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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미행2

2012.03.30 23:3603.30

 


미행 2
 
 
 1
 
 계단을 이용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한 두 달만인가.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조금 긴장이 됐다.
 긴장한 탓에, 내가 생각해도 출입문을 너무 힘없이 밀었다.
 힘없이 밀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누구도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출입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손님이 꽤 많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한 무리의 손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수가 많다. 모두 여섯 명이다. 다 내 또래로 보였다.
 일찍부터 온 모양이다. 다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길 잘했다.
 조용하게 술 마시려고 들어왔는데, 저들과 가까이 있으면 분위기 다 깨진다.
 자리에 앉은 지 한 사오 분 된 것 같다.
 여전히 가게 안 누구도 내 존재를 모르고 있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와서 긴장되는데,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으니 몸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다.
 그냥 나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나가면 되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이곳은 가끔 들르는 술집이다.
 이런 곳을 뭐라고 부르더라. 그냥 모던바라고 해야 하나.
 가게 벽 쪽으로는 4인용, 6인용 정도 되는 테이블이 있다. 주로 일행이 와서 조용히 술 마실 때 이용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 다들 술이 취하면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중앙에는 커다란 타원형의 바가 설치되어 있다.
 바는 대부분 혼자 왔거나 아니면 둘, 많아야 일행이 셋인 경우에 주로 이용한다.
 손님이 들어와 바에 앉으면, 아가씨가 와서 그 손님을 상대한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다양한 농담을 즐긴다. 고리타분한 얘기는 금물이다. 고리타분한 얘기만 늘어놓는 손님은 이곳에서 진상 취급 받는다. 예를 들어, “아가씨는 왜 이런 곳에서 일하시나요?” “전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여자가 정말 좋습니다.” “이렇게 매일 술 마시면 몸 상하지 않나요? 다른 일 알아볼 생각은 없으세요?” “정말 미인이시네요. 제가 한잔 따라드릴게요. 술 잘 드시네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와, 보기보다 어리시네요. 그런데 혹시 손님이랑 2차도 나가시나요?”
 단골손님인 경우, 그 손님을 상대하는 아가씨가 따로 있기도 하다. 단골손님도 그 아가씨와 함께 술을 마시려고 온 것이니까.
 물론 단골손님이 돈 좀 있는 경우에는 주인이 직접 영업에 나선다.
 “어머, 사장님 오셨어요!”
 이러면서 달려들어 멋대로 양주 한 병을 시킨다. 그리고 어린이들(이곳 사장은 가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을 어린이라고 부른다) 몇 명을 불러서 역시 멋대로 양주를 한 잔씩 쫙 돌린다. 그리고 거국적으로 건배.
 “쓰다. 사장님, 우리 폭탄주로 가지요? 양주도 한 병 더 시키고.”
 이러면서 역시 또 멋대로 양주 한 병에 맥주도 몇 명 시킨다. 순전히 술집 주인 마음대로다.
 이쯤 되면 그 단골손님도 이제 막 나간다.
 “팍팍 시켜. 여기 애들 다 오라고 해. 한잔씩 다 돌려.”
 당연히 술집 주인은 술 더 시키고,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온다.
 그 단골손님은 다음 날 휴대폰 문자메시지에 찍힌 카드 금액을 확인하고 한숨을 쉰다.
 하지만 그런 후회도 길어야 삼사 일이다. 다음 주에 그는 또 온다.
 물론 술집 주인이 직접 나를 상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두세 달에 한 번 오니, 나는 단골손님도 아니다. 게다가 기껏해야 맥주 다섯 병에 오징어 한 마리.
 술집 주인이 나를 상대할 리 없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낸다. 어쨌든 나도 손님이니까.
 그런데 어디 보자, 쟤들은 여섯 명이면서 왜 테이블로 안 가고 저렇게 바에서 마시는 거야! 저러니 당연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지. 끝에 앉은 애가 반대편 끝에 앉은 애한테 말 걸려면 아주 고함을 질러야 되네. 아주 여섯 명이서 이 술집 전세를 내셨어.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양주만 세 병이네. 맥주는 엄청나게 많고. 전세 낼 만하구나.
 이 집 아가씨들이 저 손님들 쪽으로 다 가 있다.
 오늘 하루는 저 손님들 상대로만 장사를 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오늘은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다음에 오자.
 그러면서 일어나려는데, 술집 주방에서 누가 나왔다.
 “어, 오빠 언제 왔어?”
 연희, 내가 올 때마다 함께 술을 마셔주는 아가씨다.
 양손에 안주가 잔뜩 들려 있다.
 저쪽 손님들이 추가로 주문한 안주들이겠지.
 “방금. 바쁜가 보네.”
 이곳 아가씨들 중에 막내라 굳은 일은 혼자 다 한다.
 안주도 뚝딱 뚝딱 잘 만든다.
 가끔 주인 없을 때면 몰래 주방에서 이것저것 가지고 와 나더러 먹으라고 주기도 한다.
 “조금 바쁘네. 어리바리한 손님들이 왔거든. 돈 자랑 엄청 하네. 막 시켜 그냥. 오늘 주인 언니가 급한 일 있어서 조금 전에 갔거든. 가면서 그러더라고. 오늘 장사 쟤네들로 끝내버리라고. 그래서 우리 다 달려들었잖아. 덕분에 쟤네들 아주 신났어. 오늘 이 집 술 자기네가 다 마시겠대. 참, 오빠 술 안 시켰지. 잠깐만 기다려. 내가 조금 있다가 맥주 가지고 올게. 우선 이거 하나 먹고 있어.”
 그러면서 연희는 튀김 안주 한 접시를 내 앞에 슬쩍 놓고 갔다.
 물론 이 튀김 안주 계산은 저 손님들이 할 것이다.
 “야, 나 술잔 비었잖아. 안 따르고 뭐하냐?”
 “미안. 잔에 술 조금 남았기에 그냥 있었지.”
 “나 원래 이 정도는 남겨. 그런데 너 몇 살이라고 그랬지?”
 “스물한 살.”
 “얘들은 어떻게 된 게 죄다 스물하나야. 다른 데 가도 있잖아, 거기 있는 애들 나이 물어보면 전부 스물하나야. 얘네끼리 무슨 카페 만들었나 봐. 나이는 전부 스물하나로 통일하자고 카페에서 정했나 봐.”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전에 갔던 바에서도 애들 전부 스물하나라고 했지 아마. 제일 나이 많은 애가 스물셋이었고. 내가 볼 때는 스물일곱은 됐겠던데. 우리랑 동갑.”
 “에이, 그래도 걔가 우리한테 진짜로 스물일곱이라고 했어봐라. 같이 술 마실 기분 나겠냐. 아마 쟤도 한 스물다섯은 됐을 걸. 너 스물다섯이지?”
 “아니야, 진짜 스물하나야.”
 “그럼 넌 몇 살이냐?”
 “스물하나.”
 “실은 너희 다 스물하나지, 그치?”
 “응, 우리 다 스물한 살이야. 죄다 동갑. 잘 아네.”
 “그럼 내년에 또 와서 내가 나이 물어보면, 그때는 스물둘이라고 할 거냐?”
 “애초에 나이 물어보는 게 실례지. 그리고 당연히 내년에 나이 물어봐도 스물하나라고 할 거고. 이런 데 처음 다녀! 뭘 그런 걸 다 따지고 그래!”
 “오, 얘 좀 성깔 있다. 난 이런 애들이 좋더라. 술집 애들 너무 고분고분하면 재미없지.”
 “야, 애초에 술집 애들치고 고분고분한 애가 어디 있냐!”
 “없긴 한데, 대신 돈 주면 고분고분해져.”
 “하긴, 저번에 룸살롱 갔잖아. 옆에 앉은 애 가슴 좀 만지려고 했더니, 내 손을 거의 비틀더라. 우와, 깜짝 놀랐어. 그래서 스커트 밑에 수표 끼워줬잖아. 가만있더라. 스커트 밑으로 손 집어넣어도 가만있어.”
 “미친 놈. 그럴 거면 그냥 2차까지 바로 연결되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 뭐 하러 따로 수표까지 찔러주면서 그 지랄이냐.”
 “에이, 그래도 또 대놓고 하는 것하고 슬쩍 만져보는 것하고 맛이 다르지.”
 “하긴 그렇다. 야, 넌 여기서 하루 일하면 일당 얼마 받냐?”
 “우리 일당으로 안 받아. 주급으로 받아.”
 “그래! 이런 데 전부 일당으로 받는 거 아니었냐?”
 “알바 애들은 일당으로 받기도 하지. 직원은 대부분 주급이야.”
 “그럼 주급 얼마냐?”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럼 너희들 2차는 나가냐?”
 “우린 2차 안 가. 주인 언니가 싫어하거든.”
 “일당 2배로 줘도 2차 안 갈 거냐?”
 “안 가. 나중에라도 주인 언니 알게 되면 엄청 혼나거든.”
