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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에 대한 학살이 멈춘 건, 딱 백 년 전이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인류를 구한 게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발굴대의 W는 헬멧의 전조등을 비틀어 켰다. 하루치 연명할 거리라도 캐기 위해.



 W의 세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환형우주생물체들의 우주선이 도착하던 날 인류는 흥분에 휩싸였었다고 한다. 그들의 우주선은 매끈한 구석 하나 없는 낡은 트럭 같았지만, 어쨌든 새 시대가 열렸으니까. 솔직히 그때까지 그들이 익숙했던 환형동물이란 지렁이밖에 없기도 했고.
 “지렁이를 닮았다고?”
 “하지만 엄청나게 커. 큰놈은 1킬로미터 길이인걸. 허리통이 빌딩만 해.”
 “그래도 지렁이라면 당연히 이로운 생물일 거야.”
 “하긴 적어도 토양은 풍부해지겠구만.”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니었다.
 다만,
 우주 지렁이들이 인류 문명 통째를 부식한 유기체로 파악하고 다 삼켜버리기로 결심한 것만 빼고는 말이다. 학자들은 우주 환형생물체들에게 룸브리쿠스 말라Lumbricus mala라는 학명만 허망하게 붙이곤 죽음을 맞았다. 이내 지구 표면은 다크 초콜릿 같은 흙으로 뒤덮였다. 심지어 사막까지. 사막화가 이런 식으로 해결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바다 한가운데의 방주에서 살아남았다. 한때 항공모함이었던 방주는 흙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피난처였다. 해저라 해도 흙이 있는 곳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렁이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도주에서 도주로 이어지는 삶이었다. W는 룸브리쿠스력 84년, 방주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다. W에게 흙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옛날에는 비가 오잖아, 그럼 운동장에서 지렁이들을 잡으며 놀았단다. 낚시에 지렁이만 한 미끼는 없었지.”
 W의 할아버지는 지상에서의 삶을 최대한 W에게 전달하려고 애썼지만, W는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육지로 귀환을 요청하는 신호가 오기 전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흙 냄새 한 번 맡지 못하고.



 처음에 방주 사람들은 귀환 신호를 무시했다. 지렁이들이 무시무시한 파괴력 외에 계략까지 부리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환 신호는 끈질겼다. 아무리 다시 봐도 사람들이 보내는 신호가 맞았다. 사악한 지렁이들과 공존할 방법을 찾았다고,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더 필요하다고 했다.
 “갑자기 그들이 우릴 삼키지 않기로 한 이유가 뭡니까?”
 회의적인 방주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헬기가 왔다. 헬기에는 언어학자가 타고 있었다.
 “제가 번역기를 발명했습니다.”
 정확히는, 극지방에서 이누이트 언어를 연구하던 학자의 후손이었다. 룸브리쿠스들이 얼음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어쨌든 2대에 걸쳐 그의 아버지와 아들이 빛과 진동만으로 기능하는 번역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끊임없이 룸브리쿠스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결국 같은 헤모글로빈 색소를 가지고 사는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먹힐 리 없었다.
 하지만 이누이트 언어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정수를 끊임없이 번역하여 전송했는데, 룸브리쿠스 100년 드디어 두 문명 사이에 대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환형우주인들이 이야기를 발견했어요.”
 “네?”
 “그러니까, 그들에겐 지금까지 이야기라는 개념이 없었나봅니다.”
 “우주선은 만들면서 이야기는 못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자 언어학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야기를 못 만드는 지성체가 우주선은 만들었다는 게 더 신기하지 않나요?”



