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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바지니에게 1/2

2006.02.24 23:0202.24

바지니에게


1



종소리가 울렸다. 잡일 돕는 청년이 종을 친 것이다. 카스트라 신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좋은 날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를 돌이켜보고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당 안으로 들어왔다.
성당 안은 아직 밝았다. 점차 창들이 검어졌다. 성당 뒤편의 숲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것이, 어두운 공기를 뚫고 귀에 닿았다. 내당에 불이 켜졌다. 매달려있는 갓이 달린 전등들은 쓸 수 없다. 촛불과 제단 위쪽 등잔 하나를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교 후 잡일을 도와주는 열 아홉살짜리 청년이 어두워지면 내당에 불을 밝힌다. 신부는 고해석에 들어가 앉아, 몸을 의자 등에 기대었다.
건물 안의 네 귀퉁이는 거의 암흑에 싸여 있다. 내당은 밤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는 건축물의 사면체에서 자연스러운 원형으로 - 원초적인 공간을 이룬다. 청년은 불을 켜고 나서 다른 일을 하러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신부는 한참동안 고해실에 앉아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부는 아까의 석양을 떠올렸다. 떠올리고 있었던 이유는, 주변이 온통 어두워져버렸기 때문이다. 소리까지도 나지 않아서, 바람도 불지 않는지 숲 쪽에서도 아무 스산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언가 기억해내지 않으면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만다. 아니 사실상,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두려움에만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 뿐인 인생을 살게 되기 십상이지,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은 이 기억으로부터 오고, 이 눈앞의 사물로부터 오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고, 또 내가 무엇이라 하려면, 내 미래에 돌려보내야 하고, 내 앞의 사물을 움켜쥐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단 말이야... 그것, 모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외칠 목소리도 없고, 외칠 언어도 믿을 수 없으며, 들어줄 사람도 없다면, 빛이 없다면... 무엇을 어찌하려는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르는 자의 두려움은, 그저 두려움 뿐인 것이 되어버린다... 삶과 죽음 양 쪽을 똑같이 두려워하는 것.
처음에는 그 양자가 너무도 초월적이며 거대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어둠에 길이 들기 시작하면 둘 다가 너무도 사소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마도 희망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느 쪽일까,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아이들, 그러나 곧 다시 빼앗길 아이들은? 굳이 총리의 입법이 아니더라도, 교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늦든 더 빠르든 이 아이들을 빼앗겼으리라 - 아이들은 사제들의 품을 떠나, 공교육에 맡겨졌으리라. 지금 단순히 총리가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교회에 일임하고 있는 고아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아이들도 곧 국가가 주도하는 보육 시설로 옮겨지리라. 승리해서 재정이 충족되면, 우수한 아이들을 뽑아 기숙 학교를 보내줄 거라고도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이야기지. 당분간 이 애들은 역시 우리가 맡게 될 거야. 신부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윤곽만 떠올랐을 뿐이다. 열 살, 아홉 살짜리 아이들은 그저 조그만 동물들같다. 그 아이들 대부분 열 세 살을 넘기며 자기 안에서 어둠을 보리라. 적든 크든 그것은 한 번은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카스트라 신부는 하품을 한번 했다. 그는 계속 기다렸다. 열 시까지 사람이 오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이다. 지금은 여덟시다. 카스트라 신부는 시계를 차고오지 않았다. 사람이 어디에 있건 째각째각 소리를 내며 따라다니는 그 물건을 신부는 좋아하지 않는다. 신부는 적당히 자기 몸의 상태로 말미암아 시간을 따져보는 방법을 안다. 그는 이 시간대에 지극히 익숙하기도 하다. 고해실 밖에서 촛불이 타들어가는 냄새로도 대충 시간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준비실로 들어가 거기 있는 탁상 시계를 볼 것이다. 그 시계들의 맥이 끊어지면 착실한 신도들이 다른 시계를 기부하곤 하기 때문에 아예 시간이 떨어지는 적은 없다. 새로 도착한 탁상 시계, 손목 시계, 벽시계가 다시 역을 떠나 달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싣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서 등잔불이 흔들렸다. 바람은 세지 않았다. 불빛은 곧 오르락 내리락하며 조용한 숨을 되찾았다. 둥그런 내당 안으로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카스트라 신부는 그의 몸이 작은 것에 조금 놀랐다.
소년은 창살 앞에 와서 조심스레 손을 모았다. 다듬어지지 못한 손가락들이 구멍뚫린 장갑 밖으로 나와 있었다. “네가 돌아다닐 시간이 아니구나, 얘야.” 카스트라 신부가 말했다. “곧 엘레가 순찰을 다니지 않겠느냐?” “저는 고백하러 왔습니다.”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용서를 빌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는 즐거이 들었다. 소년은 신부가 떠올린 바로 그 나잇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표현력이 좋았고, 대체로 훌륭하고 당당했다. “그래, 얘야.” 신부가 중지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말이다...” “하늘을 보고,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는 불그스름한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붉은 하늘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황혼을 믿게 됩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굴종 이상이 아닙니다. 그 뿐이지요. 일어난 일의 필연이라는 것도 그런 겁니다. 모든 일어난 일은, 일어납니다.” “얘야, 얘야.” 신부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중단시켰다.
“너는 말을 잘 한다. 너는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구나. 네게 이런 물음은 어쩌면 우스울지도 모른다. 너는 이미 네 세계를 가졌고, 네 세계에 대해 무엇이든 말해줄 수 있구나. 하지만 한번만 돌아오자. 아직 네가 오직 네 자신이 아니라 세례받은 아이이며 건강한 이 나라의 소년이던,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온전히 그러했던 시절에, 도둑을 도둑이라 욕하며, 사형수의 목을 매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을 네게, 무엇이 그 끈을 끊어버리고 너를 고독하게 했을까? 무엇이 바로 네가 사형수가 될 수도 있고, 네가 도둑이 될 수도 있다 느끼게 했을까? 그리하여 이 현실로부터 너를 오직 네 자신이 방비해야 함을, 깨닫게 했을까? 너는 이제 너다, 네 세계를 갖추고, 네 세계를 이 세상에 증언할 수도 있구나. 너는 한걸음 더 자랐다, 얘야. 그러나 그 이전, 순진한 너를 갑자기 내던진 그 계기를 알고 싶구나. 그건 지금은 네 세계에서도 한가지 이야기가 되었겠지. 그러나 여전히 바로 이 세상의 폭력이기도 하다. 너도 그 점을 알고 있을 터... 이후에는 네 안에서 진행되었을지 모르나, 그 계기만은 분명 두 가지 세상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 듣고 싶구나. 너는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너의 이야기를, 세상이 어떻게 너를 후려쳤는지 이 세상의 언어로 말이다...”
신부는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네가 얻어맞은 이야기는 충분히 듣고 감동한 것 같구나.” “저는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겁니다.” 소년이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제가 겪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신부님은 곧 듣게 되실 겁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언어로 신부님께 전해드리겠지요. 그리고 신부님 또한, 그 언어로 조처가 취하지게끔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맡길 수 밖에 없으실 겁니다.”
소년이 약간 조소하듯 말을 맺었다. “내가 누구로부터 듣게 될 테지?” 신부가 되물었다. 그러나 소년은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지금, 신부님은 제가 겪은 일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판단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용서를 비는 게 아닙니다.”
신부는 소년과 잠시 더 이야기했다. 신부는 소년이 약간 황홀경에 들떠 있다고 여겼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부는 소년을 다독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신부는 소년이 작가가 될 거라고 왠지 확신하면서, 가볍게 하품을 했다.
신부는 고해실에 앉아있었다. 아홉시가 조금 덜 된 것 같다. <모든 일어난 일은, 일어납니다>그 단순히 어법이 잘못된 것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문장이 조금 거슬렸다. 신부는 잊기로 했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가 연결된 방식 - 어긋난 시간차가 주는 인상은, 흔들리는 촛불 빛 속에서, 주위를 빙빙 돌며 점차 불길한 예감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예감이라기보다 죄책감이었다. 그게 돌처럼 목구멍과 심장에 걸려 있었다. 너무도 단단해서, 그건 분명히 예감이 아니라 기억이다... 아니 예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어법이란 애초에 틀리거나 틀리지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불그스름한 하늘밖에는, 도무지 또 무엇이 있는가? 다 이미 일어난 일일 뿐... 신부는 잠에서 깨어났다.
신부는 잠시 기차 소리라고 착각했다. 실제로 기차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철도는 먼 곳에 있지만 이 밤에는 제법 찌르듯이, 선명한 진동이 머리카락 끝으로 전해져오곤 한다. 신부는 아무튼 꿈 속에서인지 실제로인지 기차 소리 비슷한 것을 들으며 깨어났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이들 소리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 소리가 있을 시간이 아니다. 신부는 일어나려다가 깜짝 놀랐다. 졸아버린 바람에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촛불은 모두 꺼져버렸다. 제단 쪽에 등잔만 매달려 있었지만, 곧 식어버렸다.
신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순간 내당 문이 쾅 닫혔다. 바람 소리가 뒤따르다가 엷어졌다.
신부는 생각했다. 그 소년이 문을 열어놓고 나갔나보다. 자신은 조느라 오래 알아차리지 못했나보다. 잡일 돕는 청년은 어디로 갔지?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본데. 바깥이 시끄럽다. 금방 청년이 무슨 소식을 가져올 만도 한데... 신부는 고해실에서 나가려다가 문득 어떤 차가운 손을 매만졌다. 다음 순간 그는 그 손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느꼈다. 신부 자신의 손이었다.
“신부님,” 청년이 돌아왔다. 청년은 귓가에서 새소리를 털어버렸다.
“카스트라 신부님.” 신부는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여기저기 돌아보았다가, 준비실에도 들어가보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는 또 턱 밑을 긁적거렸다.
청년은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제 마지막 점검을 하러오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신부는 내당이라면 눈감고도 훤히 알고 있을 터이고, 이 마을에서 아무도 감히 신부를 해하려 들지는 못한다. 신부는 밤 열 시가 될 때까지 고해자를 기다리다가 겨우 거리 하나 건너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벽 여섯시가 되면 아침 미사를 드리러 다시 교회로 돌아온다.
지금이 다섯시 반이다. 신부는 보통 일찍 오는 편이지만, 오늘은 잠을 좀 더 청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제의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 결례를 무릅쓰고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서 떠들어버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까? 청년은 어제 기차역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 틈에 섞여서, 신부와 성당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신부는 여섯시까지 오지 않았다. 청년이 경내 청소를 마치고, 조금 걱정을 하며 준비실 정리까지 마쳤을 때였다. 청년은 시계가 또 멎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시계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다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청년은 빙긋 웃으며 시계를 내려놓았다.
