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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허밍웨이 베이커리

2013.03.29 23:2203.29

 

 
 "그럴 거야."
 "그게 말이 돼?"
 "싫음 관둬."
 "그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있어. 그리고 안 지워. 싫으면 관두고 니네 별로 꺼져."
 "비자 만류 기간이 다다음달이고, 기한을 최대한 갱신 연장까지 했기 때문에 돌아오려면 관광 비자를 새로 받아야 해. 그렇지만 센트럴에서 과연 어서 옵쇼 하고 비자를 내 줄까? 엄청 까다로운 거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싫으면 그냥 니네 집에 가. 내가 알아서 애 낳고 둘이서 잘 먹고 잘 살 테니까. 넌 두 번 다시 니 새끼 볼 생각하지 말고. 물론 나중에 애가 성년이 되어 생부를 찾아가 보겠다고 하면 나도 안 말릴 거지만."
 "내가 날 백수에 체류신분도 불안하다는 건 나중 문제야. 네 건강이…… 제일 문제라고. 의사 말 같이 들었잖아. 성공한 예도 있지만 잘 안 되었던 예도 비슷하게 많다고. 이건 종족 차원도 아니고, 외계 차원이라고."
 남녀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공원 저편의 공간이동 정류장 신호등이 주홍색으로 깜박이더니 곧 녹색으로 바뀌었다. [이동 시간입니다. 이동 시간입니다. 대기 시간이 삼 분 남았습니다.]
 곧이어 한 여자가 스카프를 휘날리며 달려와서 얼른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또 한 무더기의 사람과 외계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퇴근 시간이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처럼 부스 안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급히 달려 출퇴근하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다. 이제는 특별관리대상자가 되어 일이고 뭐고, 의사한테 가서 온갖 검사를 받는 것이 일이다. 그게 편치않은 일인 것을 정부도 아는지, 특별용돈까지 쏠쏠히 나오기는 했다. 그것으로 괴로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녀 뱃속의 아기는 지구인과 P-IC:W13IIO성인의 혼혈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고향별을 간단히 숯불별이라고 불렀다. 영상으로 봤던 그곳은 온통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행성으로, 도대체 어떻게 생명이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계 임신은 구식 의학으로는 애당초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센트럴에서는 그래도 가끔 있는 일이라고 했다. 센트럴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어서, 여자는 귀중한 샘플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아직도 의사들이 아기 성별도 몰랐다.
 "엄마가 남자 소개해 준다고 했을 때 만나볼 걸 그랬어."
 "그러게. 나도 아예 혼인한 후 센트럴에 오는 건데."
 "그러니까 넌 집에 가라니까. 가서 다른 여자 만나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나도 너 싫어. 그리고 너, 나한테 아무 필요도 없어. 내가 임신했다고 네 다리라도 붙잡고 늘어질 줄 알았니? 제 새끼 지우라는 놈, 행성째로 줘도 싫어."
 "내가 어떻게 가. 안돼."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하고 애 편이라고 하든지! 이런 것도 일일이 알려줘야 해? 아우 정말 속 터져! 그냥 가, 좀."
 여자는 벤치 손잡이 끝 스위치를 쾅 눌렀다.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 지저귀는 효과음과 함께, 벤치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곧이어 남자의 벤치도 짹짹거리며 내려온다. 여자는 일어서서 공원 입구 쪽으로 걸었다.
 "미안해. 화났어?"
 남자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여자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데다, 다리까지 길고 쭉 뻗어서 보폭부터가 달랐다. 가고 싶어도 항상 성큼성큼 걸어와서 앞을 막아서니 속 시원하게 갈 수도 없다. 지난 몇 주간의 경험으로, 여자는 자신이 화를 낼 때 남자가 특히 좋아한다는 걸 잘 알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심리였다. 좋든 말든 상관할 바도 아니었지만.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여자는 몇 걸음 물러섰다.
 "지금 너하고 이럴 생각 전혀 없거든?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으니 꺼져. 아주 치가 떨리네 진짜."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화 풀어. 애한테 안 좋잖아."
 "지우라며 이 자식아!"
 소리는 소리대로 지르면서 또 배는 어루만지는 여자였다. 화를 내더라도 감정이 너무 깊이 내려가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낳아서 예쁘게 키우자. 응?"
