사귀로 움막 비슷한 입구를 만든 집들은 미개해 보일 뿐만 아니라 좀 전에 봤던 도시의 흔적과 전혀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그 도시를 만든 이들이 아닌 모양입니다. 갑작스레 퇴화했다고 보기도 힘들고 말이죠.”

“2만 년 전에 핵전쟁 같은 걸로 조상들이 몰살했을 수도 있지. 저 녀석들은 문명과 단절되어 살아남은 후손이라든지.”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증거를 찾아낼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저들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지 조사해보자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건 위험했다. 저들이 보기에 우리의 모습은 낯선 외계인일 수밖에 없다. 두 배가 넘는 키에 다리가 길고 털 한 올 없는 피부에 옷도 안 입은 외계인이라. 음, 나 같아도 길을 물어볼 상대로는 못 고를 것 같은데.

일단 우리는 수풀 우거진 곳에 엎드려 단인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대화를 녹음했다. 나보다 우수한 부관의 두뇌가 번역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저들의 언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꼼짝도 안 하고 계속 관찰을 했다.

이 마을엔 대략 5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작은 밭도 있고 새 비슷하게 생긴 가축도 기르며 강에서 물을 끌어온 저수지도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인간과 다른 단인의 특징에 시선이 갔다. 우선 암컷의 덩치가 더 크고 계급도 높은 것 같았다. 암컷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며 거의 마을 안에만 있었다. 수컷이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며 너른 땅 위에 그림 비슷한 걸 그리는 일을 했다. 밧줄과 쟁기 비슷한 도구를 써서 매우 커다란 원이나 직선 모양을 그리는데 농사도 아니고 어떤 의미인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풍년을 바라는 주술적 행위일 수도 일종의 예술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다.

가끔 암컷들이 땅 위의 그림 등을 보며 뭐라고 지시를 하면 수컷들은 꼼짝도 못하고 복종하는 걸로 보였다. 점점 자료가 쌓이자 부관은 내게도 번역기를 보내주었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간단한 일상대화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받아서 번역기를 돌리니 확실히 내용은 단순했다. 사냥 다녀왔다, 오늘은 얼마나 잡았냐, 애가 말을 안 듣는다, 배가 고프니 밥 먹자, 날씨가 좋구나, 등등.

생활수준을 보면 어렵고 복잡한 대화를 나눌 녀석들도 아니었다. 혹시나 고대 문명의 산물을 활용하는 모습이 있을까 살펴봤지만 없었다. 아직 종이로 된 책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전달하는 중요한 이야기나 지식을 노래처럼 외워서 전승했다.

우리의 평온한 단인 관찰기는 사흘 만에 갑작스레 끝을 맞았다. 아마도 개의 후예가 낯선 침입자를 잡아낸 것 같았다. 갑자기 수풀을 가르며 나타난 조그만 짐승들이 우리를 보며 우악스레 짖어댔다. 생긴 건 개구리를 닮았는데 하는 짓은 똥개였다. 하여간 녀석들이 짖어대는데 멍멍도 아니고 깽깽도 아니고 글자로 표현하기 심히 난감한 괴상망측한 소리였다. 그래도 굳이 해보라고? 슈쿠폐췌샤푸츄쉐!

시끄러운 소리와 포악한 태도에 당황한 사이에 단인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엔 호기심에 달려온 어린놈들이 우릴 보고는 놀라서 도망갔다가 무장한 어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어쩌죠, 선장님? 아마도 저들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겁니다. 사냥할 때의 동작을 보니 빨라도 초속 10m는 넘지 않을 것 같더군요. 우리의 육체는 지금 중력이라면 초속 20m로 이동 가능합니다.”

“아냐, 잠깐만.”

저들이 두려움과 놀라움이 담긴 얼굴로 다가올 동안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방금 나는 저들의 감정을 서술했다. 그 말은 저들의 얼굴에서 인간과 흡사한 감정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만큼 단인이 인간을 닮았다는 얘기다. 최소한 얼굴만 보고도 저들이 웃는 건지 화난 건지 놀란 건지 정도는 구별이 가능할 것 같은 자신이 생겼다. 이럴 땐 벼룩 비슷한 종족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일어나자 단인들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만 했다. 나는 얼굴 근육이 부족함을 원망하며 입을 열었다. 입이라고 해도 안에 발성기관도 소화기관도 없다. 목구멍 대신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번역기를 통해 알아낸 저들의 언어를 음성으로 바꾸어 전달했다.

“너희들을 만나서 기쁘다.”

당연히 단인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길쭉하고 미끈한 외계인이 자기네 말을 유창하게 하는데 안 놀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는 너희들의……”

음, 적절한 어휘를 찾기가 힘들다. 내 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조상이라고 해야 하나? 조상에 해당하는 낱말은 아직 못 알아냈는데. 과거에서 온 사람? 과거도 아직 모른다. 저들의 대화에선 어제 이상의 과거를 표현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친구야. 가족 비슷한 사람이야.”

결국 몇 안 되는 어휘를 동원해서 두루뭉술한 설명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눈에 담긴 당혹과 의심의 빛은 너무나 인간과 닮았다. 역시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닐까?

“움직이면 죽인다!”

단인 하나가 외치며 창끝을 내 목으로 들이밀었다. 거의 찔릴 뻔했다. 동시에 다른 녀석들도 나와 부관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부관이 살짝 원망 섞인 목소리로 불평했다.

“분명 저는 도망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매정한 녀석아. 머나먼 시공의 간격을 넘어 지구의 두 종족이 조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내 심정을 이해 못하겠냐?”

“못하겠는데요.”

우리끼리의 대화는 저들이 듣지 못했다. 무선통신으로 직접 주고받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내 고집으로 발화를 통한 의사소통─비효율적이라며 부관 녀석이 늘 불평하는 방식─을 하는 우리 사이지만 이럴 때는 이쪽이 빠르고 편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 사이에 덩굴을 꼬아서 만든 걸로 추측되는 밧줄을 들고 오더니 우리 둘을 한 번에 묶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찌른다!”

