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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 만난 길거리 화가

 

 


내 이름은 지도남, 나이는 29세다.
11월. 라오스는 지금 건기라서 여행하기 좋다. 날은 덥지만 땀은 안 나는 날씨. 한낮 기온 30도, 하지만 한국의 습하고 푹푹 찌는 날씨와는 다르다. 덥다고 불쾌지수가 치솟지는 않는다.
하, 그래도 덥기는 덥다. 라오스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인가, 뒤에 성인 예닐곱 명 태울 수 있게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뚝뚝에서 내리자마자, 더워,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왼쪽으로 메콩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강가에 음식과 생과일 음료를 파는 노점들. 음료 한잔 사마실까 하다가, 그리 시원할 것 같지 않아 그만 두었다.
강가를 따라 조금 걷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바로 눈에 들어온 건 식료품 가게였다. 음료수가 들어 있는 냉장고. 냉장고 안에서 캔콜라를 꺼냈다. 외국까지 와서 처음 사먹는 음식이 콜라라니,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캔을 따서 한모금 들이켰다. 낭만이고 뭐고, 세상에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식료품 가게 옆 화단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오스 북쪽에 위치한 루앙프라방. 수도 비엔티엔에서 비행기로 40분 정도 걸린다. 불교 사원이 많은 곳이다. 그리고 외국 관광객들도 많다. 현지인 수를 압도할 정도로 많다. 물론 대부분이 서양 사람들. 지금 주변은 온통 서양 사람들뿐이다. 내가 라오스에 온 건지 유럽 어느 시골 마을에 온 건지 애매모호할 정도였다.
‘1 DAY, 50000kip’
내가 앉아 있는 바로 맞은편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현관문 옆 입간판에 쓰인 글씨, ‘kip’은 라오스 화폐 단위다. 천 원이 8000kip 정도 한다. 그러니까 하룻밤 자는 데 6천 원 조금 넘는 셈인가. 게스트하우스는 마당이 있는 2층 건물이었고, 조금 오래된 듯 보였다. 골목이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밤에 잘 때 뒤척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가 영어로 인사를 하며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여행 중이신가요?”
“네. 이곳에서 이틀 정도 머물 생각인데요, 혹시 방 있나요?”
“네, 있어요. 하지만 전부 침대 두 개짜리 방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상관없습니다. 침대 두 개짜리도 하루 5만 킵인가요?”
“네, 5만 킵이에요.”
1인용 침대 두 개. 그러고도 침대 한 개 정도 놓을 공간이 있었다. 좁지 않은 방이었다. 침대 시트도 깨끗했고 덮는 이불도 깨끗했다. 안내 받은 욕실은 공용. 나쁘지 않았다. 따뜻한 물도 잘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 이틀 머물기로 하고 1층으로 내려가 10만 킵을 주었다. 그리고 방명록에 여권 번호와 이름, 나이, 국적을 적었다. 지도남, 29세, 대한민국.
짐을 정리하려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불렀다.
“혹시 이곳에서 저녁 5시부터 야시장 열리는 거 알고 있나요? 몰랐다면 나중에 한번 가보세요. 볼 게 참 많아요. 민속공예품도 있고, 그림도 있고, 옷도 있고. 물론 민속공예품이 대부분이지만요, 이곳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 보는 재미가 있잖아요. 게다가 먹을거리도 많아요. 대부분 라오스 음식들이에요.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요. 라오스에 오셨으니, 이곳 사람들이 먹는 음식 한번 먹어보는 것도 추억이잖아요. 값도 싸고요. 1만 킵이면 접시 한가득 음식을 담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아주머니는 야시장이 열리는 곳을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벌써 오후 한 시. 한국 시간으로 보면 오후 세 시 정도.
대충 짐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애초에 루앙프라방에 온 목적은 불교 사원 구경이었다. 하지만 햇빛이 너무 강했다. 아마도 하루 중 햇빛이 제일 강한 때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날씨에 계획대로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야 안 쓰러진다.
우선 목이 말랐다. 아직 시간은 안 됐지만 야시장이 열린다는 곳으로 가봤다. 왕복 4차선 도로, 길이 넓었다. 자동차보다는 오토바이가 더 많이 다녔다. 길 양쪽으로 카페, 레스토랑, 여행사, 민속공예품 판매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카페마다 몇몇 관광객들이 앉아서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거리를 관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아까부터 목이 말랐다. 카페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았다. 비어 라오. 저들이 마시는 맥주가 비어 라오였다. 나는 맥주 한 병하고 닭고기가 들어간 면 요리를 주문했다. 나 역시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 이국적으로 보일 것이다.