 “혼나면 다른 데 들어가면 되지 않냐?”
 “여기 괜찮은 데야. 주인 언니도 좋고, 주급도 세고. 다른 데 갈 생각 없어.”
 “2차 간다고 하면 술 좀 더 시키려고 했더니.”
 “안 시켜도 돼. 이 정도면 충분히 오늘 매상 올렸어.”
 “여기 있는 애들은 죄다 고분고분한 애들이 없다. 여기 마음에 드는데. 야, 양주 몇 병 더 따라. 그런데 참, 너흰 몇 시까지 영업하냐?”
 튀김 안주만 먹고 있자니, 듣지 않으려 해도 옆 손님들 얘기가 들렸다. 덕분에 혼자 앉아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술 마시는 사람들 얘기 듣고 있으면 의외로 재미있다. 다들 지나치게 솔직하다. 무례할 만큼 솔직하다.
 “오빠, 심심했겠다. 여기 맥주.”
 연희가 맥주 다섯 병을 들고 왔다.
 “응, 고마워. 튀김만 먹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목이 좀 마르더라.”
 연희가 얼른 잔에 맥주를 따라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연희가 따라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 많이 탔구나. 미안해. 좀처럼 빠져 나올 기회가 없었어.”
 연희가 빈 잔에 다시 맥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아니야, 미안하긴 뭐. 그런데 연희 너, 저쪽으로 안 가봐도 돼! 혼자 여기 앉아 있으면 다른 언니들한테 눈치 보일 텐데.”
 “괜찮아. 언니들도 오빠 온 줄 알고 있어. 나더러 가보라고 했어. 언니들도 그 정도 배려는 해주지.”
 “그래! 고맙네. 그런데 연희 너 오늘 술 좀 마셨겠다.”
 실내가 어두운데도 연희 얼굴이 벌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희가 양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면서 투덜댔다.
 “후, 양주 거의 한 반 병은 마신 거 같아. 내일 좀 힘들겠어. 맥주도 엄청 마셨고. 쟤네 우리한테도 술 엄청 권한다. 이제 그만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언니들도 술 많이 마셨거든. 내일 다들 힘들어 할 거야.”
 그러면서 연희는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내 앞이라 예의상 한 잔 마시는 것이다.
 “그럼 분위기 봐서 그냥 연희 너 먼저 들어가!”
 “에이, 의리가 있지.”
 “언니들도 눈감아 줄 거 같은데.”
 “당연히 뭐라고 하지는 않지. 내가 언니들한테 좀 잘 하냐.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에는 먼저 가면 좀 그렇지. 내가 남아서 뒷정리 하고 가야지.”
 “그럼 뒷정리하고 그냥 가게에서 자. 피곤하게 집에까지 가지 말고.”
 “왜, 덮치게.”
 “집에 가서 자라.”
 내 말에 연희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오빠는 여전히 편의점 알바 하는 거야?”
 “응, 여전히 편의점 알바.”
 “여전히 다른 거 할 생각은 없고?”
 “응, 여전히 다른 거 할 생각은 없어. 나, 지금 다니는 편의점 그만 두면 큰일 나거든.”
 “또 그 소리야! 큰일 나기는 개뿔. 거기 편의점에 뭐 빚이라도 있어!”
 “있지. 엄청 많아.”
 연희는 나만 보면 이렇게 편의점 그만 둘 생각 없냐는 말부터 한다.
 물론 나도 그만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만 둘 수 없다.
 다행히 연희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는다.
 왜 남들처럼 멀쩡한 직장 구할 생각 안 하냐는 말까지는 안 한다. 딱 이 정도에서 끝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레퍼토리.
 “그럴 거면 방세라도 아껴. 내가 열쇠 준다니까. 그냥 내가 사는 집으로 들어와. 뭔 고집이 그렇게 세냐.”
 “싫다.”
 “와, 나 같은 미인이 같이 살자고 해도 매번 싫대. 하여튼 비싸.”
 “너한테 신세지기 싫다.”
 “하여튼 저 자존심. 써먹을 데라고는 전혀 없는 저 자존심. 으이그.”
 이제는 연희가 같이 살자는 말을 해도 농담으로 넘겨버린다. 연희도 마찬가지다. 내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묻는다.
 물론 나는 연희가 좋다.
 처음 연희한테 그런 말 들었을 때는 같이 살까 하는 생각도 잠시 가졌다.
 들어갈까. 방세라도 아낄까. 연희하고 같이 살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연희와 같이 살게 되면, 연희는 죽는다.
 “야, 쟨 왜 저기 가 있냐?”
 “왜는, 손님 왔으니까, 한 사람은 가 있어야지.”
 “무슨 소리야! 오늘 우리가 너희들 다 산 거나 마찬가진데!”
 “우리가 무슨 물건이냐! 사고 말고 하게.”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손님 안 받아도 될 만큼 우리가 오늘 여기 매상 왕창 올려준다는 얘기지. 다른 손님 받지 마. 쟤도 나가라고 하고. 그리고 얼른 쟤, 이름이 뭐랬더라, 그래 연희, 연희 쟤도 빨리 이리 와서 앉으라고 해.”
 “됐어. 이제 매상 그만 올려줘도 돼. 그리고 저 손님도 단골이야. 함부로 나가라고 할 수 없어.”
 “단골은 무슨, 꼴랑 맥주 몇 병 마시는 주제에. 쟤 혹시 연희 그거라도 되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남은 술이나 드셔. 오빠들도 얼른 한잔씩 받으시고.”
 “그래 한잔 따라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와야겠다.”
 그러면서 거의 삭발 수준의 헤어스타일에 체격이 우람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약간 비틀거렸다.
 “참, 나 이틀 전에 휴대폰 잃어버렸어. 아무래도 택시에서 두고 내린 것 같아. 그날도 술 좀 많이 마셨거든. 아까워 죽겠어. 산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건데. 오빠, 그 휴대폰 찾을 방법 없을까?”
 연희가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잃어버린 다음에 바로 전화해 봤어?”
 “바로는 못 했지. 잃어버린지도 몰랐으니까. 다음 날 일어나서야 알았지. 그래서 전화했더니, 전원 꺼져 있더라. 오늘도 가게 오기 전에 전화해 봤는데, 역시 꺼져 있고. 완전히 잃어버린 건가.”
 “글쎄, 방법이 없을까! 휴대폰에는 무슨 고유번호 같은 거 없나! 그런 거 있으면 좋을, 으크야!”
 휴대폰 분실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내 입에서 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가만 있자. 그런데 왜 내 얼굴이 바에 처박혀 있는 거지. 맥주잔까지 엎어졌다. 게다가 지금 내 머리를 무언가가 누르고 있다.
 “어이쿠, 이거 미안합니다. 제가 술이 취해서 그만.”
 그러면서 삭발 청년은 팔에 더 힘을 줘 내 머리를 짓눌렀다.
 “어머, 오빠 괜찮아!”
 “응, 괜찮아. 저기 아저씨, 이제 그만 이 팔 좀 치워주시겠어요. 머리가 바에 계속 짓눌리고 있어서요.”
 삭발 청년이 화장실에 가다 중심을 잃고 비틀. 하필 내 쪽으로 몸이 쏠렸나 보다. 그리고 내 머리를 짓누르면서 균형을 잡고 있는 상태고.
 하지만 삭발 청년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여전히 팔을 치우지 않고 버텼다.
 “어우, 팔 좀 치워! 사람 머리를 그렇게 누르고 있으면 어떡해!”
 연희가 삭발 청년의 팔을 잡고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도 삭발 청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지.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런단 말이지. 아, 이거 미안합니다.”
 삭발 청년은 미안하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몸까지 내 등에 기대고 있었다. 기댄다기보다 몸으로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돌려 삭발 청년의 팔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삭발 청년의 팔을 비틀어, 더 이상 내 머리를 짓누르지 못하게 했다.
 내가 팔을 비틀자 삭발 청년이 아얏, 하고 짧게 비명을 지르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누가 봐도 과장된 동작이었다.
 삭발 청년의 아얏 소리에 나머지 일행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뭐야, 창민이 너 왜 그래?”
 눈썹이 새카만 청년이 그렇게 물었다.
 “아 몰라. 갑자기 이 자식이 내 팔을 비트네.”
 삭발 청년은 앞뒤 다 잘라먹고 내가 팔을 비튼 얘기만 했다. 시비를 걸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휴우, 오늘은 그냥 가야겠다.
 역시 날을 잘못 잡았다.
 “연희야, 오늘은 나 이만 갈게. 다음에 또 보자.”
 그러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희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어, 어 그래. 조심해서 가” 하고 약간 얼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누가 봐도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은데, 내가 너무 태연하게 자리를 뜨려는 걸 보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연희에게 살짝 웃음을 지은 뒤 바닥에 쓰러진 삭발 청년을 피해 출입문 쪽으로 갔다.
 “야, 저 놈 잡아!”
