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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Nessun sapra

2011.03.25 23:5703.25

Nessun sapra


 


아프또르 니까그다네브일롭스끼 지음


정보라 옮김


 


우리가 생존자를 찾아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위대한 조국수호 전쟁이 끝난 지 6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10주년도 20주년도 아니고 60주년이다 보니 이미 쓸만한 아이디어는 모두 40주년이나 50주년 할 때 써먹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기획회의 내내 서로 눈치 보면서 고개만 갸웃거려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편집기사 조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희 숙모님이 일하시는 요양 병원에 대조국 전쟁 생존자라는 분이 계신데요….”


PD는 일단 눈살부터 찡그렸다. 생존자 인터뷰도 50주년 때 이미 다 했다. 사실은 30주년 때도 하고 40주년 때도 했다. 아마 10주년이나 20주년 때도 다 했을 것이다. 그 때에 비하면 생존자가 이제 몇 명 남지 않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단지 희소가치 때문에 십 년 주기로 했던 인터뷰를 하고 또 하는 걸로 때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기, 그건 저도 아는데, 저희 숙모님 말씀으로는, 그 분이, 저기….”


편집기사 조수가 망설이며 말을 끌었기 때문에 PD가 미간 사이에 지은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리고 PD가 얼굴을 찡그릴수록 편집기사 조수는 더더욱 망설이며 똑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지켜보는 우리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짜증도 함께 솟아올랐고, 그 짜증 때문에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터지지 않고 점점 더 부풀어오르는 긴장감 때문에 짜증도 함께 심화되었고, 편집기사 조수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긴장감과 짜증은 출구를 잃은 채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마치 자기 꼬리를 쫓는 강아지처럼 방 안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맴돌고 있었다.


그 분이, 저기….”


편집기사 조수가 말하려다 말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PD가 들고 있던 펜을 미간 사이로 가져가서 두개골이라도 뚫고 쳐박을 듯이 꾹 눌렀다.


저걸 떼면, 그 순간 폭발이다. 우리는 조마조마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 분이, 저기, 그러니까….”


편집기사 조수가 입맛을 다셨다.


PD가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곧, 지금 곧 손을 뗀다. 지금 당장, 금방이라도, 폭발이다


PD가 미간 사이에 쑤셔박은 펜을 떼기 직전에 편집기사 조수가 외쳤다.


그 분이 포위전 때 인육을 먹어서 미쳤다고 숙모님이 그랬어요!”


우리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편집기사 조수를 쳐다보았다. 조수는 입을 연 김에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쏟아냈다.


원래는 정신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포위전 때 의사들 전부 도망가고 도시가 봉쇄돼서 먹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돌보던 환자를 먹었대요, 포위전 끝나고 군인들이 들어가 보니까 그 환자 병실에서 시체랑 같이 발견됐는데 자기가 먹었다고 자기 입으로 그래서 그 정신병원에 그대로 수감돼서 55년 살다가 2000년도에 대통령 바뀌고 나서 요양 병원으로 옮겼다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2차 세계대전 당시 1941-1943년까지 약 900일간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여 도시가 봉쇄되었던 사건. 물자 보급이 차단되어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시민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투항하지 않고 버텨서 이후 레닌그라드는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2000년도에는 보리스 옐친이 물러나고 블라지미르 푸틴이 러시아 연방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 역주]


PD가 이마에 쑤셔박은 펜을 떼었다. 책상 위에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모두 움찔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PD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이봐.”


PD가 차분하게 편집기사 조수에게 말했다.


여기가 이래봬도 국영 방송인데,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고 나서 이름에 국영자 붙은 건 모조리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런 뜬소문 같은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내서 이미 떨어진 위상을 더 떨어뜨릴 수는 없지 않나? 게다가 지금 돈도 없고 운영은 엉망이고 총체적인 난국인데 그런 이야기를 무려 대조국 전쟁 60주년 특집으로 내보냈다가 방송국 문이라도 닫게 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뜬소문이 아녜요, 저희 숙모님이 공식 기록에서 직접 보셨다고…. !”


말대답을 하려다가 편집기사 조수는 옆에 앉은 편집기사가 맹렬하게 발을 밟는 바람에 짧은 비명을 지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대하여 PD가 여전히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차분한 표정으로 편집기사 조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포위전 때 도시가 봉쇄돼서 굶주린 사람들이 별별 해괴한 짓거리를 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지. 그런 얘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린 지금 대조국 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발굴하자는 거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냐. 게다가 명색이 국영 방송인데 그런 이야기를, 그것도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보도하는 건 생존자와 희생자 양쪽에게 실례야. 설령 공식 기록에 있다고 해도 그런 이야기는 그냥 뜬소문으로 남겨두는 게 그 시절을 살아나오신 분들에 대한 예의인 걸세. 그렇게 생각이 없나?”


하지만아악!”


또 다시 토를 달려다가 편집기사 조수는 다시 한 번 옆에 앉은 편집기사에게 격렬하게 발을 밟히고 입을 다물었다. PD가 우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 생존자나 희생자를 모욕하지 않으면서 대조국 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재조명할 만한 다른 의견은 없나?”


하지만 그 생존자 할머니가 먹었다는 사람이 바로 다니일 바실례비치 이바쵸프라고요!”


편집기사 조수가, 이번에는 옆에 앉은 편집기사에게 발을 밟을 틈을 주지 않고 이렇게 외치는 바람에 우리는 PD를 포함해서 전원이 일순간 조용해지고 말았다.


