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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히스테리아 선언

2012.03.30 23:4203.30

 빨간 줄이 두 개 나타났다. 센은 누군가가 화장실에 들어올 때까지 삼십 분 가량을 변기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건 구시대적이긴 했지만 믿을만한 검사 방법이었다. 더군다나 세 번 검사 결과가 다 같다면 믿어도 될 법했다. 발소리가 들리자 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치마폭에 테스트기를 감추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방안에 들어서자 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깔린 잔디 시뮬레이션을 밟자, 잔디가 발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센의 자리는 벽에 연결된 정원 시뮬레이션 바로 옆이었다. 꽃향기가 날아 들어왔고, 센은 편안하게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센과 같은 방을 쓰는 탄빙이 보이지 않았다. 탄빙은 이제 첫 임신이었고, 아무 일 없이 열 달을 무사히 버티고 예정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두리번거리는 센에게 진영이 입을 떼었다.
 “아까 진통이 시작되었어요.”
 탄빙은 이 따분한 공간에서 10개월을 견디고서야 겨우 임신이 되었다. 3개월 만에 임신이 된 센은 운이 좋은 셈이었다. 진영의 말은 차분했지만 질투와 절망은 숨길 수 없었다. 센은 진영에게 임신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진영은 깊게 한숨을 쉬고 계속 혼자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진영은 벌써 1년 반째였다. 3년 동안 임신이 없으면 퇴소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년 반 동안 임신이 없다면 화가 치밀 수밖에 없다. 그녀는 화를 다스리려고 애를 쓰는 게 분명했다. 태교에 좋다고 검증된 오랜 옛날의 소리들이 천천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모차르트가 태교에 좋다면 진영의 불편한 심정도 위로할 수 있으리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이 장중하게 울렸다. 어두운 선율 위로 바이올린이 격렬하게 겹쳐졌다. 센은 눈을 감고 있는 진영을 보면서 탄빙을 떠올렸다. 생산원들은 출산실 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출산에 관련한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떤 생김새일지 센은 상상할 수 없었다. 고향에서 누군가 출산하는 날은 온 마을이 시끄러웠다. 아이를 낳는 여자는 온갖 욕설을 다 쏟아냈고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주변을 맴돌거나 신이 나서 음식을 했다. 센은 아이가 나오는 걸 눈으로 본 적도 있었는데, 이 하얗고 조용한 곳에서는 도무지 그 핏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3악장의 선율은 어두우면서도 기묘하게 활기찼다. 조금 더 밝은 주제부가 흐르자 방문이 열리고 탄빙이 기진맥진해서 실려 들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으면서 침대로 손을 뻗었다. 센도 탄빙의 발치 쪽을 잡았다.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을 희미하게 웃으며 올려다보던 탄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어디로 갔어요?"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탄빙에게 관리사는 자애롭게 미소를 띠고 흰 손을 뻗어 탄빙의 눈을 감겼다. 탄빙은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았다. 이제 탄빙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푹 휴식할 수 있다. 아니, 휴식해야만 한다. 생산원들의 몸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었다. 센은 빨간 줄을 다시 생각했다. 산 아래 살던 다부지고 퉁퉁한 수키 언니는 막 태어난, 붉은 볼의 아이를 품에 안고서 딱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방패 유전자 계획이 실행된 건 22년 전입니다.”
 화면에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늠름한 모습이 들어왔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저 영상을 셀 수 없이 보았다. 교육 시간이면 몇몇 생산원은 바로 졸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초롱하게 눈을 뜨고 자신이 만들 미래의 아이, 미스터 언빌리버블을 지켜본다. 화면 속에서 미스터 언빌리버블은 언제나 멍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걷는다. 때때로 그는 코를 후비기도 하며,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르기도 한다. 센은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몰골 위로 겹쳐지는 교육담당 관리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기이하게 들렸다.
  “25년 전, 우주인을 모집하던 한국 정부는 G-테스트 중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9G까지만 올라가야 할 기계가 129G까지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테스트를 받던 열 명 중 아홉 명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바로 이 남자, 미스터 언빌리버블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목숨과 맞바꿔서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제 미스터 언빌리버블은 적어도 그 아홉 명보다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머리를 긁으면서 멍청한 표정을 하고 기계에서 걸어나오는 영상은 센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좀 더 정확히는 지구인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산골짝에 살던 센만 이 영상을 그 당시에 접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화면 속에서 과학자 한 명이 손을 떨며 말했다.
