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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붓꽃 우산

2007.11.30 23:1611.30

            Great Eastern Street, London  


            뱀파이어들은 다 그렇듯 그에게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다 그렇듯 그를 처음 물어 영생케 한 주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를 주인이라고 부르며 숭배하는 열두 지파가 이것을 알았다면 관 뚜껑을 뒤엎고 뛰쳐나와 한낮에 탱고를 추었으리라. 물론 아무 준비 없이 햇빛을 받으면 뱀파이어는 죽는다. 냉정하고 두려운, 명철하고 유능한 그들의 주인은 아주 오래전, 어떤 여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니! 열두 지파의 수장은 물론이고 어젯밤 막 입문식을 마친 새내기 뱀파이어까지 모조리 경악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윌리엄은 신대륙에서 웬 엉뚱한 계집애를 데리고 돌아왔다. 검은 머리칼은 그냥 길게 자라게 둔 데다 검은 옷차림에 흰 메리 제인을 신고, 네 마리 고양이를 달고 다니는 애였다. 열두 지파의 수장이 다 모인 자리에서 윌리엄에게 시큰둥하니 "당신의 악마들이야? 다들 어두침침하네." 라고 했던 애였다. 열세 살 때 주인이 직접 시체를 꺼내 자신의 피로 적셨다 한다. 어째서 그런 은총이 저런 볼 것 없고 쓸데없이 반항적인데다 영원히 사춘기에 붙박인 애한테 떨어진 걸까. 열두 지파의 수장은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에밀리라는 애는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정신력도 열세 살 난 인간보다 나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자기 혼자 사냥을 할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주인에게 빌붙어 민폐나 끼치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붙임성이 있기라도 하나, 개념이 있기라도 하나. 자기보다 수백 년은 더 산 윗전들에게 반말이나 갈기고 쓸데없이 반항적인데다……. 열두 수장은 처음으로 주인의 안목을 의심했다. 잠시나마. 강하고 의지 굳고 아름다운 뱀파이어들이 들판의 잡초처럼 널렸는데 하필 저런 걸 주워 오다니. 런던에 존재하는 뱀파이어 구역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는데, 그 중 몇 개만 뒤져도 에밀리보다 수백 배는 더 나은 뱀파이어를 찾을 수 있었다. 닉스여 헤카테여, 페르세포네여. 하다못해 그 천박한 신대륙의 도시를 뒤진대도 저것보다는 나은 걸 찾을 수 있을 게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검은 리무진 속에서 열두 수장은 서로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하긴 세상에는 뱀파이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지. 건망증, 팔불출, 콩깍지.' 그 계집애 자체는 심히 거슬렸지만 어쨌거나 주인이 좋다는데 자신들이 뭐라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열두 수장은 별 내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윌리엄은 열두 수장의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었지만 별말을 않았다. 벌써 몇백 년, 열두 수장은 그들만의 대화가 윌리엄에게 한낮에 본드 가(Bond St.)를 헤매는 박쥐처럼 뻔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수다 떨어온 지 꽤 되었다. 그런 일이다.
            물론 주인이 따스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애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코트 단추를 무려 손수 잠그는 광경을 보면 아무리 열두 수장이라도 머리꼭지가 다 돌아갔다. 하지만 어쩌랴, 좋다는 걸. 저대로 좋은 채 오래 이어지도록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의 작은 악마들로서는.  



