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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인용

2007.07.27 22:0807.27

시간 4. 인용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머리는 어깨에서부터도 목에서부터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구두를 신은 한쪽 발은 발끝으로 엉덩이 근처를 스치고 있었다. 눈알 두 개가 멀찍이서 뒷통수 즈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부에 덮인 날개뼈 두 조각이 고환 앞에 놓여있었다. 배꼽이 달린 뱃가죽 정면으로 구부러진 목이 놓여있었고, 쭉 뻗은 팔이 그 목의 뒤편에 놓여 있었다. 귀들이 심장 근막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머리 뒤통수에서부터 검고 딱딱한 이물질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한쪽 손이 이물질의 다른 끝을 붙잡은 채 굳어 있다.

                                    
*


  외국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빠르고 낮게 그는 속삭이듯이 말을 했다. 내게 익숙한 문법 규칙도 찾아낼 수 없었고, 아는 단어의 비슷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발음조차도 거의 귀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말밖에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니 내게 무언가 전하려면 말로 하지 않겠는가. 내가 모르는 언어일 뿐이다.
  당연히 내게 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수많은 것을 보았다. 오늘도 수많은 것을 보았다. 평생을 거쳐 수많은 것을 보았지. 이른 오후의 밝은 빛. 회색 도로 위에 바짝 말라붙은 햇볕. 횡단보도를 짓밟고 서 있는 커다랗고 텅 빈 버스. 자주색 관광 버스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인사하던 여자.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어. 표지판 바로 아래 정차 위치에 서 있었지. 내가 발견했다고 믿은 진실이 옳은 거라면 조그만 난쟁이가 내 눈앞을, 정확히 3초 후에 지나가리라고 예견했지. 그러자 난쟁이가 정확히 3초 후에 내 앞을 걸어갔지. 내가 진실을 발견했자면, 다시 한번, 나는 이번에는 녹색 북채를 든 두 난쟁이가 지금 당장 내 앞을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지. 생각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난쟁이들이 내 앞을 걸어갔지. 그 뒤로 아무렇지도 않게 전철이 왔다. 나는 올라탔다.
  환영이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고 환청이다. 이 버스도 저 햇살도. 내가 발견해낸 이 진실이 옳다면 지금 당장 난쟁이들이 내 눈앞을 지나가리라. 난쟁이들은 지나갔고 버스가 멈추리라, 하면 버스는 멈추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결론을 얻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환상을 조절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연습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자 그때그때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환상이므로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실제로 내 가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연습해서 미쳐버린 것인가 정말로 진실을 깨달은 것인가? 꿈 속에서 노니는 것을 연습하듯이, 어느날 나는 눈을 감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영영 포기한 채, 나의 뇌 속에서 헤매며 나의 세계에 갇혀버린 것인가 아니면 평생, 수많은 것을 보았으며 수많은 것을 들었는데 모두 환청이며 환영이었던 건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는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외국어인 것 같다. 아무튼 말인 것은 틀림없다. 모든 사물이 속삭여왔듯이. 젊은 시절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징조들. 햇살, 도로, 그림자, 시내 전차 정류장의 표지판, 횡단보도의 하얀 줄무늬, ‘이것은 네 환청이다!’ 눈부시게 속삭이고 있었던 징조들이여. 이러한 진실처럼. 내가 그 외침에 답을 줄 수 있을 만큼 자기 조절이 가능해지고 성숙해져서, 마법의 난쟁이들을 보내 자유롭게 이 자연에 대답한다면. 초록색 모자를 쓴 그놈들을 내 앞에 이열 종대로 척척 걷게 하여 이 세계에 깃발을 쳐들게 한다면. 오, 나의 세계에. 은닉되고 짓눌린 진실을 돌려준다면.
  그러나 나는 아직 그리 능숙하지는 못한 것이다.
