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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사형집행일

2012.10.20 01:1710.20

남자는 양팔이 결박된 채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 자세로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등장하자 경호원들은 총을 고쳐 잡았고 사형집행인들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에게는 벌써 열여섯 번째 사형집행이었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한쪽 다리를 불량하게 떨고 있었다. 그에게 왜 그렇게 불량한 자세로 있냐고 물었던 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그는 불량하게 웃어 보이며 가난해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했었고 나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었다. 문득 서글퍼졌다.


상관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상관이 농담을 하는 줄만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으며 상관을 보는데, 상관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걷혔다. 아무리 전시중이라고 해도, 아무리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걸 나한테 시키다니. 그 순간 계기판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빨간 신호가 다시 들어왔다. 담당자는 화급하게 통신을 돌렸다. 빨간 신호 옆으로 우리 군대를 의미하는 노란 점들이 다닥다닥 다가섰다. 나는 손을 뻗어 상관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열심히 가르치고 있어요. 재능이 보이는 친구들도 있고.”


상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 또 도망갈지 모를 놈이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적국에게 폭격을 당한 자리들은 검은색으로 표시되었다. 폭격을 당한 자리는 풀 한 포기 제대로 못 자랄 정도로 황폐해졌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저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상관이 내 손에 쥐어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나는 멋쩍어진 왼손을 들어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기 시작했다.


“생각해볼게요.”


“그럴 시간이 없어.”


“이따가 숙소에서 말하면 안 돼요?”


상관은 눈썹을 곧추세웠다.


“유소이 씨.”


제기랄. 저 호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상관은 그와 나의 관계를 아예 무너뜨리고 전제된 다른 관계만 강요할 셈이다. 저 압력에 노출되어서 굴복하느니, 차라리 상관과 내 개인적 관계 위에서 수락하는 게 나았다. 나는 엄지손톱을 입에 문 상태에로 오른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남자와 내 관계는 10년도 전에 끝난 상태였다. 저 호칭만 듣지 않을 수 있다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사형집행을 맡아버렸다. 내가 수락하자, 상관은 다시 상냥하게 내려앉은 눈썹을 하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서 문득 서랍을 열어보았다. 오래 전 남자가 화이트데이에 선물했던 편지를 아직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버리지 않았다기보다는 특별히 버릴만한 동기를 찾지 못한 거지만. 남자는 쪽지 여러 개를 꼬깃꼬깃 플라스틱 통에 담아주었다. 순서대로 찾아 읽느라 고생했던 생각이 났다. 종이를 펼치려고 손을 뻗었다가, 나는 플라스틱 통째로 쓰레기 분쇄기에 밀어 넣었다. 지금 와서 쓸데없이 저 종이쪼가리를 읽어봤자 마음만 혼란스러울 터였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쳐 지났다. 팔다리를 결박하고 구속복을 입히고 온갖 짓을 다 해 보았지만, 그에게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이 감옥에 지금까지 얌전히 있어 왔던 것도 그에게는 그저 있어 주는 것, 혹은 사형집행인들을 놀리는 것일 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열여섯 번이나 사형장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구속복을 입고 있으니 옷 안쪽으로 문을 열어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는 완전한 알몸으로 사형장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어디에 떨어졌을까. 그토록 자주 얘기하던 고등학교 시절, 90년대의 풍경일까. 어릴 적에 살았다던 80년대의 홍제동 골목일까. 아예 다른 나라에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르는 그의 삶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나와 만나는 동안 진실만을 말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 같은 곳으로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는 영화 <백 투 더 퓨쳐>를 좋아했고, 펩시콜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는, 3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젊음의 상징인 ‘펩시’를 주문한다. 물론 한때의 젊은이들이었던 기성세대는 마티의 ‘펩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영화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겠지. 펩시, 라는 발음은 그의 입 속에서 콜라 김이 빠지는 소리처럼 향긋하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그가 하도 그 이야기를 자주 해서, 나중에 펩시, 라는 발음을 들을 때 나는 김이 다 빠진 콜라처럼 눅눅해 보이는 그의 보라색 잇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펩, 시, 하고.


