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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가벼운 칼

2014.07.01 00:1807.01


가벼운 칼


대속(代贖)의 과정은 평범한 백성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그 광경은 생전 처음 보는 충격이었다. 장로들에게 불려가 “때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아무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더라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완전하게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자는 미리 마련된 높은 단상 위에 서 있었다.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상의와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폭이 넓은 하의 차림이었다. 그렇게 흰 옷을 입고 남자는 두 개의 기둥 사이에 서 있었다. 활짝 벌린 양 팔은 각각 기둥에 붉은 밧줄로 묶였고 눈은 폭이 좁은 붉은 가리개로 덮여 있었다. 핏빛 같은 짙은 붉은색 가리개가 남자의 흰 피부에 대비되어 괴로울 정도로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단상 아래에는 장로들이 마찬가지로 흰 옷을 입고 얼굴을 붉은 두건으로 가린 채 줄지어 서 있었다. 눈만 가린 남자와는 반대로 장로들은 붉은 두건에 뚫린 좁은 구멍으로 눈만 내놓고 있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장로들이 모여 있었으나 궁의 마당에는 완전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다. 그녀를 데려간 장로는 모여서 장로들 뒤쪽의,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어떤 지점에 그녀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장로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속은 신성하고 경건한 행사이니 움직이지 말고 큰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는 붉은 두건을 꺼내어 머리 위로 덮어쓴 뒤 흰 옷과 붉은 두건 차림의 다른 장로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징 소리가 울렸다. 아무렇게나 모여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장로들이 조금씩 옆으로, 뒤로 움직여 줄을 맞추었다. 여전히 말소리도,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와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궁의 마당을 잠시 떠돌았다.

다시 한 번 징이 울렸다. 장로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흰 옷을 입고 붉은 두건을 쓴 사람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역시나 흰 옷을 입고 붉은 두건을 쓴 시동이 뒤따라 올라가서 은쟁반에 담은 황금 가위를 내밀었다. 단상 위의 사람은 시동에게서 가위를 받아 들었다. 시동은 익숙한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돌려 단상에서 사라졌다.

가위를 든 사람은 기둥 사이에 묶인 남자의 상의를 자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대단히 익숙한 동작으로 정해진 지점에 재빠르게 가위 날을 스쳤다. 가위를 든 사람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기둥 사이에 묶인 남자의 상의가 조각조각 하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며 잠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시동이 다시 올라와서 은쟁반을 내밀었다. 가위를 든 사람이 황금 가위를 쟁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시동이 뒤로 물러서자 그 뒤에서 다른 시동이 나타났다. 가위를 내려놓은 사람에게 두 번째 시동이 둘둘 말린 채찍을 내밀었다. 흰 옷을 입고 붉은 두건을 쓴 사람이 진중하게 채찍을 받아 들었다. 두 번째 시동은 황금 가위가 놓인 은쟁반을 든 첫 번째 시동과 함께 재빨리 몸을 돌려 단상에서 사라졌다.

흰 옷과 붉은 두건의 처형인이 둘둘 말린 채찍을 풀었다. 굵직한 채찍은 처형인의 손에서 바닥까지 늘어졌다. 그녀는 채찍 끝이 세 가닥으로 갈라진 것을 보았다. 

궁의 마당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말소리나 숨소리는 물론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흰 옷과 붉은 두건의 처형인이 불시에 팔을 크게 휘둘렀다. 채찍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라 기둥 사이에 묶인 남자의 맨살에 휘감겼다. 붉은 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남자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흰 옷과 붉은 두건의 처형인이 채찍을 뽑듯이 잡아당겼다. 그녀는 기둥 사이에 묶인 남자의 가슴에서 채찍 끝이 감겼던 곳을 따라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처형인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채찍이 다시 맨살에 휘감겼을 때 기둥 사이에 묶인 남자는 이번에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그 앙다문 입 모양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동작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강철 같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그 힘은 충분히 무서웠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단상을 바라보았다.

대속의 행사가 끝날 때까지,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기둥 사이에서 풀려나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어깨를 쥔 손은 그녀를 풀어주지 않았다.

