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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호접만장蝴蝶萬長

2013.01.31 16:5501.31

호접만장蝴蝶萬長





  우주는 넓고 네놈 하나쯤 날려버릴 행성이야 정원에 깔린 자갈만큼 많다고 아버지는 자주 말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날려버릴 줄은 몰랐다. 
  천수국(千壽菊)은 밝은 황금색 꽃이다. 다 피면 꽃잎이 정말 많아 보인다. 화호는 천수국을 영상으로 띄워놓고 작은 태양 같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보글파마를 한 금발 여자 같다. 물론 모든 천수국의 꽃잎이 그런 모양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훨씬 더 보글보글하고, 어떤 것은 거의 빳빳하다. 그것은 만수국일 수 있다고 한다. 붉은색이 꽃잎에 들어간 것 역시 만수국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캡슐선이 착륙하는 동안 화호가 화면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그런데 왜 천수국성인가, 천수국만수국성이 아니라? 하긴 무슨 상관이랴. 이 행성의 정식 이름은 숫자와 알파벳으로 따로 있지만 그런 걸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냥 지구, 토성, 시리우스, 알파 센타우리, 참깨성, 천수국성, 해왕성, 다섯쌍둥이성인 것이다. 
  이곳에는 꽃밖에 없다. 천수국성은 제1 태양계의 모성(母星)만 한 크기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그냥 통째로 천수국과 만수국으로 뒤덮여 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나를 기절시킨 뒤 배에 싣고서, 여행지를 설정하면서 행성 정보를 열어놓았다. 화호가. 한번 읽어보라는 뜻이겠지.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찻잔이 하늘하늘 날아와 테이블에 안착한다. 곧이어 한 부대의 향기가 살랑살랑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화호였다. 온몸이 긴장한다. 나는- 이런 젠장, 나는, 화호에게는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절망적인 불쌍한 얼굴로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물론 지금 그러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다. 심호흡을 했다. 
  화호는 항상 등장하기 전에 신호를 보낸다. 신호는 주로 향기나 노랫소리- 하프 소리 비슷한 소리이거나 했다. 2차 성징기를 맞아 난생처음으로 자위를 시도하는데 난데없이 침대맡에 나타나서 빤히 내려다보며 “왜 고추를 만져? 의사가 필요해?”라고 했을 때에도,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같은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제발 체화할 때에는,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하듯이, 미리 기척을 내라고.
  화호는 본디 9차원에서 진동하는 존재인데, 내가 아홉 살 때 갑자기 나타났다. 사람들의 눈에 보여야 할 때에는 3차원으로 체화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본래 차원으로 돌아간다. 팔 한쪽만 체화했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며 나와 놀아주었다고 한다. 아홉 살의 내가 까르르 웃으며 나자빠지는 영상이 어디 있다. 
  3차원에 체화한-혹은 시각화된-화호는 정녕 사람 같지 않다. 무슨 입체 전시된 산수화 같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조금 색깔이 짙은 연기가 떠다니는 것도 같고, 머리칼이라고 해놓은 것을 보면 은색, 보라색, 금색, 청록색, 진홍색이 뒤섞여 느리게 흐른다. 피부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눈동자는 체화할 때마다 색이 바뀐다. 움직임에는 무게감이 전혀 없고 티슈 한 장 바람에 날아가듯이 가볍다. 목소리는 정말 존재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목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메아리치듯 울리기 때문이다. 
  사실 화호가 어떻게 말을 하는지야 내가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다. 문제는 화호가 말을 하기는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마 컨디션 문제가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괜찮을 때에는 아무 문제 없이 말한다. 안 괜찮을 때가 문제지. 가끔은 공용어가 아니라 영 다른 우주, 다른 연합의 언어로 말할 때도 있고, 단어가 온통 뒤섞일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내게 말하는 동시에 어디 다른 행성의 다른 누구에게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가 알랴, 동시에 천 명에게 각자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인지, 과거의 말과 미래의 말을 함께 하는 것인지.
  하여간 다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그럭저럭 소통할 수 있기는 한 수준까지 오기는 왔다. 화호는 (컨디션이 수상할 때) 무슨 정보를 읽거나 할 때에는 소리로 말하고, 다른 경우에는 주로 영상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이를테면 사과 먹을래? 라고 물어보고 싶을 때 화호는 내 얼굴 앞에 영상을 한 점 띄운다. 나는 내가 사과를 먹는 영상을 보고 “사과 먹으라고?”라 확인을 한 후, 그러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싫다고 대답하는 식이다. 아니면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화호의 컨디션이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든지. 내가 성질이 급한 놈이었으면 진작에 속 터져 죽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느긋하고 조용해서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한다). 물론 천 년 묵은 거북이라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 아버지가 왜 나를 여기로 쫓아낸 거야? 도대체 왜? 비상사태인 거야? 습격이라도 당했어? 만약 그렇다면 누군데?” 
  화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 대었다. 
  “왜 안 가르쳐준다는 거야?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말랬다고?” 화호는 주변에 황금색 빛의 입자를 흩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죽었다 깨나도 화호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는 백요성계의 연합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다. 연합을 통틀어 대통령과 아버지만이 각하라고 불린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나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화호가 아버지의 명령에 동의했다면 더 큰 문제다. 정말 문제라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도대체 왜? 