나와보니 고해실에서 사람 한 명이 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신부님?” 신부가 청년을 보더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듯이 빙긋 웃어보였다.
“세상에, 신부님, 어제 여기서 잠이 드셨나요?” 청년이 물으며 다가가다가, 신부의 얼굴을 보고는 주춤했다. “웃고 계시는군요. 저를 영 딴 사람 보듯 하고 계세요. 신부님이 그러시니 두렵습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설마 여기서 주무셨을 줄이야. 소식 못 들으셨지요, 신부님?”
신부는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들기만 했다. “어제 화물차가 지나갔습니다. 여기도 물품을 전하고 갔고요. 저, 중요한 소식이 왔다고 해서 다들 같이 들으러 갔습니다. 그 후로도 다들 떠들어대느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소식이였어요. 아무래도 끝이 날 모양입니다. 역시 안 좋은 모양으로 끝날 모양이고요. 기차로 물품을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철수 명령이 떨어지고 있다고요. 어제가 결정적이예요. 아래 항구 도시에서 마지막 총공격을 명령했는데 대위가 격분해서 오히려 반란을 선동했다는 겁니다. 군인 뿐만이 아니라 지친 민간인도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답니다. 물론 이 뒤에는 일전에 추방 직전까지 갔던 켈레아스가 있습니다. 그 대위도 켈레아스의 대학 동문 아닙니까. 예전 의회 세력은 남아있으니까요. 역시 이 나라도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걸까요... 사실, 저는 그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 참, 어제는 정말 죄송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뭔가 급한 소식이 왔다고 시끄럽게 굴길래 다들 같이 기차를 기다리러 갔거든요... 촛불이 금방 꺼져버렸나요? 그래도 등잔이 있어서... 신부님이니까,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괜찮네, 엘레.” 카스트라 신부가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 철수 소식이란 말이지. 대위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켈레아스에 동조하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그는 총리가 쫓아냈던 게 아니네. 대부분 지도층도 지식인들도 산업가들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와서 배후에는 그가 있다고? 대위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니야, 그거야말로 총리가 퍼뜨린 소문이네. 이건 그저 지친 사람들의 반란이야. 켈레아스가 오히려 그 반란에 묻어가려 한다면 묻어가려 하는 거겠지. 과연 의회를 선포할 수 있을 것인가, 선포할 수 있다 해도 그 의회가 또 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인가...” 신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물었다. “참, 엘레. 내 어제 잠들어버려서 놓쳤네. 자넬 믿긴 하네만, 아이들 숙사 점검은 잘 하였는가?”
“네, 잘 했습니다. 다들 잘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 두 번 다 그렇던가?” “네. 아홉시에도, 열한시에도 점검했습니다. 잘 자고 있더군요.”
신부는 끄덕거렸다. 엘레는 고개를 숙여보였고, 다른 신부 한 명과 성가대에 속한 소년들도 내당에 도착했다. 시간이 여섯시 사십분이니, 소년들은 조금 늦게 도착한 편이다.
일곱시에는 주민 대부분이 모였다. 그들은 기도하고 노래했다. 성가대 반주를 맡은 신부가 피아노를 치면서 눈 사이에 잔뜩 주름을 잡고 있었다. 독창자가 없어서, 그 부분은 반주로 대강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신부들은 엘레에게 물었다. “어제 점검 때는 분명 있었다고 했지?” “네. 잘 자고 있었습니다만...” 열 아홉 살짜리 청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시 숙사에 가 볼까요? 늦잠을 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닐 거야. 방금 다른 소년들한테 물어봤는데, 깨어나보니 그 애는 이미 없었다고 하네. 옷도 다 없어졌고. 한참을 기다렸고,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봤지만 없어서, 미사에 더 늦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왔다는 거야.” “어떻게 된 걸까요?” 엘레가 오히려 되물었다. 카스트라 신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간혹 별 이유없이 사라지는 고아 애들이 있네. 그럴 때마다 흉흉한 소문이 돌지.” 다른 신부가 찡그린 채 말했다 “일단 우리도 숙사에 가서 찾아보기로 하세. 정 안 되면 경찰에 연락해야겠지. 때가 안 좋으니만큼 와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될 수 있으면 그런 일은 없게 하세. 우리끼리 찾아내는 거네. 조심해서 움직이기로 하세. 고아들이란 불안정해. 실제로 별 이유없이 사라지기도 하니까. 옷이 같이 없어졌다니 스스로 떠난 거겠지.” “갓 열 두 살인데요? 평소에 순순한 애였어요. 무슨 일을 당했는데, 그걸 무마하려고 누가 옷까지 가져간 거라면...” 엘레가 전에없이 반발했다. 그는 문득 카스트라 신부와 눈이 마주쳤다.
카스트라 신부는 성가대 소년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젯밤 어렴풋이 보았던 얼굴이 거기 있었는데, 밤에 보았던 것보다 키도 더 크고 얼굴도 야무져 보였다. 그 애는 또래 소년들 틈에서 약간 떨어져나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카스트라 신부는 조용히 엘레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청년의 큰 몸이 주춤거리며 끌려왔다. “혹시 어젯밤, 내게 전할 말이 없었는가?”
엘레가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여느 때에 비해서?” “그렇고 말구요.” “그러면 계속 저질러져 온 일은 있었던가?”
엘레는 훨씬 더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스트라 신부는 여전히 그의 어깨를 잡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겨두고 있었다. 엘레는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고,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였다. “숲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2



1.

"비켜.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군.“ 인리히가 리페의 팔을 밀어냈다. 아기는 울고 있었고, 리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인리히가 데려가서 사물함 위에 놓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기저귀는 좋은 천으로 된 것도 아니고, 두껍지도 못해서, 오줌을 싸면 반은 새어나온다. 제때 갈아주지 않으면 큰일이다, 여기저기서 냄새가 나기 시작할 테니까. 냄새 때문에 짜증이 나서 아이를 버릴 수도 있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건 중요한 일이다. 기저귀로 아이를 잘 싸서, 보송보송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상태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기는 다른 물건이 되어버린다. 아기란 건, 아기 냄새가 나고 보송보송하고 사랑스러워야지만 아기다... 아기는 아기라서 사랑스럽다는 녀석들이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세상 빛을 한번도 못 본 인간들이나 하는 말이다. 사랑스러워야지만 아기가 되는 것이다.
“난 그냥 당황했을 뿐이라구.” 리페가 투덜거렸다. 인리히가 금세 면박을 주었다. “당황했기는, 너도 그 녀석들이랑 똑같기 때문이야.” 인리히가 오줌 묻은 손으로 리페의 머리를 밀었다. “가자, 손 닦아야 할 거 아냐. 너도 아기는 아기라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아기를 지키려는 거야. 기저귀로 싸고, 닦고, 엉덩이를 씻어주는 일을 잘 하게 되면, 네가 그 일을 잘 하게 될수록 아기들이 네 손에서 포장 상품이 되어버릴까봐 겁이 나는거야. 너는 천하의 게으름뱅이나 될 거다.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제 손에 닿는 계집애들을 데리고 도망쳐버릴 녀석이야... 부모 돈이 많아서 좋겠구나.”
“인리히!” “부모도 있고, 부모도 돈이 많고, 책만 읽으며 컸으니 그 모양이지. 넌 어째서 세상이 다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느냐면... 당연하지, 제 손으로 한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리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고아 소년이 쏘아대기 시작하면 리페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래서 뭐, 이 청소년단에 들었다고? 고맙습니다, 우리 공주님.” 리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인리히는 손을 닦고 리페더러 머리도 닦으라고 했다. 쉰냄새가 나면 그들 부모는 다시 이렇게 <세상 경험>을 하도록 내보내주지 않을테니... 리페는 잠시 자신이 왜 이 입바른 친구를 쫓아다니는지 생각했다. 다른 친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방과 후 활동이다. 열살부터 여섯 살짜리 학생들이 사 년 전에 끝난 일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이 뒤치다꺼리에 열심히 돈을 붓다가, 묘안을 짠답시고 정당 하나가 <구원 청소년단>을 대대적으로 발족했다. 종교 단체지만 비종교인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다. 뒤이어 다른 정당들도 비슷비슷한 청소년단을 발족하고 있다.
의회의 이 정당들은, 전 총리와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재정이 충분히 있기나 했다. 세금을 거둘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 단체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민간 단체들이라는 것이 의회에서 방해가 될 만큼 세력이 강해지더라도 그렇다.
전 주에는 리바켄 주의 상공업 조직 하나가 대통령에게 외무 장관 해임 요청을 했다. 외무 장관은 직접 나서서 사과를 해야 했고, 대통령은 직령으로 의회에 이번 환율 조정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산업체에 대해 세금 삭감 건의를 의회에 내려보냈다. 그러나 수출을 주로 하는 다른 기업 조직은 그 안에 반대하면서 제 2정당에 압박을 행사하고 있다. 의회는 이 문제로 여섯 달째 환율 조정을 미루었고 주변국들은 화가 났다. 자국 통화 신용도는 하락했고 자동으로 평가 절하가 이루어졌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고 양당은 서로의 탓을 했고, 세금 삭감을 해 주기로 결론이 났다. <구원 청소년단>의 청소년들 중 몇몇은 정당들이 하는 꼴에 실망해서 제 동생들을 데리고 단을 떠나버렸다. 어느 지역에서는 다른, 좀 더 급진적이고 활동적인 청소년단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도 하고, 하여간 어려운 시기다...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단 자체에 대한 열망이 식은 것은 아니다. 소년들이며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일을 배우고 있지만, 소년단에서도 꼬박꼬박 잡일이라도 돕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밑바닥까지 해체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안정된 세계를 맛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제 손으로 지키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자기 자신조차도, 갈갈이 찢겨 먼지처럼 날아간다. 자기 동생이라고 해서 소중한 게 아니고, 자기 어머니라고 해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큰 소리 한번 귓가에 울리고 나면, 납작 엎드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새까맣게 뒹굴고 있는 먼지 덩어리에 불과한데, 그런 어머니 앞에서는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아이들은 학교 교육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방과 후에 청소년단 활동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를 돌보았고 무너진 집터를 닦았고 학교 건물을 청소했다. 상이 군인들이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막았으며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어린 아기들을 돌볼 때 그들은 행복했다. 애들은 울어댔고 사람도 아닌 것처럼 오줌을 싸댔다. 그 주변에서는 늘 냄새가 났고 미혼모들은 일을 하러 나갔고 언제든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라면 자기 아기의 눈알 하나 정도는 엄지로 꾹 눌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새빨간 생물체들의 기저귀를 갈고 있노라면 아기들은 잠잠해졌고, 가끔은 옹알이며 바랜 사진에서나 본 것 같은 미소짓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청소년 단원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순진한 생물체를 보며, 미래에 대한 행복감에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이 군인의 난동을 볼 때는 기분이 다르다. 그들이, 모자를 내밀고 서 있다가, 어떤 여인네가 돈을 주지 않고, 돈을 주기 싫어서라기보다는 무서워서 도망치면, 뒤를 밟아 따라가서 괜스레 그 집 대문 양 쪽을 갈고리로 박박 긁어 자국을 남기고 있는 걸 볼 때는 기분이 다르다. 그 집 대문에 남는 자국을 바라보면서 소년들은 그 자국이 남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왜 저런 짓을 하는 걸 막아야 하는가, 저런 짓이기 때문이다... 저 집에는 제대로 된 아기가 살고 있겠지, 그들은 생각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태어난 아기가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간신히 군인을 떼어놓는다.