남자가 기둥에서 풀려나 바닥에 쓰러지는 것으로 행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닥에서 잠시 움직이지 못하던 남자는 꿈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앉아 힘겹게 상체를 세워 두 팔을 하늘로 향했다. 양 손목에는 여전히 붉은 밧줄이 감겨 있었다.

“대자연과 우주 삼라만상께 속죄하나이다!”

남자가 여전히 붉은 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채 하늘을 향하여 외쳤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 데 비해 목소리가 예상 외로 크고 우렁차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 속죄하나이다. 속죄하나이다.

마당에 모여 선 장로들이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뒤에 선 누군가의 손이 다시 어깨를 건드려서 그녀도 서둘러 장로들을 따라 ‘속죄…’라고 중얼거렸다.

“죄를 씻어 주소서!”

남자가 다시 외쳤다. 

- 씻어 주소서. 씻어 주소서.

장로들이 중얼거렸다. 그녀도 따라서 속삭였다.

“어둠과 불행을 거두어 주소서!”

남자의 목소리가 궁의 마당을 가득 울렸다.

- 거두어 주소서. 거두어 주소서.

여기까지 외치고 남자는 양 팔을 그대로 하늘을 향해 벌린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두건을 쓴 흰 옷차림의 처형인이 아까의 두 시동을 데리고 다시 단상 위로 올라왔다. 처형인은 시동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남자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는 남자의 흰 바지 허리 부분이 피로 붉게 물든 것을 보았다. 처형인과 두 시동은 축 늘어진 남자를 조심스럽게 끌고 단상 뒤의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뒤 비로소 궁의 마당을 가득 메운 장로들은 술렁거리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셔야지요.”

뒤에 서 있던 사람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부군을 알현하실 시간입니다”

그녀는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두건의 장로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앞장서 가는 장로를 따라 그녀도 궁의 마당을 가로질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섰을 때 남자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방에 ‘들어섰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남자의 방 문 앞에는 붉은 두건을 쓴 사람 두 명이 서 있었다. 혹시 아까의 그 시동들인지 그녀가 궁금해진 순간 시동들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여기까지 안내한 장로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척 없이, 안에 있는 사람의 허락을 받거나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그녀를 방 안으로 불쑥 밀어 넣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남자가 여전히 상의를 벗은 채였기 때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남자의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어서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당황해서 망설이고 있을 때 남자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옷을 갖춰 입는 게 예의라는 건 압니다.”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아까 궁의 마당을 울리던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기운 없이 속삭이는 듯 목쉰 소리였다.

“하지만 아직은 입을 수 없어서…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힘겹게 간신히 몸을 움직여 다가와서 남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남자는 아름다웠다. 검은 눈은 부드러웠고, 피부가 희고 얼굴의 골격이 섬세했다. 그러나 남자는 지쳐 보였다. 아마 굉장히 아플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양 손을 내밀었다. 손목에는 아직도 붉은 밧줄이 감겨 있었다.

“풀어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속삭였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밧줄이 풀렸다.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밧줄을 놓쳤다. 붉은 밧줄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그녀를 가볍게 껴안고 입맞추었다.


남자의 침상 옆에는 은 그릇에 담긴 물과 깨끗한 흰 천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피를 닦아낸 뒤에 상처에 바를 약 단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흰 천을 반으로 접어 물에 적셨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상처를 닦아주는 동안 남자는 천천히 지친 듯한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의무와 책임… 무거운 의무와 괴로운, 고통스러운 책임만으로 가득한 삶입니다.”

남자는 침상 위에 반듯하게 앉아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그녀가 물에 적신 흰 천으로 등의 갈라진 상처를 건드려도 아무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이 계속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그녀는 눈치챘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탓할 수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더 늦기 전에,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는 다시 당황해서 남자의 상처를 닦던 손을 멈추었다. 이것은 예정에 없던 말이었다. 붉은 밧줄, 입맞춤, 상처를 닦기 위한 물과 흰 천, 닦아낸 뒤에 상처에 바를 약에 대해서는 이미 오늘을 준비하면서 장로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다. 방에 들어선 과정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지만 들어와서 보니 모든 것이 예정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남자의 말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예정에 있었다 해도,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저에겐 달리 갈 곳이 없는 걸요.”