 누군가 내 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출입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내 몸은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이마가 정통으로 바닥을 쳤다. 순간 두개골 전체가 흔들리면서 속이 메스꺼웠다. 균형 감각도 잠시 마비가 됐는지, 손발을 바동거려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계속 일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내가 왜 쓰러졌는지는 뻔하다.
 뒤에서 누가 내 등을 강하게 밀친 것이다.
 나는 일어나려고 바동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래, 쟤들 중 누가 나를 밀친 건 맞다.
 맞는데, 맞긴 맞는데, 그런데 이게 뭐지.
 그렇다면 내가 쟤들 공격에 당한 거야!
 내가 진짜로 공격당한 거야!
 이게 말이나 돼!
 얜 어디서 뭐하는 거야!
 왜 안 나타나!
 “얘들아, 이 새끼 지금 튀는 거였냐? 말없이 그냥 튀네. 졸라 웃긴 놈이다.”
 “민식아, 우선 걔 좀 몇 대 갈겨라.”
 나를 밀친 놈이 민식인가 보다.
 “윽!”
 민식이라는 놈이 내 옆구리를 걷어찼다.
 내장이 다 뒤틀릴 것만 같았다.
 민식의 발길질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려 옆구리를 보호하려고 기를 썼다.
 그러자 민식은 발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내 머리가 뒤로 홱 재껴졌다.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민식은 놓치지 않고 발로 내 얼굴을 짓눌렀다.
 여전히 머리도 띵했고, 옆구리를 걷어차이는 바람에 호흡하기도 힘들었고, 얼굴을 가격당하는 바람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한 마디로 저항할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그래서 민식이 발로 내 얼굴을 짓밟고 있는데도, 나는 그 발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치우려고 했다가는 민식이 또 발로 내 얼굴이나 옆구리를 가격할 것 같았다.
 “창민아, 너도 얼른 이리 와라. 얘들아, 너희도 얼른 와. 와서 한 대씩 걷어차라. 졸라 재밌다. 이 새끼 이제 완전 쫄았나 봐. 움직이지도 못한다.”
 민식의 말에 창민을 비롯해서 놈들 일행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또 겁이 덜컥 났다. 아니지, 겁이라기보다 차라리 이건 공포였다. 공포를 느꼈다. 이런 경우 쓸데없는 객기가 나오는 법이다. 한 마디로 죽으려고 환장하는 행위.
 나는 팔에 힘을 실어 순간적으로 민식의 발을 왼쪽으로 휙 재꼈다.
 민식의 발이 내 얼굴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민식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한쪽 다리만 바닥을 딛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얼른 바닥에서 일어나, 바닥을 딛고 있는 민식의 발을 힘차게 걷어찼다. 걷어찼다기보다 힘차게 밀어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한쪽 발마저 바닥에서 떨어진 민식은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당연히 얼굴은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꼬리뼈가 상당히 아팠을 것이다.
 쌤통이다 인마, 하고 놀려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장 계단으로 뛰어올라 갔다. 자칫하면 일행들에게 잡히는 수가 있었다. 잡히면 끝장이다.
 계단으로 뛰어올라 가는데, 뒤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우왁! 우왁! 하는 비명 소리도 들렸다.
 뭐야, 얘 지금 온 거야!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지금 나타난 거야!
 나는 그제야 손으로 옆구리를 만지며 한숨을 돌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이거 완전 계약 위반인데.
 그때 뒤에서 연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도망 안 가고 뭐해! 빨리 뛰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는 거의 난장판이었다.
 연희를 비롯해서 술집 아가씨들이 민식과 창민 일행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일행의 머리카락을 잡아뜯는 아가씨도 있었다.
 민식과 창민 일행은 달라붙은 여자들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주먹질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냥 힘으로 떼어내려고만 했다. 그러면서 계속 비명을 질렀다. 여자들이 머리채를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한 손으로 옆구리를 감싼 채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옆구리도 옆구리지만, 아직도 코끝이 찡했다. 입술도 퉁퉁 부은 느낌이었다.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하는 바람에 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치사한 놈. 웬만하면 얼굴은 이렇게 정통으로 안 때리는데. 보통은 옆쪽을 때리잖아. 치사한 놈. 코뼈 나간 거 아닌가 모르겠네.
 티셔츠는 코와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피는 멈췄다. 어디 공중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대충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뒤 편의점에서 면티 하나 사 입고. 점원이 내 행색 보면 깜짝 놀라겠네.
 그나저나 이거 창피해서 다음에 연희 얼굴 어떻게 보냐.
 거기 아가씨들한테도 미안하고.
 정말 미치겠네.
 얘 때문에 정말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미치고 환장해서 아주 돌아가시겠네.
 얘 결국 안 나타났어.
 내가 여러 명한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데도 안 나타났어.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야, 너 왜 안 나타나! 나 하마터면 걔들한테 죽을 뻔한 거 몰라! 너 이래도 되는 거야! 나 확 편의점 그만 둬버린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분명 분홍색 여자는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입을 크게 벌려서 소리를 질렀나 보다. 찢어진 입술이 굉장히 쓰렸다. 옆구리도 욱신거렸다.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손으로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그때 주변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분홍색 여자는 나와 가까운 곳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그렇게 많이 안 맞았잖아요. 옆구리 몇 대, 얼굴 한 대. 그 정도 아닌가요. 그거로는 사람 안 죽습니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괜히 옆구리만 더 아픕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다 봤지! 나 맞는 거 다 봤지! 다 보고 있었으면서 안 도와준 거지! 그렇지!”
 “네, 다 봤습니다.”
 “……그게 끝이냐! 뭔가 더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안 도와준 건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소리 지를 때 마다 옆구리가 욱신거렸고, 입술이 쓰렸다. 게다가 화까지 더 치밀었다.
 “보니까 맞을 짓을 했던데요 뭐. 그런 건 제가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너, 제대로 보긴 본 거 맞아! 누가 맞을 짓을 했다는 거야!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술만 마셨어! 걔네가 괜히 시비 건 거라고! 그리고, 설령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무조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텐데! 무조건 나를 지키라고! 무조건! 무조건! 알겠어! 무조건!”
 “어우, 시끄러워요. 좀 조용히 얘기하세요. 그래도 다 들립니다. 사람들이 지금 댁이 미친 줄 안다고요.”
 그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밤중인데도 길에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하지만 멀리서 나를 힐끔거릴 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관없었다. 
 “네가 내 입장이 돼봐! 이게 조용히 얘기할 상황이야! 걔가 내 얼굴을 짓밟고 있었어! 내 기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그런데도 너는 안 도와줬어! 내가 흥분 안 하게 됐어!”
 “그러니까 누가 그런 데서 술 마시래요! 그런 데서 술 마신 사람이 잘못입니다.”
 “그런 데고 저런 데고를 떠나서, 무조건 도와줬어야지!”
 “무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데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안 도와줄 겁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럼 그게 무조건이야! 그건 무조건이 아니잖아!”
 “그거 무조건입니다. 애초에 그런 데는 빠져 있었거든요. 그런 데는 뺀 상태에서 무조건. 그러니까 무조건이 맞습니다.”
 “애초에 누가 그걸 뺀 건데!”
 “접니다.”
 “나는 몰랐잖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순간 혈압이 엄청나게 올라가서, 자칫 내 몸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피가 머리 쪽으로 한꺼번에 쏠리는 바람에 온몸에 있는 핏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래, 몰랐던 내 잘못이 크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저 술집에서 술 마신 게 왜 잘못된 건데.”
 진짜로 몸이 폭발할까 봐 겁이 나서,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비교적 조용히 물었다.
 “댁은 지금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잖아요. 벌어봐야 얼마나 벌겠습니까. 뭐, 다른 아르바이트생보다야 많이 벌겠지요. 그래도 일반적으로 봤을 때 남들보다 수입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수입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요, 댁은 어쨌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 보세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이 저런 술집에 다닌다, 이게 말이 됩니까. 사람들이 댁을 얼마나 생각 없는 인간으로 보겠습니까.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맥줏집에서 술을 마신다, 이러면 또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여자들이 우글대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주제 모르는 행동입니다. 댁이 주제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구경만 했습니다. 물론 저들이 흉기까지 집어들고 위해를 가했다면 나설 의향도 있었습니다.”
 위해를 가하려 했다면이 아니라, 위해를 가했다면.
 나설 의향이었다가 아니라, 나설 의향도 있었다.
 분명히 분홍색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나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연희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분홍색 여자는 나를 안 도와준 거겠지. 괜히 주제를 모르네 어쩌네 하는 말을 하지만, 그건 다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덕분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앞으로도 그런 데서 여자랑 술 마시면 안 도와줄 겁니다.”
 “그래, 도와주지 마. 나도 이제 그 집 갈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나 연희 안 좋아한다. 같이 살 마음 조금도 없어. 물론 이제 만날 일도 없고. 그러니까 괜히 연희 주위에 얼쩡대지 마. 걔 다치게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나나 잘 미행해.”
