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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미안해, 뱀파이어 율리

2013.12.31 22:5312.31

미안해, 뱀파이어 율리

 

 

전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단 3개월 만에 끝났다. 뭐, 정확히 얘기하자면 끝난 건 아니고, 휴전을 선포했다.
뱀파이어가 패했다. 뱀파이어 대표가 인간 대표인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졌다. 자비를 구하지는 않겠다. 뱀파이어 대표는 이런 말을 교황한테 했다. 주위에 있던 인간들은 교황이 뱀파이어 대표의 심장을 찌를 줄 알았다. 그래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교황은 역시 교활했다. 뱀파이어 대표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휴전을 선포했다.
‘이 도시는 두 구역으로 나뉜다. 한쪽은 인간 거주지, 한쪽은 뱀파이어 거주지. 인간은 뱀파이어 거주지 출입이 자유롭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인간 거주지 출입을 금한다. 만일 이를 어길 시 이유 불문하고 뱀파이어 헌터가 그 뱀파이어를 죽인다. 또한 앞으로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못한다. 그가 죽은 자든 산 자든 상관없다. 인간의 피는 마시면 안 된다. 짐승의 피는 허용한다. 만일 이를 어길 시 인간의 피를 마신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휴전 파기. 인간은 뱀파이어를 전멸시킨다.’
뱀파이어 대표는 교황이 내민 휴전 협정문에 서명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뱀파이어 거주지로 향했다.
교황은 알고 있었다. 그가 싸우면 인간이 전멸한다는 것을. 뱀파이어 헌터 따위 상대도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 전쟁에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인간 여자를 사랑했다.

 

