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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꽃의 집합

2011.01.01 01:0501.01


오래 전


  아난나는 과거 지구가 아직 살아있을 적에 존재하던 과일 이름이라고 들었다. 좀 더 널리 알려진 언어로는 바나나라고도 했던가. (아니던가?) 확실히 기억해두지 않아 혼동될 따름이다. 단지 이름의 뜻을 읽고는 마음에 들어 기억해두기로 했었다. 또다른 언어로는 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무시해도 좋은 점이다. 어쨌든, 아난나- 나의 아난나는 아직 성에 눈뜨기 전, 여섯 살의 나이였으니.
  무슨 뜻인가 하면 내 딸 아난나가 여섯 살 되던 해 사라졌다는 뜻이다.
  또한 영영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또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까.
 
눈부시던


  그 분수의 밑바닥을 차지하는 것은 대리적이요, 분수 주변을 꾸민 것은 열두 가지 보석이요, 분수가 솟아오른 지점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덮은 것은 순금이니 이것이야말로 아직까지도 강림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새 예루살렘의 광장 분수대와 다름없다 할 만했다. 물론, 나는 쓸데없이 농담을 지껄이고 있다. 그러나 항우울제를 삼킨 채 누워 천장을 감상하는 일보다야 실없는 농담을 주절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항우울제는 결국 슬픔을 다음 날로 미룰 뿐이다. 행여 부작용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하루종일 소리없이 눈에서 물만 뽑게 된다. 슬프지도 않는데도. 그러니 예전, 아주 오래 전, 지구가 여전히 살아있었을 적에, 어떤 시인이 어떤 되다 만 화가의 입장에서 썼던 시에서도 나왔듯이, 절망 중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뒤틀린 농담질뿐인 것이다. 마누라가 구제불가능이었던 화가였던가, 아마? 빛나는 재능의 불꽃,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스러운 순간을 맛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놀랍도록 정확하고 틀림없는 재주의 소유자였던가? 그러니 정확하지도 않고 신의 자비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인간이라면 더더군다나 영 쓸데없는 농담이라도 주절대야 한다.
  (물론 진담은 아니다. 모든 것처럼.)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의 살을 씹어삼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항우울제는?
  그렇다면 유예된 눈물은?
  (알 수 없다.) 세 달 전 침묵의 바다 한가운데 드높이 솟은 예루살렘 분수에서 아난나를 잃었다. 내 뱃속으로 키워 낳은 생명, 내 살과 피, 내 내장과 심장과 눈물과 뇌수의 결정체, 부드럽고 가볍고 따스했던 지구의 씨앗, 그러나 달의 딸, 아난나. 머리는 양갈래로 나누어 땋았고 리본으로 묶었다. 작은 발과 발목과 종아리까지 흰 양말을 신겼다. 둥글고 희고 리본 장식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걸었다. 분수대 주변을 감돌며 웃었다, 간혹 내게 와서 또, 그러면 나는 이유모를 감정에 심장이 울려서 갑작스레 울고픈 심정이 되기도 했다, 지나치게 행복한 가운데. 그 웃음은 마치 바람과도 같았고 안개와도 같았다. 그 웃음은 내가 아난나를 낳고서 한동안 우울에 시달리며 자살을 계획할 적 나를 흔들어 깨운 웃음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어 끈질길 수 있다는 사실, 한참 더 잔인할 수도, 자비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 뻔한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 사실들이 한 줌도 되지 않는 아이의 미소로 인하여 우울의 안락을 부수고 현신했다…
  지구에서 도망쳐 나온 실향민, 달의 이주민이 된 지 십년 째 되던 해였다.


