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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복 상냥한 마녀

2004.09.25 15:0409.25

  내가 이 석 달 남짓 되는 실습기간에 무얼 해야 하는지 역사학부가 말해주지 않았다. 역사학부는 내게 지금 쓰는 이 일지와 삼촌이 썼다는 편지, 그리고 전쟁전 화폐로 10파운드만 건네주고 나를 화물 부치듯 과거로 보낸 것이다.
  코니 월리스 - 화제 감시원

  1.
  그래 너 잘났다. 네놈이라면 아마도 말이다. 친애하는 아버님의 수제자였다면, 그 책을 수십 번은 삶아 먹고도 남았겠지. 그리고 사서가 내 이름을 물어봤을 때, 내 기분 이 정말 어땠을 것 같아? 빌어먹을 내가 그 책을 빌리려 간 것 자체가 정말 웃긴 일이 아니겠어? 무심코 내 이름을 말해 버렸을때. 그때 녀석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의아해 하며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경멸의 눈빛으로 변하더군. 뭐 그다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어. 단지 좀 불편했을 뿐이지. 그래 알고 있다고 내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최소한 내게 그런 한심한 일이 맡겨 질 때부터 뭔가 라도 짐작했어야 했어. 결국 이런 꼴이 된 거지. 스승이자 아버지의 유고 연구집을 빌리려고 대낮부터 이런 되먹지 못한 사서와 신경전이라니…….
  사서는 내가 잠시 부끄러운 감정에 휩싸였다가 화가 치밀 때까지 천천히도 나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그리곤 그게 끝이야.

  지난주쯤에 학교는 나에게 아무런 미안한 감정도 없이 이 놈의 성가신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1년이 아니라 1년 이상을 다녀야 한다고 담당교수가 말하더군.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하시기도 하시지. 그래서 내가 적어도 졸업을 한달 남겨두고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니라고 했더니 자신도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염병할 학교를 올해에도 졸업할 수 없다는 거야. 이 얘기를 누구에게 처음 했냐면 내 여자친구였다.
  "어머 그래, 너에게 참 좋은 기회가 될 꺼야."
  그녀가 한말은 이거야. 대뜸 그 좋은 기회가 누구의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친애하는 나의 여자친구, 뭐든지 다 좋다고만 하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이 좋은 기회라는 소리를 또 한번 듣게 되었다.
  "자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걸세."
  이번엔 학장이었다. 한번 들어갈 때마다 조금씩 생명이 줄어든다는 학장실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우린 자네가 이번 일에 가장 알맞은 학생이라고 결정했네. 준비해주게 일주일후에 떠날 수 있게."
  면담은 이걸로 끝이었다. 난데없이 마녀를 판별해 달라니? 갑자기 네 주위에 모든 인간들이 악마로 보였다. 이것은 전부 존경에 마지않는 아버님의 유산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유일하게 물려준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러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마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거짓말을 둘러대진 않았겠지. 그건 최악이야."
  그녀는 의외로 사태를 잘 파악하는 듯 했다.
  "맞아, 난 마녀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어. 마녀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일이지 내 일이 아냐. 왜 사람들은 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그녀는 학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학장이 나에게 한말은 겨우 이런 거였다.
  "겸손할거 없네……."

  그 뒤에는 상상할 필요도 없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아버지의 유고저서(그것은 악마 연구론 이었다.)를 빌리려 사서랑 신경전을 한바탕 했고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내게 남겨진 것은 학교 측에서 나온 몇 푼의 착수금, 그리고 절망밖엔 없었다. 그나마 그 몇 푼의 돈도 마녀에 관한 책들을 사는데 거의 써 버렸다.
  난 학장이 손을 흔들며 ‘자 떠나게 자네는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걸세’하고 나를 그 산골 촌구석으로 보내기 전에 남은 시간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빌어먹을 마녀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아버지의 책은 전혀 도움이 안됐다. 염병할 사서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키거나 잠잘 때 베개로 쓰기엔 적합했지만 너무나 어려운 말들뿐이었다. 다른 책들도 뻔할 뿐이었다. 온통 순진한 아가씨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마녀로 몰아 세워서 그녀들의 옷이라도 베끼려는 수작을 친절히도 설명해 놓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떠났다. 학장은 손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대충 예상했던 말들을 늘어 놓았고 조금은 긴장된 모습으로 단정한 복장에 가방하나를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여자친구는 졸업식 때 보자며 작별 키스를 하고 손수 싸준 도시락을 책들 때문에 들어갈 때도 없는 가방 안에 힘겹게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전쟁터에라도 끌려가는 듯한 꿀꿀한 기분으로 걸어가야 했다.

  마을이 정말 가깝다는 학장의 발언은 사기였다. 물론 지도상으로 볼 때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럴싸한 험한 산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가방은 무겁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맨 처음 학장을 저주하고 빌어먹을 담당교수를 저주했다. 그때 사서를 한방 먹이고 올 것을 하고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고생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전부 알량한 졸업 때문이다. 이번 일을 잘 해결한다는 조건으로 학장은 나의 영광스런 졸업을 약속했다. 그러나 산 중턱쯤 다다랐을 때 상황은 달랐다. 차라리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었다. 나는 학장이 요구한 이번 일이 마녀 판별이 아닌 이 빌어먹을 산 넘기가 아닐까? 하는 환각에 빠져서 기를 쓰고 올라갔다.