 분홍색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봐, 내 말 들은 거야! 들었으면 뭔가 대꾸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조용히 얘기하셔도 다 들린다니까요. 그리고 연희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전 그런 사람 모릅니다. 아, 같이 술 마신 사람이 연희라는 분이었나 보군요. 몰랐습니다. 저는 다만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이 그렇게 여자 많은 술집에 가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를 한 겁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술집에 안 가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때 뒤에서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술집에 있던 민식과 창민 일행이 기어이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나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저기 있다! 오늘 저 새끼 아주 죽여버려!”
 정말 끈질긴 놈들이다.
 나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쥔 채 녀석들과 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뒤에서 녀석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2
 
 오후 3시 전에 편의점에 도착했다.
 “누리씨, 안녕!”
 오전 근무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입술이 엉망이시네요.”
 다른 때 같았으면 입술이 왜 그 지경이 됐냐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호들갑을 떨며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입술이 엉망이라는 말만 하고 끝이었다. 게다가 목소리는 듣는 사람이 다 기운 빠질 만큼 작았다.
 “누리씨, 무슨 일 있어? 어째 오늘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내가 그렇게 묻자, 누리씨는 턱으로 출입문 바깥을 가리켰다.
 누리씨가 턱으로 가리킨 곳을 보자, 거기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키는 한 175센티. 마른 체형. 짧은 머리.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셔츠. 때가 낀 운동화.
 전체적으로 깔끔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연신 손톱을 물어뜯으며 편의점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누구, 저 녹색?”
 “네.”
 “녹색이 왜? 들어와서 진상 짓 했어?”
 “그런 게 아니고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스토커. 저 사람이에요. 한동안 안 나타나다가 어제부터 계속 오후 2시 전에 와서 저렇게 매장 앞에서 손톱 뜯고 있어요. 그리고 2시 50분 조금 넘으면 사라져요. 미리 버스 정류장에 가 있는 거예요. 제가 버스 탈 때까지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어요. 정류장에서는 저를 아주 노골적으로 쳐다봐요. 손톱 뜯으면서요. 그땐 정말 소름이 쫙 돋아요. 기준 오빠 보기에도 저 사람 정상적으로는 안 보이죠! 그죠! 좀 사이코 같지 않아요! 옷차림도 항상 저렇게 똑같다니까요.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 저 사람 진짜 이상해요.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그럼 당장 편의점 그만 두라그러고.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글쎄, 사람이 어딘가 좀 불안해 보이기는 하다. 죄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네. 그래서 누리씨는 어떻게 하려고. 어머니 말씀대로 편의점 그만 둘 생각이야?”
 “모르겠어요. 그만 둬야 하나. 일한 지 오래 돼서, 막상 그만 두려니 좀 섭섭하기도 하고요.”
 “그렇기는 하겠네.”
 “저기, 기준 오빠! 그러면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죄송하지만, 한 달 정도만 저랑 시간대 바꿔서 일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 달 동안 제가 오후에 일하고, 기준 오빠가 오전에 일하시고요. 가능하세요?”
 “가능하기야 하지. 그런데 시간대 바꾼다고 저 녹색이 스토커 짓 안 할까! 나랑 시간대 바꾼 거 며칠 지나면 금방 알아차릴 텐데. 그러면 누리씨한테 더 안 좋은 거 아니야? 괜히 밤에 버스 정류장에서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더 무섭지 않을까? 그 시간에는 버스 정류장에 사람도 더 적을 테고. 시간대 바꾸는 건 별로 좋은 방법 같지 않은데.”
 “그럴까요? 혹시 그만 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 저 녹색이 제대로 된 스토커라면 그런 것쯤은 금방 눈치 챌 것 같은데. 저런 사람들 참 무서워.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거든. 그래서 늘 우리들 생각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는 거고. 시간대 바꾸는 방법은 너무 허술한 방법 같다. 오히려 저 녹색이 자기를 바보로 아느냐며 화낼지도 몰라. 일단 오후 근무하던 내가 오전에 근무하는 것부터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어차피 시간대 바꿔도 오후 3시면 누리씨 올 거잖아. 저 녹색 2시 전에 와서 저렇게 훔쳐본다며! 아마 내가 오전 근무해도 저 녹색 분명히 2시 전에 와서 오후 근무자가 누군지도 확인할 걸. 그럼 그날로 들통 나잖아. 그럼 괜히 녹색 저 놈 신경만 건드리는 꼴일 텐데. 발끈할지도 몰라.”
 “그럴까요? 그래도 일단 제가 시간대 옮기면, 저 사람도 생각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요? ‘저 아가씨가 내 정체를 알아챘구나. 나를 피하려고 하는구나. 내가 싫은가 봐.’ 그러면서 스토커 짓 멈추지 않을까요?”
 나는 가만히 누리씨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리씨 얼굴이 조금씩 빨개졌다.
 누리씨가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물었다.
 “왜요, 기준 오빠!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나는 그제야 누리씨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누리씨 이제 보니까 참 순진하네. 저 녹색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면 애초에 스토커 짓도 안 하지.”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은데. 무리일까요?”
 “무리지.”
 “아, 몰라요. 그래도 일단 바꿔요. 바꿔도 계속 스토커 짓하면, 그때는 기준 오빠가 알아서 해주세요. 끝.”
 나는 다시 누리씨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리씨가 내 눈을 피했다.
 “누리씨 이제 보니까 귀찮은 일 생기면 남한테 막 떠넘기는 스타일이구나. 오늘 누리씨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됐어.”
 “상관없어요. 될 대로 되라 예요. 그건 그렇고요, 얼른 칡즙이나 하나 사주세요. 그거 먹고 빨리 집에 가게요.”
 될 대로 되라면서 왜 나한테 떠넘기는 거냐고, 나는 그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누리씨가 얼른 칡즙을 사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누리씨는 스토커 때문에 시간대까지 바꿔달라면서 칡즙만큼은 악착같이 챙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칡즙만큼은 거르는 일이 없다. 물론 본인 돈으로 사먹는 건 아니고, 항상 나더러 사달라고 한다. 이제 막 스무 살 넘은 아가씨치고는 입맛이 좀 특이하다. 한 번은 하도 궁금해서 물어본 적도 있다.
 “누리씨 참 희한하다. 그거 안 써?”
 “쓰긴요! 이게 몸에도 좋고 맛도 좋아요. 물론 처음에 쓰긴 한데요, 계속 마시면 안 써요. 나중에는 달아요.”
 누리씨가 칡즙을 마시는 동안 나는 잠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 스토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리씨 말대로 미리 버스 정류장으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저 놈 진짜로 스토커일지 모른다.
 진짜로 한 가지만 생각하는 무서운 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피곤한 일에 휘말렸다.
 문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전 근무 첫 날부터 늦잠을 잤다. 역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밥도 못 먹고, 머리도 안 감았다.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만 하고 튀어나왔다.
 전철 기다리는 동안 괜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넌 내가 늦잠 자면 좀 깨워주면 어디 덧나냐! 나중에 점주님한테 불려가서 혼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너 가만 보면, 은근히 나 혼나는 거 즐기더라.”
 물론 이번에는 휴대폰을 귀에 갖다대고 소리 질렀다. 당연히 통화 버튼 같은 건 누르지도 않은 채.
 이러면 적어도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머리를 좀 썼다.
 대신 전철 기다리던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래도 미친놈 취급당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이게 낫다.
 “야, 왜 대답이 없어! 너 요즘 아주 걸핏하면 내 말 무시하더라. 한번 해보자는 거야! 내 주변이 요즘 조용하니까 네가 아주 팔자가 늘어졌지! 요즘 엄청 편할 거야! 그치! 당장 인터넷 검색해서, 지금 중동 어디 내전 중인 데 없나 알아보는 수가 있다. 내전 중인 데 있으면, 나 바로 그리로 날아간다. 내전 중인 곳 한복판에서 활개치고 다닐 거야. 나한테 총알 막 날아온다. 소총, 기관총으로 막 쏴. 자주포, 박격포, 탄도 미사일, 지대지 미사일, 공대지 미사일, 함대지 미사일, 이런 거 나한테 막 날아온다. 최신형 벙커버스터까지 날아와. 전차, 장갑차, 공격 헬기, 뭐 이런 거 그냥 다 출동해! 나한테 막 돌진해! 너 이거 다 막아야 된다. 하나라도 놓치면 난 그 자리에서 즉사야. 그럼 너도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끝장이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쳤다. 세게 친 건 아니었지만, 치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나는 중심을 잃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분홍색 여자가 또다시 휙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시끄럽습니다. 댁이 앱니까!”
 그러면서 또 쳤다.
 어깨를 쳤을 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는데, 분홍색 여자의 두 번째 공격으로 그만 내 몸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하마터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큰일 날 뻔했다.
 아차,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소리 지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분홍색 여자가 나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분홍색 여자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 혼자 통화하다 말고 벌러덩 넘어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만히 서서 통화하다가 갑자기 벌러덩이라.