꿈의 지구


  …는 감당할 수 없이 푸르고 시리다. 그 별에 살던 때의 기억 역시 푸르고 안타깝다. 황금색 들판. 황금색 노을. 붉은 노을. 회색 구름. 푸른 지평선. 몇 세기 전 신들이 살았다는 호수, 숲, 막 포장된 도로.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던 바람. 어떤 이가 내 지구의 기억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낭만적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달에서 깨어난 후 받았던 적응훈련 클래스 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값싸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약을 먹지 않고도 힘들이지 않고 울 수 있었던 이는 그이였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간혹 내 “낭만적”인 기억에 반대하던 이들에게 별로 신경쓰지 않고 이어서) 때때로 호수로 찾아오던 흰 새들을 이야기했다. 긴 다리와 긴 부리를 지녔던 새들. 날개를 어느 정도 펼친 채 마치 어느 동화책 그림 속 새처럼 수면을 바라보던 새들. 그들이 단지 배고파서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 물 속을, 세계의 바람 속을 들여다보듯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학은 두 장의 날개로 비행합니다, 비행은 곧 세상의 바람 속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바람에도 내장이 있어요. 이슬처럼 하늘을 물들인 학의 삽화 위로 찍혀 내려가던 구절. 동화책 책장 위로 노랗게 내려오던 햇빛. 왼쪽 어깨로 무겁던 햇볕.) 이제 검게 변한 지구를 떠도는 새들의 망령들만이 알 일이다. 그러나 이제 누가 있어 그들의 울음을 듣겠는가.
  이제 누가 있어…
  (지구의 모든 신들은 달에 무사히 이주했을까. 지구가 끝장나던 순간 종교는 핼쓱해졌다. 종교에 의지하던 신들 역시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그들의 목을 베면 달에 흰 피가 내릴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누가 있어 순교자를 순교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적응 훈련을 마치고 대기 필름으로 휩싸인 달의 바다로 풀려난 이후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줄곧. 그저 떠돌아다녔다. 그래봤자 달, 그래봤자 인공 대기 속, 그래봤자 꿈의 지구 속이었지만 돌아다닌다는 행위 자체에 어딘가 마음을 달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오래 걸었다. 혹은 잠들었다. 혹은 시덥잖은 모임에 참석했다. 혹은 스스로의 시덥잖은 삶을 두고 시간을 낭비했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고향을 잃고 달로 도망온 피난민들. 그래도 나는 아주 슬프지는 않은 경우에 속했다. 우리 중에는 지구에 남아서 함께 죽기를 원했지만 어쨌든 달로 떠밀려 날아온 이도 있었다. (많은 이가 죽으려 했다. 어떤 이들은 정말 죽었다.) 시신은 지구로 보내지기도 했다. 지구를 검게 감싼 망령들의 구름 속으로, 피난민의 시신은 반갑게 빨려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죽은 이를 질투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있어… 나는 지구에서 도망 온 수정란을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흙 한 줌, 햇살 한 뭉치, 바람 한 줄기, 보라색 노을, 무지개, 붉고 노랗고 푸르고 검은 물, 희고 무심한 학, 호수의 파문, 새벽 이슬, 비 냄새, 빗물 마르는 냄새. 잊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반항하고 싶었다. 아주 버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달까지 밀려와서 살아있을 리가 없겠지?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우리들이. 하지만 왜 달까지 밀려와서 살아있어야 하지. 질문에는 답이 따랐고 답에는 질문이 따랐다. 아난나를 자궁에 심은 것은 마지막 발악이었다. 비록 달에서는 아무 식물도 (자연적으로는) 자랄 수 없지만.
  그러나 실수였다. 임신 두달째부터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수정란을 제공한 측의 정성어린 간호와 (감시와) 관심이 없었다면 아마 피를 삼키며 죽어갔을 지도 모른다. 튜브와 주사 바늘과 호흡으로 영양과 공기를 공급받으며 나는 서서히 지구와 달을 함께 잊었다. 단지, 그래, 우리가 태어난 곳이 언젠가 부서졌었지. 나 역시 가라앉았다. 죽음은 유예되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아난나가 새 예루살렘의 미소를 보이기 전까지는.
  어쩌면 달에서도 부서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새 예루살렘 역시 옛 지구의 소산인 것을. 유예된 죽음은 새 제물을 찾아갔는가.


그러나


  죽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기계가 달의 길가에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말이 편지지 거의 무엇이든 보낼 수 있는 기계였다. 풍선이든, 인형이든, 옷이든, 신발이든, 사진이든. 네모난 구멍 속으로 편지, 선물, 정표, 마음들이 쏟아져 들어갔으며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기계를 믿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포장했다. 기계가 정말로 망자에게 선물을 보내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쪽에서 내가 무엇이든 전달하려 시도했다는 점이었다. 믿음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철저히, 안타깝게도, 자기위안의 문제였던 것이다.
  아난나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세 달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답신은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쓴 편지의 사본을 다시 읽었다.