맥주를 잔에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가스가 확 올라와서 코끝이 찡했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비어 라오, 라오스의 대표 맥주인가, 한국의 대표 맥주들과 별 차이는 없었다. 그냥 맥주 맛이었다.
현지인들은 주로 오토바이를 탄 채 거리를 지나다녔고, 관광객들은 주로 슬리퍼를 신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의자에 기대고 앉아 사람들 모습을 쳐다보았다.
나의 이런 행동, 참 익숙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장사 잘 안 되는 동네 작은 커피숍을 하다 보니 늘 하는 행동이다. 가게 안에 있는 네 개의 테이블 중 하나는 거의 내 지정석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할 게 없어서 항상 내 지정석에 앉아 사람들을 혹은 거리를 본다. 그런 나를 사람들도 보고. 그러다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커피를 만들어준다. 그러고는 다시 내 지정석에 가 앉는다. 물론 다른 점은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들어와도 내가 커피를 만들어줄 필요가 없다.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그냥 계속 앉아 있어도 된다. 이게 타국까지 와서 생각한 차이점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가 조금 안 됐다.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사원에 가든 동네를 한바퀴 돌든 할 작정이었다. 내 가게에서 하던 행동을 흉내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으니까. 무료한 게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걸어다니면서 무료함을 느끼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약간이라도 차이를 주고 싶었다.
미리 주문한 커피를 들고서 밖으로 나왔다.
야시장이 열린다는 곳에서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장사할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폈다. 그런 사람들이 몇 눈에 띄었다. 가지고 온 물건들은 대부분 종이에 라오스 승려들을 그린 그림이나 실로 만든 지갑, 천으로 만든 인형, 각종 액세서리 등이었다. 특별히 시선이 가는 건 없었다.
몇몇 상인들이 펼쳐놓은 물건들을 대충 둘러보며 걷다가, 어느새 야시장이 열리는 길 끝까지 왔다. 구경하는 데 십 분도 채 안 걸렸다. 물론 아직 시간이 일러 본격적으로 야시장이 열린 건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열린다고 해도 그리 구경할 만한 게 마땅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자전거나 빌려서 동네 외곽을 한바퀴 돌고 올까. 그런 생각에 일단 야시장 구역을 벗어나 자전거 대여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야시장 끝에서 왼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길모퉁이에 돗자리 대신 다 낡아빠진 천을 깔고, 작은 접이식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라오스 사람치고는 유난히 얼굴이 하얗다. 천 바닥에는 스케치북 하나와 연필 몇 자루뿐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림 그려주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치던 중이었다. 그때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려드릴게요. 앉으세요.”
마치 공짜로 그려주겠다는 말투였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앉게 될 거라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여행 중이신 거 같은데, 별로 즐겁지는 않은가 봐요. 앉으세요. 제가 얼굴 그려드릴게요. 그러면 색다른 라오스 여행을 경험하실 거예요.”
물론 라오스 여행이 생각보다 즐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화가에게 내 얼굴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면, 그 다음부터는 여행이 즐거워지나! 그것도 색다른 라오스 여행이! 관광객을 상대로 나름 호기심 유발형 호객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라오스다. 라오스까지 와서 길거리 화가 앞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한국에서도 몇 번 해봤다. 지루했다. 당연히 여기에서도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앉아 있으려면 지루할 것이다. 전혀 색다른 경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자에게 그림 그리는 데 얼마냐고 물었다. 설마 공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여자에게 말을 걸었지! 자세히 보니 예쁜 얼굴이었다. 앉아 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몸매도 괜찮아 보였고. 그래서 물었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불순한 생각으로.
“20만 킵이에요. 얼굴 그려드리는 데요.”
컥, 20만 킵! 한국 돈으로 치면 대략 2만 5천 원. 그렇게 따지면 또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게스트하우스 하루 방값이 5만 킵이다. 야시장에서 먹는 푸짐한 식사 한 끼가 1만 킵이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맛있는 요리는 3만 킵 정도다. 라오스 물가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굉장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구라고는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스케치북과 연필뿐이었다. 하다못해 물감조차 없었다. 지우개도 없었다. 그냥 연필로 슥슥 그려줄 게 뻔하다. 그런데 20만 킵! 그것도 전신이 아니라 달랑 얼굴 그려주는데! 나는 커피 한 잔 팔아서 3천 원 번다. 거의 여덟 잔을 팔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이렇게 따지니까 또 확 피부에 와닿는다. 굉장히 비싼 값이다. 이 나라 예술가들은 자부심이 대단한가? 색다른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장담하질 않나, 엄청 비싼 값을 부르질 않나. 자부심 갖는 건 좋지만, 그걸 꼭 돈으로 표현해야 하나. 갑자기 예술가들에게 심한 거부감이 생겼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여자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그림 그릴 준비라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여전히 천막 밖에서 멀뚱히 서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비싸네요.”
