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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레퍼런스

2013.06.01 00:3306.01

“이 새끼들, 술 처먹으려고 대학원 왔냐.”
교수는 단상 옆구리를 걷어찼다. 3월 말이란 참 통제가 안되는 시기였다. 이제 갓 대학원에 들어온 석사 1년차들은, 갓 들어온 학부 1학년들 앞에서 신처럼 으스대기 일쑤였다. 더러는 아직도 동기가 거지 반은 남아 있는 4학년들 앞에서도 뭐라도 된 듯 굴다가 놀림감이 되는 녀석들도 있었다.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는 녀석들중 대부분은 언젠가 유학도 다녀오고 어디 지방대학 교수 자리라도 차지하고 앉을 꿈들을 꾸는 모양이었지만, 이 바닥도 이미 레드오션이었다. 이들의 선배들 대부분은 포닥이 되어도 학교를 떠나지 못했다. 꿈꾸던 유학 같은 것은 그들의 현실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시간강사가 되어 공대에서 공업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공대생은 학부생의 절반이 넘을 만큼 많았고, 그들 모두 공업수학 두 학기는 들어야 졸업이 되다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가도록 여기 남아있던 학생들은 원하면 누구라도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학부생 4년, 석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마침내 박사모를 머리에 쓴들, 이들 대부분은 그대로 학교에 남아 공업수학을 가르치고, 더러는 학교에 책상 하나를 둔 채 근처의 다른 대학에 출강하며 학부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마도 몇 년 더 지나면, 박사과정에 들어온 학생들도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수업을 맡을 수는 없게 될 테지. 교수는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했다.
“노벨상은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주는데, 왜 필즈 상은 40살까지만 주는지 아냐.”
“......앞으로의 연구를 격려하려고요?”
“그것도 있지만, 그 전에.”
교수는 손바닥으로 단상을 쳤다.
“수학이라는 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야.”
사실 그랬다. 가장 위대한 수학자들이라 해도, 그들이 평생 내놓은 수학적 아이디어와 써낸 논문들 중 가장 빛나고 참신한 것들은 대부분 그들의 젊은 시절에 떠올린 것들이었다. 교수는 자신에게 그들과 같은 젊음이 있었다면 연구를 더 했을 것이라는 말로 잔소리를 마무리지었다. 어차피 지금 무언가 말해도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이긴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2년동안 공부를 하고, 자기가 정말 원하는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수능 성적 맞추어서 수학과에 온 녀석들이다. 취직이 안 되어서 대학원에 온 녀석들도 이중 반은 넘을테니, 어차피 큰 기대할 필요도 없었다. 교수는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권진웅만큼만 해 봐라. 권진웅만큼만, 좀.”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조롱하듯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그 형 만큼만 하면 필즈상도 받긴 받겠는데요.”
쉿, 하고 다른 학생이, 그 말을 뱉은 학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났다. 학부든 대학원이든, 1학년이란 묘할 정도로 어리고 또한 어리석다.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면서, 방자하고 치기넘친 소리들을 쏟아낸다. 교수는 한숨을 쉬며 강의실 문을 닫았다.
권진웅은 박사과정 3년차였다. 아직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열의만큼은 그가 아는 어떤 학생보다도 뜨거웠다.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비정한 것은, 그것이 노력만으로 어떻게 되는 세계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권진웅은 한없이 수학을 사랑했고, 밤낮없이 그 세계에 매달렸지만, 아마도 이 길은 그의 것이 아니었을 거다. 아마도 처음부터.
“아직도 그 연구를 붙들고 있었나.”
“예.”
권진웅이 들여다보면 화면을 잘 볼 수 있도록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했다.
“언젠가는 풀리겠죠?”
“그렇겠지.”
녀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p-np문제.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중요한 수학적인 문제로서,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21세기를 맞아 백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었던 문제다.
“자네가 해낼 수 있다면 나도 정말 자랑스럽겠군.”
교수는 말을 흐렸다. 마치, 십년도 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학생을 바라보았다면 이런 마음이 들까. 누군가는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자네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선생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교수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박사 논문 주제로는 하지 말라고 내가.”
“예, 그건 여기 있어요. 교수님이 정해주신 걸로.”
영 지지부진한, 몇 번인가 교수실로 가져오라고 했지만 영 성과가 나지 않는 논문의 한 부분을 보여주며 진웅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이것 하나만 해도 논문 통과할까 말까 그런데, 지금 뭘 하는거야.”
“예. 죄송해요.”
교수는 마음이 먹먹했다. 진웅은, 결코 어리석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수학으로 대학원까지 와서 공부를 계속해야만 할 만큼 총기가 있는 학생 또한 아니었다.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중간 이상의 성과도 거두고 있었지만, 그가 갈망하는 무언가는 결코 그의 손에 닿지 않으리라. 차라리 그가 이 대학원 공부를 그저 간판을 얻기 위해 계속하는 것이었다면 나았을텐데. 그는 진심으로 수학이라는 이 학문의 세계에 깊이 헌신하고 싶어했다.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박사 논문부터 먼저 하게.”
“예, 교수님.”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만을 주셨을 뿐 그를 감당할 성실함을 주지 않으셔서 빛나는 총기조차 허비해버리게 하시더니, 어떤 사람에게는 성실함과 열정을 주셨으면서 그에 합당한 재능만은 주시지 않으셨는가. 교수는 믿지도 않는 하늘을 탓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뿐이었다.
슈슬리사의 우주선들이 하늘을 뒤덮은 것은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런 날인데 책이 눈에 들어 오나, 자네는?”
“그럼 뭘 하겠어요.”
창문을 열자,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쟁반같은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슈슬리사”라고 말한 그 외계인들은, 딱히 지구를 공격하거나 할 야심같은 것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한 달이 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이 공격한다면 쌀이라도 사지, 외계인이 공격하면 도망칠 곳도 없잖아요.”
진웅은 풀던 문제를 덮어놓으며 기지개를 켰다.
“자네 어째, 다 산 사람 같은 말을 하는군.”
연구실이라고 간판만 달아놓은, 사실상 석박사 과정과 포닥들에게 독서실 책상 하나씩 놓아준 것이 전부인 이 좁은 공간에, 모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텅 빈, 책상과 캐비닛의 미로같은 연구실에서 진웅은 오랜만에 허물을 벗고 몸을 쭉 펴는 누에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는 창문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연구실에서 금연이라고 붙이신 것 교수님이셨잖아요.”
“자네밖엔 없잖나.”
“그런가요.”
