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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네임 블랙 - 1. 키스러브 제거

 

 


 1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인간들 냄새가 나고는 있었다. 그러니 냄새 나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블랙의 후각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남태평양 티니우 섬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원래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다. 녀석들이 이곳에 숨어든 것도 겨우 몇 달 전이다. 그러니 섬에는 아직 인간들 냄새가 배지 않았다. 이 지독하게 비린 냄새. 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냄새. 아마 섬의 동식물들도 몇 달 동안 악취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과 동떨어졌다. 서로 냄새가 섞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저런 녀석들에게서 풍기는 악취는 더 심했다.
 블랙은 코로 자기 몸 이곳저곳을 문지르며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섬 이곳저곳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저한테도 나네요. 후딱 저놈들 처치하고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더 이상 섬에 악취는 안 날 겁니다.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블랙이 이윽고 냄새 나는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자, 아주 작은 불빛 몇 개가 깜빡이고 있었다. 졸개들 몇 명이 지시를 어기고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양이었다. 어느 무리에서건 저런 놈들은 꼭 있다. 명이 가장 짧은 놈들.
 블랙은 자신과 불빛과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백 미터 정도. 장사무를 이용해 두 번 뛰어오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시간은 1초가 채 안 걸리리라. 블랙이 지금 뛰어오르면, 녀석들의 목숨은 1초 뒤에 끊어진다. 녀석들은 과연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1초 정도뿐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지금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하나 둘 셋. 불빛은 세 개였다. 그리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세 개 다 바닥에 떨어진 채 희미해져 갔다. 더불어 인간 세 명 분의 악취가 줄어들었다. 섬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블랙은 섬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흔들었다. 한쪽 눈도 찡끗 하고 감았지만, 얼굴까지 완전히 가리도록 만든 옷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멋지게 해치웠지. 아, 이 모습을 고미가 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블랙은 장사무를 이용하지도 않고 훌쩍 뛰어올라 자리를 옮겼다. 그 거리가 10미터는 족히 넘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하나 둘 셋 넷. 이번엔 모두 네 명이었다.
 “이것들은 담배 피우고 온다더니 왜 감감무소식이야! 밖에서 담배 피우다 대장한테 걸리면 끽 소리 못 하고 죽는다는 거 모르나! 허락한 나도 죽는다고!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 처먹을는지. 이참에 그냥 내가 이것들을 죽여버리는 게 속 편하지. 내 명도 길어지고.”
 “아직 애들이잖아요. 한창 니코틴 땡길 나이. 하루에 세 갑씩 피워도 부족할 판에, 형님이 하루에 딱 세 개만 피우라고 엄포를 놓으셨잖아요. 그러니 하나 피울 때마다 타들어 가는 담배가 얼마나 아깝겠어요. 저 같아도 무지 천천히 피울 것 같은데요. 그냥 봐주세요.”
 “봐주긴 뭘 봐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까딱하면 죽는다고!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너, 4층에 있는 저 대장이라는 자 몰라! 인간이 아니라고! 용서라는 게 없어! 그리고 저 대장이라는 자가 지키고 있는 사람은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뿐이냐! 난 여기가 어딘지도 몰라. 분명 이거 엄청 위험한 일이야. 물론 엄청난 돈을 주니까 따라 오기는 했는데, 까딱하면 우리 여기서 살아서 못 나간다고. 알기나 해! 그 돈 쓰지도 못하고 죽어! 그러니 어떻게든 몸을 사려야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돼. 최소한 여기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해야 돼. 이제 사흘 남았어. 사흘만 참으면 된다고. 그럼 우리도 이제 용병 노릇 안 해도 돼. 평생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고. 돈 많잖아. 그래, 안 그래? 사흘!”
 “그렇죠. 사흘만 무사히 버티면 되죠.”
 “그렇지. 사흘. 그런데 저런 놈들 때문에 자칫 개죽음 당하면 좋겠냐? 대장이라는 놈이 과연 저 녀석들만 없애버릴 것 같아! 같이 온 우리들까지 개죽음 당해! 내가 도대체 몇 번을 경고했냐? 제발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얌전히 지내라,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나도 이젠 한계다. 더 이상 저 녀석들 때문에 가슴 졸이는 거 못 참겠다. 이러다 내가 먼저 심장마비 걸려.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다. 저런 놈들 필요 없어. 게다가 저 놈들 없애면 우리 몫도 늘어나는 거고. 어때? 너희들도 불만 없지?”
 나머지 세 명은 서로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일단 소리 나면 안 되니까 녀석들 해치울 때 소총은 사용하지 마라. 칼로 그어. 괜히 얼굴 아는 놈들이라고 아마추어들처럼 머뭇거리지 말고 확실하게 그어.”