남자가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짙은 검은 눈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여서 그녀는 겁을 먹었다.

“미안합니다.”

남자가 속삭였다.

“운명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언젠가 그 운명을 받아들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녀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인 뒤에 그녀는 흰 천을 도로 침상 옆에 놓고 약 단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그녀가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옷을 다 입혀줄 때까지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옷을 입다가 등과 가슴의 상처가 천에 쓸렸을 때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순간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속자의 아내로서의 생활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심했고 그녀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자유로웠다.

혼인의 예식을 치른 뒤에도 그녀는 남자와 부부가 되지 못했다. 나라의 땅은 넓었고, 산이 높고 계곡이 깊고 강은 넓고 숲은 어두웠다. 그러므로 나라 곳곳의 넓고 깊고 어두운 지역에서 언제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이 찾아온 마을에는 도적떼가 창궐했고, 그 도적들이 휩쓸고 간 이웃 지역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백성들의 삶에 이런 불행이 찾아들 때마다 남자는 그들의 죄를 씻고 불운을 타개하기 위해 수시로 장로들에게 불려나가 밤새워 회의를 하거나 속죄의 예를 행했다. 장로들이 천문과 우주의 이치를 읽어 정해둔 합방의 날은 번번이 이런 국가적 사건과 행사들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고, 남자는 대속의 예를 행한 뒤에 몸이 회복될 새도 없이 다음 예식을 견뎌내야 했다. 상처가 빨리 아물고 남자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라 곳곳의 용하다는 의원들이 불려왔고, 그 동안 그녀는 별실에 방치된 채로 남자 곁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녀로서는 크게 불만이 없었다. 합방의 날을 위한 옷과 이불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심심하면 치마폭이나 베갯잇에 새로 수를 놓았다. 남자의 상처를 닦을 때 쓸 깨끗한 천을 마련하고 예식에 눈가리개로 사용될 붉은 수건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물건들은 성스러운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진짜 예식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런 물건들을 갖다 놓는다는 핑계로 남자와 함께 사용할 신방에 몰래 드나들곤 했다. 물론 핑계는 그녀 혼자 생각해낸 것이었고, 실제로는 아무도 그녀를 막아서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방에는 큰 침상과 조그만 탁자, 의자 두 개, 이렇게 기본적인 가구만 갖추어져 있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했으나 벽에는 낡고 긴 칼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 칼이 몹시 반가웠다.

아주 오래 전에, 궁에 들어오기 전, 아직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있었고 형제들과 함께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그녀는 그런 칼을 본 적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부모님의 집에 걸려 있던 칼은 엄청나게 크고 손잡이와 칼등에 금과 은으로 장식이 되어 화려했으며 칼집에서 뽑으면 칼날이 눈부시게 빛나서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 칼이 예뻐서 좋았다. 그러나 칼 쓰는 연습은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쯤 그 칼을 휘둘러볼 수 있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아버지는 언제나 “네가 좀 더 큰 다음에”라고만 대답했고, 그게 언제인지 물으면 오빠들과 함께 연습이나 하라고 타일렀다. 오빠들은 막대기를 들고 하는 가짜 칼싸움을 즐겼지만 어린 그녀의 눈에는 진짜 칼이 아닌 나무 막대기는 몹시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막대기를 들고 뛰어다니다 보면 힘이 들고 막대기가 손에서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싫었다. 무겁다고 아무리 불평을 해도 아버지는 그녀가 지겨워할수록 더 끈질기게 연습을 시켰다. 견디다 못해 아버지 앞에 막대기를 내던지고 큰 소리로 울며 도망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뒤에서 “계집애들이란…” 하고 혀를 찼지만 더 이상 붙잡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벽에 걸린 칼을 내려 칭얼거리는 그녀에게 들어보게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칼을 직접 만져본 것은 그 때 단 한 번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 칼을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잡아서 가볍게 들곤 했는데, 그녀가 실제로 잡아보니 양 손으로도 제대로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어머니가 했듯이 그녀도 한 손으로 칼집을 잡고 다른 손으로 칼을 꺼내려 해 보았지만, 너무 무거워서 칼집을 제대로 받칠 수도 없었고 칼을 꺼낼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애쓰다가 결국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머니가 말했다.