다니일 바실례비치 이바쵸프. ,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 문학, 아니 글을 다루는 분야의 모든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전설적인 작가. 그러나 1937년 대숙청 때 체포되어 이후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저주받은 천재. “황금시대 운동을 주창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뛰어든 1920년대부터 체포될 때까지 약 1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이바쵸프는 소비에트 문학계를 혼자서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포된 후에도 그의 인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고, 오히려 정권의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불법 지하 출판물의 형태로 점점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 1956년 공식적으로 사면 복권된 이후로 이바쵸프는 명실공히 20세기에 발자취를 남긴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작가 중 학생들이 점수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읽고 또 읽고 외우기까지 하는 작가는 아마도 이바쵸프가 유일할 것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촬영 기사가 눈치 없이 에이, 거짓말이겠지, 하면서 큰 소리로 웃으려다가 이바쵸프의 이름과 함께 좌중을 뒤덮은 진중한 침묵을 눈치채고 에이까지만 조그맣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PD가 편집기사 조수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확실한가?”


정말이라니까요.”


편집기사 조수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옆에 앉은 편집기사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편집기사는 이번에는 발을 밟지 않았다.


이바쵸프란 말이지….”


PD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펜을 입으로 가져가서 뒤꼭지를 씹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좋아.”


마침내 PD가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먹었다는 얘기는 되도록이면 빼. 어디까지나 이바쵸프 중심으로 가는 거야.”


물론이죠.”


편집기사 조수가 신이 나서 외쳤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촬영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


다니일 바실례비치 이바쵸프는 1901년 뻬쩨르부르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였고 어머니는 결혼 전에 성악가였는데 결혼한 후에는 그림도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동화나 단편 소설 같은 것도 집필했다고 한다. 즉 예술적인 재능이 많은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이바쵸프 자신은 뻬쩨르부르그의 사립 김나지움[남자 고등학교 역주]을 마친 후 법과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바쵸프가 만 16세 되던 1917년에 공산 혁명이 발발하는 바람에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이바쵸프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내전에도 참전했지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제대해야만 했다. 내전이 끝나고 나서 1921년부터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다고는 하는데 공식적인 수강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청강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뻬쩨르부르그는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다시 원래 이름인 쌍뜨 뻬쩨르부르그로 바뀌었다. – 역주] 어쨌든 이 시기부터 문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황금시대를 되살리자는 의미에서 황금 시대라는 문학 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2년 문학 잡지인 <붉은 처녀지>에 내전 참전 경험을 다룬 단편 소설 용기를 게재하면서 등단했다.


내전의 참상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를 특유의 독창적인 문체로 시적이면서도 강렬하게 묘사한 그의 데뷔작은 금세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바쵸프는 이어서 전차”, “조국등의 실험적인 시와 ”, “배신자의 계절”, “허물을 벗다등의 중편, 그리고 허수아비들의 무도회등의 희곡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담담하고 시적인 묘사 속에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은 단편과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묘사가 일품인 중편 소설, 또 참을 수 없이 우습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하게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는 풍자적인 희곡 등 이바쵸프는 어느 한 스타일이나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다종다양한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집필 속도가 빠르면서 동시에 시의적절한 주제를 정확하게 골라내어 당대 사람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짚어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가 등단하자마자 일약 스타 작가로서 인기를 구가했고 아직까지도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이바쵸프는 행복하지 못했다. 1924년 만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함께 황금 시대그룹에서 활동하던 친구의 누이와 결혼했다. 그러나 2년 뒤에 태어난 아들은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내 옐레나 이바쵸바는 이 때부터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가까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마음도 함께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바쵸프는 자식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절망을 문학 창작을 통해 풀어내려 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빛나는 걸작들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남편이 자식의 죽음을 개인적인 비극으로 묻어두지 못하고 작품 속에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처공식화해버린 것을 못 견뎌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부부는 1927년 이혼했다. 이로 인해 이바쵸프는 황금 시대활동에 참여했던 작가들과 결정적으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이바쵸프는 이혼한 다음 해인 1928년 고향 뻬쩨르부르그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그는 음악가인 여동생의 소개로 볼쇼이 극장 등 여러 극장 관계자들과 알고 지내게 된다. 그 중 무대 연출부로 일하던 어느 여성과 가깝게 지내다가 이바쵸프는 1931년 재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해서, 이바쵸프는 1934년에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한다. 그러나 이바쵸프가 3년 뒤에 체포당해 숙청된 것을 생각하면 미리 이혼하고 자녀도 갖지 않은 것이 이바쵸프의 전 부인들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고 해야겠다.


1936년 이바쵸프는 살아 생전 출판된 마지막 작품인 왼손 위의 심장을 발표했다. 원래 장편으로 기획된 이 작품은 문학지 <붉은 별>에 제 1부가 게재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작가 협회로부터 돌연히 공산주의 정신에 어긋나며 인민 대중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와 함께 <붉은 별>은 폐간되었으며 이바쵸프는 모든 작품을 출간 금지당했다. 그리고 정확히 8개월 뒤인 1937 4월 이바쵸프는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된 후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는 참담하다. “조국이 내게 죄가 있다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어떤 처벌이라도, 유배라도,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고문을 그쳐 주십시오….” 이바쵸프에 대한 마지막 공식 기록은 1937 8조국을 배신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이바쵸프의 지인들 중 문학 비평가 뻴라닌이 시베리아로 가는 호송 열차 안에서 옆 칸에 탔던 사람이 죽어가면서 내가 이바쵸프와 같은 날 같은 열차 안에서 죽었다고 전해 주시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또 이바쵸프의 친구였던 시인 크라넨바움은 유배지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중에 누군가 곁에 다가와 내가 바로 다니일 이바쵸프요, 나는 살아 있소라고 속삭이고 사라졌다는 말을 같은 방의 동료 죄수에게서 전해 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모두 소문일 뿐 확인된 바는 없으며, 소문에 관련된 장소도 시베리아부터 시작해서 중앙 아시아까지 다양하다. 일설에 의하면 이바쵸프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티에 생존해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1901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세기를 넘겨서까지 살아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20세기 초반의 대작가 다니일 이바쵸프의 마지막 날들이란 역사 속에 묻혀버린 미스테리로만 남은 것이다.


