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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태양을 삼키다

2005.02.26 12:3602.26

  나는 태양을 삼켰다.
  정말이다.

  내 눈에는 언제나 송곳 구멍처럼 작고 빨간 동그라미가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으면, 그 원은 붉은 색과 초록색의 테를 두른 강력한 금빛으로 빛난다. 눈을 뜬 채로 한곳을 응시하면 작고 선명한 점멸등이 보인다. 그 등은 내 눈의 깜박임에 따라 초록색과 붉은 색으로 번갈아 바뀐다. 그게 내가 삼킨 태양의 마지막 흔적이다.

  "이 개자식!"

  고상하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욕지기와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나는 보통 사람으로선 미처 볼 수도 없는 움직임으로 슬쩍 주먹을 피하고 다시 감상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감상을 즐기기에 적합한 때는 아니었지만 어쩌랴, 이미 생각이 흐르기 시작한 것을.



  그때, 나는 불면증에 걸려 있었다. 아주 심한. 벌써 두 달 가까이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으니 밤이 너무 길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티비, 컴퓨터, 게임, 책, 아무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밤새 얘기할 친구도 없다. 나에게 밤의 침묵은 숨이 막힐 정도로 깊고 무거웠다. 나는 정말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내 배갯머리에는 달콤한 피로 대신에 새벽 전의 어둠처럼 짙고 무거운 한숨이 가득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한숨이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뭉게뭉게 자라서 짙게 고인 먹구름처럼 크고 무겁고 조밀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수도 없지만, 난 내 한숨이 거기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불 속에 웅크린 나랑 똑같은 모습으로.

  나는 실연 당했다.

  원희는 조용히 어깨에 둘러진 내 왼팔을 끌어내, 내 심장 가까이 옆구리에 되돌려 놓았다. 또 5년 동안 그녀를 향해 내밀어져 있던 내 손을 제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원희는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5년 동안 원희와 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문제였고, 앞으로도 거기에 답할 생각이 없음을 그녀는 5년 간 무수히 나에게 말해왔다. 구스르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유혹하고, 갖은 방법을 썼지만 원희와 나 사이에 한 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기엔 지쳤다. 그리고 그마저 그녀에게 폐로 느껴져서, 이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받은 것을 모두 돌려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되고, 거기에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과거'라는 시간만이 남겨졌을 때, 내게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원래부터 거기에 아무 것도 없었고, 내가 느끼는 공허와 고독 모두 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익숙했다. 나는 진짜 원희를 만났던 것이 아니라, 원희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따뜻하고 애달파서 잠이 깬 뒤에도 오래오래 생각이 나는 그런 꿈을.

  그러다, 그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은 오랜동안 열지 않은 이메일 함 속에서 스팸메일에 짓눌려 바짝 쫄아붙어 있었다. 마치 잊어달라는 원희의 공격에 짓눌린 내 미련처럼, 지워지고 지워지고 지워지다 간신히 살아 남은 기억의 증거처럼.

  이제 스펠이 헷깔리기 시작한 아이디만이 출처가 그녀임을 확인해 주는 사진은, 원희의 얼굴이 아니라 외국 어딘가에서 찍었다는 일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싸이월드에 굴러다니는 원희의 얼굴보다 그쪽이 그녀가 거기 정말로 존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진 속엔 어둑한 하늘과, 보라색 비늘이 번뜩이는 수면이 있었고, 그 위에 방금 토한 것처럼 붉고 선연한 핏자국을 길게 남긴 태양이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봐봐, 적도에선 태양이 이렇게 뜬대, 왜, 어떤 그림에 보면 태양 주위에 방사선을 그리잖아? 정말로 그대로였어, 정말 신기하지?'

  신기해.

  '언젠가 보러 가고 싶어.'

  그래.

  '칫, 너랑 안 갈 건데.'

  알아.

  나는 메일 창을 닫고 잠시 눈을 감았다. 원희가 마지막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느새 잠들지 못한 아침이 지친 몸을 끌고 마루바닥을 기어오고 있었다.

  일하러 나갈 시간이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오늘과 똑같은 내일로 잔인하리만치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그러나 내 속의 오늘은 어제와 같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같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릴 길 없는 마음은 분풀이로 몸을 갉아 먹었고, 마음에 갉아먹힌 몸은 그 결과를 고스란히 마음에게 되돌렸다. 어느새, 나는 어느 것 때문에 힘든지도 모르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위태로워졌다.

