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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가지 못한 길

2005.04.29 19:3704.29

  나무들 틈 사이로 햇살이 마지막 손을 내밀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창백한 햇살이 숲에 잠시 머물다 가는 앙상한 겨울이었다.
  메르다는 셀 수 없이 다녔던 길에 다시 한 번 발을 내디뎠다. 이번 겨울에만 오늘로 벌써 열흘째 나서는 산책이었다. 꽤 오래 걸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도, 오늘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도. 산책 시간을 점점 늘려 가면서 아이들에게 자신이 없는 시간을 미리 경험하게 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메르다 자신이 이 길을 계속해서 걷고 싶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떠오른, 말발굽으로 다져진 너른 길. 샘을 끼고 숲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그 길은 메르다가 가지 못한 길을 떠올리게 했다. 영영 손에 닿지 않는 게 당연했지만, 어쩌면 손을 뻗었다면 따라갈 수 있었을 그 길을.
  나무들은 앙상하지만 곧았다. 메르다는 이젠 체념으로 변한 눈길을 주위로 돌리며 계속 걸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열여덟 살짜리 처녀는 이제 일흔 살도 넘어 아들과 손주를 포함한 대가족을 거느린 노파가 되어 버렸지만, 나무들은 그다지 자란 것 같지도 않았다. 모든 게 변한 게 없는데 홀로 오도카니 남은 듯한 기분이 들어 잠깐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이 크게 날뛰었다.
  단 한 번 그렇게 경고처럼 날뛴 후 다시 가라앉았지만 메르다는 이번 겨울이 다가올 때 함께 스며든 통찰을 떠올렸다. 나는 내년 봄을 맞지 못할 거야.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만약 죽는다면, 이대로 죽는다면 꼭 다시 보고 싶은 곳이,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파파냐,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부탁한 일이 내 일생을 이렇게나 잡아먹을 줄. 우슬라 할머니, 당신은 알았겠지요? 진실된 키스와 포옹이란 말이 가지는 양날을. 에밀리오, 너도 알고 있었어? 언제나 넌 내가 네 거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마음을 준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를 잊지 못한다는 것을.
  샘을 보았을 때 메르다는 탁 맥이 풀리는 듯했다. 역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얕았던 저 수심이라든가, 수풀과 덤불 너머로 이어진 곧은 길이라든가. 메르다는 익숙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으니 유일하게 변한 자신의 육체 또한 변하지 않아 그때 그곳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막막한 기분으로 숲을 찾아와서 이 나무 밑에 옷을 벗어 두고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갔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멀리에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렸었다…….
  메르다는 눈을 떴다. 눈을 비볐다. 상상 속의 소리가 아니었다. 상상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커멓고 챙이 큰 모자를 눌러 쓰고 말 위에 올라탄 늘씬한 남자의 형체가 나무 사이로 보였다. 그때는 질주하다가 메르다의 기척을 느끼고 홱 방향을 돌려 다가왔었다. 지금은 샘을 향해 똑바로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누구냐고 차갑게 묻기부터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말에서 내려 모자를 벗고 앞에 와서 메르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메르다는 그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그의 모습에 그때와 똑같은 말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누구세요……?"

  검은 망토에 검은 모자에 검은 채찍으로 검정 일색으로 갖춰 입은 그림자 같은 그 남자는 대답 대신 채찍 든 손을 들어 올렸다. 힘껏 내리치는 손길에 물방울이 요란하게 튀었다. 아무 표정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내 영지에서 나가. 당장."
  "영주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메르다가 찾던 그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보다 실제는 더 나빴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에게 도대체 무엇으로 호소해야 할지 메르다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영주님, 제발 내쫓지 마세요. 저는 더 갈 데가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바치겠어요."
  "네가 가진 것 중에는 내게 딱히 필요한 게 없어 보이는데."

  여전히 낮고 딱딱하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 마을의 천민들도 창녀는 필요할 테니."

  감정 없는 목소리와 배려 없는 내용 때문에 메르다의 속에 불이 붙었다. 그런 취급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뒤틀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물러설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무모해졌다.

  "당신에게는 필요 없단 말씀이신가요? 필요한 게 없으신가요, 아니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시나요?"

  잠깐 어이 없다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메르다도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있고 무엇인지도 알지만, 네가 그걸 내게 줄 수 있을가?"
  "무엇인지 저는 모르니 지금은 드릴 수가 없지요."
  "알면 줄 수 있다는 거냐?"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느껴졌다. 비웃음.

  "뭔지 알려 주시면 드릴 수 있는지 말씀드리지요."

  메르다의 말에 그는 얼굴을 들어 보라고 했다. 밖으로 나오라고도 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온 메르다의 허리를 안아 눈깜짝할 사이에 자기 앞에 앉혔다.

  "시험해 보지."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달렸다. 메르다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안아 올릴 때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그의 코와 입술과 턱에, 그때 풍긴 은은한 향기와 남자의 냄새에 잠시 아찔해졌다…….





  "이런. 그 사이에 이름도 잊어버린 거야? 허락하지 않아도 잘도 아드리안 아드리안 하고 부르더니."
  "그럴 리가요, 아드리안……."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메르다의 목소리는 일흔 살 노파가 아니라 그때의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된다. 싱긋이 웃는 그의 얼굴이 그때로부터 얼마 안 지난 것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앞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 숲에서 혼자만 나이를 먹고 변한 것 같은 메르다를 그가 다시 그때로 되돌려 주었다.

  "그 사이에라고 하기엔 난 너무 늙어 버렸지만요. 그래도 잊을 만한 이름은 아니지요."

  웃으며 메르다를 보는 그의 얼굴은 예전과 같지는 않다. 그 창백한 피부와 푸르고 깊은 눈, 흑단처럼 검은 머리는 어디 가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남은 희미한 상처. 메르다는 놀라서 그 상처로 손을 뻗는다.




  메르다의 손에 그가 안겨 준 것은 망토와 장갑이었다. 그가 데려간 성은 돌보는 이 없고 거하는 이 없는 을씨년스러운 곳, 버려진 곳이었다. 가뜩이나 젖은 알몸으로 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온 메르다에게는 너무 황량하고 추운 곳이었다. 집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커다란 성, 화려한 홀이었지만 잡초와 거미줄만은 아주 친숙했다. 메르다는 자기 손에 쥐어진 망토를 보았다.

  "걸쳐도 되나요?"
  "나중에 다려 둬."

  '필요한 게 하녀인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궁얼거릴 뻔했지만 메르다는 얌전하게 대답하고 그 망토를 몸에 둘렀다. 안 그러면 바람에 빳빳하게 마르고, 그가 얹었던 손에 빨갛게 물들고, 어두운 밤에 빛나는 야수의 눈동자에 파랗게 질린 몸이 견디질 못할 것 같았다.

  "식사는 오후 4시쯤에 한다."
  "제가 준비하나요?"
  "그럼 내가 준비할 줄 알았냐?"

