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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운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에 어울리는 평범한 운을 타고난 여자였지만, 그 날은 운이 없었다. 장난처럼, 하지만 주술처럼 매일 확인하는 운세 사이트의 점괘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에요. 그러니까, 부디 집에서 쉬도록 하세요. 하지만, 그녀는 직장인이었고, 불안한 점괘에 하루 쉴 수 있을 핑계도, 권력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책상 위에 놓아둔 염주 팔찌를 차고 출근 해야만 했다. 그녀는 운이 없었다.
  그녀 또한 운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녀보다는 조금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었고, 언제라도 허망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격월로 유언장을 갱신하고, 유품을 재분배했다. 그 날 아침 그녀는 몇 일 전에 산 커다란 LCD 모니터에 대해서 자신이 죽으면 동생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언장을 갱신하는 걸 저녁으로 미룬 체로 출근했다. 그녀도 운이 없었다.
  출근하는 내내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불안케 했다. 신문 구석에서 시작한 그녀의 운세 인생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그토록 불행한 점괘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람이 꽉 들어찬 지하철에 오르면서 그녀는 치한을 만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매치기를 만날까 두려워 핸드백을 가지런히 양손에 모아 쥐기도 했다. 집 근처 역에서 직장 까지는 열 정거장 거리였고, 시간은 이십 오분 정도가 걸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역에 내려섰다. 막 내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 커다란 재채기를 했다. 머리카락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휴지를 꺼내 닦아보니 누군가의 침, 그리고……
  그녀는 작고 많은 사치보다는 꼭 필요한 사치를 부리는 여자였다. 조금 일찍 일어난 그녀는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혹시 사람을 노리는 범죄자가 있을까 한참, 그리고 멀리 구석구석 주변을 경계하면서, 산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중고 경차에 올라타자 마자 재빨리 문을 잠그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막히는 도로를 지나 직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오늘따라 막히는 도로를 용케도 달려 직장 근처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문득 오늘 필요한 서류를 집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짧은 고민 끝에 그녀는 그냥 출근하기로 마음 먹었다. 까짓 거 한 번 혼나면 그만이다. 괜찮다. 나는 원래 운이 없는 사람이니까.
  직장에 앉아 일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머리를 감고 싶었다. 그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 세면대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조금 차갑다고 하더라도 아예 머리를 들이밀고 물을 끼얹고 싶었지만, 화장을 다시 고칠 일이 막막해서 손수건을 적셔 머리카락을 한 땀씩 천천히 닦았다. 더러운 것이 묻었던 부위는 몇 번이나 고쳐 닦았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운이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작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울었다.
  부장은 목청 높게 울부짖었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외침 속에는 아마도 성차별이나 희롱에 속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체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을 뿐이다. 작년 겨울에 산 남색 구두가 보였다. 굽 높이가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산 구두였다. 디자인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 똑 같아 보이는 구두 중에서 유난히 굽 높이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착각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흡족한 기분으로 샀다. 그 기분을 되살리기 위해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왼쪽 구두 발끝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처참하게 가라 앉았다. 그녀는 울었다.
  아무도 그녀의 눈물을, 울음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또는 실망해야 할는지, 그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점심 시간이 끝나지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눈물에 번진 화장을 고치고, 부은 눈을 몇 번 손끝으로 누르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마침 바쁜 시기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되뇌면서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해놓기 위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눈물은 부장을 만족 시켰다. 직원 몇 명이 마지 못한 듯이 부장을 말리고, 다른 몇 명은 그녀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누군가가 자판기 커피를 내밀고, 휴지 몇 장을 내밀자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휴지로 눈물을 닦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아픔 마음을 달랜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구두였는데, 오늘로 끝이구나. 어디서 수선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위로와 충고를 듣는 둥 마는 둥, 그녀는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이리저리 번지고 흘러내린 화장을 고치다가 문득 두 발을 내려다보니, 왼쪽 구두의 찢어진 틈이 흉하게 보였다. 그녀는 세면대의 수도를 틀고 손끝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몇 개의 물방울을 왼쪽 구두 위로 떨어뜨렸다. 몇 방울이 빗나가고, 마지막 물방울이 정확하게 찢어진 틈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발가락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흐릿하게 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일찍 퇴근하지 못했다. 그녀는 퇴근 시간이 세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그나마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으면, 밤늦게까지 붙잡혀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홉 시하고 삼십이 분, 그녀는 회사 앞 도로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교통 체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했다. 오늘은 너무나 피곤해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택시를 타고 돌아가고 싶었다. 회사 앞 도로는 조금 막히는 듯 했다. 그녀는 한 시간쯤 기다려 보기로 마음 먹고는 가까운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따끈한 캔 커피를 사 들고 나와 마침 자리가 비어있는 편의점 앞 간의 의자에 앉아 도로를 주시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차와 버스의 행렬을 바라보며, 그녀는 커피를 마셨다. 히터 안에서 달아오른 커피는 애매한 뒷맛을 남긴다. 그 애매한 뒷맛의 불편함에 사로 잡힌 그녀는 문득 버릇처럼 핸드백을 뒤졌다. 영수증과 휴지, 그리고 화장품 주머니 사이를 한참이나 더듬다가 결국 포기하고 간의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길래 금연 같은 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바로 뒤에 편의점이 있지만, 직접 사서 피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겨우 몇 주 지났을 뿐이지만, 우연이나 유혹 때문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의지를 꺾어버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앉아 도로를 주시했다. 교통 체증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없었다.