교수는 담배를 건넸다. 제자와 맞담배질을 하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그까짓 맞담배 좀 피웠다고 뭐가 달라지랴 싶었다. 하늘에는 외계인의 우주선이 떠 있고, 처음에는 외계인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겠다고 외치던 정부에서는 어느새 외계인들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할 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듣기에는 몇몇 나라에서 이미 우주선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들은 호전적으로 대응하려는 나라들을 향해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심층심리에 접근함으로써 불필요한 공격을 막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노라고, 지구인들에게 알리기까지 했다.
“저 정도의 우주선을 만들려면 얼마나 기술이 좋아야 하는 걸까.”
“글쎄요, 일단 지구상의 물리법칙이나 공학기술 같은 것은 애들 장난같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아마도요.”
“그럼 왜 쳐들어오질 않는 걸까?”
“싸울 필요도 없을 만큼 자기들이 강하니까요?”
“그렇겠지?”
“아마 그렇겠죠.”
“대학이라는 게, 앞으로도 필요하긴 한 걸까?”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결에, 내뱉은 담배연기가 다시 얼굴을 향해 밀려들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기침을 하다가 말고, 그는 창틀에 담배를 눌러서 껐다.
“나도 슬슬 은퇴해야 할 것 같네, 진웅군.”
“교수님?”
“어차피 정년도 2년밖에 안 남았고. 명예퇴직하기 딱 좋은 시기지. 자네가 박사 받고 나가는 걸 보고 싶었는데,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저 외계인들은요, 슈슬리사라고 했던가요.”
“그랬던것 같은데.”
“그들은 밀레니엄 문제 같은 것은 이미 다 풀어버린 지 오래일까요.”
“그렇지 않겠나.”
“교수님.”
“음?”
“누군가가 이미 다 풀어버렸다면, 그리고 이제 새로운 질서가 우리 앞에 놓일 거라면, 어쩌면 그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모두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면, 수학은 가치없는 건가요?”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긍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진웅은 담배가 꺼지고 그 재가 모두 바람에 날려 사라진 뒤에도, 해가 저물어가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뒤쫓은 일이었을 거다. 자신은, 그저 십 년을 뒤따라온 것일 뿐이다. 손해라고도 볼 수 없다. 석사학위가 있고, 논문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수료는 한 상태다. 어디 번듯한 회사는 아니라고 해도 입시학원 같은 데 취직해서 고등학생 재수생들 가르치는 학원선생 노릇 마음잡고 몇 년 하면, 장가 갈 밑천 정도는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석사 받을 무렵 선배들이 해 주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노을이 스며든, 텅 빈 연구실을 돌아보았다. 책상들은 이미 짐이 거지 반 빠진 채로 텅 비어 있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 대부분은, 이 방학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새로운 시대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듯 그렇게 왔다.
하지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듯이,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나 있었다. 권진웅이라는 남자 또한 그러했다. 그는 이제는 동기도 선배도 남지 않은 연구실에 혼자 나와서, 하루종일 수학문제를 풀었다. 가끔 마음이 산란해지면 이면지를 깔아놓고, 연필을 깎으면 연필밥이 줄줄 새어나오는 오래된 연필깎이를 그 위에 얹어놓고 연필을 꽂아 손잡이를 드륵드륵 돌렸다. 연필깎이가 앉았던 자리마다 시커먼 흑연 얼룩이 손자국처럼 남았다. 여전히 복도에는 학부생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녔고, 더러는 조교를 찾아 연구실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여름이 가고, 바람이 서늘해질 무렵, 학교에는 하늘빛처럼 푸른 피부의,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부생만큼 젊디 젊은 얼굴을 하고, 이곳의 대학조직을 견학하고 개선책을 연구하기 위해.
진웅은 때로 창문을 열고, 더는 금연 안내판이 필요없는 이곳의 창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차라리 공과대학이라면 나았을 것이다. 어떤 시대에라도, 사람들은 살아가야 했으니까. 누군가는 나무를 다듬고 쇠를 깎고, 집을 짓고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지어야 할 테니까. 차라리 법과대학이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세상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분쟁이 있을테니까. 하다못해 문과대학이라도, 외국어라는 게 앞으로는 점차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적어도 십수년은 쓸모가 있을 테니까. 적어도 사람이 말은 하고 글은 읽을 테니까. 예술을 한다면, 운이 좋다면 외계인들이 “지구인 특유의 문화유산”이라고 보호하려 들 지도 모르는 일이고, 디자인 같은 것도, 모든 지구인에게 스타트렉에 나오는 빨간 셔츠를 입히지 않는 이상에야 쓸모가 있겠지만.
진웅은 한숨을 쉬었다. 수학, 이건 대체 어디다 써야 하는 걸까. 허생은 10년 할 공부 7년만에 손절매하고 일어나 “조그마한 시험”이라며 장사라도 하러 나갔지, 대학에 들어와서, 수학과라는 팻말이 매달린 이 좁은 복도를 오가며 보낸 세월만 벌써 10년이다.
복도의 끝, 매트랩과 매스매티카가 설치된 컴퓨터들이 줄지어 앉은 전산실의 벽에 기대어 서면, 닫힌 문이 가득한 복도의 반대편 끝에 커피 자판기와, 그리고 드물게 새어들어오는 햇살이 보이곤 했다. 진웅은 연구실 문을 잠가놓고, 느릿느릿 자판기로 걸어가 2백원짜리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셨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속이 쓰렸다. 그는, “수학과 전산실”이라고 붙어있는 철문을 향해, 그늘을 향해, 끝도 없을 듯 닫힌 문이 늘어선 복도를 슬리퍼를 끌며 걸었다.
슬리퍼 바닥에 납이 붙은 것 마냥, 완전군장을 하고 천리행군의 마지막 능선을 넘던 모냥, 발이 무거웠다. 더웠다. 이미 여름이 다 지나가고 가을이 왔는데도, 병든 듯 고요한 복도가 마치 꿈 같았다.
- 대체 수학이란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 학문인거야?
십년도 전에, 학부 1학년이던 시절,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기들이 술잔을 기울이다 낄낄거리며 나누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그때 그런 이야기에 조금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어야 하는 것일까. 먼 먼 옛날, 지금은 마치 전생같은 그 어느 때에.