단인은 위협하면서 우리의 상체를 묶어서 한 덩어리로 만들더니 창끝으로 슬쩍 찔렀다.

“우리를 따라와! 다리를 움직여라!”

두 문명인의 조우는 한쪽이 사냥감 신세가 되면서 초라하게 끝나고 말았다. 내가 따지고 들어가면 너희들 조상일지도 모르는데 이런 대접은 좀 심하지 않냐?

* * * * *

“선장님,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가 있습니다.”

“둘 다 필요 없어.”

“화나셨습니까?”

“화 안 났어! 말 시키지 마.”

나는 통신을 끊고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부관에게 등을 돌린 채 몸을 웅크렸다.

여기는 외양간으로 추측되는 허름한 움막 한 구석. 허리까지도 안 오는 통나무 칸막이로 나눠진 옆 칸에는 돼지 비슷한 새들이 꽥꽥거리며 먹이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단인이 기르는 가축은 날개가 퇴화되었고 깃털도 거의 없는 새 비슷한 동물인데 몸은 그야말로 뚱뚱했다. 짧은 두 다리로 뒤뚱거리다 먹이 비슷한 것만 발견하면 바로 주둥이를 땅에 처박고 꽥꽥 소리를 냈다.

아, 이놈들이 닭둘기의 후예인가보다.

통신을 차단했더니 부관은 음성으로 직접 말을 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갇힌 곳이 매우 허약한 목재 건물이라는 점입니다. 언제든 우리의 힘으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

“나쁜 소식은 우리 주위에 상당한 배설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황화수소 및 암모니아의 농도가 높으니 후각기관을 차단해놓으십시오. 배설물에는 상당한 병균과 기생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육체에 피해를 입힐 수준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한 마디로 똥통이라는 얘기잖아!”

나는 기겁하며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엔 마른 잎사귀를 깔아놓긴 했으나 저 돼둘기─마찬가지로 내가 붙인 임시 호칭이다─들의 똥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으악, 벌써 온몸에 다 묻었어!”

“저들은 배설물로 퇴비를 만드는 지식조차 습득하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아깝게 방치해놓고 있으니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고 자원 활용 측면에서도 아쉽군요.”

“이게 뭐가 아까워, 더럽지!”

툴툴대며 벽 쪽에 있는 그나마 깨끗한 잎사귀를 골라 모아서 몸을 닦고 있는데 새가 우는 건지 동물이 짖는 건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가느다란 통나무를 성기게 엮어 만들어서 밖이 훤히 보이는 벽에 조그만 단인 몇이 달라붙어서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워낙 가느다랗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재잘거리는지라 통역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웃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처지가 딱해도 내가 저런 애들의 놀림감이 될 사람은 아니지. 똥 묻은 잎사귀를 팽개치고 양손을 치켜들며 성의 없는 포효를 토하면서 달려드는 시늉을 했더니 웃으면서 저만치 도망쳤다.

속으로 투덜대며 다시 주저앉았더니 아이들은 슬금슬금 또 다가왔다. 다시 일어나며 소리를 쳤더니 또 도망쳤다. 이렇게 두세 번을 하니 이젠 놀라는 시늉도 안 하고 웃기만 했다. 여기가 무슨 동물원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저 녀석들 시선에 내가 동물원에서 볼 만한 희한한 생물로 보인다는 점에는 동의를 하겠지만 그래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거 먹어.”

한 아이가 해독이 가능한 쉬운 말을 건네며 긴 잎에 싼 무언가를 건넸다. 널찍한 통나무 틈 사이로 손을 쑥 내미는 모습이 조금의 경계심도 없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내 쪽이 걱정될 정도였다.

아직 유아의 암수구별을 정확히 할 만한 데이터를 모으지 않은 상태라서 성별은 모르지만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귀 옆에 유난히 빨갛고 예쁜 꽃을 꽂고 있어서 여자애인가 싶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 없다. 꽃을 머리에 꽂는 게 주로 암컷이라는 건 내가 지구인이던 시절의 문화였지만 이들이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아무튼 총기 있고 영리해 보이는 눈빛과 좌우대칭의 깨끗한 얼굴을 보면 이 아이가 성별에 관계없이 이들 종족의 기준에서 예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더구나 낯선 생물에게 먹을 걸 건넬 정도로 마음씨도 착하지 않은가. 이 이름 모를 아이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멍하니 받아서 펼쳐보니 털이 잔뜩 난 시커먼 열매 세 개가 있다. 살펴보니 아이들도 거리낌 업이 통째로 입에 넣고 있었다.

“어서 먹어, 길쭉한 □□!”

뒤쪽의 낱말은 번역기가 통역하지 못했다. 이틀간 수집한 대화에서 나오지 않은 낱말이었다.

“이 행성에 사는 생물의 이름인 걸로 추측됩니다. 아마도 사지가 길겠지요.”

갑자기 부관이 끼어들었다.

“이거 먹으라는데 어쩌지?”

우리에게 입은 있으나 치아도 목구멍도 소화기관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처치곤란이었다.

“타 종족의 관습은 따르는 게 예의라고 배웠습니다. 주는 음식을 먹고 하는 행동을 따라는 것만큼이나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좋은 방법은 없는 법이죠.”

“그럼 너도 하나 먹어.”

말 하는 투가 얄미워서 털복숭이 열매 하나를 부관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멀뚱히 보다가 단숨에 삼켰다. 나도 나머지 두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물론 열매는 입 구멍 끝에 붙은 스피커 진동판 위로 떨어져서 마치 접시에 잘 담은 것처럼 얌전히 놓여 있었지만.

“씹지도 않고 삼켜?”