상관은 날 보면서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보았던 등판이 떠올랐다. 상관과 함께 살기 시작한 건 이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상관이 군사적 문제들에 매달려 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시간들이 급격히 줄어들어갔다. 우리 둘 다 견딜 수 없을만한 시점이 다가왔을 때,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해 주었던 건 상관이었다. 상관은 어제도 돌아오자마자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잠이 들었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하얗게 드러난 상관의 가슴팍에 천천히 손을 얹어 보았다. 상관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챘다. 상관과의 마지막 섹스가 1년 전 계곡에서 국지전이 발생하기 전날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깊이 잠이 든 상관은 천둥처럼 코를 골다가, 흐느끼며 제발 죽지 말라고 잠꼬대를 했다. 상관이 꿈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상관이 죽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을 사람들이 몇 년 동안 너무 많이 죽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또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


적어도 이곳에서 그가 문을 열 때 그 문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가 얌전히 사형을 당할 확률은 아마도 0에 수렴할 것이고,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재빠르게 보아야 했다. 그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그 기이한 문을 열었을 때를 생각했다. 나는 그 문이 열렸다는 걸 발견할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내가 처음으로 문을 찾아냈을 때 눈을 반짝이며 내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까봐 내 손을 꼭 붙잡고도 노심초사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수많은 기억들 위에서, 지금은 그를 죽이기 위한 시간들을 찾고 있는 중이라니.


상관은 내가 그 기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수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도 알고 있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이 열리는 것조차 보지 못한다. 설령 본다고 해도 현재 시간으로 돌아올 수 없으면 전쟁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능이다. 그냥 여기가 아닌 다른 우주로 건너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기술을 가르칠 때마다 삶과 기억에 대한 애정과 혐오가 함께 강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순간들을 혐오하고, 가장 괴로웠던 순간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상관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이 기술을 상관에게 전수하는 게 더 효과적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반드시 이 기술을 누군가에게 전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차근차근히 그의 죄목들이 읊어졌다. 그는 우리 군대의 매복 위치, 병참선을 알아냈고, 주요 설비들과 생산물들을 집중 포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바로 전날쯤으로 돌아가서 상황이 터지기 직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그는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여러 번 돌아오는 지점을 엇갈려서 생포되었지만, 그 때마다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또 어디선가 유쾌하게 웃으며 생포되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의 첫 사형이 집행된 것은 2016년 6월이었다. 지금은 2017년, 우리는 1년 동안 열여섯 번의 사형집행을 했지만 한 번도 그를 사형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보고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지난 연애 이야기를 현재의 연인에게 도란도란 얘기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상관에게 그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나는 모든 임무에서 철수되었다. 남자가 생포될 때까지 나는 하루 종일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가르쳤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시간을 건너 뛸 수 있는 사람이 그와 나 둘 뿐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자 그는 낄낄거렸다. 긴 머리채가 흔들렸다.


“예전 여자친구가 머리카락 좀 자르라고 했었는데……."


상관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상관을 향해 목이 부러질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내 얘기가 아니었다. 그 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했다며 내게 투덜거리는 건 그의 단골 레퍼토리 중에 하나였다. 머리카락에 코멘트 좀 한 게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와중에 꺼낸 말이 내 얘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시간을 건너뛰지 못하는 다른 집행인들은 눈에 힘을 주고 계속 낄낄거리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악마였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그는 자신의 상관들보다도, 반대 진영의 총사령관보다도 더 악마화 되어있었다. 저렇게까지 혐오의 대상이 된 데에는 그의 기이한 외모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 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헤어진 이후로 적어도 20킬로그램은 더 찐 것 같았다. 벌써 10년쯤 전이니까. 내가 저 악마의 전 애인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나는 상관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나까지 악마와 같은 취급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나를 혐오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했었지만 나는 어떠한 혐오의 기미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전우였으며 동지였다. 나는 여전히 비교적 좋은 전술적 감각이 있으며 진지하게 이들과 함께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 나는 상관을 돌아보았다. 상관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선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잠깐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얼른 다시 눈을 그에게 고정했다.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사형집행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기는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언제나 지나치게 이벤트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이곳에는 커튼도 없고, 부저도 없다. 그는 평범한 사형수가 아니니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시중이고, 그 같은 범죄자에게 교수형이 허용될 리가 없다. 모두가 초조하게 빨간 등을 지켜보고 있다. 총은 소음총이지만, 그는 어떻게든 죽기 직전에 형장을 빠져나갔다. 빨간 등에 불이 들어왔다.


