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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림 할머니 나무

2003.09.26 16:2909.26

  나는 아주 자그마하고 색다른 비밀 한가지를 갖고 있다.
  그건 내가 곧 나무가 될 것이라는 거다.
  내 어머니와, 할머니, 또 먼먼 할머니처럼.


  아스라하게, 아침 안개 묻은 거리를 2층 창에서 내려다 본다. 어깨를 고인 창틀은 아주 오래 전에 죽어버린 나무이지만, 나는 알루미늄 샷슈나 플라스틱 창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체온을 느꼈다. 처음, 반짝반짝하게 발라졌었을 니스가 황폐하게 닳아빠진 창틀에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뒤틀림으로 남아 있었다. 그건 1mm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진 인공물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얼룩처럼 퉤퉤하게 남아 있는 나무테들을 어루만졌다. 규칙적이고 가느다란 결마다 잊혀진 세월이 기록되어 있을 자연의 기억장치. 그것은 더듬는 내 손등의 주름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니까.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이 '나무가 되는 현상'은 '직계'만이나 '혈통 전부'에게 일어나는 식으로 어떤 '조건'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일종의 확률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나무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제 슬슬 시작된 치매와 전부터 조금씩 말라붙는 다리 근육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후..."

  생각이 들자 더욱 저려오는 듯한 다리를 주무르면서 나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1, 2층을 잇는 내부 계단 마디마다 늘어선 화분에 물을 주던 참이라 손에는 걸리적 거리는 게 많았다. 나는 눈 앞에 남은 두 그루에 마저 물을 준 다음 허리를 폈다. 계단 중간에 걸린 네모난 창틀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거리에 나무라곤 큰 길에 키재기 줄처럼 세워놓은 가로수와 큰 집 담벼락 밖으로 비져나온 정원수들 뿐이었다. 옛날처럼 골목 어귀와 길가 어디에든 서 있을 정감 어린 것들은 이제 하나도 없다. 우리집도 뭔가를 심기엔 마당이 너무 협소해서 집안 가득한 화분들로만 대치되었다. 실은 난 화분안에 식물을 기르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내 취향은 둘째 치고라도 땅속으로 마음껏 뻗어 들어가야 할 뿌리들을 마치 코르셋같은 화분안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내심 미안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을 준 화분은 가장 최근에 놀러왔던 배꼽 친구의 선물이다. 꽃잎 끝이 붉게 물드는 노란 장미를 피우는 화분. 자기도 올때마다 꽃과 작은 화분을 선물로 사오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내 수집품에 놀라워하곤 했다.

  '어머나, 화분이 또 늘었네. 이게 왠거니? 너 집안에 수목원 차릴거니? 늘어가는 숫자가 거의 기하급수로구만...'

  찬탄인지 핀잔인지 모를 감상을 터트리면서 친구는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 너, 혹시 외롭니?'

  대답없이 그 친구 얼굴만 말끄러미 보았던 그때처럼, 나는 창밖의 거리만 물끄럼한 시선으로 내다 보았다. 인공적인 회색, 그 뿌연 먼지같은 모노톤 속에 마치 톡 터진 완두콩알처럼 선명한 녹색이 드문 드문이 눈을 사로 잡는다. 정말 빌딩 숲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린 때는 과거와 현재를 통털어 지금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게 녹색이었는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무성한 나무 숲 속에 빨간 강남콩같은 집이 서 있었겠지. 지금과는 정 반대로...

  나는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두려운 것은 둘째치고 이런속에서 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서운함으로 먼저 가슴을 할퀴었다.


  어릴 때, 모든 일들이 그랬듯이 나무가 된다는 것은 단지 막연할 뿐이었다. 내 몸이 나무로 변화하는 상상은, 잠자리 발치에 섬뜩하게 덮쳐 기어올라오는 귀신 이야기 정도로만 무서웠을 뿐, 별다르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귀신이야기가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을 때 '나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잊었다.

  야릇하게도 그것이 다시 무서워진 것은 쉰이 다 되가는 이 나이에서다. 이제야, 정말 그것이 무언지 알 거 같기 때문이다. 어릴 때 무섭던 처녀귀신이나 도깨비는 단지 잊혀져가는 전설의 애처로움만 남기고, 정말 무서운 건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은 얼굴로 나타나는 것인 것처럼.... 나무가 된다는 것도 아마 그런 형식을 따라 다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게다.

  툭...

  나는 텅 빈 물뿌리개를 가장 작은 화분 옆, 언제나의 그 자리에 내려 놓았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화분 받침 안에 낯설은 긴 생물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흙으로 스민 물이 흥건하게 고인 그 속을 괴로운 듯 헤집고 있는 것은 지렁이였다. 물을 너무 많이 부었는지 흙길을 따라 밀려나온 듯한 길고 가늘고 매끄러운 생물은 진한 분홍색이 화사했다.

  "..."

  나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화초에서 떨어진 마른 잎으로 건져 도로 화분에 넣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 손을 닦았다. 문득 쳐다본 세면 거울 안의 얼굴이 내가 놀랄 정도로 창백했다.

  "잔뿌리가 나오려나..."

  나는 눈에 띄게 거칠어진 뺨을 더듬었다. 아직 혈관이 뿌리로 튀어나올 기미는 없었다.