 


요양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를 타고 가는 다섯 시간 반 동안 우리 팀을 주로 지배했던 것은 그런 역사적, 문화적 미스테리를 밝힌다는 흥분감이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그래봤자 이제 와서 사실이 밝혀질 리가 없다는 회의와 냉소였다.


어쨌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장비를 챙긴 후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


편집기사 조수가 미리 숙모에게 연락해둔 덕에 생존자를 만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존자의 병실이 너무 살풍경하고 공간도 협소하다는 이유로 다른 장소를 섭외했으나 병원 안의 장소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1층에 있는 식당이 그나마 크기라든가 조명 등 여러 가지로 괜찮은 것 같아서 급하게 치우고 장비를 설치했다. 편집기사 조수의 숙모가 생존자를 데리러 갔다.


편집기사 조수의 숙모가 미는 휠체어를 탄 생존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을 때, 흥분과 기대와 회의와 냉소로 떠들고 있던 우리는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생존자는 한 눈에 보기에도 인터뷰 같은 걸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초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두 눈이 제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가누지 못해 휠체어 안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입은 조금 벌어진 채 실처럼 가느다란 침을 흘리고 있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라이스카야예요.”


편집기사 조수의 숙모가 소개했다.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그리고 편집기사 조수의 숙모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 버렸다.


 


우리는 한동안 당황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촬영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숙모 때문에 괜히 따라온 편집기사 조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존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인사했다. 상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내가 몸을 굽혀 생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저희는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말하면서 나는 생존자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마치 고무장갑처럼 차갑고 물렁물렁했다.


이거, 할 수 있을까?”


나는 허리를 펴고 촬영기사를 쳐다보았다. 촬영기사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만 움찔해 보였다.


편집기사 조수가 나섰다.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몸을 굽히고 생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다니일 이바쵸프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알고 계신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딱히 기대를 걸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존자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두 개의 눈동자가 같은 방향을 보기 시작했다.


편집기사 조수가 다시 말했다.


다니일 바실례비치 이바쵸프 말입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생존자의 두 눈동자가 편집기사 조수를 향했다. 힘없이 벌어져 있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이바쵸프….”


편집기사 조수는 기뻐했다.


, 이바쵸프 말입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알아들으시겠어요?”


이바쵸프….”


생존자가 다시 중얼거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이번에는 내가 가까이 갔다.


다니일 이바쵸프와, 전쟁에 관해서입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이바쵸프전쟁….”


이번에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분명하게 생존자가 되풀이했다. 내가 뭔가 다시 격려하는 말을 하려는 차에 생존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티파미아….”


그리고 생존자는 눈을 감았다.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집기사 조수와 촬영기사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참만에 편집기사 조수가 말했다.


저기, 숙모님을 불러오는 게….”


그러나 그 때,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나를 쳐다보더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바쵸프, 다니일 바실례비치. 전쟁 때, 내가 그의 간호사였어요.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그는 자살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의 시체를 먹었어요.”


그 발음은 분명하고 확실했으며 표정은 평온하고 담담했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마주보았다.


그리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다니일 이바쵸프는 그녀의 환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바쵸프와 사랑에 빠졌다. 어찌 보면 뜻밖이지만 또 어찌 보면 당연한 전개였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당시 간호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초반의 신출내기 간호사였다. 첫 직장으로 발령받은 곳이 하필이면 대숙청의 시기에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신 이상을 가장한, 혹은 수사기관에서 감옥에 보낼 정도의 혐의를 찾아낼 수 없었던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이었다는 점은 상당한 불운이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자신도 그곳에서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젊었고, 순진했으며, 간호학교에서 배운 이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맡은 환자들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그러나 정신병원이란 본래 끔찍한 곳이다.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의 대부분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치권력의 눈에 거슬렸을 뿐 사실상 정신에 아무런 병도 없을 경우에는 더욱 더 끔찍하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어느 모로 보나 멀쩡한 사람들에게 정신에 해로운 약을 주고, 다루기 쉽게 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잠든 채로 보내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 중 몇몇에게는 그녀 자신처럼 경험도 없고 출신도 보잘것 없으며 뒷배를 봐줄 사람도 없는 일개 간호사에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 무서운 일들을 의학의 이름으로 자행하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절망했다. 그것은 진로를 고민하는 20대 젊은 청춘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절망이 아니었다. 정의롭지 못하며 어둡고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체제 안에서 그 체제의 지극히 작은 톱니바퀴 하나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무력한 자의 깊고 출구 없는 절망이었다. 그런 때에 그녀는 이바쵸프를 만났다.


그가 우리 병원에 온 것은 1940년이었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말했다. 그 연도가 확실한지 재확인하고 싶었지만 의심하기에는 그 눈빛이나 말투가 너무나 또렷했다.


간호사들 사이에 소문이 돌아서 나도 알고 있었어요. 이바쵸프가 누군지도 알고, 작품도 몇 개 읽어봤었죠.”


그러나 이바쵸프 정도 되는 거물을 이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발령받아 와서 간신히 근무 첫 해를 넘긴 신출내기 간호사에게 맡길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이바쵸프가 수감되고 나서 2년이 더 지날 때까지도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이바쵸프를 만나기는커녕 그의 병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건 전쟁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살짝 웃었다. 80이 넘은 노인인데다 조금 전까지 두 눈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 있는 웃음이었다.


1941 6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1939년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근 2년이 지나도록 스탈린은 히틀러와 맺은 불가침 조약만 믿고 있었으나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독일군은 쉽사리 소련의 방어선을 뚫고 발트 3국을 지나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병원을 떠나 전선으로 나갔어요. 몇몇 사람들은 그냥 도망치기도 했죠.”


