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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갈 듯 한 솟을대문이 늦가을의 새파란 하늘 아래 시리도록 날렵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종로서 고등과의 순사부장인 가네야마는 그 솟을대문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의 돌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마다 매번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경성 한복판, 이왕가 종묘의 바로 곁을 차지하고 앉은 이 고택에 올 때 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특히 이 댁의 마리 아가씨를 만날 때면 더욱 그랬다.

“무슨 일인가.”

가네야마가 머뭇거리자, 뒤따라오던 미와 경부가 부드럽게 한 마디 했다. 미와는 가네야마의 굳은 표정을 한 번 보고 웃음지었다.

“원래 높으신 분들 댁에 일로 가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지. 한때 자작을 지낸 댁이라 부담스러운 것은 알겠지만, 한두 번 온 것도 아니지 않나.”

“죽은 대감이야 제 알 바가 아닙니다만, 그 아씨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알아, 알아.”

미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아가씨가 불령선인 놈들과 어울려 다니고 있으니. 그냥 잡아넣으면 좋겠는데, 높으신 분들 보시기에는 또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고. 자네가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그는 종로서의 형사들에게는 마치 아버지나 큰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가네야마도 처음에 순사보로 들어왔을 때는 저승사자라 불리는 미와를 두려워했지만, 미와는 충직한 가네야마를 아끼고 잘 가르쳐 지금처럼 제 몫을 하는 고등과 형사로 키워 주었다.

“그럼 들어가지.”

“예.”

미와 경부가 들어가라고 하면, 불 속이든 한강 한복판이든 뛰어들 수 있었다. 가네야마는 가슴을 펴고, 매번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반지르르한 돌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묵직한 대문이 열리자, 이미 십수 번도 넘게 보아 얼굴이 낯이 익은 어멈이 머리를 조아렸다. 가네야마가 한 마디 했다.

“또 보는구만. 이러다가 정분 나겠네.”

“....”

농지거리라고 던진 말인데, 어멈은 정색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가네야마는 일부러 거칠게 마당에 침을 퉤 하고 뱉으며 걸어들어갔다. 미와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대감 댁 머슴들은 제가 대감인 줄 아는 법이지.”

“한심한 꼴을 보였습니다.”

“음, 트집 잡힐 일은 하지 말게. 운양 대감이 세상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해도, 여전히 조선 사람들은 이 댁을 존경하고 있잖은가.”

이 저택은 경술년에 자작 작위를 받은 운양 대감 댁이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과 한 나라가 되는 것에 대해 불가(不可),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경술년에 덴노께서 황공하옵게도 자작으로 임명하고 위로금을 하사하셨다. 그랬으면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자는 십여년 전 조선인들이 만세 운동을 할 적에 감히 총독 각하께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그것도 선물이랍시고, 케이크 상자에 그 글을 포장하여 제 손자 손에 들려 보냈다니. 독종도 이만저만한 독종이 아니었다.

“그래, 자네 보기에 그 아씨는 어떤 사람이던가.”

“마음같아서는 그냥 잡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귀히 자랐으니 장 몇 대만 때려도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질질 짤 텐데요.”

“흠, 그거야 모르는 거지. 만세 운동 때 잡혀 들어온 여학생이라는 아이들이 얼마나 독했는가. 게다가 운양 대감 댁 손녀일세. 얻는 것은 없이, 공연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 일이야. 그래서 내 자네더러 그저 경고만 하라고 말했던 것이고.”

미와의 가르침에, 가네야마는 머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이 집의 손녀인 마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경성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집은 그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예전의 영화를 간직한 듯 화려하였다. 사랑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었고, 안채로 이어지는 낮은 담을 따라 이르게 핀 매화꽃이 늘어져 있었다.

“저는 그 아씨가 미울 때가 있습니다.”

“밉다고?”

“왜, 얼마 전에 우리가 뒤쫓던, 농촌계몽운동 하러 간다던 놈 있지 않습니까. 그 놈도 이 댁에서 숨겨 주었지요.”

“브나로드 한다는 놈들 말이로군. 그런데?”

“시골에서 소 팔아 경성에 유학 온 놈들이 제 고향 사람들 계몽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집에 살면서 좌익운동이라니. 그야말로 배 곯아 본 적 없는 부르주아의 허세가 아닙니까.”

미와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때, 안채의 대청마루 위로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 밑에서 자른 단발에 조선 옷을 입고, 그 위에 뜨개질한 숄을 두른 채였다. 무슨 글이라도 쓰다 나온 것인지, 오른손 손목을 조금 걷어 올렸는데 손가락에 잉크인지 먹물인지 모를 것이 두어 방울 묻어 있었다.

“늘 오시는 가네야마 형사님에다, 오늘은 종로통에 소문이 자자하신 미와 형사님까지 오시다니. 모르긴 몰라도 제가 크게 장한 일을 한 모양입니다.”