  '나무가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은 확률에 달린 것이었지만 내가 확신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내 할머니는 나무였고, 수많은 이모들을 제치고 어머니가 나무가 되었으니 나에게도 그 피의 농도가 배는 짙을 것이다. 할머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나무가 되는 것은 열 세 살 때 직접 마주했다. 그때, 난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고 한동안 현실을 꿈처럼 느낄 만큼 몽롱했었다. 그냥도 사춘기라는 덫에 걸려들고 있는 참인데 그 특수한 상황은 내 어깨에 성장의 짐을 두 배로 얹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마흔 여덟은, 열 세 살의 세배는 족히 채우고도 남는 나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쯤은 쌓이는 세월로 직접 체험했지만, 흐르는 시간은 나에게 폭 넓은 경험과 지각으로 열 세 살 때는 알 수 없던 많은 것들을 이해 시켰고, 상상으로 막연하게만 느껴왔던 것들에 구체적인 설명을 달아 주었다. '나무가 되는 사람'의 이야기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건 무척이나 신비롭고 이상스런 '사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열 세 살의 나는 이미 그것을 '죽는다'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 버렸다. 사람들이 때가 되면 죽는 것처럼, 나는 때가 되면 나무가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숨이 멈추고 움직임도 멎는다. 나무도 숨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앉는다. 그 둘은 같은 것이다. 말만 조금 다를 뿐.

  후- 호륵.

  녹색이 사금석처럼 밖힌 부엌 가스렌지 위에서 주전자가 맑은 고음을 냈다. 나는 느긋하게 남은 부엌으로 건너가 레버를 돌려 불을 줄였다. 물이 끓는 소리를 멜로디로 대채하는 그 주전자는 빨간 에나멜 위에 은으로 선처리를 한 세련되고 조금 부담스러운 것으로, 내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남편은 내 취향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건 아직 철이 덜난 막내딸의 15주년 결혼기념 선물이었다. 딸애가 오는 날이면 나는 분주하게 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그 애가 선물한 그릇들을 꺼내어 씻고 일부는 사용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주전자는 이제 막 물이 끓는 참에 내가 불을 줄어서 부글부글 끓는 성을 삮이고 있었다. 나는 식탁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가만히 가스렌지의 고른 불꽃을 응시했다. 바람이 없으므로 흔들일 일도 없는 그 파란 불꽃은 가끔 이물질이나 먼지가 타들어 갈 때만 주홍색을 발했다.

  토독.

  잠깐 솟아오르던 불협색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른 새파란 뾰족 울타리 틈으로 사라진다. 나는 우리내 부엌에 이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불이 사용되고 있을 때 내 어머니에게 '할머니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줄무늬 고양이가 부뚜막 위에서 늘어진 긴 하품을 하고, 볕이 잘드는 뒷뜰 장독대가 포근한 밤색으로 젖어 있는 나른한 봄날 오후였을 거다. 나는 전날 아버지가 새로 사다주신 두꺼운 동화책 전질을 밤새도록 탐독하고 나서 아주 행복하고 몽롱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열린 장짓문 툇마루 위로 햇살이 물결처럼 금빛 아롱졌다.

  [지혜야, 할머니게 물좀 가져다 드리렴. 날이 더워질 것 같네.]

  부엌에서 한참 새참 중비 중이셨던 어머니가 칼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느적지근하게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중앙에는 시꺼먼 우물대신에 닳은 흔적도 없는 반짝반짝한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펌프가 있었다.

  끼익 끼익 철커덩-.

  누런 놋쇠 대야에 고여 있던 물을 펌프 안에 붓고는 힘차게 손잡이를 내리 눌렀다. 펌프는 새 것이라 어린 손이 모자라도록 큰 손잡이가 불편했던 외엔 생각만큼 힘겹지는 않았다. 네 귀에 큰 돌을 괴어 놓은 펌프는 찌익찌익 물오르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쏴아-! 하고 소리만으로도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냈다. 나는 빈 대야에 가득 그것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근처에서 펌프식 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집을 하고 한 집을 더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들은 아직도 두레박질을 하면 어둠이 물보다 먼저 퍼올려지는 깊고 음습한 우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우물에 빠진적도 없으면서 우물을 유독 싫어했다고 어머니께 나중에 전해 들었다. 기억에도, 옆집에 놀러가면 그 집 마당 가운데 있는 우물을 최장거리로 비켜 다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비록 쇠똥 냄새나는 외양간과 그 옆에 달린 인분의 짜고 메스꺼운 향내를 마주하는 재래 화장실과 아주 근접한 길이라도 말이다.


  책에서 읽은, 아이 두 셋은 그냥 잡아 먹었음직한 깊은 우물 구덩이. 나는 너무 깊어서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소리로만 길어 올리는 그 물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그 속엔 맑은 물이 아니라 검붉은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거 같았다. 실은 펌프관의 캄캄한 속에서 올라오는 올라오는 물소리도 약간 섬뜩했지만, 그것은 좀 덜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끙.]

  커다란 놋쇠 대야 가득한 물짐은 여덟살짜리 계집애에겐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받은 물의 반은 나무가 아닌 흙마당에 주어가면서 뒤뜰까지 대야를 질질 끌고 갔다. '쇠그랑 쇠그랑 끼익...'하는 소리가 내 종종이는 발소리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줄줄줄...

  장독대 옆에 서서 부엌 뒷문이 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 나무였다. 늙은 발등의 불거져 나온 거친 혈관같은 그 뿌리 근처에서 힘들게 끌고온 대야를 기울인다. 아버지가 물을 줄때처럼 '철퍽' 부서지는 시원한 소음은 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안에 빙빙도는 대야는 개운치 않은 오줌소리처럼 질질 거리다 남은 물방울만 찔끔였다. 나는 몸을 수그려 나무 뿌리에 충분히 물이 닿았는가를 살핀다음, 촉촉히 젖은 검은 나무 껍질사이에 익사한 개미의 시체를 보다가 전날밤에 읽은 개미와 배짱이를 기억했다. 생각의 연상작용은 그렇게 시작되어 동화책 전집에 걸쳐진 수 많은 이야기 더미로 한번 내 머리 속을 휘저은 다음, 상당히 난해하게 읽었던 '만드라고라'에 대한 부분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사람처럼 생겼고, 뽑을 때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전부 죽어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개나 기타 동물로 하여금 뽑게 했다는 그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또렷한 이유는 다름아닌 할머니 나무 때문이었다. 내가 사람처럼 생긴 식물 '만드라고라'와 '할머니 나무'와의 사이에서 공통점을 열심히 찾아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나무화'와 옛 전설인 '만드라고라'가 다르다는 걸 알기엔 어린 지식의 폭이 너무 좁았던 것이다.