  그는 무척 키가 컸다. 발돋움을 해도 메르다가 그 턱에 닿을까 말까 했다. 모자를 소파에 벗어 던진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자 처음으로 맨 얼굴이 다 보였다. 창백한 피부, 푸르고 깊은 눈, 흑단처럼 검은 머리, 늘씬하고 탄탄한, 완벽한 육체, 그리고 귀족만이 가질 수 있는 품위. 메르다가 이제까지 만나고 목격한 어떤 남자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 공기는 섬뜩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메르다."
  "너, 알아둘 게 있다."
  "네...?"
  "세 가지 규칙이다. 첫째, 질문하지 마. 둘째. 시끄럽게 굴지 마. 소음은 싫다. 셋째, 내 침실에는 들어오지 마."

  뭐라고 대꾸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한 규칙이었다. 그나마 봐줄 수 있는 부분은 그의 말투만큼이나 간소하고 명료한 규칙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는 메르다를 무시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 규칙을 지킨다면 사흘 정도는 시험해 보지. 사흘 내에, 네가 내가 원하는 걸 줄 만한 계집인지 답이 안 나온다면 내쫓을 것이고, 규칙을 어긴다면 그전에라도 내쫓는다. 그럼 난 잘 테니까, 늦지 않게 식사 준비해 둬."
  "영주님 성함은……."
  "영주님이면 충분해."

  우물거리는 메르다의 목소리를 자르고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간 그가 2층 어딘가에 있는 듯한 방에 들어가며 묵직한 문을 닫는 듯한 소리가 조금 후에 들렸다. 그리고 고요만이 남았다. 메르다는 그 침묵에 시위하듯이 중얼거렸다.

  "원하는 게 하녀나 요리사라면 절대 못 주는데. 파파냐, 우슬라, 나 어떻게 해요."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메르다는 철저히 혼자였다. 메르다가 속한 집시 무리의 지도자인 파파냐는 메르다만 믿고 있었다. 조산을 하고 탈진해 누워 있는 에스테라와 갓난아기를 위해서 이 근처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생기긴 했지만 괴팍하기 그지없는 저 영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비천한 집시 무리가 당신의 영지 구석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해 달라고 해야 했다. 파파냐는 물론 경고해 주었었다. 수도에 영지가 있는 큰 귀족님인데 이상하게 1년 정도 전부터 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내려와 있고, 온 날 바로 고용인을 모조리 내쫓고 혼자서 살고 있다고, 새벽에 말을 타고 숲을 질주하는 것 말고는 외출도 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메르다가 꼭두새벽부터 숲에 가서 알몸으로 목욕을 했던 이유였다. 정신이 반쯤 나간 우슬라 할머니가 한 말이 머리 뒤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흘러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아기는 죽을 거야. 에스테라도. 아주 추워. 모두가 그 뒤를 따라가게 될 거야. 네가 그걸 얻지 못하면. 축복의 아이가 그 남자의 진실한 키스와 포옹을 받지 못하면……. 사흘 안에."

  안 돼.
  메르다는 고개를 떨군다.






  "어디서 다쳤어요, 이건?"

  메르다는 그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가 그런 메르다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글쎄. 기억 안 나. 어디였는지는."
  "뭐가 이렇게 해 놨어요?"
  "늑대인간. ...... 이라고 말하면 믿어 주겠어?"
  "괜찮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안 괜찮겠지."
  "험한 일 하고 돌아다닌 거예요?"

  메르다는 질문 공세를 퍼부으면서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지금 그가 말했던 제1 규칙을 계속 어기고 있어.
  그래도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메르다의 옆에 앉았다. 노파가 아닌 것처럼, 그 옛날의 메르다를 다시 만난 것처럼 어깨를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늦게 왔어요. 할 얘기가 이렇게 밀릴 때까지 안 오고."
  "그럼 제일 좋았던 것만 말해 봐. 제일 재미있었던 거라든가."

  메르다는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이 모든 게 꿈 같았다. 내년 봄을 맞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아니면 죽는다면 이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무 옆에 앉아 눈을 감았던 그 순간 잠이 들거나 죽어 버려서 가장 바랐던 얼굴을 마주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시기에 그가 샘가에 있는 메르다에게로 올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현실이라면 메르다는 자기 별명인 축복의 아이란 말에 처음으로, 정말로 감사해야 할 터였다. 이 순간에 그를 여기로 데려다준 우연에도.

  "아무래도 내게 허락된 최대 축복은 이것 같으니까, 늦기 전에 이 말부터."

  그 말에 그가 웃었다.

  "질문이라곤 허락하지도 않는 주제에 곤란한 질문만 해 대는 어떤 남자랑 지낸 사흘이 제일 좋았어요. 이건 우리 아들 내외한텐 비밀……."





  "질문이냐?"

  그가 매서운 눈을 들어 물었다. 메르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푸념이에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절반 넘게 진실이었다. 알몸으로 온 게 끝내 잘못되어서 열이 오른 것까지는 좋다. 아니, 그것도 금방이라도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아팠지만 필사적으로 버틴 것이었다. 그래도 버텼으니까 결과적으로는 괜찮다. 그 뒤에 그나마 평소에 잘하지도 못하던 음식을 비장하게 실패해 버린 것도 괜찮았다. 한 잠도 못 자고 열이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할 짓은 아니긴 했지만 오후 4시까지 다시 한 번 음식을 할 만한 시간은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결과적으로 훌륭한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괜찮다. 그러나 왜 열이 나는지, 그러게 왜 겨울도 다 된 때에 알몸으로 목욕했는지, 뭘 찾느라 거기서 헤맸는지... 주욱 연쇄적으로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바보같이 모든 걸 솔직하게 불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지에서 겨울을 나게 하는 건 못해 준다는 말을 듣고서 막막해서 훌쩍거리니까 울면 집어던져 버리겠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여자한테 언제나 이렇게 대하냐는 원망 어린 질문 또는 푸념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대답을 들었으니 돌아가려면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지만 사흘 동안 시험해 본다는 게 끝나기 전에는 희망조차 버릴 수 없었다.

  "사흘이라는 건 내게 필요한 시간이지. 하지만 사흘이 지난다고 해도 네 부탁을 들어 줄 순 없어. 혹시 모르지, 시험 결과에 따라서는. 하지만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데, 그래도 해 보겠어?"
  "하겠어요."

  그가 다시 식기에서 손을 떼고 메르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 몸 상태를 보니 사흘 내내 앓고만 있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보이는군. 많이 아프냐?”
  “아까는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이리 와.”

  많이 아프냐거나 이리 오라거나 하는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열에 들떠서 얌전한 학생처럼 그의 앞에 가서 서는 메르다도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훤칠한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메르다의 이마에 반듯한 이마를 댔을 때, 메르다는 열에 들뜬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아, 시원해라…….”

  그가 맞댄 부분이 이마에서 뺨으로, 목덜미로 옮겨 가더니 어느 순간 그가 메르다의 허리를 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양이가 인간 손바닥에 부비적대듯이 메르다에게 비벼 오는 그의 몸이 서늘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몸을 밀착시킬 때 으레 느껴지는 음란한 부분이 그에게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체온을 즐기는 듯한 몸짓이 메르다에겐 생소했다.

  “체온이 낮으신 걸까…….”
  “그런 편이지.”

  열에 들뜬 머릿속으로 생각이 두서없이 지나갔다.
  왜 이렇게 몸이 차가울까? 차가워서 열이 들끓는 내 몸을 반가워하는 걸까? 그의 진실된 키스와 포옹…… 시원하다, 이 옷만 없으면 더 시원하게 맞댈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뜻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따뜻한 게 필요한 사람이지 않을까?
  메르다의 손이 옷자락을 만지작거릴 때에도 개의치 않고 열을 즐기던 그가, 메르다의 손이 목으로 옮겨 가자 잠깐 몸이 굳었다. 열에 들뜬 와중에도 이상해서 메르다가 고개를 들자 그가 메르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묻자.”

