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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허기

2012.01.27 23:3301.27

허기



1
 
 대학생이었다.
 2학년 2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른 학과 전공과목을 듣고 있었다.
 문예창작학과 수업이었다.
 “아우, 내가 왜 이 수업을 신청했지.” 이러면서 듣고 있었다.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는 뭐가 되냐?”
 내 수강 신청서를 그대로 베낀 친구다.
 “그러게 너는 베낄 게 없어서 남의 수강 신청서를 베끼냐? 그런 건 제발 고민 좀 하고 신청해라.”
 “너도 고민 안 했잖아. 그냥 강의 제목 보고 대충 고른 거잖아.”
 “아주 짧게 고민은 했지. 0.05초의 고민은 했다. 아주 안 한 건 아니다.”
 “그건 안 한 거다.”
 친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고민을 안 했다.
 강의 제목은 ‘예술과 정신분석학’이었다.
 한창 프로이트 얘기가 나오고, 무의식이라는 단어만 벌써 수 백 번 들렸다.
 도대체 무의식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수업 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그 단어를 수백 번 들먹인단 말인가. 저 선생은 무의식적으로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무의식을 한번 파헤쳐봐야 한다. 그럼 뭔가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저 선생, 얼굴이 너무 창백해. 소문에 의하면 꽤나 실력 있는 강사라고 하는데, 실력은 그렇다 치고 어쩜 저렇게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지 몰라.
 수업 중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리가 들렸다.
 거인이 사용하는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물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는 뜻이다.
 깜짝 놀랐다.
 나도 놀랐고, 친구도 놀랐고, 문창과 학생들도 놀랐고, 선생도 놀랐다.
 아니, 분명히 다들 놀랐을 것이다. 그렇게 물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안 놀랄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다들 안 놀란 척하지.
 이상했다.
 선생은 의식적으로 무의식 얘기에 집중했고, 문창과 학생들도 수업에 집중하는 척했다. 심지어 친구는 필기까지 하고 있었다. 저게 받아적을 얘기는 아니지 않냐.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허리를 잔뜩 굽히고 있지.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턱이 책상 위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30분 동안 물소리는 두 번이나 더 교실에 울려퍼졌다.
 “자, 10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합시다. 그런데 요즘은 초코바가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저 때는 그런 게 없어서 좀 고생했습니다만.”
 난데없이 웬 초코바 얘기냐.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꽤 비싼 무슨 전집을 샀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곤충 나오는 전집인가, 동화책 전집인가, 아,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아무튼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전집을 샀다고 자랑했다. 당연히 나도 아빠한테 사달라고 졸랐다. 무려 3일을 단식투쟁했다. 이틀이었던가. 아, 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아무튼 중요한 건 어린 나이에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거다. 그게 효과적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 이미 깨달았다. 그리하여 아빠는 이틀인가 사흘 째 되던 날 밤에 그 전집을 사들고 왔다. 그러고는 한 마디 하셨지.
 “자, 이제 그만 밥 먹자.”
 그 말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밥상으로 달려가 밥을 먹었다. 정말 거지새끼처럼 마구 마구 집어먹었다. 아예 입안으로 쑤셔넣었다.
 이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당연히 전집은 읽지도 않았다. 아빠가 사오자마자 한 10분 후루룩 훑어봤나, 그러고는 끝이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전집이었는지 기억이 안 날 수밖에 없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기껏 전집 사줬더니 쳐다도 안 본다며, 며칠 뒤에 아빠한테 참 많이 맞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운 적도 없었다.
 그때 다짐했다. 복수하자. 다음 날 나는 친구 상표네 집으로 갔다. 그리고 상표한테 전집 자랑을 엄청나게 했다.
 아마 매를 부르는 그 전집, 우리 동네에서 꽤 많이 팔렸을 것이다.
 이야기가 샜다.
 그러니까 아빠의 밥 먹자는 소리에 빛과 같은 속도로 밥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지금, 문창과 선생의 10분 휴식이라는 말에 나는 어린 시절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했다. 사라진 능력인 줄 알았는데, 그 능력은 마치 무의식처럼 내 밑바닥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나 보다. 빛과 같은 속도로 학교 안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때와 비교해도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시간은 오전 11시 33분.
 3분이나 걸렸네. 빛과 같은 속도는 개뿔. 이제 나오지 마라. 그냥 계속 웅크리고 있어.
 편의점에 들어와서 한동안 숨을 헐떡였다. 정말 숨이 차도 너무 찼다. 그때 깨달았다. 마라톤 선수들은 정말 힘들 거야.
 숨을 쉬어도 쉬어도 폐 속에 산소가 부족했다. 편의점 안에 있는 공기를 나 혼자 다 독차지하고 싶었다. 한 번에 스읍 하고 다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러니 너희들 다 나가! 숨 쉬지 말고 다 나가! 속으로 이렇게 막 외쳤다. 덕분에 더 숨이 찼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왜 편의점에 온 거야.