그냥 발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인데, 나는 굳이 그림 그려주는 값이 비싸다고 한마디 했다.
“비싼 거 아니에요. 제 그림은 좀 특별하거든요.”
여자는 그 말만 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집어들고는 나를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꽉 다문 입술, 동그란 눈으로 상대방의 뇌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
라오스를 여행하는 동안 방값 빼고 하루에 최대 20만 킵까지만 쓰자고 예산을 짰다. 그런데 그림 하나 그리는 데 20만 킵. 당연히 자리를 떠야 정상이다. 그려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저 여자, 혹시 나한테 무슨 최면이라도 거는 걸까. 그냥 자리를 떠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한쪽에 있는 접이식 간이의자를 펼쳐서 여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여자는 내가 의자에 앉으리라는 걸 알았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없이 연필로 슥삭슥삭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렸다.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그냥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멋대로 막 그리네. 내 얼굴은 쳐다도 안 보고 막 그려. 그새 내 얼굴을 다 외웠나. 그나저나 이젠 일어날 수도 없어. 20만 킵 날렸어. 내일부터는 하루에 10만 킵씩만 써야겠어. 아, 그런데 저 그림 정말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쓸 데가 없잖아. 가게 벽에다 붙일까. 라오스의 유명 화가가 그려준 그림, 손님들한테 이렇게 소개라도 할까. 그런데 손이 참 곱다. 목도 가늘고 길어. 얼굴도 예쁘고. 저 화가 아가씨 모습 감상하는 데 20만 킵. 별로 아깝지는 않구나.
“제가 비싼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 됐어요. 받으세요.”
뭐야, 벌써 그린 거야! 너무 빨리 그렸잖아! 외국인이라고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야! 너무 대충 그린 거 아니냐고 이거! 아니지, 그런데 뭐야 이거, 설마 지금 내 생각을 읽은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내가 지금까지 속으로 중얼거린 게 아니라는 건가.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나. 미쳐, 내가 미쳐. 그럼 혹시 지금도! 아니지, 나 방금 한국말로 생각한 건데.
나는 여자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모습. 손에는 내 얼굴을 그렸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스케치북을 부욱 찢은 종이.
나는 주머니에서 20만 킵을 꺼내 여자에게 준 뒤, 여자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낚아채 듯 쥐고 그곳을 벗어났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처음부터 내가 그림 그려달라고 부탁할 걸 예상한 듯한 행동,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내뱉은 말.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가 있는 쪽을 보았다.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줄곧 내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엉겁결에 나도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지러웠다.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꼈다. 손을 흔들었는데 왜 어지러울까. 머리를 흔든 것도 아니고 손을 흔들었는데. 종이를 쥔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내 얼굴을 그린 종이.
나는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될 수 있으면 여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방향 감각도 없었다. 그냥 무작정 걸었다. 이러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 못 찾으면 큰일이다.
내 옆으로 오토바이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녔다. 다들 운전을 능숙하게 했다. 걸음마보다 오토바이 운전을 먼저 배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오토바이 운전 솜씨를 감상하며 걷다 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폭이 좁아서 메콩강 같지는 않았다. 뭐 메콩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강가 난간에 앉아 또다시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를 구경했다. 원래는 강을 구경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몸을 비틀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자세가 돼버린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직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아직 나는 그림을 보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그렸을까, 똑같이 그리기는 했을까, 20만 킵 값어치를 할 정도는 될까. 궁금했다.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도대체 얜 누구냐! 분명 동양인이기는 한데, 한국인 같기는 한데, 그런데 넌 누구냐! 난 한국인 29세 지도남. 넌 누구냐! 넌 누군데 종이 속에 들어가 있는 거냐! 얼굴 형태부터가 달라. 넌 너무 길쭉해. 턱이 너무 뾰족하다고. 입술은 두텁고, 눈은 찢어졌고, 코는 유난히 크고, 눈썹은 또 왜 이렇게 짙어! 도대체 넌 누구냐! 그러니까 저 여자는 내 돈을 20만 킵이나 받아놓고선 도대체 누굴 그린 거냐고! 자기가 사귀고 있는 한국인 남자친구라도 그린 거야! 왜 내 얼굴을 자기 멋대로 상상해서 그린 거야! 나랑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잖아!