  나는 아직 그렇게 스스로를 알고 있지도,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어리고 미숙한 주인. 아무것도 몰랐던 나의 어린 시절만큼이나, 여전히 미숙하고 두려움에 떠는 주인인 나. 어릴 때도 나는 두어번 의심한 적이 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어둠 속에서 보라색 얼룩같은 것이 둥둥 떠올라 있는 걸 보았던 것이다. 바로 내 침대 위에 말이다. 나는 속삭였다. 침착해, 침착해. 너는 오밤중에 화장실 전등을 보았으니 눈에 잔상이 남은 거다. 초록색 잔상이 시간이 지나 보라색으로 변한 게지. 그러나 보라색 얼룩은 금세 선명한 도깨비 모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에어컨이 중세 노래를 합창하듯이 불어대기 시작했으며 기괴한 합창대의 얼굴이 찬 바람 속에서 나부꼈다. 나는 물론 그때도 의심하곤 했다. 이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이것들은 환영이다. 내가 겁에 질린 나머지 지어낸 환영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내가 오히려 그점 때문에 겁을 먹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 이런 것들이 내 안에 있었는가? 오 이런 것들이 나란 말인가?
  기억해보라. 세포 속에 기생하는 그 조그만 벌레들을. 인간의 기원부터 그 벌레들은 인간의 세포막 안쪽에 기생해왔다. 그런데 그 벌레들이 사람의 핵심에 필수적인 단백질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인간의 심장이 날개를 접고 있는 풍뎅이이며, 뇌는 호두 모양의 버러지라고 생각해보라. 나의 환상 안에서 생각해보라.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환상을 작동시키며 호두 모양 허물을 부르르 떠는 버러지. 어느 순간 내 장기 모두는 부웅 부웅 소리를 내며 방 안을 날아다니는데, 젠장,  장기가 온통 해체된 나는 그래도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벌레들이란 결국 나의 환상 아닌가! 맙소사, 아니다, 나는 악몽 속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차피 내가 아니라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모르는 것이 나와 무관하다면 그건 당연할 뿐이다. 그러나 낯선 것은 공포를 불러온다. 낯설다는 것은 그것이 나 자신이라는 뜻이므로.
  나는 생각한 적이 있다. 나의 난쟁이 악대. 이 세계의 진실이여. 진실에 대한 확답이여. 그런데 그 난쟁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가 계속 지껄이고 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어떤 말이리라. 나는 그의 언어가 나의 언어와 다른 것을 인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낯설음을 인정한다. 이 환영과 환청의 나의 오직 나의 세계에서, 나는 나 자신의 낯설음을 인정한다. 이 낯선 자도 이 악몽의 고통도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점을. 이것이 오직 나의 세계라는 점, 오직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만 말하며 때문에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 세 가지는 모두 똑같은 뜻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나의 환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거기에서부터 나의 악몽이 시작되었지만. 오, 그러나 내가 떠나온 더 끔찍한 악몽보다는 낫지. 나는 삶을 선택했다. 나는 그대가 말을 하는 곳에 있지.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자신만의 환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곳.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낯설음을 인정하지 않는 곳. 다른 사람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여 아무런 징조도 되지 않는 곳. 그런 장소가 존재하지. 그런 세계가 그려져 있지. 두 사람, 여러 사람, 몇백명의 사람이든 함께 살아가는 한 장소. 우리 둘을 한 장면에 그려내는 것. 여럿이든 두 사람이든 하나의 장면에 그려내는 것.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모사법 자체 밖에는. 그려낼 수 있다는 끔찍한 무지밖에는.
