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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황금 비단

2011.01.01 01:0901.01



  "푸른 소…. 하나, 둘…."
야탄고무나무 위에서 오란은 접근해 오는 상단의 깃발을 자세히 보려 애썼다. 흰 바탕에 푸른 소가 세 마리, 황금색 뿔이 세 쌍, 소 등에 자리 잡고 앉은 물새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란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동쪽에서 가장 큰 무역항인 세치 항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꽤나 큰 상단의 깃발이었다. 두 달이나 별 볼일 없는 오아시스에서 버틴 보람이 있었다.
그곳은 기실 오아시스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편의상 오아시스라 불리는 곳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사막을 가로지르는 상단들의 출발 준비 지점이라고 해야 했다. 오래된 우물을 지나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서면 땅이 깊이 패여 들어가는 것과 함께 공기가 난폭해진다. 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풀줄기 한 줄 나지 않는 흰 모래밭이 이어지고, 폭염으로 호흡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길을 가야 하는 상단의 일이지 오란이 염려할 일은 아니었다. 오란이 염려할 일은 상인들의 속주머니 속에 있었다.
그녀는 허리띠 속에 손을 넣어 손칼자루를 더듬어 보았다. 반질반질한 가죽 칼집이 손끝에 편안했다. 너는 어지간하면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도적질을 해먹고 살아왔던들 어차피 열 다섯 살 계집애가 칼을 쓰면 얼마나 쓰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는 도망치기도 번거로웠다. 마을 쪽으로 닦인 길로 달아나면 쉽게 잡힐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고 사막 쪽으로 빠졌다가는 폭염에 타죽을 것이다. 오아시스와 마을 사이는 나무나 수풀이 꾸준히 이어지기에 청량한 숲길 같았다.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처럼 시뻘건 사막이 펼쳐진다는 것이 차라리 거짓말 같았다.
  어쨌거나 타죽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도 없지. 오란은 검지 마디로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둥그렇고 붉은 점이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 엄마한테도 이 표시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엄마를 붙잡아 불에 태워 죽였어요.
  인생 최초의 거짓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벌써 몇 년 전인가, 그게. 물론 그전에도 자잘한, 진실이 아닌 말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거지에서 도적으로 그녀를 승격시켜 준 제대로 된 거짓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디였는가 하니, 모닥불 앞에서였다. 밤이었고 함락된 성은 승전의 기쁨에 취한 병사들로 들끓었다. 저쪽에서는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고, 또 다른 쪽에서는 재판이 벌어졌다. 손가락이 몇 개 없는 악사가 현을 그었다. 거지 아이들이 눈치를 살피며 성벽을 따라 바삐 움직였다. 그림자 안으로, 최대한 조용히. 쌀 익는 냄새가 하늘까지 갔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래서 나더러도 불길하다며 쫓아냈어요,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서 엄마가 그랬다고, 비구름을 멀리 묶어 놨다고 했어요. 오란은 그때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닥불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같은 거지 중 다른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오란에게 충고를 한 것이 그날 아침이었다. 뭐라도 좋으니 아주 불쌍하게 보이는 게 중요해. 거지한테 사람들이 왜 먹을 걸 던져주겠어, 밥이 남아나서? 아니지, 동정심이 일어나니까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무조건 배고파요 그러면서 엎어지지 말고 무슨 얘기를 잘 해보란 말야. 불쌍하면 불쌍할수록 좋은 거라고. 오란은 배운 것을 어서 시험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 춥고, 아니, 추운 게 문제라 아니라 아직 뜨거운 닭 국물을 앞에 두고 담배를 입에 문 노인이 문제였다. 아니, 그 노인은 둘째치고 닭 국물이 제일 문제였다. 질그릇 밖으로 닭 뼈와 당근 조각이 보였다.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넝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거지 옷과 비슷하게 보이는 차림새의 할아버지는 딱히 더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지라고 돌을 던질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저 만사가 피곤한 듯 보였다.
  그래서 저는, 저도 죽을 뻔했지만 어쨌거나 살았어요. 엄마가 살아있었을 때에는 그래도 나무집에서 살았는데. 굶지는 않았는데. 엄마가 머리를 빗겨 줬는데. 사람들이 저더러 엄마를 살리려면 비를 내리든지 아니면….
노인이 말없이 밀어주는 그릇을 낚아채듯이 하여 정신없이 배를 채우고 나서도, 열 두 살의 오란은 거짓말을 그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어떤 날에는요, 빨래터였는데.
바람과 함께 흰 옷가지가 펄럭인다. 빨래를 마지막으로 헹군 물을 버리는 대신 엄마는 오란을 씻긴다. 찬물이라 여름인데도 이가 딱딱 부딪힐 지경이다. 오란의 눈썹 사이 붉은 점을 꾹 누르며 엄마는 추우냐고 묻는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마녀는 아니지만)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기는 했던 엄마가 무슨 신기한 말을 중얼거린다. 쏟아지던 찬물은 온데간데없고 목련이 오란의 속눈썹을 치고 떨어진다. 금색, 백색, 연홍색, 청운색, 연녹색, 빛깔들이 꽃잎을 발갛게 통과하여 환하다. 부딪히는 빛들. 뒤섞이는 빛들. 쏟아지는 빛들. 오란은 눈을 조금만 뜨고서 세상을 가득 메운 꽃잎을 바라본다. 들이마신다. 입을 벌리면 꽃잎이 혀에 앉는다. 스미듯 한다. 어지럽고 눈부셨다. 어여쁘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란은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 거짓말이랍시고 시작했는데 머리를 꽉 채운 이 광채들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입속에 목련을 한가득 문 기분이었다. 때마침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너더러 느이 에미를 살리려면 비를 내리든지 또 뭐라 하드냐?
  그야 비를 내리든지 아니면….
  "비가 언제쯤 쏟아지려나?"
  오란은 갑자기 아래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가져온 물은? 낙타들은 쓸만하고? 여기서 더 가면 빼도 박도 못하니까 철저히 보고 또 봐. 점사가 왜 막히는지 모를 일이야, 저기서 비를 만나면 죄 휩쓸려가 죽는단 말이지. 두 달 전 일은 자네도 들었지, 아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어느새 나무 그늘은 상단 사람들과 수레, 짐승들로 바글바글했다. 저쪽에서는 땅을 쓸고 화덕을 쌓았고, 오란의 발밑에서는 대나무 발을 사방으로 둘러친 자리가 섰다.