리페도 한때 책을 덮어놓고 이층 창문으로 그런 상이 군인을 내려다보곤 했다. 리페의 집 대문에도 저 갈고리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을 만져보려 하니 어머니가 막았다. “손대지 말렴.”
“왜요?” “하인을 시켜서 닦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물론 하인에게도 장갑을 끼도록 한단다. 코와 입도 천으로 가리고.” 리페는 어느 날엔가 대문에 누군가 손가락을 문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문은 물론 철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청동을 입힌 것인데, 그렇게 살을 문질러대면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개를 들자 얼굴이 다 문드러져 있었다.
알 수 없는 복수극이 횡행했다. 청소년단은 어느 집에건 아기가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물체가 고운 집 안에서 예쁘게 포장되는 광경을 상상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고 외면했다. 그들은 아기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배정된 업무 내용으로 보면 아기들을 돌보았거나 상이 군인들의, 나병 환자들의 복수극을 막거나 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사실은 늘 아기들을 돌보고만 있었던 셈이다. 리페도 그 일에 끼지 않으면 자기 얼굴이 썩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언젠가 그 복수극이 성공하여 자기 얼굴도 똑같이 썩어버려도, 그 얼굴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막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소년단에 들었고 인리히를 만났다.
소년단에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인리히는 지방의 어느 작은 교회에 딸린 고아원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그 성분을 전혀 부끄러움 없이 말했다. 사실상 그건 부끄러울 것이라기보다는 소년단 안에서는 자랑거리였다. 리페가 우물쭈물 자신이 사는 곳을 말했을 때 모두는 어딘지 격려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리페는 사실상 출신 성분으로 치면 꼴찌였고 늘 얕보일 수 밖에 없었다. 리페는 지금 갑자기 자신이 인리히를 따라다니는 이유를 깨달았다. 소년단의 아이들이 리페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리페와 진지하게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연합 대회때 딱 한명 리페에게 다정하게 미소지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단위대에는 속하지 않고, 사흘 밤 낮을 함께 먹고 잤던 연합 대회때조차 리페는 그 사람 말고는 누구와도 친분을 쌓을 수 없었다. 리페 자신이 소위 고상한 척 하는 태도가 드러날까봐 입을 꼭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위대의 단원들은 모두들 리페를 슬쩍 얕보고 있지만 노골적으로 뭐라 하지는 않는다. 인리히만이 노골적으로 리페를 <공주님> 운운하며 퍼붓곤 한다. 그런 방식으로밖에 단원들은 리페에게 진지한 말을 건넬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단원들 중에 <진심으로 친한> 학생은 인리히 뿐이었다. 리페는 그렇게 생각하니 몸에서 힘이 주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반면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페의 부모는 그저 그런 소기업가였는데, 근 십 오년간 크게 성장해서 이 도시로 옮겨왔다. 리페가 기억할 수 있는 시절에는 이미 입에 맞지 않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사년 전에 리페는 열 두살이었는데, 그 해에 무슨 조약이 체결되었는지도 몰랐고 왜 부모가 그 조약 때문에 실망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조약 때문에 그들 부모는 더 이상 조선 사업을 불릴 수 없게 되었고 시설을 압수당했다. 대신 새로 들어선 정부로부터 그만큼 보상을 받아서 금리 생활자로 살고 있다. 그래도 불만이 많다. 그들은 정부가 금리 생활자가 안심하고 살 만큼 안정된 통화 정책을 펼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이미 세금 삭감이 도가 지나치다. 리페는 여러 모임에 끌려다녔지만, 아주 최근에야 그의 부모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산 대부분을 외국에 투자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가자.” 조장이 불렀다. 그는 인리히를 보았지만, 리페에게는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리페는 녹색 셔츠를 입은 채 뒷짐을 지고 섰다. 다른 단원들도 그렇게 했다. 조장이 수를 세어 단장에게 보고했고, 단장이 소년 과장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정렬하고 발을 한번 굴렀고, 곧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근교의 농업 활동을 도와준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청소를 하게 될 것이다.
매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청소년단 활동 중에는 여가나 체육도 포함되어 있다. 청소년들은 그들 자신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게 정당의 명령이다. 그들은 자기 어깨 위에 진 자기 몸뚱아리와 머리를 움직여, 그것들이 보다 잘 움직이고, 건강한 소년답게 움직이도록 명령한다. 여가나 체육 활동을 즐기 때 단원들은 사무원이 된다. 그들이 다 잊고 사람처럼 구는 건 쥐를 잡을 때다.
거리 청소를 할 때 그들은 쥐도 잡아야 하는데, 그것들의 꼬리를 뭉텅뭉텅 자를 때에야 그들은 자신을 잊고, 소년들처럼 소리지르고 웃으면서 무슨 재간을 써서든 쥐를 쫓아가 꼬리를 잘라온다. 그럴 때 그들은 재치있고, 독창적인 생각이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쭉 편다. 잘못해서 눌러 죽여버려서 피투성이가 된 쥐의 꼬락서니에 대해 살짝 부끄럽게 떠들기도 한다.
조를 나누어 공원 청소, 강가 청소, 주변 도로 청소까지 마치고 나면 청소년단은 다시 한번 정렬하고, 단장들 이상만 남기고 해산 구호를 외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이렇게까지 일을 한 것이다. 주말에는 발 뻗고 쉬어도 좋다. 일요일 오후에는 소년단 체조 대회와 축구 경기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리페는 마지막으로 경례를 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인리히를 흘끗 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리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인리히는 리페가 고개를 떨구자 만족한 듯 피식 웃고는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리페는 자기 집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또 다른 친구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일이 끝나면 바로 오라고 하셨다, 요즘은 날이 춥다고. 리페는 주춤거렸다. 그래도 리페는, 어머니를 조금 기다리게 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네 블록쯤을 더 걸어 책방에 들러 보기로 한다.


2.

소년단 임원 아델마이어는 보고서를 쓰고 있다. 다른 임원들도 뒤에서 남은 작업을 하고 있다. 보고서는 우편으로 송달될 것이고, 오늘 찍은 사진 일부는 액자를 해야 한다. 구원 청소년단의 후원을 맡고 있는 정당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액자며 매체를 이용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는 것은, 합의된 의미, 즉 글자이며 회의록이여야 할 것이다 - 그 후에 문서의 끄트머리에 각자의 날인을 남겨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여기 당신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이미 승인된 것이다, 하고 우기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자르다가 아델마이어는 문득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손을 멈추었지만, 거의 순식간의 일이었고, 금방 가느다란 선을 그어내려갔다.
구원 청소년단을 후원하는 정당의, 정적이라 할 만한 인물이 여러 영화사의 주주로 활동하고 있다. 위대한 총리의 제국 이전 제국 시대의 위대한 왕에 대한 영화들을 만들곤 한다. 아델마이어는 보고서 정리를 마치고 창고를 점검하러 간다.
아델마이어가 점검을 하러 간 사이에 다른 임원들도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괜히 더운 흉내를 내며 - 초가을이었는데도 - 바닥에 걸터앉거나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단장, 단위대장, 관리 임원들이 자리에 앉고, 임원들이 귀여워해서 남겨 둔 작은 소년들도 조심스럽게 자리를 차지한다. 누군가 책상 뒤쪽 창가, 창가 아래 수도관이 자나가는 빈 공간을 열고 숨겨둔 술병을 꺼낸다.
임원들은 잠시 창 밖을 바라본다. 건물 앞에는 단원들이 집합할 수 있을 만한 넓은 공터가 있고, 임시 숙소가 그 건물 왼쪽에서 공터를 둘러싸고 있고, 창고는 공터에서 공터 앞쪽의 연단으로 올라가려면 거쳐가야 하는 계단 뒷쪽의 지하실에 있다. 건물 모양만 좀 더 세련되었을 뿐 여느 공립 학교와 비슷하게 생긴 꼴이다.
아델마이어는 꼼꼼하지만 재빠르니까 몇 분 안 되어 올라올 것이다. 단원들은 빙 둘러앉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델마이어가 언제부터 특히 눈길을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신을 차려보니 다들 그 녀석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델마이어 스스로는 단원들과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
아델마이어의 나이나 출신 배경을 아는 소년도 거의 없었다. 어른들에게 묻는 건 규칙에 없는 일이라, 단원들은 저희들끼리 떠들어대다가 <아무도 그의 나이를 모른다> 따위의 소문만 부풀리고 말았다. 누군가 본인에게 물으니 쉽게 열 다섯이라고 답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들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편이 더 듣기에 좋다. 청소년단에 있으니 열 넷에서 열 여덟 사이이긴 할 것이다.
단원 중 하나가 머그잔에 술을 따라 반쯤 들이키고는, 아델마이어가 처음 그의 눈에 들어왔던 때를 이야기했다. 단원들이 신체 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모두들 웃통을 벗고 짧은 바지 혹은 통이 넓은 팬티만 입고 있었다. 이날 검사를 한다는 걸 잊어버리고 하필이면 착 달라붙는 팬티를 입고 온 아이들은 창피해했다.
창피한 건 당연한 노릇이다. 웃통을 벗고 무언가 검사 대상이 되어 있는 와중에, 그러니까 여기에 몸만 있어도 된다는 사실은 우두커니 깨어있는 의식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어딘지 안절부절하지 못해서 떠드는 분위기가 소년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소년들은 상대에 몸에 대해 떠들어댔고, 가벼운 욕을 해댔다. 털이 조금 난 것이나 어깨가 조금 굽은 것이 대단한 상징이나 되는 양 대화의 소재가 되곤 했다. 그래도 그들은 성장기라 그런 소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아델마이어도 옷을 벗고 서 있었다. 그의 몸 모양 자체는 괜찮았다고 소년들은 기억한다. 잘 다듬어진 성장기 소년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 몸 구석 구석에 희미하게 흉터가 남아있었다. 다리나 배에 있는 커다란 붉은 흉터는 몇 년은 된 것처럼 보였다.