  산꼭대기는 내 상상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조그만 호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정표 하나만 달랑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조그만 가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정표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로케마을에 가는 길이라면 이곳에서 쉬고 가십시오.'
  이런! 젠장 도대체 어디서 쉬라는 거야? 바위 밑에서? 나무아래서? 결국 이름도 알 수 없는 큰 나무아래 가방을 내려놓고 쉬기로 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점점 쌀쌀해졌다. 불을 피우려고 제법 훌륭하게도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모았건만 불을 피우는 방법을 몰랐다.  결국 나뭇가지들은 멋진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는 여자친구가 싸준 빵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내게 당장 필요한 건 불을 피우는 요령이지 마녀에 대한 게 아니잖아. 가방에 잔뜩 들어있는 책들을 보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한밤이 되었을 때 난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았다. 엿 같은 책 같으니라고 책 살 돈으로 담요를 샀으면 수십 장은 샀을 텐데…….
  밤새 나뭇잎과 땅바닥을 꼭 껴안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신경질이 나서 아침에는 책들을 모조리 호수에 집어 처넣었다. 볼쌍 사납고 성가신 제기랄 책들 같으니! 물론 아버지의 책은 솔직히 베개로써의 유용성을 인정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곤 훨씬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내 꼴은 정말 가관이었다. 머리는 온통 쭈빗 섰고 옷은 더러웠으며 밤새 잠을 설쳐서 눈은 충혈 되고 얼굴은 반쪽이 되어있었다. 한마디로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마을은 예상했던 대로 조그마한 촌구석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다가 한 녀석에 말을 붙이려고 다가섰다. 생긴 건 꼭 범죄형같이 생겨서 입구에 서서 날 째려보던 놈인데. 마법사인지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그것은 마법사의 지팡이보다는 언제라도 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 흉악무도한 건달의 몽둥이 같았다. 나는 마법사들이 왜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지 의아해졌다. 하긴 이런 촌구석이니 아직도 옛날의 인습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내가 접근해서 말을 붙이려고 했는데.  녀석이 대뜸 한대 치겠다는 표정으로 뭐라고 나에게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처음 그 말이 "당신은 마녀를 사랑합니까?"란 소리로 들렸다. 마녀를 사랑 하냐고? 나는 생각에 잠겨서 녀석의 말을 되뇌어봤다. 녀석은 계속 한대 치겠다는 표정으로 지팡이를 병적으로 꼭 부둥켜 안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작자의 말은 ‘당신은 마녀 사냥꾼입니까?’인 듯했다. 하도 딱딱하게 말을 해서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어째든 난 마녀 사냥꾼은 아니니깐.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자 그 작자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나를 두고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정말로 자상하시기도 하지! 어찌 되었던 난 저 작자를 찾아야만 했다. 저 작자는 나를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녀석, 난 숨이 차서 머리가 빙그르 돌 때까지 열심히도 뛰어서 녀석을 찾았다.
  "이봐요.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마녀 사냥꾼이 아니라고 했잖소?"
  녀석은 여전히 한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동네 말투는 모두 시비조인가보다.
  "마녀 사냥꾼은 아니지만 마녀를 판별하러 보내졌습니다."
  "그럼 당신이 길리엄 이슈님입니까?"
  그렇다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이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작자는 나에게 따라오라며 중얼거린 후. 그리 크지 않은 저택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 작자는 날 끌고 가는 내내 무엇이라 중얼거렸지만 내가 알아들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가자 말쑥해 보이는 한 사내가 내 쪽으로 걸어 왔다. 매우 단정한 복장이었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걸 보면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얼굴엔 잔주름조차도 없었다. 마치 청년 같은 느낌을 풍기는 이상한 사내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마중 나갔어야 하는데……. 많이 피곤하시지요?"
  그 사내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는 정체불명의 뜨거운 차 한 잔을 대접했다.
  "첨 뵙겠습니다. 저는……."
  "이슈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리메르라고 합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 자와 얘기하다보면 뭔지 불편함을 느꼈다. 너무 예의를 차린다고나 할까? 물론 저기 지팡이를 병적으로 부둥켜안고 아직까지 뭐가 불만인지 나를 지속적으로 째려보고 있는 녀석보다는 백배는 나아 보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아이는 저의 제자입니다."
  리메르는 그 지팡이를 가리켜 말했다. 그러자 그자는 또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카블 즈어라고 합니다."
  처음 그 말이 그자가 나에게 "까불면 (너) 죽어"라고 협박하는 줄 알았다. 이 작자는 정말로 언어의 사교적 이용법 따위나 세상을 더불어 잘 어울려 사는 법 따위를 좀 더 배워야 할 것만 같다.
  "먼저 제가 판별해야 하는 마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나는 조금은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녀는 저의 딸입니다."
  네, 이해합니다. 리메르님 아버지는 언제나 힘든 직업이죠. 가끔씩 자식들이 악마처럼 보일 때도 있죠. 이해합니다. 처음에 모든게 농담인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이렇게 이슈님께 폐를 끼치고 있지요."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되자 모든게 내가 받아 드려야할 사실이란 걸 알았다. 그럼 난 현자의 딸을 보러왔군. 그리고 모든 것이 쉽지만 않다는 걸 깨달았다.
  "따님을 볼 수 있을까요?"
  리메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딸애는 한 달 전에 자살을 했습니다."
  이쯤 되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영광스런 졸업은 물 건너갔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그 망할 학교를 새파란 애송이들과 함께 다녀야함은 물론이고 이 절망을 부둥켜안고 그 젠장맞을 산을 넘어야 했다. 물론 그 지랄 같은 호수에서 모든 것을 저주하며 땅바닥을 꼭 껴안고 잠을 청해야 하는 것도 상기했다. 갈 때 말이나 잘해서 담요라도 한 장 얻어야겠다.
  "그렇다면 저는 할 일이 없군요. 죽은 자의 영혼은 저의 영역밖에 일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영광스런 졸업은 아직 물  건너가진 않았다. 그는 넋두리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죄송하게도 딸애의 시체는 제가 화장을 했습니다. 그대로 둘 수가 없었지요. 결국 이슈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경솔했지요."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인 개념인데. 그런 죽은 자의 영혼에 마녀인가 아닌가는 부질없는 일이지 않는가.
  "이거 죄송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차리겠습니다."
  리메르는 우울한 표정을 말끔히 지우고 다시금 환한 미소를 띄웠다. 저기 몽둥이 같은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시시각각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뭐 씹은 표정으로 멀뚱거리는 산적 같은 그의 제자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이 자식은 저녁식사 내내 그 몽둥이형 지팡이를 병적으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제법 많은 것을 알았다. 물론 리메르의 부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것.  작은딸은 언니가 죽고부터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죽은 언니의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려고 한다는 것과 마을은 겨울부터 봄까지 많은 비가 내렸고 이것이 마을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마녀의 재앙쯤으로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성직자라고 하는 녀석이 한번 다녀갔는데 확실히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카블 즈어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악마의 존재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도 하다. 녀석은 나와 리메르가 조금은 심각한 얘기를 늘어놓자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만약 학장이 말한 악마가 이 녀석이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녀석을 일약 악마로 추켜세운 후 나는 지금쯤 학교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영광스런 졸업을 기다리며 여자친구와 졸업여행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그리고 리메르는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책을 내 앞으로 내 놓았다.
  "이것은 죽은 큰딸의 일기장입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악마와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보관하고 있었지요. 저는 딸애의 일기장을 읽을 수 없으니 이슈님께 드리겠습니다."
  엉겁결에 그 일기장을 받았지만 남의 일기를 받는 것은 얼마나 부담스런 일인가? 모든 일이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일기장을 뒤척이며 읽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읽어볼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빠른 걸음으로 리메르는 문밖에서 방문자를 맞아들였다. 리메르와 같이 들어온 자는 매우 계집애 같은 사내였다. 삐쩍 마른 몸은 말쑥한 예복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구리에 큰 책을 끼고 있는 것을 보니 성직자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예비형 매부리코-곧 매부리코가 될 듯한-에 실눈을 보고 있자니 전혀 신을 모시는 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새 비가 내리는지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일요일마다 찾아와 옆구리에 낀 책을 펼쳐 보이며 신이 말씀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신전에 한번 가보 자며 성가시게 굴 그런 스타일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 가장 험악한 인상을 쓰며 있었다. 내가 성직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가르침이 사랑과 믿음이면서도 실천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 그 실천은 너무나 특수한 경우뿐이란 것이다. 그 자의 인상을 본다면 차라리 내 인상이 더 선량해 보였다.
  리메르는 그를 데려와 탁자에 앉히고는 그를 소개한 후 나를 소개했다. 나의 이름을 듣자 그는 매우 놀란 눈치였다. 처음에 지우지 못한 경계와 경멸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당신이 쓴 책을 읽었습니다. 매우 훌륭했지요. 저희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 아니 돌아가신 스승님의 책입니다. 제가 아니고……."
  제기랄!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는 나를 지겹게도 쫓아다닌다. 하지만 이 작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시끄럽게 수다를 떨면서 그리고는 나에게 몇 가지 뻔한 질문까지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리메르는 딸이 나를 만날 수 있는지를 보려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직자는 절호의 기회란 표정으로 몸을 나에게 바짝 기대더니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학원에서 보기보다 상황판단을 빨리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학장이 상황판단을 조금만 빨리 했어도 나의 가방에 성냥과 담요정도는 준비할 여유를 주었을 것이다. 난 이 자의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
  "나쁜 것은 초기에 화근을 없애는 것이 안전하죠. 제가 판단하곤 데 마녀가 틀림없어요. 물론 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그는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빨리 해결하려면 자백을 얻는 편이 빠르지요.  방법을 알려드릴 수 도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수도 있지요. 아무리 악마와 계약을 했다 해도 마녀는 16살의 계집아이에 불과하죠. 쉽게 자백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상당히 불쾌했다. 이자는 16살 계집아이를 언제든지 구워 삶을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는 말 같았다.
  "모든 것은 마법학원 내부의 일입니다. 당신의 말은 이른 감이 있는 것이 아닐지요?"
  나는 잠시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굳어지는걸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언은 감사하지만. 이만 손을 떼 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것이 학원과 관련된 일이지요."
  "흥, 그렇군요. 하지만 재앙은 모두의 문제지요. 이번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저희도 신을 모시는 입장으로 구경만 할 순 없지요."
  "문제 따윈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오해를 풀려고 온 것입니다."
  여기서 마법학원과 신전의 케케묵은 싸움을 상기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저는 마녀 따위는 모릅니다. 전 여자친구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빌어먹을 학장이 졸업 운운하면서 저를 이 산골 촌구석으로 밀어 처넣은 거지요.'
  오해를 푼다고?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문제는 내가 이 산골에 오기 위해 가방을 메고 여자친구에게 작별키스를 할 때부터였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어느새 왔는지 리메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 작자가 먼저 천연덕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닙니다. 다만 의견을 나누고 있었지요. 이제 이슈님 같은 마법사님이 오셨으니 저는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하죠.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이 작자의 말은 ‘절대로 손을 못 뗀다. 이 애송아.’하는 소리보다 더 끔찍한 말들이었다. 내 생각엔 이 자는 성직자보다는 서사극 따위를 공연하는 배우를 하는 것이 장래성이 더 촉망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 작자는 가식적인 웃음으로 우리를 쳐다본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리메르는 당연히 그를 따라 문까지 배웅하는 정말로 초인적인 친절함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곤 그는 잠시 동안 문밖에서서 서로 얘기를 나누더니 비 오는 밤길로 사라져 버렸다.
  "제가 괜한 손님을 불러서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나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죠. 그 보다 따님을 볼 수 있을까요?"
  리메르의 걱정스런 말에 나는 제법 상냥하게 대답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딸애는 지금 잠을 자고 있답니다."
  리메르는 나를 데리고 이층까지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2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중 한 방의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딸애는 의자에서 자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깨우시지 않는 것이……."
  "알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보기만 하죠. 그런데 따님 이름이……?"
  "라트리 프리 리메르입니다. 그냥 라트리라고 부르십시오."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메르가 '자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할 때 무릎이라도 꿇고는 ‘제발 같이 들어가 주세요. 전 무서워요.’하며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안감과 공포가 나를 집어 삼켰다. 마녀란 것 정말 어떻게 생겼을까? 의자가 눈에 띠었다. 창가에 커튼이 처져있고 그 앞의 의자에 조그만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첫 인상은 계집아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매우 짧았다. 다듬지 않았는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장난꾸러기 사내아이 같았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순한 소녀의 표정을 담고 있었다. 뒤로 젖혀진 목이 가냘프고 턱 선이 예쁜걸 보아서 소녀가 틀림없었다.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학장과 리메르가 말한 마녀가 어디 딴 곳에 있을 것이 아닐까 하고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그리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 때문에 나는 얼마나 고심했던가! 소녀는 누구보다도 평범하게 보였다. 조심스럽게 라트리를 안아 침대에 누였다. 여전히 라트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곤 밖으로 나왔다.
  "매우 깊이 자는군요. 내일 다시 보겠습니다."
  "딸애는 괜찮을까요?"
  리메르에 질문은 마치 라트리가 마녀인지를 묻는 말 같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킬 말을 몇 마디 해주었다. 그리고는 그는 나를 복도 끝에 있는 마지막 방으로 인도했다. 모든 것이 상상한 것보다 더 엉망이 되었다. 사악할 때로 이를 때 없는 학장은 나를 잘도 함정으로 집어 쳐 넣었다. 내가 원한 것은 마녀 판별이었고 그리고 졸업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맡긴 것은 한 소녀의 죽음 그리고 한 소녀의 미래, 지리하고 케케묵은 성당과 학원의 긴 싸움, 그리고 동시에 나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들과 두려움들이었다.
  저주받을 학장 같으니라고…….