  질문을 금지시킨 주제에.

  “네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지? 너희 같은 비천한 유랑의 족속에게?”

  열기 속에서 메르다는 둥둥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 추처럼 메르다를 눌렀다.

  “글쎄요, 태어났으니 산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나는 삶이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분명 비천한 유랑의 족속이라 겪는 어려움과 설움에 언제나 아파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 살고, 아이를 낳아서 물려 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거죠. 춤추고 노래할 때는 더욱…….”

  또렷하지 못하게 웅얼거리면서 메르다는 속으로 웃었다. 이런 포즈로 이렇게 밀착해 있으면서 이런 걸 묻는 그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고분고분 길게 답하는 자신도 이상했다. 아마도 서늘한 체온과 고저가 없는 목소리를 가진 그가 이렇듯 질문하는 것이 심상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몸을 팔아서라도 유지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삶이냐?”
  “안 그래 보이나요?”
  “질문은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으응…… 미안해요.”

  순순하긴 하지만 너무 격식 없는 말투라고 해도 할 말 없었다.

  “내게는 내 목숨만 걸려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정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부양 가족이 있나?”
  “말했잖아요, 아까.”
  “네가 다 책임져야 하느냐는 말이다.”
  “사실상으로는 그런 것 같아요. 적어도 내가 없으면 그들은 하나씩 얼어 죽고 굶어 죽을 테죠.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내 언니도, 그 갓난 아기도…….”

  ‘아기는 죽을 거야. 에스테라도. 아주 추워. 모두가 그 뒤를 따라가게 될 거야. 네가 그걸 얻지 못하면. 축복의 아이가 그 남자의 진실한 키스와 포옹을 받지 못하면……. 사흘 안에.’

  “그런들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네가 있더라도 늙은 자와 병든 자는 죽기 마련 아닌가.”

  일부러 그러는 듯이, 화를 돋우듯이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버림받고 아무 보살핌 없이 죽는 것과, 당신이 떠나면 슬퍼할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손을 잡을 때 죽는 게 같을 리 없잖아요.”
  “같아. 어차피 죽으면 다 똑같아.”
  “같지 않아요.”
  “행복하게 보살핌받으면서 죽은 자의 시체는 썩지 않던가?”

  도대체 좋은 집안에서 난 데다 스스로도 잘나기까지 한 그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괴팍한 이유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기행을 벌이는 이유는 단지 모든 것을 손에 쥔 자가 느끼는 사치스러운 회의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더할 나위 없이 냉소적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메르다는 문득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그는 목소리만큼, 말하는 내용만큼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을 식힐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열이 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가 상처 입어서 그런 말을 뱉는 거라면 완벽하게 심중을 숨기진 못했다고 하고 싶었고, 그런 게 아니라면 메르다는 그에게 이상한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메르다는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그가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밀어내는 건 느껴지지 않았다. 메르다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입술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그가 조금씩 메르다의 부름에 답하기 시작했다. 점점 깊은 입맞춤을 나누면서 그가 메르다의 허리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어느 틈엔가 그는 다시 앉아 있었다.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서늘한 그의 몸은 도를 넘어 차갑기까지 했지만 메르다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그는 메르다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게 대답인가? 대답 치고는 엉뚱한데.”
  “죽음 이후가 모두 같다면 삶도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 행복하게 보살핌받은 시체도 썩겠지요. 하지만 옆에서 보살핀 사람 마음에서는 썩지 않아요.”
  “알 수가 없군. 넌 삶을 사랑하는 거냐,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탕녀인 거냐?”

  그는 여전히 진지하게 물었다. 성인이 할 법한 소리를 하면서 입을 맞춰 오는 메르다가 웃기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바로 메르다도 자기 행동에 대해 느낀 바였다. 그러나 메르다는 다시 충동적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그 창백한 뺨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는 탕녀라고 나를 비난하는 자들은 말할 테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과연 나만큼 삶을 사랑하는지 나는 언제나 궁금했어요.”

  그것은 진실이었다. 메르다는 언제나 자신에게 돈을 주고 몸을 사는 이들이, 그러면서도 천하다고 하는 이들과 삶에 대한 애정도를 겨뤄야 한다면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잘것없는 돈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 맞아 주는 가족의 걱정을 알까? 춤추고 노래할 때 모든 걸 잊는 기분을 알까?

  “그럼 죽음은? 넌 죽음은 증오하겠군?”
  “삶을 사랑한다면 죽음 또한 사랑해야겠지요.”
  “죽음에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나?”
  “삶을 끊는, 끝을 내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또 질문.”
  “아, 질문…….”

  질문을 하지 않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메르다에게는. 정말이지 자기는 이상한 질문만 퍼붓는 주제에 남에게는 이것저것 바라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술에 취하듯이 들뜬 기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자꾸 묻는 어린애 같은 이 남자에게 대답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안식이고 삶의 또 다른 얼굴이며 다시 삶을 준비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나는. 집시 카드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카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럼…….”

  그가 메르다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만약 지금 네게 그 ‘죽음’이 찾아온다면, 넌 기꺼이 그걸 맞이하겠어?”
  “조금은 슬프겠지요.”
  “조금이라?”
  “나는 다른 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여기 왔는데…… 그걸 주지 못하고 가야 한다면 슬프겠지요.”

  에스테라. 그리고 아가야.

  “그러면 반대로 영원한 생명이 찾아온다면? 그건 또 어떨까?”
  “영원한 생명…….”

  그 말을 내뱉기 전에 그가 잠깐, 아주 잠깐 망설였던 것 같았다.

  “음, 그다지 반길 일 같진 않은데……요.”
  “왜?”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니까. ……그런데 영원한 젊음이 보장된 영원한 생명인가요?”

  왠지 어떤 마녀의 이야기 중에서 영원한 생명은 받았지만 젊음을 얻지 못해 점점 늙어서 작아지는 마녀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메르다는 물었다. 그는 그 질문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젊기만 하다면 괜찮다는 뜻인가?”
  “조금 낫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메르다는 열심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약간 흔들리는 걸 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더 낫지 못할까.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문다는 건 외롭고…… 괴로울 것 같은데. 아!”