  “꽃가루. 꿈. 천수국성의 부작용일 수 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슨 소리, 아니지, 무슨 뜻이야?”
  “산책하고 오면 좋아.”
  나는 더는 아무 말 없이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화호가 설명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말마따나 천수국성이나 돌아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든 뭐가 폭발하든 누가 죽든 연합이 깨지든 뭉치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제나 그랬다. 전함에서 일평생을 보내면서 어쩌면 아버지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는 포기가 빠르고 충돌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무력한 방관자로 자랐다. 아버지가 티를 낸 것은 아니지만, 자식 이름을 소위라고 지었으니 알 만한 것 아닌가. 
  이제는 안 되겠다.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화호, 나 나갔다 올게.”
  “다녀오렴.”
  화호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다가 곧 완전히 사라졌다. 장미 이슬과도 같은 향이 가볍게 어깨를 스쳐 흘렀다. 

*

  노란 물결이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 둥글게 밖으로 피어나는 것이 천수국이다. 만개한 천수국은 모두 꽃잎이다. 어떻게 보면 노란 꽃잎을 모아 축구공을 만든다면 천수국이 될지 모른다. 천수국은 대부분 황금색이거나 주황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곳곳에 자리한 만수국을 보자면 일단 꽃 모양이 천수국만큼 풍성하지는 않다. 색깔은 노란색부터 주황, 주홍, 빨강까지 다양하다. 부피가 비록 풍요롭지는 않아도 색상은 만수국이 더 예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빨간 바탕에 노란 경계를 그리는 꽃잎을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일부러 붓으로 색칠한다 해도 저렇게 완벽하게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솔직히 통째로 꽃밖에 없는 행성이라는 설명을 읽었을 때 믿어지기는커녕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걸어 다니며 본 것 말고도 행성의 영상을 돌려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천수국 들판, 천수국 산, 천수국 골짜기, 천수국 강, 수중 천수국, 수상 천수국, 손톱만한 미니 천수국, 키가 3미터에 육박하는 거대 천수국, 꽃이 두 송이씩 등대고 피어나는 쌍둥이 천수국, 아주 종류도 끝이 없었다. 캡슐이 정박한 곳 근처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연못 수면에 연꽃처럼 빼곡히 피어난 천수국 덕분에 물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꽃 때문에 물이 안 보였다. 
  전함에서는 아직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화호에게 재차 물어보아도 묵묵부답이었다. 하긴 전함을 떠난 지 공통시간으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뒤로는 문이 열린 캡슐선, 앞으로는 천수국 들판, 천수국 언덕, 천수국 지평선, 위로는 분홍색, 진홍색, 은청색, 남색 노을이 소용돌이치는 저녁 하늘이 있다. 
  잔잔히 바람이 불 때마다 수천수만 조각의 꽃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장대한 비누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다르게 인지할 길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거의 평생을 전함 안에서 살았고, 인공적으로 생성되는 바람과 바람 소리 말고 다른 것은 잘 몰랐다. 물론 어릴 적 제1 태양계의 모성(母星)을 방문했던 적은 한 번 있지만, 그건 별로…….
  아버지는 적이 많다. 자잘한 적부터, 성계 연합의 대통령조차 어쩌지 못하는 거물까지. 어쩌면 이미 암살당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네사가 배신을 한 것인지도. 나는 양쪽 관자놀이를 엄지로 세게 눌렀다. 이런 생각을 아무리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무엇보다, 네사가 그럴 리가 없다. 흑사단(黑蛇團)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배신하느니 네사는 차라리 자결하고 말 인물이다. 무엇보다, 네사가 배신하리라 생각했다면 아버지가 먼저 알아서 그를 처리했을 것이다. 비록 네사가 더할 나위 없는 충복이고 심복이지만 아버지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나조차도, 아니, 나는 더더욱 안 믿겠지. 그러니 여기에 이렇게 덜렁 버려둔 것 아닌가. 
  이렇게 혼자 있으니 머리만 복잡하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전함 안일 것만 같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리라 싶은 적 없었다. 그 철벽같은 인간이라면 죽음도 빗겨가리라 생각했다. 그리운 내 방…… 성도(星圖)가 한없이 펼쳐지는 침실 천장과 한쪽 벽을 차지한 컴퓨터,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방바닥, 화초와 분수로 구성된 작은 화단, 그리고 또…. 나는 땅바닥에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상당히 졸리다. 눈뜨기 어렵다. 무겁게 졸리다.
  멀리서 화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자. 그런데 기억해? 천수국성…… 적응 시 부작용 조금…… 꽃가루 때문에…… 컴퓨터의 기계적인 음성이 뒤따랐다. 천수국성의 대기에 존재하는 꽃가루는 몽환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이외의 별다른 증상은 발견된 바 없다. 소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아래로 한없이 꺼져 내려갔다. 털썩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첫 번째 꿈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지구의 행방에 큰 관심이 있었다. 사실 군에 몸을 담기 전에는 백요성계의 변두리 행성에 살았다. 도시계획지구의 민원실 말단 직원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지구에 관한 각종 정보를 모으는데 그게 마니아 수준이었다. 물론 그것은 총각이었을 때 일이고,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는 좀 더 시간을 쪼개야 했다. 
