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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푸른 숲의 남자

2006.06.03 01:3606.03


로맨스

푸른 숲의 남자  정대영






창 밖으로 서리가 내린다. 황량한 뜰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술잔을 들고 불 주변에 모여 조용히 떠들고 허하게 웃는다. 하나같이 커다란 체격에 험상 궂은 얼굴, 그리고 가늘고 긴 검을 찼다. 용병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마을에서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건달에 불과한 자들이다. 그저 돈푼이나 벌기 위한 건달의 자원을 아버지는 귀족에 대한 경애로 받아들였고, 거기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던 딸의 호위까지 맡겼다. 기회만 된다면 저택을 털고, 사람을 살해하고, 불도 지를 수 있는 무뢰한들을 스스로 뜰에 들여놓다니... 도적을 막기 위해 도적을 들여놓은 격이 아닌가- 힐데그라트는 한숨을 내쉬며 창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별채에 갇힌 지도 벌써 두 달하고도 열흘이 흘렀다. 아버지는 도적으로부터 보호 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도적에게 사로 잡혀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함과 불쾌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으려니, 닫힌 문 너머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채에 갇힌 딸을 달래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질렸다. 재담꾼도, 재주꾼도, 떠돌이 가수도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 오히려 기분이 상할 뿐이었다. 힐데그라트는 어느 사이 깊이 가라 앉은 목을 간신히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뮐러,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쏘아붙이듯 대꾸하고나니 적막이 찾아 든다. 당분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면 만나고 싶지 않다. 특히나 가문과 관계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피하고 싶다. 차라리 뻔한 이야기를 이상한 단어로 꼬아 말하는 한심한 서적이나, 괴이한 기행 같은 이야기를 잘난 듯이 써놓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훨씬 낫다. 마침 오늘 아침 집사에게 부탁했던 새 책 꾸러미를 받아 두지 않았던가.

“아가씨, 잠시 지나는 길에 뵙고 싶어 찾아 왔습니다.”

탁자 옆에 무성의하게 쌓아둔 책 더미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어 읽으려는데, 어쩐지 기억 속에 엷게 남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그라프, 스테판 그라프입니다, 아가씨.”

조금 고민한 끝에 겨우 스테판 그라프라는 이름을 기억해 낸다. 스테판 그라프- 그녀가 줄곧 선생님이라고 불러 버릇한 탓에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곤 했던 가정 교사의 이름이 아닌가. 힐데그라트는 책을 다시 탁자에 얹어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들어오세요.”

곧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그녀가 뛰쳐나갈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딱 한 사람이 드나들 만큼 열리는 문 사이로 익숙하지만 기억보다는 좀 많이 늙은 얼굴이 보인다. 검소한 정장과 빛 바랜 모자, 다리를 절지만 품위 있는 몸가짐이 잠깐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끌어낸다.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고, 그녀에게서 신뢰 받았던 가정 교사,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그리고 넓은 마음을 지녀 그녀는 물론 그녀의 오빠와 동생을 잘 이끌어주었던 가정 교사의 늙은 모습이 어쩐지 애닯았다.

“오랜 만에 뵙는군요, 아가씨.”
“오랜 만이에요, 선생님.”

별실 안으로 걸어온 그라프가 모자를 벗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는다. 힐데그라트 역시 두 손을 모아 쥐고 가만히 몸을 숙였다.

“앉으세요.”

다리가 불편한 그라프에게 의자를 권하고, 아직 따끈한 주전자에서 차를 따른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제가 방해를 한 게 아닌가 걱정이군요.”

찻잔을 받아 든 그라프가 탁자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며 묻자, 힐데그라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마땅히 할 일이 없었을 뿐이에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몇 달 전부터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정말 드물었거든요.”
“그렇군요.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별채에 와 계시다고 해서 병에 걸리신 줄 알았는데,
막상 찾아와보니 정원에 용병 같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더군요.”
“용병이라니요. 근처 마을에서 마구 잡이로 불러들인 불량배들이에요.”
“허, 그렇습니까.”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그라프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겪으셨나요?
남작님께서 아가씨와 이야기라도 나누고 가라고 말씀 하셔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굳이 들르게 되었습니다만.”

그라프의 질문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슬쩍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역시 그라프는 아버지로부터 그녀의 마음을 바꾸거나 혹은 설득하라는 부탁을 받은 듯싶었다.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석 달 전, 머나먼 이국의 물건과 전시회를 구경하기 위해 항구 도시에 들린 후 돌아오는 길에 도적떼를 만났다. 왕국이 반드시 전원 교수형에 처하리라 선언한 ‘푸른 숲’이라는 이름의 도적떼였다. 도적떼는 ‘인육을 먹고, 학살을 즐기고, 겁탈을 일삼는다’는 명성에 걸맞을 만큼 순식간에 마차 호위병들을 쓰러뜨리고, 마차를 둘러쌌다. 호위병들의 비명과 함성, 그리고 도적떼의 환호성이 마치 지옥 한가운데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 공포스러운 말발굽 소리와 거친 함성 소리에 그녀가 자결을 결심한 그 순간, 누군가 마차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부인.’