  그가 메르다를 품에서 홱 밀어냈다. 식사는 내일 같은 시간에 하겠다고 하고는 올라가 버렸다. 삶, 죽음, 영원한 생명, 그리고 밀어내기……. 무언가 희미하게 메르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피로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2년인가 있다가 파파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는데. 건강하셨거든요. 우슬라 할머니라고, 점을 치던 할머니는 나이도 더 많고 몸도 더 약했는데도 조금 더 오래 사셨어요. 어쩌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요…… 워낙 파란만장하게 사셔서 쉽게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파파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연장자인 카롤 아저씨가 지도자가 되었는데, 원래 그분이 내성적인 편이었어요. 그래서 실무는 젊은 사람이 맡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와 에밀리오가 후보가 되었죠. 에스테라 언니는 몸이 약하고 역시 나서는 거 좋아하지 않고, 잠파노는 머리 쓰는 일은 포기했고, 레니아와 스테파니는 막내들이고…… 에밀리오가 나랑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지만 않았으면 양보했을 텐데,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에밀리오가 그 후에 나가 버리겠다고 그래서 말리는 데 꽤 애먹었어요.
  조심했는데, 그래도 어쩌다 보니 임신하게 되더군요. 당신이 떠난 이후에는 결혼도, 임신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상하지요, 내 가족과 내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것과 같은 삶을 택했으면서도 그런 작은 부분에서 고집을 부렸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안 되는 일에 바둥거렸던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애를 낳았더니 아들이고 해서 당신 이름을 붙여 버렸지요.“

  소녀처럼 조잘거리던 메르다는 이때 그의 얼굴을 일부러 쳐다보았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마주 보았다. 약간 그 모습이 짖궂어 보이기도 했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 한 번 보러 왔었지요? 아드리안이 여섯 살 되던 해 겨울에 말이에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아드리안이 아드리안에게서 받았다고 하면서 단검을 들고 들어왔을 때……. 말을 몰고 달려가서 텅 빈 숲을 보고는 다리 힘이 빠졌었어요. 아드리안에게 ‘축복의 아이에게’ 주는 단검을 들려 보냈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쩌면 마음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다시 오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래도 다시 새벽이 올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다시 보고 싶어서. 화난 얼굴이라도, 무표정한 얼굴이라도, 그저 다시 보고 싶어서.”





  “뭘 봤어?”

  그가 장갑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메르다는 그의 분노가 앞으로 확 다가서는 바람에 잠시 머리가 굳었다. 그러니까 나는 1층 응접실을 청소하고 있었고, 그 방에는…….

  “초상화요?”
  “그래! 생쥐처럼 뭘 뒤지고 있었느냐고!”

  그가 메르다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어제도 푸념한 바지만 이 남자는 여자라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처벌에 예외가 없는 듯했다. 메르다는 잠깐 자신이 한 일을 돌아보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모처럼 보는 멋진 성에 거미줄 쳐진 게 안타까워서 청소를 한 게 전부였다. 물론 손님을 맞는 방으로 보였던 거기에 나디스디 공작가의 역대 공작과 공작 부인 초상화가 주욱 걸려 있어서 그걸 유심히 보긴 했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아드리안이라는 것, 나이가 25살이라는 것, 그의 생모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고 거기 달렸어야 할 패찰은 깨져 있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얻은 부수입일 뿐이었다. 그래서 메르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쥐처럼 뒤지다뇨, 지저분한 방 청소한 것뿐이에요.”
  “누가 치우라고 했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하지 말라는 일만 하는 이유가 뭐야?”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망토를 벗어서 역시 옆으로 패대기쳤다. 어제 메르다가 걸쳤다가 다리지 못한 그 망토였다.

  “에, 망토는 잊어버려서 죄송해요. 일어나자마자 찾았는데 이미 갖고 나가셨더라고요.”
  “잘도 조잘조잘. 죄송하다고 말은 하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군.”
  “그리고 어제 부엌도 지저분해서 청소부터 해야 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데도…….”
  “다른 곳을 청소하라고 언제 말했어? 건드리지 마. 어차피 네가 영원히 살 곳도 아니니까.”

  메르다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데려올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지금처럼 감정을 나타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비록 그 감정의 표현이 메르다를 몹시 노려보는 것이라 해도.

  “세 가지 규칙 말고 더 있는 거네요, 그럼.”

  메르다의 맹랑한 말에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규칙에 없던 거라고 반항하는 거냐?”
  “반항이 아니라 그렇잖아요.”
  “그럼 옷을 벗고 장미를 물고 춤추지 말라는 규칙이 없었으니 그것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정 심심해지면 하려고 했는데요.”

  물론 오기로 한 말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옷을 벗고 장미를 문다는 것 빼고는 메르다가 언제나 힘들 때, 혼자일 때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메르다의 대답에 그는 아주 잠깐 동안 기가 막혀 했고 그 다음에는 어디 한번 해 보라고 했다.

  “소음은 내지 말라고 하셨으니 노래는 못하겠지만요.”
  “그래, 음악 없이 해 봐. 발소리도 크게 내지 말고.”

  멱살을 놓는 게 아니라 밀어내듯이 메르다를 놔주고 그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어디 진짜로 하나 보자는 태세였다. 메르다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엣, 장미 없잖아요. 할 수 없네.”

  이 겨울에 장미를 찾다니, 그가 피식 웃었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메르다는 하나씩 옷을 벗으면서 마지막에 띠를 남겨 그걸로 장미를 접을 생각을 했다. 내내 장미를 물고 춘다고 한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생각하면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첫 스탭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춤은 메르다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이긴 했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노래를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선이 모두 춤이 되었을 뿐이었다. 노래하지 않고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노래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메르다 속의 목소리는 한 소절도 도와주질 않았다. 그것이 해 보란 듯이 버티고 앉아서 구경하는 그의 서슬 때문인지, 음악이라곤 하나도 없는 적막한 성의 풍경 때문인지, 그 앞에서 사실은 긴장하고 움츠러드는 메르다 자신만의 잘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꼴이 우습게 된 건 분명했다. 왼쪽으로 발을 뻗으면서 동시에 오른쪽으로 뻗었어야 어울렸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니 죽을 맛이었다. 그 생각 때문에 다음 스탭이 어디로 갔는지, 팔은 어느 쪽으로 뻗었는지 나중에는 춤을 추면서 메르다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점점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중에는 눈을 꽉 채워 버렸다. 박수도 안 치고 끝까지 빤히 보기만 하는 얼굴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워, 춤이 끝나자 메르다는 포위당해서 오래 버틴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도록 지쳐 버렸다.

  “이렇게 매너 없는 관중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렇게 기본만 갖춘 춤은 처음 본다.”
  “저도 이 정도로 못 춘 건 처음이에요! 음악도 없고 관중도 엉망이라서 그럴 거야!”
  “못 믿겠는데.”
  “백 보 양보해서 이 정도로 못 춘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게 평소 실력은 아니라고요.”

  말을 하면 할수록 변명 같았다. 게다가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옷이나 입으라고 하기까지 했다. 메르다가 대놓고 투덜거리면서 옷을 입어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투덜거리다 이상하다 싶어 잠깐 조용히 있으니 고개를 돌린 그에게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얼굴이 온 세상을 채우더니 이젠 그의 웃음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웃지 마세요!”

  얼굴이 시뻘개져서 메르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는 아예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너무하잖아요!”
  “뭐가.”
  “사람이 그 쇼를 했으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웃는…….”

  그제야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이 너무 웃겨서 괴롭도록 일그러진 것을 보고 메르다가 말을 더듬었다. 기운이 쏙 빠져서 웃지 말라고 다시 말하기조차 민망했다. 나이는 열여덟 살이지만 그 인생은 계속 춤과 함께 해 왔다고 생각하던 메르다로서는 수치요 치욕이었다. 그는 그걸 더욱 부추겼다.

  “여자 광대지?”
  “가수예요! 가수 겸 댄서! 우리 극단 하이라이트라고요!”