 “언빌리버블.”
 “바로 이 장면이,”
 관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몇몇 생산원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센의 뒤쪽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부분은 몇 번씩 봐도 볼 때마다 울게 돼.”
 교육담당 관리사는 엷게 미소를 띄우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이 감격하는 바로 이 장면, 모두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이 장면은 전세계에 전파를 타고 퍼져나갔고, 그 이후로 김동균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미스터 언빌리버블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 과학자들은 여러 기계들에 계속해서 미스터 언빌리버블을 밀어넣지만, 미스터 언빌리버블은 수중생물들조차 심장이 터져버릴 수압 속에서도 무사히 나오고, 모든 금속을 우그러뜨리는 기압 속에서도 무사히 나온다.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얼빠진 웃음 뒤로 신나는 배경음악이 깔렸다. 그 다음 장면은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신체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장면이다. 이상한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근육이 특별히 발달한 게 아니라는 것, 관절이 기이한 게 아니라는 것, 뼈가 더 튼튼한 게 아니라는 것, 피부조직이 평범하다는 것들이 자막으로 아주 커다랗게 깔렸고, 몇 번씩 본 영상이지만 영상 앞에 앉은 생산원들은 때마다 감탄사를 토해냈다.
 자막의 하이라이트는 여기였다.
 [미스터 언빌리버블은 우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였다.]
 미스터 언빌리버블을 실은 로켓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센은 똑같은 장면을 몇 번씩 보고도 지치지도 않고 또 눈물을 짜내는 생산원들이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제는 지겨웠다. 센은 책상 위의 노란 책자를 들여다보았다.
 [미스터 언빌리버블 - 김동균이 혈액 몇 통, 피부조직 몇 만 개, 털 몇 뭉치를 남겨놓고 지구를 떠나고 2년 후, 두 번째 방패 보유자 - 찰스 도지슨 등장]
 미스터 언빌리버블보다 찰스 도지슨은 훨씬 똘망하고 예쁜 인상이다. 아직 스킨스쿠버 복을 다 벗지 못한 금발머리 소년이 한쪽 팔에는 울부짖는 어머니를 매단 채 입에 빵을 한 가득 물고 우물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좀 추웠어요, 겨울처럼. 둘러보니까 온 몸이 이끼로 덮인 거 같은 물고기도 있고, 다 눈도 좀 이상하게 생겼고. 솔직히 바다괴물 같기도 하던데. 그런데 데이곤이나 크라켄 같은 거 실제로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음 장면에서 소년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초롱처럼 튀어나온 물고기들의 기괴한 눈이 무채색의 심해 가운데에 번뜩이는 그림이다. 물고기들의 표면은 아주 딱딱해 보인다. 일주일 동안 소년은 심해의 산소로 숨을 쉴 수 있었고, 심해 식물들을 먹을 수도 있었다. 소년을 수색하던 수색대들이 등장한다.
 “초보가 20m 이상 내려갈 리가 없어요. 저희는 근처 수심 30m까지는 샅샅이 뒤졌거든요. 거기다가 장비가 초심자용이잖아요.”
 다음 페이지에는 DNA 그림이 하나 있었다. 눈으로 봐서는 그 차이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교육 관리사는 차이가 나는 유전자를 그림으로 형상화 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방패 유전자였다.
 “소년과 미스터 언빌리버블 사이에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압력을 막아내는 이 유전자에 방패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미스터 언빌리버블처럼 압력을 견딜 수 있지는 않을 거예요. 미스터 언빌리버블의 어머니도, 찰스 도지슨의 아버지도 그랬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여러분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걸 발견해냈죠. 여러분들이 모두 알고있다시피, 여러분은 미세한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유전적 변이가 바로 인류의 커다란 자산입니다.”
