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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그림자 용

2011.01.01 01:0301.01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아직 언어가 갈라지지 않았고, 인간의 나라가 조각나서 흩어지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이제는 그 순간을 기억하는 존재가 많지 않음을 안다. 운 스로가, 세계의 다섯 용이 이름만을 남기고 승천했을 때 인간의 세기는 끝났다. 서쪽에서 올라온 겨울이 부서진 왕좌에 온전히 담긴 그 일은 이미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들의 축복을 배은망덕하게도 내팽개친 죄과라는 식의 교훈담 정도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모든 교훈담의 운명이 그렇듯) 그다지 충실히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든 모든 진실일 수는 없으니, 그 밤, 종말이 쏟아지던 가운데:
  많은 이가 지옥을 보았으리라. 이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갑작스럽게 밀려든 시안, 겨울과 폭풍과 눈보라는 시작되려 하던 내전을 얼려 멈추었으며 위대한 라비요르의 황금 왕좌를 부수었다. 그때 인간들이 경험한 것은 아마도 멸망이었으며, 과욕이 불러온 마땅한 말로, 혹은 대가였으리라.
  진실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진주와 장미수정과 하늘에 뜬 해의 위치에 따라 빛깔을 바꾸는 물이 흐르는 정원을 소유한 이들이었다. 또한 신성한 라비요르의 원을 침범하려 든 이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늘이 찢기고 땅이 부서지던 그때 진정으로 멸망을 경험했다. 그러나 보석으로 장식한 손이 무심하게 내던지던 음식 조각과 금이 간 장신구를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던 걸식자들과 눈먼 가짜 점쟁이들, 구정물 속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운명의 소유자, 즉 나무판자와 너덜거리는 천 조각으로 지은 집의 주거자들이 본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춤과 노래, 허공을 가로지르던 별의 심장과 쓰고 검은 연기, 요란하게 부서지던 새장과 날아갈 방향을 모르던 새들과 들썩이며 갈라지고 가라앉던 땅, 만월의 파편인양 반짝이며 떨어져 내리던 모든 빛들. 그러한 소란 속에서 어떤 이들은 온전히 평온하였다.
  신들이 인간의 땅을 걷고 있었다, 그 종말의 때에. 이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다섯 용의 이름이 인간에게 낯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지금은 그림자의 그림자에 불과한 나라 해도, 깊은 지혜나 끈질긴 인내 같은 덕목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도 다섯 용의 이름은 지나치게 드높고 또한 믿기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데마타, 하모르타, 아스가야, 마수르카, 카르파- 그림자, 태양, 불, 꽃, 죽음의 용. 구만 구천 하늘의 여신이며 생명의 구원자인 라요라의 자식이자 세상을 지탱하는 다섯 신. 수천 년 전이든 후든, 그들의 이름은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이던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는 법. 나는 다섯 용 중 단 하나라도 직접 목격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믿을 수 있었겠는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던 중에 새장 속의 새가 [바로 오늘, 모든 날 중에서도 이날 우리는 멸망하리라]고 울어댔다면.*


*


  거적과 쓰레기 더미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라난 소녀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그늬가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어리석었다고도. 그늬가 태어나서 십수년 간 들어본 음악이라고는 배고픈 거지들이 동냥하며 부르는 노래가 전부였으며, 옷이나 신발이라고는 더럽고 까칠한 천을 꿰맨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구할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것이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소녀 앞에 별처럼 빛나는 최상급 청사옥과 먼 바다의 도화인에게서 들여온 구름 같은 비단, 순금 머리꾸미개와 붉은 윤기가 흐르는 꽃자수신을 늘어놓으며 이것이 다 네 것이다- 한다면, 그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조건만을 내걸고서, 보석 반지로 장식된 손을 내밀며, 온통 빛나며:


  네가 우리가 된다면.