 여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못 이기는 척 남자의 품에 안겼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범죄겠지. 아마도.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살살 벤치에 함께 앉았다. 뺨은 빨개졌고,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숨소리가 씩씩거린다. 남자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이렇게 화를 낼 때면 꼭 토라진 고양이 같다.
 "배 안 고파? 뭐라도 먹으러 가자."
 "너 때문에 안 고파. 됐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단 거 먹을래? 치즈 케잌?"
 "싫어. 다 싫어. 너도 싫고 다 싫어."
 "그러지 말고, 응?" 
 남자의 품은 매우 따뜻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가, 아주 조금만 떴다. 센트럴의 노을이 남자의 어깨에 얹혀 번진다. 황금빛이다. 여자의 갈색 머리칼도 노을 속에서 금빛이고,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심장 구석이나 뱃속 아기가 노니는 양수도 덩달아 금빛으로 물들었지만, 그것이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너 진짜 짜증 나."
 "알아. 미안해."
 "그냥 대충 넘기려고 계속 말로만 미안하다는 거잖아."
 "아니야."
 "됐고, 다음 생에는 네가 여자로 태어나서, 딱 너 같은 놈 만나서 딱 나만큼 힘들어 봐."
 "내가 정말 미안해."
 남자는 순간 긴장했다가, 이곳은 신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못내 안도했다. 여자의 본신은 본디 화끈한 성격으로, 그런 그녀를 사랑한 죄로 그는 억겁의 세월을 말도 못하게 화끈하게 보내온 역사가 있었다. 목을 잘리지 않나, 피를 바쳐야 하지를 않았나, 그도 모자라서 목 잘린 몸 위에서 춤까지 췄었지. 아직도 좀 소름이 돋는 기억이다. 물론 지금 이 세상하고는 별 상관없는 옛 역사지만.
 다음번 색신으로 화해서는 이 여자의 아이를 밴 남자로 살아야 하는 걸까. 그건 또 처음이네. 에이 설마. 이번 색신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냥 농담이었다고 하겠지. 하겠지. 하겠…지.
 "몰라. 난 이제 갈래."
 "최대한 빨리 비자 신청해서 인터뷰 보고, 비자 나오는 대로 들어올게. 두 달을 잡아도 예정일에 맞출 수 있어."
 "그러든지 말든지. 안 돌아와도 돼. 그냥 거기서 계에에속 살아도 돼. 난 이제 그쪽한테 어떤 미련도 희망도 기대도 털끝만치도 없으니까. 애도 걸핏하면 중절을 입에 담는 아빠가 싫을 거야."
 "그래, 다 내 잘못이야. 백 번 천 번 잘못했어. 딸기 크림치즈 케이크 먹으러 갈래?"
 "됐어."
 말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으나 표정에는 화기가 거의 없다. 오히려 좀 멍하니 노을만 바라보고 있다. 좋은 징조다.
 "가기 싫으면 여기서 기다릴래? 내가 가서 사올게."
 "누가 먹는다고."
 그리고 중얼거린다. 나쁜 놈. 나쁜 놈아. 이 정도면 충분히 오케이라고 할 만하다. 남자는 더 지체하지 않고 얼른 일어섰다.
 "딸기 크림치즈 케이크하고 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마실 거는?"
 여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빽 외친다. "시뮬 커피!"
 "알았어. 금방 올게.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됐어! 내 맘이야!"
 그래그래. 남자는 급한 마음에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풀어져 있을 때 얼른 단 걸로 달래줘야지,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센트럴의 시가지는 대체로 한산하다. 작년부터 개설, 가동된 공간이동 부스 덕택에 행인이나 차량의 수가 크게 준 덕이다. 조만간 행성 간 이동 부스 서비스를 개시한다는데, 일단은 센트럴 근처 행성부터 대상으로 시범 시행한다고 했다.