“윽, 피 냄새. 무슨 카페에 커피 냄새가 안 나고 피 냄새가 날까요!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사람들이 오기나 하겠어요?”
“어, 왔냐. 사람들은 여기 안 오지. 뱀파이어 카페에 사람들이 왜 와. 그리고 우리는 커피 같은 거 못 마셔. 피만 마시지. 그러니 피 냄새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냐. 아니지, 그런데 넌 내가 오늘 카페 개업한다는 거 어떻게 알고 왔냐? 난 너한테 말한 기억이 없는데.”
“저번에 얘기했어요.”
“아니, 안 했어.”
“얘기했어요.”
“안 했어.”
“그러니까 왜 얘기를 안 한 거예요! 치사하게. 제가 아저씨 일거수일투족 완전히 꿰뚫고 있다는 거 모르세요? 이런 건 직접 얘기해 주면 얼마나 좋아! ‘유미야, 다음 주에 카페 개업한다. 놀러 와라!’ 이러면 얼마나 좋아. 그럼 나 완전 감동 먹었을 텐데. 에이, 아니지, 그런 거 기대 안 한 지 오래 됐으니까, 뭐 상관없어요. 아무튼 개업 축하드려요. 여기 화분!”
유미는 자기 주먹보다 작은 화분을 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올해 24세. 인간이다. 사립 중학교 미술 교사.
“그러니까 도대체 네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냐고! 날 감시하는 놈들이 누구야! 그리고 이건 또 뭐야! 화분이야 장난감이야!”
케일은 얼음같이 창백한 손으로 유미가 준 화분을 집어들었다. 그는 뱀파이어다. 오늘은 카페 개업일. 케일은 뱀파이어 거주지에 작은 카페를 열었다. 영업시간은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 커피 대신 피를 판다. 동물의 피.
“보면 몰라요, 화분이지! 왜 소리를 지르고, 정말. 나처럼 예쁘고 깜찍한 거 고르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누가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차가워 차가워. 으윽, 차가워.”
유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혀를 쏙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케일이 카핫! 하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육식동물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 가볍게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페 안에 있던 식기들이 덜거덕거렸다. 유미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튼 와줘서 고맙다. 늦었으니까 얼른 가봐.”
“뭐, 뭐예요! 이제 막 온 사람한테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제발 그 카핫! 소리 좀 내지 마요. 귀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아니지, 나도 엄연히 손님이에요! 손님한테 가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럼 주문해. 뭐, 피 한잔 줄까? 따뜻하게, 아니면 시원하게?”
“윽, 피, 피는 됐어요. 그냥 물이나 한잔 주세요.”
“여긴 물 없어. 우린, 아니, 뱀파이어들은 물 같은 거 안 마셔. 피만 마시지. 무슨 소린지 알아? 여기에는 유미 네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네가 올 곳이 아니라는 얘기야. 인간은 인간 거주지에 있는 카페를 가야지.”
“피 한잔 주세요, 시원한 걸로.”
유미는 케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피를 주문했다. 
유미의 말에 케일이 또다시 송곳니를 드러내려 했다.
“또, 또 저 송곳니.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내봐요! 저 아예 집에 안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한 유미의 눈이 조금 충혈됐다.
“뭐해요, 빨리 피 한잔 주세요. 저도 엄연히 손님이에요.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제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예요. 가고 싶으면 갈 거고요. ……그러니까, 오지 말라는 얘기, 하지 마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미는 고개를 숙여서 떨어지는 자신의 눈물방울을 쳐다보았다. 감정이 더 격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면서 빌었다. 케일이 옆에 와주기를. 아니면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를.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기를.
“눈에서 떨어지는 그게 눈물이라는 건가. 신기하군. 볼수록 신기해. 눈에서 물이 다 떨어지고. 역시 인간과 뱀파이어는 다른 점이 참 많아. 눈에서 물이 떨어지질 않나, 추위와 더위에 약하질 않나, 태양을 쬐도 멀쩡하질 않나, 쉽게 감정에 취하질 않나. 참 많이 달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하고 나는 달라. 그만 돌아가라. 인간은 이제 잘 시간이야. 이것도 우리 뱀파이어랑 다르지.”
유미의 바람은 깨졌다. 그냥 거칠게 눈물을 훔쳐낸 뒤 카페를 나가고 싶었다. 인사 같은 것도 할 필요 없이, 이왕이면 테이블 위에 피 한 잔 값도 내려놓고 카페를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지금 카페 안에 흐르는 노래, 제목은 모르지만 멜로디는 귀에 익숙하다. 이 노래가 유미를 카페 안에 붙잡아두고 있다. ‘쉽게 감정에 취하질 않나.’ 그 말이 맞나보다. 제목도 모르는 이 노래가 유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주르륵 주르륵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있다.
케일은 잔인하다. 음악을 껐다. 그런 뒤 냉장고에서 동물의 피가 들어 있는 병을 꺼내 잔에 따른 뒤 단숨에 들이켠다. 새빨간 입술, 피 한 줄기가 입꼬리에서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악!’ 육식동물이나 낼 법한 낮은 으르렁거림. 낮기에 울림은 더 컸다. 카페 안이 가볍게 한번 출렁였다. 그리고 유미의 몸도 뒤로 약간 밀렸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으르렁거림 몇 번으로 유미를 카페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다. 케일은 그럴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유미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유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일은 결국 피 한 잔을 갖다주지 않았지만, 유미는 피 값을 테이블 위에 놓을까 말까 순간 망설였다.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은 등을 돌리고 선 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유미는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다 그만 두었다. 