이건 내가 아니잖아!
하마터면 종이를 구겨서 강물에 던져버릴 뻔했다. 20만 킵을 그냥 날릴 뻔했다. 증거품이 사라질 뻔했다.
지나다니는 오토바이 따위 구경할 때가 아니다. 당장 아까 그 여자한테 가서 따져야 한다. 이게 어디 나냐고, 당장 환불해 달라고 따져야 한다.
일단 내가 온 길을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보았다. 그림 그렸던 곳에서 왼쪽으로 쭉 와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쭉 와서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서 왼쪽이었던가 아니면 오른쪽이었던가, 아무튼 골목을 나와서 쭉 와서 큰 사거리 지나서 왼쪽으로 왔을 것이다. 거기가 여기다. 이제 반대로 가면 된다.
나는 종이를 쥐기 편하게 반으로 접은 다음, 뛰었다.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골목에서 잠시 길을 해매기는 했지만 무사히 야시장이 열리는 곳까지 왔다. 그리고 여자가 천을 깔아놓고 그림을 그렸던 곳까지 왔다. 아까까지 그림을 그렸던 곳까지 왔다. 분명히 이곳이었다. 길모퉁이, 야시장이 끝나는 곳 길모퉁이, 반대로 얘기하면, 야시장이 시작되는 곳 길모퉁이.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자가 없다. 천이며 접이식 간이의자 같은 것도 없다. 그 자리는 각종 철기구 파는 좌판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도 나이 든 사내였다.
여자가 튀었다. 엉터리 그림을 그려주고는 내 돈 20만 킵을 들고 튀었다. 자기 한국 남자친구 얼굴을 그려주고 튀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나,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나, 남자 얼굴만 보면 남자친구 얼굴이 떠오르나. 그렇더라도 내가 그 여자의 안타까운 사연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중요한 건 그 여자가 내 돈 20만 킵을 들고 튀었다는 것이다. 뭐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다 있냐.
어쩌면 내일 다시 이곳에 나오지 않을까, 아니 안 나올 수도 있다. 이곳에서 한 건 올렸으니, 다른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는 또 언제 올 지 알 수 없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어리숙한 나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여자가 내일 다시 이곳에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서 분하지만 단념하기로 했다. 계속 생각해 봤자 여행 기분만 망친다. 쿨하게 잊어버리자.
그러고 보니 날이 제법 선선해졌다. 덥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안 됐다. 하지만 이미 야시장은 개장 분위기였다. 차량을 통제했고, 인도와 차도에는 사람들이 진열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야시장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도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나는 이미 아까 야시장을 대충 둘러봤던 터라 크게 흥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여전히 나를 전혀 닮지 않은 그림을 손에 쥔 채 야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파는 물건들은 비슷비슷했다. 지갑, 인형, 액세서리, 그림, 옷 등등. 심지어 전갈이 들어가 있는 술을 파는 사람들도 여러 명이었다. 똑같은 병, 똑같은 용량. 전갈 크기도 비슷해 보였다. 마땅히 살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야시장 한쪽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건 먹거리들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가 얘기했던 음식, 그러니까 1만 킵만 주면 음식을 한 접시 가득 담을 수 있다.
처음에는 주인아주머니 얘기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한 접시 가득 담아서 1만 킵이라니, 1만 킵을 주면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준다는 뜻인가. 한국 돈으로 천 원이 조금 넘는 금액. 그 돈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니 어쨌든 반가웠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1만 킵으로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일종의 뷔페식이었다. 1만 킵만 주면 30여 가지 음식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그러니까 한 개의 접시 위에 먹을 만큼 담으면 된다. 그렇게 한 번으로 끝이다. 두세 번 왕복은 안 된다.
대부분이 라오스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각종 면 요리와 튀김 요리와 야채들, 내 입맛에도 맞았다. 1만 킵으로 한 끼를 배터지게 해결했다. 그림 값으로 날린 돈을 일부 보상 받은 기분까지 들었다. 5만 킵 정도 되찾은 기분.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하게 눈 밑에 뭔가가 아른거린다. 마치 콧등에 뭔가 묻은 듯한 기분, 뭔가 안 보이던 게 보이는 듯한 기분. 밥 먹을 때도 은근히 신경에 거슬렸다. 손으로 계속 콧등을 문질러도 마찬가지였다. 없어지지 않았다. 나 굉장히 예민한 남잔데, 뭐냐고 이거!