            Madison Square Garden, New York City


            뱀파이어들은 다 그렇듯 그에게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다 그렇듯 그를 처음 물어 영생케 한 주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를 주인이라고 부르며 숭배하는 열두 지파가 그의 이 감상을 알았다면 관 뚜껑을 뒤엎고 뛰쳐나와 한낮에 탱고를 추었으리라. (물론 아무 준비 없이 햇빛을 받으면 뱀파이어는 죽는다.) 당연한 일이다. 냉정하고 두려운, 명철하고 유능한 그들의 주인은 아주 오래전, 어떤 여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니! 젠장. 스물다섯의 그를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서 정신없이 입맞추고 목을 찢은 그녀라니, 그가 그 모든 세상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했다니, 그 진정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못했다니. 그가 아주 오래전 단지 별볼일없는, 젊고 꿈 크고 가능성 넓으나 시시한 청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과연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윌리엄은 어느 날 밤 문득 생각해 보았다, 아니라고. 불가능하다고, 자신은 이대로는 자신일 수 없다고. 그가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윌리엄은 다시금 입문식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다시금 어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떠한 형식이든, 성인식의 형식이 필요했다. 갈증 끝으로 밀려드는 피 내음처럼, 애리조나 벌판 한가운데서 그는 에밀리의 죽음을 목격했다. 온몸으로 겪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뱀파이어인 그에게 필요한 이유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때로는 형식이, 껍질이, 형식이, 표피가 중요했다. 몇백 년의 시간을 기준으로 그런 때가 돌아왔다. 네가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든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행동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듯 어떤 형식이로든 확실한 틀이 끝없이 갈증 나는 때.
            변화가 필요하다는 증거였다. 오래전, 꼭 그런 느낌이 그를 엄습했을 적 어둡고 빛이라고는 한줄기도 찾아볼 수 없었을 적, 그를 그처럼 뒤덮었던 어둠 있었다. 존재했다. 진짜였다. 실재했다. 들끓는 런던의 거리 한구석에서, 그늘 가장 깊은 때 그늘 가장 깊은 곳에 누워 전염병의 제물로서 죽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적. 죽음이 완성되어 이제 세상을 뒤덮을 죽음과 천국, 아니면 지옥을 기다리고 있을 적. 그를 뒤덮었던 그녀의 붉은 눈.
            그는 진정으로 그녀의 심장을 들여다 보았다 믿었다. 그처럼 그늬 진심이었다. 그처럼 온전하고도 완벽했다. 그처럼 그늬 그, 아꼈다. 품 안의 보석처럼, 소중한. 런던의 여주인, 그믐밤의 공주님. 그녀는 볼품없이 널브러져 죽어가는 그를 목 뒤로 잡아 들어 올렸다. 손톱 끝이 칼날 같았다. 그것은 그의 뺨을 베는 대신 어루만졌다. 마치 밀림 한가운데서 흑표범과 마주쳤는데, 그 짐승이 자신을 죽이려 들기는커녕 꼬리로 감고 얼굴을 핥는 그런 상황이었다. 언제든 죽임당할 수 있다. 그 결정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힘은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결과 이면에 자리한, 그늬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의 것이 아닌 권한이 그의 것인 목숨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윌리엄은 애매한 의문을 품었다. 자신의 생명은 처음부터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거나 마는 일을 결정하는 저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답을 찾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꺾었다. 죽음은 눈부셨다.  
            눈부신 혈액.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 처음부터 다시 흘렀다. 윌리엄은 그의 세월을 피를 목으로 넘길 때 목울대 울리는 감각으로, 사냥하는 밤, 바람 칼처럼 온몸 밖으로 불어나가는 해방감으로 건축했다. 그의 그녀가 세상의 밤을 찢어내고 죽은 정지선에 이르기까지. 그늬가 죽었을 때부터 다른 혈통의 절단감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멈춘 심장 속에서부터 뻗어나왔다.
            오래도록 그는 타 생명체에서부터 잘려 나와 있었다. 세상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온전하고 멀쩡한가 싶었다. 윌리엄은 오래도록, 스스로도 무엇이 오래고 최근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동료 흡혈귀들과 대적했다. 그를 태초에 품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부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는 줄곧 외로웠다. 그것을 다르게 설명할 길은 없었다. 그저 그는, 새벽의 문간에 이르러 흑색 관 속으로 몸을 구겨 넣을 때면, 항상, 언제나, 줄곧, 혼자가 아니고 싶었다. 그렇게 바랐다. 세상에서 불쑥 말도 안 되는 구세주라도 튀어나와 그의 결핍을 채워 주었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잠깐은 잠깐일 밖에 없으며, 그는 곧 괜찮아졌지만 어쨌거나 채워지지 않은 그 그늘은 오래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인간 여자애를 구하게 했을까. 손끝을 밀어 강요하듯 구원을 요구했을까. 풀벌레들도 입을 다문 검은 들판 위로 짙은, 그 짙음을 반복하며 깊은 지옥의 탄생 속으로 눈부신 존재로서 움직이도록, 기원했을까. 혹은 그저 그 스스로였을까. 윌리엄은 아마도 오래도록 에밀리를 그 생매장되던 지옥 속에서 구하던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또한 사실이었다.