  그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구원받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내가- 그 소녀가- 청사옥이 귀한 것은 그 안에 푸른 뱀의 저주가 고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수년 후의 일이다. 동쪽 노을숲 너머 산다는 나티들은 어미뱀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뱀을 한데 엮어 산 채로 독에 담그어 두었다가 뼈까지 흔적없이 녹으면 그 용액을 안을 깊이 파낸 보석 속에 부은 후 특별한 흙으로 구멍을 메운다. 청사옥은 만든 지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일수록 빛깔이 선명해지며 그 가치 또한 상승하는데, 껍질 역할을 하는 보석의 두께가 점차 얇아지므로 독이 새어나올 위험 또한 커진다. 도박과 온갖 암수에 능한 나티가 만들어낼 법한 작품이라며 세크는 자주 말하고는 했다.
  [독을 품은 보석을 보관하는 곳으로야 광대의 새가 머무는 둥지보다 나은 곳도 없지.]
  그가 내게 마야를 주었다. 자정, 텅 빈, 어두운 무대 위에서 광대 중의 광대는 모든 시험을 통과한 제자를 동료로 인정했다. 세크는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금 이 무대를 채운 이 침묵뿐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일부가 이 위에서 연기될 것이고 재현될 것이고 우리는 그림자를 뒤집어 쓰고 거울 놀이를 하겠지만 종국에는 어둠뿐이라,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니. 그가 뭐라고 말하든 온전한 광대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반쪽 가면이 그때는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이름과 인생 전부를 그 가벼운 가면 반쪽과 맞바꾸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므로.
  알지 못했으므로 망설이지 않았다.
  그 무지의 결과가 멸망을 넘어 또다른 멸망을 보기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종국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다만 로샤타의 모든 인간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거울놀이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다. 마지막 라비요르는 왕좌의 원 중심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로샤타는 네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로아, 마요르, 로샤타, 가르곤- 라비요르는 일찌기 로샤타에서 자신의 후계가 나타나리라고 예언한 바 있으나, 가르곤이 역심을 품고 일어났다. 오래도록 서로 앙숙이었던 아로아와 마요르는 일시적인 협조관계를 시작했으며 (그들은 늙은 왕이 후계 없이 홀로 죽으리라는 것과 겨울, 즉 시안이 왕좌의 원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굳이 로샤타와 가르곤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기회를 보아 안전하게 로샤타의 원 밖으로 피신해 나간 지 오래였다.
  라비요르는 자신이 죽기 전날 밤에 후계의 이름을 선포하겠다고 결정한 바 있었으며, 그 밤이 바로 로샤타와 가르곤이 전쟁을 시작한 때였다.
  그 밤, 우리는 마지막 춤을 추었다. 광대들은 거지들을 결혼시켰으며, 병든 개를 종이꽃으로 장식했으며, 오늘 저녁부터 달이 지기 전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영생을 누린다고 가정하고서 공짜 술을 남김없이 풀었다. 불을 삼키는 묘기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뱀, 영혼의 지도를 보여주는 마법 거울, 뜨거운 물에 담그면 순식간에 수백 송이의 꽃으로 폭발하는 구슬, 삼키기만 하면 어느 종족의 말이든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는 손톱만한 나비,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나는 메두사마저 동정심을 품을 정도로 불쌍하게 떨며 무대 뒤에 엎드러져 있었다. 아침에 먹은 것을 토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며, 혼자서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의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온몸을 장식한 비단 꽃과 보석과 줄종이 마치 쇳덩이처럼 무거웠으며, 호흡이 심하게 불안정했던 것도 같다. 마야를 받고 나서 처음으로 무대 중심에 서야 했던 것이다. 오직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은 아니다. 이제 곧 종이 울리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나는 라요라가 되어야 했다.
  영원한 구원자, 여섯 용의 어머니, 대홍수의 대적자- 내가 어떻게 그런 그림자를 뒤집어쓸 수 있단 말인가.
  전날 밤에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답을 해 주는 사람은- 무슨 답이든, 어떤 답이든-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라요라의 마야가 되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섯 용의 이름을 배정받은 다른 광대들은 아예 그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들려온 말로는 다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다. 마지막 연습 때 당연히 나타났어야 했을 단장까지도 불참했으므로, 배역을 바꾸어 달라고 애원할 수조차 없었다.
  세크는 무대가 열리기 직전이 다 되어서야 홀연히 나타나서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다 된 나를 붙잡아 세웠다. 내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뭐가 즐거운지 피식거리고 웃으며 머리의 꽃장식을 고쳐 꽂아줄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직업이 곧 광대거늘, 이제 와서 어쩌고 저쩌고 해봤자 늦은 일이다. 자, 걸어 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나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검은 선 앞으로 데려갔다.
  무대의 입구로 이어지는 통로는 열 걸음이면 다 지날 거리였는데, 그 바닥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흑색, 백색,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검은 땅을 지나며 광대는 죽고, 흰 땅을 지날 때 마야가 광대의 빈 몸을 일으키며, 마야가 된 광대는 붉은 땅을 지나며 영생을 얻는다.
  세 가지 색깔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든 저것이든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령 어찌해서 무대로 나간다 해도 라요라의 여섯 루오르타- 여섯 아이이자 용이 무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음악을 잃으면, 춤을 잊으면, 혹은 다른 광대와 부딪힌다면, 아니, 그 이전에, 움직일 수조차 없지 않은가 말이다- 메두사여, 지금 제게 강림해 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세크의 손이 흐늘거리는 허리를 붙잡아 곧게 폈다. 턱을 들었으며, 어깨를 바로 했다. 흐트러진 의상과 장신구를 다시 펼치고 고정했다.
  [어차피 저곳에 나가는 건 네가 아니라 마야라고. 광대에게는 수치를 느끼는 것도 사치다.]
  열 걸음 너머에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몸에 힘을 주고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고개가 땅으로 떨어지려 했다. 온몸의 피부와 심장 울리는 소리, 하다못해 호흡마저도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불안한지, 세크는 자신의 상황을 내게 알려주었다.
  [왕이 나를 불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너도 알겠지. 다녀올테니 그동안 잘 해내고 있으라고.]
  자신의 상황이 훨씬 골치 아프니, 이것을 알고 위로나마 받으라는 심보였을까.
  음악이 시작함과 함께 바깥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차 가라앉는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세크의 손이 붙잡아 다시 세웠다. 등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들리지 않기를 반복했다. 숨소리처럼, 맥이 뛰는 소리처럼. 이것이 곧 죽음이며, 이것이 곧 죽음이며, 이것이 곧 죽음이며…그는 내게도 같은 말을 반복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곧 죽음이며…세크의 손은 천천히 나를 놓았다. 나는 힘들게 검은 땅 위로 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곧 죽음이며, 끝이며, 죽음이며, 발목과 손목에 매달린 종이 어지럽게 울었다, 끝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흑암이 온몸의 피부를 타고 상승하였으며, 죽음이며, 끝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야가 희게 빛나는 듯했으며 음악이 멈추었으며…