 이런 세상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남자는 금방 베이커리에 도착했다. 길 어디서든 호출하면 날아오는 카트가 아니라, 빌딩 일 층에 자리 잡은 고풍적 컨셉의 빵집이고, 빵 맛도 남다른 곳이었다. (라고 한다, 여자가. 남자는 맛의 차이를 잘 알 수 없었다. 이 빵이나, 저 빵이나.) 남녀가 데이트하던 시절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전통적인 진열창 디자인의 스크린을 죽 훑어 보았다. 복잡하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온갖 케이크 이미지가 저마다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그에게는 다 같은 맛이었는데, 그녀에게는 모두 다 달랐다. 그에게는 포실한 색깔 뭉치처럼 보이는 것이면 다 케이크였지만, 그녀에게는 장식 하나만 달라도, 색깔만 조금 달라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전에 뭐라고 했더라. 아이보리 펄과 베이지 아몬드가 어떻게 같아? 모, 모르겠어. 어쨌든 남자는 일단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진열 스크린에게 "주문!" 했다.
 [메뉴를 선택해 주십시오.]
 "딸기 크림치즈 케이크. 그리고 초콜릿 케잌 중에 제일 맛있는 게 뭐지?"
 [범위가 지나치게 방대합니다. 초콜릿을 제외한 다른 재료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바닐라? 아 그리고 시뮬 커피 하나도 줘. 초콜릿 케잌 중에서 그냥 제일 잘 팔리는 걸로 하나."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부담스럽게 생긴 하트 모양의 비행접시가 케이크 두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담고서 남자 앞으로 날아온 것은 일 분 후였다. 그는 혹시라도, 이 모던한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계산에 실수가 있었을까 싶어서, 공중에 영수증을 띄워 액수를 직접 확인했다.
 "이제 가야지. 잘 따라와라."
 테이크아웃 비행접시는 잘 알아들었다는 양 삑삑 하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둘은 가게 밖 길거리를 나란히 달리기-날기 시작했다.
 남자가 케이크를 공수하러 간 동안, 여자는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다 말고 공중에 뉴스 화면을 열었다. 영상으로 보자니 가뜩이나 뾰족하게 긴장한 신경으로는 부담이라 그냥 단신 텍스트로 열었다.
 [천명관에서 드디어 우주의 전체 지도를 대략적이나마 완성했다는 소식. 지난번 예고했던 세상의 종말 건은 아직도 별다른 설명이 없음. 단면성 존재의 흐름이 다면적으로 폭발했다는 아리송한 말이 전부. 공간이동 부스의 성공을 센트럴에서 세이연 기자가 밀착 취재. 센트럴의 까다롭고 복잡한 입성 절차, 언제쯤 나아질 것인가?]
 가장 궁금한 뉴스는 맨 마지막이었지만 여자는 일부러 맨 첫째를 눌렀다. [요약-전체보기-동영상-프리미엄 메뉴] 중에 요약을 선택했다. [일반-내 위치-옵션] 에서는 내 위치. [행성-성계-옵션] 에서는 행성.
 [천명관이 공개한 지도에 의하면 센트럴의 위치는 우주의 심장이라 할 수 있음.]
 여자는 텍스트 한 줄을 그저 허공에 띄워둔 채 그저 그 자리에 앉아서, 다시금 멍한 얼굴로 노을을 바라보았다. 뉴스란 것이 으레 그렇듯 별로 재미는 없다. 그래도 이처럼 뜬금없이 자신의 크기를 우주적으로 환기해 본다는 것에는 뭔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왠지 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예전에 꼭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딱히 알 수 없지만. 그것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냈다.
 그냥 그렇다.
 아주 오래전에도 남자는 여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렸었다. 여자는 곧잘 죽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했다. 그럴듯한 사랑의 맹세가 오가기도 했다. 배신도, 증오도, 희생도, 기만도, 좌절도, 그야말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생과 사를 지나오는 가운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일들이 있었다. 지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여자는 아직 자신을 모른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이 삶이 신계에서 자신이 짠 각본에 의해 흘러간다는 것도, 신계에서 자신이 가장 즐기던 아침 메뉴는 달이라든지, 거실에서 자라는 달 나무에서 매일 하나씩 따서 구워 먹으면 아주 고소하고 반짝이며 맛나서……. 하계로 내려가서 살아보자는 제안은 주로 여신이 했다. 별로 할 일도 없으니 남신도 동의하고는 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 드라마를 계획하고는 하계의 몸을 받아 내려온다. 인간, 화성인, 오랑우탄, 바위, 거북이, 구름, 바다, 어부, 바다와 노인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 고양이, 킬리만자로의 눈…….