(내가 네게 지나친 것을 기대했을까, 이제는 죽은 별의 노을, 안개, 파도? 강물이 깊은 밤중에 흐르며 내는 소리? 어쩌면 나는 네가 인간이 아니기를, 어떠한 선명하고 믿음직스러운 상징이기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고대했을까? 하지만 딸아, 잠들 때 내 심장에 맞서 뛰던 네 심장 소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돌아오기를 바란다, 내가 대신 사라져도 좋으니, 네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혹은,


(지금 이 매끄럽고 차가운 부스 속에서, 주저앉아 분간 없이 플라스틱 펜을 눌러대며, 지금이라도 네 목소리가 내 등뒤를 잡아채기를 원하고 있다. 지구의 종이였다면 눈물을 빨아들였을 테지. 그러나 지금 이곳이 지구였다면 난 너를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너를 원한 동기부터가 이루 말할 데 없이 이기적이었다. 아마도 너를 태어나게 한 것부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철없는 짓이었다. 아마도 너로 인하여 누렸던 모든 기쁨은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네가 아직 내 몸 속에 있을 때, 내가 느꼈던 모든 이상한 기분들, 내 몸 속에 또다른 몸이 뭉쳐 생겨나던, 그 기분들 속에서 죽기만을 바랐던 내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러나 용서해다오, 기쁨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분간 없이 쓰는 네 철없는 어미를. 죄라는 단어를 이토록 쉽게 언급하는. 이기적이라는. 용서라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널 삶으로 끌어올린 나를. 지금 이런 말을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구였다면 널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토록 혼란스럽게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나를. 그러나 용서해다오, 엄마는 자주 오래 전 호수를 들여다보던 새들을 생각했단다. 너를 데리고 새들을 보러 가는 일들을 생각했단다. 들판을 가로질러. 노을 속으로. 별. 안개. 낙엽. 시내, 돌다리. 먼 도시의 불빛.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음. 도로 한편에서 머뭇거리는 사슴을 보았던 기억들. 숲 한가운데서 온갖 나뭇잎과 그림자들 사이를 교차하며 천천히 내려오던 햇살 조각들. 햇빛 속에서 온몸으로, 모든 세포를 꿰뚫거나 휘감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실하던 모든 세례들. 그 모든 게 있었다면 아마도 너를 지켰을까. 아마도 너는 그 분수대 어딘가로 걸어가서, 또한 더 멀리 걸어가서, 세상의 어느 순례자도 다가갈 수 없을 곳까지 멀리-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가 있었다면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고(어떻게든) 생각했던 걸까? 지구의 마지막 씨앗인 너라면… 그러나 용서라는 단어를 이토록 가벼이 입에 담는 나를 결단코 용서치 말아다오. 대관절 무엇으로 용서하고 무엇을 위해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네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지구인 것을. 대관절 누가 있어 널 위해 나서서 말해 준단 말이냐.
어째서 그리 멀리 갔느냐. 어째서 그리 멀리 갔느냐. 그러나.)


  그런 것들을 써서 기계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항우울제를 마시고 울음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계속 닦아내야 하는 부작용을 견뎌냈다. 그렇다, 나는 아난나를 낳을 자격이 없었다. 단지 도망치기 위해 자궁을 열었을 뿐. 한 줌도 되지 않던, 따뜻하고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깝던 아이를 차가운 달로 끄집어낼 권리가 없었다. 방향 잃은 내 우울을 그 아이에게 떠밀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오래도록 부모를 증오했다. 그것은 무슨 이유가 있는 증오가 아니라 그저 골수에 박힌, DNA레벨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이름붙일 수 있는 종류의 증오였다. 나를 낳았으므로. 언제든 삶을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내 생명이 시작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분노했다. 그 분노가 결국은 뼈저리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 분노했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었다. 끔찍한 자동차 사고를 겪고도. 지구의 죽음을 넘어.)