아이는 놀란 듯했다. 아이들은 모두 열매를 한참이나 씹다가 씨앗을 손바닥에 뱉더니 그걸 모아서 바닥에 늘어놓고 던졌다가 받는 놀이를 했다. 다들 벌써 우리에게 흥미를 잃은 눈치였다. 이 빨간 꽃을 꽂은 아이만이 여전히 통나무를 팔다리로 끌어안고 벽에 매달려 우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서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알고 싶은 지구의 역사나 종족의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사항을 표현할 적절한 낱말은 찾지 못했거나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이 미개한 종족에게는 역사, 국가, 정부, 화폐 등에 대한 개념 및 단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또 아이 나름대로 우리의 정체를 캐묻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빈곤한 어휘로는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만의 착각인지 어떤지 몰라도 서로 마주보며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과정 자체가 우리 사이를 꽤 친밀하게 만들어주었다.

더 오래 대화를 나눴다면 그래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최소한 이 아이에 대한 것이라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어른들이 다가오자 아이는 놀라면서 얼른 도망치듯 외양간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씨앗 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덩달아 그 자리를 떠났다.

긴 지팡이를 짚은 덩치 큰 암컷이 선두에 섰고 여럿이 그 뒤를 따랐다. 척 봐도 지도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선 몸에 두른 천의 색이 화려하고 뼈로 만든 장신구가 무척 많았다. 이마에도 팔뚝에도 장신구를 털에 묶어서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지도자 암컷이 잠시 우리를 쏘아보다가 물었다.

“산 너머에서 왔느냐, □□에서 왔느냐, □□에서 왔느냐?”

뒤의 두 낱말은 번역기가 해독하지 못했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저들 언어로 솔직히 말했다. 지도자는 옆 사람과 잠깐 상의를 하고 또 우리에게 뭘 물어보고 그러면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겨우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단인들은 우리가 어디서 온 존재인지 묻고 있었다.

산 너머 땅에서 온 건지, 바다 밑에서 온 건지, 하늘 위에서 온 건지. 그들이 아는 범위의 외부 세계는 크게 이들 셋으로 나뉘었다.

우리는 또 우리끼리 통신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름 작전을 짰다.

“뭐라고 대답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

“가장 사실에 부합하려면 하늘 위에서 왔다고 해야겠지만, 저들의 반응을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대답하기가 힘들겠군요.”

“설마 화내기야 하겠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지.”

“아닙니다. 아까 저들의 회의를 훔쳐 들었는데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저들은 우리가 훔쳐 듣지 못할 줄 알았겠죠. 자기네 수준의 청력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을 테니까요.”

하긴 저들은 대충 10m 정도 떨어져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정도면 내가 지구인이었던 시절의 청력으로는 듣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행성 탐사용 육체의 성능을 우습게보면 안 되지.

“산 너머에서 온 것 같아?”

지도자가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내 생각엔 아냐. 우리 형제는 저 산 너머로 갔다 온 적이 있어. 저렇게 생긴 짐승은 본 적이 없어.”

“바다 밑에서 온 거 같아!”

다른 녀석이 끼어들었다. 지도자가 손짓해서 불렀다.

“그래, 너는 바닷가로 정찰을 갔다가 빠진 적이 있지. 너라면 알 거야.”

“저 녀석들은 물고기와 닮았어. 털도 없이 반짝이는 피부를 봐.”

다른 녀석들도 동의했다.

“바다에서 온 적이야! 우리를 훔쳐본 것도 몇 명이나 있나 세어보려는 거야! 우리보다 더 많은 무리를 끌고 쳐들어올 거야! 바다는 □□야! 바다 놈들은 적이야!”

금방 격해진 무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바다 놈들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모두 조용!”

지도자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위엄 있게 말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땅의 아이들아. □□가 들을지도 모른다.”

단인들은 즉시 얌전해지며 지도자의 말에 순종했다.

“녀석들이 바다에서 왔다면 한 놈을 □□하게 죽이고 다른 놈에게 이렇게 말하자. ‘가서 너의 가족과 친구에게 전해라. 땅의 주인들은 너무나 강대한 이들이라 절대로 쳐들어가선 안 된다고. 형제가 죽었듯 모두 죽을 거라고. 바다 위로 나오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러자 모두들 소리죽여 찬성 의사를 표시했다. 그때 나이 들어 보이는 단인 하나가 말했다.

“하늘에서 왔으면 어쩌지? 아직 우리 모두 저들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하늘에서 왔을 수도 있어.”

물에 빠졌다는 단인이 거칠게 반박했다.

“저놈들을 봐! 몸에 날개도 없고 깃털도 없어. 두 다리로 걸어 다녔잖아!”

늙은 단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하늘의 이야기를 떠올려라.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를 떠올려라.”

지도자가 망설이자 늙은이가 계속 설득했다.

“우리가 기다리던 하늘에서 온 사람일지도 몰라. □□를 해서 □□를 보인다면 알 수 있을 거야. 저들의 외모가 물고기를 닮았으나 바다 냄새는 나지 않았어.”

“땅에 올라온 지 오래 되어서 냄새가 사라진 거야!”

물에 빠졌던 단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맞섰다.

“너희 둘의 말이 다 그럴듯하구나. 저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자. □□를 보이라고 요구하자.”

지도자의 말에 모두가 따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단인들이 토론을 마치고 다가오자 우리는 청각 센서의 성능을 낮췄다. 부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저들은 바다를 증오하고 하늘에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무언가를 보이라는데, 증거…… 같은 거겠죠?”

“비행기나 우주선을 뜻하는 것 같아. 아까 우릴 바다에서 왔다고 모함하는 녀석도 그러잖아?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왔냐고. 즉 우리가 무언가를 타고 왔음을 보인다면 저들이 믿어줄 거란 얘기야.”

그 사이에 무리가 임시 감옥 앞에 다시 모였다. 지도자가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너희들은 바다 밑에서 왔느냐, 하늘 위에서 왔느냐?”