          
  2.
  사방이 어두웠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걸어야만 했다.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답답함을 느꼈고 갈증과 더위와 싸워야했다. 올라감은 끝이 없다.
  "이 봐 자네 뭔가 알아냈나?"
  등 뒤에서 사악한 학장의 음성이 들렸다.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등뒤에 서 있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네, 여길 보십시오. 이곳에서 필요한 건 절대 이런 책들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학장처럼 대했다. 학장의 목소리를 지닌 아버지에게 가방에 있던 책들을 땅바닥에 쏟아내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고작 성냥과 담요뿐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밤이 깊어 가면 자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성냥이나 담요 따위가 아니란 걸 깨닫을 걸세. 자네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인간의 마음이야."
  "하지만 학장님!"
  다시 산을 올라갔다. 아버지를 외면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올라갔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고성능 폭약입니다. 저는 이 산을 몽땅 날려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축복 받은 평탄한 길을 가고 싶을 뿐입니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학장처럼 대한 아버지는 더 이상 없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올라갔다. 더위는 조금씩 물러나고 한밤의 추위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갈증은 점점 심했다.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은 한 잔의 물이었다.
  눈을 뜨고 나니깐 창밖에서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른 창문을 닫고 갈증이 생긴 나는 물을 찾으려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놀라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너는 누구냐?"
  이 목소리는? 친애하는 카블 즈어였다.
  "즈어씨,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거죠?"
  가까이 다가가자 여전히 이 녀석은 몽둥이를 가장한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충혈된 두 눈을 번뜩이며 서있었다. 잠시 즈어는 어색하게 머뭇거리더니 대뜸 자신은 뭘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뭘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작은 따님을 지키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왜 이 작자가 밤새 충혈 된 두 눈을 번뜩이며 몽둥이 같은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라트리를 무엇으로부터 지키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에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마녀의 집회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뒤에 책에서 본적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즈어씨, 당신은 결국 헛고생을 하는군요. 라트리가 진짜 마녀라면 그녀는 조그만 속임수로도 당신 몰래 집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마녀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기 분신을 만든 다죠.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질 겁니다. 만약 라트리가 마녀가 아니라면 그녀가 복도로 나오는 일은 저처럼 목이 말라서 물을 찾기 위해서겠죠."
  나는 일주일 동안 읽은 마녀에 관한 책의 유용성을 조금은 찾았다. 그러나 나의 박식한 언변에 즈어가 한 대답이란 곤…….
  "창문을 열어두고 자지 마십시오. 이 마을의 바람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죠."
  계단을 내려오면서 엉뚱한 즈어의 충고는 뭔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밤새도록……. 그것도 즈어, 이 작자는 언제부터 이런 멍청한 날밤 새우기를 했을까? 죽은 라트리의 언니를 감안한다면 적어도 몇 개월은 저런 토끼 눈으로 무거운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있었겠지. 그러니 제 정신이 아니지. 생각해보니 적어도 이 녀석에게 진정한 악마라고 하긴 어렵게 되었다. 악마적 교활함, 녀석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상쾌한 마음으로 라트리를 만났다. 솔직히 말한다면 라트리가 나의 한쪽다리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전 마녀가 아니에요. 라고 애원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손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상기시켜주었다.
  "으아아악……."
  내 비명 소리에 라트리는 후다닥 침대 쪽으로 숨어버렸다. 팔은 금세 퉁퉁 부었고 피까지 뚝뚝 떨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문밖에서 리메르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십시오."
  이런 헛소리를 쥐어짜기 위해 나는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며 방안을 팔짝 팔짝 뛰어 다녔다. 눈물이 찔끔 나온 것에 비해서 라트리는 펑펑 울고 있었다. 계집애! 지가 왜 울어? 그러면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일까? 마녀라고 지목 받고 있는 꼬마 아가씨와 인간적인 대화였을까? 아니면 영광스런 졸업을 위해 이 못된 꼬마를 화형장으로 보내야 될까? 하기야 여자애가 손톱을 기른 후 남자를 할퀴고 꼬집는 일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다.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정말로 어려움에 처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시간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다. 한 달도 채 안 남은 시간 안에 이 소녀를 화형장으로 보내거나 아님 그 바보 성직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라트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옷을 모조리 벗긴 후 온몸 구석구석 살피는 척 하면서 적당한 것을 지목한 후 악마의 표식이라고 마구 우기거나 온몸을 바늘로 쿡쿡 찌르거나 물속에 집어 처넣고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그녀는 마녀였군요. 유감입니다. 리메르님'이라고 능청을 떠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그러나 내가 한일은 고작 방구석에 조그만 책꽂이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서 라트리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라트리의 저 곱지 못한 시선은 그러니깐 그녀는 내 여자친구가 딱 한번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다가 발각된 후. 나에게 주었던 시선과 비슷한 눈매였다. 그녀는 나를 한번 쳐다본 후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 발이 무슨 바퀴벌레인양 쳐다보았다.
  언젠가 여자 친구가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퀴벌레였다.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오랫동안 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가기도 겁났는지……. 그 바퀴벌레가 조금만 꼼지락거려도 언제든지 비명을 지르며 온 방안을 팔짝 팔짝 뛰어다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바퀴벌레가 죽었는데도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슬리퍼짝을 가지고 책장이며 침대며 바닥을 온통 치면서 돌아다녀야 했다.
  마치 라트리는 그런 식으로 나를 경계했다. 내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언제라도 처절하게 울 준비가 되었다며 훌쩍거리며 조그맣게 울고 있었다. 내 졸업을 가로막는 것은 담당교수와 학장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이 16살 먹은 소녀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라트리와 나, 모두 깜짝 놀랐다.
  "이슈님, 식사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십시오."
  즈어였다.
  "즈어씨, 죄송합니다만 식사는 여기 라트리와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건……. "
  문밖에서 즈어가 어떤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내 발만 쳐다보던 라트리가 잠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눈을 맞추자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즈어는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러시겠다면 스승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그리곤 어색했던 시간이 나와 라트리 사이에 흘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즈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음식을 가져 와서 중앙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라트리는 두려운 듯 침대시트를 꼭 움켜지고 몸을 움츠렸다.
  "상처가 났군요. 조심하십시오."
  이 작자의 표정을 보면 전혀 위로가 안됐다. 갑자기 상처가 더 쑤시기 시작했다. 라트리는 예상대로 음식 따위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직 나의 발에서 눈을 띠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겨우 이런 것이다. 조금은 무식한 방법이지만 이 조그만 16살 짜리 계집애와 나는 이제 기나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이제 라트리는 울음은 흐느낌이 되었다. 여전히 나와는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고집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저녁 식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잠잘 때도 나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다. 뭐 맨 바닥에서 자거나 이 딱딱한 의자에서 자야겠지만…….