 무리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앞장섰다. 자동소총은 등 뒤로 감춘 채,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우두머리의 행동에 나머지 세 명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놈들과의 거리는 불과 5미터 정도였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새끼들은 문 앞에서 얼른 피우고 들어오라니까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형님, 이놈들 혹시 튄 거 아닐까요?”
 “야 이 미친 새끼야, 튀긴 어디로 튀어! 너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알아! 남태평양이야, 남태평양. 그것도 이름 모를 작은 섬. 사람도 살지 않는 작은 섬. 여기서 튈 데가 어딨어! 그나마 물과 음식 있는 데는 여기뿐이야. 튀는 게 오히려 자살 행위인 거 몰라! 잔말 말고 이 주변 뒤지기나 해! 젠장, 이렇게 어두워서야 원, 뭐가 보여야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우두머리의 발아래 녀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우두머리의 왼발에 무언가 툭하고 걸렸다.
 “어, 뭐야 이거.”
 그리고 뒤이어 내뱉은 말.
 “너, 너 누구야?”
 “블랙.”
 하지만 우두머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뭐야, 기껏 누구냐고 물어보기에 알려줬더니, 듣지도 않고 그렇게 픽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그럼 애초에 물어보지를 말던가. 괜히 나만 무안해졌잖아.”
 블랙은 바닥에 쓰러진 우두머리의 매너 없는 행동을 탓하며, 나머지 일당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나머지 일당들은 블랙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못한 채 픽픽 쓰러졌다.
 회사에서 블랙에게 지시한 내용은 간단했다. 섬에 숨어든 키스러브를 제거하라. 그리고 휴대용 핵폭탄 회수.
 키스러브가 뭐하는 자인지,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 누구의 혹은 어느 나라의 부탁으로 회사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것인지, 블랙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시가 떨어지면 움직인다.
 블랙뿐만이 아니다. 블랙이 근무하는 회사인 스크립스 영업사원들은 다 똑같다. 이유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움직인다.
 블랙은 방금 우두머리가 나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키스러브를 만나든 대장이라는 녀석을 만나든 할 테니까.
 블랙은 그렇게 걸음을 옮기면서, 그제야 건물 외부를 보았다.
 구조는 단순했다. 5층짜리 직사각형 건물. 전체가 검은색. 창문은 하나도 없다. 시멘트도 아니고 벽돌도 아니고, 쇠. 거멓게 칠한 쇠. 키스러브가 숨어 있는 곳은 거멓게 칠한 쇳덩어리 안 어딘가였다. 건물은 웬만한 공중 폭격에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키스러브는 참 겁이 많은 녀석이군. 아니면 적이 많은 녀석이든가. 그래도 이 쇳덩어리, 장사무에는 안 될 텐데. 못 버틸 텐데.
 그러면서 블랙은 마치 손목 운동이라도 하듯 허공에 대고 양쪽 손목을 한 번 툭 쳤다.
 곧이어 촤앙! 하고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양손에 잡힌 건 길이 150센티미터, 넓이 어른 새끼손가락 정도 되는 칼이었다. 그리 길지 않고, 그리 넓지 않은 칼. 장사무였다.
 장사무는 평소에 블랙의 팔목에 늘 감겨 있다. 마치 뱀처럼. 아니, 팔찌처럼. 그러다 팔목을 허공에 한 번 툭 치면 촤앙 하고 펼쳐진다. 그만큼 잘 휘지만, 그만큼 강하다. 그리고 장사무는 블랙의 손놀림에 의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장사무를 쥔 블랙은 천하무적이다. 물론 장사무를 쥐지 않고서도 천하무적이지만. 그렇다면 차이점은? 장사무를 쥐었을 때 공격이 더 아름답다. 마치 춤추듯 허공을 날고 허공을 가른다. 블랙의 몸놀림에 상대는 넋을 잃는다.
 천하무적 블랙은 오른손에 쥔 장사무로 철문을 내리치려 했다. 가볍게, 마치 종이를 베듯이. 깔끔하게 절단된 철문을 상상하면서.
 끼익!
 블랙의 나이 올해 24세. 장사무를 쥔 지 좀 됐다. 하지만 장사무로 무언가를 베었을 때 이런 소리가 난 적은 없었다. 아니, 소리 자체가 난 적이 없었다. 그냥 소리 없이 잘린다. 그런데 끼익이라니. 이런 천박한 소리가 날 리 없다.
 그러니까 이건 장사무로 베어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철문이 열리고, 곧이어 우람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복 차림에 짧게 자른 머리. 상의 소매를 반쯤 걷어올렸는데, 덕분에 보기만 해도 상대의 기가 질릴 만큼 단단한 팔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디 그뿐이랴. 목은 일반 성인 남자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정말이지, 운동을 꽤나 성실히 한 티가 역력했다. 아니지, 너무 무식하게 한 건가.
 아무튼 누가 봐도 좀 과하다 싶은 근육 덩어리 사내가 블랙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누가 봐도 상대를 얕보는 시선, 뭐지 이 검은 껌딱지는, 하면서 상대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시선.