  "아 그러믄입쇼. 우리 화금마마 말씀인데 어련할깝쇼. 여기 출발하기 전에도 쫙 점검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일단 저 우물가에는 항상 사람을 세워두기로 했는데 그걸로 되겠습니까?"
  "사흘만 바짝 정신 차리고 주의하면 될 일이지. 그걸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럼 저는 가서 다시 쭉 돌아보고 오겠습니다요."
  이어 접부채 펼쳐지는 소리가 꽤나 사나웠다. 화금마마라는 여자는 부채를 부치며 연방 혀를 차댔다.
  화금마마라니, 그새 무슨 수완으로 청우상단까지 먹은 건가? 오란은 나뭇가지를 힘껏 쥔 채 속으로만 혀를 찼다.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화금마마가 버티고 있다면 일이 좀 힘들게 생겼다.
  굳이 사람들이 마마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본시 그녀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단지 할머니 쪽으로 그 비슷한 귀한 피가 섞여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또 본인 자체가 워낙 성격이 세고 대단한 장사꾼이다 보니 그리 불리는 것이었다. 요즘 같은 미친 세상에 이 땅 저 땅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현상유지를 넘어서서 번창하기까지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선우타의 일개 상인이던 그녀를 처음 화금마마라고 부른 이는 세한다의 임금이었다. 군량미가 부족하여 상인들을 붙잡아 놓고 협박하여 식량을 탈취하려던 그 왕은 그녀의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당당한 기세에 웃으며 황금 주머니를 던져 주고 말았다고 한다.
  옜다, 내 네 기백이 참으로 아깝구나. 사내로 태어나 장수가 되었다면 내가 크게 썼으리라. 네 치마에 떨어진 것이 황금이니 너를 그와 비슷하게 일러 화금이라 하겠다. 좋지 않으냐?
  그 자리에서 화금마마는 공주의 버선과 비단신을 하사 받았다.
  앞으로 내 땅에서 군사들이 너희에게 해코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떠한가?
  "등새들을 데려와라. 새장을 여기에 걸어두는 것이 좋아." 
  오란은 검은 천으로 덮인, 높은 새장이 두 개나 다가오는 모양을 보았다. 새꾼들은 화금마마의 양옆으로 삼발이를 세우고 받침을 얹고 새장을 세웠다. 새장을 덮은 천이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밝은 빛이 안에서 새어나왔다. 그 안에 빛을 내는 새가 들어 있을 것이다. 오란은 침을 삼켰다. 저 새 하나면 집이 몇 채인가. 그러나 아무리 노련한 도적이라도 등새를 훔쳐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단 눈에 잘 띄고 주인 아닌 이라면 경계가 심한 데다가 조금만 뭐가 마음에 안 들면 무척이나 시끄럽다. 그리고 부리에 쪼이면 살이 파이고 무엇보다 절대 잠들지 않는다. 그물을 던지면 부리로 찢어내고, 스스로 약초와 독초를 구분할 줄 아니 뭘 먹여 어찌할 수도 없다. 아마 화금마마라고 어디서 저 새들을 샀거나 잡은 건 아닐 것이다. 새들이 스스로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 오란도 등새를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어느 새벽에.
  빗소리에 잠이 깬 오란을 엄마가 꼭 껴안고 창을 내다보라고 한다. 문가에 내놓은 항아리 속에서 참새 뒤통수가 하나, 둘, 셋, 차례대로 튀어나와 주변을 살핀다. 청회색 새벽이었는데, 마당 대추나무 위에 마치 연등이 하나 걸린 듯 물기 어린 빛 무리가 번져났다.
  등새다, 등새.
  귓가로 엄마가 속삭였다.
  물론 모두 그녀가 지어낸 거짓말 속의 장면이었다. 오란은 처음부터 고아였으며, 거지였고, 세상의 엄마나 아빠는 모두 다른 아이들의 차지였다. 어떤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당연한 것들을 지니지 않고서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간다. 황량하게 죽거나 한다. 어떤 새는 알에서 깨어나고도 다른 형제 등쌀에 그대로 굶어 죽기도 하지 않던가. 어린 물소는 무리에서 뒤처져 맹수에게 잡아 먹힌다. 전쟁이 휩쓸고 간 동네에서는 부모가 자식들을 문밖으로 밀어내고 돌을 던져 쫓아내기도 했다. 혹은 상단에 팔았다. 어떤 곳에서는 잡아 끓여 먹었다고도 했다.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마을에 잘못 들어서면 별별 못 볼 꼴을 다 본다.
  그래도 어떤 먼 섬마을에서는. 오란은 어떤 날 생각해 보았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새벽에 마당으로 찾아든 등새를 보여주려 딸을 조심스레 깨우는 엄마가 있기도 하지 않을까. 세상 어디엔가에는, 아마도. 그녀는 나뭇잎 위로 얼굴을 묻었다. 푸르고 차가웠다. 아직 저녁도 아니었는데 벌써 자고 싶었다. 눈을 감자 반은 힘들고 반은 마음 놓이는 기분이 되었다. 어서 밤이 왔으면. 사람들이 잠들었으면. 거짓말 속의 등새가 대추나무 위로 별처럼 날아오른다. 오란은 세상이 멈추는 듯한 날갯짓을 감은 눈으로 보았다. 새, 날개 끝, 젖은 하늘, 검게 얼룩진 성벽. 아무 말 없이 오란의 첫 거짓말을 들어주던 노인과 성질 사납게 타오르던 모닥불. 기억하는 일과 꿈꾸는 일은 언뜻 비슷했다. 오란은 마치 몸이 두 개가 된 기분이었다. 하나는 나무 위에서 잠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열심히 예전 일을 꿈으로 되새긴다. 햇빛은 눈가에서 어른거리는데 눈이 뜨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졸립기만 했다.
  한동안 조용하던 노인은 담배 주머니를 열고 담배를 말아 불을 붙였다.
  분명 어느 나라의 귀인이었으렷다. 그러면 뭐하나, 세상이 하수상하니. 피에 금이 섞였든 은이 흐르든.
  그리 중얼거리며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는 손이 떨렸고, 자세히 보면 흉터 자국이 무수히 많았다.