  두번째 태초의 바다가 무대를 메웠다.


  넘쳐흐른 시간이 세상을 질식시킨 채 고요히 순환하였다. 무릎까지 가득 찬 비단꽃의 물결 사이로 광대는 지극히 느리게 걸었다. 마야로 덮인 얼굴은 언제나 관중 쪽으로 고정하고서 양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구슬을 쥔 손모양을 하고서 바다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광대는 입을 열었으나 마야는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광대는 멸망을 불렀다.
  그 소리는 어느 인간에게서도 나지 않는 소리였다. 고대 파늬로마들이 일으켰던 전쟁의 소리, 세상의 심장에서 솟구치며 온땅을 뒤덮어 쓸어내던 대홍수의 소리, 천둥과 폭풍과 자멸의 소리가 무대를 통째로 꿰뚫어 지났다.


  죽음의 죽음이여, 대홍수의 대적자여,
  구만 구천 하늘 위 극상의 하늘에서부터 강림하소서.


  광대의 양손에서 검은 비단꽃 뭉치가 별안간 만개하였으며, 그것을 신호로 라요라가 영원한 광영에 휩싸인 채 시간의 바다로 내려왔다. 여신이 스친 하늘의 일부에는 별들이 무수히 꽃피었으며, 바다의 표면에는 도화가 꽃망울을 맺었다. 라요라는 구름을 걷고 천둥을 잠재운 후 해와 달의 궤도를 올바로 고정했다. 광대의 소맷자락 밖으로 온갖 빛깔의 꽃이 쏟아져 내렸다.