  '산책을 해요.'

  늦은 저녁 퀭한 눈으로 편의점 문을 나서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자 가제나 좁은데 자질구레한 물건으로 가득 차 더욱 좁은 편의점 계산대 안에 점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예?'
  '잠이 안 오면 산책을 해요. 그럼 오히려 피로가 풀려요. 단, 다음 날 힘들 정도로 무리만 안 하면요.'

  점원은 생긋 웃었다. 희고 고른 치아가 무척 돋보였다.

  나는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점원의 미소에는 낯익은 사람에게 보내는 친근함이 듬뿍 담겨 있었다. 덕분에 뻣뻣한 내 쪽이 무색해져 버렸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말을 건 적이 있었던 듯도 하다.

  - 여자 분 혼자 한밤중에 무섭지 않아요? 흉한 일 없어요?

  그건 그냥 찰나의 호기심이었고, 잘 모르지만 낯은 익은 동네 사람에게 보내는 눈인사 정도였다. 젊은 여자가 늘상 한밤중에, 그것도 혼자 편의점을 지킨다는 건 별로 권장 사항이 아니다. 우리 동네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술주정뱅이의 행패는 어디서나 있을 법하고, 좀더 재수가 없다면 깡패나, 강도가 들지 않는 다고 누가 보장하랴.

  - 아뇨. 별로요.
  - 야간은 남자도 힘들던데, 물건 들어오잖아요.
  - 대신 돈을 많이 주잖아요.
  - ...밤에 안자면 여자들 피부 미용에 안 좋다던데요?

  점원은 까르르 웃었다. 나는 멋적어 졌다. 그럴 것이 그녀의 피부는 티 한 점 없이 희고 매끄러워서 피부 미용이고 자시고가 필요 없어 보였다. 남자니까 여자의 화장술을 어찌 꿰뚫어 보랴만은, 그래도 그녀는 꽤나 맑고 선명한 얼굴이었다. 화장을 아무리 잘해도 그런 것 까지 꾸며낼 수는 없다는 건 사촌 누나들에게 누누이 교육받아(?) 알고 있었다.

  '요즘도 계속 나오시네요.'

  나는 멋적게 인사했다.

  '늘 있었는데요.'
  '아 네... 잘 못 주무시는데 안 힘드세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요. 익숙해서요.'

  점원과의 관계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하지만 대개 눈인사 정도고 길게 말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저쪽에서 작업을 거는 것 같지는 않았고, 나도 별로 수작을 걸 기운이 없었다. 나쁘지 않았다. 저녁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아주 약간 밤이 가벼워진다.


  점원의 충고에 따라 나는 밤산책을 시작했다. 자정부터 네시까지 길이건 공원이건 산이건 닥치지 않고. 새벽 5시 안에 돌아와 출근할 수 있는 거리라면 어디든 걸었다. 그리고 씻고 누우면 잠은 여전히 오지 않더라도 머리맡의 한숨이 조금 덜 버겹다. 그걸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러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여전한 불면증 때문에 아무리 아파도 잠도 못자고 고스란히 앓아야 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잠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잠은 우라질 육체의 그물로부터 영혼이 달아나 쉴수 있는 유일한 작은 방이었다.

  '괜찮아요?'

  어느 저녁, 점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열이 들끓는 몸에 발 밑이 빈 것처럼 허우적대며,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여기까진 대체 어떻게 온 걸까, 그런 걸 생각하기도 전에 점원의 양손이 내 뺨에 닿았다. 발그스름하게 혈색 좋은 뺨과 뜨거운 입술과는 달리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뭘 원해요?'
  '자고 싶어요.'

  정말로 깊고 조용히, 가능하면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나는 너무나 피로했다. 내겐 정말로, 잠이 절실했다.

  '...잠깐 기다려요.'

  그녀가 너무 적극적이어서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열 때문에 혼미한 와중에서도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수습하지 말아버릴까 하는 유혹이 다가왔다. 상황을 해결하려면, 좀 치사하긴 하지만 점원이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로 몸상태가 나빴다. 어디로도 혼자 움직일 수 없었고, 아무런 판단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라, 그녀의 손에 조용히 이끌려 갔던 건.

  '정말로 자.고. 싶어요?'

  우리는 어느 샌가 옥탑방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내 자취방을 알았는지는 나중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피곤했다.

  '네.'