“칼은 본래 가벼운 거야.”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볍기는커녕 그 무게는 양 손으로 받쳐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칼은 본래 부드럽고 가벼운 거다. 좀 더 연습해서 익숙해지면 너도 알게 될 거야.”

그 뒤로 그녀는 막대기를 들고 연습하는 것은 여전히 싫었지만 더 이상 부모님께 불평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낡고 녹슨 칼을 보면서 그녀는 어렸을 적 배웠던 칼 쥐는 법, 휘두르는 법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자루에 양손이 나란히 놓이도록 쥐고 팔꿈치가 벌어지지 않도록 안쪽으로 모으고 내리치거나 찌를 때는 코에서 명치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똑바로 칼끝을 움직인다. 아버지가 늘 잔소리처럼 되풀이하던 이런 말을 생각하며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벽에 걸린 낡은 칼을 떼어서 내려 보았다.

칼은 무거웠다. 칼자루와 칼집에 예전에는 화려한 문양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먼지가 끼고 녹에 덮여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무겁기도 했지만 녹과 먼지 때문에 날이 칼집에서 잘 빠져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칼집에서 꺼내 보니 칼날도 녹이 슨 데다 완전히 무뎌져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되풀이해서 들었던 대로 양 손이 일직선으로 나란히 놓이도록 칼자루를 쥐고 머리부터 명치까지 반듯한 선을 긋는다고 상상하며 칼을 휘둘러 보았다. 한두 번 칼을 들었다 내렸다 했을 뿐인데 팔이 아프고 숨이 차서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남자의 눈가리개로 쓰려고 만들었던 붉은 수건을 꺼냈다. 칼집에서 칼을 빼어 녹슨 칼날을 문질러 보았다. 녹을 전부 닦아낼 수는 없었고 칼날은 여전히 무뎠지만, 그래도 붉은 천에 먼지와 녹이 잔뜩 묻어 나온 모습을 보자 칼날이 조금은 깨끗해진 것 같아서 그녀는 흐뭇했다.

남자가 나라의 일로 바쁘게 시달리는 동안 별실에 있는 그녀를 아무도 찾지 않았다. 시녀들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장로들은 그녀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심심할 때마다 신방으로 가서 벽에서 칼을 내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르쳐주었던 것을 기억하며 휘둘러 보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어떤 부분은 선명했으나 어떤 부분은 불확실했고 중간중간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누운 채 옆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것을 기억했다. 빼빼 말라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입을 멍하니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하늘에서 비가 내려 빗방울들이 어머니의 벌린 입 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확실하게 기억했다. 물이 있으면 된다고, 어떻게든 물과 먹을 것을 구해 오면 어머니가 살아날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너무나 배가 고파서 물이나 먹을 것을 구해 오기는커녕 누운 자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의 옆얼굴을 그렇게 들여다보던 그 때에 어머니는 이미 굶어 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녹슨 칼날을 닦으며 생각했다.


남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남자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는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습니까?”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뒤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칼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상상도 못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남자는 이렇게 물으며 다가서려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멈추었다.

그녀는 칼을 조심스럽게 칼집에 넣었다.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칼을 받아 들었다.

“잘못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무서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함부로 물건을 만지고… 죄송해요….”

남자는 칼을 내려다 보았다. 

“누구의 허락을 받는다는 겁니까?”

남자의 건조하고 조용한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장로…님… 들… 그리고….”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 겁을 먹어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되었다.

남자가 그녀에게 다시 칼을 내밀었다. 그녀는 받아도 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몸을 움츠렸다.