  알 수 없는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제기랄, 또 산이군. 내가 학장을 시작으로 온갖 사악한 무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검고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라트리!"
  하지만 그녀는 라트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얼굴은 라트리였지만 몸은 16살 소녀보다 더 풍만했다. 짧은 머리도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게다가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었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해줄래요?"
  내가 원하는 것은 영광스런 졸업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내게 필요한 건 성냥과 담요뿐이었어."
  "아니에요. 그건……."
  라트리는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을 달래는 약이에요."
  그리고는 라트리는 뒤로 물러났다.
  "저를 갖고 싶나요? 말해 봐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죠."
  라트리의 옆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당신이 선택하세요. 언니와 나, 누구를 선택하시겠어요."
  라트리의 언니라는 그림자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라트리가 또 한번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언니는……. 젠장,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라트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너에게 좋은 기회가 될 꺼야. 이슈!"
  이건 최악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난 미친 듯이 그곳을 빠져 나왔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마녀들 같았다. 미친 듯이 뛰어가다가 누군가와 쿵하고 부딪혔다. 카블 즈어였다. 녀석은 여전히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난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은 그녀들이 마녀의 집회에 가는 것을 막아야 했어!"
  나는 버럭 소릴 질렀다.
  "그럴리가요. 이슈님, 그녀는 목이 타서 물을 마시려 간다고 했는걸요. 그래서 제가 믿을 수 없다고 했더니 마녀라면 간단하게 저를 속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자기 분신을 만들어 놓고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마녀의 집회 따윈 잊어버리세요. 창문을 열어 노셨나요? 창문을 꼭 닫으셔요. 이 마을의 바람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한기가 느껴졌고 눈을 떴다. 찬바람이 창문밖에서 넘나들었다. 커튼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얼른 창문을 닫았다. 라트리는 지쳐서 맨바닥에 쪼그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다행히 마녀의 집회에 가지 않았군. 골 때리게 웃긴 말이군! 자기 분신을 만든다고 그리곤 연기처럼 사라진다니……. 상상력도 기발하군. 갈증이 생긴 나는 복도로 나갔다. 즈어는 더 이상 없었다. 내 충고를 받아드리고 행복한 꿈을 꾸면서 지팡이 대신 침대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물 한잔을 마시고 올라와서 나는 라트리를 침대에 똑바로 뉘였다. 그리고 자상하시게도 담요도 덮어 주었다. 그 후 나의 포근하고 안락한 잠자리인 젠장할 맨바닥으로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누웠다. 빌어먹을 담요 한 장 없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는 나로선 참기 힘들었다. 이것은 첫 번째 고비였다. 라트리는 그런 것쯤은 우스운지 여전히 음식에는 눈길 한번 안 주었다. 독한 계집애 같으니…….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 하고는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오후에 즈어는 점심을 가지고 들어왔다.
  "스승님이 많이 걱정하십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올려다봤더니 즈어는 여전히 지팡이를 가장한 몽둥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말을 듣자 녀석은 아주 잠깐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트리는 전에도 굶은 적이 있지요. 저 아이는……."
  그 뒤에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진정한 프로가 틀림없었다. 아니라면 이런 불쌍한 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도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정말 마녀일지도 모른다. 즈어는 뭔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다가 식사를 테이블에 놓고 나가 버렸다. 정말로 무인도에 라트리와 단둘이 떨어진다면 며칠 굶어보다가 내가 먼저 그녀를 잡아먹어 버릴 것 같은 망상에 빠졌다. 그래! 내가 먼저 그녀를 구워먹겠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여자가 남자보다 굶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라트리는 얼마든지 굶은 후 내가 아사 당하면 그 후 느긋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한 계집애 같으니! 저녁때 즈어가 식사를 들고 와서는 또다시 측은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내가 원한 것은 즈어가 이제 그만 굶으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이 악마니 더 이상 미련한 짓 그만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녀석은 정말 악마 같은 놈이 아닐 수 없다.
  "주무실 때 창문을 열어 놓지 마십시오."
  녀석이 한말은 겨우 이런 말이었다. 아마 녀석이 '자 이제 그만 고생하시고 몸을 돌보셔야죠.'같은 혹은 이런 비슷한말만 했어도 당장 이 미친 짓을 그만두고 녀석의 몽둥이형 지팡이라도 아작 아작 씹어 먹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냥 나가버렸다. 게다가 담요 한 장도 안 줬다. 갑자기 이 녀석의 악마적인 이 같은 행위를 고발하고 빠른 시일 안에 화형장으로 보낸 후 녀석을 구워서 라트리와 리메르, 학장, 담당교수, 여자친구를 불러서 만찬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트리는 피곤한 듯 일찍 요염한 자태로 바닥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라트리가 잠자는 사이에 몰래 빵 하나를 슬쩍해서 먹을까 하는 비열한 생각도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역시…….
  나도 잠을 청했다. 그리고 늦은 밤에 나는 어김없이 깨어났다.  창문이 열려져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썩을 자식이 자꾸 창문을 여는 건지 매우 의아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바닥에 한대 얻어맞아 기절한 듯한 포즈로 잠을 자는 라트리를 안아 침대에 뉘였다. 이 아이는 잠잘 땐 완전히 천사 같다. 숨소리조차도 잘 들리지 않아 마치 시체 마냥 잠을 잘도 자는 마녀라니……. 혹시나 죽은 것이 아닐까? 그녀의 가슴에 귀를 살짝 갖다 대었다. 조그맣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만져 보았다. 이 아이는 며칠까지 굶을 수 있을까? 그러다 결국 죽어버리면 어쩌지……. 하지만 잠자는 모습은 평범한 아이 같았다. 게다가 그녀가 마녀든 요정이든 간에 자신이 흘린 눈물만 먹고도 며칠씩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밤은 담요가 필요 없었다. 비가 올 모양인지 공기가 따뜻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부터 들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심난하게 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침식사는 마찬가지였다. 라트리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즈어가 들어와서 한마디씩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이 녀석은 이 세계가 종말 한다 해도 반듯이 살아남을 궁극적이고 진정한 악마가 틀림없다. 라트리는 이에 비하면 오히려 천사이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라트리는 절대 마음을 열지 않았다.
  굶주림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종일 굶주림과 싸우다가 잠이 들면 새벽마다 어김없이 깨어났다. 빌어먹을 창문이 매일 같이 열려 있었다. 그날이 그날 같아서 날짜 감각도 잊어 버렸다. 5일 아님 6일쯤 지났을까? 꼼짝없이 방안에 틀어박혀서 라트리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물론 라트리는 바닥에 거의 쓰려져서 의식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라트리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대로 죽는다면 마녀를 굶겨 죽인 독한 마법사란 소릴 들일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또 언젠가 누구든 찾아와서 자기 마을에 독한 마녀가 살고 있다며 그녀를 굶겨 죽여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내려가서 즈어의 방망이형 지팡이라도 뺏어서 구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  라트리가 조심스럽게 내 쪽을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트리의 시선은 흐릿했다. 여전히 경계와 두려움이 서려 있었지만 왠지 처음하고는 다른 눈빛이었다. 동요가 일어나는 걸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힘든 몸짓으로 조심씩 조금씩 중앙의 탁자 앞으로 기어왔다. 서둘지는 않았다. 탁자 위에는 친애 하는 즈어가 가져온 빵과 꿀, 스프가 놓여 있었다. 라트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또 느릿하게 목표까지 기어갔다. 이윽고 라트리는 조그마한 손으로 빵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나를 한번 쳐다봤다. 물론 나는 꼼짝 않고 있었다. 벽이 내 애인인양 바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라트리는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똑같은 몸짓으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래 먹어라! 라트리!!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라트리는 먹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금세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라트리! 뭘 원하는 거야? 뭘 하길 바라지? 내 자신에게 물었다. 어쩌면 라트리는 내가 빵을 먹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주 잠시 내 행동에 놀라서 몸을 움츠렸지만 울거나 숨지 않고 나를 계속 지켜봤다. 대단한 발전이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바닥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힙겹게 나는 빵을 집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라트리를 보고 살짝 웃었다. 그러자 라트리는 내 눈을 피했다.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지만 여전히 라트리는 먹지 않았다. 무엇이 문젠지 알 수 없었다. 라트리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마치 눈을 통해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라트리, 이제 먹어! 그녀는 나에게 여전히 무엇을 요구했다. 이제야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았다.
  그녀의 눈망울과 얼굴표정이 언어가 되었다. 딱딱한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이처럼 맛있는 빵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자 라트리는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나에게서 돌렸다. 그녀는 이제 내가 방안에 있다는 걸 받아 드렸다. 라트리는 조그마한 입으로 빵을 한입 물었다. 라트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굶고 있는 것을 안쓰러워했을까? 내가 먼저 빵을 먹기를 요구했던 그녀의 눈빛은 적어도 마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리메르에 어떤 식으로라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리메르는 몇 번씩이나 몸은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어째든 나는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매우 놀란 눈치였다. 도대체 즈어 이 녀석은 뭘 보고 다니는 걸까? '스승님, 도시에서 온 얼뜨기가 속이 안 좋은지 식사를 안 하는데요. 다이어트를 하나봅니다. 헤헤' 겨우 이런 말 정도나 했을까? 정말 악마 같은 녀석 같으니……. 그리곤 라트리가 마녀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선급한말일지도 모르지만 리메르의 얼굴에는 기쁨과 걱정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녀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은 어쩌면 아버지인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문제되는 것은 라트리가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침묵은 악마의 계약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지만 어째서 딸애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리메르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째서 말을 잃어버린 것일까? 결국 라트리가 진짜 마녀인가 아닌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소녀가 마녀이다. 이것은 그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연관되어 있었다.
  "앞으로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지요."  
  내가 리메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3.
  스스로 외로웠던 것을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외톨이였다. 아버지는 나 따위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악마 연구에만 매달리셨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우는 방법을 몰랐다. 나에게 남겨 진 것은 외로움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어렸다.
  낯익은 풍경들,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나를 감쌌다. 달리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곤 무언가에 걸려서 바닥에 넘어졌다. 눈을 떠보니 나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다.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났다. 쓰라리고 아팠다.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꾹 참았다.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건네 줄 때까지……. 올려다보았다. 여자아이였다. 누구였을까?
  "꼬마야. 왜 울지 않니?"
  그녀는 나를 아이처럼 대했다. 누나인양 목소리조차 부드러웠다.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감정들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나는 울지 않아!"
  생각과는 틀리게 내목소리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음성이었다. 존재를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건넨 손을 잡지는 않았다.
  "울고 싶으면 울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나와 맞추었다. 나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꼭 안았다.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엄마품 같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멈출 수가 없었다. 비로소 나는 아이가 되었다. 누나인양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누구도 상처를 건들지 말았으면 해.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선 해서는 안되는
  일. 하지만 나도 슬픈걸. 아프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해."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로 떨어졌다. 내 눈앞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그 미소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조금씩 모든 것들이 현실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소리였다. 다시 희미 해졌다. 그녀의 입 모양만 보이더니 결국에 가서는 그녀도 주위풍경, 느껴지던 바람과 공기와 냄새들도 차례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흐릿한 느낌으로만 남았다. 포근함은 놓치기 싫을 정도였다. 꿈속에서 나를 포근하게 안아준 소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마지막 모습까지……. 마루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무엇인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담요였다. 얇은 담요 한 장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누구지? 즈어가 했다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됐다. 그럼 리메르였을까? 하지만 리메르는 이방에 들어온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일까? 마치 꿈속에서 넘어진 나에게 손을 내밀고 포근하게 안아 주었던 이름 모를 소녀의 따뜻함이 여전히 계속되는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이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침대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는 라트리, 그것은 라트리의 담요였다. 나는 말로 설명 못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라트리를 똑바로 눕히고 그녀의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바닥으로 돌아와 다시 누웠다. 하지만 여전히 따뜻함이 느껴졌다.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담요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제멋대로 엉키는 온갖 감정들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이면 고맙다고 라트리의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식사 때 조심스럽게 라트리의 곁에 접근했다. 조금은 걱정했지만 예상대로 라트리는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소곳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라트리가 힐끔 쳐다봤다.
  "어제 밤엔 고마웠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트리는 내 말에 얼굴을 붉혔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조그맣게 미소를 보였다.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이슈야. 길리엄 k. 이슈, 만나서 반갑다. 꼬마 아가씨."
  그리곤 손을 내밀었다. 어제 꿈속에 소녀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라트리는 한참을 내손을 쳐다보더니 어색한 몸짓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먼저 손을 내민 건 라트리였지 내가 아니었다.