  그 곳에서는 여기처럼 되지 못하리라. 그대도 없고 나도 없겠지. 시체마냥 토막난 몸뚱아리 조각 뿐. 그대여, 무릎 꿇은 그대여. 그런데 이건 무슨 모습인가. 그대는 뒤로 돌아선 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대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큰데도 무릎을 꿇으니 그대의 어깨가, 아름답게 들썩이는 어깨가 내 머리 한참 아래에 있어. 어디서 묻은 건지 다친 건지, 당신 몸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있군. 무릎을 꿇은 데다가 목을 잔뜩 구부리고 있으니 당신 머리 높이가 내 배꼽쯤이 되겠군. 내 청회색 자켓의 벨트 즈음 말이야. 구두를 신고서 나는 한쪽 발로 당신 엉덩이를 툭툭 쳐 보고 있어. 두 눈으로는 무심하게 당신 뒷통수를 바라보는 채. 그러자 당신이 좀 더 앞으로 기어나가는군. 나는 팔을 쭉 뻗고 뒤에서 당신 머리를 겨누고 있어. 총구를 당신 뒷통수에 딱 대고 있어. 총신을 잡은 손이 굳어버린 것 같아. 심장 소리가 들려. 내 심장 박동이 미치도록. 당신의 심장 박동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둘은 같잖아. 내 육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귀와 입의 거리보다도 귀와 심장이 거리가 훨씬 더 가까울거야.
  나는 총을 발사하지 않을 거야. 그대여, 내가 어떻게 쏘겠어. 나는 그대를 모르는데. 나는 그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러나 이 총은 알고 있는 것 같군. 이게 그대와 나의 약속이었나? 이게 그대가 내 자신인 이유인가? 그대의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어 받듯이, 나는 총을 쥐고 있다. 그대의 머릿속의 날카롭고 새카만 환영을 이어받듯이, 나는 이 총을 그대 뒤통수에서 끄집어낸다. 총신을 잡고 천천히 끌어당겨서. 철컥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


  나는 가만히 그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정류장에 서 있었다. 파란색 표지판에 흰 색으로 번호가 씌여 있었다. 햇살이 표지판에 정면으로 내리쏘이고 있었다. 번호들이 날아와 발톱으로 눈을 거머쥐었다. 그 새가 날면서 나는 버스 뒷문에 자리잡고 서서 유리에 붙은 테이프를 읽었다. 꺾어지고 둥글게 잘린 붉은 테이프들. 번호들이 뜨끔거렸다. 테이프가 군데군데 보랏빛으로 보였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기울였다. 옆으로 누워서 보는 듯이 애를 쓰면 테이프는 모르는 나라의 고대 상형문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금세 붉은 테이프로 붙인 모국어 글자들 - 정차 정류장들의 명칭들로 돌아가버리긴 하지만. 내 뇌는 문자들의 인력에 심각하게 반응해서, 몸을 바로 하지 않으면 눈알이라도 알파벳의 아랫변과 평행하게 빙글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햇살과 그늘이 구걸꾼의 맨발과 내 어깨를 동시에 반으로 잘라놓고 있었다. 칼날이 내 어깨와 머리와 발꿈치를 차례로 지나간다. 열쇠를 돌리고 현관을 열자 집이 그 무서운 익숙함 속으로 내 몸을 빨아들인다. 그 여자가 나를 끌어들인다. 침대에서도 어둠이 내 코를 막아서 나는 검게 변했고 햇빛은 여자의 엉덩이 모양을 내 눈부터 뇌수까지 깊이 찔러넣었다. 웃음소리. 나는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간다. 회벽 아래에서 나는 그대를 무릎꿇리고 뒷통수에 총구를 대고 있지.
  피가 튄 옷을 갈아입고 나는 술집으로 간다. 바에서 럼주를 마시며 나는 옆자리의 남자들을 곁눈질한다. 어깨에 온기를 느끼고 나는 돌아본다. 약속 시간 뒤늦게 그대가 나타난 것이다. 점퍼와 가죽 벨트와 코듀로이 바지 차림의 그대. 그대가 내 어깨를 짚고 앉아서 함께 남자들을 흘겨본다. 마침내 고개를 돌리고 내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며 그대는 위스키를 주문한다.
  나는 난쟁이 떼를 불러낸다. 난쟁이 군단이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술집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대는 머리를 긁적거렸을 뿐이다.