순간 도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점잖은 목소리가 그녀를 사로 잡았다. 사람을 사로잡는 부드러운 음성에 자결을 위해 들었던 호신용 단검을 든 체로 멍하니 마차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마차 안으로 짓쳐 들어온 도적은 그 행동에 걸맞지 않게 고귀한 혈통을 물려 받았음에 틀림없는 맑은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기품이 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날카롭고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차 운전수와 부인의 호위병을 모두 사로 잡았습니다. 무사히 귀가하시려면,
모쪼록 이 포로들을 사주셔야 할 것 같군요. 지불하신 금액은, 글쎄요, 반드시
나이페르그 가문의 이름으로 좋은 일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먼 훗날 나이페르그 가문을 도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천연덕스럽게 하지만 기품을 잃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깊고 먼 곳에 빠져있는 듯한 푸른 눈동자는 분명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에서 조금 들떠있고, 가망은 전혀 없지만 아득한 희망과 잔잔한 의지가 물결치는 그런 꿈을 말이다. 힐데그라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의자 아래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도적에게 내밀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여유 있게 주머니를 받아 들려던 도적이 순간 손을 멈추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포로는 필요 없어요.’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아무리 바보라도, 아무리 어리석다 하더라도 저 눈동자의 진실함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파도처럼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여 곁으로,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이끌어가는 그 눈동자, 그 푸른 꿈의 물결이 힐데그라트를 이끌었다.

‘나를 데려가 줘요. 아니, 데려가야만 해요.’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던 도적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꿈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도적은 대답 없이 머뭇거리며 주머니를 받아 들고, 말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한참 만에 놀란 표정을 지운 도적이 마침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순간, 마차 바깥에서 함성을 울러 퍼졌다. 도적은 마차 문을 열고, 그녀를 한 번 돌아본 다음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그라프는 엷게 미소 지으며,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 놓았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큰 위험에 처해 계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요.”

그녀가 무사히 귀가한 지 몇 일이 흘러 ‘푸른 숲’ 도적으로부터 편지가 한 장 집으로 날아 들었다. 그녀를 데려가겠노라는 짧은 예고에 그녀의 아버지, 나이페르그 남작은 크게 놀랐고 그녀를 별채로 옮기고 수많은 사람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하지만, 예고한 날에 도적떼는 나타나지 않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가씨께는 숨길 마음이 없으니, 솔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남작께서 부탁하셔서 아가씨를 뵈러 온 겁니다.”

힐데그라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푸른 숲’ 도적떼가 그녀를 납치하리라 예고했던 날, 그녀는 별채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침실 문마저 잠그지 않고 열어 두었었다. 딸을 걱정해마지 않았던 나이페르그 남작은 그 광경에 경악해 마지 않았지만, 힐데그라트는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나는 도적을 따라 가겠노라고 선언하고 말았고, 결국 사교 모임은 물론 정원 산책마저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남작님 말씀으로는, 아가씨께서 오히려 도적떼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녀는 그라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만났던 스승 중에 가장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기다리고 말고요.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금도 기다리는 중이지요.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지만, 어떤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면, 제가 아가씨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는 답니다. 다만, 한때 아가씨의 가정 교사로서
일했던 만큼, 조금 걱정이 들 뿐이지요.”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글쎄요?”

그녀의 되물음에 그라프는 고개를 기울이며 엷게 웃었다.

“방금 말씀 드렸지만, 걱정이 듭니다. 이를테면, 아가씨께서는 저에게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고심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거든요.
예를 들어, 아가씨의 이런 행동이 사랑하는 아버님께 얼마나 큰 상처가
될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상관 없어요.”

힐데그라트는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움켜 쥐었다.

“아가씨, 남작님께서 얼마나 아가씨를 사랑하시는지 알고 계시지 않나요?”
“잘 알고 있어요. 다만, 저보다는 제 가치를 더 사랑하고 계시지요.
제 결혼을 늦추신 것도, 좀 더 가문에 유리한 결혼을 시키기 위함이고,
도적의 협박을 받았으니 아마 내년에는 아쉬운 대로 가장 나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지 않으실까 싶어요.”