  
  4.
  "일기장에게!
  어쩌면 너에게 하는 마지막 이야기일지도 몰라. 이제 어떠한 식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아. 어떻게 되건 전부 나의 의지 이었으면 정말 좋겠어. 그리고 잘한 일이구나라고 여겨지면 좋겠어. 또 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오늘 아침에 무심코 창밖을 봤어. 이제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어. 조금은 쌀쌀했지만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졌어. 이제 곧 봄이 찾아 올꺼야. 벌써 파란 새싹이 군데군데 돋아나 있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로…….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어. 어째서 일까?
  한때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너무나 가혹한 불행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만약에 신이 있다면 말야.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한발씩 한발씩 그분의 곁에 다가설 수 있게 하시는지도 몰라. 나를 비난할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떠난 다면……. 하지만 이제 나도 많이 지쳤어. 그리고 두렵지 않아.
  만약에 행복하게 떠날 수 있다면 남아있는 자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 날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 나의 사랑스런 동생, 귀여운 라트리, 너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너에게 무거운 짐을 두고 가는 것 같아. 부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으면 해. 잠시 아주 잠시만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었으면. 그리고 영원히 나를 기억해 줘. 하지만 나 때문에 너무 많이 아파하진 말았으면 좋겠어. 영원히 널 지켜주려고 했는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그 모든 상처가 깨끗이 아물었으면 좋겠어. 안녕 모든 것들! 라트리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