“여기는 부부의 방이니 당신의 방이기도 합니다.”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저와 당신의 것입니다. 이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다시 칼을 내밀었다. 그녀는 받아 들었다. 

“제가 방해가 되니 나가겠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문을 열려다가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끔 와서 봐도 됩니까?”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 방을 나갔다.


남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매번 문가에 잠시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고 그녀가 놀라서 칼을 내리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나가곤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그녀는 칼을 휘두르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쳐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되었다. 

칼은 무거웠다. 머리 위로 쳐들 때마다 그녀는 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계속 연습하니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녹과 먼지만은 그녀가 끈질기게 닦아내어 거의 다 사라졌다. 물론 칼집의 문양은 이미 빛이 바래서 이전의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완전히 무뎌진 칼날도 무엇으로 어떻게 갈아야 제대로 칼날답게 날카로워질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칼이 이제 최소한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만족했다.


남자는 그녀가 칼을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집에서 시작해서 칼날, 그리고 손잡이까지 꼼꼼하게 닦아내는 모습을 오랫동안 문가에 서서 보고 있었다.

“북쪽 지방에 큰 불이 났습니다.”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남자가 와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그녀가 칼을 다루는 동안 남자가 말을 건 적이 없었다.

“밤에 대속의 의례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으나 남자는 조용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의 말이 끝난 줄 알고 다시 칼을 닦기 시작했다.

“큰 불이 났기 때문에, 의식에서도 불을 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남자가 갑자기 다시 말했다. 그녀는 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불을 쓰는 의식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무서워하는구나. 그녀는 불현듯 깨달았다. 

남자는 수많은 의식을 견뎌내면서도 그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속죄의 의식을 행하는 사람도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그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속을 행하는 자는 그 가문 전체가 장로회 바로 아래 서열에 속했다. 대속자의 가문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건하고 중요한 예식을 책임지는 집안으로 존경 받았고 그 때문에 단일 가문으로서는 최고의 권력을 가졌다. 대속의 의례는 종교적 예식일 뿐 아니라 최고로 성스러운 국가적 의례였고 그만큼 비밀스러웠다. ‘많은 책임과 중대한 의무가 따른다’는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설명 외에는 그녀도 직접 보기 전까지 그것이 어떤 과정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내가 같이 가 줄까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사실 자신이 의식에 참관해도 되는지조차 그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혼인 직전에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아무도 그녀를 의식에 부르지 않았다. 그녀도 딱히 참관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묻지 않았다.

“아니오.”

남자가 단호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 생각한 뒤에 말했다.

“의식이 끝나면, 의원들이 와서 치료를 해줄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거의 속삭이듯이 낮아졌다.

“그 때, 옆에 있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의식이 끝난 것은 자정을 훨씬 넘겨 새벽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시녀가 알려주러 왔다. 그녀는 따라 나섰다.

불이 닿은 곳은 남자의 허리 부근이었다. 의술을 모르는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도 상처는 심해 보였다. 남자는 상의를 벗은 채 좁고 긴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고, 그 주위를 의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의원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남자가 뭔가 말하자 의원이 시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시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남자를 둘러쌌던 의원들이 옆으로 조금씩 비켜서 자리를 내 주었다. 그녀는 남자가 엎드린 침상 곁에 섰다.

갑자기 뭔가 그녀의 손을 만졌다. 그녀는 놀라서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힘이 너무 강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의원들은 남자 주위에 서서 상처를 닦아내고 찢어진 곳을 꿰매고 불에 덴 자리의 탄 살갗을 벗겨내거나 물집을 터뜨려 진물을 빼내고 약을 발랐다. 치료를 받는 내내 남자는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이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치료가 끝난 뒤에 의원들은 차례로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시녀도 조용히 방을 나갔다. 시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낮추어 침상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침상에 고개를 파묻은 채 아래로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가끔 어깨가 들썩였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깨나 등은 상처 입지 않은 곳이 없어서 손을 댈 수 없었다. 계속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남자의 흐느낌은 마침내 그쳤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침상 곁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말없이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를 찾아온 것은 며칠이나 지난 뒤였다. 그녀가 문가를 돌아보니 남자가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이 괜찮은지 물으려 했을 때 남자가 먼저 말했다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무엇이 어째서 무책임하다는 것인지 그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괜찮아요? 다친 데 아프지 않아요?”