  귀기울여 들으라.


  라요라의 머리를 두른 것은 반쪽의 카임드라였으며, 반쪽의 하얏수르였다. 서로 절반인 두 뱀의 몸은 온통 광채로 가득했다.


  처음 신들은 세상에 내렸으며 또한 지났으며 처음 전쟁은 세상을 덮었으며 또한 죽였느니, 멸망만이 세상에 무성했느니라……시간의 전쟁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를 기억하라. 파늬로마들이 벌인 시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대홍수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처음 멸망이라. 이를 기억하라. 시간이 넘치며 바다를 이루었으며, 넘치는 바다에 세상이 잠겼으며, 오로지 사야타만이 침몰을 피하였느니…


  라요라는 손을 내밀어 어지럽게 뒤엉킨 시간의 바다를 휘저었다. 세상 중 침몰하지 않은 땅은 오직 사야타 뿐이었으니, 일찌기 그늬의 경고를 들은 바 있는 파늬로마들을 그리로 옮겨 살게 하였다. 사야타는 그 이후로 선택받은 파늬로마만이 오를 수 있는 산이 되었다. 시간의 전쟁을 일으켜 싸웠던 파늬로마 중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이들이 있었으니, 라요라에 의해서 도화인으로 되살아났다. 그 후 라요라는 죽은 땅을 다시 불러 올렸으며, 여섯 용을 낳아 땅을 지키게끔 했다.


  처음으로 라요라의 하미샤가 태어났으며, 새벽의 몸을 이루었다. 그 그림자의 이름은 데마타이며, 용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두번째로 이투르가 태어났으며, 언약의 권능을 증명하게 되었다. 그 태양의 이름은 하모르타이며, 용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세번째로 사미아가 태어났으며, 꿈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 불의 이름은 아스가야이며, 용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네번째로 낫수르가 태어났으며, 노을을 수호하게 되었다. 그 꽃의 이름은 마수르카이며, 용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섯번째로 데르타가 태어났으며, 흑야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죽음의 이름은 카르파이며, 용의 이름은 메두사이다.
  마지막으로 크로예사가 태어났는데, 태어난 순간부터 자멸하기를 소망하였으므로 끝없이 멸망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신이 부르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멸망이 지평선을 넘어 세상의 땅으로 오르려 했다.
  이것이 라요라가 스스로의 몸을 찢은 이유이다. 귀기울여 들을 일이라, 세상이여, 우리 왕이 어떻게 크로예사의 이름을 버리고 라비요르의 이름을 얻었는지 들으라. 처음 인간인 타마시아의 처음 왕이 누구의 시체 위에서 왕좌의 원을 그렸는지 들으라. 대홍수의 대적자, 세상의 구원자, 라요라가 스스로 피를 쏟았으므로 비로소 우리 세상이 살아났느니.


  백금과 구름수정, 황금과 황옥, 산호와 흑요석과 마노와 비단 꽃으로 온몸을 꾸민 여섯 광대가 빛을 뿌리며 무대 구석으로 각자 흩어졌다. 라요라는 스스로의 손으로 가슴을 갈랐다. 붉은 꽃이 그늬의 가슴에서 한없이 쏟아졌으며, 광대의 손목에 묶인 종들이 맹렬히 떨며 사방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라요라는 세상에 자신의 피를 뿌리며 예언의 파편을 더불어 퍼뜨렸다. 세상에 죽음을 들이지 말 일이라, 그로부터 시안이 길을 얻으리니, 겨울이 태어나면 인간은 멸망하리라, 죽음을 통하여 겨울이 오리니……얼음과 피와 천둥의 종족이 세상을 그러쥐리라……그들이 절망을 쏟아 다시금 대홍수를 부를 것이다……그러나 신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새벽은 이미 부서졌도다, 노을은 떠나갔으며 꿈은 스스로를 잊었으며 죽음조차 남지 않았으니, 오로지 한 줌 언약만이 남아 세상의 무덤을 지키리라.