“저 갈…….”
유미는 인사를 하려다 말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간다고 말해봤자 케일은 들은 척도 안 할 것이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와줘서 고맙다. 조심해서 가고.’
문 소리에 케일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미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쳇, 저렇다니까. 일부러 그렇게 차가운 척 구실 필요 없어요. 전 다 아니까. 실은 내가 오늘 와줘서 기뻤잖아요, 그쵸? 저 내일 또 올 거예요. 그때까지 너무 제 생각만 하고 계시면 안 돼요. 장사에 지장 있으니까요. 인간인 저는 이제 그만 자러 갈게요, 뱀파이어 아저씨!”
그러면서 유미는 또 한 번 혀를 쏙 내밀었다.
케일은 송곳니를 드러내려다 말았다. 으르렁거리려다 말았다. 대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쉽게 감정에 취하질 않나!’ 훗, 뱀파이어는 너무 쉽게 감정에 취해서 탈이지. 내일 보자, 유미야. 너무 늦게 오지 말고 일찍 좀 와라.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든 줄이나 아냐!
케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싫어해야 한다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매번 다짐하면서도, 다짐하는 순간 무너진다. 
왜 좋아할까, 왜 보고 싶을까. 뱀파이어가 인간을. 내일부터 나를 만나러 안 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은 왜 생기는 걸까.
순간 케일은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
인간은 슬플 때, 아플 때 눈에서 물이 떨어진다. 조금 전 유미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뱀파이어는 피를 토한다. 인간보다 조금 더 슬플 때, 조금 더 아플 때. 그래도 지금은 너무 갑작스럽다. 너무 갑작스럽게 피를 토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유미 너보다 조금 더 힘든 거 같다. 싫어하는 척하는 게 더 힘들어. 삼일 동안은 피를 안 마셔도 버틸 수 있어. 그 다음부터는 힘들지. 목이 타들어가는 듯하거든. 숨을 못 쉬지. 그러다 죽어. 죽고 싶어서 한동안 피를 안 마신 적이 있었어. 일주일을 버텼어. 끔찍하게 괴롭더라고. 삼킬 수 없는 불덩이가 계속 목 안에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하루만 더 버티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불덩이를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고통이 너무 참기 힘들더라고. 그래서 그 하루를 못 버티고 피를 마셨어. 인간을 물었지. 그때만큼이나 힘든 것 같아. 목 안에 지금 불덩이가 들어 있어. 크핫!
케일은 목 안에 들어 있는 불덩이를 뱉어내려는 듯 크게 한번 울부짖었다. 역시나 거대한 육식동물의 울부짖음, 그 소리에 또 한번 카페 안이 출렁였다. 집기들이 흔들리고,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그리고 출입문이 열렸다.
“으악, 이거 카페 안이 왜 이래! 왜 흔들거려! 야 케일, 어떻게 된 거야? 너 또 울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툭하면 우냐?”
케일의 수백 년 단짝 친구 율이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사냥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인간들의 숭배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둘은 신의 행세를 했다.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케일과 율이 함께라면 무적이었다. 둘은 위협을 가하는 뱀파이어들의 심장을 수없이 꿰뚫었다. 율의 주특기는 힘이었다. 뱀파이어 가운데 율보다 힘이 센 자는 없었다. 평상시에는 평범한 체격. 하지만 송곳니를 드러내고 울부짖으면 지금 체격의 두 배가 된다. 제 아무리 잔인한 뱀파이어라도 그런 율의 모습 앞에서는 기가 질리고 만다. 그런 율이지만, 케일 앞에서는 언제나 친구이자 부하처럼 행동한다. 이미 케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물론 케일과 율이 서로 힘을 겨룬 적은 없다. 하지만 율은 알고 있다. 뱀파이어 가운데 가장 강한 자는 케일이라는 것을.
물론 케일은 그런 율의 생각이 틀렸다고 매번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 “네가 더 강해! 그러니까 맹세 같은 거 하지 마!”
물론 그럴 때마다 율의 맹세는 더 확고해진다. “멋진 놈. 넌 진짜 멋진 놈이다. 난 널 위해 목숨을 바친다.”
“안 멋져! 나 하나도 안 멋져! 나한테 네 목숨 같은 거 바치지 마! 필요 없어!”
“싫어, 바칠 거야! 무조건 바칠 거야! 한 번 다짐한 맹세는 바꿀 수 없어! 그게 내 신조야!”
“바꿔! 이번만 바꿔! 다른 걸 맹세해!”
“못 바꿔! 절대 못 바꿔! 차라리 나를 죽여!”
“너같이 힘 세고 무식한 놈을 내가 어떻게 죽여! 그러다 내가 죽어! 난 죽기 싫어!”
“넌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내가 지켜줄 거야! 너 대신 내가 죽을 거야! 맹세할게!”
“하지 마! 맹세 같은 거 하지 마!”
둘의 대화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건지. 둘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툭하면 사랑 싸움도 아니고 우정 싸움도 아닌 애매한 실랑이를 벌였다.
“이봐, 케일, 넌 몰라.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 아니, 그 전에,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는 그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마음. 존재의 이유를 알아냈을 때의 마음. 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그보다 더 위대하지. 난 밤마다 눈을 뜨면 맹세한다. 오늘 하루도 케일 너를 위해 살겠노라고. 날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없어. 날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죽을 수 있어. 케일 네 한 마디로 말이지. 네가 죽으라고 하면 난 죽는다. 그게 이 세상이 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케일, 너는 이런 마음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알 필요도 없지. 넌 케일이니까.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자니까.”
“죽어! 죽어 인마! 죽어, 죽어!”
하지만 율은 죽지 않았다. 둘은 그런 단짝 친구다.
“울기는 인마 누가 울어. 그냥 하품 한 거야. 입 찢어질 뻔했다. 근데 너 왜 빈손이냐? 힘도 좋은 놈이 그러면 안 되지. 뭐라도 들고 와야지. 죽어!”