“고통은 제 의무입니다. 그걸 견디는 게 제 책임이고 운명입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부끄럽게도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사과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거칠고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하는 대로 따라가서 손을 잡아준 것이 실수였는지,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남자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남자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돌연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옆에 있는 침상 위에 내던지듯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그녀의 양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녀는 더욱 겁을 먹었다.

남자는 화난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남자가 때리면 피해야 할지 맞아야 할지 고민했다. 아마 그대로 맞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남자가 그녀를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입술에 키스한 뒤에 그녀를 품에 꽉 붙잡아 안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에게 안겨서 그녀는 배에 뭔가 단단한 것이 닿는 감촉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가 정확히 이해하기 전에 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가 버렸다.


합방의 날이 마침내 정해졌다. 혼인의 예를 올린 지 석 달이 넘게 지난 뒤였다.

본래 법도대로라면 몇 주에 걸쳐 몸을 정갈히 하고 준비를 해야 했지만 이미 혼례 이후로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게다가 나라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남자가 언제 회의나 예식에 불려나갈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장로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통보를 받았다. 아침부터 궁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몇 번씩 갈아입는 와중에 신방에서의 법도에 대해 또 다시 귀가 닳도록 되풀이해서 들어야 했다. 이런 야단법석에 하루 종일 시달린 끝에 저녁이 되자 그녀는 이전처럼 남자와의 신방으로 안내되어 이전처럼 아무 말 없이 밀어 넣어졌다.

남자는 이전처럼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위 아래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남자는 이전처럼 일어섰다. 

그녀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난 번에 남자가 손을 확 잡고 거칠게 끌어당겨 입맞추던 것이 생각나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남자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동작은 거칠지 않고 가볍고 부드러웠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안심하고 남자가 입은 흰 웃옷의 어깨 부분을 잡아 뒤로 젖혔다.

옷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남자의 가슴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보기 흉한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속삭였다.

“겁내지 마십시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아프지 않아요?”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지난 번처럼, 예정되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공들여 그녀를 대했다. 

그녀의 상의 아래로 손을 넣어 배를 부드럽게 만졌다. 배탈난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몸짓이라서 그녀는 조금 웃었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고 손을 조금씩 위로 올려 손바닥으로 갈비뼈와 등을 감싸듯이 쓰다듬었다. 남자는 손이 가슴에 이르기 전에 잠시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가볍게 살살 만졌다. 처음에 그녀는 간지러워서 웃었다. 그러나 점차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지자 남자는 그제야 그녀의 옷을 천천히 하나씩 벗겼다.  

남자는 그녀의 가슴에 입맞추었다. 몸의 다른 곳에도 입맞추었다. 그 입술은 주의 깊고 가볍고 따뜻했기 때문에 그녀의 몸도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따라 함께 달아오르며 상기되었다. 남자가 그녀의 골반을 쓰다듬고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망설이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다리를 벌렸다. 

남자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화난 듯한 표정으로, 시선은 그녀의 머리 너머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그녀가 기다리다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남자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았다.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어리둥절해서 마주 쳐다보았다. 

마침내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는 자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그녀가 잠시 망설인 뒤에 다시 물었다. 남자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아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고민했다. 그리고 침상에서 내려갔다. 

그녀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그녀 앞에 서서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의 몸 전체를 보았다. 남자의 등과 가슴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덮여 있었다. 허리 부근의 불에 데었던 곳은 커다랗게 피부가 일그러졌고 미처 다 아물지 않은 그 화상자국 위에 다시 최근에 생긴 상처가 나 있었다. 남자의 다리에도 오래 된 흉터들이 있었고, 손목은 밧줄에 여러 번 묶이고 쓸려서 굳은살이 생겨 있었다.