  3일 내내 언니의 일기를 라트리에게 읽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마지막 일기였다. 라트리는 가만히 귀를 기우려 듣고 있었다. 때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었다. 결국에 마지막 일기는 라트리를 울게 만들었다. 마치 비극으로 끝나는 소설같이……. 일기를 덮었다.
  "라트리, 언니의 말처럼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는 거야."
  손수건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언니는 행복할 거야. 라트리 이제 그만 울어도 돼."
  하지만 라트리는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상처가 깊은 것일까?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라트리의 언니가 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라트리는 언니의 일기장을 꼭 안았다. 마치 진짜 언니인양. 모든 것이 나를 속이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연관들이 있을까? 그리고 내가 즈어를 찾은 것은 오후가 한참 지나서였다.

  즈어는 여전히 몽둥이 같은 지팡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너무나 꼭 안고 있는 모양이 라트리가 언니의 일기장을 꼭 안고 있는 모양을 연상케 했다. 하마터면 나는 왜 그렇게 지팡이를 꼭 안고 있냐고 물어볼 뻔했다.
  "죽은 라트리의 언니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예쁘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한참을 더 기다렸다. 뒤에 분명히 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즈어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정말 친절하고 자세하기도 하시지…….
  예쁘고 착한 아이였다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군. 예쁘다에……. 착하기까지라……. 차라리 왜 지팡이를 안고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어야만 했다. 그러면 즈어는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짖고는 '이 지팡이는 예쁘고 착한 지팡이죠.' 라고 대답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끔씩 내가 즈어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했다.
  "즈어씨, 리메르씨는 어디에 계시죠."
  처음부터 리메르를 찾아갔어야만 했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다른 의미가 됩니다."
  또 시작이군. 그의 대답은 더욱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밤이 되면 뭐가 어쩐다고……. 모든 언어가 제멋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나를 조롱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곳을 빠져 나오고 싶었다.
  "스승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밤이 될 때까지요."
  그에게 등을 보였을 때. 그는 마지막 힌트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아이는 예쁘고 착한 아이였죠."
  이 말을 듣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즈어와는 달리 리메르는 그 뒤로도 할말이 남아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때론 너무나 이상하게도 보였지요. 정신적인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이?"
  "때론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아이라고 느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 적도 종종 있었죠."
  "이상한 행동이라면?"
  그는 그 부분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잠시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라트리의 머리는 예전에는 아주 길었지요. 허리까지 닿곤 했답니다. 라트리는 언니가 머리를 손질해주는걸 좋아했지요. 자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져주곤 했으니깐요. 어느 날, 그 애가 강제로 라트리의 머릴 잘랐지요."
  그는 더 이상 말하기가 힘든 눈치였다. 강제로 머릴 저 모양으로 자른 자매치고는 사이가 너무 좋아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곤 서재를 나와야만 했다. 머릿속은 더 뒤죽박죽이 되었다. 결국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라트리의 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지금 중요한건 라트리지 죽은 언니 따위가 아니잖아. 라트리는 잠들어 있었다. 언니의 일기장을 품에 꼭 안고 긴 머리카락을 저렇게 잘랐는데도 언니를 미워하지 않다니 천사거나 아마 비정상이라고 해야지 마녀는 아니었다. 갑자기 나는 그녀를 깨워서는 뭐든지 물어보고 싶었다.
  험한 인상을 쓰며 다그치고 싶었다. 나는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그녀의 품에서 빼고는 그녀를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서 일기의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리메르의 친필이 있었다.
  '16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 아빠가'
  그리고 바로 밑에 희미하게 적인 글씨…….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밤이 되면, 다른 의미, 즈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도 이런 소릴 했는데……. 모든 것들이 나를 속이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을 왜곡되고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즈어를 다시 찾아야 했다. 미친 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즈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씩 그들이 말한 밤이 찾아오는 것이 창밖으로 보였다.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가 지금은 굵어져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녀석은 어디로 간 걸까? 비오는 거리 구석구석을 그를 찾기 위해 뒤지고 다녀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을이 작다는 점이다. 아니었다면 이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 깜깜한 밤에 그런 녀석을 찾을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웃기게도 너무나 쉽게 그를 찾았다. 마을 한 복판에서 어떤 미친놈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굳이 마을이 작지 않아도 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놈이 드디어 미쳤군.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비틀거리고 또 쓰러지고 소리까지 질러 되며. 정말 가관이었다. 인간이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보는 게 싫증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근처에 왔는데도 전혀 알지 못하고 고함만 치고 있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놈들!"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즈어의 말 중에 가장 맘에 드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뒤돌아 봤다.
  "이게 누구신가? 도시에서 오신 마법사님이 아니신가?"
  혀 꼬부라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나를 대했다. 매일 같이 부둥켜안고 있던 몽둥이형 지팡이가 없는 걸로 보아 담보라도 맡기고 진탕 술이라도 퍼먹은 것 같았다.
  "즈어씨, 많이 취하셨군요."
  나는 정말로 상냥하게도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즈어는 그 자리에 풀썩하고 주저앉자 버렸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움직이지도 않고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시선은 계속 땅바닥이었다.
  "라트리의 언니가 왜 자살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즈어는 입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시체 마냥 가만히 앉자 있었다. 그리고 진절머리 날 정도의 침묵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빗소리만 계속해서 우리들 사이를 산만하게 했다.
  "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해!"
  이번엔 너무나 또렷했다.
  "뭐라고요?"
  "넌, 아무 것도 하지  못해. 빌어먹을 도시에서 온 얼뜨기일 뿐이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돌아가 버려."
  "즈어씨, 저는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라트리의 상처를 이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는 나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곤 이상할 정도로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라트리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그 아이의 상처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넌 아무 것도 몰라. 얼뜨기 같은 놈아!"
  갑자기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녀석을 한방 치고 싶었다. 하지만 얻어맞은 쪽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얼굴이 얼얼했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즈어는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쓰려져 버렸다.  얼굴을 문지르면서 녀석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할말이 잔뜩 있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또 다시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감쌌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절머리 나거나 지겹지가 않았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법사로서 진실에 봉사한다고 서약했습니까?"
  한참이 지나서야 즈어는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마치 딴사람 같았다. 그는 매우 차분했다. 작은 소리였는데도 너무나도 또렷했다. 하지만 즈어의 말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런 뻔한 말이었다.
  "한때 저는 진실이 견고하고 단단하며 또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즈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즈어는 내게 뒷모습을 보이더니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떠나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나를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을 때 보다 더욱 화가 났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달려가서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언니의 죽음 말고도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그걸 말해 줘!"
  "저는 어렸을 때 진실에 대해 봉사하겠다고 서약을 했지요."
  녀석은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기 시작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녀석의 멱살을 꼭 움켜지고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빌어먹을 마법사의 서약에 대해서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다시 한번 버럭 소릴 지르자 그때 그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동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의 그의 눈매와는 달랐다. 난 여전히 멱살을 놓지 않았다.  
  "라트리가 언제부터 말을 못했지?"
  "말 따위를 못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냐!"
  "말해봐! 언제부터야? 빌어먹을 자식아!"
  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녀석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말해봐!"
  "……."