 센의 옆자리에서 진영이 관리사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영은 대표적인 방패 유전자 세대였다.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자랐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인류의 커다란 자산’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진영은 체육시간에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공무원 두세 명이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붙어있었다. 진영은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았고, 진영이 완수해야 할 사명은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진영은 어릴 적에 동화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마녀를 물리치는 것과 마녀를 물리칠 아이를 낳는 것은 엇비슷한 일이었다. 영양공급으로 건강한 자궁을 사용하고 난 후의 삶이란 당연하게도 풍족한 연금이었다.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진영은 센에게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센은 진영 같은 사람을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만난 적이 없는 웃음. 진영에게는 경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살이 오른 하얀 손이 센의 손을 잡았을 때, 센은 거칠게 손을 잡아 뺐다. 진영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센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떤 위축도 없이, 지금 있었던 일이 아예 없었던 일처럼 진영은 센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이곳의 잔디에는 벌레가 없고, 꽃들은 시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딱 적정한 양을 얻을 수 있고 과하게도 덜하게도 되지 않는다. 거친 곳에서 살아 온 센은 한참 후에야 이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체보다 몇 만 배는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센은 예법을 갖추기 위해 고생을 했다. 모두가 센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고, 하얀 치마폭이 사랑스럽게 나부꼈다. 센이 그렇게 인사를 할 줄 모른다고 아무도 센을 재촉하지 않았지만 센은 열심히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를 따라했다. 센은 열여덟 해 만에 착하게 웃는 법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진영은 다시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진영이 손가락을 뻗어서 버튼을 눌렀다.
 “바나나 간 것 하나랑…….”
 진영은 센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바나나 간 것 두 개 주세요.”
 금방 센과 진영의 자리에 주스로 만든 바나나가 올라왔다. 센은 음료를 입에 대자 속이 역했다. 진영의 눈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가 그녀들의 침묵을 메우는 동안,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음료를 마셨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진영이었다.
 “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어떻게 들을지 잘 모르겠어요.”
 센은 진영이 늘 짓던 상냥한 미소를 만면에 띠우고 진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기 위해서 사 년이 걸렸다고 해요. 그리고 나는 다른 형제가 없어요. 센, 나는, 혹시 나는, 엄마를 닮은 게 아닐까요?”
 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히스테리아’ 증상일 수도 있었다. 센은 진영을 말려야 하는 걸지, 달래야 하는 걸지, 감찰 쪽으로 보고를 해야 하는 걸지, 망설였다. 진영은 센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센. 나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겠어요. 명상을 해야겠어요.”
 센은 안도했다. 교정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진영의 이상상태를 보고하고 싶지는 않았다. 센이 살던 동네의 여성들은 쉽게도 임신을 했는데, 어째서 진영의 어머니는 사 년이나 임신을 하지 못한 걸까.
 진영을 보다가 센 역시 명상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루했지만 매우 편안하게 권태로웠다. 많은 경우 생산원들은 사교 관계보다 명상에 더 집중하곤 했다.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한 생산원일 수록 그랬다. 처음 명상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강사는 명상할 때는 잡생각을 떨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건 그저 생각들일 뿐이었다. 센은 도무지 이들이 말하는 집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눈을 감고, 잡생각을 하곤 했다.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진영의 어머니 대신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몸이 약했다. 어머니는 특별히 가진 땅이 하나도 없었으나 오랫동안 밭에 서 있거나 앉아있을 수 없었고, 다리에 힘이 없어 다른 아낙들처럼 나물을 캐러 다니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센과 오빠는 어렸다. 오빠가 크게 앓던 어느 봄날, 오빠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던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서 휭하니 집을 나섰다. 센은 아버지가 아픈 어머니를 떠났듯이 어머니가 아픈 오빠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센은 조용히 오빠 머리에 손을 얹었다. 오빠의 숨이 뜨거웠고, 센은 이대로 세상과 삶이 멈추지 않는다는 걸 천천히 깨달았다. 방문이 열렸고, 어머니는 의원을 집에 데리고 왔다. 의원은 오빠에게 약을 처방해주고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이야기 한 후, 어머니와 함께 쪽방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센은 마루에 앉아서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땅을 지켜보았다. 햇볕은 따스했고 꽃망울이 맺히고 있었다. 튼튼한 팔로 바구니를 지고 아낙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센은 여기저기 흩어진 하얗고 작은 꽃에 손을 내밀었다. 그 꽃으로 달려들던 벌이 느닷없이 센을 쏘았고, 센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대신 한참 후에 쪽방에서 나온 어머니가 퉁퉁 부은 센의 손을 보고 비명을 질러주었고, 의원은 웃옷을 입으며 껄껄 웃었다.
 “계집아이가 아픈데 소리도 안 지르고 있었니.”