심지어는 환자들 중에서도 자원하는 사람은 무기 없이 전선으로 내보냈다. 병원 운영은 엉망이 되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그런 시기에 병원에 남은 몇 안 되는 의료진 중 하나였다.


남은 환자들에게 식사와 약을 가져다 주어야 했어요…. 식량도, 의약품도, 일손도 모두 모자랐지만.”


그렇게 해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전쟁 첫 해의 가을에 이바쵸프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은 일찍 왔군.”


그녀를 처음 보고 이바쵸프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자신의 담당 간호사가 아님을 알아보고 물었다.


당신은 처음 보는데. 전에 있던 간호사는 어디 갔지요?”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해서 전선으로 나갔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았다.


식사 하실 시간이에요. 약도 드셔야 하고요.”


이바쵸프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지요, 간호사 동무.”


그녀는 이바쵸프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가 약을 내밀자 이바쵸프는 또 다시 엷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녀가 물컵을 내밀자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는 약을 먹었다.


이바쵸프의 이런 태도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환자 중에서 약을 먹으라고 하면 찡그리거나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덤벼드는 사람은 많이 봤어요. 하지만 고마워요라는 말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다니일 이바쵸프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바쵸프가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잘생기고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며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방에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그 후로 포위전이 계속될 동안, , 내가 그를 돌봤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말했다.


먹을 것도, 약도 없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뭐든 마련해서 그에게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는 그 값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이바쵸프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전차에 대해서, 빵가게에 대해서, 넵스키 대로에 내리는 소나기에 대해서, 여자들의 구두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무엇이든지, 정말로 뭐든지 다 이야기로 만들 수 있었어요.” [넵스키 대로는 뻬쩨르부르그 중심가의 거리 이름. – 역주]


아무리 소소한 소재라도 이바쵸프의 입을 거치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재미있고 매혹적인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전차에 무임승차하려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빵 속에서 발견된 외화 때문에 체포됐지만 같은 빵 속에서 발견한 다이아몬드를 뇌물로 주고 풀려난 사람의 이야기, 넵스키 대로에 소나기가 내릴 때 갑자기 비를 맞고 홀딱 젖은 채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새로 구두를 사서 뽐내며 신고 다니다가 전차 안에서 건설 노동자의 흙투성이 발에 밟혀 울상이 된 멋쟁이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전쟁 전의 생활이 다시 거기 있는 것만 같았어요. 줄어들기만 하는 연료와 식량도, 거의 떨어져버린 약품도, 전선에 나간 동료들의 생사도, 점점 가까워오는 포격 소리도, 모두 잊을 수 있었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말했다. 다시 살짝 웃음 지은 입끝이 떨렸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상적인 생활, 내 어린 날의 생활이,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이바쵸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하루 세 번의 짧은 시간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식량보다 약품이 먼저 떨어졌다. 그리고 약을 먹지 못하자 이바쵸프는 곧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날 식사를 갖다주고 또 한참이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경탄하여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찾아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바쵸프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벽 속에서 이야기가 걸어 나오지요. 당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혼자 이 방에서 벽을 쳐다보며 지내니까요.”


그리고 이바쵸프는 그녀에게 종이와 연필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금지 품목이에요.”


이바쵸프는 그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규칙은 지켜야 한다는 거군요, 고지식한 간수님.”


고지식하다는 말에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반박했다.


어떤 상황이든 규칙은 지켜야 해요. 이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지켜야죠. 그리고 난 간수가 아니고 간호사예요.”


뜻대로 하세요, 간수님.”


이바쵸프가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녀가 말했다.


금지 품목일 뿐만 아니라 지금 병원에는 모든 물자가 다 모자라요. 종이와 연필은 사치품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기분이 상한 채로 이바쵸프의 방을 나왔다.


여기서 그녀가 신경썼어야 하는 것은 사실 고지식하다는 놀림이나 금지 품목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벽에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하고 흘려 들었지만, 이후로 차츰 이바쵸프의 병실 벽에서는 여러 가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바쵸프는 벽에 달린 (가상의) 창문을 통해 뻬쩨르부르그의 모든 거리를 내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전에 알던 사람들의 생활을 엿보고 있다고도 말했다. 체포되기 전에 살던 집의 책장이 자기 병실 벽 속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식사를 가지고 들어갔더니 마구 화를 내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자기를 만나러 왔는데 내가 왔기 때문에 도로 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들은 이미 15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설령 살아있다 하더라도 정신병원의 벽을 통해 아들이 면회를 왔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한 말이었다. 이번에도 꾸며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바쵸프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에게 얘기했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답변만 들었어요. 의사도 간호사도 모자라고, 약도 없고, 게다가 애초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한 게 아니니까, 큰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불법으로 탈출하지 않게 막으라고만 하셨어요, 그게 최선이라고….”


그래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노력했다. 할 수 있는 한 먹을 것을 찾아내서 가능한 한 정해진 시간에 뭐가 됐든 식사를 가져다주고, 혼란한 세상으로부터 이바쵸프를 격리하고, 혼란한 이바쵸프로부터 세상을 격리했다. 얼마 안 되지만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다음날 다시 찾아갔을 때 이바쵸프는 제 정신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전날 화를 낸 것에 대해 사과하고 그녀가 내미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식사를 하면서 이바쵸프는 그녀에 대해서 물었다.


당신은 어쩌다가 나의 간수가 되었죠?”


그녀는 간수라는 말에 화를 내야 할지, 이바쵸프가 보여주는 관심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당혹해하자 이바쵸프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게 됐어요? 젊은 아가씨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많았을 텐데?”


그냥, 다른 사람을 돕고 싶었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설명했다. 그녀는 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고, 혁명의 와중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고아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과 함께 별다른 불행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보모들은 친절했고,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러므로 진로를 정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을 잘 키워준 당과 사회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뭔가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뼛속까지 혁명의 딸이군요.”


