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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wind 글잔디

2004.01.30 20:5701.30

  한 사흘은 감지 않은 비듬이 벅벅 떨어지는 머리를 긁으며 슬리퍼를 직직 끌고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 두 봉과 소주 한 병,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샀다. 이 달 생활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요즘은 일거리 마저 뜸하다.
  그런 내 우중충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 하늘은 쓸 때 없이 맑기만 했다. 아아. 젠장. 하늘을 아무런 근심 없이 길게 가로지르는 구름을 보며 나는 구름 빛보다 어두운 담배 연기를 뿜어내었다. 그러나 내가 뿜어낸 구름은 하늘로 떠오르는 대신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쳇.”

  나도 한때는 저 하늘에 구름처럼 청운의 꿈을 가진, 정말 꿈 많은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군. 처량해라. 감수성 예민한 나의 눈물샘은 금방 눈물을 찔끔찔끔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 때 누가 내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툭 쳤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나는 황급히 눈가를 문지르고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서있었다.

  “현빈? 현빈이 맞지? 야아! 뒷모습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민…우?”

  “그래, 나야! 임마, 이름이 내 이름이 왜 그렇게 늦게 나와? 졸업한지 몇 년 지났다고 벌써 동창들 얼굴도 다 잊어버리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변해서.”

  나는 멍한 정신을 수습하며 간신히 그의 말에 대답했다. 민우. 고등학교 때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형의 낡고 낡은 교복을 물려 입고, 형이 쓰던 교과서, 형이 쓰던 신발. 등등, 한번도 무엇 하나 새것을 자기 것으로 가지지 못하던 녀석. 항상 소심했던 그 녀석은 그러나 언젠가 너무나 동경하던 운동화를 신발 가게에서 훔치다가 걸려서 퇴학을 먹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그렇게 낡은 교복을 이끌면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한번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이 과연 민우인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얼굴에, 고급 양복을 쫙 빼 입고 새카만 외제 승용차를 몰고서 나타난 이 녀석이?

  그 날 저녁은 오랜만에 동기를 만난 그가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다고 해서 나를 억지로 끌고 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게 되었다. 종업원들은 내 봉두난발에 때묻은 와이셔츠를 보고서 비웃음의 눈길을 보냈으나 민우가 “이 사람? 내 친구야! 와하핫!” 하고 나를 소개한 이후에는 그나마 대하는 태도가 사근사근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배부터 채우고 보자고, 그가 시킨 고급 요리를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싹 쓸어버리고 난 후에야 나는 간신히 그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물어볼 만한 여유가 생겼다.

  “아아, 그거? 뭐, 그런 일이 좀 있었지…”

  그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질문을 얼버무렸다.

  “그러는 자네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자네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잖아.”

  읔. 바로 역습이 나오는군.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내 몰골로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소설? 훗. 그 때는 철이 없었지. 지금은 간신히 3류 도색 소설 같은 거나 팔아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다네. 문학소년이라… 겉만 번지르르한 별명이었지. 지금 자네를 보니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네. 나도 그 때 자네랑 같이 도둑질이나 하고 퇴학이나 맞았으면 글을 쓰겠다는 철없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럼 지금보다야 나은 생활을 하고 있겠지.”

  말끝에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잔에 따라져 있는 술을 한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포도주라서 별로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내 말을 듣고 그는 한참 고민하던 표정이었다. 자자. 이제 조금만 더 찔러보자.

  “사실 그 때는 나도 무척 괴로웠었지. 친구가 그런 일을 할 때까지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말이야. 하지만 지금 이렇게 성공한 자네를 보니 나는 무척 기쁘네. 하지만…”

  말끝을 조금 흐렸다.

  “자네가 그 때처럼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면 나는 자네를 다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네… 도대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란 게 도대체 뭔가? 무슨 기업의 비밀 같은 것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내게 그렇게 말해주게. 그렇다면 오히려 마음이 놓이겠구먼.”