 의원의 거침없지만 따뜻한 손길에 센은 가만히 손을 내맡기고 눈을 감았다. 의원은 차갑게 적신 천으로 센의 손을 싸매어주고 가방에서 작은 약을 꺼내어 센에게 건넸다. 돌아가는 의원은 키가 커서 온 몸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부터 센의 어머니는 가끔씩 사람들을 쪽방에서 만났다. 어머니를 만나고 가는 사람들을 고기 몇 근을 두고 가기도 하고,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두고 가기도 했다. 오빠와 센은 전보다 튼튼해졌지만 센은 여기에서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무두질을 하는 아저씨가 돌아가고 나서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열무를 꺼내서 무치려던 어머니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센은 어머니의 등을 두드렸지만 어머니는 아무 것도 토하지 못했고, 구역질 끝에 눈물만 약간 맺혔다. 어머니는 나지막이 흐느끼며 쪽방으로 들어갔다. 센은 가만히 마루에 앉아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한 쪽으로 다 흘러갔을 때쯤, 쪽방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의원을 불러오라고 부탁했고, 센은 벌떡 일어나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공식 검진은 2개월에 한 번이었다. 자율적으로 테스트기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임신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없었다. 검사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임신 사실을 함구하는 생산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잦은 검사는 생산원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켜서 임신을 막을 가능성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생산원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로 지목되는 것들은 많지 않았지만, 산후 우울증은 분명하게 그 중 하나였다. 산후우울증은 대표적인 ‘히스테리아’였다.
 탄빙은 명백한 산후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센은 탄빙이 몇 번 흐느끼는 걸 보자마자 알아차렸는데 다른 생산원들 그 누구도 그녀가 우울해 한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소문이 빨리 퍼지지 않았다. 처음에 센은 예의바른 숙녀들이기 때문에 남의 말을 잘 옮기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고, 한 달 넘게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서서히 깨달아갔다.
 모든 생산원들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예의바른 미소를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제대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고, 기억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건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히스테리아’를 앓고 있을 때는 언제든 관리사에게 보고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생산원들은 다른 생산원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리사들은 생산원들을 어머니처럼 대했다. 생산원들이 짜증을 부리면 달랬고, 웃어보이면 귀여워했다. 언제나 모두의 관심을 받고 살아 왔으므로 자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생산원들에게 관심을 제공해주는 관리사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타인의 사소한 일들에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낳았다. 그 스트레스 때문에 관리사들은 6개월을 일하고 다음 6개월을 휴직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였다.
 처음에 관리사들은 센에게 “대단하네요, 굉장하다, 멋져요” 같은 말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다가, 센의 반응이 다른 생산원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다른 생산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관리사들은 떠받들어지며 자란 생산원들 틈에서 하루 종일 피로했다. 관심을 보여주길 특별히 원하지 않는 센 같은 생산원이 있다는 사실이 관리사들에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걸 보고 센은 탄빙에게 괜찮냐고 말을 건넸다,
 “어떻게 내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괜찮은 게 뭐예요?”
 탄빙은 온 몸을 덜덜 떨면서 센에게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센은 탄빙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탄빙은 그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탄빙은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방금 뿌리쳤던 센의 손을 잡고서, 탄빙은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나 때문이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관리사들이 달려왔고, 탄빙은 여전히 센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떨궜다. 센의 손 위로 탄빙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썩 기분 좋은 촉감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낳은 아이들이 둘이라고 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여기에서, 이렇게 나왔을텐데, 얼굴도 못 봤어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나빠요. 애당초 그렇게 낳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죠. 미안해요.”
 탄빙은 이번엔 관리사들을 두리번거리면서 미안하다고 정신없이 사과하기 시작했다.
 탄빙은 교정실로 갔다. 사흘 동안 교정실에서 생활할 거라고 했고, 사람들은 탄빙에게 건강해져서 돌아오라고 말했다. 사흘 뒤, 탄빙은 교정실에서 돌아왔고, 예전처럼 착하고 차분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무도 그녀가 교정실에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영의 행방을 누군가 묻자, 탄빙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보고했어요, 진영이 술을 마시고 계시더군요.”
 생산원들의 눈썹이 八자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어쩌면 그런 일이, 안타까워라, 애쓰셨어요, 얼른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센은 멍하니 탄빙을 바라보았다. 보고하지 않았지만 센 역시 진영이 ‘히스테리아’를 앓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진영은 매일 두려워했다. 자신의 가치가 사라지는 걸 자궁 속에서부터 느끼는 기분일 터였다.