곧바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나는 눈을 부릅떴고, 순간적으로 그의 죄수복이 환하게 빛났다. 그의 몸이 죄수복 안에서 분절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석궁을 놓치지 않게 꼭 쥐고서 빠르게 내 몸의 구성을 해체했다. 그는 시간의 기류를 타고 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온전히 기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빛 속을 내달리는 그의 맨 엉덩이와 허벅지가 보였다. 나는 그를 따라 뛰면서 소매 한 쪽을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꼴이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의 맨살이었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고궁이었다. 나는 그와 약간 차이를 두고 떨어졌다. 고궁이라고 해도 이 시대가 조선시대는 아닐 터였다. 차원의 문을 연다는 것도,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통해서 여는 것이니만큼 살아오지 않은 시기의 문을 열 수는 없다. 그저 다른 세계의 우리들을 찾아가는 것뿐인데도, 사람들은 도무지 그 기억들의 파편을 연결해내질 못한다. 단지 그 파편의 반짝거림만 찾는다면 문은 금방 발견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알몸인 채 고궁 벽을 따라 한 걸음씩 움직였다. 나는 고궁 벽에 붙어서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따라가고 있자니, 그가 날 따라오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어처구니없이 실소했다. 그를 만나고 있을 무렵에, 나는 거의 신경증 환자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터뜨렸고, 그에게 꺼지라고 소리쳤다. 그는 묵묵히 몇 시간이고 가만히 나를 따라오곤 했다. 그 수많은 기억들을 지나, 지금 그는 내가 뒤에 있다는 걸 모른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나는 아주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를 따라가고 있다.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연못이 나타났다. 경회루라는 안내판이 햇빛에 반짝였다. 안내판 옆에 수정펜으로 쓴 오밀조밀한 글씨가 보였다. “TAIJI BOYS 영원히 96. 5. 23”. 글씨는 쓴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했다. 1년 단위로 넘어오는 문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틀림없이 1996년 5월 24일이었다. 평일 낮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알몸의 그는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고, 그가 가는 길에선 몇 번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는 비명 소리에 개의치 않고 훌쩍 담을 뛰어넘었고, 나 역시 그를 따라 고궁의 담을 뛰어넘었다. 담 아래로 내딛는 발소리에 그는 이쪽을 흘깃 보고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쪽이었다. 1996년이라면 그가 고등학생일 법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가 달려간 길을 정신없이 쫓아 뛰었다. 짧은 머리의 소년이 허둥거리며 학교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의 가방은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알몸의 그는 여러 번 해 본 솜씨로 곧장 가방을 낚아챘다. 난데없이 나타난 알몸의 남자에게 가방을 빼앗긴 소년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소년의 머리를 학교 담벼락에 짓찧었고, 소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가방을 열어서 부풀어 있는 가방에서 소년의 교복을 꺼내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다 걸치고 나서는 아마 소년을 죽일 것이다.


석궁을 장전했다. 그를 쏠 무기를 찾기 위해 상관과 함께 무기고에 갔을 때 나는 이 석궁을 집어 들었다. 손에 들린 석궁을 보고, 상관은 내게 소음총을 권했다. 이상하게도 도저히 소음총에는 손이 가질 않아서, 나는 석궁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를 놓치면 대체 누가 그 책임을 질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상관은 내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소음총을 집어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 살짝 술이 취한 상관의 손에 내가 들었던 석궁이 들려있었다. 나는 잠깐 가슴이 뛰었다. 고맙다고 웃으며 상관의 목을 끌어안았지만, 상관은 날 끌어안는 대신 침대에 쓰러져 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잠이 든 상관 옆에서 나는 석궁을 끌어안고 그를 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히 이 원시적인 무기는 편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무기가 상상되지 않았다. 느리고 힘이 세며 강한 파괴력을 가지는 단 한 번의 화살.


단추를 아직 다 잠그지 못한 채, 그는 나를 발견했다. 잠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는, 내 석궁이 당겨짐과 동시에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미 화살은 날아갔고, 석궁을 쥔 채, 내 몸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고,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그가 먼저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휘날렸고, 나는 아직 재구성되지 못한 몸들을 서둘러 이동시키면서 되는대로 길게 기른 그 머리카락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거대한 초록색 물결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식물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서 식물에 매달려 있는 열매를 뚝, 따냈다. 옥수수밭이었다. 그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옥수수밭의 아이들〉 이야기를 하던 걸 생각해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옮겨갈 수 있다는 건 현실 세계의 이야기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가상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건 불가능하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아주 간절하고, 애타게,


“어디 있니!”