 적어도 이 녀석이 대장은 아닐 것이다. 한 무리의 우두머리,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키스러브의 신임을 얻고 있는 자라면, 함부로 상대를 얕보지 않는다. 설사 얕본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는다. 권투 시합 도중 상대의 주먹에 충격을 받았다. 아마추어라면 표정부터 일그러진다. 그리고 움츠러든다. 충격 받았다는 걸 상대에게 들킨다. 하지만 프로는 다르다. 충격을 받았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듯 경기에 임한다. 뭐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이 녀석이 대장이었다면, 저렇게 눈을 위아래로 굴리면서 상대를 얕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저 상태에서는 상대의 어떤 공격도 막아내지 못한다. 상대가 공격해올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으니까. 녀석은 아마추어다. 그걸 감추기 위해 열심히 근육만 키웠다. 그저 문지기답게. 하긴, 저 묵직한 철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려면 근육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
 블랙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지기가 열어준 덕분에 블랙은 직접 철문을 여는 수고를 덜었다. 게다가 블랙에게 방해되지 않게 문 한쪽 구석에 얌전히 쓰러져 있었다. 왼쪽 가슴에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구멍이 뚫린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선 블랙은 장사무 두 개를 살짝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두 개의 장사무가 허공에서 몇 번 휘청대더니, 하나는 블랙의 왼손, 하나는 블랙의 오른손 팔목에 촤앙 하고 감겼다. 뱀처럼. 아니, 팔찌처럼. 그 시간은 1, 2초에 불과했다.
 건물 안은 어두웠다. 사물을 보거나 몸을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키스러브라는 이름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밝기였다. 비록 건물 외부는 시꺼먼 쇳덩이였지만, 내부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휘황찬란한 조명에 휩싸여, 당장에라도 이 집 주인과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줄 알았다. 환해서 눈이 부실 줄 알았다. 눈이 멀 줄 알았다.
 블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1층 어디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는 파악이 끝났다. 복도 끝에서 두 번째 방. 모두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몇 개의 방이 더 있었지만, 그리고 각 방에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들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시간에 1층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섯 명이 전부인 모양이었다.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교대를 할 테고.
 블랙은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녀석들은 문이 열린 줄도, 블랙이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카드 게임에 열중이었다.
 방에서는, 아니 건물 안에서는 저렇게 다들 모여서 한가하게 카드 게임을 해도 되는 걸까. 담배만 안 피우면 되나.
 동료들이 밖에 나가서 안 돌아오는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키스러브라는 놈도 참 한심하군. 저런 녀석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겼으니 말이야. 아닌가, 다른 녀석들을 데려왔다 해도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용병들 선택은 대충대충, 이런 태도가 맞았으려나. 뭐, 애초에 용병들을 돈 주고 데려올 필요도 없었지만. 회사가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상, 그리고 담당자로 나를 선택한 이상, 키스러브라는 놈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그저 스크립스 직원이 찾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열심히 즐겨야지. 가능하면 미련 남지 않도록, 아니지, 미련이 안 남을 수가 없지. 미련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게 닥치는 대로 즐겨야지. 그러다가 끝. 그러니까 키스러브는 오늘 끝.
 블랙은 다시 문을 닫고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물론 방에 있던 여섯 명은 이미 숨이 끊겼다. 카드 게임 하던 자세 그대로 상체만 앞으로 고꾸라진 상태. 소리 없이 재빠른 일격으로, 고통이나 공포도 느끼기 전에, 심지어 자신들이 언제 숨이 끊겼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숨이 끊겼다.
 블랙에게 망설임은 없다. 죽여야 할 자는 순식간에 죽인다. 아무 말 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듣지 않고 죽인다. 상상하듯 죽인다.
 블랙이 2층까지 연결된 마지막 계단을 오름과 동시에 한 사내가 스르륵 바닥에 쓰러졌다. 소리 없이.
 2층 계단 앞에서 경계를 서던 사내는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혹은 보지 못했다. 검은, 물체, 인가. 그러고는 쓰러졌다. 검은 물체, 그것이 움직이는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혹시 사람인지, 미처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자신이 무언가를 본 건지 안 본 건지 판단조차 못 한 채 쓰러졌다. 그러니 그것이 자신을 공격해 온다는 건 당연히 몰랐다.
 블랙은 쓰러진 사내를 지나쳐 이미 정한 순서대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시간은 3초. 블랙이 잠시 동작을 멈췄을 때는 다섯 명의 사내가 이미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그리고 또다시 3초가 흘렀다. 나머지 다섯 명도 거의 동시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2층은 1층과 구조가 달랐다. 호텔에 비유하자면 1층은 객실이 있는 층과 비슷했고, 2층은 로비였다. 안내데스크 같은 곳에 세 명이 서 있었고, 엘리베이터 앞에 두 명, 앉아서 쉴 수 있게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는 곳에 두 명, 그리고 중앙에서 각자 등을 대고 서로 반대 방향을 경계하던 자들이 세 명.