  이상한 여자들을 많이 보고 들었지. 비구름을 불러오던 여자, 유령들을 휘파람 소리로 부리던 여자, 깃털을 허공에서 흔들면 신기하게도 불씨를 얻어낼 수 있었던 여자, 그런데 다들 예사롭기 그지없이 죽더구나. 죽음이 세상 가장 평범한 일이기에 그렇겠지. 느이 엄마는 왜 죽었는고? 그 점 때문만은 아니렷다. 비가 안 와서 그랬다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요, 엄마하고 저는 너무 멀쩡한 것처럼 보였나 봐요. 그냥, 다른 이유 없이 횃불을 들고 밀고 들어와서…. 그때 저는 너무 어렸구요, 사람들이 엄마를 붙잡아 가고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구요.
  애는 그래도 해치지 않았나 보구먼.
  담날에 절 마을 밖으로 쫓아냈어요. 엄마를 살리고 싶으면 바다 건너 검은 탑에 갇힌 공주님 옷을 갖고 오라 했어요. 그러면 살려준다구. 돌을 던져댔구요. 나중에야 들은 건데 마녀라고 요괴라고 잡혀 끌려가는 사람들은 다음날이 오기 전에 불태워 죽인대요. 그러니까 엄마는 이미 죽었는데 저더러 그냥 그런 말을 한 거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위험하게 게서 그러고 있으면 어쩌느냐."
  화들짝 놀란 오란은 잠이고 꿈이고 다 날리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나뭇가지를 놓치는 손가락이 아찔했다. 눈을 꼭 감는데 뜻밖에 땅이 등 아래로 푹신하게 퍼져 부풀어 오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고, 부드럽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이렇게 들키고 말다니 차라리 허무했다. 오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돈도 다 떨어졌는데,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이제 일 좀 잘해서 한탕 챙겨 나를 계획에 희망을 걸었었는데 다 텄구나, 젠장.
  화금마마의 앉을 자리는 솜것과 방석 같은 것이 쌓여 마치 구름자리 같았다. 그런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가 아니라 아저씨 목소리였다.
  "괜찮으냐?"
  "아 그럼 괜찮겠어요?"
  오란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쏘아붙였다. 사실은 화금마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 조금 안심이었다.
  "눈이나 뜨고 얘기하지 그러냐."
  그 말에 오란은 눈을 떴다. 처음에는 눈이 부셨고, 다음에는 갈색 넝마를 머리에 덮어쓴 아저씨를 보았다. 옷차림이 도저히 돈이 있어 보이지 않아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도적은 훔칠 만한 게 있어 보이는 상대가 곱게 보이는 법이다.
  "누구신데요?"
  그래도 사정이 딱히 여유 부릴 사정이 아니라 높임말이 나간다.
  "잡아가시려구요? 그러면 빨리 잡아가시든지요. 어차피 들킨 거면, 뭐, 어쩔 수 없는 건데. 사막으로 굴려 보내든, 저 사미측국에다가 팔아 넘기든지."
  "일단 좀 게서 굴러 내려와 봐라. 거기 계속 누워 있다가는 정말 화금마마한테 들켜 어찌 될지 모른다."
  "네? 그럼 그 아줌마 여기 없어요? 조금 전까지는 여기 있었는데!"
  오란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새장 둘과 넝마를 몸에 걸친 아저씨밖에 없었다. 상단의 큰 마차들은 아직 오아시스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짐과 짐승들을 일부만 옮겨두고 다시 돌아간 모양이었다. 화금마마의 수레 역시 저쪽에 있었다.
  "자리만 펴 두고 돌아간 것이 언젠데 무슨 소리냐. 저 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잔 모양이구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란은 이미 나무 아래 쌓인 짐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짐이 대부분 식량이나 부피가 큰 천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조금 김이 빠진 듯했으나, 다시 일어나더니 낙타며 말들을 바삐 살폈다. 어차피 돈 될 것을 들고 날 수 없다면, 도망치는 길에 탈 짐승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타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오란은 여러 짐승을 살피다가 그 중 하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삐 끝을 둥글게 묶었다.
  "그럴 시간에 다시 숨을 자리나 찾는 게 좋을 게다. 곧 해가 떨어지면 저 치 절반은 여기 와서 잘 것인데 그때 잡히면 정말 팔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무슨 상관이라고 잔소리예요? 해 떨어지기 전에 얘 타고 도망가면 되지."
  "탁 트인 동쪽으로, 아니면 서쪽으로? 게다가 넌 눈이 없는 게냐, 이제 저녁이라니까."
  "말 하나 되찾겠다고 사람들을 보내 추격해 오겠어요, 설마?"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그야 당연히 쫓아오겠지."
  "못 잡으면 되죠."
  "네가 더 말을 잘 타겠느냐, 아니면 화금마마 상단에서 평생 말을 다뤄 온 놈들이 더 말을 잘 타겠느냐? 어쩌면 쫓아오고 할 것도 없이 휘파람 소리 한 번이면 말이 알아듣고 돌아갈지도 모르지."
  "그, 그거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막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힘들 게다."
  "아 됐어요. 도망치려는 거지 죽으려는 건가 뭐. 흥."
  괜히 자갈을 걷어차며 투덜거리던 오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래된 우물가 곁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훔칠 만한 것도 없고 지금 당장 도망칠 수도 없고 답답한데 배까지 고파서 괴롭기 그지없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영 모를 일이었으며, 그냥 짜증이 났다가 스스로가 한심했다가 왜 지난달에 번(훔친) 돈을 죄 써버렸는지 후회도 되었다가 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말을 잘 해줄 테니 그냥 게 앉아 있거라."
  "몰라요."
  "내가 여기 고용된 것이 세 달인데 그제 서웅 남쪽 마루 터에서 널 주워가지고 수레 안에 처박아놨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칭얼대는 소리 들으면 불침번 설 때 잠도 안 오고 좋다고 말이다."
  오란은 그 말에 그만 웃었다. 그게 뭐야, 되도 않는 말이잖아. 어쨌거나 비록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옷차림을 한 아저씨였지만 농담도 하고 상단에 잘 말해주겠다 하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그리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화금마마가 그리 무섭거나 괴팍하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은 마라. 요새 왕족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더 왕족 같은 사람이지. 일단 정신이 미치거나 돌지 않았거든.”
그리 말하며 소맷자락 속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물건을 보아하니 깨끗한 천으로 둘둘 만 육포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오란을 향해 육포 한 줄기를 건네며 그는 우물가에 걸터앉았다. 오란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말린 고기를 받아들어 씹었다. 한동안 바쁘게 먹기만 하던 오란은 슬쩍 아저씨 쪽을 보았다.