  [지혜야, 저건 그냥 사람처럼 생긴 나무가 아니라 네 할머니란다란다. 엄마의 엄마지. 그러니까 항상 착하고 얌전하게 인사를 하고 물을 드리렴. 그럼 착한 아이라고 선물도 주실거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믿었었고, 실재로 해마다 붉어지는 가을이면 선물을 받았다. 할머니는 가시가 싸글싸글하지만 알맹이는 고소한 밤나무였다.

  [엄마! 할머니는 만드라고라야?]

  한참 동안 서로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는 개미의 무리를 보다가 부엌 문가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기척을 듣고 소리쳤다. 한창 새참 준비에 바쁘던 엄마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내다 보셨다.

  [만.. 뭐시깽이라고? 그게 뭔데?]

  [만드라고라-! 사람처럼 생긴 식물이야. 뽑을 때 소리를 지르는데 그걸 들으면 죽는데-!]

  나는 여남은 발자국 떨어져있는 부엌까지 들리도록 가능한한 크게 소리쳐 말했다. 그러나 한창 분주한 어머니에겐 꼬마애가 앵앵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나보다. 잠시 귀를 기울이시던 어머니는 데울 찬거리를 마저 준비해 놓고는 뒤뜰로 나와 다시 물었다.

  [만드라고라가 뭔데?]

  지금에 와서 내가 아이를 기르게 되니까 세삼 그때의 어머니의 인내가 존경스럽다. 나라면 논에 나가신 아버지 새참 준비로 가제나 정신없는데 어린 딸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윈 도저히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을 둘째치고라도 나는 첫딸이라고 꽤나 부모님께 특별 취급을 받았던 게 틀림없다. 그 당시에 동화책 전질을 가질 수 있는 어린애라면 정말 굉장한 부잣집 애들뿐이었다. 게다가 계집아이라면 더더욱 어려웠다. 그들은 태어나서 걷고 말할 줄 알게 되면 쓰기나 읽기보다 상차림이나 설거지를 먼저 배우게 되고, 앞이나 뒤에 태어난 남자 형제의 수발과 뒷바라지를 떠맞는다. 그렇게 대강 자라서 처녀티가 나면 또 바로 남의 사내 품으로 들어가 애낳고 밥하고 빨래하는 소모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부모님은 생각이 트인 분들이셨다. 나는 그것이 할머니 나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이지 않은 아주 자그마한 특별한 일. 그건 사람의 시각을 혁신적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걸 이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거 이거.]

  신발을 벗어 던지며 뒷마루로 기어 올라가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솨아하게 방안 가득히 배인 새 책 냄새가 밀려나와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문지방에 몸을 걸치고는 팔을 있는대로 뻗어 붉은 칠이 하나도 벗겨지지 않은 새 책을 끄집어 냈다. 손 끝에 닿는 매끄러운 감촉은 낡고 꺼끌한 오래된 책과는 차원이 달랐다. 책이 내 손을 떠나 어머니에게 건네지는 그 잠깐 동안에도 내 두근거림은 조금도 엷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기억해보면 철없던 연애때보다 그때가 더 가슴이 뛰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는 책을 받아 들면서 문지방에 함부로 걸터 앉거나 밟고 넘어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잊지 않으신 다음 책장을 펼치셨다.

  [만드라고라... 만드라.. 음.. 만드라고라라...]

  [왜 문지방에 걸터 앉으면 안돼?]

  어머니는 눈으로는 책장을 훑으시면서도 곁귀로 들린 내 질문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문지방은 저 세상과 이세상의 접점이란다. 그런 곳을 함부로 밟거나 걸터 앉으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는 언제나 반문의 형태를 취하는 대답으로 내가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했다. 어쩌면 그건 그냥 어머니의 말버릇일지도 몰랐지만 난 늘 그 뒤를 상상했다. 문지방을 넘은 이쪽은 방이고, 저쪽은 밖이고 그 사이에 검은 공간이 있어서 죽은 사람들에게로 가는 길이 있는...
  그런식으로. 그리고 오싹하게 치밀어 오르는 푸르딩딩한 공포를 참느라 잠시 그대로 숨을 죽였다. 아마 내가 우물을 무서워하는 것도 이런 비슷한 상상의 연속이 기억의 찌꺼기 아래 묻혀져 있는 탓일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 이거구나...]

  어머니는 서양의 전설이 나온 곳에선 내 어떤 질문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으시더니 '탁' 소리나게 책을 덮었다. 덕분에 나는 어머니가 화가 나신 줄 알았다. '왜?'라는 표정으로 울 듯이 올려다 보는 내 표정에 어머니는 생각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셨다. 어머니가 그런식으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어머니는 내 엄마이기도 하지만 아직 신혼의 젊은 새댁이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러하듯 수줍고 고분고분한 새댁과는 조금 달랐지만.

  [부엌으로 가자. 일하면서 얘기를 하자꾸나.]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부수물이 아닌 아이의 인격으로 존중해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에 무척 감사하고 있다.

  [이런, 불을 꺼트릴 뻔 했구나.]

  잠시 신경을 덜 쓴 틈에 엷은 불꽃이 불안하게 사그라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참 밥그릇이 너무 뜨겁게 달구어져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조금 식도록 아궁이 옆 선반에 얹어 놓고는 뒤쪽에 쌓인 짚단을 끌어와 아궁이에 넣었다. 불쏘시게로 후벼도 불꽃은 쉽게 일지 않았다. 겨우내 잘 말린 볏단이었는데 방금 눈 쥐 오줌에라도 젖어 있었던지 매캐한 연기까지 나는 틈에서 어머니와 나는 연신 기침을 터트리며 눈을 부볐다. 가물가물 널름대던 불꽃은 다행히도 오래지 않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 나무는 만드라고라가 아니야. 할머니 나무는 네 할머니란다. 그리고 나도 나무가 될 거고, 너도 여자애니까 때가 되면 나무가 되겠지.]