 외계라는 것은 가벼운 눈속임이다. 인간 사이에서 살려니 신들은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천명관이 어떻게 사람과 우주의 운명을 예언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천명관의 직원들조차 모른다. 그냥 컴퓨터로 들어가서 작업을 하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데이터가 나온다. 직원이 아닌 이가 건드리면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어떻게 그리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그냥 그렇다.
 기실은 이런 사정이 있었다. 우주의 의지를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에는 항상 심각한 부작용과 후유증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한 신들은 아예 기관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나라와 성계, 세계들과 연결되었으나 권력과는 상관이 없는, 기상예측기관이나 도서관 같은 무덤덤한 곳. 우주 모든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의 운명까지 기록하며 정확히 예측하지만 떠받듬 받지도 않고, 예배를 집전하지도 않고, 그냥 모든 정보를 다 공개해 버리는 곳. 그냥 그런 곳.
 왜 천명관이 존재해야 하나?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부 소속인가? 처음에는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천명관 측에서는 별말이 없었다. 그냥 있는 걸 뭐, 라는 식이었다. 천명관을 없애야 한다는 놈도 있었고, 찬양하며 영접하겠다고 난리 치는 놈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그들이 받은 대접은 마찬가지였다. 뭐하러 직접 오셨어요? 그냥 집에서 기록 보실 수 있는데. 들어오세요. 초기에는 천명관이 그래도 상당히 개방된 곳이었다. 센트럴의 달로 본부를 찾아온 사람들은 방명록에 서명한 후 건물의 일부를 투어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냥 안 하지만. 이제는 굳이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긴 하다. 남자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를 멀리서 보고 씩 웃었다. 아고, 태곳적부터 울 마누라.
 "자, 천천히 먹어. 오늘따라 더 맛있어 보인다 그치?"
 여자는 자기 앞으로 날아온 딸기 크림치즈 케이크 접시를 한동안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비행접시 포켓에서 포크가 나왔다. 그것을 마지못해 받아 들어 마지못해 케이크로 가져가며, 여자는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공중에 열어둔 뉴스 창이 덕지덕지 아주 많았는데, 잠시 후 알아서 지워졌다.
 "남들은 잘만 계획해서 멋지게 식 올리고 천천히 애 낳고 잘만 사는데."
 "우리도 잘살면 되잖아."
 "난 네가 싫은 게 요점이야."
 "내 잘못이 크잖아. 미안해."
 "언제 취직할 건데?"
 "계속 알아보고는 있어. 그런데 잘 안 맞네……"
 "세상 참 좋아졌어. 옛날이라면 굶어 죽을 걱정을 했을 텐데."
 "의식주야 뭐."
 "센트럴이 전에는 지구라고 불렀다며?"
 "그렇다고 하던데."
 "전에 뭐가 종말했다는 거야? 하나도 종말 안 했는데?"
 "난 요새 뉴스를 잘 안 봐서."
 "그 시점 전에는 시간이 스파게티 한 가닥 같았는데, 그 이후부터 찐빵 같아졌대."
 "그게 뭐야……."
 나도 몰라, 하며 여자는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누구에게는 영원이 다른 누구에게는 한 시간이다. 누구에게는 한 세계가 다른 누구에게는 케이크 한 조각이다. 남자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싶었지만, 여자 눈치를 보며 참았다. 누구에게는 아기가, 다른 누구에게는 반지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 쪽으로 접시를 밀었다. "초콜릿은 네 거잖아."
 "아냐, 너 다 먹어. 난 배 안 고파."
 "아까부터 계속 쳐다봤잖아."
 "네가 참 아주 예뻐서 널 본 거지."
 "무의미한 수작은 관둬."
 "수작 아닌데……."
 그러면서 남자는 포크를 꺼내 케이크에 꽂았다.
 "이것만 먹고 갈래."
 "응?"
 "이제 밤이니까 집에 가서 잘 거야."
 "그래……. 그런데 그냥 우리 집으로 가면 안 될까?"
 "싫어. 어차피 넌 내일 아침이면 다시 지우자는 소리 할 거니까."
 "안 해, 정말이야."