            그는 에밀리를 그곳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그가 에밀리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폭풍 몰아치던 밤이었다. 마약과 술에 찌든 인간이 살해의 증거를 없애고자 들판의 한구석을 파내고 또한 뒤덮을 동안, 윌리엄은 자신이 이미 오래전 잊은 인간의 심리에 다시 연결되고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저 인간의 행위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뱀파이어는 함께 하고픈 존재의 피를 빨고 또한 자신의 피를 희생하여 영생의 동업을 꾀한다. 인간은 영사營死의 동업을 꾀한다. 지나치게 자주, 지나치게 바삐. 그게 아니면 철저히 혼자인 삶을 꾀한다, 마치 그 이외에는 진리에 이를 길이 없다는 듯이. 진리가 정말 세상에 존재한다는 듯.
            그가 그곳을 지날 때, 에밀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에밀리의 법적인 보호자가 이미 에밀리의 숨을 끊었으며, 마약으로 어지러운 머리로 어떻게든 에밀리의 상황을 수습하고자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던 중이었다. 검고 습한 흙 속에서 흰 시체 한 구, 고적히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윌리엄은 느꼈다, 그 죽은 아이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끝까지 말해내야만 하는 의무감에 붙잡혀 있다고, 자신은 그저 그 아이의 피를 몸째 구출해내서 그 끝나지 않은 세상의 허리를 끌어안는 수밖에는 없다고. 아마도 모두가 행복한 그런 결말은 없을 거라고.
            몇백 년 전, 그를 구했던 그녀가 느꼈던 감정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거라고. 그러나 에밀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에밀리는 영원히 대적하는 세상의 구석에 석화된 듯했다. 그녀에게 진짜로서 다가오는 "감지하는 방식"은 적대뿐이었다. 삶을 설명하려면 죽음의 예를 들어야 하며, 죽음을 설명하려면 삶의 예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꽤 오래 살아온 주인이자 원로이자 장로이자 세력가인 윌리엄으로서도 "삶"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설령 에밀리가 노래하는 수많은 신 중 하나라도 삶을 설명하는 일은 어려웠으리라. 아니, 특히나 에밀리이므로 더욱 어려웠으리라. 대조와 비유, 은유와 직유, 비교와 대유, 상징은 모두 그녀 앞에서 그 정통성을 잃었다. 마치 처음부터 무의미했다는 것처럼.
            힘, 혹은 힘의 표현을 정당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겨운 의문이었다. 또한 여전히 살아있는, 끔찍한 질문이었다. 그곳의 심장에서는 생각조차 죽음을 거쳐 건축되었다. 존재의 혀끝을 죽음에 빚지는 일은, 어느 정도 끔찍하고 어느 정도 별수 없는 것이다.
            "어제 사냥은 잘 됐나 봐? 빌?"  
            에밀리가 그의 품 속으로 바르작거렸다.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윌리엄은 에밀리와 코를 살짝 비볐다. 방금 그와 피를 나누어 마신지라, 에밀리의 몸은 밖으로는 따뜻하고 안으로는 분주했다. 윌리엄은 에밀리를 힘주어 끌어안고 그대로 온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면 에밀리가 짜증을 내며 자신의 몸을 밀쳐내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장미 가득 담긴 유리 화병 다루듯 조심조심, 에밀리를 포옹했다. 고양이 걸음 소리 거실 멀리. 에밀리가 그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에밀리가 어떻게든 움직임을 자아내고 목소리를 꺼내 내놓을 때마다 윌리엄은 심장이 아팠다. 마치 작고 흰 손가락이 그의 심장을 꾹 찌르는 듯한 감촉에 감정이 출혈한다. 그는 에밀리의 머리칼 속으로 코를 박았다. 피비린내와 살아있음과 오렌지꽃 샴푸 냄새와……. 에밀리는 어제 그가 살육한 이들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피는 기억의 몸이다. 죽은 이를 다시 생각하는 일은 윌리엄에게 낯선 행위였다. 단 한 명의 경우를 제외하고.