그새 선택지가 줄었군.

“우린 하늘 위에서 왔어.”

모두가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지팡이를 쥔 지도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게 사실이냐? 그럼 □□를 보여라. 너희들은 어떤 방법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지?”

나는 부관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관은 즉시 임라나를 불렀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기에 우리가 가리킬 때까지 녀석들은 멍하니 우릴 쳐다보고만 있었다. 단인들이 우리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고 겨우 몸을 돌리기 직전 마을에 있는 암컷과 아이들이 먼저 발견하고 비명을 질러대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하얀 우주선이 마을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론 내 시야에는 작고 낡은 장거리 비행용 탐사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진작 분해해서 폐품 처리해야 할 고물 수준의 물건이다.

그래도 단인들에게는 거대한 새, 아니 날개가 아주 작으니 거대한 상어에 가까운 물체로 보일 터다. 지금 지구에 상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이미 4억 년이 넘도록 큰 변함없이 존재하던 고참이었으니 건재하지 않을까 싶다.

단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몸을 떨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암컷도 있었다. 지도자도 지팡이를 땅에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울음 비슷한 소리를 터뜨렸다.

므어어어어. 튜바처럼 낮은 울음소리가 마을 상공으로 퍼져갔다.

부관은 임라나를 마을 위로 천천히 한 바퀴 돌게 한 다음 조금 떨어진 평평한 땅, 저들이 이상한 그림을 잔뜩 그린 땅 위에 착륙시켰다. 마을 안에는 도저히 우주선이 차지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 저들은 분명 우주선이 하나의 생물이거나 안에 다른 누가 타고 있을 거라 여기지 않을까. 아무튼 강렬한 충격을 주었음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가장 커다란 생물도 임라나 전고의 20%를 넘지 못했다.

비명과 울음이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오려나 싶은 순간 지도자가 벌떡 일어나 마을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양손을 번쩍 들더니 지금껏 들어본 가장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

처음 듣기에 해석이 안 되는 그 낱말의 발음은 ‘뚜공’에 가까웠다.

“뚜공!”

지도자가 연거푸 외치자 마을 주민들이 그에게로 달려가서 역시 양손을 들고 외쳐댔다.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번역기는 임시로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뚜공
【명사】 비행기, 우주선, 커다란 새.


단인들은 한참이나 양손을 들고 춤을 추며 뚜공을 외쳤다. 광란의 클럽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나이든 단인이 가장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지도자를 시작으로 주민들도 따라서 우리를 보더니 물밀듯 몰려들었다. 예상 못한 사태에 부관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선장님, 우릴 공격하는 걸까요? 일단 피하죠!”

“아냐, 공격일 리가 없어. 저렇게들 기뻐하는데……”

어쩌면 세월과 종족의 간격이 표정과 감정의 관계를 뒤바꿔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들의 표정을 지금까지 거꾸로 읽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기쁨이라고 생각한 게 실은 화를 낸 표정이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지금 저들은 우리를 잡아 짓밟고 산산조각을 내고 싶어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허름한 외양간은 단숨에 무너지고 나와 부관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단인들의 손아귀에 전신을 붙잡혔다. 그들은 우리를 번쩍 치켜들더니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록밴드 콘서트 중에 스테이지 다이빙을 시도한 록커처럼 우리는 단인들이 치켜든 손 위에 누운 채로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단인들은 다른 낱말을 다 잊어먹고 이거 하나만 기억하는 것처럼 뚜공만 연발했다.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아, 자꾸 시끄럽게 뚜공 거리지 마! 뚜껑 열리겠네!”

……여느 때라면 부관이 썰렁한 개그에 대한 핀잔을 주었을 텐데 그것마저 없으니 섭섭했다. 녀석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선장님, 우린 대체 어디로 옮겨지는 걸까요?”

“글쎄, 우주선으로 가고 있는 거겠지.”

“아닙니다. 잘 보세요. 우주선은 저쪽이에요. 벌써 지나쳤다고요.”

“진짜네?”

단인들은 우릴 데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당연히 우주선 앞으로 가서 만져도 보고 두드려도 보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들은 임라나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우릴 들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둔덕 위로 올라가나 싶더니, 이제는 우리가 놀랄 차례였다.

아마도 지구에 온 이래로 본 가장 커다란 인공 건조물이 거기에 있었다.

수많은 거대 벽돌로 쌓아 만든 물체였다. 건물이라고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

외양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선 아주 납작한 원기둥이 있다. 원판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낫겠다. 그 위에 삼각형 구조물이 있다. 꼭짓점 하나가 원의 중심, 하나는 원의 가장자리 끝, 나머지 하나는 끝에서 수직으로 위쪽에 위치한다. 두께는 제법 굵어서 원의 면적을 대충 30% 정도 점유하는 걸로 보인다. 거의 이등변삼각형에 가깝다.

개략적인 모습이 이렇고 실제로는 돌을 깎고 벽돌을 쌓아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다. 원판의 반지름이 80m, 삼각 구조물 높이가 120m 정도 된다.

얼핏 해시계 같긴 한데 그러기엔 침에 해당하는 부분이 너무 굵다.

역시 주술적 혹은 종교적인 목적인 걸까? 피라미드처럼?

단인이 만든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뿔쥐처럼 고대 문명의 유산을 의미도 모른 채 물려받은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표면은 깨끗하고 잘 관리된 걸로 보였다. 벽돌 사이로는 잡초 한 포기 안 보였다.

여기에 이르자 겨우 뚜공 소리가 멎었다. 그들은 우리를 원판 한쪽에 난 돌계단 앞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헹가래 치듯 던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지도자가 우리 앞에 다가오더니 높이 솟은 삼각형 구조물을 가리켰다.

“너희들 □□를 다시 불러라. 여기에 □□해서 □□하도록 □□해라.”