  메르다가 속한 무리는 언제나 곡예나 차력을 먼저 한 후에 메르다가 카롤 아저씨의 반주에 맞춰서 노래부르는 게 클라이막스였고, 노래를 부르다가 메르다가 자연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하면 관객들의 시선이 온통 메르다에게로 쏠려 에밀리오가 소매치기를 하고 다녀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맘에 들어서 메르다를 부른 남자와 자 주고 돈을 더 받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순수한 감상이 폭소인 공연은 낯설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그는 버럭 외치는 메르다에게 특유의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에요오. 내가 어딜 봐서 여자 광대로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미 그는 웃고 있는걸. 그것도 진심으로,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런 웃기는 장면은 난생 처음 본다는 듯이.
  솔직히 메르다가 보기에도 그랬다.

  “시끄럽지 않은 노래도 부를 줄 알아?”
  “에? 조용한 사랑 노래라면 괜찮아요?”
  “뭐, 괜찮겠지. 식품 저장고에 와인도 있을 거야. 한 병 따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서 메르다가 재빨리 다녀오니 그는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을 지나 3층까지 올라가서 테라스로 나가더니 메르다에게서 잔을 넘겨받고 와인을 따랐다. 메르다는 이곳이 보통 집이 아니라 무려 성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때에야 처음으로 실감했다. 테라스로 나가기까지 뱅뱅 돌아서 올라간 나선 계단 단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메르다에게, 그가 난간에 삐딱하게 걸터앉더니 물었다.

  “삶을 사랑한다고 했지?”

  또 이 화제가 나왔다 싶었다.

  “삶을 사랑하는 자가 죽음 한 발 앞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군. 올라가 봐.”

  그러면서 그가 가리킨 건 맞은편 난간이었다. 이 높은 데에서 좁은 난간까지 올라가서 노래를 하라니, 그것도 시험인 건지 그저 재미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너무 태연한 투로 명령하니 오기가 발동해 버렸다. 메르다는 냉큼 올라갔다.

  “어어…… 꺄앗!”

  높고, 바람이 불어서 흔들흔들하고,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떨어진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그가 어느 틈엔가 다가와서 메르다의 다리를 잡았다. 메르다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다리를 안은 그에게 매달렸다.

  “우와아, 높아…….”
  “비명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 게 아니야. 백조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거지. 떨어지더라도 다 부르고 떨어져.”

  말은 매몰차게 하지만 잡아 준 게 고마워서 별 소리 안 하고 다시 허리를 펴는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그가 다시 메르다를 놓았다. 다시 주위가 핑 돌았다. 다리가 떨리니까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삶의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너무 목소리가 떨려서 찬양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중간에 가사를 까먹어서 본의 아니게 박자가 늘어지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아까 춤을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고 와인 잔만 열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이 또 점점 커지고 있었다.
  노래 한 곡이 다 끝나고 그가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메르다는 새 노래를 시작했다. 집시들이 주로 부르는 방랑의 노래였다. 원래는 우울한 가사에 그다지 밝지 않은 멜로디였지만, 오기 때문인지 평소만큼 부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밝은 노래보다 더 좋은 노래처럼 들렸다. 그가 와인 잔을 메르다 쪽으로 들며 건배 자세를 취했다.

  “조금 괜찮아졌군. 하지만 아직 원하던 맛은 아닌데.”
  “그럼 좀 많이 기다려야 할 거예요.”

  이번에는 무슨 노래를 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부른 다음 노래는 그다지 들을 만하지 못했다. 그의 반응이 바로 돌아왔다.

  “좀 전 건 우연이었나?”
  “기다리라니까요!”

  놀리는 데 맛이 들린 게 틀림없다! 메르다는 이를 갈며 다음 노래로 우울한 춤곡을 골랐다. 정말 우울한 곡이었다. 이렇게나 처절히 실패할 수 있다니.

  “백 년쯤?”

  메르다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 사실은 고향이란 게 있을 리 없는 집시가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었지만 선율이 아름다워서 즐겨 부르는 곡이었다. 고향이 없기 때문에 더욱 절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몰랐다. 생애 최고의 노래는 아닐지라도 영혼을 울리는 메르다의 특기가 훌륭하게 나타날 정도는 되었다. 잘한 노래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그가 약간 밉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노래. 그리고 또다시 다음 노래.
  잘 부를 때도 있고, 못 부를 때도 있었다. 어쨌든 한 번 훌륭하게 부른 이후에는 그도 아무 말 없이 와인을 마시며 감상하기만 했다. 메르다 자신은 난간에 서 있다는 것도, 여기가 높다란 테라스라는 것도 잊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삶을 사랑하는 자가 죽음 한 발 앞에서 부르는 노래.’

  그런 것이 정말로 있을까? 사람은 죽음 앞에서 언제나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게 감정 이입이 될까? 그가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난간에 올라가서 노래하라고 한 거라면 적어도 메르다의 생각과는 달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다는 그가 여자도 난폭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고 놀리는 것마저도 냉정하리만큼 딱 끊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곳에서 메르다가 죽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조금 지나자 그것도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메르다는 계속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했다. 슬픈 노래를 하고 즐거운 노래를 하고 소곤거리고 크게 외쳤다. 바람에 몸이 흔들리고 목이 점점 아파 오고 몸이 점점 식어 갔다. 그래도 메르다는 계속 노래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메르다에게 남은 단 하나의 바깥 세상이 되었다.
  몇 곡째일까, 노래를 마치고 나서 문득 기력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은 말라붙었고,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흔들리더니 곧 깜깜해졌다. 메르다는 난간 위에서 테라스 안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떨어지면 심하게 머리가 부딪칠 것 같았지만 곧 정신을 잃어서 걱정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메르다는 그렇게 떨어지면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곳에는 자신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옛날에, 사흘의 시험이 끝나고 바로…… 당신을 만나겠다고 혼자 나설 때 에밀리오가 가로막았었어요. 에밀리오는 부탁을 하러 당신에게 가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었죠. 입버릇처럼 넌 내 꺼라고 했어요. 그때 가로막고는, 너와 나는 롬의 자손이라고, 아무 곳에도 섞일 수 없다고, 받아들여 주지도 않을 거라고, 잊지 말라고……. 나는 그 말에 아무 답을 해 주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부정하면서도 더 깊은 곳에서는 그 말에 수긍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집시라고, 가족을 떠날 수 없다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하고, 그 사슬을 깨고서라도 당신을 쫓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신을 그렇게 하루 동안 기다리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오니까, 아드리안이 막 뛰어 나오더라고요. 엄마라고 제대로 말도 못할 정도로 울음 범벅이 되어서는, 너무 울고 소리 지르고 찾아서 금방이라도 까무라칠 것처럼 붙잡고 매달리는 거예요. 나도 울어 버렸어요. 우는 내 아이가 안타깝고, 미안하고, 당신을 다시 만났더라면 그때에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라서 더욱 죄책감이 들고.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떠나갈 수 없도록 이토록 무거운 사슬이 생겼구나 하고 달갑지 않았다가도,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 생겼으니 기쁘기도 했어요.
  그리고 다시 당신 생각을 했었죠. 당신에게도 나처럼 그런 것이 생겼을까?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차갑고 단단해 보이지만 그렇게 금방 바람에 뛰어들 것처럼 위태로웠던 당신이…….“



  메르다는 혀를 넘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쓰고 달콤한 액체를 느끼며 눈을 떴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정신을 잃을 때 그가 있음을 믿었던 것처럼,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하는 것이 그의 얼굴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메르다는 입을 열어 말을 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왠지 웃음이 목소리에 배어났다.