“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살았다기보다,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자식을 낳으면 저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전 그걸 원치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불경한 생각인 것은 저도 압니다. 제 의무를, 이 나라에 대한 가장 큰 의무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장로들께 고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로들에 대한 의무 같은 건 상관 없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아무한테도 고하지 않아요. 난 당신 아내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은 짙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굽혀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일어섰다. 그녀에게 덤벼들어 온몸으로 밀어서 그녀를 침상에 눕혔다. 마치 목숨이 걸린 일인 듯 격렬하게 그녀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아팠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을 뒤덮은 상처와 흉터를 생각하면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남자가 그녀의 위에서 움직일 때 그녀는 무심결에 남자의 등에 손을 대었다. 남자의 짧은 비명과 얼굴에 나타난 고통의 표정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요.”

그래서 그녀는 있는 힘껏 남자를 껴안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침상 옆에 준비된 흰 천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닦았다. 하얀 천에 새빨갛게 피가 배어 나온 것을 보고 남자는 굳어진 듯 그대로 멈추었다.

“아팠어요?”

남자가 흰 천의 붉은 얼룩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팠어요?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나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흰 천을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상에 똑바로 누웠다.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상처 입은 몸 위에 그녀의 몸을 얹었다. 남자는 등이 침상에 닿았을 때, 그리고 그녀의 몸이 가슴에 닿았을 때 가늘게 신음했다.

그녀는 남자 위에 엎드린 자세로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녀도 남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귀를 대고 남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오기 전엔 어떻게 살았어요?”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은 일과, 부모님과 오빠들도 그렇게 죽은 것, 자신도 죽을 뻔했으나 누군가에게 구출되어 장로들의 손에서 자라난 일을 기억나는 한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해서 장로들에게 발견되었는지, 왜 나를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선택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남자는 자신의 가슴에 기댄 그녀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남자는 열 세 살 나이에 처음으로 먼 지역에서 일어난 홍수와 전염병을 알아맞힌 것, 그리고 이듬해에 가뭄이 들었을 때 첫 예식을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예언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남자가 말해주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는 거니까 예언은 아니에요. 그리고 항상 맞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면서 남자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로들이 군대를 보내 정찰을 하게 해요.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의식을 크게 행해야 하니까.”

“이루어지지 않으면요?”

그녀의 질문에 남자는 조금 웃었다.

“장로회에서 ‘눈이 흐려진’ 데 대한 책임을 물어요. 그러면 나는 ‘눈을 맑게’ 하기 위해 좀 더 엄격한 수행을 하게 되죠.”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남자가 머리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드디어 내놓았다.

“의식을 할 때, 많이 아프지 않아요?”

“고통을 견디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남자가 즉시 대답했다. 의례적으로 되풀이된 질문에 대한 훈련된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 물었다.

“처음엔 어땠어요? 어렸을 때에도 지금처럼 했어요?”

남자는 대답 대신 양팔로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녀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꽉 안은 뒤에 남자는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뭄이 들어서 곡식이 모두 말라 죽었어요. 그래서 흉년과 기근이 찾아왔고… 아주 먼 지역이었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였어요. 죽어가는 부모와 그 옆에서 우는 아이들….”

파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남자가 그녀를 더 세게 껴안고 말을 이었다.

“군대가 정찰을 끝내기까지 석 달이 넘게 걸렸어요. 먼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찰을 마친 군대가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더 걸렸고… 그 동안 나는 매일 그곳의 참상을 눈앞에서 보았어요. 푸르던 숲과 밭이 갈색으로 말라버리고,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람들….”

남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마침내 군대가 돌아와 내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광경에 대해 보고했을 때, 그 순간 나는 마음의 각오를 했어요. 예식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남자는 다시 말을 끊었다. 눈을 감았다.

“채찍이 몸에 닿는 느낌… 살이 찢어지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어요. 굶주리며 불행 속에 죽어간 사람들, 서로 싸우고 죽이며 죄악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 불행과 죄악이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 해야 하니까요.”

남자는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어요.”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남자가 먼저 말을 이었다.