밥 배불리 먹은 뒤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야시장을 벗어났다. 제법 어두워졌고 더위는 완전히 기세가 꺾였다. 선선하기까지 했다. 바로 게스트하우스로 가서 쉴까 하다가, 카페에서 저녁 거리 구경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눈에 띈 카페로 가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한 건 역시 비어 라오. 작은 병으로 하나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까 밥 먹을 때도 느낀 거지만, 그러니까 눈 밑에 뭔가 보이는 것 말고 또 다른 거지만, 지금도 굉장히 편하다.
5년이 넘었다. 앉기만 하면 배가 불편했다. 명치에서 오른쪽, 앉기만 하면 나는 저절로 그쪽에 있는 근육에 힘을 주게 된다. 한쪽 팔은 힘을 뺀 상태, 한쪽 팔은 주먹을 꽉 쥔 상태.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 앉기만 하면 늘 배 오른쪽에 힘을 주게 된다. 억지로 윙크를 하듯이 오른쪽 눈만 꽉 감은 상태, 그것과 비슷하다. 저절로 배 오른쪽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간혹 근육이 경직돼 배 오른쪽이 파르르 떨리는 경우도 있다. 근육통을 겪을 때도 있다. 물론 힘을 빼려고 수없이 노력해 봤다. 하지만 내 의지로 힘을 주고 있는 게 아니라서 소용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경, 멋대로 힘을 주라고 명령하고 있는 신경, 그걸 어떻게 조종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힘을 빼고 싶으면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앉지 않으면 힘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5년 전 어느 날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의식하게 되었다. 배 오른쪽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 뒤로 항상 의식을 하게 된다. 지금 배 오른쪽에 힘을 주고 있다고.
그렇게 힘을 빼보려고 애를 써도 안 됐는데, 지금 그 힘이 빠진 것이다. 배 오른쪽에 힘을 안 주고 있다. 일부러 힘을 줘봐도, 이젠 쉽게 힘을 뺄 수 있다. 그렇게 됐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저녁 거리 풍경을 구경하려고 했다. 외국의 어느 저녁 거리 풍경, 생각만 해도 참 낭만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라오스에 오기 전에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낭만적이라는 생각 대신 다른 걸 떠올리고 있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저녁 거리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이 생각뿐이고, 이 말만 중얼거리고 있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편하다. 쉬지 않고 생각하고, 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편해졌을까. 언제부터 편해졌을까. 라오스 오기 전부터! 아니면 라오스에 도착해서! 한국을 벗어나면 배에 힘을 안 주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외국에 나와서까지 힘을 주게 되면 여러 모로 불편할 수 있으니까, 특별히 뇌가 배려를 해주는 걸까! 아, 이 배려심 깊은 뇌!
어쩌면 비어 라오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맥주를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코올이 들어가면 뇌든 신경이든 뭐든 좀 둔해질 테니까. 실제로 한국에서도 사람들과 술 마실 때에는 배에 힘을 안 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 병을 더 마실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을 너무 쬐어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괜히 술 한 병 더 마셨다가는 픽 쓰러질지도 모른다. 응, 아니,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아니, 내가 술이 이렇게 약했던가! 평소 같았으면 이런 생각 안 했을 텐데! 술 한 병 더 마신다고 픽 쓰러진다니, 전혀 나답지 않은 생각이다. 삼일을 잠 한숨 안 자고 술 마신 적도 있었다. 친구가 이러다 우리 죽겠다고 겁을 먹어서 결국 그만 마셨다. 그런 내가 겨우 술 한 병 가지고, 그것도 맥주를, 아, 비록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지만 정말이지 낯설다. 배도 멀쩡하고 떠오르는 생각도 낯설고, 역시 일찍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림 그려준 여자, 그 여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쪽 방향으로 걷다가 저쪽 방향으로 걷다가 이쪽 방향으로 걷다가. 돌아올 때 길을 못 찾으면 어떡하지, 하고 잠시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감하게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강가에 앉아서 그림을 살펴본 뒤, 다시 여자가 있던 곳으로 왔다. 하지만 올 때 길을 헤매지 않았다. 왔던 길이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랐다. 저쪽으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그건 전혀 나답지 않았다. 여긴 외국이다. 게다가 초행길이다. 게다가 이쪽저쪽 생각 없이 방향을 바꿔가며 걸었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다 떠올렸다. 세상에,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길치인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대공원으로 여름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오전에 동물들 구경하고 나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 뒤 잠시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말했다. 엄마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지만, 친구들이 보고 있어서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화장실 표지판만 따라가면 문제없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친구들 앞에서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나는 엄마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해하던 얼굴, 엄마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예상은 적중했다. 화장실 찾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엄마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엄마와 아이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었으니까. 결국 대공원 내에 울려퍼지던 방송을 듣고 찾아온 엄마는 누가 봐도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엄마한테 나는 그 자리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맞았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그랬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이후로도 많았다. 특히나 누가 위치를 알려준다면서 그려준 약도는 내게 미로처럼 보였다. 반드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여자가 있는 곳의 위치가 마치 약도를 그리듯 떠올랐고, 그건 전혀 미로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야 할 방향까지 순서대로 떠올랐을 정도였다. 덕분에 여자가 있던 곳까지 쉽게 찾아왔다.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겪었다. 배 오른쪽은 여전히 편했다.