  보라, 햇살이 내 머리를 잘랐다. 몇백번이나 이 평생동안. 나는 물론 태양을 조종할 수 있다. 그 태양이 언제 떠올라 정확히 언제 하늘의 정 가운데를 세 번 돌고 빛의 술을 따르고 서녘 혹은 남녘으로 빙그르르 흩어질 것인지 손가락 끝에서 결정할 수 있다. 이 세계는 나의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몇 번이나 그렇게 움직였다. 그 명확한 존재로서. 글자들은 내가 원한다면 모양이 변할 것이며 다른 글자들로 변할 것이고, 정차역의 위치도 구획도 내 세계에서 합리적인 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도무지 태초부터 글자들이거나, 아니 내가 읽을 수도 없는 그림같은 글자들로 바꾸어버린다고 해도, 그래도 글자들인 것이다. 무언가를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겠지. 내가 아무리 움직이고 변형해도 피할 수 없게, 나의 세계의 나 자신의 어딘가를. 뒷통수에 구멍이 난 그대. 그래, 그대여. 이제는 식탁 근처의 세발 의자에 앉아 조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대. 당장이라도 저 환영을 지워버릴 수 있지만. 이 집안의 고요조차도.
  침대 옆자리에서 그대가 알몸으로, 내 얼굴을 응시하며 무어라 재잘대다가 눈을 돌린다. 어린애처럼 수줍은 얼굴이다. 나는 뛰쳐 나간다.
  이 세계 - 삶을 선택하면서 오래 전에 버린 것의 이름을 나는 간혹 기억해내려 애쓰며 몸을 뒤틀곤 한다. 방향을 잃을 때까지 헤매다 거리 한 가운데에서 희미한 아무 신음이나 불러 외치고 절규하고 원하며 내 머리에 총구를 대고 수없이 방아쇠를 당기곤 한다. 역겨운 옛 악몽의 시절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니. 그러나 곧 어리석음을 깨닫고 절망하지. 그러느니 아름답고 낯설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읽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글자를 응시하는 것이, 굴러가는 동전을 바라보는 것이, 이마의 반쪽을 갈라놓는 햇빛을 느끼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압도적인 집안의 익숙함에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그 허구의 개념에 근접했으리라. 이 새까맣고 서먹하기만 한 물건을 가지고 대체 뭘 어쩌자는 건가? 이 물건에도 기본적인 낯설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만 끝내고 싶다. 그러나 내가 끝나려면 나는 이 세계 전부를 끝장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여, 영원한 세계여! 내 손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여. 내가 가리키고 원하는, 그 어디에나 피할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여. 나의 의지가 피해갈 수 없게. 내가 조절에 능하게 되고, 내 힘을 능숙하게 운용하게 될 수록, 내가 심지어 진실을 묻지 않고 명령만 하더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대령하는. 그 숱한 선명하거나 망설이는 기호들이 결코 피해갈 수 없게 모든 곳에 존재하며 어떻게든 존재하는 세계여. 나의 진실을 위해 난쟁이들까지 낳아내는 이 세계여.
  세계여, 나는 피하고 싶었다. 나 자신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할 수 없는 명령을 모두 내려보았다. 나는 난쟁이를 명령했다. 꼬리가 둘 달린 고양이를 발 앞에 엎드리게 하라며 심통부렸다. 내가 도저히 형상을 그려 떠올릴 수 없는 괴이한 물체를 보여달라고도 명령해보았다. 나의 세계는 이 모든 과제를 통과했다. 그리고 내가 끝을 외쳐 명령하면 전 세계가 내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징조들은 말했다. 주인이여, 모든 것은 끝났답니다. 나뭇잎이 살랑이는 것을 보시죠.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세요.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늘에 쌓여있는 깃털 구름을. 뒷통수의 구멍이 깨끗이 아물어버린 그를 보세요. 그가 당신을 보고 웃네요. 모든 것은 끝났답니다.
  나는 세계의 뺨을 건드린다. 자신의 부재를 품은 그것을. 세계여, 늘 여기에 없는 세계여. 나는 그들의 부재를 건드릴 수 없다. 내 세계에서 나는 어느 시신도 묻어줄 수 없다. 계속해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어느 시신의 눈도 감겨줄 수 없다. 그들의 눈은 나를 보고 있기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나의 세계에서.