이 댁의 손녀인 마리였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겨우 넘었나 싶은 젊은 아가씨인데, 조선인들에게 저승사자라 불리는 미와를 두고 농지거리를 던지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날도 많이 쌀쌀해졌는데 여기까지 오셨으니 응당 안으로 모셔서 다과라도 대접해야 도리겠지만, 혼인도 안 한 젊은 처자가 외간남자를 내실로 들일 수 없는 것이 조선의 법도이니 이해해 주시오.”

“실례가 많습니다.”

미와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본관도 자작님 댁 아가씨를 함부로 찾아 뵙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은 압니다만, 그래도 일이니 어쩔 수 없지요. 마리 아가씨께서 조금만 저희 사정을 봐 주신다면, 모두가 편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감히,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종로서 고등과 미와 형사님의 사정을 봐 드린다고요? 쥐가 고양이를 걱정할 일이겠군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자꾸 불령선인 놈들과 어울려 다니셔서 종로서 서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얼마 전에는 브나로드를 한다며 좌익사상을 전파하고 다니던 학생 놈도 숨겨 주셨지요?”

“학교 후배 하나가 며칠 묵다 간 것 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종로서 경찰들은 생각보다 할 일이 없으신 모양이오.”

“아니라, 는 말씀조차 아니 하시는군요.”

“어차피 다 알고 오셨는데, 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이 집의 아랫것들에게 손을 대시겠지요. 예, 제가 숨겼습니다. 숨겨서 멀리 떠나보냈지요. 그렇게 이실직고하면 되겠소?”

마리는 불쾌함을 숨길 생각도 없이 대꾸했다.

마리의 조부인 운양 대감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을사오적들마냥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눈 앞에서 나라를 빼앗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낸 것도, 민 충정공처럼 나라 잃은 것을 비통해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백면서생이라면 모를까, 그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저 안전하게 난세를 버텨내는 것 자체가 죄가 되기도 한다고 마리는 생각했다. 그가 원하지 않았다 해도, 그의 동양삼국동맹론이 매국노들에게는 매국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조부는 수치를 아는 분이셨고, 만세 운동 때 학부대신 이용직과 더불어 총독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라는 글을 지어 보냈다. 그 일로 조부는 삭탈관직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자작 작위도 그때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댁을 자작 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작 댁 아씨라고 말할 때 마다, 마리는 오물을 뒤집어 쓰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마리 아가씨께서는 영리한 분이시지요.”

미와는 너구리같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입장에서도 아가씨를 잡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대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은 운양 대감의 손녀가 불령선인이라니, 얼마나 망극한 일입니까.”

“나는 조선 사람이지 불령선인 따위가 아닙니다. 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세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대감께서는 만세 운동 때 조선인의 편을 드시다가 고초도 겪으셨지요. 아가씨도 학생 운동 하는 놈들과 얽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가씨를 함부로 잡아넣었다가는 또,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다. 양쪽으로 곤란하게 된단 말씀이지요.”

“그쪽이 곤란한 건 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명문가의 따님이라 함부로 잡아들이기 어려운 줄을 뻔히 아시니까, 그렇게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듯한 일을 계속 하시는 것이겠지요. 좌익 운동 말입니다.”

“조상이 어떤 오명을 썼든, 혹은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든, 자손은 자손대로 떳떳이 살아야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아들놈도 아가씨처럼 기개있는 사내가 되면 좋겠습니다만.”

미와가 혀를 찼다.

“어쨌든 저희도 매번 다 잡았다 싶다가 아가씨가 가로막으시니, 참 어렵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여기 가네야마 이 친구가 무척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이 친구 입장도 한번 보십시오. 매번 잡았다 놓아드리기를 반복하려니 도대체가 사는 낙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왜, 조선인이 되어서 일본놈 똥이나 닦는 자의 입장까지 봐 줘야 한답니까.”

마리는 말을 뱉어 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의 입장에서야 거칠게 말한 것이었지만, 공포의 대상인 미와 경부도 아니고 가네야마 같은 자야 오며가며 흔히 들었을 이야기다. 공연히 제 입만 더러워진 것 같아 마리는 고개를 틀었다. 그때 가네야마가 한 마디 했다.

“누가 제 입장을 봐 달랍니까. 결국은 돈 많은 집 아가씨가 저 혼자 안전한 데 앉아서 무슨 열사라도 되는 듯이 구는 게 고까워서 그럽니다. 그렇게 의기가 넘쳐서 좌익운동을 꼭 해야겠으면 어디 만주나 상해에라도 가 버릴 것이지, 왜 남의 나와바리에서 이런 몽니를 부린답니까.”