계단 앞에 있던 자까지 합하면 열한 명.
 열한 명! 아니다. 순간 블랙은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원래 서 있던 곳에서 약간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송곳처럼 뾰족한 모양의 단검이 블랙의 왼쪽을 지나쳐 벽에 꽂혔다.
 비록 상대의 기습 공격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잠깐이나마 기습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저런 아마추어 용병한테.
 단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소리를 듣기도 전에 단검에 찔렸을 것이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왔으니까. 그러니까 그만큼 속도가 빨랐기에 블랙의 귀에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안 날 만큼 천천히, 느리게. 하지만 눈으로는 그 속도를 쫒아갈 수 없게. 만일 블랙이었다면 그렇게 단검을 던졌을 것이다.
 속도에만 신경 쓰는 이런 애송이를 놓치다니.
 블랙은 홧김에 장사무를 펼칠 뻔했다. 장사무를 펼쳐 저 애송이의 몸을 수천 개로 조각내, 분을 풀어버릴까 생각했다.
 이미 녀석은 블랙의 등 뒤에 와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블랙의 귀에는 주먹으로 샌드백 치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녀석이 긴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평소의 심장박동일 뿐.
 녀석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블랙이 돌아서는 순간, 자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송곳 모양 단검을 블랙의 심장에 꽂아넣을 기회. 그러면 분명 키스러브한테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보너스로 받을 것이다. 평생을 한 나라의 왕보다 더 호화롭게 살다 갈 수 있을 만큼의 돈. 만일 가능하다면 또 한 번 태어나 다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
 녀석은 그런 상상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작정 블랙의 등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저 찌르고 싶은 조급한 마음으로. 그저 왕이 되고 싶어 안달 난 마음으로.
 푹, 푹, 푹, 푹.
 먼저 왼쪽 눈에 푹, 그리고 오른쪽 눈에 푹, 이어서 목 한가운데에 푹,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푹. 정수리에 꽂았을 때는 송곳 모양 단검을 다시 빼지 않았다. 빼지 않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내리누르는 힘 때문에 녀석의 무릎이 꺾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 무릎이 꺾이면서 얼굴이 대리석 바닥을 강하게 쳤다. 쿵 소리와 동시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코뼈가 주저앉고 이가 몇 개 부러졌을 것이다. 물론 아픔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가. 이 정도 했으면 키스러브도 내가 왔다는 건 눈치 챘겠지. 그리고 지금쯤 나를 불쌍히 여길 테고. 정말 웃겨. 왜 저런 녀석들은 늘 보면 자기네들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할까. 결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까. 이런 곳에 숨어 지내는 주제에 말이야. 자신이 거물이니까 이렇게 숨어 지낸다고 착각하는 건가. 그러면서 느긋하게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다들 똑같아. 정말 웃겨. 아니면 저 녀석, 혹시 벌벌 떨고 있으려나.
 블랙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블랙이 녀석의 정수리에 단검을 찌르는 사이에 이미 5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작동했다.
 지하 1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는 15초 뒤에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은 모두 아홉 명. 다들 꽤나 요란하게 탔기 때문에,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몇 사람이 타고 내리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블랙은 녀석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 탓에 키까지는 무리였지만, 몸무게는 알 수 있었다. 아홉 명의 몸무게를 합하면 832kg. 물론 각자 소지한 흉기나 무기를 포함한 무게였다. 그러니까 평균 체중 92kg. 용병들치고는 좀 무겁다. 그만큼 각자 소지한 흉기나 무기가 많다는 뜻이다. 역시 아마추어들이다. 외모에 자신이 없을수록 화장으로든 옷으로든 화려하게 치장하는 법이다. 땡! 음, 아닌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땡은 엘리베이터가 멈추면서 나는 소리였다.
 아, 녀석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먼저 나오려고 난리들이었다. 무기를 잔뜩 짊어진 채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있으려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들 우우우, 하고 괴성을 지르면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마추어이기 이전에 무슨 원시시대 사냥꾼들 같았다. 아니면 그들의 후손이거나. 다만, 무기만큼은 최신이었다. 역시 키스러브는 돈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홉 명 모두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중에는 연료 탱크가 여섯 개나 되는 화염방사기도 보였다. 블랙을 없애기 위해 섬 전체를 불태울 모양이었다. 물론 그 전에 이 쇳덩어리 건물부터 녹아버릴 테지만.
 예상대로 화염방사기가 먼저 불을 뿜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화력이 엄청났다. 화염 온도 대략 4, 5천 도.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직접 불에 닿지 않더라도, 주변 수 미터 내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재로 만들었다.