아마 그때가 맞았을 거다. 지금은 어딘가 지방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는 선배가, 동기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껄껄대던 것이. 자기 손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군대 간 사이에 앤드루 와일즈라는 작자가 풀어버리고 말았다고, 한탄같은 농담을 던지는 그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닫힌 교수실을, 사람 없는 강의실들을 바라보며 진웅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갈증을 느꼈다. 슈슬리사들이 왔다. 인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문명을 산타클로스처럼 손에 쥔 채로. 인간의 두뇌로는 아직 감당조차 할 수 없을 지식들이 담긴 우주선을 우리의 머리 위에 띄워놓고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고, 빛은 멀었다. 언제나 이대로일 줄 알았다. 가끔 뛰어난 이들이 있지만 언제나 고만고만한 세상. 도토리들이 키를 재고, 개중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더 큰 도토리가 어떻게든 그 빛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 수도없이 많은 도토리들이 까치발을 서며 서로를 밀어올려 쌓인 큰 무더기의 끝에서 진리의 스쳐지나가는 옷자락이나마 겨우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기는 했다. 수많은 학부생과 대학원생과 포닥과 교수들의 탑 위에,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진리는 존재했다. 언제나 믿었다. 그랬기에, 그 모든 것이 이렇게 단숨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모든 진리의 문이 열려버린 것 같은 시대에, 대체 수학이라는 건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 학문인걸까.
“실례합니다.”
그야말로 아홉 시 뉴스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흠집없이 완벽한 억양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피부를 한,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이가 서너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진웅은 눈을 깜빡였다. 발소리도 없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야. 키가 큰 슈슬리사는 진웅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점잖게 물었다.
“수학과 학생이신가요?”
“예...... 뭐, 그렇죠.”
진웅은 잠시 생각하다가, 얼른 부연했다.
“학부는 아니지만.”
“아.”
슈슬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사? 박사?”
“박사 논문 쓰는 중인데요.”
“혹시 요즘 바쁘십니까?”
박사 논문 쓰는 중이라고 하면 정신없이 바쁜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되물으려다, 진웅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바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논문을 들여다 봐 줄 교수도, 은근히 경쟁이 되던 동기나 후배들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방학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서 안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과하게 긴 방학이었다. 세상이 변할 거라고 해도, 이들부터 이렇게 먼저 변할 줄은 몰랐다.
“뭐, 사실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음?”
“무슨 일인데요?”
“수학은 어느 우주에서도 서로 맥락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수학이 진리로 가는 문이라면 어디서든 맥락이야 비슷하겠죠.”
“이야기가 통할 것 같군요. 나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수학 교육에 관한 논문이죠. 이곳 지구의 수학 수준을 나름대로 연구해서 이번 논문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용어나 개념 정리를 도와주실만한 분을 찾는 중입니다.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여기의 수학을 거기의 수학으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느냐 그런 문제인건가요?”
“비슷할겁니다.”
슈슬리사는 가능한 한 정확한 개념을 전달하려 애쓰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언제부터요?”
“편하신 시간으로 한 주에 두세 번 정도, 한번에 두 시간 정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내 시간만 맞출 순 없죠. 그런데......”
이젠 별 의미도 없는 수업 시간표를 확인하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진웅이 고개를 들었다. 박사 말년차, 논문만 끝나면 졸업할 판에 교수는 도망치듯 은퇴해버리고, 어떻게 논문이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들 그걸 어떻게 써야 할 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을 만큼 남아돌아 주체할 수 없을 듯 느껴졌다. 진웅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체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그쪽 세상에서는 저기, p-np 문제...... 풀렸어요?”
물론, 답은 듣지 못했다. 애초에 이쪽과 슈슬리사의 수학을 비교하여, 용어와 개념을 서로 번역하듯 짜맞추어 재구성하러 온 사람, 아니 슈슬리사다. 적어도 그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 까지는, 무의미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웅은 물론, 자신을 신이라고 불러달라 말한 그 슈슬리사도, 바로 그 질문의 난처함을 깨닫고 그저 웃고 말았다. 그렇게 계약은 성립되었고, 진웅은 슈슬리사에게 매주 두 번, 과외공부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애매한 “지구 수학 개론”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라면 모르겠지만, 슈슬리사가 지구에 내려오고 몇 달 지나지도 않은 시기였다. 슈슬리사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먼저 공격하는 이들의 정신속에 평화에 대한 열망을 세뇌, 아니 불어넣었으며, 평화로운 지배자로서 우리의 평화와 문명 발전과 심지어는 인격의 도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아직은 그동안 인류의 문명이 낳은 수많은 “외계인 침공 블록버스터”를 기억하며 조금 지나면 저놈들이 우리를 모두 세뇌한 뒤 곰탕처럼 끓여먹고 말 거라고 믿는 이들 또한 분명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직각삼각형에서 대각선을 구하는 공식으로 배워요.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이름으로 배우죠. 이 일반형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예요.”
“일반형을 증명하는 것은 꽤 어렵죠. n이 2나 4나 특정한 소수일 때라면 몰라도.”
“이봐요, 여기선 보통 사람은 n이 2일 때, 그러니까 피타고라스 정리밖에는 모르고도 잘 살아요. 수학 하는 애들도, 전공이 아니면 굳이 파고 들어가진 않아요. 여기서 이 정리는 일반인들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이긴 하지만...... 이름을 왜 들어봤느냐 하면요, 1995년에 증명이 되었거든요. 비교적 최근에 된 것이기도 하고, 책도 많이 나왔어요. 뭐, 아주아주 유명한 가설인데 358년만에 증명이 해결된 거니까, 이슈가 될 만도 했지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이런 애매모호한 시기에,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푸른 피부의 슈슬리사와 머리를 맞대고 중고등학교 수학교과서에 나오는 용어들을 일단 그들의 개념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웅은 그의 언어를 몰랐고, 그는 우리의 일상어만 알고 있었기에, 일단은 중고등학교 수학교과서를 죽 설명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자신의 설명에서, 그가 우리의 수학과의 접점들을 순조롭게 찾아내기를 바라면서.
“그런데요, 신.”
뭔가, 사람, 아니 외계인의 이름으로도 껄끄러운 그 이름을 부르면서, 진웅은 어깨를 움찔했다. 아무리 자의식이 강한 외계인이어도 그렇지, 신이 뭔가, 신이. 그렇지 않아도 외계에서 온 슈슬리사들을 신처럼 추앙하는 이들도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마당에,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신의 이름을 외람되게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괴이한 이름은 뭐란 말인가.
“어째서 신이에요?”
“예?”
“당신 이름요. 원래는 더 길죠?”
“발음해도 당신이 따라하기 어렵습니다.”
“알아요. 그 총독 이름만 해도...... 피랄리라투시나...... 였나?”