나이페르그 가문의 젊은 아가씨 힐데그라트 나이페르그- 그녀는 아름다움보다는 당돌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한 머리로 왕가와 귀족 가문에 유명했다. 사람들은 세상을 앞서 가는 그녀의 신념이나 사상에 관심을 같기 보다는, 가문의 내조에 뛰어나리라는 제멋대로의 착각에 빠졌기 때문에 늘 그녀가 어느 좋은 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될는지 관심을 가지곤 했다.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나이페르그 남작 역시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를 가르쳤던 스승, 그라프만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이 들었다면 대경 실색을 했을 발언에도 그라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전히 귀족다운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그래요, 귀족답지 않지요. 하지만, 사람답지 않나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힐데그라트는 창가로 다가섰다. 창 너머 멀리 어디선가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아직도 많은 귀족들이 검은 연기를 혐오했지만, 사실 저 검은 연기는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아름다운 신호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기차와 증기선이 달리고,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요.
귀족다움은 아무것도 아닌 세상으로 변해가는 중이지요.
‘푸른 숲’ 도적도 그런 증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 같으면 감히 귀족을 상대로 도적질 할 수 없었을 거에요.
상상 할 수도 없을 만큼 불경한 짓이니까요. 아마 신에게 대적하는
짓이나 다름 없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그 누구도 귀족이 습격 당했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잖아요?”

그라프는 찻잔을 비우고, 창가에 선 힐데그라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상 이야기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푸른 숲’ 도적떼는
그저 돈을 위해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집단이 아닐까요.”

‘푸른 숲’ 도적떼는 인육을 먹고, 학살을 즐기고, 겁탈을 일삼는다는 소문은 왕궁 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푸른 악마라 부르며 증오했지만, 실은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습격 받았다는 귀족들이 모두 살아 있다는 점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는 건 추악한 짓이었다. 그 날, 힐데그라트가 정말로 자결을 했다면 정말로 사람을 죽인 건 어느 쪽일까?

“아니요, 그랬다면 저는 이미 죽고 없겠지요. 저는 직접 만났어요.
‘푸른 숲’ 도적에 얽힌 이야기는 전부 헛소문에 불과해요.”
“소문과 다르다고 해도, ‘푸른 숲’ 도적떼에게 죽은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도적질을 용인할 순 없을 것 같군요.”

힐데그라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는 것은 분명 도적질이다. 하지만, 반드시 복면을 쓰고 칼을 든 무력 집단만이 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긴 역사 동안, 가진 자는 언제나 도적이었다. 나이페르그 가문의 부흥 역시 귀족의 탈을 쓴 가증스러운 도적떼를 토벌한 공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던가.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렇게 화려한 집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편하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또 뭘까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고 있는 덕분이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저라고 도적보다 순수하거나 마냥
착하다고 할 순 없는 게 아닐까요?”
“그건…”
“네, 귀족답지 못한 생각이지요.”

적막이 흐른다. 그라프는 불편한 다리를 어루만지다 찻잔에 차를 따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 가까운 창가를 향해 걸었다.

“아가씨, 제가 듣기로는… 남작님 말씀으로는 그 도적떼의 도적에게
반하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귀족으로 자라고 생활해오신 분께서
그런 도적떼와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변할 겁니다.
환상에 불과한 바람은 몇 일이면 산산조각 나버릴 겁니다.”
“물론 힘들겠지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괴로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만큼 무언가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반역죄로 토벌군에게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꿈을 현실로 착각한 자의 인생은 하잘 것 없고, 최후 역시 흉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꿈을 꾸기 위해 현실에 항거하는 자는 다르다. 비록 그 항거가 자기 파괴의 수순을 밟더라도, 한 순간의 불꽃처럼 아름답게 타버리는 낭만 정도는 만끽할 수 있다- 힐데그라트의 목소리는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그 단호함 앞에 그라프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윽고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좋아요. 아가씨의 말씀을 틀렸다고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많은 생각과 결의가 어쩌면 무의식 중에 말입니다.
그 무례한 도적과 함께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을 수 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 없습니까?”
“그건…”

그라프의 말은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과 결단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심은 씨앗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그 생각의 가여움을 근거로 꽃의 아름다움을 폄하할 수 없듯이 말이다.

“부정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모든 것이 단지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한
  제 의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요.”

그녀의 대답에 그라프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도적을 대한 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까지 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급박한 상황에서 조금 마음 상태가 어지러웠던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질책하듯이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를 향해 힐데그라트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 안에서 쌓이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는 단지 그 수많은 파편을 하나로 맞추어 완성할 계기였다.