“근데 아저씨는 왜 처음 보는 애한테 먹을 걸 그냥 줘요? 이상한 아저씨네.”
“줘도 뭐라고 하는 게냐, 너는. 그냥 먹어라.”
“우리 엄마가 처음 보는 사람이 먹을 거 주면 절대 먹지 말랬는데.”
“제대로 가르쳐 주셨구먼. 그런데 이마에 묻은 건 뭐냐?”
“아, 이건 날 때부터 있었던 거예요. 엄마한테도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엄마를 붙잡아 불에 태워 죽였어요.”
먹을 것을 주는 아저씨가 예전에 성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해서인지, 오란은 그때 했던 거짓말을 다시 꺼냈다. 그 할아버지처럼 눈앞의 육포 아저씨도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린 오란을 내쫓는 부분까지 막 얘기했을 때였다. 가뭄이라는 것이 참 골치 아픈 것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아저씨가 왼쪽 소매 속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러고 나서는 불이 없어서 아쉽게 뱉었다.
“이따 밤에나 피워야겠구먼. 내가 저 서쪽 테마르흔 평원 쪽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있을 때였는데 말이다, 그때에도 그쪽 땅에 남김없이 가뭄이 들어서 전쟁이고 뭐고 당장 내일 먹을 쌀죽 걱정이나 하게 생겼었거든. 그래서 일단 급한 대로 서로 싸움은 멈추고 각자 어떻게든 먹어 보려고 머리를 있는 대로 굴렸었다.”
“그럼 장군님이셨어요? 에이, 설마아. 무슨 장군님이 이래요? 갑옷도 없고.”
“아 조금만 기다려 봐라. 장군은 뭐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장군이겠느냐? 어쨌거나 그때 마침 근처에 장사꾼들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휴전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지. 사실은 휴전이 차라리 나은 거였지만 그때야 어디 그랬나. 다 머리꼭지가 돌아가 있었으니 휴전만큼 끔찍한 일도 없었지.”
“그런데요? 장사꾼들이 바가지를 팍 씌웠죠?”
“어떻게 알았지?”
둘은 다 안다는 웃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오란은 육포를 하나 더 입에 물었고, 전직 장군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늘어놓았다.
그는 지나치게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나라의, 특출나게 권세가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도에서 상당히 떨어진 변방에 성을 두엇 가지고 있었는데, 맏아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 그 중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주민들에게서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세금을 걷었고, 심하게 혹독하지도 않고 너그럽지도 않게 권력을 행사했다. 영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지는 적당히 내리는 비와 나쁘지 않은 토양 덕으로 매년 적당한 소출을 보였다. 그는 아내와 적당히 잘 지냈으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도 하나 보았다. 전쟁 전에는 모든 것이 평온했다. 그는 전쟁터로 나가는 날까지도 딱히 심하게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적당히 시간을 채워 충성심을 표시하고 돌아오면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어린 왕을 직접 만나고 보필하게 되어 곧 전쟁의 중심에 서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전쟁의 시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한에 어떤 왕이 있었는데, 이웃 나라를 쳐 그 공주를 잡아왔다. 끝내 혼인을 거부하는 그녀를 탑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그 와중에 왕의 첫 비가 원인 모를 죽음을 당했다. 왕은 왕비의 친정 나라에 시신을 돌려주는 대신 자국의 관습을 따라 화장토록 했다. 하나뿐인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눈이 멀었다. 하늘의 저주라는 신탁이 내렸다. 분노한 왕의 칼이 신관을 베었다. 왕의 조카가 반역을 꾀하다가 붙잡혀 온몸이 토막 나서 죽었다. 남몰래 그에게 줄을 대고 있던 축촌국과 무역이 끊기고 교류가 끊겼다. (축촌은 공주를 하나 수한의 선왕에게 시집보낸 적이 있었다) 거기까지라면 또 모르겠는데 수한 왕은 자국의 영토 안에 아직 있던 축촌의 사절이며 민간인까지 잡아내어 죽였다. 이 밖에도 시끄럽고 잔인한 일들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나라 간의 민감한 부분마다 이리 걸리고 저리 걸려서, 결국에는 줄줄이 전쟁이 터졌다. 한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다른 곳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덩달아 들고 일어났다. 어떤 나라는 평소 탐내오던 무역항을 차지하려고, 어떤 나라는 자국의 신승이 당한 죽음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어떤 나라는 오래된 원한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풀려고, 혹은 눈엣가시 같던 주변 나라를 반드시 무너뜨리고자. 전쟁하는 신을 모시는 터당들이 급작스레 부유해졌다. 동맹과 화친과 선전포고가 남발되었다. 각국의 왕들이 하나같이 미친 듯했다. 그것이 벌써 오래전 일이 되었다.
싸움은 계속되었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장사꾼들은 점차 패를 이루어 뭉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곧 상단으로 불어나고 세력이 커져서 일 년 내내 움직이는 국호 없는 나라와도 같은 자금의 흐름으로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왕들도 유명한 상단의 장사치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화금마마나 북방의 서치관, 태화관의 소백대인 같은 장사꾼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치열한 전투가 바로 벌어지는 싸움터 바로 곁으로 상단이 유유히 통행하는 웃지 못할 광경도 자주 벌어졌다. 이름 높은 상단이라면 으레 사병도 거느리고 있게 마련이었고, 보상도 후하게 해 주었다.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노예나 다름없이 고생하다가 별다른 포상도 없이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쟁은 돈을 필요로 했고, 돈은 전쟁으로 불어났다. 악순환이었다.
전쟁은 또한 어떠했는가. 싸움은 지겨웠다. 나중에는 하루의 일과처럼 되었다.
어느 날 문득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까마귀 떼가 말발굽처럼 저녁 하늘에 찍혀 있었다. 전투는 끝났으며 땅은 이미 붉었다. 승패는커녕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은, 결론의 가능성조차 바랄 수 없는 날이었다. 구름 붉었고 바람 붉었다. 그는 전쟁이 더는 끔찍하지도 않았고, 그저 비구름이나 우박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게 된 지 오래였다. 손발에 박힌 굳은살이나 흉터처럼 더도 덜도 없이 그저 그런 일. 그럼에도 그는 자주 멈췄다. 전투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일들이 그를 멈추게 했다. 날아가는 철새, 회전하는 까마귀 떼, 모랫바람, 천둥번개, 바뀌는 계절과 돌아오는 계절과 바람의 방향, 장막과 깃발과 머리칼과 말 갈기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투명한 힘. 이를테면 징조였다. 모든 징조는 성스럽다 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려는 징조인가.