“개업식 때 뭐 들고 오는 거, 그거 인간들 문화다. 우리 같은 고등 종족이 인간들 문화를 따라 해서야 되겠냐. 안 되지, 안 돼. 아무튼 카페 개업 축하한다. 일단 피나 한잔 줘봐라. 따뜻하게 데워서. 아 참, 그건 그렇고,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말이다, 도대체 왜 피를 파는 카페를 차린 거냐. 그것도 인간의 피도 아닌 동물의 피. 과연 동물의 피를 돈 주고 사마시는 뱀파이어가 있을까. 들짐승 잡아먹으면 될 텐데, 아니면 가축을 잡든가.”
“아, 저 생각 짧은 놈. 그러니까 인마 네가 맹세 어쩌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 하는 거야. 넌 외식도 모르냐 인마.”
“외식, 들짐승 잡아먹는 게 외식 아니냐?”
“아, 진짜, 그게 어떻게 외식이냐 인마. 단순히 밖에서 먹는다고 다 외식이 아니지. 거기엔 분위기라는 게 빠졌잖아. 이젠 뱀파이어도 분위기에 신경을 써야 돼. 피 한잔을 마셔도 분위기 있게, 품위 있게. 인간들이 왜 비싼 돈 주고 식당에서 밥을 먹겠냐. 집에서 먹으면 되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지.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러니까 뱀파이어도 이제는 연인끼리 이런 곳에 와서 피를 마시게 되어 있어. 다른 뱀파이어 동네에는 벌써 이런 카페 여러 개 생긴 것도 모르냐?”
“그러냐?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왜 피를 돈 주고 사마시냐. 그것도 맛없는 동물 피를. 뭐, 아무튼 카페 차렸으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킁킁, 어째 인간 여자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뱀파이어 카페에 인간도 출입하냐? 와봤자 마실 것도 없을 텐데. 혹시 피 말고 다른 것도 파는 거냐?”
“아니, 안 팔아. 그냥 아까 어떤 인간 여자 한 명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혹시 다른 음료도 파냐고 묻더라. 피밖에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도망치듯이 나가더라고.”
“피라떼, 피주스, 피빙수 뭐 이런 것도 한번 팔아봐라. 혹시 아냐? 인간들 사이에서 유명 카페로 소문날지? 아, 커피에 시럽 대신 피를 넣으면 어떨까? 피메리카노, 이름 좋네.”
“피메리카노! 그게 좋냐, 좋아! 덩치 값 좀 해라. 유치하게 좀 놀지 말고. 여기 피 한 잔 마시면서 정신도 좀 차리고. 애가 어떻게 수백 살 먹어도 철이 안 들어, 철이. 참, 오늘은 개업식 날이니까 피 한 잔에 1만 깁이다. 카드 안 받고 현금만 받아. 선불이야.”
“넌 친구한테도 돈 받냐? 그것도 바가지까지 씌워가면서? 하는 짓이 어쩜 저렇게 인간들하고 똑같을까! 너 그러다 인간 된다.”
“너한테 바가지 씌우면 인간 되냐? 확실해? 안 그래도 요즘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 가끔 들 때가 있는데…….”
“……인간 여자 때문이냐? 방금 여기에 왔다간 그 인간 여자.”
케일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피를 홀짝이는 율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케일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율은 맛없는 동물의 피만 계속 홀짝였다.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말한 적 없는데.”
케일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여차하면 카페 안이 뒤틀릴 듯한 울음을 토해낼 기세였다. 그럼에도 율은 여전히 느긋했다. 아니, 느긋한 척했다.
“뭐야, 나도 뱀파이어라는 거 잊기라도 한 거야? 네 단짝 친구라는 거 잊기라도 한 거냐고? 요즘 너한테서 어떤 냄새가 나는 줄이나 알아? 인간 여자. 너한테서 줄곧 인간 여자 냄새가 났어. 똑같은 냄새였지. 그러니까 한 명의 인간 여자 냄새. 우린 인간 거주지에 못 가. 하지만 인간은 이곳 뱀파이어 거주지에 올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건 곧 한 인간 여자가 줄곧 너를 만나러 왔다는 얘기잖아. 하지만 너는 나한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지. 물론 나도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어. 너한테서 줄곧 인간 여자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 인간이 뱀파이어를 좋아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또 어떤 골빈 인간 여자가 정신 나간 짓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만 잠시 했지. 뱀파이어가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구나,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 너를 숭배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다 조금 전에 그 인간 여자를 길에서 만났어. 지나쳐가는데, 그 인간 여자한테서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나잖아. 케일 너한테서 났던 냄새. 아, 이 인간 여자구나, 케일을 숭배하는 인간 여자가. 그러고 나서 얼굴을 봤어. 이봐 케일, 우린 수백 년을 살았지. 수백 년 동안 인간들을 봐왔어. 수백 년 전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 참 많이 변했어. 신기할 정도지. 하지만 말이야 케일, 변하지 않은 것도 있어. 정확히 말하면 변하지 않은 모습. 뭔지 알아? 뱀파이어를 숭배하는 인간들의 모습이야. 그 모습은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그런 인간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단 말이야. 딱 봐도 알 수 있단 말이야. 딱 봐도 돈 많은 인간이구나 하고 알 수 있듯이 말이야. 그런 거 보면 인간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분위기에서 모든 게 드러나버리니까 말이야. 심지어 직업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잖아. 그런데, 그런데 그 인간 여자는 달랐어. 뱀파이어를 숭배하는 모습이 아니었어.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꽤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 행복에 겨워서 나비처럼 나풀나풀거릴 정도였어. 이봐 케일, 그 인간 여자를 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어, 아냐고 케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고, 케일!”