 사람들한테 설명을 해줄까.
 아닙니다. 제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넘어진 게 아닙니다. 저 그렇게 하체 부실한 놈 아닙니다. 못 보셨습니까? 몸매 별로인 분홍색 여자가, 순간 분홍색 여자가 나를 또 치고 갔다. 몸매 별로라는 말에 발끈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다행히 이번에도 휴대폰은 무사했다. 이번에도 못 보셨습니까? 몸, 아니, 분홍색 여자가 저 치고 간 거 못 보셨습니까? 지금 치고 갔잖아요. 그래서 넘어진 겁니다. 사람들이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아마 이런 상황이 벌어지겠지.
 내가 넘어진 이유를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나와 멀어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분홍색 여자한테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전철을 기다리며 조용히 책을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녹색 사내는 오후 2시 조금 안 돼서 나타났다.
 누리씨 말대로 차림새는 그대로였다. 머리 모양도 똑같았다.
 짧은 머리.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셔츠. 때가 낀 운동화.
 전처럼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매장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누리씨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녹색 사내가 매장 안을 훔쳐보듯 나도 녹색 사내를 훔쳐봤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녹색 사내는 얼른 눈길을 피했다.
 나는 매장 밖으로 나갔다.
 녹색 사내 곁으로 다가갔다.
 녹색 사내는 나를 힐끔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 시야에 멀찌감치 떨어진 녹색 사내가 보이듯이, 녹색 사내 역시 멀리 떨어져서 내 모습을 보고 있으리라.
 녹색 사내는 알고 있었다.
 내가 매장에서 너무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오랫동안 매장을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곧 매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녹색 사내는 완전히 자리를 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내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매장 안으로 손님이 들어가는 기척을 느끼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손님 접객을 한 후 유리 너머로 바깥을 보았다.
 녹색 사내가 어느새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와 매장 안을 훔쳐보듯 살피고 있었다.
 물론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녹색 사내는 저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밖으로 나가 녹색 사내를 위협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다시 돌아와 저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방금 내가 한 행동으로 녹색 사내도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럼 일단 저 녹색 사내도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지. 아무리 한 가지만 생각하는 스토커라도 섣불리 누리씨한테 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녹색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면 누리씨 얘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체가 탄로 났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됐다. 물론 그렇더라도 스토커 짓을 그만 두지는 않겠지만.
 아니지, 이왕이면 좀더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볼까. 손님 없는 틈을 노려서 손에 커터칼이라도 움켜쥐고 노려볼까. 커터칼로 내 목을 스윽 긋는 시늉도 해볼까. 손가락으로 녹색 사내를 가리키면서.
 저런 스토커가 또 의외로 겁이 많을지도 모르는데.
 스토커를 노려보면서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서기준!”
 순간 움찔했다.
 스토커가 밖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줄 알았다. 
 저 녀석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나한테도 관심이 있는 건가!
 아, 저런 녀석은 내 취향이 아닌데!
 “……오빠!”
 컥, 오빠라니, 뭐야 저거!
 실은 대상이 누리씨가 아니라 나였던 거야!
 “기준 오빠!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사람이 인사를 해도 받지도 않고.”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들어왔는지 누리씨가 서 있었다.
 누리씨를 보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리씨가 나를 부른 거였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누리씨는 사람 헷갈리게 왜 오빠 소리를 한참 있다 붙이는 거야! 그냥 ‘기준 오빠!’ 하고 바로 붙여서 불러야지! 괜히 착각했잖아.”
 “무슨 착각이요?”
 “저 스토커가, 아니,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런데 누리씨, 오늘은 기분이 좀 좋아 보인다. 시간대 옮기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나 봐?”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마음 편히 먹기로 했어요. 설마 저 스토커가 저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기껏해야 납치 정도겠지요. 상관없어요.”
 헉, 이건 또 무슨 누리씨답지 않은 소린지.
 어제까지만 해도 편의점 그만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너무 확 대범해진 거 아닌가. 기껏해야 납치 정도라니. 그러다 진짜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오빠,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세요? 그만 중얼거리시고요, 얼른 칡즙이나 하나 사주세요. 그거 마시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해야지요.”
 칡즙 사달라는 거 보면 여전히 누리씨답기는 한데, 그래도 하루아침에 스토커에 대한 경계심을 너무 풀어버린 것 같아서 오히려 내가 다 불안했다.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건가. 자기 때문에 시간대까지 바꿨는데, 그런 내 앞에서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기 미안해서 저러는 건가. 그렇다면 마음 씀씀이가 참 보통이 아닌데.
 어린 나이에 상대방 배려할 줄도 아는 저 마음 씀씀이. 녹색 사내는 누리씨의 저런 성격에 반한 건가. 그래서 스토커 짓을. 아니지, 녹색 사내가 누리씨의 성격까지 알 리 없지.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아니지, 아니지. 녹색 사내는 누리씨의 모든 걸 알 수도 있지. 스토커잖아.
 그러면서 나는 유리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리씨가 근무 시간을 바꿨다는 걸 확인했으니 돌아간 모양이다. 아마도 밤에 다시 오겠지.
 어쨌든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마음을 편히 먹으면 곤란하다. 상대는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스토커다. 누리씨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스토커.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또 누리씨가 걱정이 됐다. 그래서 근무 교대 전에 누리씨한테 거의 당부를 받아내듯 얘기했다.
 “누리씨, 혹시 밤에 녹색 사내가 쫓아오면 일단 다시 편의점으로 와. 아니면 근처 아무 편의점에라도 들어가던가. 그러고 나서 나한테 바로 연락을 줘.”
 “어우, 연락은 무슨. 걱정하지 마세요. 쫓아오면 제가 확 먹어버리면 되죠!”
 헉, 먹어버린다니. 먹긴 뭘 어떻게 먹는다는 거냐.
 상대방 배려, 뭐 이런 게 아니었나 보다. 진짜로 하루아침에 누리씨가 대범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녹색 사내가 대상을 잘못 고르지 않았나 싶다. 까딱하면 자신이 먹히는 수가 있다.
 녹색 사내보다 누리씨가 더 무섭다.
 나는 누리씨한테서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집에 와서도 혹시나 싶어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밤 10시가 넘어 11시가 다 되어가는 동안 누리씨한테서 연락은 없었다.
 누리씨가 변한 걸 알고 녹색 사내도 겁을 먹었나 보다.
 아니다. 겁먹지 않았다.
 녹색 사내는 다음 날 오후 2시 넘어서 다시 편의점 앞에 나타났다.
 덕분에 나는 또 헷갈렸다
 녹색 사내는 어제 분명 누리씨가 오후 근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굳이 이 시간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 누리씨 끝날 시간에 맞춰 미리 편의점 앞에 나타나면 된다. 그러니까 누리씨가 밤 10에 일을 끝마치니까, 그러면 밤 9시쯤에 나타나면 된다. 이 시간에 올 필요가 없다.
 어우, 뭐야, 쟤. 이제는 나를 스토킹 하겠다는 거야 뭐야. 도대체 이 시간에 왜 나타난 거야. 넌 도대체 스토킹 기준이 뭐야!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는 거야! 무조건 편의점 오전 근무자만 스토킹 하는 거야! 아, 스트레스 받네. 누리씨한테 다시 시간대 바꿔달라고 해야 하나. 스트레스 받으니까 칡즙이 확 땡기네.
 반면, 오후 3시 조금 안 돼서 나타난 누리씨는 어제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이제 녹색 사내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누리씨가 나타나자마자 녹색 사내는 또 사라졌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여전히 누리씨는 녹색 사내에 대해 신경도 안 썼고, 녹색 사내는 누리씨 보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문제는 나흘째 되던 날 벌어졌다.
 오늘도 녹색 사내는 오후 2시 조금 안 돼서 나타났다. 이제는 편의점 앞 자전거 보관소가 아주 녹색 사내 지정석이 됐다. 차림새는 여전히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셔츠. 때가 낀 운동화였다. 정말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겁이 날 정도로 한결같은 모습.
 지정석에서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편의점 안을 훔쳐보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습을 흘깃거리기도 했다.
 나도 이제는 녹색 사내가 제법 익숙해져서 그리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그냥 오늘도 나타났구나, 하는 정도였다.
 녹색 사내는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를 편의점 앞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오후 3시 조금 안 돼서 누리씨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기준 오빠!”
 “어, 왔어! 사무실 아이스크림 냉동고에 보면 비닐 봉투 안에 아이스크림 있거든. 종류 되게 많아. 그중에서 먹고 싶은 거 하나 먹고 나와. 천천히 먹고 와.”
 “웬 아이스크림이에요?”
 “오전에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몇 시간 동안 고장 났었거든. 그래서 몇 개 녹았어. 못 팔 거 같아서 따로 모아놓은 거야. 점주님한테 얘기했더니, 그냥 우리 먹으라고 하더라고.”
 “제일 비싼 걸로 골라 먹어야지.”
 “그러던가.”