  “별로…… 백조 같진 않았죠?”
  “살겠다고 애쓰는 참새 같더군.”

  메르다는 왠지 더욱 웃고 싶었다. 그의 무표정은 아까부터 풀려 있다. 비록 그것이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뜻으로 비뚤어진 웃음일지라도 그의 얼굴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건 왠지 즐거웠다.
  물론 스스로도 자기가 한 짓을 우습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가 또 아주 달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메르다가 죽지 않도록 잡아 주었고 정신이 들도록 입으로 와인을 넘겨 주었고 지금은 메르다를 무릎에 누이고 있었다. 비록 주위에 바람은 여전하고 그의 어깨 너머로 테라스 안쪽이 보이며, 문득 돌아본 그의 무릎 너머는 까마득한 허공이었을지라도…….
  메르다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꽈악 붙잡았다. 그는 메르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깐 말이 없더니 언제나처럼 위협적으로 말했다.

  “흔들면 떨어져 버릴 테다.”

  그는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로 그렇게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게 좀 전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메르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안 흔들겠노라고 약속했다. 테라스 난간에 바깥으로 다리를 내놓고 걸터앉은 사람 위, 그것도 그 무릎 위에 머리를 누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현명한 대응일 것 같았다. 그가 무섭냐고 묻기에 메르다는 물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는 그게 또 우스운 모양이었다.

  “좀전까지는 여기에서 내려올 생각도 안 하고 꽥꽥 잘도 노래 부르더니?”
  “그야 자존심 문제니까!”

  망치는 건 춤으로 족해.

  “자존심이 생명보다 중한가?”
  “안 중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행동했잖아.”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예요. 내게 춤과 노래는 내 인생이나 다름없는걸요. 나중에는 영주님에게 들려주는 걸 잊고 내 자신이 더 나은 노래를 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찼으니까.”

  그는 특유의 고저가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금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메르다도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그는 생명과 죽음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기에? 그가 시험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걸 부르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나?”
  “내 경우에는요.”
  “네 가족들은? 그들에게도 그런 게 있어?”

  이런, 질문 상대를 잘못 고르셨어요, 영주님. 생기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찌든 농민이라면 몰라도, 방랑하는 집시가 살아 있는 걸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 하러 걸음을 멈추지 않겠어요? 롬은 자유와 생명의 부족인데.

  “누군가는 점을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죠. 또 다른 걸 할 필요 없이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걸 느끼기도 하고요. 아이든, 가족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이든.”
  “너는? 있어?”
  “있냐뇨?”
  “사랑하는 사람 말이야.”

  메르다는 잠깐 옆으로 눈을 돌렸다가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왠지 대답하기가 몹시 조심스러웠다. 왜?

  “몸을 섞고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요. 알아요? 집시란 천하니까, 우리 안에서 반려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언젠가는 그 남자와 결혼하겠군?”
  “예정대로 간다면 아마도 그렇게 될 거예요…….”
  “삶이 계속된다면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메르다는 웃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자꾸 대답하기가 싫어졌는데, 그 이유를 몰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하지만 정말로 결혼하게 될진 모르겠어요. 그다지 결혼이 필요 없는 족속이니까. 삶이 계속된다고 해도 말이에요. 어쨌든 너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그 안에서의 사랑이란 역시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가족 간의 사랑 같아요.”

  메르다는 자신을 약간 혐오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변명하고 있어.
  왜?

  “가족이라. 가족 사이에 사랑이 있기는 한가.”
  “이상한 말을 하네요.”

  메르다는 피식 웃으면서 말하는 그를 올려다봤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고 그는 눈으로 물었다.

  “나는 세상에 믿을 게 가족밖에 없는 삶을 살아 왔어요. 그래서 영주님 말이 이해가 안 되네요.”
  “그거야 네 삶이지. 천한 족속과 공작의 삶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다르겠지만.”

  그렇지만.

  “왜 천한 족속보다 더 슬픈 말을 하는 거예요.”

  메르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왜 자꾸 삶에 대해서 말하고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지, 왜 자꾸 믿음이나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눈을 하고 그렇게 말하는지…… 그리고 왜 그 눈에 가슴이 아픈지, 왜 천한 족속과는 다른 삶이라는 말이 칼처럼 가슴을 쑤시는지 알 수 없었다.

  “슬퍼?”

  슬퍼요.

  “안 무서워?”
  “뭐가요? 영주님이?”

  영주님이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성격만 나빴지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기반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영주님인 주제에.

  “아니.”

  그러나 그는 메르다의 머리 뒤 허공을 턱으로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메르다는 다시 그에게 달라붙었다. 뭐라고 투정도 했다. 투정을 듣더니 짓궂게도 그가 메르다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뛰어내려 볼까.”
  “앗, 앗, 이봐, 이봐요!”

  누워 있을 때보다 어딘가에 기댄 비중이 적어져서인지, 유독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그가 일어서자 메르다의 온몸으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경황이 없이 내뱉은 몇 마디에 속좁게도 그가 어이 없다는 듯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이봐?”

  그리고 휙 뛰어내렸다. 메르다는 감히 주위를 볼 수조차 없어서 그의 목에 팔을 꽉 두르고 비명을 질렀다. 이상하게도 그라면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사할지 몰라도 자기는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메르다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낙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충격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거야?”

  그럴 법도 했다. 그는 난간에서 테라스 안쪽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왠지 심술이 돋아 메르다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더욱 세게 죄었다. 처음에는 웃기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다시금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계속 이러고 있을 참이야?”
  “바보된 김에 계속 그럴래요. 테라스 안으로 뛰어내리면서 또 웃었죠?”
  “흠. 팔 힘에 자신 있어?”
  “놓으려고요?”
  “생각 중이다만.”

  갑자기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 시시한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메르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쩜 그렇게도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지! 그래 봤자 눈에 어린 놀리는 빛은 숨기지도 못하면서.
  분한 기분이 들어서 메르다는 그에게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감행했다.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그의 혼을 빼고서 이래도 놔 버릴 거냐고 묻는 게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미 시시하고 우스운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 메르다의 입술은 약간 심통맞은 기습 키스 정도로 그쳤다. 메르다는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하며 입술을 떼었다.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어제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아니 지금까지 했던 어떤 입맞춤과도 달랐다. 입맞춤과 남녀의 성에 대해 메르다는 웬만한 영역은 모두 가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성이란 것에는, 남녀 간의 일이라는 것에는 환상이 숨어 있게 마련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환상. 그가 메르다의 입술을 열고 들어와 혀를 얽어 보여 준 것이 바로 그 환상이었고, 그가 데려간 곳이 메르다가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거기였다. 메르다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버티던 자기 손이 힘을 잃고 늘어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도 먼 곳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처럼 베일 너머로 느꼈다. 입맞춤 하나로 더 깊은 유희를 즐길 준비가 된 듯이 온몸에 피가 돌고 두근거렸다. 그러나 준비가 되었더라도 메르다는 그 뒤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쾌락을 알게 된 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얼마나 오래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입술을 떼어 그 마력에서 메르다를 놓아 주었을 때, 메르다는 그의 품에서 내려와 있었다. 메르다의 뒤에는 벽이 있었고, 그의 한 손이 그곳에, 나머지 한 손이 메르다의 가슴 위에 얹혀 있었다.