이바쵸프가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독일군이 포격해오고, 우리가 알던 세상은 무너져가고, 당신은 남을 도우려다가 정신병원의 돌벽 안에 미치광이와 범죄자들과 함께 갇혀 버렸는데?”


후회는 하지 않아요.”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에 찬찬히 설명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을 포함해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그건 내가 원하던 일이에요. 그리고 이 돌벽 안에 갇히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돌보다 죽었거나 길거리에서 포격을 맞아서 죽었을 지도 몰라요.”


과연 혁명의 딸다운 대답이군요, 나의 간수님.”


이바쵸프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불편해졌다. 쟁반에 식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바쵸프가 뭔가 말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바쵸프를 쳐다보고 되물었다.


? 뭐라고요?”


이바쵸프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바쵸프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세 번째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사랑, 티파미아.”


그녀가 물어도 더 이상은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식기를 챙겨 병실을 나왔다.


 


***


티파미아가 누구죠? 전 부인인가요?”


내가 물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게 궁금했어요. 그의 기록을 전부 뒤져보았지만, 그가 아는 사람 중에 티파미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없었어요.”


그의 첫 부인은 옐레나 이바노브나였고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은 발렌티나 빅또로브나였다. 그리고 애초에 티파미아는 러시아 이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헌에도 이바쵸프가 외국인 여성과 가깝게 지냈다는 기록은 없었다. 체포된 후나 심지어 유죄판결을 받을 당시에도 그러한 죄목이 없는 것을 보면 이바쵸프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외국인과 알고 지낸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당시 소련 시민이 외국인과 교류하는 것은 국가 기밀을 유출하려는 간첩 행위로 의심받아 감시당하거나 체포당했다. – 역주]


티파미아, 티파니, 스테파니아까지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요. 아마 벽에서 나온 그의 환각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티파미아벽에서 걸어나오는횟수가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바쵸프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조건 티파미아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이바쵸프가 하는 이야기들도 점점 부조리한 내용이 늘어갔다.


한 번은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둠을 비추다가 다음날 사라지는 게 뭔지 아냐고 물었어요. 촛불을 말하는 거냐고 했더니 마치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니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또, 태어날 때는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게 뭔지 아냐고 묻더군요. 체온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아니라고 미친 듯이 소리치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외치면서 티파미아를 찾는 거예요. 내 사랑, 내 사랑 티파미아! 하고 말예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간신히 이바쵸프를 설득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저녁에 다시 찾아갔을 때 이바쵸프는 완전히 광기에 차서 날뛰고 있었다.


벽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있었어요. 어둠을 비추고 다음날 사라지는 것은 희망이라든가, 태어날 때는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것은 피라든가, 그러면서 피와 희망을 되풀이해서 외치다가, 또 티파미아를 찾다가, 갑자기 벽에 머리를 짓찧으려고 했어요….”


말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힘으로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히 나가서 의사를 불렀고, 한참만에야 찾아낸 의사와 함께 이바쵸프의 방에 갔을 때 환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벽을 들이받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는 의사와 함께 둘이서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이바쵸프를 제지했다. 의사가 이바쵸프에게 진정제를 놓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잠든 이바쵸프를 침대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의사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러 나가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바쵸프를 풀어주지 말고 우선 자신을 부르러 오라고 당부했다.


의사가 나간 후에 나는 곁에 앉아서 그가 깨어날 때까지 지켰어요. 이마가 찢어지고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약도 붕대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어요. 내 간호사복 소매를 뜯어 압박해서 지혈하고, 피가 그친 후에는 그저 물로 씻어주는 수밖에 없었죠. 그나마 깨끗한 물도 구하기 힘들었으니까요….”


이바쵸프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긴장했다. 그러나 이바쵸프는 예상 외로 얌전히 누워서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했다. 벽돌 벽에 세게 부딪쳤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설명했다. 왜 그랬냐는 말에 이바쵸프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날 언제까지 묶어둘 거죠, 간수님?”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지금이라도 풀어줄 수는 있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바쵸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냥 이대로 묶여 있는 게 낫겠어요.”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일어섰다가 도로 침대 옆에 앉았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서 나가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바쵸프가 입을 열었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바쵸프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처음에 체포됐을 때, 아주 많이 맞았어요.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고,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억지로 깨어났어요. 그리고 깨어난 뒤에 좀 더 맞았어요. 독방에 내던져졌을 때는 어둡고, 차갑고, 단단했고, 너무 많이 얻어맞았고, 그래서 내 죽음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죽음이었죠.”


이바쵸프는 침대에 묶인 채로 고개만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죠. 그리고 끝나더라도 세상은 이전과는 같지 못할 거예요.”


그의 갈색 눈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은 멸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여전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먹을 것이 점점 줄어들어도 어떻게든 식사를 가져다주고, 붕대도 약도 없지만 옷소매라도 찢어서 내 다친 이마를 감싸주고….”


, 간호사니까….”


그녀가 말하려 했지만, 그가 말을 막았다.


티파미아. 당신은 나에게 마지막 희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티파미아라는 말에 그녀는 움찔했다. 자신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녀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나 혼자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가,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훨씬 나았어요.”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그녀는 아직도 피가 묻어 뭉쳐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요.”


남자가 속삭였다.


어느 구덩이 속의 이름 없는 시신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가 위로했다.


내가 지켜줄게요.”


그녀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묶여 있어도 좋아요, 간수님.”


그리고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계속 남자 곁에 앉아서, 오랫동안 모질게 고통받아 이제는 회색으로 변해버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


그럼 이바쵸프는 진짜로 정신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입원한 건가요?”


내 질문에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입원한 사람들 모두 공식적으로는 진짜 정신병자예요.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에 가짜 정신병자 따위는 없으니까요.”