  붉고 푸르고 희고 검고 노랗고, 색종이 혹은 비단, 혹은 면으로 엮이거나 묶이거나 매듭진 온갖 나비와 꽃과 새와 무지개가 한가득 쏟아졌다. 어떤 것은 빠르게, 어떤 것은 나긋이 느리게, 어떤 것은 허공을 한참동안 떠돌다가 마지못해, 어떤 것은 넓게 퍼지며 무대를 덮으려는 듯 바람처럼, 그리고 여섯 용들은 북과 피리와 금 소리 뒤로 몸을 숨겼으며, 다섯 얼굴을 지닌 비단 부채가 무대 앞을 현란하게 휘젓고 다녔으며, 그렇게 라요라의 피가 강과 호수를 물들였으며, 뼈가 산맥을 이루었으며, 살이 비옥한 땅으로 변했고, 눈과 심장이 각각 흩어져 성스러운 원을 그렸으니 라비요르의 원이 그중 하나라. 어두워지는 무대 위를 손톱만한 나비들이 무리지어 날아 지났다. 광대들이 키우는 새가 횃대 위에서 날개 치며 각자 소리내어 노래했다. 나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라요라가 피흘린 자리를 붉은 바탕에 검은 자수를 놓은 구슬꽃이 대신 채웠으며, 음악 소리가 점차 시끄러워졌다.
  밖에서 누군가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대며 날뛰는 듯했다. 동전이 상자 속으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꽤나 날카로웠다. 라요라의 살과 피로 새로 태어난 세상은 어느새 무대 밖으로 흘러나가 온데간데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외치는 소리, 울고 웃는 소리와 나무 의자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 속에서 라요라는, 광대들은, 눈을 떴다. 그들은 무대에 엎드러진 채 한참동안 미동도 않았다. 비단 꽃더미 속에 파묻힌 채 서로의 마야를 외면하며 각자 불길한 예감을 곱씹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광대들이 라요라나 여섯 용을 무대에 부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장의 고집에 못이겨 어차피 안 되는 일, 한바탕 그럴 듯하게 흉내나 내다가 끝내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무대에 오른 이도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자마자 모두를 완벽하게 짓누르고 마야에 깃들어 외운 바 없는 대사와 연습한 바 없는 움직임을 자아내게 만든 그 무형의 기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주변에 남은 이라고는 무대의 광대들과 빗자루를 들고 돌아다니는 몇몇 견습밖에 없었다. 누군가 모두가 속으로 곱씹기만 했을 뿐 언급한 바 없는 일에 대해 소리내어 말했다.
  [오늘이 라비요르가 계승자를 이름하는 날이었지, 아마.]
  두세 가닥의 목소리가 그렇다며 답했다.
  [우리들은 왕의 그림자가 아니었나?]
  전보다 좀 더 많은 목소리가 그렇다며 답했다.
  [성스러운 광대, 로샤타의 그림자가 바로 우리다.]
  나는 얼굴을 덮은 마야로 손을 가져갔다. 차고 딱딱하기만 하다. 마치 시체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엎드린 채 낮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라요라와 여섯 용이 내려왔지.]
  목소리들은 점차 제멋대로 솟아오르며 겹치며 꼬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는 광대가 여기 단 하나라도-,]
  [가르곤이 결국 들고 일어날 작정일까나. 도대체 뭘 믿고 반역을 꾀하는 거지?]
  [로샤타의 수장은 또 무슨 생각인지 모를 일이야. 전쟁인가, 타협인가, 도무지 마음을 정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까지 마음을 못 정했을 리가 없네요, 그 자가.]
  [내기나 걸어 볼까?]
  [전쟁이라면 우리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 거지?]
  [당연히 왕의 편이다!]
  [죽은 왕은 당장 내일의 밥그릇만도 못한 존재라네.]
  [왕좌의 계승자가 다음 왕이 되겠지, 당연히!]
  [라비요르의 이름은 어차피 더 이어지지 못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면 누구의 이름이 다음 왕의 이름인가가 문제인데, 그걸 아는 인간이 아무도 없으니 웃긴 일이지.]
  [그야 왕이 알아서 말하겠지.]
  [말해도 곤란한데 말입니다.]
  [하긴 가르곤들이 발광할 걸 생각하면 소름이 다 끼치-,]
  [정치하는 광대라니 이보다도 웃긴 광경이 없군.]
  말소리가 뚝 그쳤다. 단장이었다.
  기실 라요라를- 아니, 나를 제외한 무대의 모두가 단장에게 그간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다그치고 싶은 심정이었겠지만, 아무도 섣불리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마 다들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은지 이미 수년째였다. 도화인이든 월흔들이든 나티들이든, 타종족의 일원이 로샤타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지 기십 년이 다 지났다. 인간들은 점점 심화되는 분쟁과 불길한 징조들 속에 파묻힌 채 조용히 기다려왔다, 바로 이 날, 마지막 라비요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을. 라비요르가 로샤타 중에 있을 계승자의 이름을 말하고 죽으면 가르곤이 반역하고 일어날 것이다. 라비요르가 아무의 이름도 말하지 않고 죽는다 해도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아로아와 마요르, 곧 법사들과 술사들은 로샤타의 원 밖으로 이주한지 오래다. 불길한 고대 도시에 남은 것은 죽어가는 왕과 광대와 절반의 인간뿐이었다.
  광대는 왕의 그림자이므로 왕의 죽음을 지킨다. 광대들은 단장이 가져왔을 왕의 소식을 숨죽여 기다렸다.
  세크는 짧게 말했다.
  [전쟁이다.]
  그리고 막이 내렸다.