  그는 전쟁터 한가운데 실수처럼 솟아올라 있는 전나무 한 그루에 자주 시선을 빼앗겼다. 나뭇가지가 날아가거나 불타는 일을 겪으면서도 잘도 살아남은 나무였다. 딱히 크기가 큰 편도 아니고, 오히려 왜소한 편에 속한 볼품없는 나무가 엉뚱하게도 전쟁터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셈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남아 이십 년을 넘게 이어지는 전쟁을 구경한 셈이 되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나무가 선 자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구분 점으로 인식되게 되었는데, 전투가 슬슬 끝나야 할 때가 되어 쌍방이 퇴각하기를 원할 때 양편은 으레 전나무를 기준으로 슬슬 갈라지게 마련이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은 어느 날 급작스레 끝나게 되었다. 그가 반평생을 다해 섬겨온 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전나무 아래에서였다. 그는 반평생 충성해온 왕이 마치 나무 인형처럼, 혹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는 일을 겪었다. 등을 감싸 안은 손으로 온기가 흘러내렸다. 상처는 치명상이었고 죽음은 빨리 왔다. 끝났다. 전쟁은 멈추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어쨌거나 끝은 왔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내일 눈을 뜨면 더는 전쟁이 천막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마치 수비병처럼, 깃발처럼, 전나무처럼 전쟁은 엄연한 한 존재였고)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까지.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눈을 떴을 때, 전쟁은 없었다. 수비병과 기병과 보병과 포로와 식량으로 길러오던 염소와 소, 닭, 기세 좋게 펄럭이던 깃발 역시 없었다. 오래되어 말라붙은 우물 곁으로 바퀴 수레바퀴 자국과 짐승 발자국, 사람 발자국이 어지럽게 땅에 찍혀 있었다. 마치 모두 꿈이었다는 듯. 전나무 홀로 서 있었다. 사람 손이 쉽게 닿는 자리에 나 있던 나뭇가지들은 거의 꺾여 나가고 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말라붙은 흙덩이가 발바닥 아래서 부스러졌다. 마른 침을 삼키자 목 안이 갈라지는 듯했다. 오른편 어깨 위로 햇빛이 무거웠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이제?”
오색 비단옷, 수줍게 마주 쥔 흰 손. 그는 때때로 아내를 생각했다. 목소리를 잊고 얼굴을 잊고 다 흐리멍덩해진 후에도 확실치도 않은 옷 색깔과 작은 손으로 그녀를 기억했다. 옹알이를 하던 아들을 생각했다. 그는 맨발로 걷는 일에 금방 익숙해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는 돌아갈 요량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이미 잊은 곳으로. 한때는 정말 그러려고 했었다.
“지나가는 장사꾼을 붙잡아 출생지를 대고 요즘 어떠냐 했더니 다 끝났더구먼. 땅은 조카놈이 먹었고, 마누라까지 데려갔더라. 아들내미는 열병이 심해서,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근데! 일단 직접 가봐야 하는 거 아녜요?”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여기서 일하게 된 거지. 아마 두어 달 이후면 고향 땅 근처를 지날 텐데 말이다. 그때 직접 알아봐도 좋겠지. 하여튼, 어찌 되었든 그다지 기대는 않아. 그 이후에도 여러 사람 붙잡고 알아봤는데 거의 말이 일치하더라 그거지. 아들놈 무덤이나 가서 봐야지.”
“그래두.”
“뭐가 그래도야, 육포나 더 먹어라.”
“육포는 맛있네요. 요새 먹은 것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요새는 별로 먹은 거 자체가 없긴 하지만.”
“그러니 맛있지. 내가 여기서 불침번인데 이따가 저녁을 가져오면 또 주마.”
“그런데 별로 볼 것도 없는 여기에 왜 사람을 세워놓고 지켜요? 나야 밥 준다니 좋지만.”
“화금마마가 그리하랬으니 그리 해야지. 보통 여자가 아니야. 신기가 있는 것도 같고. 솔직히 예쁘기도 하지, 곱상하니.”
허기야 이 큰 상단을 죄 이끌려면 보통은 넘어야지. 그는 그리 말하며 괜히 담배를 자꾸 쳐다보았다. 정말 피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오란이 차라리 불을 가져오거나 여기 아예 피워 놓으라고 하자 고개를 젓는다.
“불을 잘못 피우면 경을 친다. 연기로 신호하는 경우가 많아서. 씹는 담배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까먹고 이것만 덜렁덜렁 넣고 왔구먼. 그런데 너는 지금껏 그럼 혼자서 어떻게 산 게냐? 누구 친척도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 꼴을 보아하니.”
“그냥 거지였죠, 어땠겠어요. 애 혼자 덜렁 내버려져서. 죽지 않고 산 게 기적이에요. 그런데 한 사 년 전인가 베오산 첨성 근처에서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서 그나마 사람 꼴 갖춘 거지요. 호신용 칼도 받고 글도 배우고 말 타는 법도 배우고 소매치기도 배우고.”
“좋은 거 배웠다 그래.”
“장군은 뭐 때깔만 좋지 결국 사람 죽이는 직업 아닌가요 뭐. 흥. 그래도 전 정직하게 도둑질만 하면서 산다구요.”
그리고 둘 다 고개를 젖히고 시원하게 웃었다. 담배와 육포가 각자 손끝에서 떨렸다. 오란은 배를 붙잡고서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저더러 엄마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비가 오게 하든지 아니면 더 말도 안 되는 걸 하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때. 그게 뭔지 아세요?”
“그래, 뭔데?”
“공주님의 비단옷을 가지고 오면 엄마를 풀어주겠다고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누구의 뭔 옷?”
“한 달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면 수도에 닿는데, 거기 궁전 곁에 보석으로 장식된 탑이 있다고 들었었어요. 그 맨 위에 너무 아름다워서 왕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가둬놓은 공주님이 있대요. 등새가 밤마다 찾아와서 창가를 지킨다는데, 공주님이 거기 갇혀있는 동안은 나라가 평온할 거라나요. 그 공주님의 비단옷을 가져오면 엄마를 풀어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죠. 정말 웃기지 않아요?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지.”