우리가 못 알아듣자 손짓발짓을 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옆의 몇몇 단인들도 거들었다. 어찌나 열의를 가지고 성의 있게 가르쳐주는지 빨리 이해 못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우리를 붙잡고 외양간에 가둘 때 보였던 적대적인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겨우 알아들은 지도자의 말은 이랬다.

“너희들의 우주선(혹은 큰 새)을 다시 불러라. 여기에 옛날부터 전해진 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해라.”

대화 결과 뚜공이 우주선을 뜻하는 말이 아님은 분명했다. 우리는 뚜공이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확실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우린 뚜공이라 외쳐. 반갑고 기쁘니까. □□가 □□하니까 뚜공이야.”

그들은 뚜공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우리가 모르는 낱말을 마구 동원했다. 번역기는 나름대로 새로 해석을 추가했다.


뚜공
【감탄사】 기쁨이나 즐거움을 나타날 때 외치는 말.
유의어 | 만세, 야호


부관은 단인들이 바라는 대로 임라나를 다시 불러 경사진 삼각형 구조물 위에 놓았다. 워낙 큰 구조물이라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선두가 하늘로 향한 자세로 놓으니 부관도 나도 느껴지는 게 있었다.

“선장님, 이건 설마……”

“틀림없어. 이들은 나름대로의 지식과 기술로 우주선 이착륙장을 만든 거야!”

“은하 연방에서 이곳을 찾은 기록은 없을 텐데요. 선장님 일행, 즉 최초이자 최후의 지구 선발대를 끝으로 연방은 지구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지도를 통해 대륙의 이동을 추측하면 이후로 최소 1억 년은 흘렀을 텐데, 그 세월 동안 숱한 문명과 종족을 거치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계승될 수 있었던 걸까요?”

“설마 그럴 리가. 지구인은 고작 몇 세대 전의 교훈도 잊어버리는 종족이야. 당장 나만 해도 공룡 시대의 기억 같은 걸 이어받았을 리도 없어. 그랬다면 알을 숭배하느라 달걀 요리는 해먹지도 못했을걸.”

“그렇다면 연방 몰래 해적이나 밀수 우주선이 지구를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미개한 종족에게는 하늘에서 온 구세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리는 있지만 동의하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면 좀 더 확실한 UFO에 대한 기록과 증거들이 있을 터다. 바닥에 그리는 의미 없어 보이는 그림을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봐야 하나?

단인들은 그 와중에도 뚜공을 외치며 양손을 치켜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도자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역시 이 표정은 옛 지구인을 꼭 닮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너희들이 와줘서 우리는 살았어! 우리는 떠날 거야!”

“떠나다니, 어디로?”

“하늘 위로! 하늘 위 □□와 □□로 갈 거야! 우린 간다! 바다 놈들은 평생 바다 밑에서 □□나 하래지! 우린 하늘 위 □□로 간다!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뚜공!”

“대체 그게 무슨…… 아, 좀 뚜공 그만 외쳐!”

나는 짜증이 나서 지도자의 털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어디로 간다는 건지 자세히 가르쳐줘!”

“우리가 이들을 데리고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부터 좀 지적해주십시오.”

부관이 옆에서 참견했으나 무시했다. 이들에게 그런 것까지 따지는 건 아무래도 심한 처사 같았다. 우릴 아마도 하늘에서 보낸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는 거 아닐까? 이들의 세계관이나 지적 능력을 감안하면 하늘에서 왔으면 당연히 자기들 편이고 자기들을 위해 온 거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우리 사는 세상은 땅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어.”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몸집이 작고 얼굴이 주름졌으며 털색이 옅은 단인이 있었다. 우리가 하늘에서 왔을 가능성을 처음 지적한 늙은이였다.

“땅의 주인은 우리고, 바다의 주인은 바다 놈들이야. 예로부터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우린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제야. 어머니는 하늘 위에서 왔어. 어머니는 두 형제에게 하나는 땅에서 살고 하나는 바다에서 살라고 했어. 언젠가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하늘로 돌아갔지.

오래 오래 살면서 형제는 점차 멀어졌어. 바다 애들은 땅 위도 갖고 싶었어. 하지만 우리는 바다 밑에서 살 수가 없어. 우리와 달리 바다 놈들은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살 수 있지. 바다 놈들은 힘도 세고 무기도 세. 이대로 가면 우리가 질 거야. 전부 죽고 땅을 빼앗길 거야.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왔어. 어머니가 우릴 데려가려고 우주선(혹은 큰 새)을 보낸 거야. 그래서 우린 기뻐하는 거지. 뚜공!”

나이 든 단인이 말을 마칠 때까지 주위의 모두가 말이 없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빨간 꽃을 꽂은 예쁜 아이가 그에게 달려가 다리에 매달렸다. 작게 속삭인 목소리는 아마도 “엄마”라고 부른 것 같았다.

침묵을 깨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부관이 무선으로 말을 걸었다.

“창세 설화나 신화 같은 걸까요?”

“신화엔 꽤 많은 진실이 담겨 있지. 우릴 바다에서 왔다고 의심했던 걸로 봐서 바다 밑에 산다는 종족과 꽤 닮았을 거야. 단인과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진화했겠지.”

“하지만 포유류가 금방 바다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하긴. 고래와 원숭이가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지만 몇 만 년은 걸린 일인데, 그 시절에 만든 전설이 여태까지 이어질 리가 없지. 에잇, 이럴 땐 옛날 지구 격언을 써먹어야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어.”

“지구인은 청각보다 시각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의미입니까?”

“틀린 건 아니지만…… 40점!”

“어떤 기준의 채점입니까?”

“보통 100점을 만점으로 하지.”

“그럼 낙제점이 아닙니까.”

“당연하지!”

기가 막힌 건지 죽은 건지 부관은 더 대꾸가 없었다.