  “잘 자라는 키스야.”

  그가 다시금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황홀한데요.”
  “그럼 이 다음은 꿈에서 즐겨, 생을 사랑하는 집시 아가씨.”

  그렇게 말하고 물러나려 할 때 메르다가 자신의 가슴 위에 남아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원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돌아보고 멈췄을 뿐이었다. 메르다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몸놀림으로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손을 돌려 손바닥에 갈망의 입맞춤을 했을 때에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안 되나요?”
  “질문인가?”
  “현실에서 원해요.”
  “그럼 대답해 봐.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생이 끝장나더라도 원해? 네가 내게 청하려던 것…… 네 가족의 안전한 겨울과 바꿔서라도 원해?”

  가혹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시험하듯이 메르다에게 그렇게 물었다. 애초에 메르다가 그에게 온 것은, 그의 입맞춤과 포옹을 얻으려 했던 것은 추워서 얼어 죽어 가기 전에 가족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가족에게 머물 곳을 줄 수 없다면 그와 몸을 섞을 이유는 없었고, 그와 몸을 섞는다면 가족에게 머물 곳이 사라진다고 하면 더욱 그랬다.

  “언제나 그런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하다니…….”

  메르다는 슬프게 웃었다.
  거짓말. 가족에게 머물 곳을 줄 수 없다면 그와 몸을 섞을 이유가 없다?
  그가 메르다의 손을 놓고 피식 웃으면서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원해요.”

  이쪽이 진심이다.

  “세상 무엇보다도 더 원해요. 그게 내 대답이에요.”

  물러나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화악 앞으로 다가왔다. 낮고도 거칠게, 숨처럼 그가 말을 뱉었다.

  “후회하지 마.”

  그의 손이 메르다의 앞섶을 잡아 찢었다. 그가 온몸으로 몰아붙여 메르다는 다시 벽에 기대 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여전히 서늘했지만, 이제는 그 냉기 한가운데 열기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름…… 가르쳐 줘요.”
  “그 방에 들어가 봤다면 알고 있을 텐데.”
  “부르게 허락받지 못했어요.”
  “아드리안.”
  “아드리안…….”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는 메르다의 목소리 끝이 신음으로 흐려졌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가슴으로 내려가며 그는 메르다를 삼키고 핥고 애태웠고, 메르다는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길 속에서 에밀리오를 생각했다.

  ‘네 몸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그놈 품에 안기게 되더라도 우리가 나눈 걸 잊지 말라고.’

  그때 메르다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눠 온 에밀리오보다 메르다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결국엔 메르다가 갈 곳이 그의 옆자리일 거라는 사실도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알던 것을 모두 버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샅샅이 알지 못해도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 이제까지 알고 나누던 모든 걸 송두리째 부숴 버리는 사람이 있다.
  메르다는 안으로 들어와 온몸을 쥐고 흔드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메르다의 입술과 함께 메르다의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피가 아래위로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으로부터 퍼져 나간 열기가 메르다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어오는 그의 몸과 만나 하얗게 폭발했다. 바꿔서라도 원하냐고 물은 걸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듯, 그는 거친 기세로 메르다를 정복했고 그 머리에서 잡생각을 몰아냈고 끝내는 메르다의 정신마저 내몰려고 했다. 메르다는 먼 데에서 들리는 것처럼 자기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희미하게 동이 트는 것을 보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속을 관통하는 쾌락에 젖어, 그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차례차례 내 곁을 떠났어요. 우슬라 할머니도 파파냐 할머니 따라서 가셨고, 카롤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나이를 그리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나보다 한 살 어린 잠파노도 죽고…… 그리고 에밀리오도.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 가기만 한 건 아니죠, 물론. 내 아들이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 무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아드리안. 어쨌든 언제나 떠돌아다니고 멸시받는 집시가 감히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까요. 한때 그렇게 우습게 자살하려고 했던 것 치고는 정말 오래 살기도 했고요. 벌써 그 뒤로 50년이 넘게 흘렀네요.”

  메르다는 말을 마치고 잠시 가슴을 눌렀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이야기를 주욱 말하고 나서인지 눈 앞이 빙글 돌고 숨이 가빠 왔다. 어쩌면 정말로 가야 할 때가 되어서인지도 몰랐다. 메르다는 반사적으로 아드리안에게 손을 뻗어 그를 꽉 잡았다. 그는 다정하게 메르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메르다는 왠지 웃음이 났다. 젊었던 그녀에게 그는 그렇게 다정하고 친절하지 않았다. 바로 이 자리, 샘 바로 옆 나무등걸에 등을 대고 앉아서 마주 본 그는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메르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메르다 자신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똑바로 그를 마주 보았고. 그러고 보면 그에게는 그런 표정을 많이 지어 보였던 것 같다. 열심히 어필하려 했었다. 아무리 내가 멀쩡히 말을 몰고 산책하던 사람을 붙잡아서 사랑 고백을 해 놓고는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샘에 뛰어들었기로서니 그렇게 한숨 푹푹 쉬어 가면서 말에서 내려서 생쥐처럼 잡아서 건져 놓고 망토로 둘둘 불러 앉힌 다음에 한심하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야겠느냐고 말이다.
  결과는 우스웠지만 그때는 정말 죽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때, 그 다음 날에 하루 종일 사랑을 나누다가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낯선 곳에 와 있는 것만 같았던 그때.

  “며칠이나 그렇게 잠들어 있었으니 그렇죠. 참, 공작님 취미도……. 일어날 수 있으면 나가서 집사님을 만나 뵈요. 나 원, 집시 따위를 칙사 대접이라니.”

  바로 옆에서 지키고 있었던 듯한 하녀는 계속 샐쭉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방 밖으로 나갔더니 거미줄과 먼지만이 벗이었던 성에 사람이 들끓고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여기가 같은 곳인가, 다른 성이 아닌가 두리번거리면서 공황에 빠져 있을 때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메르다를 손짓해 불렀다. 그리고 뒷문으로 데려가더니 아래위로 훑어보고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듣기 전부터 그 돈주머니를 받는 순간 메르다의 가슴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 문으로 나가면 마차가 너를 근처 농가로 데려다 줄 거다. 네 패거리들도 이미 거기 가 있어. 올 겨울은 거기서 묵도록 허락한다는 영주님 말씀이시다. 이건 노래값이라고 하셨고.”
  “공작님은…… 어디 계신가요?”
  “널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다.”

  그 한마디에 메르다는 고분고분 그 집사를 따라서 마차를 탔다. 덜컹거리며 농가에 도착했고, 죽은 사람 돌아온 듯이 맞아 주는 가족을 만났다. 안아 주는 파파냐에게 메르다는 멍한 얼굴로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오오오, 메르다, 정말 잘해 줬구나. 공작님께서 아주 맘에 드신 모양이지, 이런 것까지, 세상에나…….”
  “에스테라랑 아기는?”
  “아, 안에 있지. 다행히 고비는 넘겼어. 어디 보자. 이거면 마을에서 괜찮은 고기를 살 수 있겠네.”