  자자, 넘어온다. 넘어온다. 우히힛. 내 말에 그는 꽤나 감동한 표정이었다. 이런, 아직 순진한 친구로구먼. 그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주위에 이야기가 들릴만한 거리에는 종업원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게 목소리를 낮춘 채로 이야기했다.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니 고맙네 그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자네 말처럼 아주 극비에 속하는 것이라서 말이야… 옛친구라고 해도 함부러 말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게나.”

  넘어오다 말았다. 윽. 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술이나 조금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그가 하고 있는 일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다는 듯이, 내가 요새 하고 있는 너절한 일들에 대한 한탄과 생활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불쌍하게, 동정심을 자아낼 수 있게.
  한때 소설가를 지향했던 글솜씨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펜대 대신에 혀를 사용해서 쓴다고 한들, 내 순진했던 옛친구를 녹여내는 대는 부족함이 없었다.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그는 약간의 눈물마저 찍어내며 내게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이런… 자네가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을 줄이야. 내가 뭐 도와 줄만한 일 없겠나? 내 힘  닿는데 까지 도와주지.”

  “아닐세. 극비의 임무를 띠고 나 못지 않게 고생하는 친구에게 내가 어찌 그런 일을 부탁한단 말인가? 오늘 저녁만으로도 충분하네.”

  생각해 보면 저 말이 결정타였던 것 같다. 그는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자네라면야…라고 말하며 품안에서 작은 은제 담뱃갑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게 뭔가?”

  “쉿! 목소리가 너무 크네.”

  그의 목소리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나도 덩달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큰 죄를 짓는 공범이 된 것 같다. 그가 천천히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작은 뱀이 들어 있었다. 어른 새끼손가락 만한 굵기에, 역시 그와 비슷한 길이. 그리고 그 비늘은 놀랍게도 투명했다. 내장과 하나밖에 없는 폐, 꿈틀거리는 작은 등뼈가 그대로 비치는 그 모습에 애써 먹은 값비싼 저녁이 올라올 정도의 구토감이 일 정도였다.

  “이…이게 무언가?”

  “우린 이걸 영사(靈蛇)라고 부르네. 이걸 잘 부리면 사람의 기억 속에 침투할 수가 있지.”

  “사람의 기억에 침투한다고?”

  “바로 그거네! 간단하네. 이 뱀은 사람의 관념 에너지를 먹고살도록 조작된 생물체야. 희생자의 집 근처에 가서 풀어두기만 해도 충분하지. 물론 미리 최면암시를 통해서 희생자의 얼굴을 익히도록 한다네. 그리고 이 뱀은 천천히 기어가서 희생자의 귀나, 콧구멍을 통해서 뇌에 들어가는 거야…”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 혹시 이 가엾은 친구는 미친 것이 아닐까? 내가 미친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의 표정은 너무 진지했다.

  “이 뱀은 원래 암수가 항상 같이 있고, 암수는 서로 텔레파시로 교신한다네. 그러니까, 수컷이나 암컷을 희생자 쪽으로 풀어놓고, 나머지 한쪽은 자신의 뇌로 집어넣는 거야. 그러면 희생자의 생각들을 모조리 읽어 올 수 있지. 게다가 한 번 넣은 뱀은 적어도 일년은 산다네! 절묘하지 않은가? 절대로 들킬 염려 없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긁어 올 수 있다네. 그 사람이 경쟁사의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라던가… 하면 어떨 것 같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사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개발 중인 제품의 정보를 미리 빼내온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자신의 회사에서 완성시켜서 미리 특허를 내던가, 시제품으로 팔아버리는 것이다. 경쟁사에는 연구에 투자한 비용과 시간을 모두 날리고, 시장 점유율도 치명적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일석이조군.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점이 너무 많았다. 그가 내밀은 담뱃갑 같은 조그마한 은갑에서 꿈틀거리는 뱀. 자세히 보고 나서야 그것이 두 마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훔친다고?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의 나를 보면서 그 은갑의 뚜껑을 덮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약병 같은 것을 꺼냈다.