  아난나도 그 증오를 물려받았을까.
  항우울제를 흡입하거나, 망가진 지구를 바라보며 끝없는 자학에 스스로를 맡기거나, 비교적 안전한 우울을 즐기던 내 모든 행동의 뿌리에는 그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죄책감. 완벽하고 순수한 아이를 더럽고 망가진 내가 망쳐놓았다는 생각. 그리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증오와 두려움의 끈은 영영 사라질 수 없음을 결국 인정하고 만 자신. 나는 아난나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내게 상징이었을까. 내 삶의 증명이었을까. 내 우울의 제물이었을까.
  (우리는 달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하는가, 지구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서.)
  돌아갈 수 없는 지구를 향한 값싼 감상으로 한 생명을 탄생시켰다. 잃었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가진 적" 없었음이다. 나는 아난나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 진실은 단 한 번도 "바라본 적" 없었음이다.


돌아오지 말아다오.


  그 편지를 기계에 밀어넣는 일.


  (돌아오지 말아다오. 행복하려거든 우주 어느 곳으로든 한없이 떠돌아다오. 어느 누구의 자궁으로도 들지 말아다오. 나를 용서해다오, 네 기나긴 여정 중 어느 순간인가 문득. 잊듯이. 어렵지 않게.)


  페르세포네가 하데스가 건네는 석류 세 알을 집어 삼키듯. 승용차 한 대,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구르듯. 어린 여자아이 하나, 창밖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다 지구가 진흙길 위로 굴러가는 상황을 경험하듯. 깨어나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모였던 이들의 부서진 몸을 보는 것처럼 온몸으로 죽음을 배우는 일. 비극은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 그러나…


  알 수 없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의 충동만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날 나는 울고 싶은, 그러나 울어지지는 않는 심정으로 편지를 기계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기계를 붙잡고 주저앉아 내가 흘린 바 없는 낯선 눈물의 흐름 속으로 지나가는 새들과 노을과 채색 구름과 단풍진 산의 정경을 보았다. 붉고-푸르고-검고-흰-눈물의 빛깔들. 지구의 내장은 아름다웠다. 부서진 차와 부서진 시신과 소금 기둥이 된 어린아이까지도. 그 아이는 많은 것을 증오했다. (결국 그 무엇도 증오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사랑하므로. 우주의 내장 속 하찮고 미미한 푸른 별을 온 눈물을 다하여. 기계의 메시지 투입구에서 문득 금달맞이꽃이 피었다. 잊듯이. 어렵지 않게. 그리고 나는 살아있었다. 망가지고 절망한 검은 지구를 창 밖 배경으로 배치해둔 채 달을 붙잡고 살아있었다. (살아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세기를 이미 살아버린 인간처럼. 새 예루살렘의 씨앗을 온몸으로 낳았으나 결국은 잃어버린 마리아처럼 눈물- 흘리는 대신 삼키며, 마시며, 흡입하며. 그 누구도 아난나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달에서 최초의 지구가 피었다. 혹은 마지막의.
  (금달맞이꽃은 호수에 새들이 찾아오듯, 단지 거꾸로 달을 향해 솟아오릅니다. 꿈에서 깨어나듯 문득. 꿈속으로 들어가듯 가만히. 지나간 꿈을 잊듯이. 잠드는 일이 어렵지 않듯. 눈을 감아요. 좋은 꿈 꾸기를.)


  바람 꽃 지나든 꽃 바람으로 피든 둘만의 일이려니마는. 라디오에서 소음 섞인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린아이는 문득 동화책에서 고개를 든다. 노란 햇살이 열린 자동차 창문을 통해 들어와 아이 위로 들풀처럼 물들었다. 앞좌석에는 아이의 부모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아버지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제 싸웠다. 그래서 오늘 화해하기 위해 호수를 지나고 산을 넘어간다. 아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손바닥으로 어제 이불 속에서 웅크려 울다가 책이 젖은 부분을 덮는다. 그리고 고개 들어 철새들이 등불처럼 하늘 밝히는 광경을 본다. 문득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는 눈을 비빈다. 그저 막연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괜찮은 거 아닌가.
  바람 꽃 지나든 꽃 바람으로 피든…
  살아있다.


  그날 달에 흰 피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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