 정말로 성능 좋은 화염방사기였다. 하지만 적어도 저런 성능 좋은 무기를 사용하려면 사전에 테스트를 해본다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사용설명서에 적힌 유의사항 정도는 반드시 숙지했어야 했는데, 그 점이 좀 아쉽다. 비싸고 좋은 건 용도에 맞게 규격에 맞게 상황에 맞게 사용을 해야 그 성능을 십분 발휘하는 건데, 그렇지 않고 비싼 건 무조건 오케이! 연습 따위는 필요 없어! 바로 실전 돌입! 이런 생각은 곤란하다. 특히나 평소 싸구려 밀수품 무기에 익숙한 자라면 더 더욱 곤란하다. 자신의 안전은 둘째 치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 지금처럼.
 2층을 다 태웠다. 2층에 있는 걸 다 태웠다. 물건도, 사람도 다 태웠다.
 저 화염방사기는 1단 2단 3단 뭐 그런 식으로 화염 조절이 가능한 걸까. 아니면 자폭 기능이라도 있는 걸까.
 화염방사기가 발사되는 순간, 그 폭발력은 마치 화산이 터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충격 때문에 발사한 녀석까지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러면서도 용케 화염방사기는 손에서 놓치지 않았다. 벽에 쿵 부딪혀 의식을 잃었으면서도 손에는 여전히 화염방사기가 쥐어져 있었다. 아니 묶여져 있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달려들어 녀석에게서 화염방사기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혼자 춤추듯 날뛰는 화염방사기가 녀석들을 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 춤추면서 2층 전체를 불태웠다.
 그런데도 용케 쇳덩어리 건물 벽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장사무의 강도에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키스러브가 건물에 쓰인 쇳덩어리에 신경을 쓴 건 분명했다. 웬만한 폭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블랙은 장사무의 회전을 멈추게 한 뒤 다시 팔목에 감았다. 촤앙!
 2층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쇳덩어리 건물인데도 열기가 이렇게 빨리 식어버린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기한 건 연기였다. 화염방사기가 2층에 있는 것들은 모두 재로 만들었는데, 지금 2층에는 연기가 전혀 없었다.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엘리베이터 통로로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설사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져나갔다고 해도, 이렇게 말끔히 연기가 사라질 수는 없다. 이건 마치 거대하고 성능 좋은 진공청소기로 연기를 빨아낸 듯했다. 그만큼 2층은 시야가 깨끗했다.
 그러고 보니 실내가 상당히 쾌적한 것 같기도 하고. 밖에서 봤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네. 폭격 대비에만 신경을 쓴 줄 알았는데, 내부 설계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구나. 이러면 섬보다 건물이 더 비싸겠는데.
 블랙이 막 3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밟으려 할 즈음이었다.
 오오, 이 건물 진짜 끝내주는데. 도대체 이런 건물을 어떻게 지은 거지. 설계자가 누구야. 완전 천재잖아.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비밀의 문이 열리듯 한쪽 벽 전체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아니, 벽 전체가 움직인 게 아니고, 그러니까 자동문이 열리듯 벽이 움직였고, 그 안에서 사내들이 밖으로 나왔다. 벽 안에 거대한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벽에서 나온 자들은 블랙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달랐다. 녀석들에게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다들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섯 명. 숫자도 많지 않았다. 용병들이 아닌 키스러브가 채용한 정규직들. 분명 상당한 싸움 실력을 갖춘 자들을 뽑았을 것이다. 물론 손에 들고 있는 무기도 단순했다. 몸 이곳저곳에 감춰둔 무기들은 많겠지만, 적어도 겉모습으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했다. 다섯 명 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오신 건 진즉에 알았지만, 어떻게 모셔야 할까 잠시 의논을 했습니다. 쉽게 의견 일치가 안 돼서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이 섬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흰 키스러브 님을 모시는 종들, 미천한 자들, 아니, 미천한 무리들입니다. 스크립스 소속 영업사원 분들은 다들 실력이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스크립스 소속 영업사원 분을 먹어버린다면, 죄송합니다. 표현이 좀 저속했습니다. 스크립스 소속 영업사원 분과 겨뤄 이긴다면, 아, 여기에서 그러니까 이긴다고 하는 건 상대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상대를 살려두지 않습니다. 불구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죽입니다. 그리고 먹습니다. 그러니까 스크립스 소속 영업사원이신 당신과 싸워 이긴다면 저희로서도 상당한 커리어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신분은 미천한 종입니다만, 어쨌든 이쪽 업계에서의 대우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존함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갖춰서 전력으로 싸움에 임하겠습니다. 아, 물론 존함을 여쭙기 전에 저희 먼저 이름을 밝혀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을 버렸습니다. 키스러브 님의 종이 되는 순간 말이죠. 종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으니까요. 이름이 필요 없으니까요. 그냥 다섯 마리 들짐승들입니다. 당신은 저희들에게 너무나 과분한 식사입니다. 당신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키스러브 님의 은혜는 평생 갚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 섬기고 섬겨도 부족합니다. 자, 그럼 존함을.”