  이것은 꿈이다. 꽃가루 때문이다. 나는 아마 허공에 떠있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몸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저 꿈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겠고, 감각은 마취된 것처럼 멍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환히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정말 예뻤다. 어머니를 지긋이 바라보는 아버지는 내가 아는 그 얼음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때의 아버지는 정말 정상적인 인간같이 감정을 표현하고 드러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꽃처럼 부드럽게 포옹하는데 꿈인데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가 형을 둘 낳았을 때, 아버지는 군에 입대했다. 함선에 온 가족의 거처가 마련되는 데다가 양육, 교육 지원이며 여러 혜택이 많으니 입대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이때만 해도 그 누구도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 본인조차 별다른 야심은 없어 보였다. 군에서의 임무 시간은 민원실에서의 근무 시간보다 훨씬 적었다. 보수는 훨씬 좋았다. 전쟁 함선이 아니었으므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지구 조사에도 좀 더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꿈을 끝내고 싶었다. 아니면 정지라도 하고 싶었다.
  병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나는 갓 태어난 내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우는 모습을 보았다. 갓난아기는 애라기보다는 붉은 살덩이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 장면이 의사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이후였다. 병실 안은 기계음과 아기 울음소리로 가득했는데, 그 소리를 뚫고 아버지의 오열이 들렸다.
  갓난아기에서 병실 밖 복도에 주저앉은 아버지에게로 장면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양팔로 두른 채 울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쉰다. 벽에 기대어 앉은 꽃바구니가 영 머쓱해 보였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큰형과 세 살인 작은형도 멋모르고 울먹거린다. 큰형이 손등으로 아버지의 콧물을 훔쳤다. 그리고 아버지의 셔츠 목깃을 잡아당겨 킁킁 냄새를 맡았다. 꿈이라서인가, 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자리는 어머니의 정수리가 닿는 곳이다. 둘째 형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세 부자가 꺽꺽대며 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많이 달라졌다. 일, 가족, 지구 조사가 전부였던 과거와는 달리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물론 군에서 있다 보면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쉽게 얻기도 한다. 지구에 관련된 정보는 그렇게 자연스레 아버지의 손에 들어갔다. 예전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는 비전투 함선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보급선을 떠나 전함으로, 기본적인 전투 훈련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행성으로, 일반 전투에서 특별 임무로, 아버지의 임무는 점차 그 급이 높아졌다. 몇 번이고 죽음을 면하고 몇 번이고 행운이 따랐다. 특진, 특별 보수와 대우 역시. 그중 가장 중요하다 할 만한 임무는 제5차 성계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아버지의 지휘하에 있던 전함 한 대의 활약으로 트우라 전투의 흐름을 뒤집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처음으로 흑사단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겼다. 성계전을 유발하고 질질 끌어온 흑사단의 아홉 단원이 세크나-3성에 모였을 때 행성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군의 수뇌부와 성계의 지도자들에게 결정적인 인상을 남겼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군의 최고 통솔자가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흑사단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까지도,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여덟 살이었다. 나와 형들이 탄 함선은 제1태양계의 모성에 정박해있었다. 모성 기준 시간으로 밤이었고, 침실은 통풍기 소리를 제외하고 고요했다. 모성의 밤하늘이 침실 천장에 투사되어 오로라와 별을 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았다. 그날 낮에 역사를 조금 배웠다. 천 년 전에 한 무리 인간이 지구를 떠나 우주 멀리 나아갔다. 더 멀리, 더, 마침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질 때까지. 세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 수많은 성계가 인간의 새 지구가 되었고, 결국 본래 지구는 그저 역사책의 첫 페이지 정도로 남고 말았다.
  우리는 스스로 유랑 인류라 칭한다. 유랑 인류는 몇 번이고 귀향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우주의 구조가 달라진 것인지, 무슨 일인지, 기록에 남은 대로 우주 항해를 해보아도 지구에 도착하기는커녕 영 엉뚱한 곳에 떨어질 뿐이었다. 오랜 시도 끝에 사람들은 결국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 영영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주는 드넓고, 행성과 별은 널렸고, 기술은 극히 발달하여 팔찌 하나만 끼면 낯선 행성에서의 적응이 해결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유랑 인류의 성계 문화는 미아의 문화라 일컬을 수 있다, 향수와 그리움으로 점철된.
  그런데 컴퓨터, 왜 우리 엄마는 나를 다 낳기도 전에 죽은 거지. 의료 기술은 전혀 발달 안 한 거야?
  어렸을 적의 나는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도, 비록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보고 싶었다. 형들이 옛날 얘기를 해주면 또 해달라고 조르고 졸랐다. 또래 친구가 엄마에게 안기거나 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가끔 우리 셋을 찾아오는 날에도 무슨 면회 온 사람처럼 테이블 저편에 앉아 묵묵히 있다가 가고는 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안 죽었겠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밤새 잠이 안 왔다. 문득 천장을 바라보면 별이 무성했다. 
  어린 나는 자주 별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뚫어지라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이 무수히 쏟아지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붙잡고 울고 싶은 빛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많은 별 중 하나로 날아가서 그 섬광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양팔을 활짝 벌리고, 모든 것과 아무 상관 없이, 오직 절대적인 믿음으로. 