  그녀는 웃옷을 벗었다.

  '아, 잠깐만요.'

  나는 혼미한 정신을 일깨웠다.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상황을 묵인할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저. 마음에 둔 사람 있어요.'

  차마,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사랑은.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점원은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치아가 흴까? 피부는 너무나 매끄럽고, 입술은 붉고, 눈은 반짝인다. 놀랍게도 화장은 전혀 없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예뻤던가?

  '괜찮아요.'
  '난 안 괜찮아요.'
  '괜찮을 거라니까요?'
  '글세! 안 괜찮다니까요!'

  나는 버럭 화를 냈다가 곧 수그러들었다. 정말, 이제 입씨름할 기운조차도 없다. 점원은 내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에 얹었다. 크지 않지만 뚜렷하고, 모양이 좋은 젓가슴이었다. 나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긴장하지 말고 그냥 느껴봐요.'
  '...뭘요?'

  아무리 아파도 이 상황이라면 누구나 긴장한다.

  '있어야 할게 없잖아요?'

  어이가 없었다.

  '뭐가요? 둘 다 있구만.'
  '훗.'

  점원은 웃었다. 아찔하게도 웃음은 향기로웠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웃음에서 향기를 느끼다니.

  '들어봐요. 심장소리가 없어요.'

  점원은 내 다른 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정말이었다.

  '나는 당신을 조용히 재워줄 수 있어요. 원한다면 영원히 깨지 않도록.'
  '하... 하하... 어떻게요?'

  나의 안일한 고민이 부끄럽게도 그녀는 나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난 약간 놀라고 신기했다. 점원은 천천히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나, 흡혈귀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붉게 피어오른 장미처럼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가슴이 저릿했던 미국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세상은 온통 장미꽃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 속의 그 남자도 이런 아찔한 향기로움을 느꼈을까? 나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져서 목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내 어깨에 걸친 그녀의 목에서 꿀꺽하고 넘어가는 간지러운 느낌으로만 정말로 그녀가 피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봐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잘 생각....'
  '마셔요.'

  나는 그녀가 몸을 떼려는 걸 꽉 잡았다.

  '그냥 끝까지, 마셔요.'

  흡혈귀한테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먹으라고 하는 걸까? 아, 모르는 사이니까 드세요? 아니 나 지금 이렇게 죽는 건데, 죽여 주세요, 하는 걸까? 왜 이런 진지한 순간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머리 속에 떠다니는지는 모르지만, 편안했다. 조금 나른하고, 졸려운 느낌이라는 게 이렇게 달콤하구나 아찔할 만큼.

  그때 나는 정말로 편히 잤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 잘 수 있는 줄 알았다.


  새벽에 눈이 떠졌을 때, 나는 영원한 꿈을 꾸고 있다고 느꼈다. 꿈은 내 방에서 시작되어 거실로, 현관으로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대신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어딘가 물을 구하러 가려는 데 일순 붉은 빛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일출이었다.

  마치 세상이 태어난 첫 아침처럼 아파트 틈새에서 조금씩 솟아오른 빛은 붉고 수줍었다. 낮 동안 오만가지 색으로 현란하게 화장하고 있던 도시는 밤새 진중하고 우아한 어둠을 입고 있다가 새벽의 무자비한 손길에 낱낱이 발가벗겨진 채였다. 창백한 미명은 세상의 온갖 색을 빼앗고 명암만으로 존재를 자각시켰다. 도시는 어떤 대응책도 갖지 못한 채 조용히 웅크려 떨면서 그 수치스런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잘린 손톱 끝처럼 안타깝게 반짝이던 빨간빛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을 확립하며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강렬하게 타오를 때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의 맨눈에는 충분히 무리한 시간이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창을 외면한 순간에야 나는 망막에 남은 상처를 깨달았다.

  '해를 맨눈으로 보면 안돼.'

  언디선가 주워들은 말이 의식 저쪽에서 끌려 나왔다. 아주 어릴 적, 깨진 맥주병 조각을 가지고 놀 때였다. 한 녀석이 조각을 눈에 대고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뭐해?'
  '해 봐.'
  '뭘 해보라구?'

  다들 녀석을 따라했다. 암갈색을 입은 세상이 부옇게 보일 뿐 특별한 건 없었다.

  '그게 아니라, 해를 보라고.'