다른 단원들 중에도 몸에 상처가 남은 경우는 있었지만 아델마이어가 그렇다는 것은 인상에 남을 만 했다. 왜냐하면, 아델마이어가 몸에 상처가 있다는 것은, 모두의 확신을 만족시켜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평소에 과묵했고, 일을 누구보다도 빠르고 깨끗하게 처리했고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으며, 어린 소년들을 잘 이끌기까지 했다. 과묵했지만 무뚝뚝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는데, 사람과 실수로 눈만 마주쳐도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델마이어는 몸을 보이게 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늘 침착해보이던 그 소년은 그 날만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고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검사를 받을 때 아델마이어의 행동은 더욱 단원들의 인상에 남았다. 지금 잔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 단원은 눈과 설태 검사시에 아델마이어의 바로 뒷 순서였는데, 아델마이어는 이름이 불려가서 앉자 의사가 지시하면 눈을 크게 떴고, 혀를 내밀라면 내밀고, 입을 벌리라면 벌렸다. 그는 그 모든 일들을 소름끼치도록 조용하게 처리했다. 그런 것들은 얼굴에 관련된 변화였지만 전혀 표정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의사의 지시에 철저하게 복종했는데, 그 복종 때문에 아델마이어는 거꾸로 의사의 지시의 직업적 성격만 강조함으로서 의사 개인의 인간성을 지워버렸고, 그 직업적 성격을 다시금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서 이 세계 자체를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뒤에 서 있던 단원은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같은 의자에 앉았으나 결코 그렇게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머리 한 구석에서 계속 자신이 의사 앞에서 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머그잔에서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아델마이어는 정신이란 것이 애초에 기계고, 육체란 그 기계의 표현형일 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미소지을 줄을 안다. 그게 그에게 남아있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처가, 곧 정신인 것이다. 기계의 고장이, 곧 정신인 것이다. 그렇게해서 그에게는 순수한 정신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세계가 제 원리대로 밑도 끝도 없이 돌아가는 기계라고 해도 그것이 파손된다면, 파손 자체는 정신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순수한 피안이 아델마이어의 미소로 떠오르는 것이다. 아델마이어는 그 표정만을 통해서 사람들과 교통하고, 그러므로 누구든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 연합 대회 때 다른 단위대의 대원들마저도 아델마이어에게 관심을 가졌다. 소년들은, 그와 한번 눈을 마주치자 완전히 반해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다른 단위대의 대원을 보았다. 그는 샌님처럼 생겼지만, 갑자기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아델마이어가 있는 쪽으로 비칠비칠 걸어왔다. 좀 놀리듯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른 단원들이 킬킬거렸다. 그런 아델마이어가, 하고 잔을 들고 있던 단원이 문득 언성을 높였다.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다. 아델마이어가 기술 따위나 배워서 직업공으로 여생을 마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진학이라? 그건 이상하다! 다른 단원들도 동조했다. 맞아, 그건 이상해. 아델마이어는 이미 정신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의 정신이지. 그는 배울 필요가 없어. 그는 이미 상처가 있다. 배운다는 것은 육체화된 정신을 가진 녀석들이 자기 상처를 기계론적으로 변명하려 드는 치사한 노릇이다. 단원들이 머그잔을 들고 맞아, 맞아 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머그잔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마셨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들은 내기를 걸 듯이 서로 바라보다가 다 함께 잔에 남은 것을 마셔버리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고개를 쳐들고 잔을 거꾸로 들다시피 하고 목구멍에 부어넣었다. 그러고나서는 목구멍에서 참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떨구었다.
관자놀이를 눌러대고 있자니 아델마이어가 돌아왔다. 이제 임원들도 집에 가도 좋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더 남아서 술을 마실 것이다. 아델마이어도 자리에 참석하길 권유받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이유를 묻자 모레 시험이 있다고 한다.
“거짓말, 사실은 우리랑 어울리기 싫은거지?” 단원들이 진담 반 섞어 놀리자 아델마이어는 빙긋 웃었다. 단원들은 아델마이어를 보내주고, 아델마이어가 설마 시험 공부를 하러 간 건 아닐 거라고, 각각 머릿속에서 생각한다.


아델마이어는 실제로 공부하러 간 것은 아니다. 그는 모레 있을 역사 시험에 대비해서는 충분히 공부를 해 두었다. 그는 리페가 어디로 찾아올지 안다. 그 애는 늘 주눅든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델마이어는 멀지 않은 책방으로 갔다. 이 곳에서는 새 책도 팔지만 값이 싼 중고책도 팔기 때문에, 교재를 구하는 학생들이 애용하는 서점이다. 리페는 교재를 살 때만 서점에 들르지는 않는다. 사실 리페는 서점에 자주 들르는 편이다.
그게 창피했던지 처음에는 아델마이어에게도 교재를 잃어버렸다는 둥 적당한 핑계를 대곤 했지만, 아델마이어는 소년단 업무가 끝나면 이 서점에서 일하기 때문에, 리페와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치고 리페가 어떤 책을 사 가는지 알게 되곤 했다. 그 날은 아델마이어가 계산대 옆에 서서 다정하게 웃어주었기 때문에 리페는 고백하기로 했다. “난 책들이 좋아.”
“어떤 책들?”아델마이어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물었다.
“그게...” 리페가 고개를 숙이고는 소설을 건네주었다. 장편 소설이었다.
인리히가 보았더라면 역시 시간이 남아도는 녀석은 다르다고 했을 거다. 리페는 그런 기사 이야기, 그런 수백년전의 왕 이야기, 어느 가난한 아가씨와 지주 이야기를 읽으며 밤을 지새우곤 한다. 부모도 리페의 그런 태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 부모는 리페가 좀 더 자산 관리 실무에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이제 리페는 열 여섯 살인 것이다. 리페도 부모의 기대에 영 부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부모는 언제나, 이렇게 세태가 정신없이 돌아갈 때에 무슨 교양 과목이라도 듣듯이 어물쩍거리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고, 날카롭게 말했다 - 리페는 이 서점에 들러서 슬쩍 책들을 둘러보고 맘에 드는 책을 사면 가방 속 깊숙이 숨겨서 간다. 이불 속에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달력 종이같은 것에 싸서 침대 밑 빈 공간에 감추어두곤 한다.
요즈음에 리페가 읽고 있던 것은 한 소년이 성장해가는 내용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부모가 강요하는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천천히 각성하고, 주의깊게 읽다보면 시 속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서는 부모의 위협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은 속고 있다. 누구도 자기 예금의 잔고가 없다는 이유로 정말로 죽지는 않는다. 그런 엉터리 위협에 시달리면서 쫓겨 달리기 때문에 죽는 것 이다. 여기 진짜 세상이 있고, 이 세계는 늘 새로 솟는 샘처럼 끊임없는데... 또다른 세계를 알리기 위해 주인공은 자신도 시를 쓰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게 2권까지의 내용이다. 리페는 3권도 사고 싶은데, 다음 달에 용돈을 받아야 한다. 아델마이어는 끄덕거렸다. “그 책 3권은 내게 있어.” “정말?”
“그래. 나도 좋아하는 책이라 사 두었어. 다음에 빌려줄게.” 리페는 반색했다가, 아델마이어가 그 책을 사기 위해 몇 달 치 열심히 일한 돈을 모아야 했을지 생각한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미안.” “응?”
리페는 자신이 미리 책을 사 두었다가, 아델마이어가 그렇게 좋아하는 책이라면, 자신이 아델마이어에게 선물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간이 이미 지나가버린 게 원망스럽다. 아델마이어와 자신 사이를 잇고있는 시간이, 아마도 시침과 분침이 똑같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드물게 겹쳐버린 그 똑바른 바늘이, 조금만 더 비틀려서 아델마이어가 아직 2권을 읽고 있고 자신이 3권을 끝마친 참이면 좋을텐데. 그러니까 지금이 네시 삼십분이거나, 두시 이십오분이면 안 되는 걸까. 그 정도라면 리페도 3권을 끝마칠 수 있었을 테고 아델마이어와 다음번의 12시 정각에 만나면 되는 건데.
어쨌거나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낮달같은 얼굴을 올려다본다. 리페는 자기 얼굴도 흰 편인 것을 안다. 그러나 리페가 쉽게 홍조가 떠오르고 아직도 뺨에 살이 붙어있다면, 아델마이어는 턱뼈의 모양이 그대로 아름답게 드러나는 데다가 창백하다.
리페는 아델마이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제 3구역 단위대 대원들도 알고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리히가 리페가 가끔 책방에 들른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비웃지는 않겠지. 왜냐하면 아델마이어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좋아해서>, 서점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 때문이다. 아델마이어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책의 주 독자가 될 것이며 그 달에 얼마나 팔릴 것인지,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게 값비싼 것이고 어느 판본이 더 가치있는 것인지 안다. 표지가 어느 쪽으로 나오도록, 어떤 위치에 책을 놓아두면 쉽게 눈에 뜨일 것인지 안다. 서점 주인은 아델마이어가 정말 일을 할 줄 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델마이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만 보아도 리페도 <일>이라는 것을 믿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일>은 리페가 2권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보는 부모들의 일과 다르다. 그처럼 예술이나 시에서 격리된 일이 아니다. 아니, 아델마이어의 <일>은 가장 시적인 일이며, 시를 절망시키는 일이다. 아델마이어는 시의 정신을 서점이라는 육체로 끌어올린다.
그렇다, <끌어올린다>. 시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상인이 아니라 리페같은 사람들이다... 리페는 어느샌가부터 아델마이어가 일하고 있을 때는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금요일에 오후에는, 구원 소년단 일이 늦게 끝나면 혼자 책방에서 노닥거리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아델마이어를 만날 수도 있다.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요일에 아델마이어를 만나지 못한 적은 거의 없다. 리페는 책장을 뒤적거리면서 생각한다. 어머니에게는 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고 늦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그런 대답을 과히 싫어하지는 않는다. 단원 아이들이 거칠까봐 걱정하시긴 하지만, 얼굴 하얀 아들이 금요일 밤에 친구와 어울릴 줄도 안다는 점을 높이 쳤다. 아버지는 한번쯤은 네가 술을 사라고 맥주값을 주기도 했다. 그 돈은 어느정도 용도에 맞게 쓰인 셈이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책방에서 책을 한권 더 샀으니까.
아버지는 친구들을 한번쯤 집에 데려오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다음 주 쯤에 아델마이어를 한번 데려와 볼 생각이다. 리페는 다른 친구에 대해서도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렸다. 인리히는 안 된다. 집안 꼴을 - 그러니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꼴을 - 보고나면 또 무슨 타박을 줄지 모른다. 아델마이어는 타고난 신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 평범한 금리생활자 집안 사람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언어로 정원과 내부 구조를 칭찬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칭찬은 시가 아니라 <탁월한 몸가짐>에 속하게 되어서, 아버지조차도 아델마이어를 경계하지 않고 존경할 것이다.