  화호가 강림한 것은 내가 아홉 살 때다. 그날 밤, 별을 바라보던 나는 난데없는 꽃 무더기에 깔렸다. 모두 이름을 알 수 없는 풍성하고 화려한 꽃들이었다. 향기가 붉고 푸르고 희게 색으로 진동했다. 감각이 서로 혼동을 하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꽃을 헤치고 뺨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언제 눈을 떴는지 알 수도 없다. 여하튼 눈을 떴을 때, 무게 없는 흰 호랑이가 곁에 앉아 있었다. 화환을 목에 걸고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화관을 쓴 여자가 호랑이를 타고 앉아 있었다. 온몸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사방에서 맑은 종소리 같은 영롱한 음이 울려 퍼졌다. 머리칼은 물결처럼 일렁였으며, 눈동자는 무지개 빗긴 수정 같았다. 만발한 꽃으로 엮은 화관에서 연신 꽃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려도 흘러내려도 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화호(花虎)가 내게 뭐라고 말을 했었다. 
  뭐라고 했었지…….

  기억나는 대신 턱이 울울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젠장, 자면서 이를 악물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깼다. 잠에서는 좀 더 느리게 깼다. 하필이면 기억이 날듯 말듯 할 때 깨다니, 아쉽기도 하고 답답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뺨에 닿는 것이 이불인 것을 보면, 자는 동안 화호가 나를 안으로 들인 모양이었다. 
  화호가 처음 나타났을 때 다들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아무도 정확히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9차원의 존재인가보다 하는 것도 막연하게 추정하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기밀부대 요원들이 모여 화호와 대화를 해서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는데, 그러니 더욱 미덥지 않다. 나는 내 나름대로 화호가 어쩌면 천사나 여신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물론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러고 보니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일어나 앉으니 온몸이 뻐근하다. 지금 시각 캡슐선 내부는 장미 벽지가 주 테마였다. 나는 새삼스레 내부를 이리저리 보았다. 이 침대는 일어나면 벽으로 세워지듯 접혀 들어간다. 저편에는 테이블이 있고, 머리방향 벽 내부에는 옷 등이 보관된다. 욕실은 테이블을 지나 문을 통과해 왼편으로 가면 된다. 오른편으로 가면 부엌과 거실 공간이 나온다. 말이 캡슐선이지 작은 우주선이나 다름없는 크기와 구조였다. 식량과 물은 평생 가도 바닥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이 행성에서 평생 살게 된다 하더라도. 젠장. 젠장! 도대체 왜! 왜!
  “야! 당장 운행 시작해! 목적지는 아버지 전함! 가자고! 우리 귀향한다! 모함으로 귀환! 지금!”
  운행이 다 뭔가. 열려 있는 문도 안 닫히는데. 문 바깥으로 천수국 몇 송이 살랑거릴 뿐이다. 
  “통신! 모함과 통신 연결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정도라도 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지금이 몇 시이고 며칠인가. 설마 자는 사이 며칠씩이나 지나간 건 아니겠지. 시간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한 시간만 지났을 뿐이다. 캡슐선의 시스템은 여전히 잠잠했다. 혹시 고장 난 건 아닌가 불안할 정도다. 미칠 것 같다. 답답해서 미치겠다.
  “화호! 어디 있어?”
  “여기.”
  깜짝이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빨리 대답하는 경우는 드물다. 화호는 물결치는 빛과 함께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아버지는 어디 있어? 살아 있어?”
  “만날 있는 데에. 살아.” 
  아직 죽지는 않았구먼. “그래,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왜 갑자기 날 여기로 보낸- 아니지. 한 번에 하나만 물어야지. 도대체 아버지가 있는 전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비상이래. 다들 바빠. ‘그 개새끼들이 기어이 사고를 치려고 작정했구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라고 고래고래 난리 치고 있어. 소위하고 똑같아. 난리 치는 거.”
  일단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서 지랄하고 있는 듯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개새끼들이 누구야?”
  “흑사단.”
  “흑사단에서 뭘 계획하는 건데?”
  화호의 표정이 약간 미묘해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너무 일반적인 질문이었다. 빨리 질문을 보충해야 한다. “흑사단에서 뭘 계획하는데 아버지가 이 난리야? 다른 계획 말고, 이 계획만 간단히 말해줘.”
  “태양 도둑질.”
  “태양을 뭐?”
  “태양을 훔칠 거야.”
  “뭐? 아니, 뭐? 아니, 잠깐! 잠깐만.” 나는 멍해졌다. 그야말로 멍해졌다. “그 개새끼들이 뭘, 뭘 한다고?” 
  화호는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흑사단에서, 제1태양계의, 네트리 태양을, 훔칠 거래.”
  “어떻게?”
  “크고, 지지직거리는 총이 있어. 그걸로 태양을 잡을 거야. 아무튼. 그게 계획이래.” 화호는 잠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빵 부스러기 나르는 개미들을 미묘하게 바라보는 호랑이 같다. 
  “그게 성공할까?”
  “끝까지 가면, 성공해. 그게 걱정인 거야? 괜찮아, 소위야.”
  “아니, 그게…… 아, 그래, 고마워.”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냐!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꽉 감쌌다. 
  흑사단은 성계의 곳곳에 뿌리내리지 않은 곳이 없는 비밀 조직이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놈들이다. 뭣하면 여기서 전쟁 일으키고, 저기서 교란을 일으키며 연합 체계를 부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결사단이다. 목표는 연합의 해체, 새로운 통치 조직체계의 확립, 그리고 소수의 독재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놈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백요성계 연합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많이 부실한데 흑사단까지 설치니 골치깨나 아픈 일이었다. 성계 연합부터 불안정한데 은하 연합으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야 당연지사다. 