 히스테리아가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생산원들의 임신을 막기 때문이다. 임신이 안 된다는 공포감이 짙어지거나 산후 우울감이 심해지면 그녀들의 임신은 지연되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히스테리아를 두려워했고, 히스테리아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관리사들만이 알고 있었다. 교정실에서 돌아온 탄빙은, 예전처럼 웃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센은 배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센에게는 어쩐지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낳는 걸 끝으로 다시는 만질 수 없을 온기라고 생각하자, 센은 도무지 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도 낳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루쯤 시름시름 앓고 나면 하얀 얼굴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때때로 어머니는 의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센은 글자를 익히고 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월경이 끊겼습니다
 센이 그 편지의 글자들을 이해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센의 오빠는 나이가 차고 의원 밑으로 들어갔다. 해쓱한 엄마의 얼굴을 지켜보며, 센의 오빠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수염이 자랐다. 어느 순간 엄마는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았고, 의원은 그럼에도 엄마를 종종 찾아왔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옥색 치마를 입고, 방 안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센은 그 의원을 만나야했다.
 
 교정실에서 돌아온 진영은 센에게 예쁘게 웃어보였지만, 하루 꼬박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늘 조잘거리던 진영이 어색했던 건 센 뿐이었다. 돌아 온 진영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도,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센이 식사시간에 진영을 불렀을 때 그제서야 진영은 센의 팔을 붙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날 괴물이라고 불렀어요.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던가.”
 센은 진영의 팔을 맞잡았다. 진영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가 신을 낳을 수 있다면 난 신이 되고야 말 거예요.”
 진영은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몇 명의 관리사가 진영의 식사를 챙겨주는 걸 보고서야 센은 탄빙을 돌아보았다. 탄빙 역시 몇 명의 관리사가 계속해서 그녀 주변에서 무언가를 시중들고 있었다. 진영은 화려한 은식기를 우아하게 들고서, 아주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는 묵묵히 밥을 입으로 떠 넣었다. 밥을 씹어 삼키는 입술과 치아만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실제인 것처럼 밥을 먹었다. 센도 묵묵히 밥을 입으로 떠 넣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관리사들은 괜히 방에 남아서 진영의 머리카락을 만져주거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진영은 힘없이 가만히 그들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관리사들이 방을 나가려고 문을 열 때, 센은 진영의 손바닥 위에 글씨를 썼다.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진영의 눈이 하얗고 날카롭게 번뜩였다. 센은 고개를 흔들고 목소리를 낮췄다.
 “지울 거예요.”
 진영은 아까보다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질투와 놀라움이 섞여지나갔다. 아주 어릴 적 오빠와 함께 나갔던 시장에서 사탕이 맛이 없다며 집어던지던 아이를 볼 때, 오빠의 눈이 꼭 저런 빛깔이었다. 아마 그 때 센의 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탄빙을 봐요.”
 입을 열자마자 센은 말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을 멈추기엔 때가 늦어 있었다. 진영은 서늘한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센은 탄빙이 불쌍해 보이나 봐요. 센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는군요.”
 “어릴 때, 아이를 지울 수 있던 의사가 있었어요.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진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홉떴다.
 “아이를 낳지 않을 생산원이라니. 당신은 대체 왜 살고 있는 건가요?”
 센은 손을 뻗어서 환경조절장치를 만졌다. 몇 번 버튼을 누르자 바닥까지도 찬란한 별빛에 휩싸였다. 센은 환한 어둠 속을 걸어 다녔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안내 책자에는 ‘아이에게 미리 체험시키는 아름다운 우주공간’이라고 설명되어 있던 기능이었다. 센은 때때로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센 자신만을 위해서 이 환경을 만들어두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센이 어둠 속에서 황홀해하면 심리적 즐거움이 임신에 좋은 환경을 만들 거라고 진영은 즐거워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아요.”
 진영은 환경조절장치를 다시 돌렸다.