  열 시쯤 그녀는 퇴근했다.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책상에서 일어설 때 찢어진 왼쪽 구두가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열 시쯤이면 사무실에 남아있는 여사원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못해 사무실을 나섰다. 혹시라도 내려다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사무실 문을 닫고,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침과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을 조심하면서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닫는다. 잠시 운전석에 살짝 기대어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시동을 걸다가 무심코 발을 내려다보고 말았다. 어둑한 발 아래, 페달 위에 얹힌 왼쪽 구두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는 흐릿함을 자세히 들여다 보려는 본능을 억누르며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구두부터 사자. 그렇게 다짐하고 천천히 차를 몰아 지하 주차장을 나섰다. 열 시의 도로는 시원하지는 않아도 또 답답하지도 않다. 그러고 보니 열 시구나. 그녀는 허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있는 구두점은 없었다.
  열 시쯤 멀리 도로에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그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흘러가는 풍경에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핸드폰을 하릴없이 들여다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하는 동안에 택시는 금새 집 근처의 상가에 도착했다. 그녀는 집 근처에까지 타고 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상가에서 내려섰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상가 끝머리의 편의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다. 마침 집에는 간식 거리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택시비를 내고 나니 내일 생활비를 미리 준비해두어야 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 한 봉지와 사탕 한 봉지를 사고, 현금 지급기에서 삼 만원을 뽑았다. 아까 회사 근처에서 미리 사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동네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십분 남짓 걸리고, 어두운 골목도 몇 군데 있다. 편의점을 나서면서 그녀는 직장 근처에서 미리 준비해 둘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집으로 가는 큰 길이 하나 있었지만, 유턴을 해야 했고, 기분 탓이라고 스스로도 생각은 하지만 아무튼 그 길의 신호등은 지나치게 신호가 늦었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면 얼른 내일 신을 구두부터 찾아놓고, 그리고 몇 일 전에 산 커다란 LCD 모니터로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나 보고 싶었다. 냉장고에 맥주가 한 병 남아 있을 테니까, 과자나 한 봉지 뜯어 안주 삼으면 그만이겠지. 그러면 오늘 하루도 끝나는구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골목을 따라 차를 돌렸다. 순간 무언가 눈 앞에 보인다 싶더니, 커다란 것이 차에 부딪혀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하늘이 누르고, 땅이 잡아 끄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어딘가 많이 아팠지만, 그보다는 땅 위에 쏟아진 알 초콜릿과 사탕이 신경 쓰였고, 그 너저분한 땅을 환하게 비추는 자동차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어느 순간, 짧지만 강렬한 아픔이 그녀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어지럽던 정신이 박하 사탕처럼 시원하게 걷혔다. 그녀는 시원하게 일렁이는 마음으로 점점 힘들어지는 호흡을 그만 두었다. 꽉 막힌 가슴이 천천히 가벼워지려는데, 누군가 땅 위로 흩어진 알 초콜릿과 사탕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뭇거리듯이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은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어쩌면 오늘 하루 그녀에게 필요했을 지도 모르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운이 없었다.
  조금 금이 간 창 너머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똑똑히 보였다. 눈을 뜬 체로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은 멍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과 어지러운 머리를 가다듬으며, 그 멍한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쓰러진 사람의 눈빛이 살짝 떨리더니 멎어 버렸다. 이제 어딘가에 연락할 필요조차 없다는 예감이 그녀를 다시 한 번 뒤흔들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차에서 내려 쓰러진 사람에게로 다가가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그렇게 바짝 붙어 앉는데도 흘기는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과 혀를 몇 번이나 부대낀 뒤에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미안해요- 어쩌면 오늘 하루 그녀가 해야만 했는지도 모를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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