  우리가 은하 연합에 합류하는 순간, 본래 지구의 모든 정보에 접근 가능해진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본래 지구로의 방문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어차피 현재 유랑인류가 거주하는 성계와 태양계 지구는 한 은하 내에 있는 것이다. 유랑인류의 정신 밑바탕에는 항상 “우리는 떠나온 존재들이다, 진짜 본향은 은하 어딘가에 있다”가 자리한다. 진짜 지구로 가는 길이 열리면 앞으로 유랑인류의 진로가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섣불리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조성해놓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운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흑사단의 존재 이유를 거스른다.
  아버지가 지금껏 해온 일들은 최우선적으로 연합의 안정을 위한 것들이다. 성계 연합의 목적은 은하 연합으로의 합류이다. 그렇다면 흑사단은- 그 합류를 저지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은하 연합에 합류하는 순간 흑사단은 해체, 사멸할 수 있다. 은하 연합의 수뇌부가 자리하는 차원이라면 흑사단 정도 청소하는 것이야 일도 아니겠지. 아, 어쩌면.
  “은하 연합의 대통령은 몇 차원의 존재야?”
  화호는 한 손을 다 펴 보였다. 그렇군. 역시. 
  “화호는 9차원이라며?” 
  화호는 공중에 9 같아 보이는 숫자를 시각화했다. 
  “그러면 화호가 흑사단을 모두 처치할 수 있어?” 
  “응.”
  “그럼 그렇게 해줘.”
  “자.”
  뭘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화호는 천수국을 한 송이 들고서 하늘하늘 다가왔다. 그것을 내밀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건 그냥 내 욕심이라는 뜻이지?”
  “응. 욕심꾸러기야.”
  “그래…… 그렇지. 전함과 통신이라도 연결해줄 수 있어?”
  “안 돼. 기다려야 해.”
  나는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 화호와 말다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다시 전함으로 돌아가게 된다 해도,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인질로 붙잡혀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

  밥 먹고, 운동을 하고, 씻고, 저장된 영상을 돌려 보고, 또 씻고, 도무지 정녕 아무 할 일이 없다. 전함에서도 대충 그렇게 날백수로 살았지만 적어도 여자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꽃밖에 없는 별에 나를 떨궈놓다니, 이건 설마 아버지의 조크일까.
  열린 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마 이제 이곳의 밤인 모양이다. 습도는 약간 높은 것 같지만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고, 기온은 딱 좋았다. 낮이나 밤이나 꽃이 자라기에 아주 좋은 환경인가보다. 화호는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허공에 대고 말을 해두었다. “걷다 올게.” 저 꽃들이 다 여자라면 좋았을 텐데. 
  밖으로 나서니 한결 시원했다. 무엇보다 탁 트인 밤하늘이 보기 좋다. 들판은 걷기에도 좋았다. 이곳에 착륙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천수국숲 한가운데 정박했다면 꽃에 빽빽이 둘러싸여 산책은커녕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에 걸었던 방향대로 천천히 걸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바람 소리 꽃 소리뿐이다. 이대로 행성을 한 바퀴 돌아도 나 혼자뿐이다. 이상한 일이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어려서 일이지, 좀 더 자라서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게 나 때문이었으니까. 겉으로는 덤덤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으로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나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고- 형들도. 아버지가 정말로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버지는 전함 한구석에 손수 정원을 꾸며두었다. 주로 밤에 그곳에 가서 손에 흙을 묻혀 가면서 풀을 심거나 씨앗을 파종하거나 했다. 네사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을 때에는 절대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지난 수십 년간 어떻게 전쟁을 치러왔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평생 중요한 것을 잃어가며 살아온 삶이랄 수도 있겠다.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전우와 심복을 잃고, 또 전쟁과 알력 다툼, 흑사단과의 충돌로 부하들을 잃고…… 그래서 이제 남은 건 무언가. 자신을 소 닭 보듯 하는 막내아들?
나는 삶의 목표도 없고 딱히 이룬 것도 없다. 그나마 조금 해보려 했던 건 여자 꼬시는 일이다. 그것조차 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가오던 여자들도, 얼마 시간이 지나면 다들 실망해서 떠난다. 세이나, 다니아, 모니하, 또 누구더라. 릴리, 룰루? 아무튼, 그렇다, 아버지도 나도 각자 혼자다. 우리는 서로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벌렁 드러누운 것이 실수다. 꽃가루가 확 일어났다. 재채기가 터졌다. 정신없이 그러고 나니 배가 다 아팠다. 꽃가루가 잠도 오게 하는가 싶었다, 다시 졸린 걸 보면. 그래도 캡슐선에서 지나치게 먼 곳에 드러누워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비실비실 일어나 옷을 털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멀리 캡슐선이 보였다. 밤인데도 꽃들이 부옇다. 안개 같은 습기가 바람 타고 허공을 감돈다. 이 광채는 어디서 나는가. 꽃 바람 소리 일어날 때마다 뱃속이 아렸다. 아니, 안 된다. 아버지는 아직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가슴도 아프다. 한 번, 정원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자를 옆에 끼고 거들먹거리며 지나가다가 잠깐 멈춰 섰었다. 연합군의 총 수령이니 여자가 당연하게도 놀라며 어머머, 했었다. 각하? 자기 아버지께서? 열이면 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그게 목적이었지.) 수작을 걸다가 문득 본 아버지의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자리에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각하도 뭣도 아니고 그저 흙투성이, 땀투성이인 인간.