  모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날카로운 파란색 테를 두른 동그라미가 보였다. 경악과 감탄, 혹은 실망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보이네! 굉장해!'
  '에게, 뭐야 별거 아니잖아?'

  그 사이 나는 슬그머니 맥주병 조각을 내렸다. 그때 처음 해를 보기 시작한 녀석이 팔꿈치로 어깨를 툭 쳤다.

  '맨눈으로 보면 안돼. 눈이 먼다고.'

  어차피 오후의 태양은 맨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나는 이내 포기했고, 모든 시간의 잔상처럼 그 일도 기억의 지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눈은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였다.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차갑게 말라붙은 혀는 마치 입안에 내것이 아닌 다른 무엇의 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낯설고 불쾌한 느낌이 들게했다.

  일출은 아직 진행중이었다. 갓 태어난 새빨간 태양은 이제 막 금색 옷을 걸치려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몸을 꿰뚫는 강렬한 열망-한편으로 어이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욕망-을 느꼈다.

  태양을 삼키고 싶다.

  저 뜨겁고 촉촉한 열기라면 바짝 마른 혀와 언 몸을 따뜻하게 적셔 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거칠게 반항하는 찬란한 일출을 거리낌없이 꿀꺽삼켰다. 아무리 따져봐도 불가능 할 거 같지만, 정말로 그랬다.

  데일것처럼 뜨거운 향기가 입안을 적시며 차가운 혀와 갈라진 목구멍을 적셨다. 나는 몸안에, 남루한 누더기에 굴러다니던 부식된 쇳조각 같던 마음이 신선하게 벼려지는 걸 느꼈다. 붉은 녹먼지로 가슴을 태우면서 나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꺄악!'

  나는 몸부림 치며 빠져나가려는 태양을 꽉 껴안았다. 상상 이상으로 뜨겁고 찬란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숨결의 한 조각까지 태양을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자, 초록색 동그라미가 눈 위에 떠올랐다.

  왜 그때, 까마득해진 원희의 얼굴이 기억났을까? 마치 간절히 바라던 꿈의 조각처럼 너무나도 편안한 얼굴을 하고 내 곁에 잠든 얼굴이. 나는 그녀와 잠든 적이 없는데.



  "어쭈 눈을 감아? 새끼가 약을 처먹었나!"

  현실의 시간은 언제나 마음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른다. 나는 잠시 별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휘청거리다가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았다. 물론 내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쨌든 녀석들을 빨리 쫓아내고 싶었고, 그게 내가 맑은 날 이불처럼 먼지나게 두둘겨 맞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 겸허한 양보가 무색하게도, 저 뒤에 놈들은 어디서 주웠는지 녹슨 앵글 기둥과 나무막대를 들고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비켜만 주면 된다니까?"
  "새꺄! 여기가 네 땅이야? 껌 붙여놨어? 네가 샀어?"
  "그럼, 그쪽이 샀나?"

  겨울바람에 갈라진 목소리가 뱀의 혀처럼 쉿소리를 냈다. 무리 중 하나의 얼굴에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처럼 민감하게 포식자의 기운을 포착해 낸 것이다. 나는 그에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달아나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 씨발 새끼가 말을 못 알아 먹네? 응?"

  죽은 쥐를 꾹꾹 찌르듯 나무 끝이 내 몸을 쿡쿡 찔렀다. 아까의 회피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꺼질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너 다수결의 진리 몰라? 우리나란 민주주의 국가라고."
  "다수결의 원리겠지."
  "좃까."

  놈은 입술을 삐죽이다 침을 탁 밷았다.

  "그만 씨부리고. 야, 까!"

  머리를 내리쳐오는 나무 토막을 오른쪽 어깨로 흘렸다. 그걸 신호로 놈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승부가 나는 건 잠깐이었다. 나에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미명이 썰물처럼 밀려와 세상을 벌거벗기고 있었다. 나는 멈춘 비디오 화면처럼 느려터진 그들의 얼굴과 팔을 맘껏 두들겨 패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다만 다리나 발은 건드리지 않았다. 달아나는데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윽!"
  "우악!"

  녀석들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엉망이 된 얼굴과 팔을 싸잡고 시궁쥐처럼 내빼기 시작했다.

  "이 새끼! 두고봐! 가만 안 둘 거야!"