  [다른 사람들도 나무가 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나무가 되는 건 엄마하고 할머니하고 이모들하고... 지혜가 커서 딸을 낳으면 그 애들만 나무가 된단다.]

  그말에 문득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나만 나무가 된다. 옆집 영순이나 뒷집 난희 언니가 아니라 나만 나무가 된다. 그건 어린 가슴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어리지 않은 지금에도 충분한 대사건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돼. 알았지? 아주아주 특별한 일이니까 말이야.]

  [알았어.]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그머니 물었다.

  [아빠도 안돼?]

  그 말에 엄마는 금방이라도 까르르한 웃음을 터트릴 듯 말씀하셨다.

  [아빠는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 있는데서 아빠한테 말하면 안돼.]

  [응.]

  나는 세게 고개를 끄덕엿다. 그리고 특별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느낄 수있는 색다른 두근거림만 기억한 채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무가 되는 내 열세살까지.


  어머니가 나무가 되기 바로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내안에서 묘한 연상작용을 일으켜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로 가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덕택에 나는 혼자만 외따로 버려진다는 처연함까지 맛보고 있었다.

  [엄마도 죽는 거야?]

  그때 쯤, 어머니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옆동네에 살고 있던 이모들이 와서 살림살이를 돌보며 엄마가 나무가 될 준비를 도와주었다.

  [아니야, 지혜야. 엄마는 단지 나무가 되는 거란다.]

  나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등골이 오싹할 만큼 절감한 것은 그때였다. 그동안 몇몇 사람들의 장례식을 보았지만 그 시체는 그냥 깨끗한 채로 흙에 파묻혀졌지 어머니처럼 혈관이 피부를 파고나와 뿌리처럼 자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모들의 도움을 받아 매일 반나절 이상 사람보다 큰 물독에 들어가 있었다. 그 독은 이웃의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광에 놓여졌다. 지금의 나는 반나절을 집안 욕조에서 보내고 있지만 그때는 욕조란게 없었으니 어머니는 많이 불편하셨을 거다.

  [왜 나무가 되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지?]

  어머니께 묻는 내 목소리는 앙칼지게 날이 서 있었다.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는 나무가 된다는 것에서 심한 모욕감마저 느겼던 것이다. 남다른 부모님의 교육 덕에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아이들의 문턱을 넘은 머리만 커다란 열 세 살 짜리는, 나무가 된다는 특별한 느낌을 내가 남과 다르다는 이질감과 비정상이라는 기분 나쁜 꼬리표로 뒤바꿀만큼 생각이 자라 있었다. 지금 보면 그마저 어린 생각이지만...

  어머니는 내 기분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러나 대꾸해주는 표정은 예전처럼 풍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굴 근육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다.

  [지혜야.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이것도 그냥 그런 거란다. 나무가 된다는 건 뭔가 나쁘다거나 병에 걸린 게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우리는 나무가 되는 것뿐이란다.]

  [죽는 거잖아. 나만 놔두고...]

  확실히, 이른 사춘기를 겪고 있었나 보다.

  [..아빠랑 가 버릴 거잖아.]

  새된 목소리와 제풀에 북받친 눈물이 주렁주렁 떨어졌다.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얼른 접어넣으며 나를 달랬다.

  [지혜야.. 지혜야..]

  지친 얼굴이 더욱 쇠약해 보여서 덜컥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었을텐데.. 지친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오래오래 눈에 밟혔다.

  [엄마는 죽는 게 아니야. 지혜야. 너만 혼자 두는게 아니란다. 물론, 엄마는 아빠와 가까이 있고 싶어서 나무가 되는 거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빠랑만 같이 있는 게 아니란다. 지혜랑 헤어지는 것도 아니야. 나무가 되는 건 죽는거랑 다르거든.]

  어머니의 호흡은 길고 느렸다. 그렇게 숨 쉬어서는 호흡이 가빠서 죽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못 알아 볼거야. 엄마는 다 잊어버릴거야. 말도 못하고 서 있을거야 할머니 나무처럼. 땅속에 있는 아빠처럼. 그건 죽는거야.]

  뽀오오...

  물이 알맞게 끓었다는 주전자의 고음은 나를 회상에서 끄집어 내었다. 파란 테를 두른 잔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에 물을 부었다. 곧 싸아하게 집안 가득히 깔끔한 커피향이 감겨 들었다. 그 다갈색 연기 틈새로 나는 다시 옛 기억을 더듬어 들어갔다. 기억속의 어머니는 무척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혜야 엄마는... 지금 너한테 그걸 이해시킬만큼 힘이 남아 있지 않단다. 나무가 되는 건 아주 특별한 거야. 문지방 얘길 기억하니? 엄마는 문지방이 되는 거란다. 지혜곁에 남아서 아빠도 만나고 싶은거야. 죽는것과 나무가 되는 건 같을 지도 몰라, 네가 그렇게 받아 들인다면.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호흠이 가쁜 듯이 숨을 헐떡였다.

  [잘 생각해보렴. 둘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거란다. 완전히 멈추어버리는 것과 보이지 않게 변화하는 것은 다른거야.]

  어머니는 한꺼번에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지쳐 잠드셨다. 그리고 나는 큰 이모한테 어머니를 너무 피로하게 했다고 야단 맞았다. 어머니는 큰 이모보다 어린데 큰 이모보다 빨리 나무가 되었다. 큰 이모는 그것에 못내 서운하신 듯 했지만 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계시지는 않는 듯했다. 큰 이모는 결국 나무가 되지 않고 어느 산자락 나무아래 묻히셨다. 그리고 그 분이 그걸 몹시 서운해한 기억이 남아 있다.

  "후..."

  두 손 깊숙이 잔을 감싸 쥐고 길게 뜨거운 김을 한번 불었다.