공주님의 옷은 어떻게 생겼을까. 쏟아지는 꽃처럼 어여쁠까, 황금색 물결처럼 부드러울까. 오란은 육포를 씹는 일도 잊고 한동안 그 생각을 했다. 확 펼치면 꽃잎처럼 퍼지며 흩날리듯 어찔어찔 가라앉을까, 감촉은 깃털처럼 보드랍겠지. 그런 옷이라면 엄마도 살아날지도 몰라, 정말로. 
“아무리 가뭄이 심했기로 사람들이 머리 쓰는 게 괴상하구나.”
“안 괴상했으면 엄마를 잡아가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어쨌느냐?”
“어쩌긴 뭘 어째요. 그냥 거지가 됐다니까요.”
“나한테 공주의 옷은 아니더라도 왕이 입던 옷은 있는데 그거라도 주랴?”
“네? 정말로요? 그렇다고 그걸 지금 봐서 뭘 어쩌겠어요. 그런데 진짜예요?”
전직 장군은 품 속에서 손을 집어넣고 한참 고생 끝에 무언가 겨우 꺼냈다. 오란은 관심 없는 척하다가 흘끗 그의 손에 잡혀 끌려 나오는 흰 천뭉치를 눈짓했다. 그는 천의 끝매듭을 풀고 천천히 네 끝을 하나하나 펼쳤다. 네모지게 접힌 옷이었다. 오란은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보니 아침 맑은 햇살처럼 깨끗한 금빛이다. 전직 장군은 조심스레 옷을 집어 위로 들어 올렸다. 얇은 비단이 꽃 피듯 오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반투명한 금빛 비단에 풀잎 무늬가 띄엄띄엄 놓였다. 아니, 구름인가, 물길인가, 혹은 빗방울일까. 옷을 든 손이 흔들릴 때마다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런 옷이라면 정말로 엄마를 살려냈을 것이다. 오란은 손가락 끝으로 아주 살짝 건드려 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마치 곱게 짜인 바람결 같은 느낌이 피부 끝으로 맴돈다. 이런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전쟁 명령을 내리고 공주를 탑에 가두라 하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모시던 왕의 여름 겉옷이다. 진지에서 떠나기 전에 우연히 찾은 게다. 차마 버릴 수가 없더라.”
“이렇게 예쁜데.”
“그러게나 말이다.”
오란은 한참 동안 옷을 보았다. 쓸데없이 가슴 한 켠이 저렸다. 사실은 다 거짓말인데, 진짜가 아닌데, 그런데도 저런 옷만 있었으면 자신이 고아가 아니었을 것이고, 도둑질로 먹고 살지 않아도 좋았을 것만 같았다. 좋은 엄마 아빠한테서 태어나서 천방지축으로 재미있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오란은 괜히 육포 쪼가리를 세게 씹어댔다. 흥, 흥, 흥. 저녁이 오고 있었고, 전직 장군은 옷을 잘 개어 흰 천으로 감쌌다.
“이제 좀 개운한 것 같기도 하느냐?”
“개운은 무슨. 암튼 이쁘긴 이쁘네요. 흥.”
“심술은. 이제 곧 사람이 올 텐데 말이나 잘 맞추거라. 내가 전에 마을 어귀에 쪼그려 있던 너를 보고 딸 같아서 불쌍한 마음에 데려왔다고 할 테니 혹시 뭐라 물으면 우는 척이나 하란 말이지.”
“제가 눈물은 잘 뽑아요.”
“그래, 그래.”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과연 상단의 수레 중 하나가 오아시스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음식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오란은 전직 장군 곁에 누워 아예 잠든 척이었다.
“그 애는 또 뭐요.”
“전번에 길에서 주웠는데, 딱해서 말이외다. 불 좀 주시오.”
“어느새 또 애를 주웠대. 어디서 낳아온 건 아니고?”
“아 그거나 저거나 애가 하나 딸려온 건 사실이오.”
“아무튼 장군님은 오지랖도 넓으시다니까. 불 찾을 줄도 벌써 알고 내가 아예 화로를 가져왔으니 밤새 담배를 피우든 지지든 맘대로 하소그려.”
“고맙소이다. 그런데 화금마마는 뭘 하느라 아직도 안 오는 거요?”
“바쁜 모양이지요. 아마 오늘은 그냥 수레에서 주무실 걸요.”
상단 사람들도 아저씨를 장군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화로인지 무언지 무거운 것이 땅에 놓이는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담배 냄새가 확 퍼졌다. 음식과 화로를 가져온 아줌마는 얼마간 더 수다를 떨다가 일어나 돌아갔고, 가자마자 오란은 벌떡 일어나 앉아 음식부터 찾았다. 가뜩이나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자기 뚜껑까지 열자 맛있는 냄새가 한층 사방에 진동했다. 수저를 빼앗다시피 하여 정신없이 닭죽을 퍼먹던 오란은 절반 정도 그릇이 비었을 때에야 슬쩍 장군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근데 아저씨는 안 먹어도, 아니지, 드셔도 돼요?”
“지금껏 잘 먹어놓고 인제 와서 뭔 소리냐. 너 다 먹어라.”
“그래두.”
“괜찮으니 그냥 다 먹으래도. 나는 담배 피우니 배가 부르구나.”
그러면서 한 대 더 불 붙이는 아저씨였고, 더는 권하지 않고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는 오란이었다.
“밥만 먹고 수저는 먹지 마라.”
웃음 섞인 전직 장군 아저씨의 말에 오란은 입에 닭고기를 문 채 같이 웃을 수 있을 만큼 웃었다. 이렇게 걱정 없이 앉아있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할 수도 없다. 그동안 어디를 가든 뭘 먹거나 뭘 얘기하거나, 아무튼 뭘 하든지 어디서 누가 뒷목을 잡아챌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란은 그동안 힘들게 먹고 살아왔던 기억더러 약이라도 오르라는 듯 따박따박 수저질을 했다. 옆에서 장군 아저씨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아빠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오란은 감자 조각을 수저 뒤로 누르다가 문득 생각했다. 딸내미 밥 먹이면서 자기는 하릴없이 담배나 물고 하늘이나 쳐다보는, 그런 아빠.
“에헤헤.”
“밥알 떨어진다.”