 인류와 룸브리쿠스들의 평화 협정이 맺어졌을 때, W는 발굴단으로 자원한 후 난생처음 육지를 밟았다. 협정의 내용인 즉,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면 인류에게 더 이상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게 주 골자였다.
 “이건 뭐, 아라비안나이트도 아니고.”
 문제는 아라비안나이트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 피난민들의 낡은 책과 구전된 이야기들을 모아봤자 몇 달도 채 버티지 못할 수준이었다.
 “같은 얘기 두 번 들으면 병 나나? 지금껏은 하나도 없었담서 극성맞긴.”
 아마 지렁이들의 신체와 정신은 반복의 메커니즘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야기만이라도 반복이 아니길 바랐던 게 아닌가 사람들은 추측했다. 어쨌든 살려준다는데 어쩌겠어. 미술도 음악도 무용도 번역이 제대로 될 리 없는데, 이야기에라도 낚여서 다행이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재능은 룸브리쿠스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인류의 2퍼센트에게만 주어졌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다 합치면 말이다. 이제는 몇 백이 전부였다. 이미 죽어버린 작가들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류 역사상 이렇게 작가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유능한 생산력으로 여겨진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작가가 아닌, 생존 인류의 98퍼센트가 백 년 전의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W는 열여섯 살에 처음 발굴단에 자원한 후, 서른 살까지 도서관 스무여 곳을 발굴했다.
 “책이란 책은 다 분쇄해 먹어놓고, 대체 뭘 찾아내라는 거야.”
 W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부드러운 흙을 헤치며, 차라리 좋은 신발을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게 인류에 더 도움이 되겠다고 자조했다. 
 “우리도 C언어를 배우는 게 낫지 않겠어?”
 시추기를 운전하는 발굴단 동기가 제안을 했다.
 “C언어?”
 “응, 잊혀진 언어래. 자메이카 도서관에서 매뉴얼이 발견되었다는데 그걸 배우면 웹을 복구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
 “웹을?!”


 C언어를 배우는 동안 W의 마음은 자꾸자꾸 급해져만 갔다. W의 할아버지가 해주던 이야기들이 편린으로 기억이 났다. 새 이야기가 발굴될 때마다, W는 지렁이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열심히 읽었다. 어린 시절 항공모함의 어두운 선실에서 들었던,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그 이야기들이 아닌가 해서. 하루에 자기 몸무게만큼을 먹는 지렁이, 이야기도 소화하다시피 읽는 지렁이들의 기분을 알 듯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렇게 독특하고 근사한 이야기들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룸브리쿠스들이 만족한 나머지 지구를 떠날지도 몰라……



 웹이 15퍼센트 정도까지 복구되었을 때, W도 교육을 마치고 복구단에 합류했다. 여러 가지 임무가 주어졌지만, W는 자투리 시간마다 할아버지의 족적을 따라가기 바빴다. 조각조각 난 정보 속에서 할아버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제일 보안이 약한 대학 홈페이지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좋은 학교는 아니랬지만 꽃놀이가 유명하다고 했어, 할머니를 꽃놀이 하며 꼬셨다고…… 총장이 조경에 온 등록금을 다 썼다고 했지…… 학교 마스코트가 뭐였더라? 근처에 꼼장어집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학교를 찾아냈을 땐, 할아버지의 흔적이 없었다.
 “음, 학력 위조인가?”
 설마 우리 할아버지가 그럴 리가. 지나치게 솔직해서 탈인 분이었는데!
 아…… 할아버지 삼수생이었구나. 두 학번 뒤의 기록을 뒤졌더니 할아버지의 아이디를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행운을 바라야 할 때였다. 스무 살 때 쓴 대학 홈페이지 아이디를 다른 포탈에도 꾸준하게 쓰셨길. 복잡다단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어 매년 새로운 메일 주소를 만들지만 않았길.
 다행히 할아버지는 하나의 아이디를 줄곧 썼다.
 Sexychung.
 아…… 할아버지는 섹시 정이었구나.



 그러나 거대 포탈에 남은 기록에선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신용카드 고지서, 쇼핑몰 쿠폰 메일, 업무 메일, 아주 가끔 연애 편지…… 가족사적으로나 미시문화사적으로는 꽤 의미 있을 자료였으나, 이야기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W는 룸브리쿠스들의 흙에 심었더니 지나치게 크게 자란 야채들을 씹으며 절망했다. 아효, 할아버지, 쫌쫌쫌.



 “DC인사이드는 뚫어봤어?”
 시추기보다 C언어에 훨씬 재능을 보이고 있는 동기가 없었더라면, W는 결코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왕성한 DC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디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가끔 리플 정도는 달았다. 대개 유머 갤러리에 “ㅎㅎㅎㅎㅎㅎ”나 “ㅋㅋㅋㅋㅋㅋ” 같은 반복 호응을 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리플 두 개를 찾았다.
 각기 판타지 갤러리와 도서 갤러리에 달린 것이었다. 리플의 내용은 같았다.