말하면서 그녀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아니,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그런 곳에 있다 보면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주는 약은 정상인이 먹어서는 안 돼요. 환자에게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환자가 아닌 사람이 그 약을 먹으면 몸과 마음이 망가지게 돼요. 그리고 꼭 약을 먹지 않더라도, 그곳은….”


그녀는 말을 끊고 잠시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초점을 잃은 상태가 되지나 않을까, 우리는 모두 긴정했다. 그러나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곧 눈을 뜨고 말을 이었다.


“… 그곳은, 말만 병원이지 사실은 감옥이에요. 아시겠어요? 처음에 발령받아서 도착했을 때 나는 며칠동안이나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우리도, 의사, 간호사, 경비병들도 죄수들과 똑같이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내 방도 차갑고, 어둡고, 단단했어요. 그곳에서 나는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이대로 갇혀버린 채 속절없이 늙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나에겐 함께 고생하는 동료들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돌봐야 할 환자들이 있었어요….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이바쵸프가 두 번째로 종이와 연필을 부탁했을 때 규정을 어기고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바쵸프는 그녀가 몰래 구해다 준 연필로 몰래 구해다 준 종이에 유서를 썼다. 그리고 침대 시트를 이어 만든 끈으로 병실 쇠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유서라고요?”


우리는 급격히 흥분했다.


유서가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지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다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여기에 남아 있어요.”


우리는 흥분했을 때처럼 급격히 실망했다. 그러나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우리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티파미아에게 보내는 편지였어요. 유서의 내용은 아직도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천천히 암송했다.


세상이 끝날 때, 내 마지막 숨결이 허공으로 흩어질 때, 그 순간 당신과 함께 하기를,


마지막으로 부르는 이름이 당신의 이름이기를,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소원했다.


그러나 이미 갈 곳을 잃은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그저 내 입가에서만 떠돌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끝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미처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들, 다 마치지 못한 이야기들, 목숨처럼 아쉬운 그 이야기들...


당신과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진다. 살아남더라도 결코 이전과는 같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종말이 다가올 때 나를 기억해주길, 부디 잊지 말아주길, 단 한 순간이라도 아프게 그리워해주길,


고운 그대, 낙원의 이름을 가진, 빛나는 내 사랑아.”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말을 멈추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야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네순 사프라, 내 사랑, 오직 내 사랑 티파미아….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네순 사프라? 그게 뭐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리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이야기를 마쳤다.


우리는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바쵸프에 대한 자료라면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비정상적인 시체 처리에 대해서 과연 물어봐야 할 것인지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편집기사 조수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시체는 어째서 먹어버렸습니까?”


촬영기사와 내가 동시에 편집기사 조수를 쳐다보았다. 내가 뭔가 날카롭게 한 마디 하려 했다. 그러나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


그녀는 이바쵸프의 시체와 일주일간 함께 지냈다.


의사를 불러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의사는 벌써 죽었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먹이고 씻기고 돌보아야 할 환자가 하나 줄어든 걸 다행으로 알라고 말하고는 바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바쵸프의 차가운 시신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전쟁 첫 해의 겨울이었다. 봄은 아직 멀었고, 땔감은 바닥나고 있었다. 난방을 하지 못하는 돌벽 안은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이바쵸프의 병실에서 그녀는 얼어붙은 시신을 자신의 체온과 눈물로 녹였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던 날에 그녀는 그를 먹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나빴나요?”


눈치 없는 편집기사 조수가 아까처럼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까처럼 나와 촬영기사가 동시에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발견한 군인들도 그렇게 묻더군요. 나중에 의사에게서도 그 질문을 수없이 들었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팠던 건 사실이에요. 그 일주일간 나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그 이전에도 몇 달이나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굶주림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나는 짐승이 아니에요.”


짐승이 아니에요라는 말에 편집기사 조수는 움찔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어느 구덩이 속의 이름 없는 시신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두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어요.”


병원 마당 같은 곳에 매장을 할 수는 없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생각도 해 보았지요. 하지만 그랬다가 내가 죽으면 그리고 그 때는 내가 죽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내가 죽으면 그곳에 그가 묻혀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돼요. 결국은 어느 구덩이 속의 이름 없는 시신으로 끝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뭔가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나 자신의 욕심도 있었어요…. 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다른 여자에게 바쳐졌지만, 이제 죽었으니 그의 몸만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죠. 내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소유하고, 계속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죽은 몸을 조금씩 잘라서 먹었다.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죽은 연인과 줄곧 단둘이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밤엔가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가 내 곁에 누워서 손을 꼭 잡아주는 꿈을 꾸었어요. 퍼뜩 놀라서 깨어났을 때, 내 앞에 그가 있었어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말하면서 정말로 꿈꾸듯이 미소 지었다.


그 때부터 그는 줄곧 나와 함께 있어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리고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다려 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참지 못하고 내가 물었다. 그러나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요.”


나는 촬영기사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질문을 해도 쓸모 있는 답변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만 마무리를 하자고 눈짓으로 동의한 뒤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 때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동시에 그녀는 순식간에 축 늘어졌다. 목에서 힘이 빠져 고개가 아무렇게나 꺾어지고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서 눈을 덮었다. 입술이 벌어지더니 아까처럼 입가에서 가느다랗게 침이 한 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티파미아….”


그녀가 벌어진 입 사이로 불분명하게 중얼거렸다.


미아….”


의사를 불러. 아니면 자네 숙모님이라도.”


내가 황급히 편집기사 조수에게 말했다. 편집기사 조수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뛰어갔다.


 


***


방송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촬영기사였다.


이거, 쓸 수 있을까?”


운전을 하면서 촬영기사가 중얼거렸다.


못 쓸 걸요.”


편집기사 조수가 음울하게 내뱉었다.


아니, ? 자네가 낸 아이디어잖아?”