  원한이 응집된 절규는 배경효과로 내버려 두고 난 녀석들에게서 빼앗은 관망대-정확히 말하면 공원의 허름한 계단- 주위를 깨끗이 치웠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쓰레기들이 웅사린 장소에 쓰레기가 모이고, 또 쓰레기가 달아나자 역시 남은 건 쓰레기더미 뿐이었다.

  "뭐야, 돌아왔네?"

  겨울바람에 언 뺨에 따뜻한 캔이 닿아서 깜짝 놀랐다. 편의점 점원이었다.

  "희정씨."

  희정씨는 자기 몫의 캔을 따고 커피를 홀짝였다. 나도 캔을 땄지만 마시진 않았다. 대신 그 온기와 향-갈색 액체속에 녹아든 당분과 유즙, 시나몬의 향기 등등-을 하나씩 꺼낸다. 그리고 기분 나쁜 방부제 냄새와 텁텁한 유지 냄새, 부패된 시간의 냄새를 빼고 다시 깨끗하고 신선하게 조합 된 커피 향기를 마신다. '변화'는 이런 점에선 좋았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직접 해낼 수 있다.

  "긴장감 없는 얼굴은 여전하네요."

  스무 살이 갓 되었을까 말까한 앳된, 조금 맹하기까지 한 부드러운 얼굴. 나는 희정씨의 그 얼굴을 좋아했다. 마주 보고 있으면 피시식 웃음이 나고, 이윽고 아주 편안해진다. 흔들리는 요람에 누워 엄마의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남말 하지 마."

  희정씨는 웃으며 투덜댔다. 도톰한 입술 아래 지나치리만치 고르고 흰 치아가 드러났다. 지나가던 공원 경비가 이상한 시선으로 우리를 흘끔댔다. 어쨌든 외모만이라면 내가 그녀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니까, 존대를 하는 게 무척 이상하리라.

  "본 때를 보여주지 그랬어? 여전히 맘이 약하네. 그냥 마셔 버리면 될 것을."

  희정씨의 눈이 깡패들이 쫓겨간 쪽을 흘끔 건네 본다. 컬러 렌즈를 두고 왔는지 눈동자에 붉은 색이 어른거렸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치우는 시간이 아깝죠. 제 발로 달아나게 하는 편이 수고를 덜잖아요."
  "쿡, 그도 그렇네."

  희정씨의 웃음소리는 발밑에 바삭이는 낙역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그건 그렇고, 올해도 왔네."

  나는 그냥 미소로 응수했다. 벌써 몇 십년 째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대사를 읊다보면 가끔 건너뛰어도 지장이 없다.

  "어지간히 좀 해. 우린 흡혈귀지 철새가 아냐. 외모 때문에 한곳에 오래 있기 힘든 사정이야 빤하지만, 이게 뭐야? 해마다 오락가락."
  "희정씨야 말로. 한곳에 이렇게 오래 있어도 되요? 들통나기 쉽잖아요?"
  "여자는 괜찮아. 20년 정도는 옷이랑 화장으로 커버할 수 있거든. '어머, 어쩜 넌 나이도 안드니!'란 소리도 꽤 듣기 좋다구."
  "정말로 그런 이유예요?"
  "바보. 그럴 리가 없잖아."

  희정씨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말해주진 않는다. 우린 피를 나누었지만, 나는 희정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일출이나 잘 봐. 이상한 흡혈귀야. 해를 좋아하다니."

  희정씨는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희정씨가 더 이상해요. 사람 음식을 먹는 흡혈귀라니."
  "이건 그냥 의태야. 이상하다면 그쪽이 더 이상하지. <피의 세례>를 받지 않은 흡혈귀라니. 게다가 해를 좋아한다? 이런 몰상식한 일이 어딨어? 종으로서의 수치라고."

  어떤 기준으로의 상식이며, 어떤 종의 수치인지 이제는 묻지 않는다. 피의 세례는 <변화-흡혈귀가 되는 것->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었다. 자기를 마신 흡혈귀의 피를 마시는 것. 희정씨는 나를 마셨다. 그런데 나는 희정씨를 마시지 않고 <변화>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희정씨는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겠다며 몇 년을 끙끙대다가 최근에야 포기한 참이다. 조사 자료니, 현장검증이니, 최면술이니 모든 것을 시도 해본 희정씨에겐 안된 말이지만 나에게는 퍽이나 다행한 일이었다. 대체 얼마만큼이나 살 수 있는지도 모를 존재가 평생에 걸쳐서 똑같은 것만 끊임없이 묻는다면, 이쪽에서 항복하고 자살하는 편이 낫다.