  “이쪽은 알이라네. 따뜻한 곳에서 일주일이면 깨어나고, 냉동실에서 얼려두면 관리만 잘 한다면 이삼년은 버틴다네. 여기에는 일곱 개가 들어 있네. 알은 받기가 어렵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삼 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오늘 서점에 갔더니 요새는 장지우라는 사람의 소설이 대 인기를 끌고 있더군.”

  그리고 아직도 멍하게 있는 내 품속에 은갑과 알을 넣어주고 눈을 찡긋해 보인 다음 카운터로 가서 저녁 식비를 계산했다.

  집까지는 그가 차를 태워서 바래다주었다. 인사도 대충한 다음에 나는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품속으로 손을 넣어보니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만져졌다. 꺼내보니 아까의 그 은갑. 그걸 열어보자, 역시 구역질나는 모습의 작은 뱀이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그것들을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것들이 내게 부를 물어다 준다고? 으흐흐.
  은갑의 뚜껑을 덮고 품안에 꼭 껴안고, 나는 소리 죽인 함성을 질렀다.

  거사일은 사흘 후로 잡았다. 미리 보아놓은 소설의 겉표지의 작가사진으로부터 그의 사진을 얻고, 그의 팬 사이트에 들어가서 주소를 알아내었다. 다행히도 그의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민우에게 들은 대로 뱀에게 암시를 걸고, 야밤에 취객인척 하면서 그 집 근처에 가서 토하는 척하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재빠르게 뱀을 정원에 풀어놓았다. 이제 무사히 들어가는 것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후에 다른 한쪽의 뱀을 귓구멍 속으로 넣었다. 미끈미끈한 점액질 같은 것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귓구멍 한 쪽이 차가웠다. 그제야 안 것인데, 이 뱀들은 비늘이 투명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었다. 미끈거리는 것은 그 때문일 테고, 차가운 것은 뱀이 냉혈동물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 불쾌한 체험은 길게 기록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한번도 그래본 적은 없지만 정신적으로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 귓구멍이 무언가로 가득 메워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더니 어느 틈엔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방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보였다. 흐릿하고 사물의 윤곽은 모두 뿌옇게 보였다. 근시였던 내가 가끔 안경을 벗고 보던 바깥 세상이랑 비슷했다. 쓰러지면서 안경이 벗겨졌나?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위 풍경과 내 방이 아니라 무척 낯선 어떤 곳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냄새도…
  …내가 언제 냄새에 이렇게 민감해 진 거지?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시선이 빠르게 이동했다. 달리는 말이나 차에 올라탄 것 같아. 그리고 내 눈앞에-
  수백, 수천 배로 거대해진 어떤 얼굴이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나는 빠르게, 그의 귓구멍으로 달려들었다. 몸에 닿는 털의 감촉이 기분 나빴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시계는 아예 어둠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에 상관없이, 내 몸은 재빨리 그의 몸에 파고들고 있었다. 아니, 내 몸이 아니었다!

  ‘오오! 맙소사! 이건 그 뱀이잖아!?’

  그리고 다시 깜깜한 어둠. 나는 밤과 낮이 수없이 교차하는 듯한 광경을 보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자 이번에는 어떤 정원이었다. 영화에서나 가끔 보는 영국식 정원 미로. 깨어나 보니 몸도 바뀌고 풍경도 바뀌고 있더라- 하는 것은 오늘 한두번 겪는 일이 아닌지라, 나는 덤덤하게 일어나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제대로 들어왔다면 이곳이 장지우의 정신세계라는 것인데… 그가 최근에 대작을 집필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니, 그걸 꺼내다가 내가 쓰면 되는데…
  물론 문체라던가, 그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나도 나 자신의 문장에 대해서는 조금 자신이 있었다. 전개와 소재, 줄거리만 가져다가 내 식으로 개작(改作)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다.
  그럼 일단은 찾아야겠네. 어디부터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내 앞에서 일전의 그 뱀이 빠르게 어디론가 기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볼 것도 없이 그 뱀을 따라 뛰었다. 그 뱀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정원 미로에 뛰어들었고,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본 것은.

  “이게 다 뭐야!?”