이곳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는 계속 무언가를 떠올릴 것만 같아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순간, 비틀. 아, 맥주 한 병 마시고 중심을 잃다니. 그것도 작은 거 한 병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낯설다. 꼭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을 그린 뒤로 여태 담배를 한 번도 안 피웠다. 피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려는데 갑자기 목이 막혔다. 마치 누군가 내 목을 손으로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목이 막혔고 숨이 막혔고 기가 막혔다. 이 느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려 할 때 목이 막히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담배를 배우려고 처음으로 연기를 들이마셨을 때 겪었던 증상이었다. 그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기침을 마구 해댔다. 물론 지금도 속이 다 뒤집힐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허리를 숙인 채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내 옆을 지나던 외국인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손짓한 다음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입을 닦았다. 입을 닦는 동안에도 잔기침이 계속 나왔다.
나는 한쪽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내가 담배를 못 피울 리가 없지. 담배 피운 지 7년은 넘었을 텐데, 내 기억으로는 분명히 그런데, 담배 연기를 못 삼킬 리가 없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시도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기침을 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길바닥에 집어던지고 서둘러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상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고 있다. 머리가 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도 낮에 햇빛을 너무 많이 쬔 모양이었다. 이런 날에는 일찍 자는 게 좋다. 외국까지 와서 초저녁에 잔다는 게 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런 날은 일찍 자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생각을 안 한다.
방에 들어와서 곧장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우니까 살짝 졸음이 밀려왔다. 씻기가 싫었고 옷도 갈아입기 싫었다. 그냥 자고 싶었다. 길눈이 밝아졌고, 술이 약해졌고, 담배를 못 피운다. 원래는 길눈이 어두웠고, 술이 셌고, 담배를 피웠다. 그냥 자고 싶은데도 어느 틈에 침대에서 일어나 수건과 세면도구를 챙기고 있다. 이것도 변한 걸까. 원래의 나였다면 그냥 잤을까, 아니면 씻고 잤을까.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애초에 원래의 나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원래의 나라는 말이 무슨 소리지! 나는 그냥 나잖아!
나는 이상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어지럼증 때문에 속이 매스꺼웠다.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마실 물이 없었다. 손에 들려 있는 세면도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양치질을 하면 매스꺼움이 좀 가시겠지. 샤워하면 머리도 좀 개운해질 테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직 이른 시각이라 다른 투숙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창 야시장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편하게 욕실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세면도구를 가지고 욕실로 갔다.
우선 옷을 벗어서 걸어놓고 칫솔 위에 치약을 짜 얹었다.
칫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아니다!
너, 넌 내가 아니잖아! 내 얼굴이 아니잖아! 지도남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넌 내가 아니고, 그 그림이잖아! 그 여자가 그려준 그림, 그 그림 속 얼굴이잖아! 길쭉한 얼굴, 뾰족한 턱, 두터운 입술, 찢어진 눈, 큰 코, 짙은 눈썹. 넌 그 그림 속 얼굴이잖아!
내가 아니잖아!
눈 밑에 무언가 아른거렸던 것,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뾰족한 턱이었다. 턱 끝이 살짝 보였던 것이었다.
그랬구나. 난 또 뭔가 했네.
나는 양치질을 하면서 몇 번이나 턱을 쓰다듬었다.