  그리고 술과 과자를 연호하는 잠파노와 아이들. 메르다는 그들을 더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두를 버렸었다. 원래는 창녀 노릇하러 갔으면서 이제 와서는 그렇게 말하는 말에 상처를 입는다.
  메르다는 우슬라 옆으로 갔다. 여전히 일행의 환호와는 동떨어져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할머니에게 갔다. 세월 좋은 노파처럼 농가의 테라스에 있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우슬라 옆에 앉아서 듣든 말든 마구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 나 다녀왔어요. 무슨 꿈이라도 꾼 것 같아요. 할머니가 그러셨죠. 그 사람의 진실된 키스와 포옹을 받지 않으면 이라고. 내가 받은 게 그걸까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은 나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할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무슨 뜻이에요?”
  “그는 너를 살리기로 결정했구나. 에르체베트의 아들이 널 살렸어. 당연하지, 롬은 자유와 생명의 부족이니까…….”

  에르체베트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메르다는 우슬라를 흔들었다. 그러나 우슬라는 피의 마녀란 말만 중얼거리며 겁에 질릴 뿐 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가끔 돌아오곤 하는 우슬라의 지혜는 그걸로 끝인 것 같았다. 메르다는 우슬라를 흔들다가 숨을 죽여 울어 버렸다.
  모두를 버렸었는데, 뭐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만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마지막까지 남긴 건 그들이었지.”

  그의 미소가 미웠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메르다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 중 택하라고 했을 때 메르다는 자기 생명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거기에서 길은 이미 갈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그를 보기 위해서 터덜터덜 숲으로 발길을 옮길 때 에밀리오가 가로막았었고, 그리고…….

  “그래서 메르다, 행복했어?”

  그리고 이제 아드리안은 메르다에게 돌아와 그렇게 묻는다. 여전히 다정한 눈길로, 든든한 팔로 이제 주름이 새겨지고 약해진 메르다의 어깨를 잡아 안는다.

  “응, 행복했어요.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무엇보다도 지금, 당신에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자꾸 손이 떨렸다. 메르다는 그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다정하게 메르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메르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너를 처음 여기에서 만났을 때, 나는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었다. 너를 보고, 어쩌면 사흘 정도 가까이 두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내가 궁금해한 질문은 이거였어. 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인가.”

  그 옛날에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고 무슨 시험을 받았던 것이냐고 처음으로 감히 똑바로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괴물 같은 사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었다. 인간이 아닌 듯한 힘을 가진 아드리안, 인간 같지 않은 생활 습관을 가진 아드리안, 인간 같지 않은 욕망을 가진 아드리안. 그러나 당신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답이다. 나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건지, 사람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건지 그게 궁금했지. 다행히 사흘 동안 너를 죽이지는 않고 버틸 수 있었고. 하지만 여전히 보통 사람처럼 살 수는 없었어.
  내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한 분은 나를 키워 주신 나다스디 공작 부인. 그러나 내 아버지 페르첸 나다스디 공작에게는 또 한 명의 아내가 있었고…… 그녀의 이름은 에르체베트 나다스디. 아니, 지금은 에르체베트 바토리지.“

  초상화가 가득한 방, 생쥐처럼 무엇을 보고 다니느냐고 그렇게 화를 내며 그가 달려들고 감추려 했던 그 방에는 단 하나 빈 자리가 있었다. 원래 있다가 떼어지고 조각조각 뜯어진 명패는 일부만 남아 덜렁거렸다. ‘르체베트’ 라고 씌어진 명패가. 그리고 그녀는 수십 수백 명의 젊은 처녀들을 납치해서 그 피를 짜서 목욕했다는 마녀였다. 우슬라가 벌벌 떠는 피의 마녀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피와 젊음에 미친 광기의 살인자인 줄 알지. 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녀는 아주 다른 존재야. …… 내가 영원한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어?”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덤에서 일어난 자. 죽지 않는 자. 아니 영원히 죽어 있는 자들.”
  “피를…… 빠는 자.”

  떠도는 괴담으로 들은 이야기를 메르다가 말하자 바로 입을 맞출 듯 가까이 와 있던 그가 웃었다. 눈이 갑자기 붉게 빛났고 웃는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 두 개가 선명히 드러났다. 메르다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공포에 질려 고개를 파묻고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 산다는 것의 보잘것없는 행복과, 그것의 가치를 알려 준 한 집시 여자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않은 괴물의 피를 반 가졌으면서도 산 자들을 위해서 싸울 수 있어서 행복했어.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가 메르다를 보았다.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 환상 속에서 메르다는 그저 웃으며 그를 볼 뿐이었다.
  그도 자기 길을 찾아 이제껏 걸어 왔으며 그것이 행복했고, 나 또한 그가 없는 크나큰 상실 속에서도 그저 살아 온 것이 행복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일까. 나의 가지 못한 길이여, 내가 내밀지 못한 손이여, 나의 사랑, 나의 인생, 가장 짧은 순간 함께했던 가장 소중한 이여.

  “당신 덕분이야, 메르다. 이제 편히 쉬어요.”
  “예전처럼 안아 달라고 말하기엔 너무 늙었네요. 고마워요, 이 순간에 와 줘서.”

  그가 웃더니 메르다의 자글자글한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얼굴이 손 사이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마도 아드리안 나다스디라는 존재는 수도에서나 귀족 사회에서나 잊혀져 가겠지만, 이 영지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가끔은 나도 겨울을 날 곳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새벽 달빛이 나무들 사이로 스며 들어 왔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가 그 빛을 받아 섬뜩하게 선을 뽐냈다. 그 빛은 아드리안과 메르다에게도 뻗어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춤과 노래를 보고서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제 가족들이 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글쎄?”

  그가 웃으며 메르다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축복의 아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공작님에게도 축복을 나누어 드릴게요. 많이 필요하시면 많이.”
  “그거 기쁘군.”

  어깨와 목에서 노닐던 그의 입술이 메르다의 입술을 찾아 옮겨 갔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던 떨리는 입술이 그를 환영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메르다의 팔이 그의 팔을 꼭 쥐었다.
  메르다의 팔이 기운을 잃고 툭 떨어졌다. 아드리안은 머리카락과 얼굴과 온몸으로 감싸안고 있던 늙은 여인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반듯이 눕히고 보니 메르다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언젠가처럼 다시 몸을 굽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작별이다. 메르다.”

  안녕, 나의 가지 못한 길. 가지지 못한 길. 그래도 마지막에는 가고 싶었던 길과 가지 못한 길이 만나 행복했기를.

  그는 챙 넓은 모자를 다시 챙겨 쓰고 말에 올랐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망토를 길게 늘어뜨리고 말을 탄 검은 형체가 되어 숲을 빠져나갔다. 아드리안 부부가 메르다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반 발자국 먼저 그 자리를 떠나 흔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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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No Profile
    자하 05.04.29 23:53 댓글 수정 삭제
    이 단편은 한 RPG 세션의 리플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으로는 그 세션의 마스터인 마스터 Y와 저의 공동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원래 리플레이 소설이므로 완결성과 개연성이 부족한 면이 있으니 이해 바랍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 No Profile
    unica 05.05.01 12:08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재미있어요.
  • No Profile
    정크 06.02.08 19:02 댓글 수정 삭제
    어쩌면 마지막까지 함께 했으니 진정한 로맨스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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