 다섯 마리 들짐승들. 예의 바른 것들이다. 마음에 든다. 하지만 아무리 예의가 바르다고 해도 세상에 어느 누가 들짐승한테 자기 이름을 알려줄까. 애완동물도 아닌 들짐승들. 그런 들짐승들한테 이름을 알려주다니, 미친놈이나 할 짓이다.
 블랙은 천천히 다섯 마리 들짐승들 앞으로 다가갔다. 비록 키스러브의 종들이라고는 하지만, 들짐승들이지만, 이놈들은 분명 엄청난 실력자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약소국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놈들이다. 최소한 3초 정도는 더 살게 해주자.
 그것이 블랙이 놈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다.
 놈들과 마찬가지로 블랙 역시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다. 반드시 죽인다. 물론 먹지는 않는다.
 놈들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 시간은 3초 정도 걸렸다. 그리고 5초 뒤, 블랙은 다시 3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이 들렸다. 자칫하다가는 쇳덩어리 벽에 금이 갈지도 몰랐다. 그런 걱정이 들 만큼 소리가 컸다. 블랙은 저절로 얼굴을 찡그렸다.
 예전에 무협 영화에서 봤던가. 소리를 질러서 상대방의 내장을 파열시키는 기술, 아니, 비술.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그것 같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내장이 모조리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블랙은 참다못해 장사무를 펼치려 했다. 장사무를 펼쳐 소리를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타나면서 소음도 사라졌다. 정말 개성 강해 보이는 녀석의 등장.
 “왜 얼굴을 찡그려! 설마 내 노래가 듣기 싫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내 노래 무시하는 거야! 무시하는 거야! 너 같은 무식한 녀석이 감히 내 노래를 듣고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거야! 드러내는 거야! 듣자마자 의식을 잃었어야지! 잃었어야지! 너무 좋아서 사지를 비틀고 침을 흘리고 신음을 냈어야지! 냈어야지! 그러다 서서히 숨이 끊어졌어야지! 끊어졌어야지! 너 왜 내 노래 듣고도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거야! 버티는 거야!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살아 있는 거야! 노래가 뭔지도 모르는 이런 무식한 놈아! 무식한 놈아! 너 같은 놈은 내 노래 들을 자격도 없어! 자격도 없어! 노래 안 들려줄 거야! 안 들려줄 거야! 대신, 정말 듣기 싫은 노래를 들려줄 거야. 오랫동안 들려줄 거야. 내장이 조금씩 조금씩 터져서 입밖으로 모조리 쏟아져 나올 때까지 들려줄 거야. 바로 옆에서, 네 놈 귀에다 속삭이듯 들려줄 거야. 아주 작게, 아주 가늘게, 아주…….”
 녀석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녀석의 모습도 사라졌다.
 개성 강해 보이던 녀석. 양쪽 귀를 자른 뒤 살을 잡아당겨 꿰맸다. 다른 소리는 안 듣고 자기가 내는 소리만 듣겠다는 건가. 강철 내장을 가진 녀석. 입은 귀밑까지 찢어서 수다쟁이처럼 만들었다. 저 큰 입으로 어떻게 작게 노래를 부르겠다는 건지. 설마 키스러브는 저 녀석 노래를 좋아하는 건가. 그렇다면 취향이 너무 건전하지 못한대.
 그런데 이 녀석 언제 내 옆에 왔을까. 이 정도 움직임이면 소리보다 빠른 거 아닌가. 차라리 노래로 상대를 괴롭히지 말고 빠른 움직임을 활용하라고. 움직임을 더 계발해. 빠르게 움직여서 상대를 공격하는 법을 주특기로 삼으라고. 그럼 아마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야. 듣기 싫은 그 노래는 집어치우고.
 “안 그러면 막아버린 네 놈 귀를 다시 뚫어버린다!”
 동시에 블랙 바로 옆에서 소곤대던 녀석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끔뻑끔뻑. 그리고 뻐끔뻐끔. 녀석의 입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거렸다. 눈은 끔뻑, 입은 뻐끔. 곧이어 녀석의 양쪽 귀에서 피가 솟구쳤다.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녀석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소리쳤다. 손가락 틈으로 피가 계속 솟구쳤다.
 3층은 조용했다. 녀석이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것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녀석은 계속 시끄럽다며 미친 듯 소리쳤다.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그러면서 녀석은 쇳덩어리 벽을 향해 달려갔다. 소리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자기 머리를 부수기 위해.
 정말 개성 강한 녀석이다.
 아, 이 소리 때문에 그렇게 시끄럽다고 난리를 친 건가. 그러면 도대체 곁에는 왜 있었던 거야. 좀 더 배포 강한 놈을 주인으로 모셨어야지.