“피랄리라투시나프라파릴리오스. 이름 아니고 성입니다.”
“아, 예. 그렇죠. 그런데.”
“필라투사.”
“예?”
“총독을 필라투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른 지성체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지성체가 발음하기 쉬운 짧은 이름을 정해서 쓰곤 하니까요. 이곳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곳에서요?”
“아웃백이라는 가게에 갔더니 직원들이 다들 톰이니 메리니 제인이니 하는 이름을 달고 있던데요.”
“그건...... 좀 다르긴 하지만.”
아웃백 알바생의 이름표가 문제가 아니었다. 진웅은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그래서 왜 신이냐고요.”
“입안에 느껴지는 통각이 매력적이니까요.”
“음?!”
“신라면 모르십니까? 매을 신 자 써서 신.”
“설마 지금 신라면이 맛있어서 자기 이름을 신으로 정했다는 거예요?”
“지구에도 그런 이름들 있지 않습니까? 페퍼나 솔트나. 아, 신 씨도 있군요. 무려 패밀리 네임인데도.”
“한자가 틀릴 거예요.”
“그렇습니까? 같게 보았는데요.”
신은 천진하게 웃었다.
“다른 행성에서 이름을 정하는 건, 그곳에서 뭔가 사랑할 만한 것을 찾았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뭔가 사랑할만한 것을 찾아서 붙인 이름이, 신이라고. 납득하면서도 어쩐지 입맛이 썼다. 그는 신이라는 이름에 담긴 다른 뜻을 아마도, 알고 있을까. 그는 슈슬리사를 신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진웅은 볼펜을 손가락 끝에서 돌리다가, 공연히 딸깍거렸다.
이질적이다. 알고 있었다. 외계에서 온 신도, 그리고 졸업도 하지 않은 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수많은 것들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텅 빈 연구실에 혼자 남아버린 진웅도. 잔잔한 수면 위에 떨어진 작은 모래알 하나가 파문을 그리듯이, 그렇게 이질적이다. 그리고 두 파문이 겹쳐 맥놀이가 지면 더욱 복잡미묘한 파문을 그리는 것처럼.
“학교는 이만 졸업하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제안같기도 하고 강요같기도 한 말이 형체를 갖추어 발등 위로 툭 하고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해 가을이 다 지날 무렵, 진웅은 학과장의 부름을 받았다. 늦깎이 박사과정 학생이, 아무래도 이곳 대학의 입장에서는 이곳의 영역을 침범하려 드는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슈슬리사와 어울리는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그냥 자네, 학위 준 것으로 해 주겠다고.”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듬거리며, 이건 아니라고 말을 했다. 목적이 학위였다면 선뜻 받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쩌면 앞으로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종이조각 하나가 목적이었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하지만 아니었다.
“자넨 어차피...... 다 큰 어른이니 빙빙 돌려 말하지 않겠네. 자넨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고.”
“전 그냥 공부를 하고 싶은 것 뿐이에요.”
“뭘? 수학을? 그냥 앉아서 하루종일 문제를 풀고 싶을 뿐이라고?”
학과장은,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밤낮없이 하루종일, 남들이 풀지 못한 방법을 찾아서 아주 사소한 문제의 아주 특이한 부분이라도 어떻게 비틀고 되돌리고 그렇게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목을 매면서 살아가는 것 말인가?”
“교수님.”
“답지가 다 나와 있는 수학의 정석을 방법만 바꿔 가며 푸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지.”
“슈슬리사 때문인가요?”
“어차피 자넨, 슈슬리사 그런 것 없었어도 그런 새로운 것에 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건 재능 문제일세. 졸업을 시켜 줄 테니 졸업장을 들고 나가. 대체 앞으로 이 수학이라는 게 어디 쓸모가 있을 지 모르지만.”
학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학부생 놈들도 다들 공학 쪽으로 도망가 버리는 판에, 능력도 안 되는 게 박사 과정에 매달려 있다니. 지금은 자네가 날 원망해도, 나중에는 감사하다고 절을 할 걸세. 가 봐.”
얇은 옷 사이로 소나기의 굵은 빗줄기가 내리꽂히듯, 적나라한 빈정거림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진웅은 대답하지 못했다.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등 뒤에서 학과장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김 교수는, 졸업논문으로 밀레니엄 문제를 풀겠다는 놈을 그냥 둬서 어쩌겠다고.”
“제 주제는 그게 아닙니다.”
“그래?”
“......그걸 쓰고 싶었지만, 여튼 그건 아닙니다.”
“그럼 지금 자네 논문 주제에 대해 내 앞에서 설명해볼 수 있나?”
“......”
“자네, 몇년째 논문 쓰면서도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학위 연구는 자네 혼자 하는 게 아냐.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연구하는 거지. 지금 여긴 자네를 맡아 지도해주겠다는 교수도 없고, 자네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도, 계속 엉뚱한 데 한눈을 파느라 제대로 논문을 쓰지도 않았잖나.”
“엉뚱한 게 아닙니다.”
“p-np 문제라. 자네가 앤드루 와일즈나 페렐만쯤 된다면 엉뚱한 게 아닐 지도 모르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석학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학과장은 혀를 찼다,
“자네가 밀레니엄 문제들을 풀 능력이 된다면, 부디 그 전에 학위 논문부터 써 주시지. 자네를 맡아 지도해주겠다는 교수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자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밀레니엄 문제는 고사하고, 자네의 학위 논문 주제를 제 날짜 안에 풀어낼 능력도 부족해 보이는데, 그래도 내가 맡아주겠다는 거야. 하겠나.”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웅은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애원하듯 지도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현실의 진웅은, 마음속에 만들어낸 자신의 상을 꺼내는 대신 그저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예.”
 
 
“졸업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요? 축하합니다.”
“축하할 일이 아니에요.”
볼펜을 딸깍거리며 진웅은 테이블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런 건.”
“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난 졸업하기 싫은데 학교에서 강제로 졸업을 시키려는 거니까요.”
어떻게 설명해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는지, 진웅은 자조하듯 낄낄거렸다.
“봐요, 나 지금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있어요. 같은 인간도 못 알아들을 말인데, 하물며 당신이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생각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화를 내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군요.”
“......그래 보여요?”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 걱정 비슷한 것이 떠오르는 듯 보이는 것을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진웅은 몸을 일으켰다.
“이해하기 어렵죠?”
“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슈슬리사잖아요.”
“내가 슈슬리사인 것과 당신이 인간인 것과 당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인간이 아니잖아요.”