            죽은 이를 다시 생각하는 일은 윌리엄에게 낯선 행위였다. (단 한 명의 경우를 제외하고.) 어제 그 아파트에는 한 단위의 가족이 살았다. 남자는 작고 조용한 카페를 운영했고, 여자는 간호사였다. 자식으로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직 작았다. 몰래 가방을 열어 성적표를 꺼내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에 토마토 자석으로 성적표를 고정했다. 부모는 드라마를 시청했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밤바람이 밀려들었다. 그 아이는 잘 받아온 성적을 자랑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럴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하다. 윌리엄은 에밀리가 그 가족의 죽음을 하나하나 돌이키는 동안 침묵했다. 에밀리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쳤다. 화병의 장미가 슬슬 지친 모양이었다. 새벽 전에 뽑아내어 묶어 벽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은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밀리는 죽음과 비극, 살육과 흡혈을 아직도 인간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에밀리가 고통스러우면 윌리엄도 고통스러웠으므로, 결국 윌리엄도 고통스러웠다.
            너는 죽어서도 어리구나. 그는 간혹 그리 말하고는 했다. 너는 죽어서도 인간 같구나. 집을 잊을 수 없을까, 널 죽인 그 살인자를 아직도 불쌍하게 생각하니, 아직도 죽음이 낯설까. 우리는 영원히 죽은 존재란다. 피는 노출되는 순간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돼. 우리는 죽음을 마시고 죽음을 붙잡아 살아가는 존재란다. 언제쯤에야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에밀리, 그러므로 너는 네가 아니란다. 우리는 다들 그렇지, 우리지만 우리가 아니야. 빛과 어둠을 가르는 질서는 더는 우리를 감싸지 못해. 그런 일은 그저 그런 일이란다. 그의 그런 말이 또한 에밀리를 아프게 했으므로, 윌리엄은 더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과거에 에밀리가 다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둘 다 격심하게 힘들었던 때가 있긴 있었다. 이제는 지나갔으나. 어쩌면 지나간다는 것은 환상일까. 어쩌면 사라진다는 것은 희망일까.
            에밀리가 갑자기 머리를 젖혔다. 윌리엄은 의자 등받이 뒤로 고개를 젖혔다. 때맞추어 움직이지 않았다면 에밀리의 뒤통수에 코를 세게 부딪쳤을 것이다. 곧이어 에밀리가 투덜거렸다.
            "이번에도 실패. 도대체 재미가 없어. 미리 다 알고 있잖아."
            "미안하구나. 다음에는 그냥 가만히 있으마."
            "필요 없어! 알면서 부러 당하는 건 내가 사양이야. 그런 거 김빠지잖아."
            "아무튼 이상하기는."
            윌리엄은 에밀리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우리 공주님. "꽃병을 비워야겠다." 그는 에밀리를 가볍게 안아 들어 내려놓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에밀리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미스터리, 마일즈, 사바스, 니치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에밀리 곁을 맴돌았다. 윌리엄은 장미 다발을 꺼내 물기를 닦아낸 후 고무줄로 묶어 벽에 걸었다. 그의 열두 지파장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패닉하여 한낮에 메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뛰쳐나가 '채식을 합시다! 육식하는 습관을 버립시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물론 아무 준비 없이 한낮을 맞으면 뱀파이어는 부서져 죽는다.
            이후 윌리엄은 부엌 캐비닛을 열어 거기 피어난 붓꽃을 줄기째 뽑아 꽃병에 담았다. 왜 부엌 캐비닛에 꽃이 피어나게 되었는지 설명하려면 길다. 간략히 말하자면 얼마 전, 윌리엄과 에밀리가 지옥의 사대 왕을 일으키는 의식을 준비하던 중 많은 것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이 그 이유다. 지옥의 사대악마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대신 거실 천장과 부엌 캐비닛, 베란다 바닥이 죄다 붓꽃으로 뒤덮였다. 윌리엄의 열두 지파장 중 두서너…… 열둘이 뛰쳐 들어와 사태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집이 몽땅 꽃밭으로 화했을 것이다. 그나마 정돈한 이후에도 부엌 찬장 속의 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윌리엄이 단골 꽃집에 발길 들이는 일은 더는 없었다. 에밀리는 그 이후에도 그림자 몸/빛의 몸을 키우는 법, 벨리알과 거래하는 법 등에 관심을 쏟았다. 당연히 식탁 위로 덩굴이 끼고 책장 뒤에서 사자가 나오고 욕조에 파도가 쳤다. 열두 지파장이 나날이 핼쑥해지는데도 윌리엄은 에밀리를 그저 끌어안았다.