 “센, 지금 당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이건 히스테리아에요.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는 유산할 거예요. 교정실은……”
 진영이 뚝 말을 멈추었다. 교정실에 다녀 온 사람들은 누구라도 평안한 표정이 되었다. 교정실은 적어도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릴만한 곳이라는 뜻이라고, 모두들 추측했지만 누구도 교정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센은 교정실에 다녀 온 사람들이 늘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표정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진영 역시,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돌아왔었다. 잠깐 말을 멈춘 순간, 진영의 눈에 히스테리아를 앓던 때의 힘있는 얼굴이 돌아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센은 그곳에서 진영이 무슨 말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지 차마 더 묻지 못했다. 다만 센은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문들이 위치를 바꿨고, 모든 바닥이 움직였다. 편안했던 가상공간은 막상 어디가 문인지 찾으려고 하자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가상장치를 다 실험해보아도 그 때마다 변화하는 공간들은 도무지 구멍을 보여주지 않았다. 센은 이 세계가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는 아닐까 의심했고, 영원히 이 곳에서 행복하게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두려워졌다. 센은 안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잔디밭으로 환경을 바꾸면서, 이 불안을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결국 환각이라는 사실에 토할 것만 같았다. 그때, 의자 뒤쪽으로 아주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르게 펼쳐진 잔디밭 한 틈이 차가운 하얀색이었다. 센은 천천히 그 하얀 틈을 쓰다듬었다. 손끝에는 다른 잔디와 똑같은 풀의 감촉이 느껴졌다. 틀림없는 시스템 오류였다.
 그 다음날부터 센은 조금씩 그 틈들을 찾아나갔다. 관리사들은 한 명당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생산원이 부리는 투정을 감당하고 있었다. 투정을 부리지 않는 센은 시선에서 깨끗이 자유로웠다. 한 번 틈을 찾기 시작하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틈들이 한꺼번에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렇게 많은 틈 속에서 어떻게 이 공간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식당의 붉은 카펫 사이에도 하얀 틈이 있었고, 지금껏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조정실 내부가 다 들여다보이는 틈도 있었다. 기계가 그 자체로 완벽할 수는 없었다. 조정실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틈은 어김없이 새롭게 생겨났다.
 센은 점점 진영과 서먹해져갔다. 진영은 우울한 표정으로 센이 뭘 하는지 지켜보기만 했다. 센은 때때로 진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가는 법을 알게 되면 진영에게도 말해줄게요.”
 진영은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시 며칠이 걸려서 센은 그녀가 걸어갈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변하지 않는 진짜인 문을 딱 하나 찾아냈다. 어떤 틈도 생기지 않고, 다른 가상공간에 잠식되지도 않고, 꿈도 아닌 단단한 문. 그 문 자체가 거대한 틈인 단 하나의 문. 센은 문을 쓰다듬어보았다. 센의 손은 가상 잔디 위에서 부드럽다고 말했고, 가상 과수원에 맺히는 가상 과일이 매끈하다고 말했다. 가상 햇볕이 이 손을 따스하게 감싸왔다. 이 문에 대한 촉감을 믿을 수 있을지, 센은 알 수 없었다. 센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렸고, 눈이 시릴 정도로 강한 햇빛이 쏟아졌다. 이 건물 안에서 한 번도 만날 수 없던 햇빛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햇빛은 생산원의 정서에 영향을 미칠 게 자명했다. 센은 가슴이 뛰었다. 천천히 눈이 햇빛에 적응했을 때, 어렴풋이 그림자 세 개가 보였다. 관리사 두 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진영이었다.
 관리사들은 센의 몸을 검사했다. 또렷한 아이의 모습이 센의 눈앞에 떠올랐다. 관리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이를 낳으면 어차피 유전자 검사를 하게 돼요,”
 “밖에 나간다고 해서 아이를 지켜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진영은 고발자의 권리로 묵묵히 검사대 위의 센을 지켜보았다. 고발자는 아이를 지우겠다는 계획까지는 밀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센은 교정실에 불려가지 않았고, 그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임신을 했을 경우에 갈 수 없다는 건, 유산의 위험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센에게는 비밀스럽게 감시역할이 따라붙었다. 고발자인 진영이었다. 어차피 센과 진영은 원래 붙어다니던 사이였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감찰관이었다.