“저도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귀족답지 않은
언행과 신념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제 의지에요. 제가 필요했던 건
계기였어요. 어쩌면 평생 동안 찾아오지 않을 계기가 마침내 눈 앞에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붙잡지 않겠어요?”
“그럼 그 도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스승님,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스승의 표정에 살짝 체념이 드리우는 모습을 그녀는 차분히 지켜 보았다. 조금은 죄스러우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가슴 가득히 차 올랐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라프는 단호한 표정에 담담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옛 제자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례한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그 도적이 아가씨를 단지 흥미거리로 여기고 있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질문의 비겁함을 인정하는 스승의 쓴 미소가 어쩐지 질문에 대한 분노보다는 연민을 불러 일으켰다.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평생을 같이 해도 모를 사람이 있고,
잠시 바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람도 있지요. 나는 사람의 눈을 믿어요.
제가 항상 마음에 품어왔던 그 꿈을 같이 할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무엇보다 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용기를 낼 수 있는 계기를 준 사람이니까요.”

스승이 마침내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뭐라고 말씀 드려도 소용없을 것 같군요.”
“네, 정말이지 그래요.”

힐데그라트의 맺음에 마치 무슨 결심이라도 내린 듯이 그라프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힘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강하게 끌어내렸다.

“아…”

그라프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힐데그라트는 짧은 탄성을 질렀다. 거짓 얼굴이 사라진 곳에는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약속대로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힐데그라트 나이프레그양.”

마차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마차에서 보았던 그 얼굴 앞에서 힐데그라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제 와서 공연한 두려움을 느낀 탓은 아니었다.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른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미안하군요, 힐데그라트.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해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으니까요.”

남자가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힐데그라트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자신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무례하군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어리석을지 언정, 나는 당신을 잠깐 마주보고 믿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숨기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을 흉내내면서 나를 몇 번이고 시험했군요.
궁금하거나 불안한 점을 물어보면서, 내가 당신에게 있어 맞는지 틀리는지.
그런걸 따져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그건…”

힐데그라트의 질문에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힐데그라트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 눈길로 남자를 마주 보았다.

“만약 당신의 질문에 내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면, 당신은…
날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나요? 그런가요?”
“그건 당신이 말했듯이 의미 없는 가정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겠군요.”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고, 힐데그라트의 맞은 편 의자에 주저 앉았다. 심한 긴장에서 막 빠져 나온 듯이 기운 없는 동작이었고, 슬며시 등을 기울인 모습이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당신을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그 날도 돌아가 바로 잊어버릴 거라 여겼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더군요.
내 꿈을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말이 문신이라도 한 것처럼 계속 생각이 났죠.
사실 ‘푸른 숲’ 동맹을 이끌면서 내 속마음을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날 잠시 바라본 사람이 내 꿈을 알고 같이하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단지 우연이나 착각 탓을 하기에는, 당신의 눈과 목소리가
너무나 진실하기도 했고요.”

혼자서 말을 늘어놓던 남자는 문득 힐데그라트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 잡았고, 남자는 자세를 바로 잡아 단정하고 반듯하게 앉아 힐데그라트를 마주 보았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렇게 당신을 홀몸으로 만나러 왔어요.
힐데그라트, 당신을 시험하겠다는 건방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고요.”
“그럼 그 수많은 질문은 뭐였나요?”
“그건 모두…”

잠시 말을 멈춘 남자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단순하게는 당신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었고, 또 이야기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생각해봐요. 여기서 내가 당신에게 계속 무언가를 묻고, 대답을 들을수록 점점 위험이
늘어날 뿐이잖아요?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은 내가 붙잡혔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붉게 물든 얼굴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힐데그라트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분노를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믿고 싶어요. 하지만, 어쩐지 수치를 당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어쩐지 좀 혼란스러워요.”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난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내 명예를 잃었어요.”
“명예라고요?”

힐데그라트의 반문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푸른 숲’의 대장으로서 푸른 숲 동맹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어요.
‘푸른 숲’ 동맹은 여태까지 가능한 무고한 살생을 하지 않았고, 또한 불우한 이를
도왔지요. 그리고 당당하게 싸울 의사를 밝히고, 비겁한 수를 쓰지 않았고,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안전하게 만나러 오기 위해서 나는
‘푸른 숲’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 예고를 했지요.”

남자는 걸음을 옮겨 힐데그라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감수했다고 한다면, 당신의 분노가
가라 앉을 수 있지 모르겠군요. 다만, 힐데그라트, 당신이 나를 용서해 준다면
앞으로도 당신을 내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길 거라고 약속할게요.”

힐데그라트는 남자가 다시금 내미는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말한 그 명예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용서하겠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불공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이 묻는다면
숨김없이 이야기 해줄게요. 내 가명부터 본명까지, 우리 가문의 몰락부터
‘푸른 숲’ 동맹까지 말이지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만 더 묻고 싶군요. 어디로 가고 싶나요?”
“어디로라도, 다만 내 손을 놓지만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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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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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07 09:53 댓글 수정 삭제
    "로맨스" 치고는 결말이 반전에 가깝네요. 아 불쌍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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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댕! 06.07.03 16:15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자신이 없는 장르를 만용으로 맡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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