 그러면서 누리씨가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편의점 출입문이 거의 부서질 정도로 세게 열렸다. 또 웬 진상 손님이 들어왔구나 싶어서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출입문 쪽을 보았다.
 녹색 사내였다.
 녹색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편의점 안으로 쳐들어왔다.
 녹색 사내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건 내가 아는 한 처음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한동안 카운터에 서서 녹색 사내의 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녹색 사내는 곧장 누리씨한테로 다가갔다. 누리씨한테로 다가가 어깨를 확 잡아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누리씨가 아니야! 당신 도대체 누구야! 누리씨는 어디에 있어!”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녹색 사내를 누리씨한테서 떼어냈다.
 “이봐요, 녹색, 아니, 아저씨! 매장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영업 방해하시는 겁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얼른 나가십시오! 누리씨도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들어가서 문 잠그고!”
 내 말을 듣고도 누리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겁을 먹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리씨가 갑자기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녹색 사내에게 다가갔다. 녹색 사내를 노려보는 눈이 무서웠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한 번만 더 손대면, 너, 먹어버린다.”
 누리씨의 목소리는 더 없이 차가웠다. 얼굴조차 창백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녹색 사내가 움찔 하면서 뒤로 주춤했다.
 누리씨는 그 말을 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는 내게 한마디 했다.
 “기준 오빠, 아이스크림 잘 먹을게요!”
 목소리는 더 없이 상냥했다. 조금 전 녹색 사내에게 했던 말투와는 완전히 달랐다.
 누리씨한테 저런 무서운 면이 있었나. 내가 직접 누리씨한테 아까 같은 말을 들었더라면, 아마 나는 그 자리에서 오줌이라도 지렸을 것이다. 그만큼 누리씨의 말투와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살짝 녹색 사내가 걱정 됐다.
 녹색 사내가 아무리 스토커라지만, 그래도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꽤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누리씨더러 당신 누구냐니, 저 자는 자기가 스토킹 하는 사람 얼굴도 잊어버리나. 이건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도대체 저 녹색 사내는 스토커 경력 몇 년 차야! 완전 신참 아니야!
 녹색 사내가 안쓰러우면서 한편으로는 한심했다.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스토커 노릇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헉,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는 녹색 사내를 매장 밖으로 끌고갔다.
 녹색 사내는 매장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저 여자는 누리씨가 아닙니다. 확실해요. 저 여자한테서는 누리씨 냄새가 안 납니다. 아무 냄새도 안 나요. 저 여자한테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 저 여자는 절대 누리씨가 아닙니다.”
 녹색 사내는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낮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편의점 밖에서 내 눈을 한번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녹색 사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녹색 사내의 말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 하나의 감각만 발달한 사람, 차림새는 언제나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셔츠, 때가 낀 운동화.
 저 사람은 어쩌면 내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걸 듣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녹색 사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최근 며칠 동안 지켜본 바로도 누리씨가 좀 변하기는 했다.
 일단 녹색 사내를 안 무서워한다. 물론 내 앞에서만 일부러 그럴 수도 있다. 시간대까지 바꿔줬는데, 더 이상 나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 성격이나 행동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다. 본래 갖고 있는 성격이나 행동은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 누리씨는 본래 남한테 의지하는 게 주특기다. 남한테 폐 끼치는 행동을 밥 먹듯이 한다. 일단 매일 칡즙 사달라는 것부터 민폐다.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아도 나한테 1시간 일찍 와달라고 조른다. 편의점에 불량해 보이는 손님이 오면 나한테 전화부터 한다. 그 손님 나갈 때까지 전화를 안 끊는다. 통화라도 하고 있어야 덜 불안하단다. 편의점 앞 인도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앉은뱅이 걸인이 나타나 행인들에게 구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누리씨는 그 걸인에게 천 원을 준다. 물론 자기 돈으로 주는 건 아니다. 편의점 포스에서 꺼내 준다. 그리고 그 돈을 채우는 건 나다. 남들보다 겁도 많은 편이고, 남한테 폐도 많이 끼친다. 그런 누리씨가 녹색 사내에게 ‘먹어버린다’는 말을 한 건 정말 의외였다. 전혀 누리씨답지 않았다.
 누리씨는 나와 얘기를 할 때나 아니면 손님과 얘기를 할 때면 늘 발뒤꿈치를 조금 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누리씨가 작은 키도 아니다. 겁이 많아서 일부러 당당해 보이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러지를 않는다. 특히 조금 전 녹색 사내에게 ‘먹어버린다’고 말했을 때도 그러지 않았다.
 결정적인 건 역시 칡즙이다. 이건 누리씨 본인도 아마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누리씨는 절대 칡즙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우연히 칡즙을 마신 뒤로 몸 컨디션이 좋아진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누리씨는 원래 몸 컨디션에 좀 예민한 편인데, 칡즙 마시자마자 컨디션이 좋아진 느낌이 들었으니, 매일 마시기로 작정을 한 것 같다. 안 마시면 컨디션이 망가진다고 믿으니까. 물론 내 추측이다. 하지만 누리씨가 칡즙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누리씨 본인 말로는 계속 마시면 달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거짓말이다. 누리씨는 항상 칡즙 마시기 전에 아주 살짝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고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한 번에 마신다. 세상 어느 누구한테 물어봐도 대답은 같을 것이다. 칡즙이 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칡즙이 달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맛 대신 다른 이유 때문에 마신다는 뜻이다. 그런도 요즘 누리씨는 칡즙 마실 때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물론 심호흡도 하지 않는다. 마치 칡즙 맛을 못 느끼는 사람 같다. 그냥 물마시듯이 마신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하다.
 이런 몇 가지 이유 말고도 요즘 누리씨가 낯설다고 느끼는 건 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막상 녹색 사내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런 것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혹시 녹색 사내 말이 사실인가.
 저 누리씨가 그 누리씨가 아닌가. 
 그런데 이거 어째 쓰다보니까 내가 누리씨 스토커 같다는 느낌도 든다. 누리씨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실은 나한테도 스토커 기질이 있다!
 이렇게 외치고 나면 의외로 속이 후련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냄새라. 정말 사람한테서 제각각 다른 냄새가 나나.
 뭐 녹색 사내한테서는 습기 찬 곰팡이 냄새가 나긴 하던데.
 나는 누리씨와 교대하고 나서 편의점을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지금의 누리씨한테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 이상하긴 해요. 사람들마다 각기 냄새가 다르거든요. 댁한테서는 약간 비릿한 냄새가 납니다. 예전 누리씨한테서는 칡 냄새가 났고요. 냄새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냄새가 안 나는 동물은 없습니다. 식물한테서도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지금의 누리씨한테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나요. 마치 시체처럼 말입니다.”
 “뭐야, 너도 사람들한테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 저 녹색 사내처럼 말이야?”
 “네.”
 “혹시 네 안에도 스토커 기질이 있는 거 아니냐?”
 “아니오. 기질이 있는 게 아니고요, 전 이미 스토컨데요. 댁 스토커.”
 “놀래라. 그랬구나. 왜 진즉에 눈치 못 챘을까. 녹색 사내는 언제나 물 빠진 청바지에 녹색 티셔츠, 때가 낀 운동화. 넌 언제나 분홍색 전신 수영복. 얼굴까지 완전히 뒤덮은 분홍색 전신 수영복. 스토커 특징이 항상 똑같은 옷차림인가 봐.”
 “이거 수영복 아닌데요. 재질부터 달라요. 전신 수영복의 대표적인 소재는 폴리우레탄입니다. 물보다 가볍죠. 방수성도 우수하고요. 물론 제 옷에도 폴리우레탄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 특수 플러버로 만들었습니다. 특수 플러버 70에 폴리우레탄 30. 수영복에는 플러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재질을 물어본 게 아니야. 그냥 모양이 수영복 같다는 거지.”
 “뭐, 모양이 수영복 같기는 합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글쎄요, 조금 찜찜하기는 합니다. 일단 오늘 밤에 누리씨 한번 미행해 보도록 하세요. 역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네요.”
 “내가 미행해야 되는 건가. 왜 녹색 사내는 저 누리씨가 가짜 누리씨라면서, 직접 미행할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스토킹 전문은 녹색 사내 아닌가. 자기가 미행해서 알아보면 되잖아. 뭐, 딱히 미행한다고 해서 저 누리씨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낼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댁은 참 멍청하군요. 녹색 사내는 누리씨 스토컵니다. 그리고 녹색 사내 말로는 저 누리씨는 그 누리씨가 아니고요. 당연히 미행할 이유가 없죠. 스토커는 자기가 정한 대상 외에는 스토킹 하지 않습니다. 1번 버스를 타야 집에 갈 수 있습니다. 2번 버스를 타면 집에 못 가요. 그것과 같습니다. 녹색 사내에게 저 누리씨는 2번 버스죠.”