            "빌."
            에밀리는 붓꽃을 화병에 담는 윌리엄의 손을 향해 중얼거렸다. 윌리엄은 왜 부르냐는 얼굴로 그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스터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성 요한 성당에 갔었어."
            "그래, 구경할 게 있었니?"
            "아니. 가져와야 할 게 있어서."
            에밀리는 조는 사바스의 배 아래로 손을 불쑥 밀어넣었다. 손가락만한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그 속에서 반짝였다. 윌리엄은 그것을 필요 치보다 좀 더 오래 응시했다. 에밀리는 마일즈 곁에 머리끈으로 원 비슷한 도형을 연결해 두었다. 뱀파이어의 손톱으로 마룻바닥을 긁어 흰 선을 뽑아내기는 쉬운 일이었다. 에밀리는 손톱으로 벨리알의 문양을 머리끈 원 속에 그렸다. 성수 담긴 유리병을 그 속에 내려놓았다.
            "에밀리? 이번에는 무슨 의식을 공부했니?"
            벨리알, 바일레스, 아스모데이와 가압은 진실로 우두머리 영령들이다. 진실로, 벨리알은 어떠한 특정한 모습을 취하여 그의 힘을 구하는 이들에게 답례로 그 마땅한 대가를 요구한다. 내면에 자리하는 신 이외의 신은 없으므로 다른 그 무엇에게도 절하지 말 일이라.
            "태양에 거하는 대적하는 진이여, 사탄이여. 심야의 심장에 자리하는 고귀한 불꽃을 비추는 녹옥으로 왕관 쓴 이여."
            에밀리의 붉은 눈이 윌리엄을 뒤덮었다. 뉴욕으로 런던이 돌아왔다. 사백 년이 꾸깃하게 접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늬는 진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은 온전하고도 완벽했다. 진심처럼 그, 그늬 아꼈다. 품 안의 보석처럼, 소중한. 뱀파이어끼리 피를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인간의 말로 표현하자면 사랑하는 일이다. 윌리엄은 약 사백 년 전 인간이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붓꽃의 끝을 잡아 뜯었다. 손톱 끝이 칼날처럼 섰다. 몸이 저 혼자 경계한다. 누구를? 누구를 대적하여? 송곳니가 자라났다. 그것은 그의 입술을 베는 대신 어루만졌다.
            윌리엄은 에밀리를 보았다. 그늬가 그린 원 한가운데 빛나는 성수를. 무언가 부서지기 직전이다. 지금이라면 아직 죽일 수 있다. 그 결정은 그의 것이었다. 힘은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결과 이면에 자리한, 그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그의 것인 권한이 그의 것이 아닌 목숨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윌리엄은 애매한 해답을 품었다. 자신의 생명은 처음부터 그늬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거나 말거나 결정하는 저 권력은 그늬의 손가락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왜, 지금, 이렇게. 답을 찾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성수병을 깨뜨렸다. 자신의 피를 그 속에 몇 방울 떨구었다. 죽음은 눈부셨다.

견딜 수 없는 기억의 귀환 있었다. 윌리엄에게. 누군가 그의 시신 위에 손을 얹으며 상냥히 말을 건다. 재앙의 왕자님. 네게 죽음을 주마. 그러니 다시 살아나렴. 아직 온기 식지 않은 목구멍 속으로 밀려들던 피. 윌리엄은 자신의 주인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지옥이 기쁘게 그 입을 열었다.