  "그녀의 언니가 죽기 전이지? 그렇지? 그전부터 그랬지? 언니가 죽은 후 충격으로 말을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거지?"
  "……."
  "대답해!"
  "그래! 죽기 전부터야. 훨씬 전부터 말을 못했어."
  "이런 빌어먹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꼭 쥐고 있던 그의 멱살을 놓았다. 어지러웠다. 빗소리가 너무나 산만했다. 즈어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아보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는 이 모든 일들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악마에게서 떼어 놓아야해. 비 오는 밤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라트리는 깨어나 있었다. 마치 내가 다시 찾아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라트리의 옷을 거칠게 벗겼다. 악마의 표시를 찾는 사냥꾼처럼……. 라트리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악마의 표시들, 군데군데 난 상처들, 멍든 자국, 때린 흔적, 토할 것만 같았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빗소리들이 비명소리와 여자애의 울음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귀를 막아보지만 소용없었다. 조그만 여자애를 학대하고 강간하는 장면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닥에 웅크려 본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미친 듯이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악마를 막아야 한다.
  나는 다시 아래층으로 미친 듯이 내려갔다. 문밖에는 리메르가 서있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도 횃불을 들고 문밖에 서 있었다. 퍼붓는 빗줄기에 횃불들은 희미해져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가 없습니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남자 하나가 그들의 대표자 인 듯 앞으로 나와서 리메르와 나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을 선동한 자가 누구인지……. 군중들 뒤쪽으로 검은 예복을 입고 두건을 쓴 왜소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지난번 리메르를 찾아온 성직자였다. 앞에 서 있는 군중들을 무시하고 그 성직자 앞까지 걸어가서 섰다.
  "당신이 마을 사람을 선동했소?"
  "저는 신을 모시는 자입니다. 마녀를 잡으러 온 것뿐이지요."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시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직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계속 비가 온다면 우린 끝장이야."
  "마녀를 잡아서 죽입시다."
  몇몇 용기 있는 자들이 나와서 소리치자. 군중들은 쉽게 흥분해서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외침이 들려왔다. 기세가 당당해진 성직자의 표정에 거만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마녀를 데려가야겠습니다."
  성직자의 말이 떨어지자 횃불을 든 청년 몇 명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발 진정들 하세요."
  리메르가 그들과 실랑이를 할 동안 재빠른 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서서 그들을 막았다. 왼쪽 손을 펴서 그들 눈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두개가 있었는데 퍼붓는 비에 희미해진 횃불의 빛을 받아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반지중 하나는 마법사로 진실의 서약을 했을 때 끼었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법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하는 반지였다. 내가 반지를 내밀자 그들은 어리둥절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신들은 어리석게도 마법협회에 도전하는 겁니까?"
  나는 의도적으로 큰소리로 호통 치듯 물었다. 횃불을 들고 있던 청년들은 주춤거리더니 얼굴표정이 굳어졌다.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는 마법사로서 진실에 봉사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한낱 어리석음으로 마법협회에 도전하려 합니까?"  
  더욱 큰소리로 외치자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순십간에 군중들은 조용해 졌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한 발짝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저 또한 신에게 봉사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어디선가 외침소리가 들렸다. 군중 뒤쪽의 성직자였다. 그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의 의무는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있지요."
  그는 내 앞에 서서 거만하게 말했다. 군중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의 의무도 거짓을 바로 잡는 것이지요. 당신도 지금은 승인되지 않은 마녀재판이 금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요?"
  케케묵은 마법사와 성직자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진 것이다. 목청을 높여 다시금 군중에게 소리쳤다.
  "그대들 중에 어리석은 용기를 지닌 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그렇지 않다면 다들 조용히 돌아가시오."
  그들이 들고 있던 횃불들이 빗줄기 속에서 희미해지더니 하나씩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아른거렸던 횃불이 사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이던 반지들도 조용히 어둠 속에 묻혔다. 하지만 반지는 보이지 않는 빛을 바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전해온 거대한 힘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도 그 의미를 무시할 순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성직자만이 남았다.
  "대단하시군요. 과연……. 소문으로만 듣던 대마법사의 아드님이시군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번 재앙으로 입은 모든 피해는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당신이 맹세한 그 알량한 진실에 말이죠."
  성직자는 흥분한 얼굴은 아니었다. 매우 차분했다. 그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슈님,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한참을 내 행동만 지켜보던 리메르가 말을 꺼냈다. 구역질이 났다.
  "비가 많이 오는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나는 있는 힘껏 리메르를 주먹으로 쳤다.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그는 적잖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짐슴 같은 놈! 나는 최악의 욕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내가 한 욕은 이런 것이었다.
  "이 더러운 악마놈!"
  흙탕물에 쓰러져 있던 리메르는 한 손으로 입가에 피를 훔치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왜 이러십니까?"
  리메르는 끝까지 나를 속이려고 했다.
  "그 아인 당신 딸이잖아?"
  나는 모든 사실이 꺼꾸러 해석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밤이 되자 모든 것들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것은 인정한다는 듯 조그맣게 웃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대단하군요. 도시에서 온 풋내기인 줄 알았습니다만, 과소평가 했군요. 하지만 유명한 마법사님이 주먹 따위를 써서 되겠습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그녀의 아버지잖아?"
  "마법사로서 진실에 봉사한다고 하셨습니까? 저에게 진실은 이것이지요. 어차피 제가 낳은 계집애들이 아닙니까? 제가 가지고 논다 해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이런 말도 있죠. 자신의 친딸과 관계를 맺어서 태어난 아이는 강한 마법사가 된다는……."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즈어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게 너의 딸들을 가지고 논 이유인가?"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냥 즐기는 거지요."
  나는 있는 힘껏 놈을 패대기쳤다.
  "널 죽이고 말겠어. 그리고 모든 것을 폭로하겠어."
  그는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보지도 않았다.
  "진정하셔야죠. 이슈님. 저도 꽤나 명성 있는 현자입니다. 저를 죽이는 일이 그리 간단할까요? 진실은 과연 어떤 걸까요? 말도 못하는 꼬마 계집애와 저 사이에 진실 말이죠. 이슈님. 당신의 생명도 위험하다는 걸 아셔야죠."
  르메르의 얼굴에 이제껏 보지 못한 비열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나는 녀석을 죽이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문제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옷들이 축축했다. 하지만 아무도 옷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탁자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불안했지만 리메르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만 자꾸 귓속에 들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저는 진실을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져 있었다. 마치 내가 애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법학원에 사실을 보고하면 전부 믿지 않으려고 하겠죠. 게다가 저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말이죠."
  그는 매우 냉정하게 말했다.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를 죽인다면 당신도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될 겁니다."
  "네, 그렇겠죠. 딸아이는 마녀로 몰릴 것이고 저의 입장도 매우 난처해지겠죠. 이슈씨, 당신은 이름난 마법사죠. 당신은 아직 아버지의 그늘에 있습니다. 당신이 이런 시골에서 죽는다면 문제가 확대되겠죠.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언제나 생각해야 하겠죠."
  "타협을 하자는 겁니까?"
  갑자기 그의 말속에 그런 의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협?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나는 그 질문에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주 전에는 겨우 내가 원한 건 알량한 졸업장이었다. 하지만 현실 가능한걸 선택해야만 한다. 사탕가게에서 동전 하나로 사탕을 고르는 아이처럼……. 결국 아이는 자신이 가진 동전에 맞는 가장 근사한 사탕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다.
  "라트리를 데려 가겠습니다."
  이번엔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그것은 불공평하군요. 대가가 너무나 크군요."
  "대가가 큰 만큼 얻는 것이 있겠지요."
  리메르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앞세우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리메르는 기다렸던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조건으로 마법협회에 거짓 편지를 적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2층으로 올라와서 어둠 속에서 지쳐 잠든 라트리를 보았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았다. 물기가 촉촉한 옷이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차가운 듯 몸을 꼭 움츠렸다. 얼굴에는 잠에서 깨어난 갓난아기의 투정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나와 함께 떠나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는 없어."
  아마도 그 부분에 나는 조금은 울었던 것 같아.
  "아니 꼭 가야해. 싫다고 해도 강제로 끌고 가겠어."
  단호하게 말했지만 실은 나는 애원하고 있었다. 라트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잠에서 깨워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다시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포자기 상태였다.