그는 소설 자체도 매우 무서운 역작이지만,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무섭다고 말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굳이 이 영화를 찾아보았다. 영화는 계속해서 환한 옥수수 줄기들만 보여주었다.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리지만 키보다 높은 옥수수밭은 도무지 그 소리의 진원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소리를 지르는 젊은 여성은 그의 어머니이거나, 그의 보호자 역할을 할 여성이리라. 그렇다면 그는 나이 어린 소년일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열심히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그를 찾아 활을 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리지만, 그게 그의 소리인지, 어린 그의 발소리인지, 아니면 바람소리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를 찾는 건 이곳에선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1시간 내에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를 찾기가 힘들다면 그 역시도 어린 날의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기억을 열어서 차원을 뛰어넘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같은 기억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세계는 과잉으로 소멸한다. 바람이 불기 때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나는 천천히 한 걸음씩 걸음을 떼었다. 가까운 발치께에서 울다 지친 쉰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풀을 헤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작고 하얗지만 긴 눈매와 큰 코는 그대로였다. 아이는 울다 지쳐 이제 더 이상 울 힘도 없어보였다. 나는 토끼처럼 가느다란 아이를 안아들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지친 아이는 그대로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아이를 안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어떻게든 이 아이를 찾아야만하고, 나는 그를 죽여야 했다. 그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 올 것이었다.


그는 이 옥수수밭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황망해하면서, 내가 자신을 어디서 노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당혹스러워하면서. 내가 울음을 터뜨릴 때면,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가 지쳐서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있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의 집에서 나는 그의 무릎을 베고 선풍기 바람을 받으면서 지친 개처럼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아이의 몸은 작고 가늘었다.


어린 시절 내 허벅지를 토닥이던 손길들이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엄마와 친구들과 옆집 오빠와…… 지금 내가 죽이려고 하는 그의 손길들. 그는 이곳으로 처음 날아온 것일까. 내가 끼어들지 않았던 순간들에, 어쩌면 지금 내 품에서 잠든 이 아이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죽이려고 하는 그가 나와 한 때 서로 사랑했던 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역시도 다른 세계에서 건너왔을지 아닐지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 다른 세상에 가서 살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만난다면, 그건 분명히 내가 아닐 것이지만 내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나 이외의 무엇으로도 사고되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 떨어진다면 나는 나를 부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나와 똑같이 생각했을 그것. 그것을 내 의식이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풀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그는 수없이 자신을 해하며 도망쳤을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함께 있을 때도 그는 자기 자신의 실존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는 냉소적인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게 입을 맞췄다. 저 쪽 편에서 싸우고 있는 그는 지금도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순간보다는 자신의 실존을 더 믿고 있을 터였다. 그와 나의 지향점은 서로에게 들이대고 있는 총구만큼이나 달랐다.


아이의 몸이 따뜻했다. 이 작고 예쁜 몸이 그가 된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은 다정한 동시에 끔찍한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을까, 아니면 이 우주의 삶은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옥수수밭이 얼마나 광활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으로 떨어진 지 45분 째, 바람이 뒤틀린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바람이 모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스무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머리 위로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잠든 아이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가 잠투정을 할 듯한 눈으로 날 치어다보았고, 나는 가볍게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아이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은 뒤 등에 석궁을 걸쳐매고 열 발짝을 내리 달렸다.


나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의 발을 보고 있다. 그는 그 사이 발바닥에도 투실투실하게 살이 올랐을 것이다. 발바닥을 넘어서 그의 약간 너덜거리는 교복 와이셔츠가 보였다. 그는 이제 곧 불혹이 될 배 나온 아저씨였다. 나는 그의 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물가물, 손이 닿을 것 같다고 생각하자, 시간의 바닥이 텅 하고 열렸다. 갯비린내가 나는 곳이었다.