가네야마는 홧김에 속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안전한 제 집 울타리 안에서 뭐라도 된 듯이 뻗대는 젊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자작 가의 손녀가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이라도 서대문 형무소에 처 넣었을 것이다. 상해나 만주는 고사하고, 인천항까지 가는 기차에만 올라도 바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고상한 아가씨 주제에, 누구보고 일본놈의 똥을 닦는다는 거야. 미와가 옆에 없었다면, 뒷 일 생각지 않고 저 대청에 뛰어올라가 저 건방진 계집애의 머리채라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잘 알았다거나, 이만 돌아가시라거나, 형사님들께 폐를 끼쳐서 송구하다는 뻔한 말조차도 없었다. 자신에게라면 모를까, 미와 경부까지 와 있는데도 저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에 가네야마는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가네야마는 자신이 공연히 긁어부스럼을 만든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전부터 날이 제법 쌀쌀해졌는데, 이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가네야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에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지난 1월에.”

“예.”

“동경 사쿠라다몬 앞에서 천황 폐하께 폭탄을 던진 놈이 있었네.”

“들었습니다. 하늘이 도와 폐하께서는 무사하셨지만, 화족 몇 분이 크게 다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오늘 그 놈 사형을 집행한다지.”

“하.”

“...정말 끝도 없이 기어나오는구만.”

미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때, 마리는 제 방에서 여권을 꺼내 보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언제고 이 집을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핑계가 좋았다.

‘종로서 고등과의 순사부장 나리께서 제발 만주든 상해든 어디로든 가 달라고 했으니, 그 부탁 정도는 들어 드려야지.’

마당에도 어멈이며 다른 아랫것들이 여럿 있었지만, 가네야마가 자기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저 미와 경부도 함께 와 있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라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가네야마 순사님이 상해에 다녀오라고 하셨기에 그리 갔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뻔뻔하게 대답해 버리면, 아마 제 체면 때문에라도 거짓말이라고 발뺌하진 못할 것이다.

떠날 날이 온 것 뿐이다. 머리를 오리고 꽃가마를 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래왔듯이 좌익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숨겨주거나, 혹은 그 일에 가담해 같이 움직이다가, 어느날 꼬리가 밟혀 도망쳐야 할 날이 올 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렇게 몰래 짐을 꾸리고 담을 넘어 먼 이국으로 떠날 날을, 어쩌면 마리는 줄곧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안 돌아가셨소? 일본 사람은 눈치가 빠르다 들었는데.”

다시 대청마루로 나온 마리는, 미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한 마디 하고는 바로 어멈을 불렀다. 어멈은 마리의 지시를 받고 하인들을 불러들였다. 곧 날랜 하인 하나가 총독부 외무국에 다녀온다며 나셨다. 미와와 가네야마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가네야마 형사님이 만주나 상해에라도 가 보라시기에. 유람이라도 갈까 해서요.”

“....허, 참.”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미와조차도, 마리의 이런 뻔뻔한 태도에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쉴 정도였다.

“뭐, 만주나 상해는 혼자 여행하기 너무 멀고... 블라디보스토크 정도면 어떨까 하오.”

“여행이라고요...”

“설마 대일본제국의 형사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 하시진 않을 것이고... 형사님이 굳이 권하시기에 올 겨울에 한 달 정도 유람이라도 다녀오려는 것까지 트집 잡으려 드시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그렇군요, 잘 다녀오십시오.”

미와가 웃으며 대답했다. 한 손으로는 가네야마의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가네야마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눈이 많이 오기는 합니다만, 경성의 겨울보다는 따뜻할지도 모르겠군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돌아와서 뵙지요. 아, 가네야마 형사님은 저를 안 보시는 편이 나을 것도 같지만 말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미와는 가네야마를 질질 끌고 운양 대감 댁을 나섰다. 가네야마는 어깨를 움츠렸다. 미와는 종로서 형사들에게는 늘 친절하고 자상한 선배이자 상사였지만, 그렇다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는 무골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뼈도 못 추리겠구만.’

“차라리 잘 되었군. 자네가 따라가.”

“예?”

“아무리 야무지고 똑똑해도 이제 겨우 스물 넘은 젊은 처자일세. 제가 경성에서나 자작가의 손녀이지, 경성 밖에서도 그럴 줄 아는 모양이지.”

“아...”

“경성을 벗어나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불령선인이나 좌익 인텔리들과 어울리는 순간 언제든 잡혀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 말을 듣자마자 국경을 넘을 궁리부터 하는 것을 보게.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애라는 거지. 어떻게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거기서 항주 같은 데로 갈 궁리를 하겠지.”

“항주요?”

“올 여름에 상해의 괴뢰 정부가 국민당과 함께 도망을 갔어. 아, 자네도 모르는 것을 보니, 어쩌면 그냥 상해로 갈 지도 모르겠군.”

“만주로 갈 수도 있잖습니까?”

“만주는 아닐 거야. 젊은 여자가 독립군에 가서 뭘 하겠어. 상해에 가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헛된 생각을 하고 있겠지.”

“과연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저 아씨의 뒤를 밟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즉시 체포하겠습니다.”