  미로 안에서 여태까지 정원수라고 생각했던 것을 들여다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있었다. 둘둘 말린 원고지 가지에서 자라난 글자들이 잎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아. 진정 이것이 작가의 정신세계란 말인가?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긴. 남이사 머릿속에 미로를 만들던 63 빌딩을 짓던지 삼풍 백화점을 만들었다가 우수수 무너뜨리던지 내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원하는 것만 가지고 나가면 된다. 나는 천천히 나뭇가지(?)에 달린 글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으음… 이것은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으아악! 이 작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잠시 살피던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앞뒤도 전혀 맞지 않는 단지 단어의 나열들이 있었을 뿐, 이 미로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없…

  “…지가 않겠지. 원래 미로라는 것은 그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법. 암.”

  그렇게 굳게 믿으며 나는 미궁의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길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왼쪽 벽에 손을 대고 천천히 걸었다. 눈을 가득 메우는 글자 중에 뭔가 쓸만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고 있었다. “배고파” “졸려” “자고 하자” “놀고 하자” “먹고 하자” “딩굴 딩굴” …등의 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분을 걸어갔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진다고 느낄 무렵, 나는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광장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디밭? …하지만 역시 여기에도 역시 잔디 대신 글자들이 자라고 있군. 이건 글잔디라고 불러야 하나?
  그리고 그 한가운데, 글자들로 이루어진 가운데 흰 종이와 붉은 줄이 가 있는 원고지들로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는 가운데, 고이 모셔진 황금빛 장정의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갈수록 가관이다. 아무튼 저게 내가 원하는 보물이겠지?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 책을 들고 첫 장을 넘겨서 내용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내용, 가지런하게 정리된 폰트의 글자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이것이다. 역시 미로의 정수(精髓). 이것이 이 사람이 발표하려는 신작! 이걸로 나도 이제 팔자를 피게 되었다!
  책을 들고 우하하, 하고 웃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놓친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아무리 생각을 하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얼 놓치고 있는 거지?
  뭐, 상관없나. 필요한 물건을 얻었으니 빨리 나가자.
  나는 걸음을 빨리 해서 내가 지나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길었다. 너무 길었다. 이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나는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같아. 게다가 이 길은 아까 지나왔던 길이잖아!
  벌써 두 시간이나 걸었는데 나는 아직 미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냥 간단한 미로였는데! 이러다가 여기에서 죽으면… 아니지. 겨우 남들에게 떵떵거리며 살수 있는 열쇠를 쥐었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나는 남은 힘을 짜내서 필사적으로, 이번에는 덤불을 헤치며 직선으로 나아갔다. 글자들에게 온 몸이 긁혀서 금새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 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사소한 상처였다.
  과연,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던 건지, 잠시 후에 오른쪽에 눈부신 빛이 보였다. 출구다! 나는 기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그리로 달려나갔다. 눈부신 빛,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저것은, 아주 익숙한…
  뱀이 입을 다물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내 몸이 꿰뚫려 지는 순간, 나는 내가 잊고 있었던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처음에 들어 올 때 보았던 뱀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민우가 내게 정신세계로 들어오는 법만 가르쳐 주었을 뿐, 나가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것도…
  내 손에 들려 있던 황금빛 책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둘로 나뉘어 펼쳐졌다. 내가 정신을 잃고 뱀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본 그 책의 저자의 이름은…
  ‘주현빈’

  -인기작가 장지우의 집.

  장지우는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귀에 들어간 물을 빼는 사람처럼 옆으로 몇 번 탁탁 뛰자, 그의 귓속에서 뭔가 투명한 미꾸라지 같은 것이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려서, 그대로 입안에 넣었다. 와드득, 와드득, 과자를 부숴 먹듯이 그것을 뼈까지 씹어 먹은 후에야 그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거실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민우가 그에게 인사했다.

  “이번에는 어떠셨습니까?”

  “나쁘지 않았어. 자신의 안에 숨겨진 보물도 찾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내가 좀 먹는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 어디 보자, 그럼 다음 작품의 집필을 시작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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