  "그건 그렇고, 찾았어?"
  "뭘요?"
  "일출을 보면 기억이 돌아오는 거 같다며?"
  "아아..."

  나는 고개를 기웃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 이상하게도 희정씨에게 흡혈 당한 밤부터 며친간의 기억이 엉켜 있었다. 희정씨는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흡혈과 변화 둘다 육체가 감당하기엔 지나친 일이니까 어딘가 어긋나도 이상할 것이 없단다. 희정씨는 우리 둘다 모르는 '그때'에 일어난 어떤 일이 나를 '세례' 없이 변화시켰을 거라고 말했다.

  "정말로 기억 나는 거 없어? 아무것도?"
  "아직도 궁금해요? 아무것도 기억 안난다니까요. 딱 하나 빼곤."
  "그게 뭔데?"

  희정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저 그때 태양을 삼켰어요."
  "또 그 바보같은 소리. 그럼 지금 저기 밝아오는 건 대체 뭐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전 모르죠. 하지만 분명히, 전 그때 해를 삼켰어요. 그래서 <세례>없이도 <변화>한 거예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희정씨는 지겹다는 듯 손사레를 쳤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환상>이야. 정말로 기억안나?"
  "뭐가요?"
  "그때 내가 한말."
  "뭔데요?"
  "잘 생각해봐. 난 이만 퇴장해야겠어. 좀더 있고 싶지만, 더 버티다간 타 버릴거야. 벌써 어깨가 오싹오싹한데 대체 어떻게 일출을 좋아할 수 있지?"

  희정씨는 투덜대면서 여명의 첫 빛이 닿기 전에 밤이 달아난 방향으로 사라졌다. 희정씨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공원 경비는 곁을 스칠때도 그녀를 보지 못하고 뒤에 모자를 날린 돌풍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 보았다.

  나는 청회색 물감을 푼 것처럼 뿌옇게 밝아지는 동쪽을 응시하며 계단 밑으로 들어갔다. 난간이 넓은 경사진 계단밑은 일출을 보면서도 그늘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여차할 경우는 계단밑의 창고로 달아날 수도 있었다.

  곧 선연한 붉은 빛이 구릉 구석에서 꽃처럼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가빠오는 걸 느꼈다. 나의 빛나는 사신, 나의 연인이 오고 있다. 입술이 떨리고 창백한 심장이 끓어 올랐다.

  '일어났어요?'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저 세상인 줄 알았는데, 눈을 떴을 때 희정씨가 옆에 있었다. 나는 저으기 당황했다.

  '....그쪽도 죽었어요? 아니 흡혈귀는 원래 이승 저승 할거 없이 왔다갔다 하나요?'

  그때 희정씬 울수도 웃을 수도 없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얼굴을 떠올리며 희정씨를 놀리곤 한다.

  '미안해요.'
  '뭐가요?'
  '당신 안 죽었어요.'

  뒷통수가 멍했다.

  '뭐라구요?'

  나는 황급히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새삼 소름이 돋을만큼 목에는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점원은 안절부절 했다.

  '저기... 실은 제가 좀 미숙하거든요. 끝까지 잘 마시면 되는데, 아니, 분명히 끝까지 마셨는데. 아니던가? 아무튼 그게 좀.... 설명하긴 그렇고. 아무튼 대실패예요.'

  어이가 없었다.

  '실패?'
  '네.'
  '그럼 다시해요.'
  '예?'
  '다시 먹으라구요. 아니 마시던가? 아무튼, 여기, 다시 깨물어요.'

  내가 목을 들이밀자 점원은 손을 저으며 물러섰다.

  '이제 안돼요.'
  '뭐가 안돼요?'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변해서, 난 못 해요.'
  '변했다?'

  희정씨는 내 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냉기가 느껴졌다. 박동도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
  '장난 아녜요. 영화도 안 봤어요? 흡혈귀한테 물려서 변했다면 뭐겠어요?'
  '...좀비?'

  희정씨가 뒷통수를 딱 때렸다. 눈 튀어나오게 아팠다.

  '흡혈귀?'

  장난으로 회피하려던 순간이 이 한마디로 더 고일데 없이 가득찬 둑에 마지막 한 방울을 떨구는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하앳다가 점점 파래지던 희정씨의 얼굴이 순간 완전히 새빨갛게 변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진짜, 잘 할려고 했는데...'
  '....원래 이렇게 잘 못해요?'