“가서 여권부터 만들게. 위험한 좌익세력의 프락치를 뒤쫓는 중이라고, 대지급으로 발급해 달라고 연통을 넣어 두겠네.”

미와는 가네야마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초겨울의 하늘은 흐렸다. 마리는 겨울이 다가오는 11월 하순, 신의주행 열차 출발 시각에 맞춰 역에 도착했다. 그는 인력거가 아닌 승용차에서 내려 역으로 걸어들어갔다. 둥근 종 모양에 큼직한 비단 리본이 달린 새파란 클로슈 모자를 쓰고, 리본과 색을 맞춘 원피스에 모자와 같은 빛깔의 모직 코트를 입은 화려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모자와 코트는 마리에게는 조금 컸다. 빛깔도 어쩐지 추워 보이는데다, 마리에게 썩 잘 어울리지도 않아 보였다. 제가 곱게 기른 아가씨가 어울리지도 않는 코트를 입은 꼴을 보고 어멈은 속이 상하는지 가슴을 쳤다.

“대체 이게 뭡니까요. 이렇게 질질 끌리는 코트라니.”

“요즘 프랑스에서 유행이라더군.”

“아무리 유행이라도 그렇지요. 아씨께서는 누가 골라주는 대로 입어버릇 하셔서, 직접 고르라고 하시면 이렇게 색을 못 고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중 드는 이도 없이 혼자 가신다니요.”

“걱정할 것 없네.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에서는 몸종 없이도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마리의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다. 임시정부다. 말이야 무어라 하든, 그건 어멈도 알고, 마리도 아는 일이었다. 어멈은 마치 살아서는 다시 못 볼 것처럼 슬피 울었다. 마리는 어멈을 위로했다. 급사가 마리의 짐을 일등석으로 먼저 가져다 놓았다.

그때 가네야마가 플랫폼으로 걸어들어왔다.

“가네야마 형사님이 아니십니까.”

이래서야 미행도 아니고, 대놓고 따라오는 것이다. 정말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지에 예약해 둔 호텔에서 머무르며 며칠 호사스러운 관광을 즐기다가 곱게 돌아오라는 뜻이겠지.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수상한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그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얌전히 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형사님도 북쪽에 가시는 모양입니다? 평양? 아니면 신의주? 설마 블라디보스토크?”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행하는 사람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미행당하는 사람은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평온한 여행 되십시오.”

그쪽만 얌전히 있으면 얼마든지 평온하다는 말을 삼키며, 가네야마도 같은 인사를 건넸다. 마리는 일등석 객실로, 가네야마는 삼등칸으로 향했다. 어쨌든 공무로 가는 출장이고, 아직 말단 형사에 불과한 가네야마에게는 일등석 여비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뭐가 되었든 열차가 멈추어 설 때 마다 플랫폼에 내려 저 여자가 어디 딴 데로 못 가게 막으면 된다, 열차 안에 있는 한 큰 일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네야마는 차표에 적힌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마리는 얌전히 있었다. 중간에 플랫폼에 나와 마리가 어디 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가네야마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창문을 열고 땅콩 봉지를 건네 주기도 했다. 더러는 새로 맞춘 클로슈 모자가 다 찌그러지는 줄도 모르고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정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처음으로 혼자 유람이라도 떠나는 듯한 느긋한 태도였다. 이쯤 되니 가네야마도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 듯, 처음 출발할 때처럼 눈을 부라리며 감시하려 들지는 않았다.

“좋아, 됐어.”

열차가 다시 움직이자, 마리는 모자를 벗어놓고 지도를 폈다. 경성에서 출발한 열차는 우선 신의주로 간다. 여기까지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관할이다. 그리고 신의주를 지나 단동에 도착하면 세관 검사를 하고, 출입국 단속을 한다. 여기부터는 중국이고, 만주철도의 노선이다. 객실 차량은 그대로지만, 열차를 끄는 기관차는 조선총독부의 것에서 만주 쪽 기관차로 바뀐다고 들었다.

그렇게 심양과 장춘을 지나 하얼빈까지 가서, 블라디보스토크 행 열차를 탄다. 이것이 마리가 총독부 외무국에 보고한 내용이었다. 물론 마리는 계획대로 얌전히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리는 중국 본토로 가는 길목인 심양에서 내릴 계획이었다. 물론 가네야마도 그런 사정 쯤은 짐작하고 있을 테니, 여기서부터는 정말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단동에서 세관 검사까지 마친 뒤, 마리는 조용히 일어나 옆 칸을 두드렸다. 옆 칸에는 마리의 모교 교장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선교사의 부인이 타고 있었다. 마침 아이를 데리고, 남편인 선교사를 만나러 하얼빈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리는 일부러 자신의 여행 날짜를, 선교사의 부인이 여행하는 날짜에 맞추었다.