“요지는 직접 보고 확인하자는 얘기야. 일단 얘들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인데……”

나는 비유적 표현으로 진땀을 흘리며─거듭 말하지만 소화기관도 없고 수랭식도 아니며 수소 연료를 쓰지도 않는 육체에 액체를 배출하는 불필요한 기능 따위를 추가할 이유가 없다─ 단인들에게 잠깐 바다를 보러 갔다 오겠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도망치거나 가면 다시는 안 올 거라 생각하고 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설득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부관의 활약이 보탬이 되었다. 과연 지구 격언을 또 쓰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설화에는 설화로 맞서자는 대책이었다.

우리가 땅의 주인을 선택했으니 바다의 주인이 이 사실을 알면 분노할 거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잘 설명해서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야 한다.

부관의 설득이 먹힌 덕에 겨우 에워싼 단인들에게서 벗어나 임라나에 탔다. 이착륙장 따위가 없어도 얼마든지 날아오를 수 있지만 경사진 석재 발사대 위에서 출발하니 어쩐지 더 운치 있고 장엄하게 느껴지긴 했다. 고대의 숨겨진 유적지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발굴되어 깨어난 우주선 같다고나 할까.

임라나는 즉시 가까운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어종은 풍부했다. 땅 위보다 더 많고 다양한 개체가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개체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다가 전파를 흡수하는 물의 성질 때문에 바다 밑에 산다는 지성체를 찾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 * * * *

우리의 우주선 임라나는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했다.

바다 속에서 약 20년 정도를 보내며 찾아다닌 끝에 희소식을 발견했다.

특정한 초음파 신호가 집중적으로 뿜어 나오는 위치를 잡아낸 것이다.

“목표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부관의 보고를 받은 즉시 추적을 명했다.

“이건 분명 인위적인 신호로군.”

“그렇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이루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해저에 꼭꼭 숨어 있었구나? 이러니 위에서 찾아도 안 보였지.”

바다 밑에서 산다면, 특히 이동을 한다면 해저의 지형이나 어군을 탐지하기 위한 초음파 소나는 필수일 거란 착상에서 탐지한 결과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태양력 20년을 오래 걸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는 표면의 90% 가까이가 물인 행성이다. 더구나 초음파 탐사라는 건 필연적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탐지함과 동시에 상대방에게도 이쪽의 존재가 발각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부관의 똑똑한 두뇌 속에는 음파를 굴절시키는 메타물질의 설계도가 들어 있지만 우주선 외피에 씌울 분량을 만들어낼 재료와 설비가 없었다. 애초에 임라나가 수중에서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든 우주선도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덕분에 우리─일은 조타수가 다 했고 나와 부관은 잠만 잤음─는 아주 주의 깊게 그리고 조심스레 이동하며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먼저 상대를 탐지하는데 성공했으니 길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무턱대고 돌아다녔다면 200년이 걸려도 못 찾을지도 모르며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먼저 들켜서 도망가게 만들거나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우리의 목표 상대는 거의 도시 규모의 거대한 원반형 물체로 대륙붕에 거의 붙은 상태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문명의 산물인 것으로 보였다.

문득 덩굴과 풀로 뒤덮인 단단한 건물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들이 그 건물의 주인, 바로 땅을 버리고 바다를 택한 종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육지에서 딱히 포악하고 위협적인 동물은 찾지 못했다. 육식동물이 있지만 다들 적절하게 먹이사슬을 유지할 정도의 분포였다. 단인처럼 덩치가 작은 종족도 사냥을 하면서 평화롭게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대륙에는 도시를 이루고 살 만한 비옥한 땅이 남아돌았다. 대체 왜?

우리는 일단 임라나를 해저동굴에 잘 숨겨놓고 다른 육체를 골라 입고 나왔다. 다리 대신 커다란 꼬리지느러미가, 팔 대신 펼치고 접을 수 있는 지느러미 막이 달렸다.

단인들의 먼 친척이 바다 밑에서 살 수 있는 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거대한 도시였다. 반구형 잠수함이 사방으로 가늘고 흐린 빛줄기를 뿌려대며 해저 밑바닥을 유유히 훑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릇을 뒤집어놓은 듯한 외형을 보면 잠수함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대로 물에 가라앉은 원반형 우주선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상부 곳곳에 난 투명한 창문 밖으로 빛이 새어나왔다. 아마도 하층부에서 기계 설비나 별도의 도구를 해저로 이어서 광물이나 가스 등의 자원을 채취하고 상부가 거주공간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우리는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최대한 접근했다. 가까운 창문 근처로 이동하며 슬쩍 들여다보았다. 내부에는 발전한 문명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건물, 다양한 높이로 뻗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 늘 어둠만이 존재하는 해저에서 펼쳐지는 영원한 야경이었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부관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예? 당연히 저들과 접촉을 시도하실 줄 알았는데요. 문명과의 조우를 누구보다 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조우는 민폐일 뿐이야.”

“그럼 단인들은요?”

“걔들은 문명이나 종족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미개하니까 상관이 없지. 우리가 동식물을 관찰할 때 양해를 구하거나 허락을 받진 않잖아.”

“여기 바다 밑에서 고등문명을 이룬 종족은 우리를, 아울러 은하 연방과의 교류를 원하지 않을 거란 말씀입니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우리는 지느러미를 저으며 임라나로 돌아갔다.

“저들은 자기네 보금자리 속에서 충분히 안락하게 살고 있어. 땅 위를 버린 것도 그래서겠지. 땅 위에서 산다면 과거 조상들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선장님 종족의 최후 말이군요.”

탐욕과 이기심에 똘똘 뭉쳤던 고대 인류. 핵무기를 쌓아놓고 서로 겁만 주고 눈치만 보다가 결국 죄 없는 이들까지 끌어들여 다함께 사이좋게 사라진 어리석은 자들.

“이것도 내 추측이지만 도시의 외양이나 엔진을 보니 원래 목적은 우주선인 것 같아.”