 

루앙프라방에서 이틀을 머문 뒤,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가 알려준 길을 따라 북쪽 버스터미널까지 갔다. 다음 목적지는 방비엥이었다.
버스를 타고 방비엥까지 가는 데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 고속도로가 없는 탓에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거리에 비해 시간이 꽤나 걸렸다. 아홉 시간의 버스 여행, 흔치 않은 경험이지만 결코 자주 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지루했다.
밤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방비엥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하루를 손해본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터미널 주변은 임시 활주로라고 들었다. 게다가 해가 완전히 진 시각, 캄캄하고 황량했다. 저 멀리 불빛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걸어서 10분이 걸릴지 한 시간이 걸릴지 감이 안 왔다.
뚝뚝 기사가 다가와 타라고 손짓했다. 나는 뚝뚝 기사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게스트하우스 가운데 한 곳을 가리키며, 이곳까지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뚝뚝 기사는 갈 수 있다는 말 대신 “2만 킵!” 하고 소리쳤다. 1만 킵으로 가격을 깎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뚝뚝에 올라탔다.
아홉 시간의 버스 여행이 내 심신을 녹초로 만들었다. 흥정이고 뭐고 조금이라도 빨리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침대 위에 쓰러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론 샤워부터 해야겠지만. 따뜻한 물로.
뚝뚝은 임시 활주로를 가로질러 방비엥 시내 중심가를 질주했다. 식당, 술집, 마사지숍, 미용실, 여행사, 식료품 가게, 학교 등을 지나쳐, 3층으로 된 아랍 분위기의 건물 앞에서 멈췄다.
하룻밤 숙박료 10만 킵짜리 게스트하우스. 한국 돈으로 만 원이 조금 넘지만, 그래도 라오스 물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싼 편은 아니다. 대신 넓은 침대에 텔레비전도 있고 욕실도 딸려 있다. 루앙프라방에서의 공동욕실이 조금 불편해서, 이곳 방비엥에서는 욕실이 함께 있는 방을 구하고 싶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어느새 마당 한가운데까지 나와서 나를 반겼다. 뚝뚝 소리에 혹시나 싶어 나와본 모양이었다.
먼저 주인에게 방이 있냐고 물었다.
“네, 2층에 빈 방이 하나 있어요.”
“욕실도 같이 있는 방 맞나요?”
“네, 욕실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습니다. 온수도 잘 나오고요.”
“하루 숙박비는요?”
“10만 킵이에요.”
그 방에서 이틀을 묵겠다고 하자, 주인이 먼저 방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러고는 1층으로 내려와서 투숙객 방명록을 내게 내밀었다.
이곳도 여권 번호와 이름, 나이, 국적을 적어야 했다. 우선 여권 번호를 적고 나머지도 마저 적었다. 이디도, 27세, 대한민국.
나는 방명록을 다시 주인에게 건넨 뒤, 지갑에서 20만 킵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방 열쇠를 건네받았다.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시내로 나가서 간단히 식사나 하며 커피 한잔 마실까 하다, 괜히 커피 마셨다가 나중에 잠 설치면 곤란하겠다 싶어 그만 두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버스 여행만 해서 하루를 손해본 느낌인데, 잠 설치다 내일 만약 늦잠이라도 자면, 홧김에 하루 종일 잠만 잘 가능성도 있다. 오우,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샤워를 하기 위해 곧장 욕실로 갔다. 물은 따뜻하지 않았고 미지근했다. 라오스의 11월 밤은 쌀쌀하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몸에 기를 좀 불어넣어 줘야 한다. 그래서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기마 자세를 취한 뒤, 몸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양팔을 뻗었다. 좀 진지하게 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 이를 악 물고 샤워를 마쳤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다. 라오스 드라마를 잠깐 보다가, 뉴스를 잠깐 보다가, 한국 가수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그러다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새벽이었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닭, 도대체 어느 집 닭이 저렇게 신경질적으로 날이 밝았다고 고함을 지르는 걸까. 혼자서 방비엥 시내 전체에 날이 밝았음을 알리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비엥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깰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저 닭의 모가지를 비틀었다. 죄책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한 백 번 목을 비틀고 나서 겨우 눈을 떴다. 커튼을 치지 않고 잠을 잔 모양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방 안 전체에 퍼졌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환한 방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조금 늦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고 따뜻한 방, 참 이국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울부짖고 있는 저 닭 때문에 생각이 자꾸 끊기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맛보는 이국적인 느낌 때문에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여전히 미지근한 물, 라오스 사람들은 이 정도의 온도를 온수라고 하는 걸까.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서, 가방에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이곳은 방비엥. 오늘부터 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리라. 어떤 걸 보게 되고, 누구를 만나게 될까. 처음 맛보는 음식은 과연 어떤 맛일까. 우선 로비에서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마신 뒤 거리로 나섰다.