 블랙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따각따각따각따각. 이로 무언가를 깨무는 소리. 보통 이로 무언가를 깨물 때는 초조해서다. 그리고 보통은 손톱을 깨물고. 지금 이곳에서 저렇게 초조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인간은 딱 한 놈뿐이다. 키스러브. 역시 저 녀석, 겁쟁이였구나.
 물론 회사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그냥 움직일 뿐이지만, 그래도 대충 짐작은 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들이라는 것을. 아마 키스러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이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 목숨을 담보로 그 나라 지도자를 궁지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물론 목적은 돈이었을 테고. 그런 잔인한 놈들이지만, 막상 마주치면 살려달라 소리도 못 할 만큼 바들바들 떠는 녀석들이 많다. 똥오줌을 지리고, 그 위에서 미친 듯이 몸을 비틀다 정신을 잃는 녀석들도 있다. 아니면 블랙과 마주치자마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녀석도 있다. 그래도 그런 녀석들은 그나마 보기에 양호한 편이다. 초조해서 손톱을 물어뜯는 녀석도 있다. 입과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계속 손톱을 물어뜯는다. 지금 저 키스러브처럼 말이다.
 5층에 있을 줄 알았던 키스러브는 3층 맨 끝 방에 있었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정신없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런 키스러브 옆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니, 사내인가. 어쨌든 남자니까 사내가 맞기는 할 텐데, 보통은 사내 녀석, 아니면 사내놈이라고 하나. 그것도 아니면 어린놈인가. 꼬마놈, 꼬마 녀석, 사내자식. 하여튼 키스러브 옆에 앉아서 열심히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키스러브가 손톱을 물어뜯든 말든, 바로 앞에 블랙이 있든 말든, 어린 녀석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오로지 초콜릿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많이 쳐줘도 초등학교 1, 2학년생이다. 아, 그렇다면 키스러브의 아들인가. 녀석, 제 아비가 저렇게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먹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니, 역시 무자식이 상팔자다. 아니면,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여도 될까, 같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블랙에게 그런 감정은 없다. 게다가 저 녀석을 아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아이, 왠지 순수한 느낌이 난다. 천진난만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저건 아니다. 순수하지도 않고 천진난만하지도 않다. 차라리 건물 안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 이 썩은 냄새를 풍기는 들짐승들이 저것보다 순수할 것이다. 저 작은 악마보다.
 “한참 기다렸어요. 갖고 있던 초콜릿이 다 떨어져가기에, 제가 그냥 이 아저씨 데리고 3층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4층에 있던 대장이라는 아저씨는 제가 그냥, 아니지, 쟤네들이 먹어치웠어요. 이 섬 너무 재미없잖아요. 저 이제 그만 집에 가려고요. 참, 아저씨 혹시 초콜릿 있어요? 음, 없구나. 초콜릿 있으면, 나 그거 먹는 동안에는 아저씨 안 죽는데. 아쉽네요. 아, 이제 초콜릿 여섯 개밖에 안 남았다. 이거 다 먹는 동안 끝내야 해요. 너무 서둘러서 죄송해요. 히힛, 근데 이 키스러브 아저씨 손톱 깨무는 모습 너무 귀엽지 않아요? 앙앙앙, 나도 막 손톱 깨물어주고 싶은데. 내 거 한번 깨물어볼까.”
 그러면서 녀석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곧이어 블랙의 등 뒤에서 그르릉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그르릉, 그르릉. 순식간에 수십 마리 넘게 몰려들었다. 방 안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들짐승, 아니 들개들. 수십 마리의 진짜 들개들. 시커먼 몸에 새빨간 눈,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 그르릉 거리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블랙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리를 힐끔힐끔 돌려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초콜릿 먹는 어린아이의 눈치를.
 “먹어.”
 녀석이 나직하게, 나른하게 속삭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개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컹! 컹! 컹!” 짖어댔다. 그러고는 일제히 블랙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의 몸도 들개들과 마찬가지로 갈기갈기 찢긴 채 사방에 흩어졌다. 테이블에는 세 개의 초콜릿이 남아 있었다.
 키스러브는 손톱 물어뜯는 동작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물어뜯을 손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손톱 밑에 있는 살까지 물어뜯을 만큼 극도로 초조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키스러브는 아이와 들개들의 살점이 사방으로 튄 방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입을 벌린 채 “어, 어, 어” 소리를 내면서, 아니, 어쩌면 “와, 와, 와”인 것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면서, 목을 오른쪽으로 180도, 왼쪽으로 180도 비틀어가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200도로 비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대로 가만 놔두면 언젠가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실력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지만.