율의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케일이 움찔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패해 쫓겨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뱀파이어끼리는 함께 살고 있다.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케일의 경우는 다르다. 만일 다른 뱀파이어들이 알기라도 하면, 그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케일을 죽이려 들 것이다. 질서를 무너뜨린 자, 케일 본인뿐만이 아니라 뱀파이어 전체를 더럽힌 자로 낙인찍힌다. 결국 케일은 뱀파이어 전체를 적으로 만들게 된다. 케일은 지금 그런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율이 알아버렸다.
케일은 율의 고함 소리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 인간 여자는 케일 너를 숭배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거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케일 너도 마찬가지고.”
율은 언제 고함을 질렀나 싶게 차분히 말을 했다. 그런 변화가 카페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 인간 여자의 얼굴에서 드러난 게 그거거든. 케일도 나를 사랑한다. 제기랄, 아주 또렷이 드러나더군. 케일도 나를 사랑한다. 하, 게다가 케일 네 입에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까지 튀어나오고 말이지. 제기랄. 네 턱에 묻은 그 피는 뭐지? 피를 마시다가 흘린 건가? 아니면, 피라도 토한 건가? 슬퍼서? 아파서? 그 인간 여자보다 더 슬프고 아파서? 그래, 나도 피를 토한 적이 있었어. 케일 너도 기억하겠지. 내가 사랑했던, 내 여동생 율리. 케일 너는 몰랐겠지만, 율리는 늘 표정이 어두웠어. 그리고 툭하면 피를 토했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느냐, 무엇 때문에 아파하느냐? 난 몇 번이고 율리에게 물었어. 하지만 율리는 대답해 주지 않았어. 내 눈을 피하기만 했어. 케일, 너도 알지? 율리는 최강의 여전사였어. 나와는 비교가 안 됐지. 그 옛날, 우리 뱀파이어들을 사냥하던 마물들도 율리 앞에서는 감히 으르렁거리지도 못했지. 바람처럼 빠른 율리는 마물들이 채 으르렁거리기도 전에 목을 베어버렸지. 율리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 케일뿐이었어. 물론 난 네가 전력으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지난 번 인간과의 전쟁에서도 너는 싸우지 않았어. 물론 그 인간 여자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케일 네가 전력으로 싸우는 모습을 본 뱀파이어는 없어. 아니, 그러니까 내 사랑이자 내 여동생이었던 율리 말고는 없지. 네가 전력으로 싸우는 모습을 본 뱀파이어는 오직 율리뿐이었지. 그것도 단 한 번, 율리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그러니까 율리가 피를 토하는 사이에 마물 수십 마리가 달려들었지. 달려들자마자 목이 날아갔어. 마물 수십 마리의 목이 한 순간에 날아갔지.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다른 뱀파이어도 보지 못했지. 우리가 본 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물 수십 마리의 목뿐이었어. 왜 떨어졌는지 몰랐지. 그날 저녁 율리가 나한테 그러더군. 케일의 모습을 봤다고. 마물 수십 마리의 목을 가르고 지나가는 모습을 봤다고.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케일 너를 봤다고. 그래, 케일 너는 율리가 위험에 처하자 도와주러 왔던 거야. 그날 딱 한 번 케일 너는 네 진짜 실력을 드러냈던 거지.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율리뿐이었고. 우리는 네 움직임조차 못 봐. 그나마 네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자는 바람처럼 빠른 율리뿐이지. 물론 율리도 네 모습을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케일, 그때 왜 율리의 목숨을 구해줬지? 만일 케일 네가 그때 율리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일 그때 율리가 마물의 손에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그게 덜 괴롭지 않았을까? 응, 케일? 그때 왜 율리를 구해준 거지?”
율이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있던가. 왜 율리를 구해줬냐고 물어본 적이 있던가. 물론 알고는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날, 율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케일은 2㎞ 밖에서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물들의 목을 자른 뒤 곧장 사라졌다. 그 모습을 다른 뱀파이들은 못 봤을 테지만, 율리는 봤을 것이라 짐작은 했다. 그리고 율에게 얘기했을 테고. 하지만 율이나 율리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뱀파이어들에게는 물론, 케일 본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율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묻고 있다. 왜 율리를 구해줬냐고. 케일로서는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율은 반드시 대답을 듣기 원할 테니까. 그래서 묻는 것일 테니까. 물론 케일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는 있을 테지만.
“네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여동생이지만 네가 사랑하는 율리니까. 그래서 구해줬어. 그리고, 그리고 율리가 위험에 처한 건 나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그랬구나. 그래서 구해준 거구나. 인사도 못 했어. 감사 인사 말이야. 그때 율리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래도 가끔은 율리가 그때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케일 네 말대로 그때 율리가 위험에 처한 건, 그러니까 피를 토했던 건 너 때문이었어. 율리는 너를 사랑했으니까. 내가 아니라 너를 사랑했으니까. 케일 네 생각만 하면 율리는 피를 토했으니까. 그만큼 율리는 케일 너를 사랑했으니까. 매순간 네 생각만 했으니까. 심지어 마물과 싸우면서도 케일 네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도 케일 너는 율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어. 내가 율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봐, 케일, 그때 만일 율리가 마물의 손에 죽었더라면 덜 아팠을까? 덜 괴로웠을까?”