*


  그 이후로는 오직 난장판일 따름이다. 굳이 그때의 전쟁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세상에 우아하거나 곱거나 아름답거나 귀여운 전쟁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만 해두자. 전쟁을 미인처럼 묘사하는 이는 광대뿐이며, 나는 그때 광대였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혹은 절반 정도만.
  라비요르는 세상을 계승하게 될 자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로샤타와 가르곤은 끝내 전쟁을 일으켰다. 죽은 왕이 누운 왕좌의 원 밖에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거나 죽거나 하였다. 양측 모두, 양측 모두의 편도 아닌 자들에게 자비롭지 못했다. 양측 모두 왕좌의 원 안에 들지 못한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처음으로 동족을 살해한 이는 가르곤의 스로카였다.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아마 로샤타 쪽에서도 스로카 못지않은 유명인이 나왔을 것이다.
  라비요르는 자신이 침묵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 곧바로 시작된 전쟁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마 그래서 겨울을 불러올렸을 것이다. 왕좌 한가운데서 한 세상의 마지막 왕이 자신의 아이들이 서로를 죽여대는 것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쟁이 태어나는 것을 내버려 두느냐, 시안을- 겨울을 부르느냐. 무슨 선택을 하든 어차피 멸망이 온다면……
  그만이 알 수 있는 이유 덕분에 세상에 겨울이 태어났다.
  그리고 시안이 지평선을 건너 로샤타로 올라왔을 때 우리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내가 굳이 소리내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로지 그 종국을. 다른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말이지만.