“저도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도시 규모의 인구를 싣고 지구를 떠나기 위해 만들었겠지. 실제로 한 번 떠났다가 돌아온 걸지도 몰라.”

단인들의 설화에선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그의 아이 하나는 땅에서, 하나는 바다 밑으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살 만한 행성을 못 찾았나봐. 지구가 그리워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돌아왔는데 의견이 갈린 모양이야. 예전처럼 땅에서 살 것이냐 바다 밑으로 내려갈 것이냐.”

“그래서 땅에 남은 이들의 후손이 지금의 단인이다, 이건가요?”

“설화가 맞다면. 지식과 문명이 단절된 걸 봐서 그들은 사라졌고 단인은 전혀 다른 종족일지도 모르지만.”

버려진 도시의 광경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저들이 땅과 바다로 갈라진 건 머나먼 2만 년 전의 일. 무슨 비극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땅을 선택한 이들의 문명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해저도시 속의 인물들은 단인들과 닮았지만 다르게 생겼던 것이다. 진화의 갈래가 길어졌던 결과인지 여우를 닮은 얼굴에 키가 훤칠하고 털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짧아졌다.

더 자세한 사실을 알려면 우리 둘 가지고는 무리였다. 연방에서 대규모의 조사대를 파견해야 할 일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신경을 써줄 리가 없지.

우린 그저 짧은 휴가를 받아서 온 관광객에 불과했다. 1억 년 동안 벌어진 지구 문명의 흥망성쇠는 알아낼 방법도 능력도 시간도 없다. 비록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시간도 촉박하니 잘 되었군요. 바다 밑 문명이 흥미롭긴 합니다만 저들과 교류하다간 휴가기간이 모자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지구 시간으로 열흘 안에는 돌아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거든요.”

“문제가 하나 남아 있어.”

부관이 다음 말을 기다리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지구인의 행동 양식을 너무 잘 배운다. 나도 지구인답게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긁으면서 투덜댔다.

“단인들을 어떻게 속이고 달아나느냐지!”

“고민할 게 있습니까? 이대로 그냥 가면 되죠.”

“야, 말도 안 돼. 그랬다가 우린 저들의 전설 속에서 사기꾼 외계인으로 남을 거 아냐. 그런 불명예가 또 어디 있겠어?!”

“어차피 우리가 지구에 또 온다고 해도 몇 억 년 후일 겁니다. 그때쯤에는 전혀 다른 종족이 다른 창세 신화를 기억하고 있겠죠.”

“그래도 안 돼. 내가 명색이 이 별에 살았던 종족의 후예고, 족보를 따지면 단인들의 먼 조상인데 그런 안 좋은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이왕이면 좋은 추억으로…… 음…… 내가 구세주라고 주장했다가 네가 날 십자가에 매다는 건 어떨까. 난 며칠 있다가 부활해서 우주선 타고 떠나고. 어때?”

“단인들의 지성으로도 그런 허술한 연극에는 안 넘어갈 것 같군요.”

“무시하냐?! 이게 우리 때는 2000년도 넘게 통한 수법이라고.”

“선장님 동족이 멸망한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열 받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 그 점이 더 화가 난단 말이야!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로 임라나를 다시 발사대 위에 얹고 이전 육체로 갈아입은 다음 내려왔다. 근처에서 교대로 망을 보던 단인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마을로 뛰어가 다시 주민 전체를 데리고 돌아왔다.

솔직히 그놈이 그놈이었다. 20년이 흘렀다고 하지만 사는 모습도 생김새도 그대로였다. 조금의 발전도 없는 미개한 종족 같으니. 속으로 무시하다가 한 가지 섬뜩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 녀석들 평균수명이 몇 살이지?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20년 사이에 세대교체가 되어서 우릴 처음 보는 놈들만 남아 있는 거라면 그 전에 힘겹게 했던 의사소통이 모두 말짱 꽝이 되어버리고 말 상황이었다.

단인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 뚜공을 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우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부관도 비슷한 의견을 전해왔다.

“몇몇 개체를 식별할 수 있겠습니다만, 젊은이가 노인이 될 정도의 노화를 겪었군요. 아마도 평균수명은 태양력으로 30세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그럼 지도자가 바뀌었겠네.”

마침 내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지도자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가로막았던 인파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난 듯이 좌우로 물러나며 그에게 길을 틔워주었다.

새로운 지도자는 이전에 본 덩치 크고 심술궂은 아줌마와 딴판이었다. 지팡이, 화려한 옷, 많은 장신구 같은 복식은 동일했으나 더 작고 날씬하며 젊었다. 단인의 미인 기준을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내게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지도자는 우릴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편하고 부담없는 태도라서 내 마음도 한결 놓였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다.

“우릴 알아? 이전 지도자에게서 들었던 모양이지?”

“넌 나를 잊어버렸어?”

지도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으로 한 아이를 불렀다. 키가 지도자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앞으로 달려와 눈망울을 빚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만 빌릴게.”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에 꽂혀 있던 꽃을 꺼내더니 자신의 귀 옆에 꽂더니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 빨간 꽃…… 그렇다. 이 아이는 우리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을 필요도 없이.

우리야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난 셈이니 어제 일처럼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단인들에게는 자기 삶의 절반 이상이 지난 긴 세월이 흘러 재회한 셈이었다.

“우리는 너희를 기다렸어. 아주 오래오래. 우릴 속이고 도망갔다고 비난한 어른들도 있었어. 하지만 엄마와 나는 너희를 믿고 기다렸어. 엄마도 너희를 욕한 이들도 지금은 죽고 없어. 나와 아이들은 모두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지.”

감격과 회한에 젖은 목소리라고 말한다면 의인화와 감정이입이 지나친 걸까. 지도자가 된 아이는 그 시절과 똑같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더 가까이 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우리를 데리고 가줘! 다 같이 어머니의 나라로 가자!”