“실례,” 누군가 불러서 리페는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델마이어는 아니다.
“혹시 여기 직원이세요?” “아닌데요.” “응, 주인 아저씨가 안 보여서요.” 상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착각했네요. 그 책 좋아하세요?”
“그저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전작처럼 재미있지는 않아요.” 리페는 말해놓고 괜히 잘난 척 하는 말투였다고 생각한다. 상대는 왠지 킥 웃더니 그 책을 살 생각이냐고 했다. 리페는 굳이 살 만한 책은 아닌 것 같지만, 산다면 장정이 더 좋은 물건이 들어올 때 까지 기다리고 싶다고 말했다. 아는 친구가 이 서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도와줄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리페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단원들 앞에서 그는 책 따위를 사 본다는 것도 부끄러웠다. 응당 책을 사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면 <이번 달에는 용돈이 달려서 못 사요>라고 말해야 했다. 실제로 그는 이제 남은 돈이 없다. 그런데도 이 소녀 앞에서는 갑자기 거드름을 빼고, 목에 힘을 주고 장정이 더 좋은 물건 운운하다니!
게다가 아델마이어를 이용했어. 친구가 서점 직원이라 도와줄 거라니. 붕 뜬 두 개의 세계, 소년 단원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아델마이어를 이용했다. 두 개의 세계를 양 발에 신고 걸어다니는 친구를. 그는 언제라도 돌아와서 복수할 수 있어... 리페는 생각하면서도, 눈 앞에 있는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입술은 붉었고 뺨은 가무스름했다. 눈은 가늘고 새침을 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한 밤색의 눈동자는 거의 금빛으로 보였다.
소녀는 리페에게 무어라고 하고 있었다. 리페는 처음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리페가 지금 그 책을 살 게 아니라면, 자기가 사고 싶다고 하는 걸 알아듣고 내어주었다. 소녀는 리페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나서 금방 눈을 들었다. “어, 아델!”
리페는 그 발음을 들었다. 소녀는 리페의 어깨 곁을 스쳐지나가서 아델마이어에게 물었다. 아델마이어는 방금 옷을 갈아입고, 천장 윗 쪽으로 뚫린 다락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오늘치 일을 마쳤다. “오랜만이야! 저번 주말에는 못 봤어.” “저번 주말에는 다른 일이 있어서, 아저씨가 시간을 줄여 주셨지.” “응,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는 늘 늦게까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와 봤지. 내가 입을 툭 내밀고 있으려니 주인 아저씨가 알려주시더라구. 금요일마다 친구 만나려고 기다린다면서?” 리페는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혔다. 소녀가 리페를 다시 돌아보며 무릎을 약간 굽혀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질끈 묶고, 또래 여자애들답지 않게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해변가에서 입는 여성용 바지를 수선한 것 같은 물건이다. “저 분? 방해해서 미안해요.” 리페는 입 속으로만 <아니예요>라고 웅얼거렸다.
“전에 내가 부탁했던 거 있잖아, 응, 이건 저 분이 들고 계시길래 금방 찾았어. 일 끝났는데 미안하지만, 네 번째 판본으로, 플로되르 데 샹이 수정한 걸로! 그래, 얼른 찾아줘.” 아델마이어는 사다리가 있는 쪽으로 갔다. 사다리를 가져오느라고 아델마이어는 리페의 곁을 스쳐갔다. 그러면서야 비로소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리페는 저도 모르게 끄덕 마주 인사를 했다. 아델마이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아델마이어가 책을 내려 주자, 소녀는 밝게 웃음지었고, 몇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는 나가버렸다. 나가기 직전에 소녀는 말했다. “역시 안 좋아... 한번쯤 와요. 내가 얘기해서 봐 달라고 할게.” 소녀는 아델마이어의 얼굴을 한번 건드리더니 가 버렸다. 소녀의 손길은 어정쩡해서, 표정인지 의사가 시켜서 손을 올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와 잠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속이 텅 빈 이야기인걸 알고 아델마이어도 굳이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리페는 3권을 빌려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리페는 자신이 아버지를 흉내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단지 어른인 척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인 양 굴려면 아버지의 어투를 흉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겐 아직 아무런 진심도 없기 때문에. 아델마이어의 다정함, 인리히의 차가운 경멸, 심지어 자신이 추운 날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화를 낼 어머니만큼의 어떤 진심도...
그는 3권을 들고 침대에 누웠지만 읽을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은 것을 빌미삼아 잠시 훌쩍거렸다. <이 집을 나가고 싶어> 리페는 생각했다.


3.

아델마이어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차가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리페는 넌지시 말을 붙였다. “그 애 오늘은 오지 않네?”
아델마이어는 금세 알아차리고 눈을 깜박거렸다. “오늘은 너랑 있는 날이잖아.” “아니, 방해되지 않아.” 리페가 손을 저어보이며 덧붙였다. “정말로 방해되지 않는데. 그 애는 내게 방해된다고 생각하고서 금요일은 피하는 걸까? 하지만 너는 일하는 날에는 바쁠 때고, 오히려 오늘같은 날에나 그 애랑 어울릴 수 있는 거 아니야? 네 여자친구라면 내가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옳지. 너희들은 커피를 마시러 가고 나는 책방에서 혼자 놀아도 상관없고, 정 뭣하면 난 여기 오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가도 돼.”
“여자친구?” “응. 사이 좋아보이던걸.” “그야 좋은 애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야?” “아니야.” 아델마이어가 대수롭잖게 답했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길고 곧은 손가락들과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점 안에서 어깨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자신이 방금 올라갔다 내려온 사다리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고, 리페는 계산대 책상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리페는 컵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차를 마셨다.
아델마이어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다리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다.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면 아델마이어도 보통 사람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그 손은 순전히 육체적으로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 불과한 둘이 이렇게 서로의 몸을 가까이하고 쉬고 있으면 기묘한 이질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 아델마이어의 손에는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하얗게 파인 흉터가 그의 손바닥 안쪽에서 손등까지 찍혀 있다. 관통당한 상처이리라.
아델마이어는 몸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보통 장갑을 끼지만 이제 리페 앞에서는 간혹 긴장을 풀고 벗어놓고 편안하게 있기도 한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손가락에 난 잔 상처들과 손등을 관통한 상처, 손목 안쪽까지 드리운 가느다란 상처를 볼 수 있다.
저 관통상은 일 때문에 생길만한 것은 아니다. 리페는 아델마어어의 몸을 파손해놓고, 보통 상대의 육체를 파악하게 하는 맥락을 온통 끊어놓은 그 새하얀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육체는 매우 통합적이기도 하다. 손과 발, 머리, 가슴, 다리가 아닌 상처가 난 손, 상처가 난 팔, 상처가 난 다리와 가슴, 따지다보면 본질은 상처밖에 남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리페는 눈을 감는다. 새하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델마이어는 간혹 부드러운 기침을 한다. 계절 때문이리라.
소녀는 다음 주 금요일에는 왔다. 아델마이어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리페는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는데, 소녀가 그러면 자기가 미안하다면서 붙잡았다. 아델마이어가 한번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길레트>라고 했는데, 아델마이어의 발음은 명확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찻집으로 갔다. 길레트가 자주 들른다는 찻집이다. 아델마이어는 물을 마셨고 길레트는 커피를 시켰다. 길레트는 아델마이어에게도 커피를 마시라고 했지만 아델마이어는 웃으면서 리페에게 권했다. 리페가 시켜놓고 잘 마시지 못하자 길레트가 씩 웃고는 크림과 설탕을 따라주었다.
리페는 조금씩 커피를 마셨다. 아델마이어와 길레트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리페는 길레트가 의사 지망생이고, 그네 아버지도 의사라는 걸 알았다. 리페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둘 다 서로에게 시선을 준 채 미소짓고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늘 그랬던 것과 같은 미소고, 길레트는... 리페가 이만 가 보겠다고 하자 둘은 돌아보았다. “응, 아델!”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말하다가 돌아보았다. “손톱도... 이건 안 좋은 거야. 어, 가시려구요?” 리페가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라고 하자 길레트는 또 웃어보였다. 리페는 가지고 왔던 모자를 도로 머리에 쓰고 둘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 둘도 마주 손을 흔들어보였다.
리페는 나오면서 아델마이어의 흉이 남은 손가락들을 생각했다. 길레트의 아버지는 의사라고 했다. 구원 청소년단의 건강 검진을 맡고 있는 의사일지도 모르지. 그는 수염달린 쇠부엉이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에 기름이 자주 껴서 매번 손수건을 적셔서 닦아내야 하리라. 그 의사는 진찰실 문을 닫아 걸고는 아델마이어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한다. 몸을 이쪽 저쪽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아델마이어가 뭐라고 생각하건 그건 실은 음탕할 의도일지도 모른다. 아델마이어가 훌륭하게 잘 따라줄수록, 그 의사는 만족하리라.
그래서, 어떻게 할 거람? 아델마이어는 일을 잘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업무로 끌어올린다. 시의 정신까지도. 그 의사가 시키는대로 뒤를 따라가 어둠 속에서도 하늘 군대의 군인처럼 행동하겠지. 그렇다면 의사의 무릎 앞에 엎드린다 해도 악이 아니다.
리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그 행정적인 기술 속에서.... 무엇도 악이 아니다.
리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의 정신이 서점의 정신이 된 후로는, 누가 서점을 판단할 것인가? 어떤 시가 서점을 퇴출시킬 것인가? 그 훌륭한 육체를 어느 상처가 파손시킬 것인가? 아니, 파손시킬 수 있지. 하지만 상처는 침묵이지 시가 아니다.
상처는 왜 그리도 보편적인가? 왜 아무런 의미도 띄지 않고, 근원적인 것으로만 기능하는가? 휴식의 수줍은 어색함마저 침묵시키는가? 자신은 왜, 아델마이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는가? 걱정하지 않았는가? 그 숱한 상처들을 몸에 안고서. 아니, 상처들도 이미 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상처 자체가 그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해진 후로는 동경했으되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을 동경해 온 것인가? 아델마이어가 의사 앞에 나신으로 무릎을 꿇어도 좋다고? 의사는 <그래, 입을 벌려봐>하고 자기 바지 단추를 풀어도 좋단 말인가? 그래, 좋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 그걸 어떤 식으로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행동으로? 아델마이어의 온 몸에 새겨진 <순수한 정신>이 의사의 눈 앞에서 기묘한 매혹을 띄고 반짝이는 것을. 그 새하얀 것들만이 기계의 동력이며 증거인 것을. 그러니까 애초에 상처들이 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페는 정신을 차렸다. 그것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상처만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파괴를 숭앙한다! 리페는 자신이 조금 더 담백한 치즈 케익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이사를 가는 게 좋겠다고 투덜거렸다. 지붕이 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커튼을 손에 잡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음영에 가려 있었고 창 밖으로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쿵쿵대는 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은 그 곳에 있었다. 소년 단원들은 그 때에는 거기에 있었다. 몸에 상처를 얻고 더럽혀지고 동생의 반동강난 시신을 부서진 건물 틈에서 끄집어내서...