  희정씨는 아무말도 못했다. 나는 기이하게도 안정감을 느꼈다. <변화>에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이질감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독하리만치 만족스러웠다.

  '목... 안 말라요? 심하게 갈증날텐데?'

  어쩐일인지 조금도 목 마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목을 큼큼대다가 괜한 기침만 나왔다.

  '괜찮아요.'

  희정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 <변화> 하다니. 아무튼, 환영해야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흡혈귀가 된 걸 축하해요.'
  '별로 축하 받을만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떨떠름히 말했다. 그러자 희정씨의 표정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뭐, 잠은 잘 오겠네요. 낮엔 반드시 잘 거 아녜요?'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그제야 희정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근데, 저 질문 있어요. 왜 그렇게 못 잤어요?'

  원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몰라요. 기억 안나요.'

  희정씨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희정.'
  '에?'
  '내 이름, 정희정이예요. 올해로 여든 둘이 된, 어린 흡혈귀죠.'
  '여든 둘이 어려요?'
  '내가 만난 누군가는 몇백살은 가뿐히 넘어서 숫자 세기 귀찮아 했어요. 어떤 흡혈귀는 몇 년전에 천살이었던지를 기억하죠.'

  갑자기 머리가 까마득해졌다.

  '그렇게 오래 살아야 해요?'
  '싫으면 자살 할 수도 있지만, 대개 안 하죠.'
  '자살?'
  '영화 좀 보지 그래요. 많이 나와 있는데. 말뚝이나, 은총알, 태양 말예요.'

  갑자기 일출이 떠올랐다.

  '태양?'
  '다른 것보다 확실하고, 순식간에 끝나서 별로 고통도 없어요. 다만, 어정쩡하게 목숨을 건지면 그게 더 끔찍하죠. 절대 안 낫거든요. 병신 흡혈귀라니 상상이 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아침에 일출을 봤어요.'

  희정씨는 어리둥절해했다.

  '오늘 비왔는데요.'



  공원의 일출이 시작되었다. 그날 내가 삼킨 태양처럼 뜨겁고 찬란하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내 입술은 아직 그 뜨겁고도 시원한 햇살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구심도 느꼈다. 어떻게 태양을 삼킬 수 있었을까? 희정씨의 말처럼 변화 중에 본 환상일까?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기억이다. 게다가 그로 인해, 나는 본래의 의도대로 죽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다.

  나는 대체 그때 뭘 마신걸까?

  '그날'의 기억은 혼돈의 부서진 편린으로, 오랜 기억의 지층속에 산산히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출을 볼 때만 조금씩 날카롭게 반짝여 존재를 드러냈다. 그 조각들을 모으기 위해서 나는 일출을 찾아다녔다. 안전하게 몸을 가리고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은 계절마다 달랐고, 결과적으로 나는 일출을 찾아 다니는 괴짜 흡혈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저번 일출에서 마지막 편린이 지층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다른 편린을 주워 맞추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그 조각은 미처 줍지 못했지만, 오늘 본 일출이면 그 조각을 찾기에 충분했다.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변화 이후 예민해진 감각덕분이다. 나는 지저분한 공원 계단밑이 아니라 너른 골짜기에 서 있었다.  머리속의 나는 광부였고, 이제 막 지층에서 마지막 조각을 주워올린 참이다. 등뒤 너른 언덕에는 이미 찾은 조각을 맞춰둔 너른 판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조각을 그 판에 끼웠다. 그리고 방금 구름에서 나온 햇볕이 판을 비추자, 진실이 떠올랐다.

  "...희...."

  나는 차마 목이 메어서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내가 완성한 조각판은 헤어진 원희의 얼굴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태양을 마셨을 때 떠오른 그녀의 잠든 얼굴, 미소. 그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내가 삼킨 죽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흐....."

  울음이 터져나왔다. 무릎속에 얼굴을 파묻고 그런 설운 울음소리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처럼 나는 울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내 입술은 웃고 있었다.

  흡혈귀는 태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태양의 모습은 내 눈에 남아 있다. 나는 이제 어디서 건 태양을 볼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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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No Profile
    날개 07.11.26 17:02 댓글 수정 삭제
    약간은 뱀파이어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잔잔하게 잘 읽혔어요. 태양을 삼킨다는 이미지도 참 좋고요. 비군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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