  나무가 된다는 건 죽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나는 그때에 이미 인식해 버렸다. '인식한다'라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한번 '어떤 것'이라 인식해버린 것은 '다른 것'으로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또 그렇게 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보통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에겐 나무가 되는 것과 죽음은 같은 단어였다.


  어느새 그것이 거부감 보다는 유용하다는 생각으로 자리잡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처럼 사고에 비명횡사가 많은 때에 죽을 시간을 알고 준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럴싸한 일인가? 게다가 요즘들어 더욱 외박이 잦은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나무가 될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덜 지루하고 외로움도 덜 수 있었다.

  외로울 때 손 닿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는 나무가 되는 것이 났다.

  때르르...

  무선 전화기를 쓰고 어디다 두었지? 나는 소리가 울리는 곳을 찾아 한참 해맸다. 치매는 나무가 되는 시작이다.

  "엄마?"

  전화기에서는 왜 이제야 받았냐는 듯 다급하게 채찍질하는 막내 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응, 왠일이니? 오늘 네 언니하고 같이 온다고 하잖았어?"

  "엄마, 문제가 생겼어. 좀 나올래? 준비하는데 오래 걸려? 내가 집 앞으로 차 가지고 갈게."

  딸 애의 음성이 심상치 않다.

  "그래, 빨리 준비할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더 지체 될거 같아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 불안하고 마음이 조급했다. 무슨 일이지? 막내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큰 애는 제 또래 답지 않게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나를 당황케 했고, 둘째는 그런데로 제 주변에 맞게 움직여서 별 신경이 가지 않았지만 막내는 예술을 한답시고 호방하고 간이 큰(내가 보기엔), 자기말로는 자신감 있고 당당한 성격이었다. 그 애가 무엇에 놀라하거나 당황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열 아홉 살에 '남편 될 사람이예요'하고 왠 시커먼 사내 녀석을 인사시키더니 내가 맘에 안든다는 눈치를 보이기도 전에 '엄마, 내 뱃속에 손녀도 있어'라는 충격 발언으로 내 혼을 쏙 빼놓았던 것이다. 물론 딸 애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애써서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반쯤 식물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그리고 뿌리 내리지도 못한 채 죽어버렸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애를 받은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결혼은 깨졌다. 애초부터 진지한 결혼은 아니었다고 막내는 말했다. 게다가 남자는 처음부터 '나무 이야기'를 전혀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일로 종종 마음이 아팠다.

  빵빵-.

  서둘러 화장을 마치고 신을 신는데 골목 어귀에서 낯익은 엔진 소리와 크락션 소리가 들렸다. 벌써 도착했나 보다.

  "나간다."

  저만치 골목이고 차 안이니 들릴리도 없지만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음 손가방을 달랑 집어 들었다. 마침 뚜껑 닿는 것을 잊었는지 모서리가 쏠리면서 가방안에 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마음도 급한데 너무 당황해서 립스틱과 컴펙트, 동전 지갑등을 주섬주섬 챙겨 넣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

  바로 현관 밖에서 막내의 의아함과 재촉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간다. 무슨 일이니?"

  나는 손가방 안에 무엇을 제대로 집어 넣었는지 확인 해 볼 세도 없이 반쯤 신을 구겨 신고는 달려 나갔다.

  "엄마, 평택에 외할머니 집 있잖아. 거기 철거한데. 나 오늘 아침에 들었어."

  "철거라니?"

  거기에 할머니 나무가 있는데! 나는 철렁한 가슴을 끌어 안았다. 나잇살이나 먹은 에미라는 것이 자식 앞에서 흔들림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딸 애가 거드는 대로 뒷자석에 올라탄 나는 긴 한숨으로 떨림을 무마했다. 차안에는 이미 큰 애가 앉아 있었고, 앞 조수석에는 회사일을 하다 급히 뛰어 나왔는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해친 둘째 애가 앉아 있었다.

  "엄마, 아버지 핸드폰 두고 가셨어요? 오늘 하루종일 해도 연락이 안돼."

  "핸드폰? 가지고 나가신 거 같던데?"

  "큰 누나가 그럼 계속 연락해보고, 희연인 국도로 빠져. 주말이라 고속도로 막힌대."

  "알았어, 오빠."

  막내는 야물딱지게 기어를 잡아 당기고 핸들을 돌렸다. 한남 대교를 타고 수원으로 빠지는 국도를 달리면서 나는 불안감이 거의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철거를 한다니...! 할머니 나무는 괜찮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무렵에 엎친대 덮친격으로 가세가 기울어 급히 그 집을 팔게 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엉뚱하게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할머니나무 옆 그 뒷뜰에 뿌리 내리고 싶어 하셨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묻힌 야산 머리에 서셨다. 나는 어머니의 아쉬움은 그대로 이어받아 남이 것이 되어버린 그 옛집을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왠 갑작스런 철거라니?"

  "아파트를 짓느라 그 일대를 밀어 버린대. 왜, 음봉쪽에 공장 단지 들어 섰잖수. 거기에 발 맞추려는 기센가봐."

  "음봉에 공장? 그게 들어선지가 언젠대."

  나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행여나, 그 옛 집이 그렇게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자기가 살던 곳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을 거란 상상을 도대채 누가 해 본단 말인가? '마음의 고향'이란, 말처럼 언제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곳,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반겨줄 안식처였다. 그런 것이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끔찍한 예상을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요즘같이 세상 정신없이 돌아가는 때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던 이들이, 그 변모한 모습을 보고 마음 따뜻한 안식 대신 가슴에 허한 모래 먼지 더미를 쌓아가는 것은 어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 청심환."

  내 파리한 안색이 눈에 띄였는지 큰 애는 이럴 줄 알았다며 핸드백에서 자그마한 원통을 꺼냈다. 애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만 원통을 청심환이라고 건네받아서 나는 한참을 얼굴 붉히며 헤맸다.