  당신도 그런 거지. 내가 괴로웠듯이. 혹은 더.
  머리가 아프다. 


다시, 꿈

  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형 둘과 나는 제1태양계의 모성을 방문했었다. 정확하게는, 그때가 새해 전날이었는데 아버지가 무슨 행사에 얼굴을 보여야 한다고 했고, 우리는 자동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축전이라고 했다. 계속 함선에서만 살아온 우리 형제는 처음으로 땅을 밟고 무척이나 흥분해있었다. 무엇인지 매우 달랐다. 땅에 선 것만으로 가슴 한편이 따뜻한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새해 전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모든 것이 요란하고 눈부시고 재미있었다. 폭죽, 날아가는 풍선들, 평소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단 과자, 나비 택시, 얼굴이 푸른 사람, 검은 사람, 흰 사람, 화려하게 번쩍이는 도심, 모든 것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는 경호를 받으며 광장 한쪽에 마련된 귀빈석으로 가서 앉았다가, 연설 등 각종 행사가 끝난 후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 대신, 우리가 광장을 향해 움직이던 도중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연기가 퍼졌고, 통신이 끊겼다. 누군가 나를 기절시켰다.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깨어나서야 알았다. 그러나 오직 한 명에게만 행운이 있으리라고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얼굴을 홀로그램으로 희게 지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내 손에 총을 쥐여주었다. 같은 식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곁에 서서, 이마에 총구를 대고 있었다. 
  박스가 많이 쌓여 있는 창고 같았다. 내 주변으로 흑사단의 단원이 셋이었다. 한 명은 내 손에 총을 쥐여주었고, 다른 한 명은 이마에 총을 대었고, 나머지 한 명은 말을 했다. 그 사람이 [오직 너에게만 결정권을 주겠다. 네가 오늘의 행운아거든.] 라고 했다. 형들은 창고 저편에 있었다. 사지를 결박당한 채, 긴 박스에 담긴 채로 머리만 보였다. 눈은 크게 뜨였고,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둘 다 입은 막혔다. 작은 형은 웁웁거리면서 울었다. [이걸로 저 녀석들을 쏜다면 너는 살려주마. 싫으면 다 죽는 것이고.] 
  세 사람은 낮게 웃었다. 창고 밖으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고, 폭죽을 터뜨렸다. 음악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은 바깥에 별처럼 많았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다. 총을 만약 천장에 쏜다면? 어차피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래도 빛이 나간다면 누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그들은 어차피 내게 총을 완전히 맡길 의도가 없었다. 
  나는 내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총을 쥐여줬던 사람이 다른 손으로 내 손을 완전히 감쌌다. 그러더니 내 손가락을 덮은 채 힘을 주었다. 빛이 잠깐 번쩍했다. 또 번쩍, 번쩍했다. 
  첫째 형이 흡, 읍, 하는 소리를 냈다.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피가 떨어진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버튼을 길게 누른 채 내 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끌었다. 박스가 잘려 쓰러진다. 형의 몸이 울컥거리며 두 쪽으로 갈려 엎어졌다.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작은형의 울음소리가 한층 애절해졌다. 
  [아주 쉽다고. 간단하지?] 목소리는 친절하기까지 했다. [도련님 부친 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행성을 이렇게 끝장냈단 말이지. 받은 게 있으면 뭘 줘야 하잖아, 그렇지? 이번에는 너를 저 박스에 넣고, 저기 저 울보 녀석은 꺼내줄까? 저렇게 죽고 싶어?]
  죽고 싶지 않다. 흑사단의 단원은 내 손을 고쳐 쥐었고, 총구를 작은 형에게 겨눴다. 다른 단원은 내 이마를 총구로 조금 밀었다. [한 번이라도 스스로 총을 쏘면 너는 살려주마.] 숨돌릴 틈도 없었다. 그는 다시 내 손 위로 힘을 주었다. 다시 번쩍, 번쩍했다. 박스의 양쪽 측면으로. 잘린 팔과 피가 쏟아졌다. 작은형은 눈이 하얗게 뒤집혀서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너도 저렇게 죽고 싶어?] 다시금 밖에서는 환호성이 솟구친다. 무슨 현악기 소리가 난다. 이마가 꾹, 꾹 눌린다. 내 손 위의 큰 손이 갑자기 풀렸다. 동시에 내 손가락이 움찔하고 버튼을 눌렀다. 다시, 번쩍. 작은형의 무릎이 뚫렸다. 누군가 입안에 들어앉아 나 대신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으허, 비슷한, 멍청한 소리다. 콧물이 입으로 들어온다. 작은형의 호흡이 거칠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했어. 거봐, 쉽잖아?] 다시 큰 손이 내 손을 꾹꾹 누른다. 작은형의 몸이 조각조각 잘려 떨어진다. 누군가 낄낄 웃는다. 나뒹구는 작은형의 머리에 총을 조준하고 머리카락을 조금씩 자르며 장난을 친다. 숨을 쉴 수 없다. 눈앞에 검은 점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다 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별 의미 없다는 것이야 머리로는 잘 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여덟 살 때, 흑사단의 단원들이 우리를 납치해서 이렇게 했다. 내 손이 총을 쥐고 있었다. 둘째 형이 죽은 후로는 기억이 없다. 기절한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전함 안 침실이었다. 이 일은 기밀에 부쳐졌으므로 우리 셋에 관한 일은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연기가 행사 광장을 덮은 것만 누군가의 심한 장난이었다는 식으로 지나갔을 뿐이다. 그 사건 이후로 일 년간 다른 기억도 거의 없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봤었나? 장례식은? 알 수 없다.