 “예시 한번 끝내준다. 이해가 확 됐어. 확실히 너도 스토커구나. 아무튼, 그럼 집에 가자마자 잠이라도 자둬야겠네. 시간 맞춰서 좀 깨워줘. 안 그러면 나 그냥 계속 잔다. 진짜 계속 잘 거야. 미행이고 뭐고 없어.”
 “…….”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대답을 해!”
 
 밤 9시 50분.
 편의점 앞 자전거 보관소에 녹색 사내는 없었다.
 녹색 사내는 적어도 지금 편의점 안에 있는 누리씨의 스토커는 아니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는 누리씨.
 정말로 오전에 근무하던 그 누리씨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자전거 보관소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누리씨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밤 10시 10분.
 누리씨가 편의점에서 나왔다.
 나는 5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누리씨를 미행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누리씨는 단 한 번도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녹색 사내가 자신을 미행하는지 안 하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런 행동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누리씨라면 적어도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얼굴 정도는 슬쩍 살폈어야 했다. 하지만 저 누리씨는 그러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그냥 버스가 오는지 안 오는지만 확인할 뿐이었다.
 잠시 뒤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누리씨가 천천히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누리씨는 버스에 올라타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내가 바로 뒤에 서서 버스에 올라탔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게다가 모자까지 푹 눌러쓴 덕에 누리씨가 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나는 버스 안에서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버스가 열 번째 정류장을 지나자 누리씨가 벨을 눌렀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모양이었다. 나 역시 내릴 준비를 했다.
 누리씨는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넌 뒤 주택가가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제법 골목이 넓었고, 골목 좌우로 3, 4층짜리 연립주택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넓은 골목치고는 조금 어두웠다. 가로등이 거의 100미터 간격으로 있었다. 그것도 지그재그 형식으로. 그래서 폭이 10미터 이상 되는 골목인데도 제법 으슥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으슥한 골목에서 누리씨를 미행하자니, 묘한 스릴감을 느꼈다.
 이래서 스토킹을 하는 건가. 짜릿해.
 골목에 지나다니는 사람까지 없으니 짜릿함이 더 컸다.
 그렇게 혼자 몸을 부르르 떨며 짜릿함을 만끽하는 사이에 누리씨가 왼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누리씨와의 거리는 30미터 정도.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누리씨가 들어간 골목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서서 골목 안쪽을 살폈다.
 폭이 2미터 조금 넘는 좁은 골목이었다. 가로등도 없었다. 좌우 양쪽으로 늘어선 연립주택 출입문 위에 매달린 센서등이 가로등 역할을 대신했다. 누군가 출입문 가까이 다가가면 센서등이 저절로 켜지리라. 그리고 얼마 뒤 꺼지고.
 그런데, 센서등 켜진 곳이 없었다.
 골목은 그 끝이 막혔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골목 입구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대략 50미터. 좌우로 연립주택이 세 동씩 있고, 출입문마다 센서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출입문은 모두 여섯 개. 당연히 센서등도 여섯 개.
 누리씨가 골목으로 사라진 뒤 내가 골목 앞까지 온 시간은 불과 6초가 조금 넘었으리라. 누리씨가 그 사이에 연립주택 여섯 동 가운데 한 곳으로 들어갔다면, 당연히 그 출입문 위에 매달린 센서등은 켜져 있어야 했다.
 물론 5, 6초 정도면 센서등이 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골목 앞까지 온 시간 6초에 누리씨가 골목에서부터 연립주택 출입문 앞까지 간 시간을 빼야 한다. 누리씨가 골목에서 가장 가까운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3초 정도는 걸린다. 그럼 남은 시간은 길게 잡아봐야 3, 4초다. 사람이 출입문에 들어서자마자 센서등이 켜지고, 켜지는 것과 동시에 3, 4초만에 센서등이 꺼질 리는 없다.
 나는 실제로 골목에서 가장 가까운 연립주택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센서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센서등이 켜진 걸 확인하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시간을 쟀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센서등은 켜짐과 동시에 10초가 지나자 자동으로 꺼졌다.
 그럼 혹시 이 골목에 있는 연립주택 여섯 동 가운데 센서등이 고장 난 게 있나!
 나는 연립주택 여섯 동을 차례로 돌면서 센서등이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고장 난 센서등은 없었다.
 누리씨는 이 골목에 있는 여섯 동의 연립주택 중 어느 한 곳으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적어도 출입문을 통해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베란다를 통해 들어갔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아마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만일 집이 1층이라 하더라도 3, 4초 만에 베란다를 통해 들어갈 수는 없다. 나라도 최소 1분 이상은 걸린다. 당연히 내가 골목 앞에 도착했을 때 누리씨는 이제 막 베란다 난간을 잡고 낑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누리씨가 막다른 골목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왜 사라진 거지. 어디로 사라진 거지.
 덕분에 짜릿한 스릴감도 사라졌다.
 나는 무턱대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누리씨는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누리씨가 다시 골목을 나온 걸 못 봤으니까 당연히 골목 어딘가에 있는 게 맞다.
 나는 골목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작게 “누리씨!” 하고 이름을 불렀다.
 조용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시 불렀다.
 “누리씨!”
 “어머, 기준 오빠! 어쩐 일이세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누리씨가 서 있었다. 내 바로 뒤에.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녹색 사내 말이 맞았구나. 누리씨가 아니구나.
 누리씨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다름이 아니라, 혹시 무슨 일 없나 해서. 오늘 녹색 사내가 편의점 들어와서 난동 피웠잖아. 그래서 혹시 녹색 사내가 미리 누리씨 집 근처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그래서 걱정돼서 와봤지. 이제 오나보네. 오면서 혹시 누가 쫓아오거나 하지는 않았어?”
 “네, 쫓아온 사람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스토커들 실은 겁쟁이들이에요. 이쪽에서 오히려 강하게 나가면 바로 꼬리 내려요. 그런 놈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만 먹잇감으로 삼거든요.”
 “그렇구나. 그럼 뭐 다행이고.”
 “네, 아무튼 이렇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기는 뭐. 그래, 그럼 별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이만 갈게.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러면서 나는 누리씨 곁을 지나쳤다. 큰 골목으로 나가려면 누리씨 곁을 지나쳐야만 했다.  
 “기준 오빠!”
 내가 막 누리씨 곁을 지나쳤을 즈음, 누리씨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지, 집은 모르셨지! 저희 집이 이쪽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전에 내가 이 근처까지 누리씨 바래다 준 적 있었잖아. 잊어버린 거야!”
 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랬던가요! 누리씨 기억에는 그런 적 없었는데요.”
 “뭐야, 말이 좀 이상하잖아. 누리씨 기억이라니, 꼭 다른 사람 얘기 하는 거 같잖아. ‘내 기억에는’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머, 그런가요? 제가 잠시 말실수를 한 걸까요? 아닌데. 누리씨라고 하는 게 맞아요.”
 뒤에 있는 자의 목소리는 이미 누리씨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 참, 그런데 왜 절 미행하셨어요? 원래 누리씨 스토커는 녹색 사내 아니었던가요? 누리씨가 잘못 알고 있었나요? 실은 기준 오빠도 누리씨 스토커였어요? 이제 보니까 누리씨가 스토커들한테 인기 많았나 봐요. 스토커들이 좋아하는 타입인가! 스토커들은 칡즙 마시는 여자를 좋아하나 봐요.”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신 너무 헷갈리게 말을 해. ‘왜 저를 미행하셨어요? 누리씨 스토커였어요?’ 이거 너무 헷갈리잖아. 그냥 누리씨는 빼줘. 그리고 난 누리씨를 미행한 게 아니야. 너를 미행한 거지. 그런데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봐?”
 “호호, 당연하지요, 기준 오빠…….”
 “오빠는 무슨, 그러지 말자고. 듣는 사람 생각도 해줘야지. 징그럽게.”
 “까칠하시네요, 너. 9시 50분에 편의점 앞에 나타났잖아. 네 비릿한 냄새가 났어. 지독하더라. 버스 안에서도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말이야.”
 “그럼, 결국 넌 여기까지 나를 유인한 거네. 이유가 뭘까!”
 “당연하잖아. 여기 무지하게 조용해. 사람 거의 안 다녀. 죽이기에 딱 좋은 곳이지. 아, 사람이 좀 다녀도 상관은 없어. 너 죽이는 데 몇 초도 안 걸릴 테니까.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없어야 얘기도 좀 나누지. 나는 죽이기 전에 이렇게 같이 대화 나누는 거 참 좋아해.”
 “악취미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물어 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질문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들었어. 그럼 발전이 없대. 비록 몇 초 뒤에 죽는다고 해도 말이지.”
 “멋있는 말이야. 삶이 몇 초밖에 안 남았어도 질문을 던져라. 애초에 날 죽이려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내가 미행한다고 해도, 너는 그냥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럼 내가 뭘 어쩌겠어. 그걸로 끝이지. 난 다시 내 집으로 가고.”