케일은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율도 케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율리가 죽던 날, 난 케일 너한테 가서 빌려고 했어. 무릎 꿇고 빌려고 했어. 제발 율리의 사랑을 받아주라고 말이야. 율리를 사랑하지만, 율리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건 참을 수 없으니 제발 받아주라고 애원하려고 했어. 하핫, 그런데 율리가 어떻게 알았을까. 여자의 직감은 정말 대단해. 나보고 어디 가냐고 묻더군. 그래서 케일 만나러 간다고 했지. ‘안 가도 돼, 오빠. 나 이제 케케 사랑하지 않아. 아니, 사랑할 수 없어. 그리고 오빠한테는 미안했어. 실은 알고 있었거든. 오빠가 나 사랑한다는 거. 비록 남매지만,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말 안 해준 것도 고맙고. 그리고 앞으로도 케케랑 더 사이좋게 지내. 둘 너무 잘 어울려. 질투 날 정도로 말이지, 히히. 케케도 나 때문에 힘들었을 거야. 오빠가 나를 사랑하는데, 그런 내가 자신한테 고백을 했으니 말이야. 케케는 나보다 오빠를 더 좋아하잖아. 아마 오빠가 케케한테 사랑 고백하면, 케케는 당장 받아들일 걸, 히히. 그런 케케야. 오빠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케케. 나는 그런 케케를 괴롭혔어. 덕분에 오빠도 괴롭게 만들었고. 나 정말 못 됐어. 벌 받아야 돼. 미안해 오빠. 그리고 케케한테도 미안하다고 해줘. 안녕.’ 정말 눈 깜빡할 사이였어. 안녕, 그러고 나서 율리는 자기 피로 만든 칼로 심장을 찔렀어. 몸이 타들어 가면서 또 피를 토하더라고. 나는 정신없이 율리의 입에서 나오는 피를 닦아줬지. 아파하지 마, 괴로워하지 마, 율리 네가 아파하지 마. 나 때문이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바람에 케일이 너를 받아주지 않은 거야. 나 때문이야. 율리 네가 아니라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네가 아파하지 마. 괴로워하지 마.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그렇게 미친 듯 중얼거렸어. 그러면서 나도 피를 토했지. 그래, 그때 처음 피를 토했어. 끔찍하게 아프더라. 끔찍하게 고통스럽더라. 햇빛에 살이 타들어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프고 괴롭더라. 뭐가 이렇게 아파! 뭐가 이렇게 괴로워! 그런 울부짖음이 나올 정도로 힘들더라. 율리는 그 고통을 매일 겪었어. 나 때문에. 그러니까 더 멈출 수가 없더라. 계속 피를 토해내게 되더라.”
순간 율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케일이 얼른 달려가 손으로 율의 입을 닦았다.
“아프네. 괴롭네. 실은 요즘도 율리만 생각하면 아프고 괴로워. 그래서 피를 토해.”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
“케일 너도 그래서 피를 토한 거잖아. 아프고 괴로워서. 사랑해서.”
“그래, 사랑해서. 안 보면 미칠 것 같아서. 비록 인간 여자지만, 못 보면 죽을 것 같아서. 율리처럼 내 피로 만든 칼로 내 심장을 찌를 것 같아서. 그래서 피를 토해.”
“그래, 그래서 피를 토하지. 미친놈. 율리도 아니고 인간 여자 때문에 피를 토해. 미친놈.”
“너도 마찬가지지. 너도 미친놈이야. 친여동생을 사랑해서 피를 토해. 미친놈.”
“하하하, 하하하. 그래, 나도 미친놈이지. 여동생을 사랑한 미친놈.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
둘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 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뱀파이어들을 다 적으로 돌릴 거야? 설마 다 죽일 생각인 거야? 케일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동족이야. 아무리 사랑한다지만, 인간 여자 때문에 동족을 몰살시킬 수는 없어. 물론 인간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고.”
“아직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농담 아니야. 정말 인간이라도 되고 싶어. 방법만 있다면 말이지.”
“차라리 그 인간 여자를 뱀파이어로 만들면 안 돼? 물론 살아서 뱀파이어가 될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지 않나.”
“안 돼. 확률이 너무 낮아. 거의 천 명에 한 명꼴이야. 인간이 뱀파이어에게 물려서 뱀파이어가 될 확률. 나머지 구백구십구 명은 다 죽어. 뱀파이어 독을 이겨내지 못하면, 내장이 다 녹아내려 버려. 그런 모험은 할 수 없어. 그녀를 죽게 만들 수 없어. 그러면 나도 죽어.”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 그 인간 여자는 뭐래? 설마 인간과 뱀파이어가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혹시 그 인간 여자가 내놓은 의견 같은 건 없어?”
“없어. 유미는 나보다 더 철이 없지. 아마 인간과 뱀파이어가 서로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를 수도 있어. 그 정도로 철부지거든.”
“그 인간 여자, 이름이 유미야?”
“응, 유미. 어때, 이름 예쁘지? 하는 짓은 더 예쁘지만. 중학교 미술 교사야. 그림을 아주 잘 그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뭐든 따뜻해. 아니, 따뜻하게 보인다고 해야 맞는 거겠지. 뭐든 따뜻해 보이게 그리는 재주가 있어. 아마 마음이 따뜻해서 그러겠지. 심지어 나를 그릴 때도 그래. 내 창백하고 차가워 보이는 얼굴도, 유미가 그리면 따뜻하게 보여.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처럼 보여. 나도 놀랄 정도였어. 어, 뭐야, 나 인간이었어! 이런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야. 그림에서 체온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어때, 율 너도 한번 볼래? 유미가 내 모습 그려준 그림 보여줄까? 아 참, 요즘은 무용에 빠졌어. 완전히 푹 빠졌어, 하하. 현대무용이라고 했던가, 아니, 재즈댄스였던가. 아, 잊어버렸네. 아무튼 무용 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그렇게 신날 수가 없대. 맨날 앉아서 그림만 그리다가 몸을 막 움직이는 걸 하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린대. 정식으로 배워볼까 심각하게 생각 중이래. 대학원 같은 곳에 진학해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러면 미술은 어떻게 하고? 아니, 학교는 어떻게 하고? 교사 그만 둘 거야? 그랬더니 글쎄 뭐라는 줄 알아? 아, 그게 걸리는구나. 그러잖아. 완전 애지. 철부지. 앞뒤 안 가려. 좋으면 그것만 생각해. 하하하, 귀엽지 않냐? 어떨 때 보면 진짜 애기 같아. 신나면 막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거든. 공이 통통 튀듯이 말이야. 하하하. 아 참, 유미가 그린 그림 보여준다고 했지? 잠깐만 기다려 봐. 가져올 테니까.”
케일이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율이 케일을 불렀다. 그러니까 분명 율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아니, 됐어. 안 보여줘도 돼, 케케. 가져오지 마, 가져오지 마. 보고 싶지 않아, 케케. 그년이 그린 거 안 볼 거야, 케케.”