내게는 적잖게 난처한 상황이었다. 부관은 살짝 떨어져서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고. 저 녀석은 이럴 때 좀 도와줄 것이지 자기만 쏙 빠져서 남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냐.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희들에게 미안한 말을 해야겠다.

바다 밑 사람들을 보고 왔는데 너희보다 더 똑똑하고 힘도 셌어. 어머니는 바다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셨지. 하지만 바다 사람은 하늘로 가고 싶지 않았어. 바다 밑에서 사는 게 좋다고 말했어.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어봤더니 ‘너희들이 바다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강해지면 그때 데려가야겠다’, 라고 말했지.”

아, 이들은 미개한 만큼이나 순박하구나. 낯선 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일 정도로. 지도자를 비롯한 단인들의 얼굴에 배어나오는 슬픔, 안타까움, 애석함이 그 증거였다. 감정의 표현이 어찌나 절절한지 말하는 내 마음도 슬퍼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말을 해야만 했다. 단인들을 위해서. 땅의 진짜 주인이 될 이들을 위해서.

“바다 사람들은 바다 밑에서도 숨을 쉬고 집을 짓고 살아가는데 너희들은 땅 위에서 뭘 하고 있어? 외양간에 쌓인 똥을 마른 풀과 섞어서 모아뒀다가 밭에 뿌리면 작물이 잘 자란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무슨 농사를 짓는다는 거야? 너희들은 어리석어. 땅의 주인이라 말할 능력이 없어. 그래놓고 하늘로 돌아가려 한다니─적절한 어휘를 찾기 힘들어서 잠시 망설였다─…… 나쁜 놈이야. 어리석은 놈이야.

너희들은 더 똑똑해져야 해. 더 강해져야 돼. 그래야 어머니 마음에 들 수 있어.

내일의 내일의 내일, 너희들이 산처럼 큰 집을 짓고 새보다 빨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 우리가 다시 올 거야. 그때는 아마 너희가 스스로의 힘으로 훨씬 큰 배를 타고 우리를 찾아올 수 있겠지. 그날 다시 만나자.”

말을 마친 나는 과감히 몸을 돌렸다. 지도자가 팔을 붙잡았으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과감히 뿌리치려 하는데 지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만나, 뚜공.”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반갑고 기쁠 때 하는 말이 아니었어? 뚜공이라니……”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꼭 말해주고 싶어서. 잘 가. 뚜공!”

주민들은 지도자를 따라 뚜공을 외쳤다. 이전처럼 시끄럽지는 않았다.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고, 정겨운 인사였다.

이제야 나는 뚜공이라는 낱말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확히는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진 셈이었다. 하나의 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면서, 뚜공은 이들과 나를 이어주는 약속의 말이 되었다.

“그럼 모두 잘 있어, 뚜공!”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부관을 따라 임라나에 올랐다. 우렁찬 소리도 자욱한 연기도 없이 임라나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래도 저들에게는 평생 못 잊을 인상적이고 웅장한 광경임이 틀림없다.

이제 저들은 대대로 후손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언젠가 발명할 글자를 적으며 이 기억을 남겨 주리라. 더 현명해진 단인의 후예는 우리 고대 지구인이 벌였던 추악하고 어리석인 행태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언젠가 연방의 도시에서 저들의 후손과 재회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겠지.

“실은 말이죠. 몇 만 년 전에 당신 조상에게 가르침을 준 게 접니다.”

“아, 그랬나요! 덕분에 저희는 고도의 문명을 이루면서도 높은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연방의 일원으로 지구가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당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조상님.”

“아유, 뭘 그렇게까지 추켜세우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하하하……”

……물론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이뤄질 리는 없겠지만.

꿈이야 내 마음대로 꾸어도 되는 거잖아?

그때 버전 1.0으로 완성된 지구어 번역기가 마지막 낱말을 확정했음을 알려왔다.


뚜공
【감탄사】 만나서 반가울 때, 헤어질 때 또 만나자며 인사로 하는 말.


부관이 문득 침묵을 깨고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같은 말을 한다니, 특이하군요.”

“넌 모르겠지만 있어. 나 살던 지구에도 그런 인사 있었어.”

“그랬나요? 아무튼 괜찮은 인사말입니다. 효율적이기도 하고요.”

“넌 이런 때에도 효율 찾고 앉았냐…….”

“그럼 이제 가속하겠습니다.”

“잠깐만! 마지막으로 지구 모습을 한 번 더 볼래.”

이미 실제 배율로 지구는 콩알처럼 작게 보였다. 나는 모니터에 확대 표시한 지구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뚜공.”

“뚜공.”

부관도 나를 따라 말하고는 가속했다. 우리는 조타수의 자동 조종에 임라나를 맡기고 즉시 수면에 들어갔다.

의식을 셧다운하기 직전에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사전에 임의로 뜻을 한 줄 더 붙이는 것이다.

결국 이름을 묻지 못해서 모른 채로 남은 털복숭이 열매의 이름을 ‘뚜공’으로 짓기로 결심했다. 삼키는 척만 하고 목구멍에 남아 있던 열매 세 개는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꺼내어 냉동된 채 임라나의 창고에 잘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돌아가서 분석해볼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현재 지구 아이들이 즐겨 먹는 간식이 아닌가. 어떤 성분인지, 당도는 높은지 궁금했다. 이왕이면 재배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먹을 순 없어도 장식 식물은 될 테니까. 어쨌든 소중히 다뤄야만 한다.

그 작은 열매는 우리가 유일하게 가져온 기념품, 지구에서 가장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서 받은 선물인 것이다.


(2014.11.18.)


시리즈 정보는 공식 사이트에서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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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6.02.14 02:54 댓글

    계속 생각했는데, 계속 생각난다는 점에서 정말 재미있는 제목이에요. 아 이 시리즈 재밌는걸 하는 순간 시리즈 정보 링크가 붙어있어서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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