오란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그리고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 긁어도 밥알 하나 남지 않게 되어서야 수저를 놓았다. 빈 그릇 속에 수저를 떨어뜨리고 뚜껑을 덮자 아저씨가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배부르니 졸려요.”
“배부른 소리구먼.”
“아 정말 아저씨 농담은 농담이랄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실실 웃기는.”
“얘기나 해주세요. 그래서 돌아가면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묻다 말고 오란은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뭘 하겠느냐.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가야지.”
“그게 뭐예요. 기껏 돌아갔으면 뭐라도 해야지. 폭죽을 터뜨린다든가, 제방을 무너뜨린다든가, 태풍을 불러온다든가….”
“그냥 자라.”
“아무튼 뭐라도….”
“자라니까.”
그는 칭얼대며 점차 옆으로 기울어지는 아이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내려 주었다. 오란은 장군 아저씨의 손을 그대로 베고서 잠이 들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천천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담배 연기 너머, 나뭇가지와 나뭇잎 너머 하늘에 별이 뜨기는 떴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운 연기를 속으로 끌어들였고, 또 밀어냈다. 그러기를 한참, 그릇을 가지러 서창부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뭐라 말하기에 앞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담배 연기가 동서로 흔들렸다.
“하나도 안 남기고 잘 먹었구먼.”
“왜 남겼냐는 잔소리를 오늘은 안 들어서 좋소이다.”
“어쩔까요, 그럼?”
“그냥 예서 자다 내일 천천히 가겠소.”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 되지. 걱정 마시구려. 담배 더 없소이까?”
“안 물어보면 안 드리려 했더니만 귀신같이 물어보시네그래.”
“안 물어볼 수가 있나, 어디.”
서창부인은 주머니를 하나 끌러 그에게 건넸다. 그릇을 모아들고서 잘 주무시라는 인사와 함께 다시 수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손에 머리를 얹고 잠든 오란의 얼굴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꿈이라도 꾸는지 눈을 찡긋거리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무슨 표정인가를 짓기는 하는 것 같은데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뭐한 그런 얼굴이었다.
담배를 문 입으로 그는 나직이 말했다. 좋은 꿈이나 꿔라, 아가야. 배불리 먹고 푹 쉬었으니 꿈자리도 좋아야 할 일이라.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오란이 곧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지었다.
밤 고요한데 사막 쪽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길고도 둥글었다. 둥글어 용이 꼬리를 휘감는 듯하니 비구름이 멀지 않다는 뜻이다. 아주 가깝지도 않지만, 아무튼 화금마마가 그럴 만한 이유 없이 괜히 사막 건너는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튼지 간에, 다 잘 될 것이다. 그는 담배 연기를 둥글게 내뿜었다.
그가 그렇게 앉아 밤을 새우는 동안 오란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 꿈에서 흰 천 일렁이는 빨래터도 가고 우물가도 가고,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어디서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었고 마당 대추나무 가지에 참새들이 깃들어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며 나대는 모양을 보기도 했다. 등새가 날개를 펼치자 찬란한 서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빈집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던 오란은 등새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무지개 색으로 빛들이 여러 줄기를 이루며 소맷자락처럼 새 날개로 따라붙는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이른 새벽이었다. 대문은 한 짝이 떨어져 나가 있고 다른 쪽 문은 간신히 매달렸다. 아니, 비는 처음부터 내린 적 없었다. 마른 먼지가 발자국 모양을 이루어 길에서 집 문턱으로 무수히 끔찍하게 찍혀 있었다.
등새가 영롱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빛은 쏟아지고 오란은 울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알 수가 없다. 울음은 더 심해져서 나중에는 입이 떨려 닫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넘어지며 오란은 힘들게 새를 따라갔다. 신고 나온 신발은 도중에 떨어져 나가고 흘려 떨어지고, 슬펐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또 슬펐다. 눈물 콧물이 입에 짜고 싫었다. 그러던 오란은 갑자기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멈추어 섰다. 저 멀리, 가둘 물도 없는 방둑 한가운데 짚단이며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손목이며 온몸이 심하게 아팠다. 오란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팠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왜, 도대체. 오란 주변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대로 시간이 없어지고 건조한 열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불붙은 하늘 위 또 하늘, 그러나 도대체 왜.
숨이 막혀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는데 무슨 연유에서인가, 등이 별안간 시원해졌다. 빗물에라도 맞는 것처럼. 오란은 질끈 감았던 눈을 조금 뜨고 보았다. 저 위에 아직도 등새가 날았다. 눈부시게. 푸른 나뭇잎 하나가 그녀의 이마 위로 떨어져 앉았다. 오란은 등새가 천천히 마른 짚단 자리로 날아가 앉는 것을 보았다.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화형자리는 그대로 둥지자리가 되었다. 나뭇잎이 이마에서 미끄러져 다시 날아간다. 새처럼, 구름처럼. 오란은 나뭇잎 날아가는 방향으로 다시 일어나 따라가다가 그대로 꿈에서 걸어나왔다.
새벽이었다. 오아시스는 고요하고 전직 장군 아저씨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덮은 것은 바로 어제 아저씨가 보여준 그 비단옷이었다. 옷을 살며시 집어 개는데 또 나뭇잎 하나, 똑 떨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또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와락 무더기로 쏟아진다. 부채 부치는 소리인 것만 같다. 구슬 발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혹은 시내 소리, 폭포 소리, 빗소리. 오란은 입을 벌리고 나무들이 쏟아내는 잎 비를 구경했다. 그러는 동안 식은땀이 가시는 것만 같았다. 꿈이 씻겨나가고 새만 남는다. 메말라 갈라진 땅에 습기가 스며들어 부드러워지듯, 상처 아물 듯, 괜찮아지듯이. 바람 불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불어가니 잎들이 따라가며 연방 사비작거리는 소리를 낸다. 오란은 저도 모르는 새 같이 걷고 있었다. 잎이 그녀 등을 덮고 귓가 스치고 손끝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가도 괜찮다, 가도 괜찮다, 그리 속삭이는 듯했다. 모든 것이 청량히 어여쁘게도.
오란은 옷을 품으로 끌어안고서 나긋나긋 걸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싫어하던 사막을 향해서였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던 것이, 곧 다급해지고 나중에는 뛰었다. 오란은 가슴이 답답하고 또 어떻게 보면 시원할 것 같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었다. 손에 쥔 비단옷이 이슬처럼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말할 수 없이 후련했다.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을 사막으로 들이밀었다.