          
  5.
  아침이 되었을 때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따뜻한 햇살이 눈부실 정도였다. 나는 떠날 준비를 끝내고 아래층으로 내려 왔다. 한손에는 라트리의 옷들을 넣은 손가방을 들고 서재 앞에 서 있었다. 라트리는 뒤에 서서 내 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조금씩 떨고 있었다. 리메르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즈어도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아버지와 오랫동안 작별하는 거야. 마지막 인사를 하겠니?"
  내 질문에 그녀는 잡고 있던 내 옷자락을 더욱더 움켜지었다.
  "그래 그냥 가도록 하자."
  마을을 가로지를 때 라트리는 더욱더 내 뒤에 숨어서 옷자락만 꼭 움켜지고 있었다. 발걸음은 매우 부자연스러웠고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힐긋 힐긋 쳐다봤다. 그때마다 그녀는 더욱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가기조차 힘들게 보였다. 그녀를 안고 이 빌어먹을 마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 힘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즈어가 거기 서 있었다. 마치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처럼 즈어는 변함없는 자세로 그곳에 서 있었다. 다만 그는 이제 지팡이를 안고 있지 않았다. 왜 그가 그렇게 미친 듯이 무거운 지팡이를 꼭 안고 있어야만 했는지 이제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집착이었다.
  나는 그의 노력과 고뇌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나의 반지중 마법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하는 반지를 빼서 그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그에게 어떤 식이든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반지를 받는 것을 거절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받은 자격이 없다는 겸손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밤이 온다해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는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았다.
  "당신은……. 마녀를 사랑하십니까?"
  뒤돌아 몇 발짝 걸어갔을 때. 즈어는 마치 처음 그가 나에게 했던 말처럼 매우 딱딱했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즈어는 나에게 마녀 사냥꾼이냐며 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의 말을 마녀를 사랑 하냐는 말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정말로 내게 묻는 것이었다. 마녀를 사랑 하냐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저는 마녀를 사랑합니다. 그 상처받은 마음까지도요."
  그러자 즈어는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그의 미소가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아 주었다. 아마도 완전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도 그는 계속 우리가 걸어간 길을 쳐다보고 있으리라.

  마을을 벗어나 산길을 걸어가자 라트리는 조금은 두려움을 떨쳐버린 것 같았다. 때론 앞서 걸어가기도 하고 생소한 나무들이나 이름 모를 풀과 들꽃에 정신이 팔려 뒤쳐지기도 했다. 얼굴에는 금방 생기가 돌았다. 호기심만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우리는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또다시 노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나는 예전에 짐을 풀었던 나무 밑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라트리는 큰 호수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분주하게 호수 근처를 관찰하고 다녔다.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고는 그녀를 큰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일기장을 건넸다.
  "언니의 일기장이야. 이제 네가 주인이야. 소중하게 간직해."
  라트리는 두 손으로 묵직한 일기장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을 때 그녀는 내 눈을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호수 앞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는 나를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있는 힘껏 일기장을 호수를 향해서 집어 던졌다. 책은 조금 낮게 날다가 곧바로 호수로 곤두박질 쳤다.
  "어째서 라트리? 너에게 소중한 거잖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죽은 언니의 마지막 유품일 텐데. 하지만 라트리는 괜찮다는 듯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들려다 보고 있으니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란 놈은 정말 한심했던 것이다. 얼른 가방에서 아버지의 유고 연구집을 꺼내들고 다시 라트리 곁에 섰다. 그리고는 나도 있는 힘껏 책을 던지기 위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라트리는 있는 힘껏 던지라는 의미로 나를 향해 웃었다.
  빌어먹을 학교 사서, 책을 반납 안 해서 정말 미안하군! 나는 있는 힘껏 책을 집어 던졌다.

  책은 새처럼 날아오른다. 펄럭이는 종잇장들은 날개처럼 수없이 날갯짓하는……. 그렇게 책은 새처럼 날아오른다. 이내 펄럭이던 책은 호수의 수면 위에 떨어졌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라트리와 나는 그 파문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마법학원엔 가짜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일은 잘 해결되진 않았지만 마녀를 데려간다고……. 그리고 아버지의 마녀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해야겠다. 물론 그 연구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법이지만, 학교로 돌아가진 않겠다.
  졸업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라트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 살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작정했다.

  밤은 언제나 잊지 않고 찾아온다. 라트리는 밤이 되자 조금은 불안하게 보였다. 그녀는 말없이 내 품에 안겨서 잠을 청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담요도 불을 피울 수 있는 성냥도 없었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밤이 될 것만 같았다.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라트리는 더욱더 내 품에 기대어 왔다. 곧 여자아이는 새근거리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조그만 숨소리, 따뜻한 느낌 호흡할 때의 입김, 가냘픈 아이의 느낌이 느껴졌다. 밤이 되면 진정 필요한 것은 정말 성냥이나 담요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이제 알 것만 같았다. 라트리는 조금은 추운지 조그맣게 몸을 움츠렸다. 라트리를 감싸듯 꼭 안아 주었다. 그녀도 따뜻함을 느꼈는지 포근한 표정이었다.
  
  초고:1997.12 / 수정및추가:1998.7,1998.10,1999.1,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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