시내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탓에 거리는 한산했다. 개들 몇 마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갔다. 그리 크지 않아서 무섭지는 않았다.
학교가 보였다. 단층짜리 건물에 여러 개의 교실이 있었다. 교실마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멀리서도 아이들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교실에서는 지금이 음악 시간인가, 아이들 노랫소리도 들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 입구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낯선 이방인이 교실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좋게 보일 것 같지 않아 그만 두었다.
학교를 지나쳐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멀리 개들 몇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루앙프라방도 그렇고 이곳 방비엥도 그렇고, 개들이 참 많다. 하지만 사람을 경계하지는 않는다. 개 짖는 소리도 들은 기억이 없다. 쟤네들은 짖지도 않나. 참 과묵한 개들, 아까 그 닭이 좀 보고 배워야 하는데.
길 끝에서 이번에는 왼쪽 길을 택했다. 이 길로 쭉 가면 방비엥 중심가다. 우선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자전거를 빌려 주변을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다.
식당도 이미 정해두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다 만난 주인에게 음식 맛 좋은 식당을 물어보았다. 라오스 전통 음식을 파는 곳인데, 맛도 좋아서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식당이라고 했다. 주인이 설명한 대로라면, 이제 한 블록만 더 가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나온다. 식당 생각을 하니 배에서 아까 그 닭이 울어대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건 분명 내가 닭 울음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린 게 틀림없다. 당장 내일 아침이 걱정이었다. 그 닭 울음소리를 또 들어야 한다. 바로 옆집에 그런 신경질적인 닭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봤을 것이다. 라오스 여행 안내서에는 왜 그 닭의 정체를 숨겼을까. 음, 안내서를 만들 당시에는 그 닭이 안 태어났을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개정판에는 꼭 그 닭을 등장시켜야 한다. 음, 그 전에 죽을 수도 있겠네. 아, 진짜다. 이건 분명 내가 노이로제에 걸린 게 맞다. 자꾸 그 닭을 떠올린다. 점심에는 닭튀김을 먹어줘야겠다.
그런데, 왼쪽 길로 들어섰는데도 주인이 말한 식당이 안 보인다. 전부 카페, 레스토랑, 술집, 여행사들뿐이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밥집은 없다. 계속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여기가 아닌가. 다음 블록인가. 한 블록 더 가야 하는 건가. 주인 설명대로라면 이 길이 분명 맞는데. 게스트하우스 주인도 닭 노이로제 때문에 잠을 설쳤던 걸까. 그래서 잠이 덜 깬 탓에 위치를 착각한 걸까. 한 블록 더 가야 되나, 아니면 두 블록 더. 아니면 돌아가서 게스트하우스 주인한테 다시 물어볼까.
어쨌든 이 길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분명 아까는 못 봤다. 아까는 못 봤는데, 길을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니, 바로 앞쪽에 작은 천막이 보였다. 천막 바닥에는 낡은 천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천막 안에서 접이식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 얼굴이 유난히 하얗다. 바닥을 보니 스케치북과 연필 몇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림 그려주는 사람인가. 한국의 길거리 화가처럼 사람들 얼굴을 그려주는 건가. 주로 관광객들을 상대로 얼굴을 그려주고 돈을 받는 건가. 하지만 별로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려드릴게요. 앉으세요.”
마치 공짜로 그려주겠다는 듯한 말투. 그리고 당연히 내가 앉게 될 거라는 듯한 말투.
내 이름은 이디도, 나이는 27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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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1234 14.02.14 16:33 댓글

    아이님 글을 몇개 읽었는데,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벌이 생각나는 문체네요

    정신없으면서도 광기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 1234님께
    아이 14.02.15 11:24 댓글

    칭찬을 너무 과하게 해주셨어요.

    이거 쓸 때가 한겨울이었는데요, 그때 가게에 난방을 약하게 틀어서 발이 상당히 시려웠거든요. 그래서 글 쓸 때 집중이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전기 난로를 구입을 했거든요. 덕분에 지금은 발이 전혀 안 시려운데요... 전기 난로 버려야겠네요.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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