  그때 도대체 무슨 멸망이 우리를 덮친 것인지 다시 말해보자면, 고대 인간의 멸망은 이러하였다: 신들이 인간에게 세상을 내주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
  보시라. 여기, 독을 품은 불이 하늘을 가르고 눈먼 창칼이 움직이는 것이면 뭐든지 찌르고 베는 광경을. 검거나 붉은 연기가 기둥처럼 뭉치며 하늘로 올라가고, 시체들이 바다를 이루었다. 혹은 아직 죽지 않은 자가 바쁘게 도망치는 자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지만, 걷어채이거나 밟힌 후 얌전해진다. 건물이 무너지거나 불타거나 하며 사람들을 몽땅 깔아뭉개기도 하고 혹은 절반만 뭉개기도 한다. 어떤 시체는 불타고, 어떤 시체는 물에 가라앉으며, 어떤 시체는 찢기고, 어떤 시체는 꿰인다.
  다른 광대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는 아직은 살아있으며, 이 손으로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세크는 비교적 안전한 길을 찾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성스럽게도 운이 좋고.) 같이 달리기 시작했던 자들이 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죽거나 사라졌어도 아직 우리 둘은 살아있으니. 세크는 이해할 수 없게도 웃음짓고 있다.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여유가 만만하고 즐거우며 침착하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시체의 산을 넘고 피의 강을 건너 그가 나를 내려가는 곳은 바로 왕좌의 원이다. 라비요르가 죽은 곳, 이천년간 수많은 라비요르가 대대로 우리 인간들을 다스려온 곳, 라요라의 피가 떨어진 성지 중 한 곳, 마지막 라비요르가 마지막 숨을 다하며 겨울의 이름을 부른 곳……갑자기 세크는 나를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감싸며, 고개 숙여 입술을 겹친다. 내가 그의 눈을 끝까지 들여다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제나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가 인간이 아니라 광대라는 사실을 기억하다가, 그 은회색 눈동자가 마치 새벽의 결정체 같다고 느꼈다. 광대든 광대가 아니든 어느 종족이든 어디 출신이든, 자신이 입맞추고 있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여섯 신 중의 (하나가 죽었으니 다섯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런 것은 그렇게 별안간 알게 되는 일이라 더욱 갑작스럽다. 놀라서 세크의 등을 두드렸으며, 밀어냈으며, 결국 그는 그 난리를 이기지 못하고 내 허리에 두른 팔을 풀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용의 이름을.
  [처음으로 라요라의 하미샤가 태어났으며, 새벽의 몸을 이루었다. 그 그림자의 이름은 데마타이며, 용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들이마시는 숨에 맞추어 그 이름을 내게 먹인 것이다, 말 그대로. 그렇게 당황스럽게 그림자 용의 첫 승계자가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누가 알랴.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사실은 화를 낼 수도 없었는데, 그가 그 후 더이상 세상에 머무르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이다.) 입을 양손으로 막은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내 주변에서 다른 네 신이 하늘로 올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섯 신 중에서 직접 이름을 내주고 간 신은 세크뿐이었다.
  신들이 땅에 남긴 빛은 조금씩 어두워지다가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세상을 덮으며 몰려오는 겨울의 기척을 깨달았다. 전쟁의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멸망은 무대의 막이 내리듯 편리하게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신중히, 조금씩, 조용히 세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왕좌의 원 바깥에서 갑옷 차림의 사내가 요란하게 소리치며 나뒹굴었다. 그는 간발의 차로 자신을 공격하던 자를 죽인 후 힘들게 일어나 앉았다. 그가 바로 로샤타의 수장이었다. 굳이 겨울을 따질 것도 없이, 전세는 로샤타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가르곤들은 전사로 태어나며 전사로 죽는다. 로샤타는 무기와는 별 인연이 없는 부족이었으므로, 가르곤과 전쟁을 해보았자 불리한 것이 당연했다.
  나는 세크가 승천한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로샤타의 수장이 힘들게 일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희고 차가운 것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바람이 점차 그 기세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온갖 색깔로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다섯 신의 빛이 아직 하늘에 뚜렷했으니, 그들은 아직도 승천하는 중에 있었다.
  인간의 피가 인간의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신들이 인간에게 죽음의 권능을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마야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용의 이름이 내게 멸망의 열쇠를 건네고 있었다. 죽은 혼들이 살갗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녹아들었다. 이 세상의 끝이 다음 세상의 끝과 겹쳐들고 있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시간이 넘쳐흐르며 세상을 뒤덮었다.
그림자 용의 이름이 혈관을 모두 적신 후 이제 심장에 들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하는 중에 있었다.
겨울은 아직도 태어나는 중에 있었다.
라비요르의 죽음은 완성되는 중에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멸망하는 중에 있었다.



아마도 영원히.


 



*


  마지막 라비요르의 죽음이 승천하기 전에 내게 물었다. 전쟁을 택할 것인가, 겨울을 택할 것인가, 그 끝이 어차피 멸망이라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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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의 새가 노래하는 예언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정확하나, 모두 불길한 것이다.
마야: 얼굴의 반쪽만을 가리는 가면. 환상.
시안: 겨울의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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