 그날은 센의 임신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센에게는 가슴선이 높은 엠파이어 라인의 새하얀 드레스가 배달되었다. 배가 불러와도 편안하게 입을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만 특별히 허용되는 드레스였다. 모두가 선망하는 드레스를 입고, 센은 연회장을 향했다. 진영이 센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 어깨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굽히면서 센에게 축하한다고 말을 건넸다. 센도 두 번쯤 이 연회에 참석했었다. 여기저기 빛이 찬란하게 흩날렸다. 센을 위해 준비된 자리는 아주 따뜻하고 편안한 의자였다. 센은 교정실의 햇빛을 떠올리며 보드라운 의자 커버를 만져보았다. 센은 도무지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달콤한 딸기 케이크도, 복숭아 향이 감도는 무알콜 칵테일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센은 말없이 옆에 서 있던 진영의 손가락을 잡았다. 진영이 흠칫 놀라며 센을 굽어보았다. 진영이 밥을 꾸역꾸역 먹던 순간을 떠올리고 센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사람들이 다가와서 축하한다고 말할 때마다 진영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적어도 이 손가락은 가짜가 아니었다.
 사회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의 다정한 친구인 센이 새로운 축복을 안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과학기술발전에 하나의 역사로 남게 된 센에게 축하를 보냅시다.”
 연회장 전체가 날카로운 박수소리로 울렸다. 박수소리 가운데에 아주 엷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센은 모른 척, 입술이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웃음 지었다. 간헐적으로 흐느끼는 소리는 반복되다가 잠잠해졌다. 흐느끼는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겠지만, 아무도 그 소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센은 목소리를 낮추어서 입을 열었다.
 “관리사들한테 전부 이르진 않았더군요.”
 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머니는 나를 낳고 나서 수도 없이 아이를 지웠어요. 결국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죠.”
 진영은 그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내 어머니는 살아갈 수 없었을 거예요. 알다시피 난 당신처럼 미리 선택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우리 집은 엄마를 끊임없이 임신시켜야 할 만큼은 가난했거든요.”
 그 말을 마치고 나서 연회가 끝날 때까지 센은 내내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웃어 보이느라 정신이 없었고, 진영은 그런 센을 놓치지 않고 쫓아다녔다. 연회가 모두 끝나고, 주인공과 시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걸었다. 먼저 분통을 터뜨린 건 시녀 쪽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에요? 당신은 당신 어머니처럼 할 필요가 전혀 없잖아요. 그……”
 진영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당신이 낳을 건 그냥 아이가 아니에요.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흔하게 만난, 운동장을 달려서 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넘어져서 다리에 피를 흘리며 엄마를 찾고, 여자애들 치마를 들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그런, 그런 아이들이 아니에요. 어떻게 지울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센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걸어 나갔다. 진영은 빠른 걸음으로 쫓아왔다.
 “나는 그 아이를, 방패 유전자를 가진 완벽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금껏 모든 걸 견뎌왔어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훌륭한 그릇이길 바랐고, 나는 노력했어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는 운동도 잘 하고, 변환기를 통하지 않고 할 줄 아는 언어도 세 개나 돼요. 당신은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당신이 나보다 더 좋은 그릇…… 이라고.”
 센은 방문을 열고 해변을 만들었다. 센이 산 위에 올라가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굽어다볼 때, 진영은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센은 밤바다 위에 간단한 조작으로 노을을 다시 드리웠다. 공식적인 해는 이미 졌지만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도 언제든 햇빛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느 게 진짜 해일까요.”
 진영과 센은 나란히 모래사장에 앉았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난 진짜 모래도 많이 만져봤어요. 이것만큼 부드럽지 않을 때도 많아요.”
 진영이 모래를 한 줌 쥐어 센에게 집어던졌다. 시스템 오류인지, 센의 얼굴에 밀가루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센은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좋은 그릇이 아니에요. 나는 얼굴에 모래를 맞으면, 이것보다 훨씬 아프다는 걸 아는 그냥, 사람이에요. 아마 우리가 낳을 지도 모를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진영은 모래를 쥐어서 자신의 얼굴에 문질러 보았다. 진영은 운동을 상당히 잘 했지만, 다른 학생들이 뛰어 노는 모래밭에서는 달려본 적이 없었다. 푹신한 바닥에서 폐활량을 재면서 달리고 있을 때, 진영의 어머니와 선생님은 관중석에서 진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진영은 달리기를 하면서, 언젠가 태어날 건강한 아이를 떠올렸다. 센은 손을 뻗어 진영의 배를 만졌다. 진영이 훅, 숨을 들이켰다.
 “거 봐요, 당신도 그릇이 아니잖아요.”