“어서 와요, 마리 양.”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마리가 교장 선생님을 통해 부탁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가네야마를 따돌리기 위해, 여행 중간에 선교사 부인과 자신의 코트와 모자를 서로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부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아예 여행 전에 같은 양장점에서 나란히 코트를 맞추기도 했다.

“정말, 이 푸른 색은 제가 아니라 부인께 딱 맞춤이네요.”

마리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부인에게 건네며 미소지었다.

“지금 보니 부인의 눈동자 색과 똑같아요. 그래서 이 색으로 고르신 거군요.”

그때 양장점에서, 부인이 맞춘 푸른 코트는 마리가, 마리가 맞춘 검은 코트는 부인이 입고 돌아갔다. 결국은 바꾸어 입을 테니까. 코트의 기장이 마리에게 길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인은 코트를 바꾸어 입고, 마리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패물함을 꺼내 좋은 일에 보태어 쓰라며 금반지 하나를 건넸다. 마리는 그 반지를 품고 제 객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제일 중요한 물건들이 담긴 가방 하나만을 들고 일어났다. 자신의 객실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쩌면 가네야마는 마리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설령 의심하고 일등석 객실로 쳐들어온다 해도, 자신의 짐 가방이 남아있는 이상 바로 도망쳤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열차가 심양역 플랫폼에 도착하기 조금 전, 마리는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마리는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

아직 11월 말이다. 조선이라면 아직 가을이다. 하지만 압록강 너머 북쪽은 이미 겨울이었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 남자는 고작 기모노에 게다 차림이었다. 딱히 가문이 수놓이진 않은 검정 하오리를 한 겹 덧입기는 했지만, 꽤 춥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마리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망칠 수 있겠어요?”

열차가 심양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복도에 사람이라고는 마리와 그 남자 뿐이었다. 달리 그가 말을 걸었을 만한 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리는 못 들은 체 하며 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 왜늙은이가 하는 말이라고 못 알아들은 척 하기는.”

남자는 이번에는 조선 말로 중얼거렸다.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입도 컸다. 서른 살 남짓해 보이는 그 남자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마리의 손에 들린 가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마리의 어깨에 다정스레 손을 얹었다.

“무슨 짓입니까.”

마리는 남자의 손을 밀어내며 매섭게 말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열차를 갈아타려는 거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서성거리던 일본 순사를 피해서요. 그러려면 없던 동행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가씨는 아까 혼자였으니, 일본 순사도 두 사람이 지나가면 유심히 보지 않을 거요. 부부인 척 하고 지나가면 더 눈에 띄지 않을 테고.”

“세상에 할 일이 없어서 왜놈과 부부 행세를...”

“옷을 이렇게 입었다고 다 왜놈인 건 아니지. 무엇보다도 혼자 그 앞을 지나가기에는, 아가씨 옷차림이 좀 유난한 편이잖습니까. 음?”

마리는 얼른 제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검정색 코트라면 눈에 띄지도 않고 수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이 열차에 탄 여성은 많지 않았다. 이런 코트를 입고 일등석에 탄 여성의 숫자는 더 적었다. 그런데다 자신과 선교사 부인의 코트는 같은 양장점에서 맞춘, 같은 형태이기도 했다. 가네야마는 눈썰미가 없지 않았으니, 아무리 창가에 자신이 입고 있던 푸른 코트가 보인다고 해도 의심하고 쫓아올 지 모른다.

그때 기차가 역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기차가 멈추어 서자 마자, 가네야마는 허둥지둥 1등칸 쪽으로 달려왔다. 더는 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마리는 남자의 팔에 팔짱을 끼고, 정말로 부부인 것처럼 가까이 착 달라붙어 열차에서 내렸다. 다행히도 가네야마는 이런 날씨에 게다를 끌고 다니는 사내가 마리와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두 사람을 그저 지나쳐 갔다.

잠시 후, 기차가 다시 출발 신호를 올렸다. 가네야마가 허둥거리며 다시 열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리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자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내 이름은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요.”

“...김마리요.”

“어디까지 가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해까지 갈 생각입니다. 방향이 맞으면 동행이 되어 드릴 수도 있고.”

“....”

“왜, 게다짝 끌고 다니는 일본놈은 믿을 수 없어서?”

“동행이 필요하진 않소.”

“흥, 자기를 뒤쫓는 게 저 어설픈 순사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요. 따라와요.”

아사야마는 마리의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데리고 역에서 벗어났다. 마리는 뿌리치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의 손에 가방이 들려 있고, 그 가방 안에 제 여권이 있으니 마음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잠깐, 이제 여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 운양 대감 댁 손녀인 김마리, 자작가 손녀인 김마리는 이제 없다. 그동안 독립운동을 하는 여성 지사들을 후원하거나 숨겨주고, 좌익 사상을 공부하는 학교 동기나 후배들이 도망칠 때 도움을 주고, 그렇게 깊은 규방 안에서 몸을 숨긴 채 저와 같은 뜻을 지닌 이들을 돕기만 했지만, 이제 마리는 더 이상 혼자 안전한 곳에서 동지들을 돕는 일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제 손으로 하기 위해 마리는 집을 떠난 것이다. 그러니...