진웅은 대답하다가, 이번에야말로 신의 표정에 분명한, 갑갑함과 우울함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신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진웅의 얼굴을 관찰하듯 들여다보았다.
“문명이 덜 발달된 지성체들은, 종종 어린아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죠. 예를 들면,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인간의 아기들도 그런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예?”
“인간만큼의 복잡한 감정이,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에게는 없다고 확신하지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그런 복잡한 감정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열등하지 않은 슈슬리사에게 복잡한 감정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은 어떤 자신감에서 나오는 겁니까?”
진웅은 신의 느리고 기묘한 화법이, 그들 종족 특유의 논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한 단계임을 그제야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슈슬리사가 인간보다 복잡하고 발전된 문명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주에서 생활을 하고 서로 다른 태양계들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감정이 배제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난...... 그 정도의 문명을 가졌으면 다들 해탈을 하거나...... 미안해요.”
“인간보다 오래 사니까 해탈하는 슈슬리사도 많긴 많지요.”
신은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나는 지구인으로 치면 대학을 졸업할 정도의 나이입니다. 짝을 갖거나 번식을 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시기로 치지요. 그 나이에, 해탈을 한들 뭘 얼마나 해탈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진웅, 오늘은 당신은 불합리 때문에 화가 났고, 나는 지구인들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마음이 상했으니, 지구 식으로 풀어야겠습니다. 어때요.”
“지구 식이라뇨...... 뭘 어떻게 하라고.”
“지구의 술은 아직 폭탄주밖에 안 마셔봤거든요.”
뭔가 A도 B도 떼지 않고 영어회화부터 시작한 것 같은 고백에, 마음 속에서 뭔가 풍선에 바늘 끝을 꾹 찌른 직후 처럼, 웃음이 터져나왔다. 진웅은 낄낄거리며 신을 끌고 나갔다.
“지구의 술은 정말로 맛이 없습니다.”
카스와 하이트를 번갈아 마셔본 신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신은 술이 센 편이었고, 마셔도 얼굴에는 티도 나지 않았다. 외계인에게 알콜을 얼마나 마셔야 뻗을 지를 두고, 역시 낮부터 술을 푸던 생물학과 놈들 두엇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이보다는 차라리 증류주 계열이 맛있을것 같습니다만.”
“아서요. 증류주면 뭐? 비싸.”
“역시 비싸고 맛없는 건 있어도 싸고 맛있는 것은 없다더니.”
“이 아저씨가 별 말을 다 아네.”
“아저씨...... 성인 남성...... 내 성별에 대해 내가 말했습니까?”
“말을 했건 안 했건 외관상 아저씨면 아저씨지. 자, 쭉 들이켜요. 쭉.”
맥주에다가 무제한 리필되는 팝콘안주를 입에 물고, 늙다리 대학원생과 외계인은 온갖 쓸모없는 이야기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여기나 거기나 교수들의 잔소리란 쓸모는 없지만 신경쓰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게 된다거나, 관료주의란 학문의 적이라든가, 지구인에 대한 편견과 슈슬리사에 대한 편견 같은 것들. 그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끝에, 신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의 성별에 대한 편견도 포함해서요. 나는 성인 남성이 아니에요. 여성인 것도 아니지만.”
“예에?”
“음, 나는 임신을 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임신하게 만들지도 못해요. 그렇다고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지구인의 개념으로는 출아법을 생각하는게 가장 가깝겠군요.”
“출아법? 아니, 저기, 그......”
“당신이 출아법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 기쁘군요.”
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적당한 나이가 되면, 내 몸의 일부가 부풀어 오르고 변색됩니다. 딱히 불편한건 아니고, 우리의 시간으로 2~3년에 한번씩, 평생 예닐곱 번 정도 그럴 기회가 오죠. 이때 이 조직을 잘라내어 영양액에 담그면 그대로 분열을 계속하죠. 우리의 시간으로 일곱 달 정도가 지나면, 이 조직은 작은 슈슬리사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게 뭐예요, 그럼 자연적으로는 임신 못 해요?”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선조는 출아법으로 번식을 했어요. 모든 슈슬리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화가속의 결과에 따라 달라져요.”
진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화가속이 무슨 뜻인지, 출아법이라는 건 원래 단세포생물 같은 것의 번식 방법인 줄만 알았는데, 문명이 발달했다는 슈슬리사가 출아법으로 번식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신은 맛이 없다면서도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다, 한숨을 쉬었다.
“슈슬리사란 하나의 종이 그대로 진화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우주의 여러 지성체 중 기준에 맞게 진화한 종은 슈슬리사로 불리지만, 그렇지 않은 종은 독립된 종으로 남고, 일정한 진화 단계를 거친 경우 슈슬리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지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지도 모르지만......”
신은 빈 잔에 다시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지구의 정부들이 진화가속 실험에 동의했습니다. 곧 지구인들도 진화가속이 이루어질 거예요. 진화가속의 대상이 된 지성체는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그 이전 세대가 이루지 못한 지적 성과들을 이루게 될 겁니다. 진웅, 처음 날 만났을 때 내게 물었지요. p-np 문제라고 했던가요.”
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테이블의 모서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다시 맥주를 몇 모금 마신 뒤에야 말을 이었다.
“슈슬리사는 진화자궁을 이용하여 변인을 통제하고 지구인들의 진화를 가속화할 것이고, 이곳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의 기술을 사용할 거예요. 지구인들도 아마, 우리의 문명의 결과물은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 해법은 스스로 찾아야만 해요. 당신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건 슈슬리사가 지성체를 지성체로 대우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기는 무엇을.
언제부터였을까, 어디까지 들었을 때였나. 그만 술이 확 깨버렸다. 지구인들이 진화해버린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저 초연한 외계인 친구처럼 남다른 지능을 가지고, 그가 손도 대지 못하던 문제들을 마치 덧셈 뺄셈을 해내듯이 해치운다. 전지전능한 외계인들이 왔으니, 더 이상 수학 같은 것은 필요없으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끝없는 무력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혼자만 뒤떨어지리라는, 그 간극을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박탈감이 시커먼 뻘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아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듯 했다. 아아, 지구따위, 인간따위 몽땅 다 망해버렸으면.
신이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차라리 몰랐으면 화라도 나지 않았으리라. 듣고 알았다. 술따위는 진작에 깨 버렸으니. 그렇게 잘난 아이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어서, 그 아이들이 자기들 힘으로 밀레니엄 문제 같은 것은 다 풀어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지. 우리가 아니라.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격렬하게 질투했다. 이미 죽어 이런 꼴을 볼 일 없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살아있어도, 이 한 가지 문제를 풀겠다는 열망을 품지 않은 모든 이들은, 그들은 복 있는 이들이라. 차라리 필론의 돼지처럼, 진리에 대한 열망조차 없이 그냥 살아갈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해진 몸으로, 억지로 손을 들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때 묻고 낡은 천장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기랄.