 “호호, 설마 살고 싶은 거야? 안 돼. 절대 안 돼. 그리고 너는 이미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잖아. 그래서 미행까지 한 거잖아. 너, 의심받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줄 알아! 물론 내가 진짜 누리씨가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심받는 건 기분 나쁜 거야. 남을 막 그렇게 의심하면 안 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역시 까칠해. 말 좀 재밌게 하려고 했더니. 뭐, 그렇다고 해서 방금 한 말이 농담은 아니야. 녹색 사내와 너,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그런 거 신경 쓰여. 괜히 네 앞에서 행동도 조심해야 할 거 같고 말이지. 그러니 죽여야지. 아니, 먹어버려야지. 그리고 다음에는 녹색 사내놈도 먹어버리고.”
 “죽이는 거야, 가 아니고 먹는 거야! 그럼 누리씨도 먹은 거야?”
 “응, 먹었어. 먹었으니까 내가 누리씨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 아, 너는 모르겠구나. 나 있잖아, 사람 먹으면, 그 사람 모습으로 변해. 그렇다고 해서 모습만 변하는 건 아니야. 그냥 먹은 사람 자체가 돼. 먹은 사람이 알고 있던 모든 걸 알고 흉내 내게 돼. 그렇다고 해서 뭐 완전히 똑같다는 건 아니야. 무의식적인 부분은 나도 잘 몰라. 그건 먹힌 사람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말인데, 내가 뭐 한 가지 알려줄까? 나 이제 조금 있으면 누리씨 아니야. 서기준이지.”
 “이제 보니까 너, 괴물이구나.”
 “괴물이라니! 괴물 아니야! 요괴야!”
 “그거 똑같은 거야.”
 “달라! 인간들 관점에서만 말하지 마! 기분 나빠! 내가 볼 땐 너희가 괴물이야!”
 “난 사람 안 먹어.”
 “나도 요괴는 안 먹어!”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그래, 요괴! 넌 이름이 뭐냐?”
 “변신 마녀.”
 “끝이야?”
 “응, 끝이야. 변신 마녀야.”
 “이름에 너무 꾸밈이 없지 않냐? 너무 노골적인 이름이잖아. 좀 그럴 듯하게 짓지 그랬어, 이 멍청한 괴물아!”
 그러면서 나는 비로소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 변신 마녀를 쳐다보았다.
 허리까지 자란 검은색 머리카락. 단 한 번도 손질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냥 제멋대로 자라게 놔둔 모양이다. 키는 160대 중반 정도에 지나치게 말랐다. 팔뚝 굵기와 허벅지 굵기가 비슷했다. 허리 사이즈는 20인치 조금 넘으려나. 말 그대로 뼈와 살로만 이루어진 몸이었다. 그러니까 변신 마녀는 지금 몸에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다. 알몸이었다. 가슴은 축 쳐졌고, 온몸의 피부도 축 쳐졌다. 90대 노파의 몸매 같았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얼굴만큼은 20대 처녀처럼 피부에 탄력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역시 눈에 눈동자가 없으니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체적으로 흉했다.
 “너 끔찍하다. 보기 흉해.”
 “괜찮아. 이제 곧 네 모습을 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흉하니까 자꾸 사람을 잡아먹는 거구나. 안 흉해 보이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너 참 이상한 인간이다. 나랑 얘기하는 동안 한 번도 겁을 안 먹네. 내 모습 보고도 안 무서워하고. 도망치지도 않잖아. 너 같은 인간 처음 본다.”
 “무섭지는 않아. 대신 흉해서 보기가 싫을 뿐이지. 모습이 그렇게 흉하면 좀 가리고 다녀. 전신 수영복 몰라? 얼굴까지 뒤집어쓸 수 있는 걸로 내가 알아봐 줄까? 특수 플러번가 뭔가로 만든 게 있다던데.”
 순간 변신 마녀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송곳니가 5센티 정도 길어졌고, 손톱 역시 전부 5센티 정도 길어졌다.
 “더 흉해. 그래가지고는 전신 수영복도 못 입어.”
 “너 참 재미있는 인간이야. 빨리 먹고 싶어졌어. 이번에는 너로 좀 오래 지내봐야겠다.”
 그러면서 변신 마녀가 준비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어림짐작으로도 5미터.
 변신 마녀는 5미터 위에서 정지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자세를 바꿨다.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선 자세였다.
 그런 자세로 양손을 몇 번 쥐었다 펴더니, 빠른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신 마녀의 손톱이 거의 내 머리에 닿을 즈음, 변신 마녀의 몸이 골목 안쪽으로 튕겨나갔다.
 “어이, 타이밍을 너무 늦게 잡은 거 아니야! 하마터면 저 변신 마녀 손톱이 내 머리에 닿을 뻔했다고!”
 “전신 수영복 얘기에 대한 소심한 복수입니다.”
 변신 마녀는 아직도 골목 안쪽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분홍색 여자가 서 있다.
 드디어 등장했다. 분홍색 여자.
 약간 촌스러운 분홍색 전신 수영복. 얼굴까지 완전히 뒤덮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미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게다가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이라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훌륭하지 않은 몸매다.
 순간 분홍색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역시나 한숨.
 골목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촌스러운 분홍색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저 서기준이라는 놈하고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야!”
 아까보다 머리가 좀더 심하게 헝클어진 변신 마녀가 탄력 있는 얼굴 피부를 잔뜩 일그러뜨린 채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변신 마녀의 고함소리에 분홍색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신 수영복만 이리 저리 살피고 있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여전히 자신의 전신 수영복만 살피고 있는 분홍색 여자. 촌스러운 분홍색이라는 말에, 다른 색 수영복을 입을까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아무튼 너, 보통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혹시 요괴일까! 아니야. 요괴라면, 몸에 그런 촌스러운 분홍색은 걸치지 않지. 요괴치고는 몸매도 형편없고. 거의 인간 수준의 몸매야.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건데, 인간 중에서 너처럼 빠른 인간이 있었던가! 헷갈린다. 헷갈릴 때는 먹어보면 되지. 우선 촌스러운 분홍색, 너부터 먹어야겠다. 네 정체가 뭔지 궁금해졌어.”
 그러면서 변신 마녀가 다리를 굽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양손은 땅바닥을 짚었다. 손으로 땅바닥을 짚기 위해서인지, 어느새 손톱 길이가 짧아져 있었다.
 변신 마녀가 자세를 취하자, 분홍색 여자도 자신의 전신 수영복 살피는 행동을 멈췄다. 가만히 서서 변신 마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봐, 촌스러운 분홍색! 넌 딱 1분이다. 영광으로 생각해. 서기준 같은 평범한 인간은 사실 먹는 데 1초도 안 걸려. 하지만 너는 좀 다른 거 같아. 그래서 1분. 그러니까 네 목숨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길어야 1분.”
 순간 팟! 하면서 변신 마녀가 공중으로 사라졌다. 분명 공중으로 뛰어올랐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차라리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와 동시에 분홍색 여자도 팟!
 분홍색 여자는 도약을 위한 준비 자세조차 취하지 않은 채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변신 마녀와 분홍색 여자 모두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날이 흐려서인지 달조차 안 보였다.
 밤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간 거야!
 왜 여기에서 싸우지 않고 공중전을 택한 거야!
 아무래도 싸움이 좀 치열해질 거 같아서 그런 건가!
 이곳에서 싸웠다가는 주변 다 쑥대밭으로 변할까 봐!
 변신 마녀 의외로 매너 좋네.
 그나저나 모처럼 제대로 된 싸움 좀 구경하나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어이! 나 먼저 가도 되지? 시간이 너무 늦었어. 이러다 차 끊기겠다.”
 순간 슈웅, 하고 바람 소리가 났다.
 깜짝이야!
 “먼저 가세요. 곧 따라갈 테니까요.”
 다시 슈웅!
 빠르기는 정말 빨라.
 나는 큰 골목으로 나와 횡단보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맞은편에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사는 여잔가 보다.
 어두운데도 자꾸 그 여자에게로 시선이 갔다. 정확하게는 여자의 늘씬한 다리로.
 아까 누리씨, 아니 변신 마녀를 미행하면서 느꼈던 묘한 스릴감이 다시 엄습해 왔다.
 미행할까.
 집이 어딘지만 알아낼까.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에 초미니 스커트 여자가 나를 지나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리며 짜릿함이 전해졌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녀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슈웅!
 동시에 나는 보기 좋게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크헉!”
 내 비명소리에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거의 뛰다시피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싸움에나 신경 써! 그냥 호기심이었을 뿐이라고!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싸움 끝났습니다. 그리고 제발 철 좀 드세요. 남 보기 창피합니다.”
 나도 창피해. 이렇게 벌러덩 넘어진 걸 여자가 봤으니 얼마나 창피하냐.
 그런데 뭔 싸움이 이렇게 빨리 끝나!
 변신 마녀 의외로 허풍이 심했구나.
 1분 어쩌고 하더니, 오히려 본인이 당하는 데 딱 1분 걸렸겠네.
 그러면서 공중으로는 왜 뛰어오른 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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