  "엄마는, 요즘은 마시는 걸로 나온다구. 씹어 드시면 체하실까봐 이걸로 골랐는데."

  세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변하고 있었다. 큰 애는 직접 작은 뚜껑을 따서 다시 건넸다. 나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마셨다. 등허리가 어느새 축축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더듬더듬 손가방 안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려는데, 가방안에서 검은 것이 딸려나와 시트위를 굴렀다.

  툭 두르르...

  두리뭉실한 그것을 가만히 보니, 손수건이 아니라 요전에 걸래로 쓰고 현관에 처박아 두었던 빨지 않은 양말이었다. 당혹감과 난처함에 얼굴이 귀밑까지 달아 올랐다. 그때 슬그머니 하얀 휴지를 쥔 손이 다가오더니 시커멓고 냄새나는 그것은 조용히 큰 애 가방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새삼스레 큰 애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전이라면 건망증이라고 한창 창피를 주었을 것을 짐짓 모른척 옆 창으로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웃음이 났다. 약기운 때문인지 큰아이의 어른스런 마음 씀씀이 때문인지 불안은 많이 가라 앉고 있었다.

  "니 아버지한텐 연락 아직 안돼니? 그 양반은 땅 사놓고 나선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다고 얼굴도 보기 힘들데니. 이럴 줄 알았다면 돈 모았을 때 안국동에 그 땅 사지 말고 그 집이나 다시 살 걸.."

  나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나의 당혹스러움과 절망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애들은 벌써 그런 것쯤은 너그럽게 이해해 줄 성인이었다. 그런 중요한 것을 잊다니! 이건 가히 치매라 불릴만 한 망각증상이었다. 당신은 다섯 살짜리 어린 딸마저 어른의 인격으로 대우해 주셨었는데 나는 벌써 자기 애를 하나 이상씩 낳은 내 자식들조차 성인으로 대우 해주지 못한 것이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내가 소중히하던 할머니의 외갓집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가 소식이 들리자 눈앞의 일을 다 물리고 셋이서 합심해 제까닥 제 엄마를 모시러 나왔을 정도로 마음도 훌쩍 자란 내 아이들.

  문득, 치매로 잊은 것이 가벼운 일상의 외로움뿐만이 아니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자그마한 편안함으로 도피해 정말 중요한 것마저 잃고 있는 거 같다.

  "후..."

  뒷일이야 어찌 됐든 우선 애들 손에 상황을 맞겨 보리라 맘먹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편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처음처럼 심장을 조이는 불안감도 없었다.

  "엄마, 여기서 우회전이던가? 아이참, 하도 오랜만이라 기억이 나질 않네."

  막내는 갈림길에서 내 도움을 청했다. 나는 앞좌석 쪽으로 몸을 조금 내밀어 자신있게 길을 안내했다.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길을 잊어 버리니?"

  "어머, 맞아. 이 길이었지. 엄마가 나보다 낫다니깐."

  요새들어 더 심해진 치매에 기가 죽은 내 기분을 살려 주려는 입에 발린 칭찬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정말 할머니 나무가 위험한 순간만 아니라면 이 시간은 느긋하게 행복을 즐길 가족간의 단란한 한 때였다. 아니 이 사건이 오랜만에 가족을 모이게 한 건지도 모르지.

  여러 가지 증명 스티커로 얼룩진 앞 차장 너머로 저쪽 어귀에 드문드문 늘어진 집과 담벼락이 보인다. 그곳에서부턴 차가 다닐만큼 길이 넓지 않아 내려서 걸어야 했다. 막 차문을 열고 나서는데 둘째가 '잠깐'이라고 말리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금방 골목 틈새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돌아왔다. 그리고 앞좌석에 타자마자 차를 돌리라고 했다.

  "왜 그러니?"

  "보실 것 없어요, 엄마. 서울로 가자."

  가슴에 찰랑이던 불안감이 섬뜩하게 떨어졌다. 나는 말리는 큰 애를 떨치고 차밖으로 나가 길 어귀를 돌았다. 그리고 순간 더 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버렸다. 더 나아가 옛집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곳은 숨어 쉴 구석 없어 지친 황량한 먼지바람만 풀풀 휘젓고 다니는 허허 벌판이었다. 골목 모서리부터 칼처럼 잘라 만들어진 공터라서 마치 깜짝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엄마?"

  걱정스런 막내의 목소리가 한동안 멍하니 섰던 나를 불렀다.

  "한 달 전에... 밀렸대."

  막내는 음성엔 미처 알지 못해 죄스럽다는 마음이 강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딸 애와 나란히 걸었다.

  "엄마... 괜찮아?"

  "애는, 괜찮지 않고, 뭐 별일 이라고."

  차로 돌아왔을 때는 작은 애가 마악 큰 애의 핸드폰을 받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어진 선이 없는 공간 저쪽은 남편인 모양이었다.

  "예, 알았어요. 엄마 지금 함께 계세요. 바로 그리로 올라갈게요. 아마 한 시간쯤 걸릴거예요."

  작은 애는 간단한 용건으로 핸두폰 뚜겅을 닫고는 핸들을 잡은 막내에게 말할 겸 우리 모두에게 목적지를 들려 주었다.

  "안국동으로 가자. 아버지 지금 거기 계시대."

  "거기 집 다 지을려면 한 달은 남았다더니 그 양반 왜 거기 가 계시대냐?"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목소리에는 기운없는 신경질이 묻어 있었다. 막내와 작은 애는 말이 없는데 큰 애가 자상하게 대꾸했다.

  "올라가 봐야 알죠. 고속도로로 가자, 차 없더라."

  막내는 부드러운 출발로 큰 애의 말에 대꾸했다. 주말이라 서울로 가는 길은 한산하다 못해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나이답게 않게 속도를 즐기는 제 어미를 위해 막내는 한창 악셀을 밟았지만, 나는 울적한 마음을 추스리느라 그 나는 듯한 스릴도 즐길 수가 없었다.