눈을 감으면, 빛이 보일 것만 같았다. 이 낡고 초라한 반지하 원룸에도.
찬란한 빛. 진리에 대한 희망. 언젠가는 그 희망이, 빛이, 이 손에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대학교 1학년, 아직 가슴에 패기가 끓어오르던 시절에는.
내가 대학원 들어갔을 때, 난 내 손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해결할 거라고 자신을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술 먹은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 출근을 했는데, 교수님께서 신문을 보고 계시는거야. 어지간해선 신문 같은 것 안 보시는 분이었는데.
그가 대학원에 입학했을 무렵, 젊은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영국에서, 그게 풀렸다고. 앤드루 와일즈가 그걸 증명했다고. 난 전날 밤에 술이나 처먹고 있었는데, 내 꿈이었던 그걸 언 놈이 풀어버렸다고.
앤드루 와일즈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고, 그레고리 페렐만이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하고. 수학사에서 유난히 두꺼운 18세기와 19세기, 뉴턴과 달랑베르, 가우스와 오일러, 베르누이 일가와 라플라스, 맥스웰, 코시, 칸토어, 민코프스키, 불운한 천재였던 아벨과 피어보지도 못한 채 결투로 생을 마감했던 갈루아, 데데킨트, 드모르간, 코시, 디리클레. 그 시대처럼 마치 자고 일어나면 수학적인 발견이 쏟아져 나오는 듯 하루가 다르게 수학적 업적이 쌓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지식은 진보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동안 쌓아온 그 모든 수학적인 업적을 발판으로, 천천히,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진웅은 그렇게 믿었다. 믿었는데. 믿었을 뿐이었는데.
“교수님......”
그때는 웃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때는,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언젠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연푸른빛 피부의 외계인들이 지구의 하늘 위에 그들의 우주선단을 띄우고, 마치 존 레논의 노래에서나 들을 법 한 평화로운 세상이 마침내 외계인들의 힘을 빌어 이루어지는 몽상같은 현실과 맞닥뜨리면서도,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이, 교수님들이, 이제 순수학문은 끝났다며 다른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을 보면서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진리의 문을 열고.
그게 내가 아니라도 좋았다. 앤드루 와일즈건, 페렐만이건, 어딘가의 대단하게 태어난 누군가가, 그 많은 수학자들이 쌓아올린 지식의 산이 한번씩 끓어넘치는 그 순간 그 진리의 문을 열고 우리 모두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식으로, 이미 답은 정해진 상태에서, 옛날 본고사 수학문제 풀 듯, 수학 경시대회 문제 풀이하듯, “이미 증명은 끝났고요, 우리는 여러분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원합니다.” 같은 현실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리라고, 이들의 과학기술로는 이미 풀이가 끝난 일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해법은 스스로 찾아야만 해요.
이렇게 듣고 보니 처량해진다. 막연하다. 여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진보란 없다고. 이미 정해진 답안지를 두고, 그저 참 잘했어요, 그 도장 하나 받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부질없이 서로를 밟고 올라가 애벌레의 탑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는 것 뿐이라고. 화려하고 찬란한 나비의 꿈은 결코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그런 것은, 모두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시절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 슈슬리사가 지성체를 지성체로 대우하는 법입니다.
지성체를 지성체로 대우하는 게 아니라, 지성체를 사육하는 방법이겠지. 그냥, 너희들의 입맛에 맞게 내신 따고 수능 보고 본고사도 보라고 그래라. 난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정말로.
진웅의 손바닥이 차고 끈적이는 방바닥을 쳤다. 청소를 한 지 며칠 지났지. 개수대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화장실에서도, 아마 지린내가 올라올 때가 되었을 것이다. 방에 습기가 찼다. 빨래통은 비어 있었지만, 며칠째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속옷까지 한번에 벗어 세탁기에 처넣고, 진웅은 보일러를 켰다. 보일러에서 몇 번인가, 연통을 울리는 거친 소리가 울리다가, 마침내 불이 붙은 듯 가스냄새가 올라왔다. 진웅은 빨리 따뜻해지지 않는 물을 바닥과 변기에 끼얹고, 물에서 냉기가 가신 것을 확인하자마자 머리 위부터 물을 쏟아부었다. 때수건을 찾을 것도 없이 그냥 비누로 온몸을 구석구석 문지르고, 다시 물을 끼얹었다. 씻자,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깎고, 옷도 보송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리고 밖에 나가야지. 스마트폰도 충전을 하고, 넥타이도 매고, 머리도 빗고. 그리고 나가서, 입시학원 강사 구하는 데를 알아봐야지. 교수님 말씀대로, 졸업시켜주신다니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졸업을 하고, 거기 내놓을 논문 한 편도 어떻게든 써내고, 그리고 그저 살아야지. 취직 하고, 돈 모으고,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그렇게 옮겨다니고 기반 닦고, 그러고 나면 늦은 나이겠지만 어떻게 맞선이라도 보고,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애 낳고 살고. 몇 년 전 같으면야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슈슬리사가 정권 잡으면서 많이 바뀌기 시작했잖아. 어쨌든 집값이 내려가기 시작했잖아. 아, 정말. 어떻게든 그렇게, 남들처럼 똑같이, 그렇게 남들처럼. 멀리 보일 것만 같던,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진리 같은 것은 그냥 나쁜 꿈이었던 것으로 치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살아가야지. 그러면 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방구석에 처박아 둔, 슬슬 파리가 꾀기 시작한 쓰레기봉투를 묶어서 들고 나가려는데.
“진웅.”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문 손잡이를 밖에서 잡아당긴 듯 문이 갑자기 열렸다. 진웅은 눈을 끔뻑였다. 신이, 먹을 것이 잔뜩 든 수퍼 비닐봉투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
“안 죽었군요.”
“사람 보자마자!”
“아니, 정말로 죽은게 아닌가 싶어서.”
이 진지한 외계인이 그런 농담을 습득했을 리 없으니, 정말로 죽었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와 봤다는 뜻인 것 같다. 신은 진웅의 집 현관에 비닐봉투를 내려놓았다.