케케. 케일을 케케라고 부르는 이가 있었다. 케일을 케케라고 부르던 뱀파이어가 있었다. 율의 여동생 율리. 하지만 그녀는 오래 전에 죽었다. 자기 피로 만든 칼로, 오빠 율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누군가 케일을 케케라고 부르고 있다. 율리의 목소리로. 죽은 뱀파이어 율리의 목소리로. 율이 율리의 목소리로.
케일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율을 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율을 보았다. 피를 토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율리를 보았다. 율리는 언제나 케일 앞에서 해맑게 웃었다.
“내 앞에서 왜 그년 얘기를 해, 케케. 그럼 내가 기분 나쁘잖아. 내가 케케 좋아하는 거 몰라? 내가 케케 사랑하고 있는 거 몰라? 케케 정말 못 됐어. 아까 케케 모습 얼마나 미웠는지 알아? 그년 얘기 하면서 얼마나 신나했는지 알아? 그림 얘기, 무용 얘기, 철부지라느니, 애기 같다느니,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어. 케케가 더 애기 같았어. 그년이 그렇게 좋아, 케케? 나보다 더 좋은 거야, 케케? 어디가? 나보다 어디가 더 좋은데? 말해 봐, 케케. 그럼 나도 그렇게 할게. 그년처럼 똑같이 할게. 그림 그려줄까? 무용, 무용도 배울게. 나 움직임 빠르잖아. 무용 같은 거 금방 배울 수 있어. 그년보다 더 화려하게 출 수 있어. 그리고 또 뭐 있어? 그년이 기쁘게 해주는 게 또 뭐야? 말해 줘, 케케.”
여전히 해맑게 웃는 모습. 율, 아니 율리, 아니 율, 아니 율리.
“율리, 오랜만이네.”
케일도 해맑게 웃었다. 율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뭐야, 오랜만이라니? 우리 가끔 봤잖아. 그저께도 봤고, 며칠 전에도 봤고. 케케 정말 이러기야! 너무 그년 생각에만 빠져 있는 거 아니야! 날 봤는지 안 봤는지도 기억 못 해! 난 수백 년 동안 케케만 좋아했어. 불쌍하지도 않아!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율, 아니 율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수백 년 동안 율리는 케일 앞에서 언제나 웃었다. 케일만 보면 늘 환하게 웃었다. 그런 율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아파하고 있다. 괴로워하고 있다. 율리가 고통스러워 몸부림치고 있다. 율리는 늘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케일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제나 웃었다. 그런 율리가 처음으로 케일 앞에서,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케일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웃음을 거뒀다. 대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토해내는 피, 그것은 인간의 눈물보다 더 진하다.
“아니, 오랜만이잖아, 율리. 네가 죽은 지가 언젠데. 기억이 안 날 정도야. 그러니까 오랜만이지.”
어느새 케일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송곳니가 서서히 길어졌다. 손톱이 서서히 길어졌다. 팔이 길어지고, 다리가 길어지고, 얼굴이 길어지고, 허리가 길어졌다. 그 옛날, 율리가 죽기 전, 율리 주변에 있던 마물들의 목을 베어버렸을 때의 모습이었다. 수십 마리의 마물을 시간으로 채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로 죽여버렸을 때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무언가를 죽여야 할 때, 반드시 죽여야 할 때의 모습. 케일은 지금 두 번째로 그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한번 봐봐. 유미가 그린 그림. 유미가 얼마나 잘 그렸는지 한번 봐. 유미가 날 인간처럼 그려줬다니까. 넌 아니어도 아마 율은 보고 싶어 할 거야.”
“안 봐도 된다고 했잖아! 유미, 유미, 유미! 제발 그년 이름 좀 꺼내지 마! 그러니까 내가 그년을 죽인 거라고! 케케 때문이야! 케케가 그년을 사랑하니까, 내가 아니라 그년을 사랑하니까 죽인 거라고! 전에는 율 때문에 날 사랑하지 않았어. 오빠 때문에. 그런데 이번엔 인간 여자 때문에 날 사랑하지 않아. 도대체 왜, 왜 난 항상 누군가에게 케케를 빼앗겨야 돼! 이제는 그렇게 안 돼. 빼앗기지 않아. 케케는 내가 가질 거야.”
그래, 아까 갑작스럽게 피를 토했을 때의 불길했던 예감, 그때였구나. 네가 유미를 죽인 게. 율 네 기운을 느꼈기에, 설마 유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아, 그럼 이제, 유미는 내일 이곳에 못 오겠구나. 모레도. 그 다음날도. 그그 다음날도. 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그그그그 다음날도. 그그그그그그그그그 다음날도. ……. 큭큭큭큭큭큭큭큭큭,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 다음날도.
못 오겠구나, 유미는.
캉, 케일의 오른쪽 검지 손톱은 계속 자라고 있었다. 마치 검처럼. 그렇게 자라던 검지 손톱이 캉 소리를 내면서 카페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미안하다. 유미가 그린 그림은 못 보여주겠어. 너한테는 못 보여주겠어. 내 단짝 친구였던 율, 혹시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길게는 못 들어줄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대신 짧게는 들어줄게, 내 단짝 친구였던 율.”
“율! 왜 나를 율이라고 불러? 율은 우리 오빠 이름이잖아. 이제는 내 이름조차 부르기 싫은 거야? 너무 하네, 케케. ……컥, 커헉, 그리고, 그 모습, 지금 케케의 모습, 예전에 마물들한테서 나를 구해주었던 모습이잖아. ……컥, 그때, 케케 참 멋있었어.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 뒤로 한 번도 안 보여줬지. ……컥, 누군가를, 무언가를 죽이려 할 때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다시 보는구나. ……컥, 역시 멋있어, 내 사랑 케케.”
케일은 이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팔이 줄어들었고, 다리가 줄어들었고, 얼굴이 줄어들었고, 허리가 줄어들었다. 송곳니와 손톱이 줄어들었다. 
오른쪽 검지 손톱 끝에서 몇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내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반드시 죽여야 할 때의 모습. 그건 오직 율리밖에 보지 못했을 텐데. 율리밖에 본 자가 없을 텐데. 율리밖에 볼 수 있는 자가 없을 텐데.
넌 율리가 아닌데. 넌 율리가 아닌데. 넌 율인데.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영원히 ……사랑할게, 나의 케케.”
넌, 넌, ……. ……미안해, 율리.