            윌리엄은 에밀리를 그 생매장되던 지옥 속에서 구하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윌리엄은 자신의 주인을 직접 죽였던 그때 역시 잊지 못했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가장 소중한 살해.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새 시간을 부여하고 소중히 키워 주었던 그녀. 글로브 극장 뒤에서 그는 그녀의 심장에 입을 맞추었었다. 피로 젖어 가장 가까운 접촉. 갈라진 살과 뼈 사이로 죽은 피가 축복처럼 쏟아졌다. 뱀파이어의 자녀는 그 부모를 반드시 죽인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 준비 없이 한낮을 맞는 뱀파이어가 죽는 것처럼. 날의 끝을 다른 날이 따르고 밤의 끝을 다른 밤이 따르듯 지당하게 스스로를 이룩하라, 심야의 악마들이여. 윌리엄은 심장 속에서 폭발하듯 꽃이 피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다, 피어나는 것은 에밀리와 윌리엄이 나누어 마신 피의 흔적을 따라 공간을 건너온, 빛나는 성수 알갱이였다. 그의 심장 속에서 정오의 햇살처럼 성수가 뻗어나갔다. 세상이 잘려나갔다. 그가 이룩해 온. 세상의 경계가 타들어갔다. 아름다웠다. 에밀리는 비틀거리는 윌리엄을 관찰했다. 만족한 듯했다. 그는 에밀리의 미소를 보았다. 가장 끔찍하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다. 황홀하다. 마치 오래전 런던의 여주인처럼.
            그믐밤의 공주님. 지옥의 여공작. 윌리엄은 나오지 않는 소리로 이름의 몸체를 간신히 그려냈다. 그래, 에밀리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그녀가 있었다. 오래전 그를 살려낸, 오래전 그에게 죽은, 지배하는 여주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존재의 껍질 속으로. 가장 어둡고 가장 눈부신 광영에 휩싸여. 죽어가는 그의 세상 속으로 더없이 석화된 삶을 이끌고.
            "나에게도 보여, 빌. 오랜만이구나, 윌리엄. 우리 재앙의 왕자님."
            그녀의 정제된, 우아한 억양과. 그, 목소리. 윌리엄은 오래도록 에밀리와 피를 나누어 마시며 살아왔다. 그의 피가 곧 에밀리의 것이었고, 에밀리의 피가 곧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아직도 인간으로서 그의 죽음을 아프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과거에 윌리엄은 오래도록 그의 여주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 그늬가 곧 그였으며, 그가 바로 그녀였다. 그러므로 되돌아온다, 지옥은 영원히 추락한 악마들을 보듬어 품는다, 절망은 곧 위안이 된다.
            지금도 우리는 살고 있단다, 에밀리.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윌리엄은 희게 질린 시야 속으로 붓꽃 푸르게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세상이 깜박였다. 그는 웃었다. 소리 없이, 진심 가득히. 이제 나는 다시 기다려야 하겠구나. 그믐밤의 공주님과 에밀리와 빌과 윌리엄과 나를. 모두 이 구덩이 속에서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 어둠, 이 빛, 이 갈라짐, 이 파국,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경련하는 진리의 파동 속에서. 사랑하는 우리 공주님. 그러니 울지 말아라. 나의 악마들은 네게 충성을 맹세할 거란다. 이제 너의 악마가 되는 거란다. 이제 많은 것이 돌아온다 해도 잊지 않으마, 우리는 헤어질 수 없으므로. 영혼이 깨지는 일은 의외로 어렵단다. 세상은 애당초 끔찍한 적 없었지. 때로는 이 이상한 공기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웃게도 한단다. 그래, 사랑한다……. 달싹이는 윌리엄의 입술 위로 에밀리의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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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에 나오는 에밀리의 주문은 절규의 서에서 참고한 거지만 저런 주문이 있어서 그걸 그대로 참고해 쓴 경우는 아니고요, 말만 빌려온 셈입니다. (Luciferian Goetica: Book of Howling 루시페리언 고에티카: 절규의 서, 마이클 W. 포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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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이로빈 그림자 용 2011.01.01
이로빈 상사곡(相思曲) 2009.08.28
이로빈 운명2 2008.04.25
이로빈 붓꽃 우산6 2007.11.30
이로빈 고양이비2 2007.11.30
이로빈 달 잡아라3 2007.03.30
이로빈 야래유몽홀환향夜來幽夢忽還鄕2 200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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