  이후 아홉 살 때 화호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호가 오기 전까지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니까.   
  꿈은 이제 끝났나 싶었다. 과거의 영상은 다 사라지고 천수국성의 밤하늘이 펼쳐진다. 나는 들판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는데 문득 아랫배에서 출렁하는 느낌이 난다. 이게 뭔가…… 내려다보니 배가 불러있다. 응? 뭐? 다시, 이번에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배가 혼자서 출렁한다. 배 속에서 뭔가 움직였다. 응? 머릿속이 싸해진다. 뭐라고? 응? 이게 뭐지? 아냐, 이것도 꿈이다. 꿈이야. 꿈이어야만 해. 꿈이겠지? 

  무엇인지 뺨을 굴러 내려가는 감촉에 눈을 떴다. 새벽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고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배는 여전히 불러 있다. 

  다시 깨어났다. 이슬이 이마를 타고 구른다. 도대체 꿈을 몇 겹으로 꾸는가. 이제는 정말로 생시겠지. 주저하다가 아랫배 쪽을 내려다보았다.
  “어…….”
  연분홍색이 앉아 있다.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보았다. 아니다, 연분홍색 바탕에 비취색 둥근 문양을 지닌 나비 한 마리가 배꼽에 앉아 있었다. 날개가 팔락, 한다. 나는 나비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뒤늦게 의문이 슬금슬금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여기는 천수국과 만수국만 자생하는 행성이라고 했는데? 
  의문을 풀어준 것은 아련하게 들려온 화호의 음성이었다. 
  “우주 나비야.”
  하프 선율 같은 화호의 목소리가 신호였는가 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거품 같은 바람이 더는 아니었다. 이윽고 사방에 부채 소리가 차올랐다. 아니, 부채 소리가 맞는가, 많은 잎이 부딪히는 소리인가, 종잇장 팔락이는 소리인가, 도대체. 
  지평선이 춤추었다. 피리 소리 같은 소리가 또 덧붙여 울린다. 허공이 떨린다. 또 종소리인지, 영롱한 음이 파도치듯 사방을 휘몰아쳤다. 화호의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또 구슬 소리 같은 것이 하늘에 사무친다. 심장이 뒤흔들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바람이, 우주의 심장에서 불어 나오는 것만 같이 불었다. 공중에 빛의 물결이 일었다. 행성을 뒤덮은 꽃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는 것만 같다. 절실하고도 성스러운 침묵이 이윽고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배꼽 위 나비가 나긋이 날개를 펼쳐, 날았다. 나는 것인지, 공중이 나비를 받쳐 드는 것인지.
  나비를 따라 시선이 가다가 멈추었다. 높은 하늘에, 더욱더 높은 하늘에. 하늘을 장대하게 흘러가는 나비 떼가 아주 높이, 눈부시게 있었다. 
  이쪽 지평선에서 저쪽 지평선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비의 행렬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행성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이다. 날아가는 별이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우주 나비를 보았다. 하늘의 껍질 한 층이 통째로 회전한다.
  “일 년에 한 번 여기 왔다가 가. 꽃 만나고.”
  “어디로 가는데?”
  “다른 별로.”
  “나비가 어떻게 우주여행을 해?”
  “나처럼.”
  “화호도 우주 나비라는 소리야?”
  “아니.” 그러고 한 손이 시각화된다. 화호는 한 손을 펼쳐 보였다. 
  “우주 나비의 존재 차원이 5차원?” 
  “응.”
  “그럼 저 나비들을 따라가면 은하 연합의 수령과도 접촉할 수 있겠네.”
  “응.”
  “아…….”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유랑 인류의 숙원 중의 숙원인 은하 연합과의 접촉을 무척 쉽게 말해버리는 화호 앞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따라가야지! 나 데려가 줘!”
  “정말?”
  화호는 매우 드물게 되묻는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물론 이대로는 따라갈 수 없지만 화호가 날 5차원으로 녹여주면- 그러니까, 주파수를 올려주면- 갈 수 있잖아! 아, 젠장,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아니면 날 아예 5차원으로 바꿔주면 곧바로 은하 연합과 얘기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 잠시 망설여지기는 했다. 만약 5차원으로 존재 차원이 상승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중에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는 있을까? 됐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그건 아냐. 규칙 위반.”
  “아, 알았어. 그럼 일단 나비를 따라가는 목적으로서만 잠시만 5차원으로 해 줘. 우주공간을 벗어나서 다른 행성에 도착하면 그때 다시 3차원으로 돌려주면 되잖아. 그런 식으로, 필요할 때에만 잠깐 진동 주파수를 잡아주는 건 괜찮지?”
  “응.”