  "엄마.. 다리는 좀 어때요? 나무가 되면 다리 근육부터 말라 붙기 시작한다는데.."

  문득 돌아보는 작은 애의 시선에서 다리를 숨기느라 나는 황급히 긴치마를 더욱 길게 잡아 끌었다.

  "그냥 그렇지 뭐."

  아이들의 걱정은 당연스런 것일 텐데도 오랜만의 시선이 걱정어린 관심이라기보단 타자의 흥미로 느껴져서 나는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내 지나친 생각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과감히 떨쳐버리려 머리를 한번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이네. 언니랑 나는 집이 멀다 치고 가까운 오빠는 요즘 뭐하는 거야?"

  "일이 바빴다고, 일."

  "헹, 늘 그 일 이야기지. 일은 누군들 안 해? 가끔 엄마를 좀 기쁘게 해 드리라구. 다른 거 있어? 얼굴이나 좀 잘 보여드리면 되지."

  차안의 분위기를 바꾸려 막내가 작은 애한테 앙살을 떤다. 그래도 나는 쉽게 웃을 수가 없었다. 문득, 서늘하게 손을 덮어오는 낯선 체온을 느꼈다. 큰 애의 손이었다. 어려서도 찬 손은 나이가 들어도 쉬이 따뜻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앞좌석에서 동생들이 한창 입씨름이 붙은 사이 큰 애가 말했다.

  "엄마, 있잖아. 엄마가 열심히 착하게 잘 살아오긴 했나봐. 전에 그랬잖아. 착하고 얌전하게 굴면 할머니가 선물도 주실거라구. 할머니 나무 말이야... 돌아가시면서도 선물 남겨 주신게 아닐까? 우리 가족, 다들 결혼하고 독립하고 나서는 이렇게 함께 나온 적 없잖아."

  큰 애의 조용한 음성에 나는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래, 현재가 중요한 것이지. 그걸로 서운함을 모두 메울 수야 없지만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야 기분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큰 누나는 역시 현명해, 나무가 될 자격이 있다니까. 나는 뭐야? 사내 애는 안된다고 누가 정한 거지?"

  앞좌석에 앉아 우리의 대화를 옅들은 작은 애가 너스레를 떤다. 나는 피식 웃었다. 작은 애의 말처럼 나무가 되는 건 외가의 피를 이은 딸들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막내가 낳은 애도 하체가 거의 식물의 형상이어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무가 된 걸 보니 그 애도 분명히 손녀였을 거다.

  "좀 막히네?"

  양재 인터체인지를 지나 한남대교를 건너 3호 터널에서 명동으로 건너가는 중에 차가 좀 많았다.

  띠 띠리리리...

  "네. 윤 수영입니다."

  큰 애가 차분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사위의 커다랗고 호쾌한 목소리가 어깨너머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예? 아, 그래요? 음, 엄마랑 가고 있어요. 그럴까...? 에! 정말?"

  큰 애의 음성에 문득 화색이 느껴져서 얼굴을 보았더니 얼른 창으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했다.

  "음, 한 10분이면 도착할거래요. 거기서봐요."

  "누나네 부부는 아직 신혼이야?"

  간드러지는 큰 애의 음성에 작은 애가 돌아보며 닭살 돋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빠는 금슬 좋은 것두 질투하우?"

  막내는 일본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차를 세웠다.

  "엄마 모시고 먼저 들어가, 나 근처에 주차할 때 있나 알아보고 갈게."

  "그래라."

  작은 애가 먼저 내려 뒷 차문을 열어 주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신사처럼 우아하게 폼을 잡길래 그것에 맞장구 쳐 주다가 웃음이 터져나왔다. 민망할거란 상상은 완전히 어긋났다. 나는 몹시 유쾌해졌다. 할머니 나무를 잊은 것은 아니다. 큰 애처럼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자기 최면이나 자기 합리라고 불러도 좋다. 평택에 그 집은 아직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할머니 나무는 그 옛 기억속에서 아직도 진한 초록색으로 고스란히 늙어가고 있을 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 나무가 있는 곳은 몇 십킬로미터 밖의 평택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아버지!"

  성큼성큼한 걸음으로 나서던 작은애가 먼저 남편을 발견했다. 흰 머리가 희끗하지만 아직 반듯한 쉰 넷의 내 남편은 온화한 표정으로 아들의 인사를 받으며 다가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평택에 갔었다며."

  낯간지러운 다른 어떤 위로말도 필요없이 그 손길은 충분한 위안이 되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남편 품에서 와락 울고 싶었다. 늙었어도, 우리는 부부였고, 그전에는 서로를 보듬어줄 연인이었다. 나는 잠시 그 어깨에 한숨을 묻은 후 곧 남편과 떨어졌다. 서로 남의 눈을 의식하는 성격이 아니라 불편하게 구경하는 시선은 둘째치더라도 주위 경관이 좀 달랐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내 내 속내를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공사가 좀 빨리 끝났어. 여기가 20년 만의 처음 우리 집이라구, 아직 내부 장식이 덜 끝났지만... 당신, 들어와 보지 않겠어?"

  부드럽게 느껴지는 남편의 음성은 어떤 장난스러운 기대가 베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들떠오르는 가슴을 느꼈다. 마치 형제들 틈에 끼어 살다가 자기만의 독방을 얻는 어린애같은 기분이었다. 온전히 내 것인 나만의 공간을 얻은 풍족하고 자유로운 느낌.

  드렁.

  새칠한 대문은 기름이라도 먹인 듯이 매끄럽게 열렸다. 나는 그 말없는 환영을 받으며 눈 앞에 펼쳐진 잔디 밭 사이에 놓인 색색 징검돌을 디뎠다. 남편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휑한 부지만 보았을때는 그냥 그랬는데 마당과 집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훨씬 넓고 아늑했다. 인사동과 이어진 주위와 어우러지느라 양옥 집인데도 처마 위엔 기와가 얹혀 있었다. 나는 집의 독특한 외관보다 오른쪽으로 돌게 되어있는 정원에 더욱 마음이 갔다. 정원이라 부르기엔 좀 협소한 감이 없잖았지만 듬성듬성 채워진 나무 그루들은 그 아쉬움을 접어주고도 남을만큼 정겨웠다. 역시, 동질감일까?