“술을 마신 뒤,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다음 날부터 닷새동안 출근하지 않았지요. 혹시 사고가 난 게 아닐까 싶어 학교 앞에서부터 이 집 앞까지 CCTV 열람을 요청해서 봤는데, 멀쩡히 집에 들어갔더군요. 그런데 전화는 받지 않고. 술을 마시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타일을 밟고 미끄러져 뇌진탕에 빠졌을 가능성을 생각했죠. 그 다음으로는 방에서, 잠든 채 구토를 하다가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으아아아아아, 그만, 스톱. 나 여기 살아있거든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저 외계인이 사고실험 따위를 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막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걱정이라는 것을 해 주었다는 것이 반갑기도, 고맙기도 했다. 진웅은 얼른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리고, 돌아와 손을 씻고 물부터 끓였다.
“라면 먹을래요?”
신라면을 좋아한다는 이 외계인을 위해 신라면을 끓이고, 사 놓은 지 좀 된 것 같긴 하지만 여튼 냉장고에 남아 있던 계란도 까 넣었다. 라면국물에 흰자가 홀홀 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진웅은 다시 한 알을 더 까 넣었다.
“신라면은 역시 국물맛이 좋아요.”
외계인도 좋아하는 신라면이라고 광고 찍으면 대박 나겠군. 생각하며, 며칠만에 뱃속에 제대로 음식을 집어넣는 듯한 기분으로 순식간에 라면을 비워 버렸다. 닷새라고 했나? 설마 정말 닷새동안 늘어져만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정말 닷새나 굶은 듯 식욕이 밀려왔다.
“......나가서 더 먹죠. 마침 외출준비 다 한 것 같은데.”
“당신은.”
“나도 성장기라서요.”
신은 진웅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가까운 고기부페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불판이 익기도 전에, 진웅은 정말로 닷새 굶은 사람 답게 익지도 않은 고기에 탐을 냈고, 신은 김밥이며 샐러드를 가져다가 진웅의 앞에 먼저 밀어놓았다. 한참을, 뱃속이 그득해지고 식도까지 음식이 차 올라서 누가 옆구리만 건드려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그는 밥과 고기를 씹어 넘겼다. 며칠을 굶었으니, 일단은 죽이나 미음 같은 것으로 속을 풀어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그 다음에 들었다,
“우웨에에엑!!!!!!!!”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먹은 것을 다 토하는 기분은 참 엿같았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기분이 더러워졌다. 신이 그의 등을 쓸어주고, “솔직히 말해서 이런 것이 그렇게 효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가스활명수를 사다주는 동안, 그는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울었다. 남이 사주는 밥도 못 받아 처먹는 새끼가, 남이 학위 준다고 할 때 진작 받고 튀어나갔어야지. 무슨 영광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직까지 남아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나이는 들고 부모님은 늙어가시니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해서 졸업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라면. 그랬다면 그는 나이가 들어서, 어느날 제 엄마를 닮아 수학에 영 둔한 자식의 뒤통수를 콩콩 쥐어박으며, 아빠는 수학자였어. 한때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그런 연구를 했었단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너희 엄마랑 결혼해서 너 낳고 사느라 그만 연구를 그만두고 회사에 다닐 수 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가장의 고뇌랄까 비애랄까, 그런 우수어린 허세를 부려볼 수도 있었겠지.
“실연이라도 당했습니까?”
“......그동안 내게 여자친구가 있었을거라고 믿었던게 더 놀랍네요.”
“지금 보이는 반응은 전형적이다 못해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실연 반응이지 않습니까. 연락을 끊고, 씻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정신 차리자 마자 폭식을 했어요.”
“걱정하는 거예요?”
“걱정하는 겁니다.”
“실연당한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가스활명수를 마시고, 생수와 가그린으로 입을 씻어내고, 학교 구석 벤치에 웅크려 앉았다. 진웅은 목쉰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 기분 알아요?”
신은 진웅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진웅은, 신의 얼굴이 아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패배자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어떻게 돌이켜 생각할 구석조차 없을 만큼.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목숨을 바쳐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닿지 않아요.”
“원래 목숨을 바쳐야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큼 귀한 것은 쉽게 손에 닿지 않는 것 아닌가요.”
“비유라고요!”
“내가 지구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감안해 주십시오. 그건 수학 이야기인가요.”
“......그래요.”
“p-np 문제?”
진웅은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평생 생각하던 건데. 그 속삭임에, 신은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진웅. 당신이 p-np 문제를 알게 된 게 대체 언제죠? 초등학교? 중학교 때? 그때는 당신은 그 개념을 아마 이해도 못 했을 겁니다. 이름 들어본 것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고등학교 때나 학부 때, 어쩌면 개념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일 수도 있어요. 아닌가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알게 된 지, 이곳 시간으로 10년도 안 된 것을 두고, 당신은 평생을 걸었다고 말합니까?”
신은 조금 화가 난 듯 했다.
“당신이 어린아이입니까. 20년을 산 사람이 10년정도 뭔가에 몰두했다면 평생 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서른 다섯 살이 되어가는 사람이 고작 10년을 두고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럼 어쩌라고요!”
진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른 다섯이랬죠? 이 나이면 다들 자기 앞가림 다 해요. 나만 빼놓고! 다들 돈 벌고,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런데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여기서 더 지나면, 이젠 정말로 뭔가 돌이키고 어쩌고 할 시간조차 없다고요. 당신들처럼, 슈슬리사처럼, 오래오래 살면서 먼 별을 누비고 돌아와 천천히 공부하고 연애하고 인생 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초연하게 살 수가 없어.”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정말로, 원하는 거라면.”
“정말로 그따위 인생을 원할 리가 없잖아!”
길 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진웅은 남의 시선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그저 신을 노려보며 절규했다.
“그따위로 시시하게 사는 걸 누가 바라겠어!”
“그럼, 바라지도 않는 일을 하겠다고, 평생을 건 일이 손에 닿고 닿지 않고, 그런 말을 합니까?”
“해도 안 되는 게 있는 거잖아요......”
눈물이 쏟아졌다. 손등으로 몇 번을 눈을 부벼도 금세 눈 앞이 부옇게 번졌다. 다 큰 어른이, 서른 다섯이나 된 아저씨가, 길바닥에서 엉엉 우는 꼴이라니. 꼴사나울 테다. 이런 순간에도 남의 시선이나 생각하는 자신이, 이 외계인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생각하니 한심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어떤 것을 놓아버리는 이 순간에만큼은, 울어도 좋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라고.