“어디 가는 거예요.”

“상관 마시오. 잠시 도와주신 것은 고마우나...”

“이국 땅에서 젊은 여자가 여권도 없이 어쩌려고요. 하다못해 가짜 신분을 만든다고 쳐도, 그때까지는 여권이 필요할 거요. 있는 여권을 팔아서 가짜 여권과 바꿀 수도 있고.”

“...이런 일을 잘 아는군요.”

아사야마는 마리의 가방을 열고 여권이 무사히 있는 것을 보여주더니, 안심하라는 듯 마리에게 다시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마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임시정부로 가려는 거지요? 항주에 있는 백범 선생의 임정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저기서 당신을 놓쳤으니, 이제 저 순사 양반은 어떻게든 항주에 먼저 가서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일단 상해로 가시죠.”

“상해의 임정은 국민당과 함께 항주로 간 걸로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해에는 임시정부 통신처들이 있지요. 안공근 선생이 그쪽에 있소.”

“안공근이라면...”

“이토 통감을 쏘아죽인 그 안중근 열사의 동생입니다. 지금은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을 이끌고 있으니, 그쪽을 통해서 임시정부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설마, 그쪽이 안공근 선생과 안면이 있다는 거요?”

“긴 말은 가면서 하지요. 나쁘지 않은 동행일 겁니다. 아까 선교사 부인께 반지를 받은 것 같던데, 결혼반지인 척 그거라도 끼어요. 누가 물어보면 나와 신혼여행 중인 걸로 해 둡시다.”

 

***

 

아사야마는 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말은 일본사람처럼 잘 했고, 조선말은 조선사람처럼 잘 했다. 그런데다 중국어에도 능통했는데, 고문을 두루 알아 유식하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 저잣거리에서 말싸움을 해서 상대방을 이겨먹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마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디 가서 아사야마 같은 동행을 구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사실 혼자서 집을 떠난 것도 처음이요, 국경을 넘은 것도 처음이라, 마리 혼자서였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상해까지 가는 길에 놓인 난관이, 가네야마를 따돌리는 것 뿐만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신혼여행 중이라고 해도 일등칸은 너무 눈에 띄어요. 상해까지는 이등칸으로 갑시다.”

거친 밀가루 빵을 우물거리며, 아사야마는 마리의 가방을 슬쩍 열어 돈을 세어 보았다. 이제부터의 여비는 전부 마리가 내야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조금 뻔뻔하게 느껴졌지만, 어차피 따로 안내자를 구했더라도 그 비용 정도는 이쪽에서 내는 게 맞다. 다만 마리는, 아사야마가 왜 굳이 상해까지 따라오겠다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역시 돈이 떨어진 모양이구려.”

“음?”

“그러니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상해까지 동행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은근슬쩍 들러붙는 것이겠지. 내 생각에 아사야마 씨는 상해에 꼭 가야 하는데, 소매치기를 당했든가 무슨 이유로 여비가 없어져서, 나를 도와주고 그 김에 상해까지 어떻게 가 보려는 것 같소.”

“음... 그 문제도 있지만 돈만 필요해서 그런다면 굳이 번거롭게 쫓기는 사람을 안내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 지갑만 들고 도망쳐도 되고, 아닌 말로 아가씨는 젊고 아름다우니, 어디 팔아버려도 될 일이고.”

“...”

“그럴 생각 없으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 좀 짓지 말아요.”

“나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있소.”

“세상 물정 모르는 귀한 집 아가씨가, 남다른 의기를 품고 상해에 가려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는 짐작이 가지. 그렇게 상해로 간 이들을 몇 명이나 봤어요. 뭐, 그거면 되었지.”

“되었다고...?”

“뭐, 조선 사람이라고 다들 조선의 독립만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내가 아는 이들 중에는, 어떻게든 내지에서 출세해 보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형씨도 있어요. 그 형씨는 정말 열심히 해서, 만선철도, 그러니까 아가씨가 타고 온 그 열차 말입니다. 그거 운전 견습생까지 되었지요.”

“....”

“그런데 결국 포기했어요. 자기는 죽을 힘을 다 해서 공부하고 일하고 해도 전철수 까지도 올라갈 수가 없는데, 내지 놈들은 순식간에 승진하니까. 심지어는 히라가나도 제대로 못 쓰는 놈 조차도 조선인보다는 빨리 승진하니까, 철도청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그런 말을 했습디다. 하여간 왜놈 좆이어야 뭐가 되어도 된다고요.”