  붉은 모래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오란은 고개를 들고 사막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곳을 왜 그렇게 싫다 했었지?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하는 건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오란은 장군 아저씨가 덮어주고 간 옷을 너르게 펼쳤다. 제대로 소매에 팔을 꿰입으려던 것인데, 무슨 말인가 안쪽에 쓰여 있었다. 오란은 고개를 들이밀고 글자를 더듬더듬 읽었다. 그 내용인즉슨,
탑에 갇힌 공주가 떨어뜨린 비단옷이 바람을 타고 물을 건넜다. 사흘 밤낮을 날아가다가 이윽고 수숫대 아래서 굶어 죽어가던 거지 아이를 덮었다. 비단 천 끄트머리가 땅에 닿으며 먼지를 일으키자 곧 아이도, 아이를 내쫓은 마을도, 마을 사람도 짐승도 사라지고 문득 사방이 붉은 사막이었다. 우물의 어린 혼께서는 이제 마음을 풀고 부디 편히 잠드시라.
글귀를 다 읽은 오란이 아득히 사막을 바라보자 저 멀리 뭉쳐 흐르는 열기 어디쯤인가, 잠시 신기루처럼 어떤 마을이 보였다. 비가 내리지 않아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과 흠씬 얻어맞고 질질 끌려나가는 아이 하나, 그리고 대여섯은 되어 보이는 횃불. 저것이 불길한 것을 잔뜩 지고 들어왔으니 얼른 쫓아내야 사람들이 산다고 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모두 저 아이 탓이었다. 이마의 붉은 점도 핏자국이나 다름없으니 불길하다 했다. 아이는 맞다 지쳐서 나중에는 울며 빌었다. 비 내릴게요, 비 오게 할게요, 아파요. 그만하세요. 살려주세요. 비 아주 많이, 많이 내리게 할게요. 거지 아이를 불쌍하다고 주워 왔다가 버렸다가, 나중에는 그렇게 두드려 패서 내쫓아 길에서 죽게 했다. 어디선가 목련 향기가 불어왔다. 아니, 향기인가, 비구름 내음인가. 시간이 천천히 멈추었다. 아이는 목련나무 아래서 숨이 끊쳤다. 꽃잎 떨어져 아이 피투성이 손을 덮었다. 그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황금빛 햇살이 함께 둥글게 뭉치며 내려와 땅을 뒤덮었다. 꽃처럼, 빗방울처럼, 치맛자락처럼.
오아시스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성품 인자한 장군신 한 분, 제일 큰 나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그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는 문득 그리 된 일이다. 오래된 우물가는 인적 없이 고적한데 나뭇잎이 말라붙은 우물 바닥을 찾아들었다. 바람을 타고 사막으로 날아가는 넝마는 한때 화사한 오색 비단옷이었을 법도 했다. 혹은 새인가, 스스로 빛나는 날개 한 쌍인가. 하늘로 가는 어느 영혼의 화사한 꿈인가. 옛말에 눈 한번 깜박이니 다른 세상이라는데, 정말 그랬다.
  *
화금마마는 사흘째 되는 날 오아시스에 다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나무 아래 세워둔 대자리와 우물가에 붙여놓은 선향 묶음을 거두어 태웠다. 흰 연기가 끊김 없이 하늘로 곱게 올라갔다. 그녀를 따라온 수양딸 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갔을까요?”
“애들을 불러 우물가를 잘 치우라 해라. 내년에는 따로 물을 지고 오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 제대로 솟을 게다.”
새장 안에서 등새가 조그맣게 소리를 냈다. 오래 막혀 있던 물길이 트여 조금씩 차올라 물 고이는, 그런 청수한 소리였다. 화금마마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두드렸다. 향 묶음을 하나 아이의 손에 쥐였다.
“제 준비나 하자. 여기 나무 뒤에, 장군님 잘 뫼셔 가고, 오면서 사람들을 부르거라.”
“네.”
“다 점검 제대로 하고.”
“네.”
“너도 신발이며 다 새로 신고.”
“네에에.”
“대답은 납쭉납쭉 잘도 하지.”
“그러믄요.”
그러면서 씩 웃는 아이와, 못이긴 듯 또 웃고 마는 화금마마였다.
“붓과 비단을 가져오너라.”
제에 쓸 비단과 주사와 붓이 오자 화금마마는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이미 어제 새벽 일찍 한 번 쓴 문구와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탑에 갇힌 공주가 떨어뜨린 비단옷이 바람을 타고 물을 건넜다. 너른 세상을 가로질러 사흘 밤낮을 날아가다가 이윽고 수숫대 아래서 굶어 죽어가던 거지 아이를 덮었다. 비단 천 끄트머리가 땅에 닿으며 먼지를 일으키자 곧 아이도, 아이를 내쫓은 마을도, 마을 사람도 짐승도 사라지고 문득 사방이 붉은 사막이었다.
또 화금마마는 끝에 이렇게 더해 썼다.
오란 아씨께옵서는 부디 눈물을 거두시고 평안하시라, 평안하시라.
제를 마친 다음 날까지 일행은 오아시스에서 조용히 보내고 나서 다시 길을 출발했다. 제를 지낸 비단은 사막을 지나는 내내 깃발 중 하나로서 깃대에 매달아 두었다. 굳이 제사까지 지낸 효험이 있어서인가, 때가 마침 맞은 것인가, 상단이 사막을 건너는 동안 폭우는 쏟아지지 않았다. 그저 새벽마다 푸른 깃발에만 성근 이슬이 맺혔다지만 단지 그리 전해질 뿐, 이 역시 다른 비슷한 소문처럼 믿을 사람만 믿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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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No Profile
    가연 11.01.02 19:30 댓글 수정 삭제
    이 글, 참 좋아요...♡
  • No Profile
    미로냥 11.01.05 20:56 댓글 수정 삭제
    amrita님 정말 좋아요! ㅠㅠ
  • No Profile
    amrita 11.01.10 02:3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ㅎㅎㅎ 그동안 하도 업데이트를 못해서 생각하던 차에 보따리 털었어요. 이제 털어도 나올 건 먼지밖에 없으니 새로 써야 할 텐데 과연 어느 세월에..ㅜㅜ
    댓글도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당... 앞으로 업데이트도 좀... 자... 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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