리페는 상상한다. 겨우 상상하는 것이다. 신문에서 딱 한번 본 적 있는 기사, 그건 뒷골목에서 나누어주는 신문이였고, 리페가 그걸 들고 집으로 왔지만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간첩이 여기까지 나돌아다니면서 신문을 압수했지. 공공 라디오 방송이나 큰 신문사의 신문에서는 그런 사진은 나오지 않았지. 동생의 반동강난 시신을 끄집어내서, 그들은 사랑스러운 동생 대신에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렸다. 이상하지, 그런 것이 지나가고 난 후에는 삶을 더욱 더 지키고 싶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거야. 다음에 기회가 오면 그들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죽겠지. 그들은 천국으로 가는거야. 새하얀 나락. 그리고 나는 치즈 케익에 대해 불평할 것이다. 삶을 지키고 지켜서, 지붕이 부서질까봐 집을 아예 보따리에 싸서 피신다닌다. 마침내 인리히가 나와 싸운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죽을 자유를!> 외치며 걸어온다. 나는 <빵은 맛있어!>외친다. 아델마이어는 상처 투성이 나신으로 강 위에 서서 다정하게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는 미소지으며 사다리에 올라 내게도 손을 뻗는다. 나는 그의 상처로 하나가 된 육체와 닿는다. 도무지 문명이 그의 몸을 일체화시킬 필요도 없이, 상처난 손, 상처난 팔다리, 상처난 가슴, 죽음으로 일체화된 생애 - 만들어지지도 않고 진짜 태어나기만 한 <인간>의 손이 나를 잡는다. 나는 저항할 수 있는가? 나의 삶은? 인리히의 죽음은?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나락으로... 하락... 상승...
리페는 되뇌이다가 어지러워진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느 거리에 와 있는가 확인한다. 집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표지판들을 살피고 있으려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길레트가 <아델>이라고 불렀지. 남의 이름을 멋대로 조그맣게 줄여 바꾸고도 활짝 웃었어. 내가 커피를 마실때도 설탕을 부어주며 미소지었어. 아델마이어처럼 다정하지만, 꼭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반면 징그럽게 관용적인 미소였다. 길레트도 의사가 될 것이다.
너희들의 대화에 내가 방해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들의 대화는 남녀 한 쌍의 대화다. 세상에는 남녀 한 쌍의 대화라는 이상적인 것과, 그에 동조해주는 친구 하나를 끼워 줄 대화는 있지만, 남녀 한 쌍과 나같은 작자를 끼워 줄 대화는 없다. 길레트, 그 애는 <아델>이라고 부르기가 그렇게도 쉽지. 아델마이어와 비슷할 정도로 아름답게 미소짓기도 그렇게 쉽다. 너희 둘은 닮기가 그렇게도 쉽다! 나는 그 싸움에서 비굴해지지 않으려고 도망쳤다. 이상한 얘기야. 리페는 눈을 깜박이며 방금 자신이 깨달은 것을 생각한다.
리페는 생각하기가 싫어진다. 그의 가슴팍에 무서운 그림자가 창처럼 틀어박힌 것 같다. 그 창은 땅에 꽂혀있던 것이 거꾸로 박힌 거라, 얼른 그 땅을 떠나면 시원해질 것도 같다. 리페는 걸음을 옮기지만 그 땅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영토가 정해져 있었던가? 그게 남의 땅이라면? 그래도 사람은 자기 그림자 위를 걸을 수 밖에 없다. 지리한 영토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나락으로 하락, 상승... 리페는 중얼거린다. <아델> 길레트의 어조가 떠오른다. 그녀는 작은 새처럼 이름을 부른다. 남녀간의 대화는 부리를 맞부딛치며 시가 된다. 왜 나는 입 밖으로 말을 내어도 침묵이 오히려 나를 잡아먹는 것일까? 리페는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아델-> 그러고는 무섭게 눈을 뜨고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아델마이어가 팔짱을 끼고 있다. 리페에게는 찻잔을 들려준 채로. 리페가 살며시 찻잔을 내려놓고 아델마이어에게 손을 대면, 리페 자신은 도무지 그 감촉을 거절할 수 있을까?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태어난 거지? 만들어지기 전의 나는, 왜 애초에 존재했던 걸까? 죽기 위해서는 아니야.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태어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으면 되었다. 나는 너의 손을 잡지 않기 위해 태어났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저항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빵은 맛있어!>따위로? 그런 것으로 이런 마음에 저항할 수 있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뒤룩뒤룩 살찐 세상이 이상한 거야. 아버지는 멍청하고 어머니는 돼지야. 젠장, 이 마음은 진짜야. 이게 나란 말이야. 이런 진심이 있는데 어째서 나는 내가 될 수 없어? 어째서 아델마이어나 길레트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어른이 될 수 없어? 젠장, 왜 나의 시는 읽을 수가 없어? 나도 목소리가 있어.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구해내고 말겠어.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당장 날 신부에게 보내겠지. 어머니는 기도하겠지. 내가 고해할 거 같아? 차라리 신부에게 퍼부어주겠어. 그런 멍청이에게는 한두마디로도 족해.
난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아델마이어.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시인이 될 거야. 그래서 난 너도 구해내고 말 거야. 리페는 더 견디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집에 다다라 있었다.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집의 대문은 성벽처럼 변해 있었다. 이런 몸으로 그 곳에 들어갔다가는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다. 떨림을 억누르며, 리페는 자기 집의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4.

계절이 조그만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겨울에 이 지방에서는 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곤 한다. 친구들에게 들러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점점 입술이 잿빛을 띄어가는 아델마이어에게는 말이다.
아델마이어와 알고 지낸지는 일 년쯤이 되었다고 리페는 생각했다. 지난 겨울에 아직 그는 언 눈 위를 굴러서라도 매 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 겨울에 리페는 그를 만나 그의 입술과 뺨이 웃음을 띈 모양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그 계절의 아델마이어는 리페가 예전에 상상했던 사신의 모습과 흡사했다.
길레트가 말했던 것처럼, 아델마이어는 건강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의외의 일이었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아델마이어가 훌륭한 환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라면 철저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일이지, 체온계를 입에 물고 환자가 된다거나 해서 순진하게 찾아온 정신을 도로 육체화시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열이 얼마지요? 죽음은 몇 냥이나 합니까? 아 그것은 삼십 팔 점 오 부입니다. 아니, 그런 천박한 놀음은 상상할 수 없다. 아델마이어에게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한점 남김없이 죽음으로 처단하느냐이다. 어떻게하면 도망가는 것 하나 없이 자신을 죽음 앞에 바치는가이다. 희생 제의를 부활시키느냐이다... 그 해 겨울에도 아델마이어는 소년단 활동을 했다.
구원 소년단의 수는 줄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그 시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러 가거나 다른, 보다 비정치적인 - 이건 다시금 유행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 소년단으로 옮겨갔다. 아델마이어는 책방에서도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는 점점 더 정신이 두드러졌다. 이제까지는 동력에 불과하던 것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책방 주인이 그에게 잠시 쉬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아델마이어가 부드럽게 웃기만 하자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해 겨울 아델마이어는 점점 더 신의 아들처럼 변해가면서, 얼어붙은 강 위의 배를 젓는 법을 배우고 있었고, 봄이 되어도 그의 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페는 길레트가 몰래 우는 것을 보았다. 삼월 첫 주 금요일, 소녀는 아델마이어에게 자기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방을 하나 빌려주도록 할 테니, 좀 더 넓고 따뜻한 곳에서 쉬라고 했다. 아델마이어가 거절하자 그녀는 새처럼 몸을 낮추며 뭐라고 더 속삭이다가, 결국엔 아델마이어의 뺨을 때렸다. 나가버리려는 걸 간신히 리페와 둘이서 달래서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라고 했더니 소녀는 화를 버럭 내면서 자길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했다.
리페는 낡은 책 냄새가 나는 구석에 앉아, 아델마이어의 잿빛 입술을 보면서 그를 구해올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강을 건널 수 없었고 눈앞이 새햐얘지곤 했다.


5.

사월 둘째 주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완연히 따스해졌다. 인리히는 여전히 리페에게 놀리듯이 내뱉었다. 리페는 인리히가 누구에게나 그런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원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워낙 경멸 자체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도구라고는 경멸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을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용한다. 그가 누군가를 경멸하는 말을 입 밖에 낼 때는 늘 자신을 포함해서 말한다. 그 미움이 자학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인리히 주변에 친구는 아니더라도 함께할 수 있을 만한 소년들을 붙잡아둔다.
리페는 인리히가 자신에게 공주님 운운하며 <만들어진 세계>에 대해 말했을 때, 인리히 자신이 얼마나 세상이 그렇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그러자 인리히의 태도가 수줍고 어려 보이기 시작했다.
인리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델마이어의 입술 색깔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오월이 되었다. 리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계절에 자신들의 정원이 가장 아름답다는 점을 시인했다. 정원의 울타리 꼭대기까지 어린 담쟁이 잎이 피어나고, 더위를 좋아하는 붉은 꽃들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다.
관목이 장년기를 맞이한다. 나무 그림자들이 뚝뚝 떨어져서 빛의 무덤처럼 잔디를 덮어버렸다. 정원 구석에 사월 초부터 그들은 흰 벤치와 의자를 놓아 두었다. 사월 말부터는 사람들을 불러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수북히 쌓인 그런 습기찬 구석이었다. 그래도 오후 네 시쯤이 되면 햇빛이 조금씩 발치로 스며들곤 했다. 해가 질 때가 되면 석양을 이마에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장소를 옮길 채비를 한다.
부모님은 별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의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한 일에 대해 잊어버린 것 같았다. 리페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저녁까지 시내에 나가 계시는 날에 리페는 인리히를 초대했다. 인리히는 한쪽 눈을 찌푸리더니, 생산력을 말소당한 토지의 비참한 몰골을 애도하는 행사에 참가해보는 것도, 너와는 반대편의 <세상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리페는 한참만에 말 뜻을 이해하고 웃어버렸다. 어쨌거나 리페는 그가 초대에 응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리페는 책방에서 또 아델마이어를 만났다. 리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델마이어는 간혹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리페는 어떤 청소년 문예지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혹시 구독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델마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인리히는 구부정하게 앉아있었다. 그가 찌푸린 얼굴로 찻잔을 흔들어보는 걸 리페는 보고 있었다. 하인이 와서 가장자리가 적당히 그을은 과자를 놓고 갔다.