내가 놀라서 물었다. 편집기사 조수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예요. 저 여자,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게 틀림없어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편집기사 조수는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둠을 비추고 다음날 사라지는 게 희망이라느니, 태어났을 때는 뜨겁다가 죽을 때 차가워지는 것은 피라느니…. 그거 어느 연극엔가 나오는 이야기예요. 정확히 제목은 생각이 안 나지만, 그 연극이 러시아에서 처음 공연된 건 이바쵸프가 죽은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고요. 그러니까 이바쵸프가 그런 걸 알았을 리가 없어요.”


확실해?”


내가 충격을 받고 되물었다. 편집기사 조수가 고개를 들어 흘끗 나를 보았다.


연극 제목은 지금 생각이 안 나지만, 확실해요. 방송국에 가면 자료실에서 제목을 찾아 볼게요.”


망했군.”


촬영기사가 투덜거리고는 거칠게 운전대를 꺾었다. 봉고차 뒤에 앉아서 나와 편집기사 조수는 촬영장비와 함께 오른쪽으로 왕창 쏠렸다.


이봐, 조심해! 나는 둘째치고 카메라가 다 망가지잖아!”


그까짓 것 망가지라지, 하루를 다 버렸는데.”


촬영기사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편집기사 조수와 나도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여기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차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차가 방향을 틀며 이리저리 함부로 쏠릴 때만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


방송국으로 돌아와서 편집기사 조수는 촬영기사에게서 사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그 날의 촬영분을 받아들고 편집실로 갔다. 나도 따라갔다. 뭐가 됐든 조금이라도 건질 게 혹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편집 기사에게 촬영분을 넘겨주고 조수는 아까 말한 대로 연극의 제목을 확인하러 자료실로 갔다. 내가 편집 기사와 함께 촬영된 내용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잠깐만, 이거 뭐야?”


테이프를 작동시킨 후에 편집 기사가 화면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사람만 왜 이렇게 초점이 안 맞아? 이거 누군데 이렇게 이상하게 나왔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편집 기사는 나머지 촬영분을 빨리 감아서 뒤로 넘겨 보았다.


처음에는 심한데 그래도 갈수록 괜찮아지네…. 어어? 끝부분도 좀 이상한데? 이거 어쩌지? 중요한 사람 아니면 지워 버릴까?”


그 흐릿한 형체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휠체어 뒤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희미한 안개처럼 보였으나, 이바쵸프의 이름이 언급되자 갑자기 윤곽이 뚜렷해졌다. 한 손으로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어깨에 얹고 있었다.


편집 기사는 내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질문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편집 기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봐, 저거….”


편집 기사가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화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그 형체는 사람일 수 없었다. 사람이기에는 신체 비율이 너무 이상했다. 휠체어 뒤에서, 앉아 있는 사람의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어깨에 얹었다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형체는 그런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휠체어 뒤에 서서 그녀의 머리 위로 목만 내민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형체는 뚜렷해지면서 동시에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손을 꽉 쥐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도 여기에 대답하듯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눈에 띄게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또렷해졌고,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졌고, 몸에 힘이 들어가고 자세가 반듯해졌다.


인터뷰 내내 형체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때로는 손등을, 때로는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다시 한 번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봐…. , 저거, 대체 뭐야?”


편집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만 가로저었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형체는 분명하게 카메라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움직여 뭔가 말했다.


뭐야, 저게? 대체 어디서 뭘 찍어가지고 온 거냐고?”


편집 기사가 비명처럼 물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편집 기사 조수가 편집실 문을 왈칵 열고 쳐들어왔다.


찾았어요!”


언제나처럼 눈치 없는 조수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투란도트>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편집 기사가 이제는 완전히 경악하여 고함을 질렀다.


어둠을 비추고 다음날 사라지는 것은 희망, 태어날 때는 열병처럼 뜨겁다가 죽을 때는 차가워지는 것은 피….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2막에 나오는 수수께끼라고요. 하지만 푸치니는 이 작품을 완성 못하고 죽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완성했고, 그 작품이 이탈리아 초연을 거쳐서 러시아에 들어온 건 한참이나 나중이란 말예요!”


편집 기사 조수가 들고 있던 자료집을 휘두르며 설명했다. 편집 기사가 다시 소리쳤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들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다 온 거야? 인터뷰 화면에는 저런 게 찍혀 있질 않나….”


그것 좀 이리 내놔 봐.”


내가 편집 기사의 말을 끊고 조수에게 요구했다. 조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료집을 내밀었다.


인터뷰 화면이 왜요? 뭐가 찍혀 있는데요?”


질문을 무시하고 나는 서둘러 자료집의 책장을 넘겼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정확히 두 가지였다.


편집기사 조수의 말대로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프랑코 알파노라는 사람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자료집을 읽어 내려갔다.


-            1926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초연을 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28년 바쿠(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수도)에서 첫 상연을 했다. … 1931 <투란도트>는 처음으로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공연에 참여한 배우들과 연출, 제작진의 이름이 전부 나열되어 있었다. 그 명단 중 나는 무대 장식이라는 항목 아래에서 이바쵸프의 두 번째 아내였던 발렌티나 빅또로브나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자료집 책장을 넘겼다. 뒤에서 편집기사가 뭔가 항의했지만 듣지 않았다.


Il nome mio nessun saprà – 남자 주인공인 칼리프의 대사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네순 사프라.’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바쵸프가 몇 번이고 반복했다던 말이다. 정신병자의 헛소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낯선 언어를 힘겹게, 끈질기게 읽어 내려가다가, 같은 남자 주인공의 대사에서 나는 발견했다.


… il silenzio che ti fa mia.


“’티파미아는 사람 이름이 아니었어.”


내가 중얼거렸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야.”


?”