  너무 흥분한 모양이다. 나는 더 이것저것 묻지 않고 다짜고짜 시각화된 화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곧이어 부드러운 물결 같은 온기 속으로 온몸이 쑥 밀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감각이 녹는다. 보이지도 않는데 화호가 미소 짓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내게 보여줬던 것보다 훨씬, 훨씬, 화호는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도. 무슨 일인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울 것만 같았다가, 온몸이 희열로 가득 찼다가, 온통 참을 수 없이 밝다. 눈부시다. 내장이 빛에 젖는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터지는 것 같다. 눈물이 허파를 타고 흘러 배를 휘감았다가 낙엽처럼 흩날려 간다. 심장 속 가득한 별들이 일제히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모든 것이 안으로 휩쓸려 몰려들었다. 파도, 빛, 천수국, 장미 꽃다발, 키스, 긴 탄식, 미안하다, 누군가 눈물 흘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평생 모아온 지구의 정보를 흑사단에게 넘기기로 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네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일단 저들의 무기부터……. 시간이 필요해. 유랑 인구의 그리움이 우주 한편에 고여 있다. 지구는- 바로 저기에 있는데- 형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시간도 녹는다. 뱃속이 출렁였다. 흙을 파고드는 아버지의 손.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는 흑색 눈물. 뿌린 씨앗이 처음으로 떡잎을 올렸을 때, 아버지는 흙에 얼굴을 대고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이 속에서 무슨 비밀이 들썩이는가. 무엇이 진주 같은 떡잎을 위로 올리는 것인가. 연두색 여리디여린 이파리가 마치 갓 태어난 아들의 둥근 엉덩이 같다. 나는 흙에 이마를 대고 소리 없이 눈물 떨구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 울었다. 가끔, 눈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온다. 화호처럼. 그리고 또 무엇이 벌어졌는가. 아랫배가 아렸다. 나는 더는 두렵지 않았다. 별. 진주. 눈물. 저편에서 빛나는 지구.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천수국. 태양. 춤추는 혜성. 달. 흙냄새 품은 채 불어가는 바람. 발밑 풀잎. 일렁이는 꽃. 이슬. 별의 지도. 절절한 고독. 감당할 수 없는 노래가 빛과 뭉친다. 심장을 가른다. 허파가 녹아내린다. 척추가 부서진다. 손끝과 발끝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노랫소리. 푸르고 붉고 청명한 소리. 여자의 알몸. 향수 냄새, 뜨거운 숨결. 여자의 눈 속 깊숙이 들여다보면 내가 까마득히 죽어버리는 것 같았다. 비록 한순간만일지라도. 외롭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회전한다. 무섭고 싶지 않았다. 솟아오르는 새싹은 흙의 꿈인가. 왜. 도대체 왜. 불꽃. 울음 없는 삶이란 없는가. 배꼽이 열리고 갓난 내가 나비 떼에 휩싸여 날아간다. 천수국이 뿜어내는 화분이 불씨처럼 반짝인다. 높이, 더 높이, 아주 멀리, 은하의 지붕을 향해 끊임없이, 빛의 흐름이 바람처럼 별들을 지나가고 성계를 휩쓴다. 텅 빈 것처럼만 보였던 우주 공간에도 바람길이 있어 영원의 지도를 이룬다. 우주의 바람은 일렁이는 별들의 뿌리이다. 화호의 화관에는 도대체 셀 수 없는 별이 가득 박혀 있다. 9차원이 아니야, 소위야. 둥글고 다시 둥글어지는 곳에서 나는 왔어. 아버지. 갓난아기를 앞에 두고서 서류를 작성한다. 아이의 이름란에는 소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어머니. 그건 어머니의 이름이다. 아버지의 눈은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아 붉다. 울긴 뭘 우나. 엄마 이름도 나한테 안 가르쳐줬잖아. 진작 말해줬으면. 한참을 망설이던 손이 글자 위에 한 줄을 더 긋는다. 아가야. 어머니는 수술이 시작되기 전, 의식을 잃기 전에 뱃속의 소위에게 말했다. 사랑한다. 어머니의 심장이 울었다. 제발 누구든, 제 말을 우리 아이에게 들려주세요. 아버지는 울어야 했으므로 울었다. 삶이 오는데,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삶이 오는데. 슬프고 예쁜 막내야. 이 작은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장미, 국화, 튤립, 난, 천수국, 만수국, 연꽃, 호랑이 한 마리, 꿈의 주인을 데리고 인간 아이에게 온다. 어린 소위의 심장으로 우주가 쏟아진다. 어머니. 어린 소위는 화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피가 심장을 사랑하듯이. 화호. 화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위의 마음이 시작되기 전부터. 내가 소위이기 전부터. 우주 나비처럼. 천수국성처럼. 별처럼 하늘처럼 눈물처럼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손끝으로 달 맺힌다. 씨앗 떨어진다. 태양이 우르르 떠오른다. 너는 나의 꿈이란다. 우주의 해변. 춤추는 빛. 성운. 빗방울. 천사들의 노랫소리. 별들이 서서히 날개를 펼친다. 은하가 열린다. 껍질이 벗겨진다. 노래하며 물결치는 꽃들. 수많은 꽃의 꿈들이 연분홍색 날개를 솟군다. 이윽고 성대히 날아오르는 소리, 꿈 아닌, 다시금 아니고 또 아닌 곳으로, 돌이켜 차라리 꿈이라고, 도무지 그렇더라고. 누가 그리 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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