인리히가 음습한 기운에 대해 불평하는 바람에 그들은 의자를 끌고 햇빛이 있는 쪽으로 조금 더 나왔다. 인리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을 모두 뒤통수 쪽으로 넘기고 왔다. 기름을 너무 많이 바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리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인리히는 멋졌다. 친구의 초대에 응하느라 못매무새도 가다듬고 머리도 넘기고 왔다. 오늘 그런 모습의 인리히를 처음 보았을 때 리페로서는 고맙다고 손이라도 덥썩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리히가 어색하게 찻잔을 쓰다듬었다. 그는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리페는 인리히가 이 모든 꼬락서니를 지겨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찻잔만 쓰다듬고 있었을 뿐인데, 시간이 흐르자 그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한가지 집요한 심정의 표출로 이어졌던 것이다. 리페는 마법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시간이 동작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 아닐까 생각했다.
인리히는 컵받침 위에서 찻잔을 돌려보았다. 찻잔의 손잡이가 열두시 방향에 있다가 세 시 방향으로, 다시 열 두시 방향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을 움직이게끔 한 동력은 이미 과거로 소진되어버렸다. 지루함이란 무언가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변해버렸는데도 세계가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 무능함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구역질이라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열 두시방향으로 돌아온 찻잔의 손잡이는 그 동안 살짝 각도가 바뀌었을 게 뻔한 햇빛에 따라, 아니 실은 오직 햇빛에 의해서만 그러한 색깔과 광택을 띄고, 그래서 물질 자체는 매 순간 내리쏟아지는 비처럼 시간과 공간을 한 덩이로 얽으며 <컵받침 위의 찻잔>이라는 요란한 소리로 폭발하고 있었다. 잠시간 리페의 귀에는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퍼득 조용해지면서, 리페의 눈 저 쪽에 조각상이 보였다. 정원 구석에 놓인, 아버지 취향의 고전시대 조각상인데, 인리히가 들어오면서 흘긋 보고 입매를 삐뚜름하게 하며 웃었던 그 물건이다. 그 조각상은 완벽한 한 남성의 육체를 빚어놓은 것이고, 그 완벽한 모양 때문에 늘 물질보다도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 육신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 인간은 가끔 자신을 넘어서는 일을 한다, 리페는 생각했다.
인리히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리히는 그 조각을 나르시시즘과 인종주의의 극치로 보았다. 귀향한 신의 아들이란 그 모양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원의 잔디를 자라지 못하게끔 짓밟고 있으면서 금리생활자의 집 안을 장식하는 신의 아들이란 그런 존재이다. 저것은 인간의 위에 서 있는 또 다른 인간이다. 억압을 자유로 표현하려는 굴종적인 시도,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것에의 시도가 저기, 저 복근과 남근과 허벅지에 있다. 예술을 승화라고 부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예술은 자유의 표현이 아니라 억압의 형상화이다. 만약에 예술가 자신이 억압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 표현으로 호도한다면 그는 웃음거리나 되어야 마땅하다.
리페는 그저 웃음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페가, 그렇다면 조각상에 상처를 채워넣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델마이어가 인리히의 맞은 편, 리페의 오른쪽에 앉아서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델마이어는 뒤늦게 초대받았다. 리페가 초면인 두 사람을 한 자리에 초대해도 좋을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쯤 두 친구를 만나게 해 주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리페는 아델마이어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델마이어는 일 때문에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다. 과연 그는 삼십분쯤 늦게 도착했다. 리페는 이미 앉아있던 인리히와 아델마이어를 인사시켰다.
리페는 둘이 악수를 하도록 권했다. 리페는 놀라서 인리히를 바라보았다. 리페는 그가 아픈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델마이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의 입술도 여느 때처럼 잿빛이었다. 둘이 악수를 거부하면서, 둘 사이에 팔을 뻗으면 닿을만한 공간이 비어 있었다. 리페는 문득 그 둘의 육체도 단 하나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아델마이어의 전신이 그렇듯이.
둘은 그저 고개만 끄덕인 후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잠시 고요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델마이어는 리페에게 간단한 감사의 말을 건네며 분위기를 풀었고, 인리히는 찻잔을 가지고 놀며 소일하기 시작했다.
지금 아델마이어의 손 앞에는 잡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델마이어는 몇 장쯤을 신중하게 들추어보다가 그대로 놓아두고는, 리페를 향해 미소지었다. 리페는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인리히에게는 아델마이어가 오기 전에 그 잡지를 보여주었다. 인리히는 여전히 찻잔이나 돌리면서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아델마이어가 잡지를 집어들자 왠지 더 인상을 찌푸렸다.
아델마이어는 리페에게 언제부터 글을 썼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물었더라면 리페는 당황했을 것이다. 아델마이어는 그저 이 잡지 한 권을 자기가 가져도 괜찮겠느냐고 물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리페가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영광일 것이다. 리페는 숨을 멈추고 끄덕거렸다.
아델마이어의 손 앞에는 잡지 말고도 찻잔도 놓여 있었다. 고용인을 시켜서 여럿에게 나누어 준 차는 찻잎에 약재를 섞은 것이다. 효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몸에 좋은 약재료에, 차에 묘한 색을 더해준다. 인리히는 그 차의 성분을 알고도 의외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리페같은 녀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어떻게하면 더 오랜 세월 매일같이 똥을 잘 눌 수 있을까 하는 따위 뿐이라든가, 그런 소리도 툴툴대지 않고, 정원에 대해서도 딱히 악담하지 않고, 그저 자리에 앉아서 햇빛이나 풀의 빛깔, 입술에 닿은 찻잔 가장자리 같은 것이 엉망진창으로 반짝거리는 가운데 그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대로 내버려둘 걸 그랬다. 아마 인리히도 오후의 따사로움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페는 아델마이어에게 잡지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러자 인리히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조각상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난 다음, 아델마이어가 잡지에 실린 글을 다 읽고 나자 내려놓자 인리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대기 시작했다. “소설이란 말이지.” 인리히가 말했다. “차라리 시를 쓰시지.”
리페가 고개를 떨구었다. “시도 쓰고 있어.” “그래?” “어쩌다 보니 소설이 당선된 것 뿐이야.” “다행이군. 시란 말이야,” 인리히가 잡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시란 게 더하지- 시체 앞에서 돼지처럼 흥분해서 멱을 따는 거란 말이야. 문학가란 녀석들은 군인과 달리 엄숙함을 몰라.”
아델마이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리페와 인리히를 번갈아 보았다. 인리히는 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는 조각상 쪽을 보며 말했다. “네 소설에 여자가 나오지? 보자, 이 꼬마는 넌가?” 리페의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래, 취향도 성숙하시군. 그런데 이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주는걸. 그러고 나서야 글을 쓰고 있어. 예술가란 기본적으로 패배자란 말야.” 인리히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아니, 언제나 그래. 네 이 글을 봐. 문학가들이 하는 짓을 아주 전형적으로 알 수가 있어. 그 여자가 너와 헤어졌기 때문에 그 여자는 여전히 너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우기는 게 이 소설 전체잖아. 봐, 소설 전체가 이별이야. 그 여자가 너와 어떻게 이별로 맺어져있는가 이 이야기야.”
리페가 얼굴을 붉히며, 그저 한 발 물러서듯이 하며 등을 뒤로 기대어 앉았다. 인리히는 리페가 자기 경멸에 굴복하기는커녕 인리히를 좀 더 위에서 경멸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리히가 입매를 삐뚜름하게 해서 웃었다. “정신의 오만.” 그는 손을 약간 들어보였다. “그렇지, 공주님? 패배자의 오만. 패배했기 때문에 더 위대한 자의 오만. 누구나 죽기 때문에 삶보다도 죽음이 절대적이라는 그 오만...”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런 것을 썼지? 이 꼬마와 그녀는 오직 이별로만 맺어진 상태야. 너는 꼬마가 그녀와 헤어진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만 쓰고 있어. 그들 사이에는 선물 하나 오가는 것 없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인사를 건넨 적도 없어. 하지만 그들 둘이 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야. 그녀와 새로 만나고 있는 이 남자보다도 더 말이야. 실제로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글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면 이 꼬마는,” 인리히는 잡지 표지를 탁 쳤다. “고독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불과해, 이 꼬마는 영원히 혼자야. 하지만 글 안에서만은 이별로 인해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문학가들이 꿈꾸는 것은 부활이야. 모두가 죽기 때문에, 죽음을 되살리면 바로 그것을 통해 모두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문학가들의 오만은 거기서 나와. 공주님, 네 오만도 마찬가지야. 너는 언어의 실을 타고 기어오르는 왕자인 양 하지만 탑에 갇힌 건 너란 말이야. 이들은 더플 코트를 입고 있군. 이게 정답이야. 그 겨울에, 사랑을 했으면 목도리라도 사서 바쳤어야지.”
“네 말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죽음숭배자라고?” 인리히가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래,”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들은 늘 지독한 독재자지. 리페,”
인리히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문학가들은 실제로, 죽음을 부활시킬 수 있는 거라고 믿는거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물론 모두는 죽지. 하지만 그건 삶의 영역이 아니야. 세상과 죽음으로 관계를 맺은 자들도 다시 삶으로 관계를 맺을 수는 있어. 이별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을, 그 사람만을 잃고 싶지 않다면... 죽는 수 밖에.”
그는 분명한 어투로 말했다. “지나가버린 사람을 여전히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건 삶의 영역이 아니야. 과거는 다시 오지 않을 미래이기도 해. 거기엔 아무도 없어. 죽음을... 사는 것은 죽는 것 뿐이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를 위해 죽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한다면 영원해질 수 있어. 과거와 미래는 이어지지. 가버린 그와, 지금의 사랑이. 그걸 가로막고 있는 건 나 자신이니까. 투신하는 거야, 리페. 문학이 아니야, 군인이란 말이야. 언제나 군인처럼 사는거야. 아기들을 지키면서.”
리페는 가만히 인리히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구원 소년단에 있었지만, 일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아직 열 여섯 살이다.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연령은 아니다. 리페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편협한 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하여간 아버지의 얘기만 들으면 의회주의 체제라는 것은 쓰레기라서, 여기저기서 늘 반란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건 기묘한 일이다. 리페는 지붕이 부서질까 두려워해서 이사를 가야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의회주의 국가는 민주정치 자체가 부서지는 것만 두려워해서, 매번 다른 공약을 내세우고 아무에게서나 표를 얻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단 말이다. 이놈들은 돼지같아서 온종일 의사당에 온갖 결제안들 앞에 꿀꿀대며 앉아있는데, 토론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성한 의무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실제 하는 일이 없다. 이 나라는 싸우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고, 보복하려 들지도 않는다. 과거따위는 몽땅 잊었다는 이 나라는 어제의 적들에게 돈을 뿌려 의사당의 화장실을 지키고 있다. 그때에 싸우지도 않았던 놈들이 막판에 투사들에게 단검을 들이대더니 지금은 당파 지붕 밑에 숨어있지... 하지만 우리들은 속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을 겪은 우리는, 결코 치유되지 않아서... 지금 이 껍데기가 배신자라는 걸 잊지 않아...