“하고싶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야구나 축구를 했다고 해서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피겨를 한다고 김연아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게는 수학밖에 없었는데. 그 끝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아는데도...... 그건 결코 내게만은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텐데...... 어차피 그런 건, 당신들이 만들어 낼 그 머리좋게 진화시킨 아이들이 하겠지, 나나 다른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잖아요. 내게 뭐가 남는다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선택하는 게, 뻔하지. 그럼 뭘 하라고요. 남들하고 똑같이, 그냥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 길 그만두면 바로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곳에서는 성공한 사람이군요.”
신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난 여기서, 아무리 애를 써도 취직도 연애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사람을 수도 없이 봤습니다. 30대 초반에 결혼할 수 있다면 행운이라고, 아이를 둘 정도 낳을 수 있다면 능력자라고 농담하는 것도요, 이곳의 복지사정으로 볼 때, 지금까지 소소한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당신 정도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겠고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외계인이면서, 고작 몇 달 둘러보고서, 이곳 사정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신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진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푸른 얼굴을 한, 먼 별에서 온 이는, 진웅의 살기어린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감상평을 덧붙이는 정도죠. 그게 당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쳐야 할 어떤 이유도 필요성도 없고요. 하지만 솔직히 난 이 곳에 대해, 실망스러워요. 평생 연구한 사람들조차도, 훨씬 발달한 과학문명을 지닌 슈슬리사가 왔으니 순수학문은 가망이 없다면서 직업을 바꾸려고만 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곳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에도 연구자들이 부족할 정도예요. 난, 그래서 당신이 귀중한 샘플, 아니, 자원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식은 교수라는 사람들보다 부족하더라도,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도 소중한 것이어서.”
“이봐요.”
“해법은 스스로 찾으라는 그 말, 그건 당신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 말이었어요.”
신은, 이제는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답지 않게 기운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기상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신에겐 너무 이른 이야기였어요. 정말로, 당신 인생의 반이라도 그 연구에 온전히 쏟아부어 본 다음에, 그 다음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고 말했다면 납득했을 겁니다. 당신이 힘들었을 거라고 말해줬을 겁니다. 하지만.”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것 알잖아요. 그런 게 사람을 더 괴롭힌다는 것도.”
“진웅, 나는 당신이 그 문제를 풀 거라고 확신하지 않아요. 하지만 풀지 못할 것이라는 속단도 한 적 없어요.”
“박사 논문 하나 통과 못해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내게 대체 뭘 기대한 거예요.”
“당신이 말했죠. 여기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 불리는 것이, 증명되는 데 358년이 걸렸다고. 그 사이, 그걸 풀어보려고 했던 수학자들은 모두 실패자들이었습니까?”
“무슨......”
“난 당신이 그 문제를 온전히 풀어낸 사람으로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죠. 수학은, 풀어내는 과정 자체가 소중한 거니까. 지성체를 지성체로 대한다는 것은, 진리라고 불러도 좋고 해답이라 불러도 좋은 그 증명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이 종과 이 종의 문명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풀어버렸으니까 손 댈 필요 없다면,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것을 배울 이유도 없겠지요. 아닙니까.”
 
 
진웅은, 결심한 대로 우선 박사 논문을 쓰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그는 교수들의 예상과 달리,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학교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슈슬리사들이 내려온 이후로 수학과의 박사 과정들이나 포닥들 중 상당수는 공부를 그만두고 학교를 떠났고, 진웅은 생각보다 쉽게, 공과대학의 일반수학과 공업수학 강사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뒤는 그가 하기에 달린 일이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 반지하 원룸보다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가지도 않았다. 그는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비는 시간마다 연구실이라 불리는, 대학원생과 포닥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방에 돌아와 논문을 썼다. 돈을 모으고, 유학을 갔다. 부모님의 도움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 돈을 기꺼이 대 줄 만큼 진웅이 스스로 성과를 만들어 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진웅이 그 모든 변화를 이루어 낸 5년동안, 자신의 논문을 위한 데이터 수집에 힘쓰던 신 역시도 연구를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웅이 유학을 떠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아마도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간 뒤에도 신은 계속 지구 쪽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진웅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지구 쪽에서 난문으로 꼽히던 수학 문제들이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그는 진웅을 떠올렸다. 지구의 수학을 슈슬리사의 언어로 번역하고, 슈슬리사의 수학을 지구에 전할 방법들을 논의하며, 그는 진웅의 논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진웅은, 그가 답을 찾으려 했던 문제들을 향해, 느리지만 틀리지 않은 걸음을 옮겨갔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진웅의 논문은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신은 진웅의 나이를 따져본 뒤 혼자 술집에 찾아가 술을 마셨다. 지구의, 그 맛없는 술 생각이 났다. 술을 먹고 나서 다음 날 끓여먹던, 자신의 이름이 되어버린 그 신라면 생각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진웅과 달리 신은, 아이들을 낳았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을 무렵, 신은 지구에서 마침내 p-np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논문의 전문을 받아 훑어보던 신은, 레퍼런스에서 낯익은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신이, 자신의 오랜 친구 대신, 지구의 수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느 인물을 소재로 짧은 이야기를 지은 것은 아마도 그 논문을 읽고 난 뒤의 일이었으리라. 영상작업을 하던 신의 아들은 그 이야기를 소재로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그 애니메이션은, 아마도 지구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평생 연구한 것은 거짓입니다.”
은퇴를 앞두고, 연구실을 정리하던 힐베르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마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같은 외모의 남자였다. 인간같지 않은 모습, 큰 키에 마른 몸, 발이라기보다는 발굽인 것처럼 작고 발등이 튀어나온 발. 그는 외계인이었다. 먼 우주에서, 인간보다 더 많은 앎을 품고 하늘을 날아다니다, 잠시 이 별에 내려앉은 방문객이었다.
“이 세상에는 밝혀낼 수 없는, 증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 단 십 년이라도 더 지나서 증명된다면 상관없겠지만. 당신은, 당신이 죽기 전 어느 천재가, 당신의 주장을 가볍게 뒤엎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비참하게도.”
노 수학자는 미소지었다. 그를 유혹하러 온 악마라도, 혹은 외계인이나 시간여행자라도 상관없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네. 젊은이, 수학이라는 학문은 외로운 것이라서. 그 희망 없이는 견뎌낼 수 없는 법이거든.”
“가짜 희망이라도 말입니까.”
“늙은이의 지혜라고 해 두지. 오늘도, 또 내일도,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래서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믿고 싶어지는 말이라네.”
노인은, 어쩌면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별처럼 많은 시간과 세상 속을 살아왔을 젊고 지혜로운 여행자 앞에서 침착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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