갯벌에 커다란 무대가 펼쳐져 있었고,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가고 있었다. 호피무늬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가 고양이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기왕이면 내가 없는 기억을 선택해서 떨어지는 게 나았을 테지만, 아마 계속 내가 쫓아오고 있는데다가, 그 역시도 다급한 마음에 기억들을 찬찬히 골라볼 시간이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상관이 내게 이 일을 맡긴 이유도 바로 그것일 터였다. 이 일만 아니었으면 다른 것들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사형집행보다는 전술에 관한 문서를 작성하는 게 내겐 더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마음이 아파졌다. 나는 이 전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 노래가 나오고 있을 때, 아마 열아홉 살의 나는 무대 앞의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꽤 고생했었다.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섞여 있었고, 그 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듯 했다. 몸이 많이 약했던 나는 지쳐서 밀려나왔을 것이다.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때 저기에 있었던 건 사실일까, 포기하고 술을 마시러 가지는 않았을까, 분명 저 군중들 속에서 리치 코젠의 노래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기억은 당연히 진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사실 리치 코젠이 무대 위에 올라왔을 무렵에는 아주 멀리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 마치 가까이서 듣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군중들 틈에 끼어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랬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만약에 1시간이 지나도 그를 찾지 못하고, 그가 먼저 자신을 찾아내서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그를 사형시키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기억을 타고 돌아가야 하니, 결국 그가 날아가기 직전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때 나는 뭐라고 말하면서 사형집행의 순간에 실패의 보고를 할 수 있을까.


상관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기술을 전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죽고 나면 나는 그 기술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된다. 적들 역시 나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거라고, 몇 번씩 강조하고 나서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아군에게도 난 썩 달가운 사람이 아닐 터였다. 내가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열심히 싸워서 일구어낸 모든 성과들이 한 순간에 없어질 수도 있었다. 기억을 돌아가서 상황을 읽고 돌아온다는 건 다른 세계들의 승리에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리위원회가 그 사항을 점검하기에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인식이 넓지 않았다. 수많은 교육들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시공간을 건너뛰는 법을 알려주지 못했다. 가르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내가 가르친 이들 역시 그처럼 우주를 건너뛰는 사형수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아까 보았던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얼굴이 가려진 사형수 하나가 어깨를 옹송그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혹시 내 움츠러든 어깨만 보고서도 상관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상관은 언젠가부터 내게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워 질 때마다 그의 이야기를 상관에게 털어놓은 것을 후회했다. 사형수가 된 나는 옷 안으로 문을 열어서 도망을 친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리치 코젠이 연주를 시작했고, 불현 듯 정신이 든 나는 대학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날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정말로 마셨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건 그 기억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가 술에 취해 친구들에게 무어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겁먹은 표정의 나이 어린 소녀를 보고 나는 한숨을 참았다. 나는 화장기 없이 푸석푸석한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겁먹은 눈을 한 채 웃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나는 그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아저씨 전화기 여기 있어요.”