리페는 아버지가 갑자기 누구를 <우리>라고 부르는 건가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가 평소에 경멸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라고 칭했던 게 아닌가 싶다. 대문에 갈고리로 긁은 자국이나 남기던 사람들 말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주먹을 불끈 쥐었는데, 어머니는 그 때 하필이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인가처럼. 마지막 석양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순식간에 하늘이 차가워지면서, 태양도 달도 없이 하늘 자체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밤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불을 밝혔다.
인리히는 다른 단체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리페는 인리히가, 그렇게도 자신이 싫어하는 문학가들과 다른 짓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문학가들은 시체 앞에서 징징대며 그 울음으로 말미암아 연명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독재자이다. 남의 죽음을 먹으며 살아가는 그들은. 그런데 모두에게 서로를 위해서 죽으라고 할 인리히는... 자기 자신조차도 죽여버릴 그는 말이다. 희생적이기 때문에 좀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걸까...
“문학은 불가능한 작업이야, 리페.” 인리히는 잡지 위에 얹은 손을 탁탁대며 말했다.
리페는 그가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면서도,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인리히는 보통 때 리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고 코웃음을 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리페를 몇 번이나 불러가면서, 괜히 손짓을 하고, 이 말은 그가 들어주어야 할 말이라는 듯이, 다른 누구에게는 하지 않을 말이라는 듯이 하는 것이다. 인리히는 리페 쪽을 똑바로 보면서 여느 때처럼 경멸하는 입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리히의 목소리는 충분히 크고, 친하게 지내온 한 사람에게만, 눈빛과 제스쳐를 교환하면서 나눌 말 치고는 지나치게 논리적인데다가 너무 길었다. 리페는 결국 생각했는데 - 인리히도 일종의 문학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페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여기는 문학이 들어설 장소가 없다. 정원의 꽃들은 빛나고, 햇살이 찻잔의 가장자리에서 빛나고, 탁자의 표면을 따라서 빛나고, 테이블보는 주름 하나 없이 펴져 있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그림자들을 납작하게 잘라놓고 있었다. 아델마이어가 장갑낀 손을 훌륭한 모양으로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간혹 돌같은 빛을 띄었다가 보석같이 깊어지곤 했다.
리페는 고개를 돌렸다. 리페는 자기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있을까 걱정했다. 그 표정은 감추어져야 한다. 그 표정은 문학에서만 드러나야 한다. 인리히가 말하고 있었다. “...예술이란 예술이라는 게 있다고 속이는 작업인 거야. 그들은 패배자로서, 그러나 과거에 끊임없이 연연하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그들은 삶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몰라. 그래서 늘 고독해. 한없이 고독해진 다음 그 고독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그들이 죽음의 부활을 주장하는 방식은 사실 늘 자기 자신을 부활시키는 식이야. 이 꼬마가 이별을 말하는 건 이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지. 그들만큼 독재자인 자들이 있을까... 문학의 어떤 시도도 가장 단순한, 오로지 생존에의 욕구 - 그것으로 변질되기 마련이야.” 그러나 리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델마이어, 이 정원에서 그의 창백함 뺨 위를, 한 점 죄없이 미끄러져가는 햇빛과, 푸른 빛의 관목의 숨결, 그러나 그 어느것도 그의 몸에 작용하지 못하고 - 여전히 잿빛을 띈 그의 입술과 낮달빛의 뺨을.
그리고 인리히를 보았을 때, 나뭇잎 그림자 하나가 그의 오른쪽 눈 위에 떨어져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까부터 인리히에게 반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델마이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내리깐, 찻잔을 조용히 들었다 놓는 스스로의 손길을 응시하는 눈동자 때문에.
꼬마는 여자와 이별했다. 아직 열 네살도 되지 않은 꼬마... 왜 그런 설정을 했더라? 그게 더 비극적이리라는 점을, 리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조숙한 꼬마가 믿고 있던 자아를 완전히 파괴당하고, 채 다 생성되지도 못한 불건전한 욕구에 들뜨며, 자신을 그렇게 만든 대상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을.
리페는 인리히가 차갑게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본다. 리페는 여전히 가만히 있다. 그는 인리히에게 수긍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반론을 제기할 생각도 없다. 인리히는 리페의 그런 침묵을 경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리페 자신도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정신의 오만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리페는 살아나갈 힘이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여긴다. 죽는 길 밖에 모르는 것은 인리히다.
리페는 인리히가 믿고 있던 것을 잃어 본 적은 있으되, 마음으로부터 사랑해본 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을 쓴다거나, 이별을 통해 그녀를 다시 내 것으로 한다거나 말할 수 있다. 아니, 죽음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은 그녀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면서야, 존재자가 생긴다. 그녀를 사랑하기 전까지 꼬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숙하긴 했지만,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해서 남의 어투나 흉내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면서야 꼬마는 도망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 시간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흘러갔다. 물이 빨려들 듯이, 계절이 흘렀다. 꼬마는 써야 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 그러지 않고는 삶은 없다.
인리히의 말은 전도되어 있다. 인리히는 삶을 통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사랑하지 않고는 삶은 없다.
아델마이어는 부드러운 얼굴로 앉아있었다. 리페는 심장 언저리에 통증을 느꼈다. 문학에 대해서는 모를 수도 있다, 그것이 학문의 한 분야라면. 그러나 왜 글을 쓰느냐고? 자신이 왜 글을 쓰느냐고? 그것을 모를 수는 없다. 다만 말할 수 없을 뿐이다. 특히나 아델마이어 앞에서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대답할 수도 있다, 리페는. 이 심정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고백할 수도 있다.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그 답을 하는 데에는 실제 말이 전혀 필요없는 것이다.
리페의 시선이 그의 주변에 머무른다. 그 창백한 뺨에 아무 작용도 하지 못하고 미끄러져내리는, 어느 얼굴 가무잡잡한 소녀의 눈물같기도 한 빛살처럼. 그의 육신이, 안타깝게, 아무 영향도 온기도 받지 못한 채 이 세상에 머무르는 것을 본다. 리페는 그것을 아침 햇살 아래에서 보고, 저녁 햇살로도 비추어 보고, 석양 속에서 보고, 쏟아지는 하늘 밑에서 비명을 지르듯이 보고, 밤의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본다.
인리히는 아기들에게 지붕 아래 다락방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온종일 지붕만 쳐다보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삶과 인간이 전도되고 삶은 인간을 기억할 수 없기에, 삶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없고, 언어는 인간이 삶을 기억하려는 것으로, 정체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유의 시도는 모두 인간 자신에 대한 망각으로, 단순한 생존 욕구의 나락까지 떨어뜨려놓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인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인간을 기억하고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태어나게끔 했는가? 인간 자신이? 아니, 인리히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그건 너다- 나의 죽음.
나의 죽음, 나의 사랑, 내가 결코 껴안을 수 없는 것. 네가 나를 기억한다. 너의 눈이, 너의 입술이, 너의 창백한 뺨이 증거한다. 너는 사신이다. 그러나 모두의 사신은 아니다. 너는 오직 나를 태어나게 했다.
인리히- 그도 이 순간 그림처럼 손을 내저으며, 방백을 일삼고 있다. 그는 죽음을 사는 방법은 죽는 것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 우리가 죽을 존재로서만 태어났다는 운명을.
그러므로 무엇을 향해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결코.
투신할 수 없다는 것을.
리페는 인리히가 말을 마치고 다시 잡지 표지를 탁탁 두드려대는 걸 보았다. 리페는 저걸 아델마이어에게 주어야 하는데, 표지가 상하거나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치가 보였는지 인리히는 픽 웃으면서 자기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리페가 슬며시 끌어당겨다가 구겨진 부분을 바로 펴고, 아델마이어에게 주었다. 아델마이어가 빙긋 웃었고, 손이 스쳤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길레트처럼, 결혼하고, 몸을 겹치고, 입술을 겹치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나 너의 모습 뿐 너의 존재는 조금도 어루만질 수 없다는 것에 지쳐서, 몇 번이나 네가 아닌 나 자신의 감정으로 돌아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나는 네 존재를 바라지 않으리라. 나는 지치지 않고 너를 비추리라. 나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리라.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네가 여기 살도록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결코 내가 나라고 믿지 않으리라. 아니, 나는 결코 고독하지 않으리라. 나는 너에게로 살리라. 아니, 나는 결코 추억하지 않으리라. 영원히 너에게로 기억하리라. 그래, 맹세하리라. ... 손이 떨어져나갔다. 차가온 온기가 한동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몇 분쯤 더 이야기했다. 아델마이어가 기침을 했다. 리페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인리히가 조각상 쪽을 노려보고 있다가, 슬쩍 눈을 돌려 리페를 보았다. 냅킨을 입에서 떼자 거품섞인 피가 묻어나왔다.
아델마이어가 리페에게 전염성은 아니라고 말하다가, 리페의 얼굴을 보고 미소지었다. “죽을 만한 건 아냐, 리페.”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리페가 말했다.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마. 길레트가 말했던 곳에는 안 가봤어? 그 애 아버지에게 가면 싼 값에 봐 주신다고 했잖아.” 아델마이어가 리페를 다시 갸웃하며 바라보았다. 길레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늘 연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슨 상황을 가장하건, 그 이름이 나왔을 때 아델마이어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리페는 그 이름을 말할 때면 도무지 자신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델마이어가 쳐다보았을 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점이 아델마이어 자신의 연극에는 방해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리페는 아델마이어의, 묘한, 제스쳐같은 표정을 보고 어렴풋이 그 점을 알아챘다. 아델마이어는 리페를 쳐다보고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연극의 일부처럼 보인 것은 처음이다.
“나는 죽지 않아, 리페.” 그가 말했다. “절대로 죽지 않겠어.”
리페는 멍하니 앉아있었다가 말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잖아, 아델마이어.” 아델마이어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빠져나가서 냅킨을 네모낳게 접어, 피가 묻은 부분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리페는 고용인을 불러 그걸 치워달라고 하려고 했다.
오후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리페는 인리히 쪽을 쳐다보려다가 눈을 찡그렸다. 빛이 인리히의 등 뒤에서 들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 몸과 적갈색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빛에 노출시키고, 얼굴은 시커멓게 지워진 채, 그는 빛에 점령당한 것처럼 보였다- 석양이 아니고서는 그는 썩어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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