그건 아사야마의 경험담일까. 마리는 입을 다문 채, 술을 홀짝이는 아사야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형씨가 자포자기해서 철도청을 그만뒀을 때, 경성에서는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다 포기한 사람 눈에 그런 게 어디 들어오겠습니까.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다가, 오사카로 건너갔지요. 오사카에서 부지런히 일했는데, 가게 주인이 양자로 삼아 주어서 그때부터 내지인인 양 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고가 있었지요.”

“무슨 사고요.”

“몇 년 전에 천황 폐하 즉위식이 있었지요. 그건 옛 수도인 교토에서 하는데, 오사카에서 교토 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요. 살면서 보기 드문 화려한 구경거리라기에 교토에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불심검문에 딱 걸린 거지요.”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사람인 양 살았다면서, 뭐가 문제였답니까.”

“조선에서 온 편지가 짐에 있었으니까요.”

아사야마는 쓰디쓴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고향에서 온 편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수첩에 끼워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서 불령선인이 감히 천황 폐하의 즉위식에 얼씬거린다며 열흘이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정말 축제 구경이나 하러 갔지, 해 될 만한 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요.”

마리는 아사야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자신이 듣는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쪽이 어렵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대감 댁 손녀라고 강보에 싸인 듯 편안하게 살아온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길 바라는지는 모르겠으나, 출세하고 싶어서 내지인이 되고 싶어 했는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위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소.”

“위로해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아사야마는 웃었다. 그 커다란 입으로 마치 어리석은 아이마냥 헤벌쭉 웃기만 했다.

“나는, 그저 신기해서 그러는 거요. 대갓집 아들이며, 아가씨처럼 곱게 자란 이들이,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며 만주로, 또 상해로 가는 것이. 그렇다고 내가 아가씨를 어디 팔아넘기거나, 왜놈들 밀정들에게 일러바칠 것도 아니고.”

“...그저 서로 필요가 맞은 게지요.”

마리는 아사야마의 말을 끊었다. 그거면 되었다. 아사야마에게는 여비가 필요한 모양이었고, 마리에게는 길 안내가 필요했다. 상해까지 무사히 가는 것도 큰 일이거니와, 또 막상 상해에 도착하면 임시정부의 위치를 찾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럴 것이다. 모두가 알 만한 곳에 드러내어 놓고 모여 있다면, 일본군이 공격해 오는 것도 시간 문제일 테니.

“그렇게 사정을 잘 안다면, 임시정부 쪽과 접촉하는 일도 도와 줄 수 있겠구려.”

“...뭐, 노력해 보지요.”

먹을 것을 다 먹고, 아사야마는 마리를 데리고 우선 헌옷집으로 향했다. 아사야마는 마리의 원피스며 코트며 새로 맞춘 모자까지 전부 팔고, 대신 품이 넉넉한 솜바지에 칙칙한 색깔의 창파오를 입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마과로 갈아입었다. 마리의 여권은 잘 감춰 두게 하고, 어디서 장쩌후이(張澤慧)라는 이름의 신분증을 만들어 왔다.

“딱 봐도 획수부터 많은 게 고상한 이름 같지 않아요? 아가씨는 공부를 한 신여성이니 날품팔이인 척 해 봤자 소용없을 거고. 머리 좋은 걸 잘 살리는 게 좋아요. 중국말도 빨리 배우는 게 좋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벙어리인 척 해도 좋고요. 아, 필담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아사야마는, 마치 이 며칠 사이에 마리에게 대륙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전부 가르치기라도 할 것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심지어는 열차 안에서도 계속 소근거려서, 마리는 이렇게 시끄럽게 조선말과 일본말로 떠들어대는 남자를 누군가 수상히 여겨서 신고라도 하는 게 아닐까 겁이 날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는 꽤나 시끄러웠지만, 마리에게는 좋은 방패막이였다. 그런데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기로는 제법 나쁘지 않은 독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직접 사람들과 말을 하는 대신, 마리에게 표를 사게 하고, 옷을 바꾸게 하고, 음식을 사게 했다. 객점에 들어가 흥정하는 것도, 아사야마는 방법을 일러주기만 했을 뿐, 직접 한 것은 마리였다. 마리는 아사야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였으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을 일들을 직접, 그것도 손짓발짓과 필담으로 해내야 했다.

“...아사야마 씨가 나를 부려먹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오.”

흥정을 하다가 지친 마리가 한 마디 하자, 아사야마는 낄낄 웃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상해에 도착하면 아가씨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왕이면 누가 옆에서 도와줄 때 한 번이라도 더 흥정에 성공해 봐야지요.”

그 말도 틀리진 않아,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느릿한 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마리와 아사야마는 상해로 향했다. 마치 일부러 길을 빙빙 도는 것 같았지만, 아사야마는 혹시라도 일본 순사가 뒤따라오더라도, 중간에 따돌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마리는 열차 안에서 잠시 꾸벅거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경성을 출발한 지 이제 엿새 째였다. 아침이 되면 열차는 상해에 도착할 것이다.