 고개를 180도 돌려서 둘러보고 다시 반대로 180도 돌려서 둘러보고. 그러니까 키스러브의 시선이 잠시 멈추는 곳은, 그의 등 뒤다. 작은 테이블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올려놓은 은색 서류 가방. 그러니까 휴대용 핵폭탄. 키스러브는 지금 블랙에게 휴대용 핵폭탄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보니까 “어, 어, 어” 혹은 “와, 와, 와” 둘 다 아니었다. “살, 려, 줘”였다.
 수백 수천 명을 죽인 자도 대부분 죽음 앞에서는 저런 모습을 보인다. 살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 어, 어” 혹은 “와, 와, 와” 웅얼거린다. 물론 그런 모습이 측은해서 살려주면 큰일 난다. 내일 당장 대도시 몇 군데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것이다. 협상이고 뭐고 없다. 자신을 위협한 대가라며 무차별 공격할 것이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면 나라 몇 개를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을 요구할 것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또다시 공격 감행. 저렇게 손톱 물어뜯는 놈들이 돌변하면 더 잔인하다.
 촤앙! 두 개의 장사무가 블랙의 팔목을 벗어났다.
 “베어라! 마음껏!”
 블랙이 낮게 외쳤다.
 곧이어 두 개의 장사무는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공중에서 흐물대며 키스러브에게 다가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상대가 더 더욱 공포에 떨 만한 속도로. 아무 소리도 없이.
 블랙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을 빠져나왔다.
 키스러브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두 개의 장사무는 키스러브의 숨이 최대한 오래 붙어 있게, 피도 최대한 적게 흘리게 기술적으로 살을 베고 찔렀다.

 


 2

 

 이름 고조. 나이 24세. 제주도에 본사가 있는 스크립스라는 회사의 영업사원. 회사 내 닉네임은 블랙. 평소 신분은 대학생. 그렇다고 해서 고조의 신분이 철저히 감춰진 건 아니다. 자기 입으로 굳이 말하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스크립스에서는 각국 정보기관에 회사 소속 영업사원의 프로필을 공개하고 있다. 닉네임까지 포함해서.
 공개하는 이유는 하나다. 스크립스 소속 영업사원을 건드리지 말 것. 그가 사람을 죽이든 건물을 폭파하든 뭘 하든 그냥 놔둘 것. 설사 한 나라의 수장을 위협한다 해도 무시할 것. 죽여도 무시할 것.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압할 수 있는 무기도 없다. 그러니 부디 눈길조차 마주치지 말 것. 행운을 빕니다. 그런 차원에서 공개하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 역시 다른 영업사원은 물론 고조의 정체도 알고 있다. 게다가 고조의 국적과 현 거주지가 대한민국이라 특히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고조가 다니는 대학교에도 이미 통보를 해놓은 상태다. 이유는 묻지 말 것. 그가 학교에 나오든 안 나오든, 그가 학교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든, 심지어 교수를 죽이든 학생을 죽이든 당신을 죽이든 그냥 무시할 것. 경찰에 알릴 필요도 없고 언론에 고발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다. 그가 무사히 졸업하기만을 빌 것. 행운을 빕니다.

 

 고조가 학교에 모습을 나타낸 건 일주일 만이었다.
 번호판 없는 검정색 스포츠카를 주차장에 세운 뒤 곧장 강의실로 향했다. 도중에 몇몇 학생들이 고조를 알아보았지만 아는 체 하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이번에도 무시당할 게 뻔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저 녀석 언젠가 한번 손봐줘야 하지 않냐?”
 그렇게 수군대며 지나쳤다.
 강의실에서도 그런 수군거림은 이어졌다.
 고조가 강의실에 들어서자 역시나 몇몇 학생들이 아는 체를 했다.
 “와, 고조 너 오랜 만이다. 학교 너무 자주 빠지는 거 아니냐? 너 그러다 졸업 못 한다.”
 “그런데 미리 학교에다 얘기하고 빠지는 거냐? 결석할 때마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교수님들이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 우리가 고조 너 왜 안 나오냐고 하면, 그저 신경 쓰지 말라고만 하시고.”
 “혹시 고조 너 배경 후덜덜한 거냐? 아빠가 국가 고위직 공무원이라거나 집안 일가친척이 모두 국회의원이라거나 아빠가 세계 100대 부자에 든다거나 뭐 그런 거냐?”
 “알려줘. 너처럼 자유롭게 결석할 수 있는 비결이 뭔지?”
 물론 고조는 그들의 말에 단 한 마디 대구도 하지 않았다. 대구는커녕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조의 시선은 오직 한 여자, 강의실 맨 앞에 앉아 있는 고미에게 향하고 있었다. 교수가 들어와도, 강의가 시작돼도 마찬가지였다. 고조는 오직 고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런 고조의 모습을 교수는 무시했다. 왜 결석했는지 같은 것도 묻지 않았다.
 “저 녀석 언젠가 한번 손봐줘야 하지 않냐?”
 학생들 사이로 종종 그런 수군거림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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