스물일곱 살의 그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건 휴대폰이잖아, 전화기 어디 갔어, 전화기.”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고, 어린 나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크게 웃어보였다.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나는 저때 울고 있었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집 전화기라도 가져 왔냐며 낄낄거렸다. 그는 내 앞에서 자주 술을 마셨고, 저녁이면 나는 그와 함께 늘 취해 있었다. 난데없이 온갖 울음의 기억들이 솟구쳐 올라왔다. 술에 취한 그는 친구들 앞에서 그녀에 대해 ‘평생 끌어안고 갈 거라고’ 말했고, 나는 여행지의 술집 화장실에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그 날 밤에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다정스럽게 나를 향해 내가 아닌 이름을 불러왔고, 나는 그 꿈속에서도 그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잠이 든 그의 팔을 붙잡고 나는 다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열아홉 살의 질투 많고 겁 많은 나는 있는 힘껏 다리를 버티고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색 교복 와이셔츠의 배 나온 남자가 스물일곱 살의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거칠게 스물일곱 살의 그를 떠밀었고, 그 와중에 그의 손에 들린 칼에 열아홉의 내 팔뚝이 날카롭게 베였다. 마음속의 실핏줄이 터졌다. 어린 나는 자기 팔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내가 떠올린 순간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할 거라던 그의 넋두리였다. 나는 석궁을 들어 그를 향해 겨누었다. 그의 마지막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날카로운 상처가 되고 싶었다. 돌아가야 할 곳을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내 삶은 상관에게 그와의 관계를 고백하기 훨씬 이전부터 궤도를 이탈해 있었다. 잘못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날 뚫어져라 보다가 날 향해 짐승처럼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의 눈 속에서 온갖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심장이 물어뜯기는 걸 분명하게 느꼈다. 나는 느슨하게 감각을 열어서 날카로운 감정들을 다 받아냈다. 가슴에서 감정의 끈들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을 그대로 전달받은 그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가 활시위를 당겼을 때, 그는 힘겹게 차원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를 따라 돌아다녔던 수많은 예전들처럼, 나는 그의 뒤로 발을 옮겼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좀 더 명확해졌다. 나는 시외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도로는 광활한 들판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버스는 어딜 봐도 시골 동네로 보이는 곳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려야 하는데, 내 어깨에 여전히 열여덟 살의 내가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바로 내 옆으로 건너왔다. 그의 기억과 내 기억이 혼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살아남기 위해 이 소녀를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소녀의 왼쪽 귀에서 이어폰이 삐져나와, 음악소리가 들렸다. 김현철의 노래였다.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은 1993년에 발매되었고, 나와 이 소녀는 199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는 이 노래들을 좋아할 가능성이 그리 많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천천히 애인의 색깔로 물이 들고 있는 참이었고, 견딜 수 없이 새로운 세상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머리를 편하게 기대어 주려고 하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 잠이 깨더니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어폰을 제대로 끼웠다. <달의 몰락>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내 옆에 떨어졌다면, 그 역시 그 옆에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나는 등에 매고 있던 석궁을 쓰다듬으며, 차 안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교 때 교복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맞지 않는 모양인지, 단추도 한두 개 떨어져 있었다. 단추가 떨어진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여야 할 사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물색없이 배가 고파졌다. 사형집행 대기 시간까지 포함해서 다섯 시간 이상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앞쪽을 바라보았다. 옆을 힐끔 바라보니, 소녀는 그에게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소녀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뛰었다. 위험한 징조였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소녀는 나보다 빨리 내리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나 역시 그보다 먼저 스물여섯의 그를 찾아내야 했다. 소녀는 내리자마자 후닥닥 터미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소녀의 뒤를 따라 터미널로 걸어 들어가는 내 뒤로 교복을 입은 그가 따라왔다. 터미널 안에서 소녀의 손을 꼭 붙잡은 남자는 색깔이 들어간 촌스러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와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소녀와 남자를 따라갔다. 누가 누구를 죽여야 하는 것인지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째서 남자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며, 나는 어째서 그를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천천히 오른손가락을 왼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심장은 터질 듯이 빨리 뛰고 있었다. 기억을 따라 계속 차원을 뛰다보니, 끝내는 어린 나와 감정이 겹쳐지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의 팔에 꼭 매달린 소녀의 뒷모습은 거침이 없었다. 소녀에게 내 감정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내 책임감은 저 압도적인 설렘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나는 석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살해가 아니라 사형집행이었다. 이렇게 그를 쏘아죽일 수는 없었다. 소녀와 남자는 재래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투둑투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는 그들은 빗속을 내달렸고, 뒤를 따르던 우리들은 걸음을 빨리 했다. 포장마차에 멈춰 서서 그들은 떡볶이와 순대를 샀다. 남자가 소녀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자, 소녀는 허파를 좋아한다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물컹거려서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한 소리 하고는, 허파를 많이 달라고 칼을 든 주인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소주 한 병과 디스 한 갑을 샀다.


언제부터 편의점에서 저 담배를 팔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소주를 마셨던 마지막 기억은, 그가 자해를 하고 내게 전화했던 때였다. 나는 결코 놀란 마음으로 그를 걱정하면서 그를 찾지 않았다. 나는 커터 칼로 그은 자리에 자잘하게 앉은 피딱지도, 그의 보라색 잇몸도, 잇새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그의 모욕들도, 무엇보다 방 한 구석에 쌓여가는 그의 초록색 술병들이 견딜 수 없게 지겨웠다. 나는 그 자리에 도착해서는 그를 한없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 술을 통째로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모든 것이 죽고 싶도록 지겨웠기 때문이었다.