뒤에서 편집기사 조수가 되물었다. 그 질문을 무시하고 내가 편집 기사에게 부탁했다.


그 인터뷰 좀 뒷부분만 다시 돌려봐.”


, 뭘 보게?”


하여간 좀 돌려봐.”


내가 제대로 기억한다면, 이바쵸프의 유서는 “Nessun sapra, 내 사랑, 오직 내 사랑 ti fa mia.”로 끝난다. 자료집에 나온 <투란도트>의 가사대로 해석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사랑, 오직 내 사랑만이 너를 내 것으로 만든다가 된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그 부분이었다.


“… 이건 또 왜 이래?”


편집 기사가 중얼거렸다.


, 뭐가 문제야?”


먹통인데.”


편집 기사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봐. 전부 그냥 까매.”


편집 기사가 말했다.


내가 덤벼들었다. 그러나 편집 기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앞으로 돌려봐도, 뒤로 돌려봐도, 조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던 인터뷰는 사라지고 검은 화면만이 비칠 뿐이었다.


멍하니 편집 기사와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내가 황급히 편집기사 조수에게 외쳤다.


병원에 전화해 봐.”


?”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하고 다시 인터뷰하고 싶다고 해. 빨리, 다시 전화해서 약속 잡아!”


편집기사 조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내 기세에 눌려서 허둥지둥 편집실을 나갔다. 조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알고 있는 욕설을 모두 내뱉으며 점점 겁에 질려 가는 편집 기사와 함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인터뷰 화면을 헛되이 앞뒤로 돌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파랗게 질린 편집기사 조수가 편집실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내가 물었다. 그러나 편집기사 조수는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한 순간에는 더듬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게, , 그러니까, ….”


어떻게 됐냐니까? 전화 했어, 못 했어?”


, 그러니까, , 전화를, , , 하긴, 했는데….”


그런데 뭐?! 어떻게 됐어? 인터뷰 안 한대? 무슨 일이야?!”


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편집기사 조수가 내뱉었다.


죽었대요.”


죽다니? 누가?”


숙모님이?’라는 생각이 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물론 죽은 사람은 조수의 숙모님이 아니었다.


, 류보프, , 아르카디예브나 말예요. 죽었대요.”


편집기사 조수가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다시 고함을 지르려 하자 폭포수처럼 빠르게 내뱉었다.


우리가 가고 나서 방으로 데려갔는데 아까 밤중에 상태가 갑자기 급격히 안 좋아져서 수술실로 옮겼지만 그대로 사망했대요, 사인은 뇌출혈이랍니다.”


이런 젠장….”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리고 편집실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


그래서, 여자는 죽은 남자를 먹었고, 죽은 남자는 여자를 잡아먹었고, 그 인터뷰는 우리 시간과 돈과 특집을 잡아먹었군.”


PD가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50주년에 했던 거 찾아봐. 40주년이랑 30주년 것도. 되는 대로 이어붙여서 어떻게든 짜맞춰 봐.”


그리고 PD는 나가라고 손짓했다.


 


***


촬영분이 전부 날아갔다는 말에 촬영기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조금 전에 내가 했듯이 자신이 아는 욕설을 모두 퍼부었다. 그러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서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바쵸프가 결국 끝까지 사랑했던 여자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자료집을 보니 두 번째 부인이 <투란도트> 제작진에 참여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추억을 못 잊은 거 아니었을까?”


얘기가 그렇게 되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촬영기사가 담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아무도 모르는 이태리어까지 써 가면서 자기 마음을 감추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정치범으로 수감된 사람이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했다간, 그게 이혼한 전 아내든 현재 아내든, 장모의 친구의 옆집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몽땅 잡혀들어갔을 테니까.”


…, 그것도 말이 되는군.”


촬영 기사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맛있게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한껏 내뿜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 자넨 다르게 생각했어?”


아니, …. 자네 말을 들으니까 맞는 것 같아.”


내가 얼버무렸다. 촬영 기사는 꽁초만 남은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빨더니 연기를 내뿜고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부인이 그렇게 좋았으면 왜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한테 평생 달라붙어 있었을까?”


그러게 말이야.”


내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인터뷰 화면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것은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의 휠체어 뒤에 서서 화면을 향해 말하는 이바쵸프의 얼굴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분명히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입모양은 확실히 내 사랑이라 말하고 있었다. [러시아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주인공의 이름과 같은 류보프이다. ‘내 사랑’(любовь моя)이라는 구절은 듣기에 따라 류보프는 내 것이다’(Любовь - моя)라는 문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 역주]


낙원의 이름을 가진 내 사랑.’ 이바쵸프는 유서에서 연인을 그렇게 불렀다. 그녀의 이름에는 낙원이 두 개나 있었다.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라이스카야. [‘아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고 알려진 조화롭고 무구한 이상향의 이름. ‘라이스카야라이’(рай)는 러시아어로 낙원을 뜻한다. – 역주.]


간호사를 사랑한 미치광이, 혹은 간수를 사랑한 죄수.


Nessun saprà. 물론이다. 아무도 알지 못해야만 했다. 자신이 사랑한 간호사도 자신과 똑같은 혐의를 쓰고 체포되어,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어쩌면 자신과 같은 병원에 환자로 수감되게 하지 않으려면, 아무도 몰라야만 했다. 사랑만이, 오직 그의 사랑만이 그녀를 그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길을 가게 되었다. 55 - 반 세기가 넘도록 그녀는 그와 함께 둘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 돌벽 안에서, 그들은 행복했을까?


여자는 죽은 남자를 먹고, 죽은 남자는 여자를 잡아먹고, 그리고 인터뷰가 우리 특집을 잡아먹었지.”


내가 중얼거렸다. 촬영기사가 물었다.


?”


, 아냐. PD가 한 말이야.”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어쨌든 마감을 맞추기 위해서 지난 특집들을 뒤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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