 "그 소리 어제 오후에도 했어. 믿은 내가 바보야. 그제도, 그끄제도, 벌써 이게 몇 달 째야. 어떨 땐 내가 이미 미친 건 아닌가 싶어. 사실 이건 꿈이고, 진짜로는 어디 골방에 갇힌 채 헛것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네가 외계인도 뭣도 아니고 그냥 어디 고장난 기계인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돼."
 "아냐, 진짜야. 그리고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살살 주물렀다. 여자는 인정사정없이 남자의 초콜릿 케이크로 포크를 가져갔다. 한 손으로는 계속 어깨를 주무르면서, 다른 손으로 남자는 여자의 눈물을 닦았다. 둘은 한참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센트럴에 어둠이 내리고, 도로와 건물에 빛이 들어왔다. 수많은 빛나는 스파게티 가닥이 검은 센트럴을 휘감는 것처럼도 보였다. 여자는 자신이 슬픈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남자가 미운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뱃속 깊숙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평온했다. 하지만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게, 특히 이 남자가 미친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미치게 하려고 연기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들 멀쩡한데 자신만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뱃속은 또 평온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물론 애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니까 그건 좋은 일인 것 같긴 한데. 아 진짜…….
 "처음 알았을 때에는 무지하게 좋아했잖아?"
 "응."
 "그런데 왜 그다음에는 갑자기 그런 거야? 아주 싫다는 눈으로 날 봤잖아. 그러다가 이제는 또 잘해주고?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야?"
 "그때는 내가 내 상황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어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어. 그래도 이렇게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잖아, 하하. 하하하."
 "웃음이 나와? 잘 웃네. 아주 살만한 거 같아."
 "미안. 정말 미안해."
 "나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런데 이런 정신으로 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그런데 애는 무슨 죄야. 아 정말, 절루 가 좀!"
 "미안해, 용서해줘."
 남자는 약간 옆으로 가서 앉았다. 여자는 화난 표정이었다가, 얼마 안 가 시무룩해졌다. 초콜릿 케이크는 아직 반이 남았는데, 더는 먹지 않고 포크를 비행접시에 반환한다.
 "인간의 몸에 빗대자면, 센트럴은 우주의 심장 격이래."
 "그래?"
 "아까 뉴스에서 봤어."
 "그래."
 "우주에도 심장이 있다면, 그러면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손톱도 있고 그런 걸까?"
 "글쎄, 있다면 있겠고 없으면 없을 그런 거 같은데."
 "우주가 사람 같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아주 아주 큰 사람?"
 "어떤 인간이 어찌어찌 하다가 우주의 몸 밖으로 나가게 되면 그 밖에는 또 뭐가 있을까?"
 "글쎄, 일단 가능할 것 같지가 않으니."
 여자는 볼록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는 덜컥 겁부터 났다.
 "왜? 뭐 이상해?"
 "아니. 그냥 공기 방울이 톡톡거려."
 "정말?"
 "그런 지 좀 됐어 며칠 전부터. 태동이래."
 "정말?"
 "무슨 상관이야, 지우라며. 새삼스럽게 놀랄 게 있어?"
 여자는 예사롭게 시뮬 커피를 마셨다. 태아는 케이크가 맛있어서 신이 났는데, 여자는 그 낌새를 아무 검사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는 신기하면서 기쁘면서 걱정도 되면서 웃음이 날 것도 같으면서 괜히 덩달아 뱃속이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다 여자의 본신이 드라마의 끝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직 사건의 전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괜히 원망스럽기도 했다. 물론 자신도 동의하긴 했지만. 신계에서 얘기로 하는 것과 직접 색신의 형상을 취해 물질계로 내려와 겪는 것은 많이 달랐다. 이 우주는 그래도 신들이 우주 인간들 속에 좀 섞여 있긴 하지만.