소녀와 남자는 재래시장과 연결되어 있는, 그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내 옆에는 마흔이 가까워 온 배 나온 아저씨가, 90년대 중반의 교복을 입고 떡볶이 포장마차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떡볶이 1인분과 순대 1인분을 시켰다. 나는 허파를 집어 떡볶이 국물을 묻힌 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순대를 소금에 찍고 있었다. 주인은 오뎅 국물 한 컵씩을 담아서 내밀었다. 십여 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뜨거운 걸 잘 마시지 못했고, 그는 여전히 혀를 데지 않았다.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나는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내리깐 눈이 송아지처럼 보였다. 원래 저렇게 착하고 여린 눈빛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에, 나는 휴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갑자기 입술에 강한 전류가 흘렀다. 소녀와 감각까지 겹쳐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옆에 앉은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계기판 역시 붉은 색으로 빛났다.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나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떡볶이와 순대를 깨끗이 비우고 나서, 그는 포장마자 의자 위에 문을 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갈 곳이 어딘지 이제 알고 있었다. 어쩐지 다시는 그 전쟁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를 기다릴 때마다 앉아있던 목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 위에서 꼬맹이 여자애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그는 내게 낄낄대곤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술집들과 가게들을 지나쳐 내달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올랐고, 수없이 내려왔던 길이었다. 내가 화를 내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 내려오기도 했고, 그가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버스정류장까지 날 바래다주기도 했다. 어느 봄날 그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힘껏 이 길을 달렸을 때, 나는 지금보다 빨랐을까, 느렸을까. 그 역시 이 길 어딘가에 떨어졌다면 분명 그곳을 향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어깨에서 석궁을 내려 시위를 매겼다. 활을 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누군가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는 더 빨리 달렸다. 이제는 그때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거침없이 계단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의 방은 이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방문이 잠겨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대자로 누워 있곤 했다. 하루 종일 단둘이 집에 있을 때면, 내 몸까지 눅눅하게 바닥에 녹아들었다. 온 집안에 코를 찌르는 정액 냄새가 진동했지만, 이미 집의 일부가 된 나는 느낄 수도 없었다. 행복했던 기억들이다. 방문을 열자, 그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가면서 동시에 몸속으로 느닷없이 저릿한 충격이 밀려왔다.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던 날, 그는 내게 끊임없이 모욕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거칠게 옷을 벗겼다. 그가 내뱉은 모든 언어들이 명치끝을 아프게 찔러왔다. 시위에서 날아간 화살은 그의 배를 관통했고, 그는 칼을 꼭 쥔 채 모로 쓰러졌다. 그가 내 위에서 날 짓누르며 단속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날 상처 입히기 위한 그의 모든 움직임들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괴로웠고, 기뻤다. 드디어 우리는 서로의 지울 수 없는 명백한 상처가 되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는 나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낯설고 강렬하게, 냄새 나는 모텔, 술에 취해 뱉어놓은 토사물, 그의 핏방울, 보라색 잇몸, 자살하겠다고 칼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던 발자욱 소리, 밥 짓는 냄새, 달의 몰락, 스티븐 킹, 커트니 러브와 차갑게 저물던 저녁, 굵은 팔뚝, 가늘게 짓던 웃음, 성기를 입에 물던 소녀의 옆얼굴, 사랑, 사랑, 사랑, 사랑과 함께 짙은 싸구려 커피 냄새가 어처구니없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쓰러진 그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의 옆을 지나, 늘 켜져 있던 그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 아래쪽에 2007-05-24라는 하얀 숫자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스물아홉의 그를 들여다보았다. 바로 옆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서른아홉의 시체가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나는 저 길 어딘가를 올라오고 있다. 손에는 아마, 그에게 줄 생일 선물을 들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그의 옆에 누우면, 그는 날 잠시 끌어안았다가 일어나서 내게 커피를 끓여준다. 그가 끓인 커피는 머그컵으로 한 가득이다. 물의 양만큼 커피도 설탕도 손 크게 집어넣는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까딱까딱, 그의 파일들을 건드리며 천천히 커피를 다 비운다. 게으른 그는 언제나 설거지를 늦게 해서 컵 바닥에는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그 싸구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계단을 자박자박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톤이 높은 소리로 가늘게 노래를 부르면서, 스물한 살의 나는 흥겹게 그를 만나러 오고 있었다. 그녀는 십년 뒤에 자신이 그를 죽이게 된다는 걸 모르고 있다. 십 년은 커녕, 일 년 뒤에 어떤 마음으로 이 계단을 오르게 될지도 알지 못했다. 이 세계에 머문 지 35분이 지났다. 나는 사형집행 임무를 완수했다고 상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러면 상관은 반갑게 날 안아주고 예전처럼 웃어줄 것이다. 나는 웃어주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처음 상관을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웃어주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서라도 이루어야 할 세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니. 나는 눈을 감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나무문에 기대어서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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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도망니 12.10.26 23:24 댓글 수정 삭제
    아... 아닌 밤중에 이거 보고, 나도 몰래 또 보고, 또 한번 더 봤습니다.
    내일 여자친구를 만나야 하는데요.

    잘 봤습니다
  • No Profile
    앤윈 12.10.29 16:13 댓글 수정 삭제
    @도망니 으아니! 여자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한 번 더 보시고 막 그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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