  징조들은 말했다. 주인이여, 모든 것은 끝났답니다. 꽃잎이 움직이는 것을 보세요. 손바닥 손금을 내려다보세요. 도서관의 장서 목록이 당신의 눈에 걸리는 것을. 침실 책장에 놓여있는 액자의 그림을. 그가 당신의 무릎에 누워 당신 손가락 하나를 꼭 쥐고 웃네요. 모든 것은 끝났답니다.
  나는 가만히 나의 외침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나뭇잎의 살랑거림.
  내 모로 누운 허벅지. 그대의 웃음소리.
  
                                    
*


  어린 그대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졸다가 올려다본다. 그런데 아버지, 나를 쏠 필요가 있었나요? 나는 진심으로 협박한 건 아니예요. 우리는 공범자잖아요. 농담을 했을 뿐인데. 얘야, 넌 내 아들이 아니잖니. 하고 나는 평온하게 농담을 한다. 어린 그대가 깔깔 웃는다. 그대의 아랫 입술이 보드랍다.
  내가 아직 삶과 악몽 사이에서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는 새하얀 환영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하얀 얼굴에 희게 번뜩이는 안경을 쓰고 그는 말했다. 흰 종이를 책상 위에 가득 쌓아놓고, 흰 에나멜 펜을 든 채로, 그런데 당신, 반대로 볼 수도 있잖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쟁이들 말이오. 당신이 답을 원할 때마다 그들이 튀어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소? 당신은 당신이 그들을 불러낸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들이 당신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거지. 당신의 환상이라고 믿게 만들려는 거지요. 그들은 당신의 적이거나 당신을 돌보아주는 사람일지도 모르지요. 답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야말로 이 세계의 답 아닙니까? 어때요, 여기서 한번 난쟁이를 불러내어 보십시오.
  내가 다섯 명쯤을 불러내자 그가 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난쟁이 두 명을 시켜 그의 머리에 트럼펫을 씌웠을 때도 그가 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그는 나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말했다. 장기간 치료가 필요할 거 같소. 참작을 구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드리지. 그러나 소개장은 필요없었다. 그가 내게 난쟁이들이 없다는 걸 일깨워 준 것이다.
  요즘도 가끔 그 새하얀 환영을 보곤 한다. 그는 염려스럽고도 사무적인 몸짓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가 물러났다가 한다.
  벽들에 둘러싸여 철제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대가 한발 한발 가까이 오곤 했다. 그대가 그대 이마를 내 이마에 가만히 대곤 했다. 그대 머릿속의 새까만 환영을 물려주려는 듯. 나는 그대를 껴안으려고 팔을 둘렀다. 그러면 나는 여지없이 그대 머리에서 새까만 총을 뽑아내곤 했다. 우리는 공범자잖아요. 그대가 웃어제치며 내 좁은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면 나는 끄덕이며 그대의 말을 들었다.
  그대가 말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되면 안될까? 당신이 내 아들을 하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내가 대답했다.
  왜, 안 된대? 그대가 되물었다. 내가 답했다. 허여멀건한 놈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잖니. 난쟁이들은 거기 없단다. 아무데도 없어. 완전히 없는 놈들이야. 그러니 그렇게 신이 나서 시끄럽게 돌아다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잖니. 그놈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나는 전혀 모르지. 너도 거기에 없단다, 아들아.
  나는 여기 있어, 아버지. 그대가 답했다. 그래. 하지만 너는 내 환상이란다. 그러니 너는 거기에 없지 않니. 너는 있지만 거기에는 없단다. 바로 거기에.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내 자신의 부재가 될 수는 없지 않겠니. 그래서 나는 알 수 없었어. 밥을 먹는데 옆방의 지저분한 녀석이 그러더구나. 네가 나한테 복수를 하는 거라고 말이다. 제 엄마와 잤던 그 잘 생긴 청년처럼 말이지. 그는 네가 나를 쏘러 오는 거라고 말하더구나. 그래서 나는 네가 매번 내게 총을 돌려주러 온다고 말했단다. 그놈은 알아듣지 못하더구나. 이것 참, 아직 서투르단다.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겠어. 이 건방진 환영들을 순화시켜 주어야 겠구나. 내가 말하자 젊은 그대가 이어 물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였죠?