“당신만은 살아남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그래서 군대가 떠나기 전에 미리 명령했어요, 수습할 때 당신만은 죽이지 말고 데려오라고. 불운도 죄악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니까요.”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 내 짝이라는 걸 알았어요.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갖고 싶었어요.”

그리고 남자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


남자가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기 위해 나가버린 뒤에 그녀는 신방에 혼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군대가 정찰을 끝내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수습할 때 당신만은 죽이지 말고”라는 남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뼈와 가죽만 남은 해골 같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들도 곁에 누운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군인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가슴에 창을 찌르던 광경을 그녀는 갑자기 떠올렸다…

아버지는 군인들의 창에 꿰뚫려 벽에 고정되었다. 창에 찔린 아버지의 가슴에서 피가 강물과도 같이 흘러 넘쳐 바닥을 적셨다. 군인들이 그런 아버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벽에 걸린 칼을 떼내 그녀와 함께 말에 싣고 갔다. 아버지는 가슴에 창이 꽂혔는데도 가늘게 숨을 헐떡이며 짐짝처럼 군인들의 말 위에 실려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이해했다. 군인들은 근방에서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뭄과 기근으로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고,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들이 굶어 죽을 동안 군인들은 그 죽음을 “정찰”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리 전체가 몰락한 뒤에 마을을 휩쓸고 들어와 그 때까지 질긴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마저 죽이고 값 나갈 만한 물건들을 훔쳐갔다. 

그녀를 키워준 장로들과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는 이런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라의 위정자라는 사람들은 굶주리는 곳에 식량을 보내거나 병든 사람들에게 약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불운을 맞이한 평범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죽음만이 당연한 해결책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위정자들은 도움을 기다리는 백성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지켜보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죽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서 직접 죽였다. 꼭꼭 닫힌 궁 안에서 그들끼리 벌이는 속죄 놀이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남자가 목적도 이유도 없는 고통을 자청한다 해서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절박하게 갈구했던 것은 남자의 공허한 속죄가 아니라 쌀 한 자루, 물 한 병이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칼을 떼어냈다. 칼을 내리는 순간 그 무게를 여전히 견디지 못해서 그녀는 휘청거렸다. 간신히 침상에 앉아서 그녀는 칼을 칼집에서 꺼내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들여다보았다. 칼은 이제 먼지 한 톨, 녹슨 곳 한 점 없이 반들반들했다. 그러나 칼날은 완전히 무뎌져서 손으로 문질러도 베이지 않았다. 

이런 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칼로는 아무도 죽일 수 없다.

“언젠가는 이해할 줄 알았어요.”

그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남자가 문간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흰 옷이 유령처럼 허공에 떠 있는 듯 보였다.

“뭘 이해해요?”

그녀가 되물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당신의 운명이고, 우주 삼라만상과 자연의 뜻이라는 것.”

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당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걸 운명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남자는 빙긋 웃었다. 그녀가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칼이 가벼웠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다른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손바닥 안에 부드럽게 감겨온 칼의 감촉, 그 가벼움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뭉툭하고 무딘 칼끝이 쉽고 빠르게 남자의 명치를 뚫고 들어갔다. 남자는 칼에 찔린 채 벽에 기대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가 흘러내려 남자가 앉은 곳 주변을 온통 적셨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남자가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이것이 내 최후의 속죄로군요….”

남자가 속삭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몸에서 칼을 뽑았다. 칼은 여전히 가벼웠다. 

혼자 힘으로 궁을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궁 밖의 세상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었다. 궁의 담장 너머 어딘가 먼 곳에 있었던 고향 마을은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해서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장로들은 남자를 대신할 새로운 대속자를 선출할 것이고, 그렇게 위정자들은 불행에 처한 백성들을 돕는 대신 자기들끼리 궁 안에서 성스러운 속죄라 이름 붙인 비뚤어지고 가학적인 연극을 계속하며 자신들만의 좁고 추악하고 이기적인 우주 삼라만상 안에서 흥청망청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손에 쥔 칼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뭉뚝하게 무뎌진 칼날에서는 죽은 남자의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칼을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살아서 열린 하늘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가벼운 칼이 왼손에 안겨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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