‘아사야마 씨를 만나지 않았으면 진작 붙잡혔을 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았더라도 누가 봐도 돈이 있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동전 한 푼 안 남기고 도둑을 맞았을지도.’

아사야마는 임시정부의 위치도 알고 있을까.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잠든 아사야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창문 밖의 하늘은 어두웠고, 희미한 불빛 아래 아사야마는 유난히 그 존재감이 흐릿해 보였다. 마리는 한숨을 쉬다가, 처음에 경성에서 들고 왔던 가방 대신 들고 다니게 된 보퉁이를 꼭 끌어안았다.

 

***

 

열차가 상해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뜬 뒤였다. 마리는 아사야마와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아사야마가 마리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 했다.

“고개 숙여요. 누가 살피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마리는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투박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니는 습관만은 버리지 못했다.

“이제부터 잘 해야 해요.”

“알겠소.”

“임정까지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조선이 독립될 때 까지. 계속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그냥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렇게 조용히 섞여서 다니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아가씨는 똑똑해서 다른 건 잘 배우는데, 그 고개 꼿꼿이 들고 다니는 것 하나를 못 배우네.”

“.....”

“한인애국단이란, 내지의 주요 요인들을 하나하나 염라대왕께 보내드리는 단체요. 그런 일을 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남의 눈에 안 띄는 겁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죽여야 해요.”

“열차 안에서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자던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소.”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내가 시끄럽게 떠들거나 코를 곤다고 누가 뭐라고 합디까?”

그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사야마는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남자였다. 이렇게 키가 크고, 목소리가 크고, 어디로 보아도 특이한 사람인데도.

“별 일이 없으면 내가, 신천상리에 있는 애국단 본부까지 데려다 줄 거예요. 거기까지가 내 일이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아사야마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마리를 확 끌어안았다. 마치 마리의 얼굴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가 갑자기 마리를 반대편으로 떠밀며 소리쳤다.

“뛰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인력거들과 승용차들이 오가는 상해역 앞 건널목을 따라, 마리는 길도 알지 못하는 이 도시를 가로지르듯 달렸다. 등 뒤에서 가네야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총 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마리는 귀를 막은 채, 달렸다. 아사야마는 괜찮을까. 아사야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겁이 나고 무서워 눈물이 뚝 떨어지려는 것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보퉁이를 끌어안은 채 그저 달렸다. 골목에 접어들자 등 뒤에서 구둣발 울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누군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저쪽이에요! 아니, 이쪽!”

아사야마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혹은 마리의 머릿속에서 바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뒤 돌아보지 말아요. 계속 달려!”

알았소, 알았다고요. 당신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을 보니, 당신도 가네야마를 따돌리고 무사히 빠져나온 모양이지.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도착하면, 선교사 부인께 받은 금반지를 그에게 주어야지. 상해까지 오는 게 목적이라 자신을 이리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진작에 붙잡혀 가네야마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반지를 돈이라 생각하든, 혹은 정표라 생각하든, 그에게 건네준다 하여 아깝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아사야마가 소리쳤다. 마리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뒤쫓아오는 놈들이 들으면 어떡할까, 그런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아사야마가 말하는 대로 달리고 또 달려서, 가네야마의 손에서 벗어나 무사히 애국단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살파새로 188호, 3층이에요! 어서!”

살파새로가 어디 붙어있는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리는 188호라는 작은 팻말이 붙은 낡은 건물을 보고 무작정 뛰어들어갔다. 그곳 3층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선 말이었다. 마리는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문을 열자마자, 마리는 자신이 제대로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벽에는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태극기를 든 남자들의 은판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남자들 가운데, 머리를 짧게 깎고 잿빛 마과를 입은 남자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마리는 조금 전 아사야마가 했던 말을 잊고,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운양 대감의 손녀인 김마리라고 합니다.”

“....”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일하고 싶어, 경성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리는 보퉁이를 풀었다. 아사야마가 잘 갖고 있으라고 했던 여권이며, 마리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잿빛 마과를 입은 안공근이 다가와 여권을 직접 확인하더니, 마리에게 물었다.

“...여기는 임정에서도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안가요.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요.”

“아사야마가...”

“아사야마?”

“아사야마 쇼이치라는 사람이... 안내를...”

마리가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마리의 시선이,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에 머물렀다.

“아사야마...?”

사진 속 남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선서문이 걸려 있었다. 마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 선서문을 읽어보았다.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인 이봉창.”

“아사야마 쇼이치, 혹은 기노시타 쇼조. 지난 1월 천황을 암살하려다 붙잡힌 이봉창일세.”

“그런...”

안공근은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난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오늘로 사십 구 재가 되는구만. 믿기지 않지만, 그가 아가씨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인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아사야마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마음 속의 무언가가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아사야마를, 아니, 이봉창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그는 심양역에 들어서던 열차칸 안에서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 마리를 향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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