  글쎄, 난쟁이들이나 보자꾸나. 나는 방을 가로질러 난쟁이 악대를 행진시킨다. 그러나 그대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난쟁이라는 말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였죠? 대신에 그대는 다시 질문한다.
  아들아, 그 여자는 아마도 영원히 살도록 명령받았을 거다. 난쟁이들이 그렇게 북을 쾅쾅 쳐댔겠지. 나처럼 희여멀건한 환영의 도움을 받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삶을, 그저 삶을 선택하도록.
  걸음마를 하던 그대가 건장한 젊은이가 되어 침대를 어지럽히고, 그대의 시뻘겋게 뻥 뚫린 뒷통수가 여린 갈색 머리카락으로 덮혀 깔깔 웃을 때까지. 무수한 시간이 넘실거리며 여기에는 무한의 지평까지, 삶 뿐이다.
  그러나 악몽을 돌이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난쟁이들이 사라져버려서, 더 이상 그 악단의 꼬리를 쫓아 세계를 돌 수 없는 곳. 두 사람, 여러 사람, 몇 백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한 장소. 우리 둘을 한 장면에 그려내는 것.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머리는 어깨에서부터도 목에서부터도 한참 떨어져
있다. 구두를 신은 한쪽 발은 발끝으로 엉덩이 근처를 스치고 있다. 눈알 두 개가
멀찍이서 뒷통수 즈음을 응시하고 있다. 피부에 덮인 날개뼈 두 조각이 고환 앞에
놓여있다. 배꼽이 달린 뱃가죽 정면으로 구부러진 목이 놓여있고, 쭉 뻗은 팔이 그
목의 뒤편에 놓여 있다. 귀들이 심장 근막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다. 머리 뒤통수에
서부터 검고 딱딱한 이물질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한쪽 손이 이물질의 다른 끝을
붙잡은 채 굳어 있다.

      점퍼 소매 근처에서 손이 뻗어나와 있다. 손은 어깨 위에 올라 있다. 총신을
붙잡은 손도 하나 있다. 마주잡힌 두 개의 손이 침대 위에 놓여 있다. 검지 손가락
은 주먹 안에 들어가 있다. 머리 하나가 벗은 가슴 위에 놓인 채 침대 위에 떠 있다.
철제 침대  위에 팔다리들이 누워 있다.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모로  누
운 허벅지 위에 머리가 놓여 있다. 엉덩이 근처로 구두를 신은 발 끝이 스치고 있다.
눈동자 두 개가 떠 있는 아래로 세발 의자가 놓여 있다.

  K와 R은 술집 바에 앉아있다. R은 K의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서 있다. R은 K와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다. R과 K이 세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
다. K가 자기 허벅지에 누워있는 R을 내려다보고 있다. R이 술집 바에  앉아있다.
R은 K의 손가락 하나를 꽉 쥐고 있다. K와 R은 회벽 아래에 있다. K가 식탁에서 보
드카를 마시고 있다. R이 K의 가슴에 머리를 올려놓고 누워 있다. 세발 의자들에
앉아 R과 K는 싸움을 했다. R이 코듀로이 바지를 벗어놓는다.

  
  하나의 장면. 대등한 자들, 동일한 자들. A가 A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그리하여 그 순간 A가 A와 대등하며 그리하여 그 모든 A와 대등하다는 것처럼. 증언이 아닌 말들이여. 무한이 없는 영원이여. 그러나 이렇듯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서술하여 내 삶에 끼워넣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그대에게 읽어준 그 여인의 기호들처럼. 그런데 도무지 이렇게 쓰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제 와서 나의 악몽을 돌이켜보는 일이 가능했을까?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바꾸어서도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뭐라고 한 건가?”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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