  "슬기 아빠.."

  뒤에 남은 큰 애는 사위와 만나고 있는 듯했다. 그네들이 뒤늦게 도착한 막내와 함세해 조용히 눈짓을 나누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유선형으로 꺽여 뒷랑으로 이어지는 정원틈을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뒷뜰에는 장독을 둬도 될거 같더군. 거기, 할머니 나무 옆에 말이야."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남편의 말로 멍멍해져 있긴했지만 그전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기적에 한참 동안 멍하니 사로 잡혔다. 장독을 위해 일부러 비운 듯한 공간 옆에 낯익은 검은 나무가 서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40년 째 어른 키만 간신히 넘고 있는 잎이 푸른 밤나무, 등이 굽은 우리 할머니였다.

  "수영 아빠..."

  나는 넘어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덕분에 마음 놓고 눈물을 끌어 낼 수 있었다. 여기는 우리 뒷마당이고, 나의 할머니 나무와 너무 소중한 내 남편이 있는 우리집이었다.

  "평택에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 이야기는 두 달 전부터 들어왔어. 왔다갔다 했는데... 도저히 집공사도 끝날때까지 거기가 밀리지 않을 보장이 없어서 우선 뽑아다 조경원에 맞겼지. 잘 신경 써 주나 일주일에 두 번씩은 가봐야 했었고... 환경이 갑자기 바뀌면 쇠약해 지실 거 같아서. 여기 모신지는 사흘밖에 안됐어."

  울음을 삼키는 내 등을 토닥이며 남편은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변명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 긴 과정으로 들렸다.

  "어쩜... 애들한테도 말 안 했어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 안했어."

  나는 큰 애의 청심환과 세심한 배려를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말 안했어도 그 애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막내가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와락 목에 매달렸다.

  "에구 깜짝이야. 다 큰 애가..."

  나는 민망해 하면서도 막내 딸의 포옹을 거부하지 않았다.

  "엄마는..."

  막내는 어린애처럼 앙살하며 가벼운 핀잔에도 늙은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처럼 크고 든든하진 않았지만 딸애의 팔은 분명 좀더 부드럽고 포근했다. 이 느낌이 얼마만인지 코끝이 시큼한 기분마저 든다.

  "어머니, 늦어서 죄송해요."

  앞마당에는 사위와 큰 애, 작은 애, 며늘애까지 모두가 모여 있었다. 손주를 유치원에서 찾아 오느라 조금 늦었다고 말하는 며늘애의 입술 끝에는 언제나와 같은 자상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이제 막 미운 나이가 되어가는 손주를 품에 안으며 불현 듯 깨달았다. 모든 것이, 실은 아주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혼자만의 생각에 지나쳐 포기하려 했던 '행복'들은 이렇게 색도 바래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것들에 잊혀진 것이 내가 아니라, 그것을 잊은 것이 나였다. 세삼스레 되찾은 할머니 나무처럼.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생각해보니, 어릴적의 나는 나무가 되는 것을 어떤 형벌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 스스로 불러들이신 징벌. 그래서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그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원하는 대로의 '외로움을 잊는 징벌'이라면 나무가 되는 것보다 죽는 편이 훨씬 더 어울렸을 것이다. 죽음만이 온전히 세상 모든 것과 손을 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는 것으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귀가 멎고, 몸이 시간에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는 죽음처럼 멈추어 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없는 느낌표로 살아 세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으려는 생각에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나를 한꺼번에 느끼고 싶으셨기 때문에 나무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욕심쟁이였다.

  "벌써부터 나무가 될 필요는 없잖우."

  옆에서 큰 애가 내 속을 짐작한 듯 어깨를 두드린다.

  "조금 느긋하게 노년기를 즐기시라구요."

  서른을 갓 넘긴 그애의 눈은 피폐해져 가시 돋친 제 어미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보듬어 줄 정도로 깊었다. 역시 이 애는 너무 철이 빨리 들었다. 나보다도 훨씬 어머니를 빼닮은 게 큰 애다.

  "장모님, 오랜만에 함께 외식이나 하시죠? 근처에 잘하는 고깃집 아는데..."

  "자네가 낼껀가?"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능글능글한 웃음을 보였다. 사위는 '역시 우리 장모님'이라는 식의 너스레를 떨어 나에게 맞장구 쳤다. 나는 얌전한 큰 애를 잘 보필해줄 큰 사위의 성격을 처음부터 무척 맘에 들어 했었다.

  이제 나는 한동안 나무가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아주 특별한 축복이라는 걸 알지만, 큰 애의 말처럼 너무 빨리 나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직, 세상엔 내가 사람으로서 즐거울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걸 다 쓰고 새로운 방식의 삶을 얻어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거다. 세상 사는데 죽을 때까지 온전히 내 것인 것은 시간밖에 없을 테니까.

  "잠깐만..."

  달칵...

  나는 눈물자국을 지우려 컴팩트를 꺼내다가 가방 안에 들어있는 부러진 구둣솔을 보고 웃어 버렸다. 세상에,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회향나무 숲, 그 어둡고 깊은 한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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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나무 03.09.29 01:36 댓글 수정 삭제
    나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그 재 뿌린 곳에 나무 한 그루 심어 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더랬지요. 늙도 않은 것이 벌써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다고 된통 혼났더랬지요. 단 한 사람, 동생이 그러겠다고 해줘서 본전은 건졌습니다만--- 할머니 나무를 읽고 나니 이리 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부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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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바라 03.10.14 21:59 댓글 수정 삭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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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y 03.10.24 15:0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하고, 멋진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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