 

이제 뱀파이어는 다시 인간들의 피를 마실 것이다. 케일의 카페에서는 동물의 피 대신 인간들의 피를 팔게 될 것이다. 케일이 사랑한 인간 여자가 죽었으니까. 유미가 죽었으니까. 
그리고 율리(율)도 죽었으니까.
휴전 파기.
케일은 세 번째로 몸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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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사무엘 14.01.01 19:17 댓글

    등장 인물들의 대사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음에 와닿는 느낌입니다.

  • 사무엘님께
    아이 14.01.02 11:11 댓글

    헉, 이런 극찬을...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뒤팽 14.01.02 14:14 댓글

    처음에는 유쾌한 글이겠거니 했는데 끝까지 읽고 보니 사랑을 열정적으로 갈구하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네요.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의 감정변화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율과 율리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다중인격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단 생각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

  • 뒤팽님께
    아이 14.01.03 10:44 댓글

    제가 사랑에 몹시도 목이 말라서, 그래서 사랑 얘기 한번 절절하게 써보려고 노력을...ㅜㅜ

    다중인격이라... 제가 그것까지는 생각을 안 했는데요, 그런데 그렇게도 보이네요. 사랑은 역시 위험(?)한 겁니다. ;;;;;;;;;

    감사합니다. 뒤팽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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