 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센은 손을 뻗어 조도를 높였다. 지는 태양이 타올랐지만, 진짜 햇빛만큼 강렬하게 내리쬐진 않았다.
 “교정실에서 봤던 햇빛을 기억해요? 그 햇빛 아래에 서 있다면 당신도 나도 지금보다는 더 아름다울 거예요.”
 진영은 센의 손을 뿌리치고 앉아있던 센을 밀어 넘어뜨렸다. 평생 가장 거친 손놀림이었다. 진영은 센의 배에 얼굴을 묻고 마구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센은 진영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진영은 뺨이 쓸려나갈 듯이 몇 번씩이고 센의 배에 얼굴을 부볐다.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조정실의 틈은 자리를 조금 옮겨있었다. 균열에 손을 내밀자, 손은 쑥 빨려 들어갔다. 진영이 먼저 발을 내딛었다. 커다란 레버를 잡고 그녀들은 잠깐 망설이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레버를 잡아당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가 깜깜하게 내려앉았다. 곧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벽이 사라졌고, 모든 방이 하나가 되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울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눈은 어둠에 빠르게 적응했다. 하얀 방에는 진짜인 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예의바르고 아름다운 여자들은 정신없이 서로를 밀치며 뛰어다녔다. 화장실 벽조차도 사라져 있었다. 아수라장을 가로질러 센과 진영은 단 하나 남은 문을 향해 달렸다. 아무도 문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문은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나무도 아니었고, 화려한 문양도 없는 철문이었다. 문을 열자, 다시 눈이 부셨다. 문 안쪽에서 진영이 황급히 문을 잠갔다.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건물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센은 창문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발을 살짝 내밀자마자 햇빛과 모래가 센을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건물은 사막 한 가운데 있었다. 지평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진짜 모래가 센의 다리를 갈기고 지나갔다.
 어두운 건물 안에 햇빛이 스며든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의 빛은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다. 빛을 보고 달려 온 관리사들이 교정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센은 창문 밖에서 진영에게 손을 뻗었다. 철문에 달라붙어서, 진영은 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센과 진영의 손가락이 스쳤다. 다시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철문이 다시 부드러운 나무 문으로 바뀌었고, 진영의 발 밑으로 붉은 카페트가 내려앉았다. 진영은 결국 눈물을 흘리다가 손을 떨궜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센은 진영을 향해 뻗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모래바람 사이로 걸어나갔다. 하얀 드레스 여기저기에 모래가 섞여 들어갔다. 드레스 아랫단이 뜯어졌다. 센의 다리에 탈출의 흔적들이 새겨졌다. 얼마나 걸어왔는지, 벌써 도망쳐 나온 곳은 보이질 않았다. 사방이 모래바람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센은 뜯어진 아랫단을 손으로 찢어냈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 팔이 쓰리기 시작했다. 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센의 고향은 산이 많은 곳이었다. 산길의 덤불들은 예전에도 센의 다리에 유년의 흔적을 새겨놓곤 했었다. 그 흔적도, 햇빛도 진짜였다.
 센이 이곳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만났던 오빠는 입술에 짙게 화장을 한 여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오빠는 그 여자들의 몸속에서 어떤 세포들이 태어나기 전에 떼어내고 있다고 했다. 몇 번씩이고 다리를 벌리는 여자들도, 딸을 겁간한 아버지도 오빠 앞에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때 오빠는 엄마가 사랑했던 의원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센은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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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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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니 12.04.01 13:08 댓글 수정 삭제
    이번 소설도 잘 봤습니다.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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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04.01 15:18 댓글 수정 삭제
    무려 "기다려"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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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01 10:02 댓글 수정 삭제
    유년시절을 살아가는 산모 묘사가 충격적이었네요
    상상하던 유토피안데 저렇게 보니 끔찍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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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05.03 04:37 댓글 수정 삭제
    저는 자본주의가 대가 없이 사람들에게 기술발전의 혜택을 제공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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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크리 12.05.20 16:59 댓글 수정 삭제
    왠지 불쾌한 잔상이 남는 소설이네요. 문명의 대가는 생각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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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05.22 12:32 댓글 수정 삭제
    슈크리/ 문명이 '어떤 자들의 손에 들어가냐'가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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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eila 12.11.02 09:03 댓글 수정 삭제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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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11.28 04:25 댓글 수정 삭제
    sheila / 그래도 행복해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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