 Sexychung: 아, 님, 그러지 말고 여기 먼저 가보셈.



 그리고 그 뒤에 달린 푸른 링크.
 W는 침을 삼켰다. 아직 열어보기 전이었지만, W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기다. 여기가 할아버지가 해줬던 그 탁월한 이야기들의 본원지다. 달칵.



 페이지가 열리고, W는 호흡장애를 일으켰다.
 “야, 왜 그래? 숨 쉬어, 쉬어!”
 친구들이 달려와 W를 붙잡았다.
 “……찾았어.”
 “뭐를?”
 “그 이야기들. 아주 오래 만족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
 “어디?”
 “여기…… 거울.”



 
 








* 이 엽편 소설은 거울 100호를 기념하여 쓰인 것을 밝힙니다.
 나중에 읽으시는 분들이 놀라실까봐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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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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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란비 11.10.01 13:47 댓글 수정 삭제
    읽는 내내 흥미로워서 눈을 못 뗐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
    어떤 이미로는 감동적이네요 ㅠㅠㅠㅠ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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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1 14:54 댓글 수정 삭제
    크크크 축전 대신 쓴 거라서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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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11.10.01 17:52 댓글 수정 삭제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ㅋ 인류를 구하는 거울 ㅋ ㅋ ㅋ ㅋ 작가들이 대우받는 (나름) 유토피아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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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1 18:26 댓글 수정 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소설로 개그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웃어주시니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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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한별 11.10.02 20:54 댓글 수정 삭제
    문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 맙소사 디씨를 경유해서 거울로 온다니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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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2 22:53 댓글 수정 삭제
    유능한 생산력이고 싶어요 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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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11.10.02 23:56 댓글 수정 삭제
    ㅋㅋ 재미있네요. 제목이 재미있어서 봤는데, 제목에 100이라는 것이 거울 100을 상징하니, 제목에 그런 의도적인 꼼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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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ytoness 11.10.03 02:06 댓글 수정 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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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3 09:38 댓글 수정 삭제
    키키키 감사합니다! 꼼수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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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11.10.03 19:28 댓글 수정 삭제
    잠깐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물마시다가 노트북에....ㅋㅋㅋㅋㅋㅋ DC서부터 이미 낄낄대고 있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읽고 있었는데 이런 훈훈한 사이트로의 링크로 마무리되는군요.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의 요람 거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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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3 21:36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은 흥한 글이로세!! 꺅!! 초록님을 웃겨드렸다니 기뻐요! 축제니까 축제 팸플릿을 쓰자, 란 느낌으로 썼지만 진심인걸요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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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1.10.05 14:19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진지하게 정좌하고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설마설마하다가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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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5 17:37 댓글 수정 삭제
    ㅎㅎㅎ설마설마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보시면 큰일이잖아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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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 11.10.07 16:54 댓글 수정 삭제
    멋져요 훌륭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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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09 11:25 댓글 수정 삭제
    >ㅂ<)~~ 덩실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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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11.10.19 22:12 댓글 수정 삭제
    이야기는 못 만들면서 우주선은 만들었다는게 더 놀랍지 않아? 라는 대사에 역시 세랑님! 했다가 결말보고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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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0.20 09:49 댓글 수정 삭제
    크하하하 거울에 대한 애정이어요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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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리 11.12.28 09:53 댓글 수정 삭제
    어째서 할아버지 인가요???? 할머니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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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12.28 10:06 댓글 수정 삭제
    할머니인데 섹시 정이면 저 같잖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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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냥이 12.07.27 22:17 댓글 수정 삭제
    ㅋㅋㅋㅋ 할머니였다면, 로맨스 사이트나 동인 사이트에 기록이 남으셨을 수도 있겠네요. 짧고 강합니다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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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2.08.21 13:12 댓글 수정 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 할머니였다면 더 찐한 곳에! 감사합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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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대연 15.11.27 16:48 댓글

    진지하게 보다가 갑자기 빵터졌네요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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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미 16.10.24 16:13 댓글

    으아 너무 재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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