 신계에서 칼리가 가장 선호하는 아침 메뉴는 달이었다. 밤새 자라난 달을 아침 일찍 따서 굽거나 볶거나 했다. 삶는 것은 싫어했다. 그녀는 잘 예열 된 팬에 기름을 두른 후 달을 딱 깰 때의 느낌을 좋아했다. 빛나는 한 세계가 부드럽게 흘러나와 빠르게 익어가는 모습도 좋아했다. 그 속에 둥글게 담긴 시간이 무지개 빛 김을 뿜어내다가 곧 맛있게 익어가는 과정 전체가 흥미로웠다. 달을 바라보다가 그 속의 수많은 드라마 중 하나에 심히 끌리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십중팔구 남신에게 달 후라이를 먹이며 "이런 얘기는 어때?" 하고 운을 띄운다. 십중팔구 남신은 여신의 제안에 별 반대를 하지 않는다. 이윽고 둘은 방금 깨서 구워먹은 세상의 한 점 속으로 훌훌 내려간다. 여신은 원체 성질이 급한지라 이야기의 끝을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그냥 간다. 가끔 둘 중 하나가 달 세상 속에서 본래 정체를 기억해 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흘러가는 드라마를 통제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냥 가는 것이다.
 별들도 그냥 빛난다. 남자는 센트럴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건물과 공중 시설 사이로 꽤나 넓은 면적의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참깨 같고 후추 같은 별들이다. 다음번에는 꼭 결말까지 얘기하게 하고서 내려와야지. 남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케잌 맛있지?"
 "그 집이 잘 해."
 "그래."
 "내일은 슈크림 먹을 거야."
 "슈크림? 그것도 거기서 팔아?"
 "나도 몰라."
 "그래……."
 여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남자는 슬그머니 여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또 밀어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얌전히 안긴다. 보니 눈이 거의 감겼다.
 "그냥 자."
 "싫어. 너 같은 놈을 뭘 믿고. 나쁜 놈아. 볶아먹어 버릴라. 나쁜 놈. 갈대 같아서는."
 "그래."
 "너 정말 싫어. 아유 정말……."
 "그래. 정말 미안해."
 "정말……."
 남자는 케이크 접시를 베이커리로 돌려보내고 택시를 불렀다. 차가 오기까지 오 분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그는 재킷을 벗어 여자에게 덮어주었고, 여자는 곧 잠들었다. 이 세상에서 둘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여자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연신 빗었다.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이 세계에서는 바람까지 물들일 수 있어서, 바람이 줄기줄기 푸르거나 금빛이거나 분홍색이거나 하다. (법규상 지나치게 선명한 색은 사용할 수 없다.) 바람도 시간 따라 이리로 저리로 흘러다녔다. 만약 천명관에서 세계 밖으로 나가는 길을 기록, 공개한다면 어떨까. 그는 여자를 데리고 그들이 신계 시간으로 오늘 구워 먹은 달 밖으로 탈출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 손으로는 여자의 아랫배를 덮었다. 어떤 세상에서든 여자의 출산은 긴장감 넘치는 사건이었다. 그것도 의사들도 몰라 하는 출산이라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강하게 버티고 싶어도, 여자의 말마따나 자신은 갈대 같은 놈인 것이다. 시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그냥 한숨만 쉬었다. 천명관의 기록을 열어보기도 했지만, 자신과 여자의 운명만 치면 항상 에러 메시지만 떴다. 신계에서 이미 여러 번 여신에게 요구해 보기도 했다. [좀 끝을 알고 가면 안 될까, 자기?]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아……. 그게……그렇긴 한데……저기…….
 공원 저편에서 택시가 빠르게 날아온다. 여자는 잠깐 눈을 떴다. 옆으로 누운 휘황찬란한 세상을 졸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남자의 손을 슬쩍 잡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 뱃속 여신의 반지도 함께 눈을 감았다. 찬란한 신계의 달 나뭇가지에 작은 열매가 맺힌다. 어제의 여신은 잠든 채이고 새 달 속 세상 하나가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다. 아직 아무도 오늘을 알 수는 없다. 따뜻한 손 잡고 잠들면 눈물이 그칠 뿐이다. 택시 문이 올라가기 전, 남자는 잠든 여자의 뺨에 얼른 뽀뽀했다.
 
 
 
 
 ---------
 * 상사곡과 같은 세계관이...이라고 할 수 있...있을 것 같아요.
 

mirror
댓글 2
  • No Profile
    미로냥 13.04.01 00:07 댓글

    제 뽀뽀도 받아 주세요 ;ㅂ;)/

  • No Profile
    amrita 13.04.01 11:04 댓글

    제가 해드려야죠. 뽑뽀!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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