 교실에서 들렸던 그 큰 물소리. 물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면 소리가 안 날 것 같아서.
 맞다. 내 배에서 난 소리였다. 단순히 꼬르륵, 꾸르륵, 이런 게 아니었다. 고여 있던 1톤 분량의 물이 갑자기 쏟아질 때 나는 소리였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뱃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지만, 그래서 흡사 천둥소리와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래서 콰가강이 좀더 비슷한 거 아니냐 생각하겠지만, 그 콰가강에 콸콸이 섞여 있어서, 천둥소리보다는 웅장한 폭포소리에 좀더 가까웠다.
 내 뱃속에는 폭포가 있다. 그럼 뭐냐, 마지 폭포냐.
 수업 받는 1시간 30분 동안 그 큰 물소리가 세 번이나 났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처음 물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모든 신경은 배에 집중됐다. 말 그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연결된 모든 감각들이 배에 집중됐다. 그래서 또 한 번 소리가 날 것 같은 반응을 감지하면 당장에 목숨이라도 끊을 작정이었다. 그만큼 비장했다. 그러니까 그만큼 물소리가 창피했다. 졸졸졸 시냇물도 아니고 콸콸콸 거대 폭포라니.
 어머, 이게 무슨 소리니. 쟤 삼백 일 굶은 거 아니니. 왜 이렇게 크니. 위장 끝에 확성기를 달았나 봐.
 삼백 일 굶으면 죽거든.
 아무튼 그런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태어나서 그런 창피는 처음이었다. 폭포수와 같은 거대한 꼬르륵이라니.
 그리고 처음 소리가 난 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반응을 감지했다.
 명치보다 조금 더 아랫부분이었다. 순간 거기가 꽉 막혔다. 호흡을 해도 공기가 더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거기에서 막혀버렸다. 그래서 약간의 호흡곤란도 겪었다. 제대로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배에 힘을 줬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곧이어 콰르륵 콰르륵.
 결국 빛과 같은 속도로 편의점에 왔지만, 벌써 몇 바퀴 째 편의점 안을 뱅뱅 맴돌고만 있었다.
 왜 온 거야 도대체. 내가 도대체 편의점에 왜 온 거야.
 “마지야, 너 너무 빨라. 완전 총알 탄 사나이. 순간 반응 속도 0.00001초였어. 네가 휙 나가는데, 순간적으로 주위에 바람이 불 정도였어. 내 머리카락이 다 휘날렸다고. 당연히 네가 앉았던 의자는 넘어졌지. 정말 대단해.”
 의자는 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넘어졌겠지. 그게 어디 바람 때문이었겠냐.
 “넌 또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냐?”
 “궁금하잖아. 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데,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냐. 너 같으면 내가 갑자기 휙 뛰쳐나가면 안 궁금하겠냐? 그래서 쫓아온 거다.”
 궁금할 수는 있겠구나. 그럼 나 같았어도 쫓아왔을 테고.
 그건 그렇다 치고.
 “정희야, 너 아까 수업 중에 무슨 소리 못 들었냐? 폭포소리 같은 거.”
 “들었어. 빵이나 초코바 사자. 너 삼각 김밥은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음료수도 좀 사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당연하지. 배에서 폭포소리가 나면 둘 중 하나 아니겠냐. 똥이 마렵거나, 아니면 배가 고프거나.”
 “정희야, 너와 난 남녀 사이란 걸 잊지 말았으면 싶다. 남자 앞에서 똥이 뭐냐. 제발 나를 좀 어렵게 생각해라.”
 “그런데 마지 네가 편의점으로 가잖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화장실이었으면 내가 못 들어갔을 테니까. 대장이 아니라 위장이라서 다행이다.”
 “다행인 거냐.”
 그러고 보니 똥이 마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설사 쪽. 그래도 그게 좀 달랐는데. 꾸르륵 하고는 좀 차이가 있었는데.
 “그런데 왜 다들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크게 소리가 났는데 아무도 나를 힐끔 쳐다보지 않았어. 선생도 아무 소리 못 들은 것처럼 강의를 계속 이어나갔고. 심지어 정희 너도 나를 안 쳐다봤어. 정희야, 너, 그거 아니? 직접 말하지 않아도, 쳐다보지 않아도, 내가 동정 받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어. 내가 좀 전에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기분 굉장히 안 좋더라. 동정 받고 있는 기분 말이야.”
 “동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도 마지 너 동정하지 않았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럼 왜 안 쳐다봤어? 왜 다들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행동했지! 그런 행동이 이미 동정이야. ‘쟤 밥을 못 먹고 왔나 봐. 그런데 도대체 몇 끼를 굶어야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거니. 불쌍해. 그것도 3연속으로 났잖아. 정말 불쌍해.’ 그런 생각들을 했겠지. 그래서 쳐다보지 못 했겠지. 쳐다보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내가 만약 수업 시간에 큰 소리로 잡담을 했어 봐. 그때도 선생이나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휴대폰이 막 울려. 그래도 나는 전화를 안 받지. 그때도 다들 가만히 있었을까. 내게 눈치를 줬겠지. 선생은 한 마디 했을 테고.”
 “그거랑은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 네 배에서 소리가 났다고 해서 사람들이 너에게 눈치를 줄 수는 없잖아. 네가 수업에 방해를 준 건 아니니까. 네가 일부러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한 게 아니잖아. 그건 소음이 아니었다고. 그냥 생리적인 반응이었을 뿐이지. 방귀와 같아. 누구도 그걸 탓할 수는 없잖아.”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동정하지는 않아.”
 “그냥 예를 든 것뿐이야.”
 “정희야, 너 왜 편의점까지 날 쫓아왔어?”
 “그거야 뭐, 아까도 얘기했잖아. 네가 갑자기 휙 나가기에 궁금해서 쫓아온 거지.”
 “그럼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건 뭐야? 뭘 그렇게 많이 샀지?”
 “어, 이거, 그냥 너랑 같이 먹으려고.”
 “내가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니?”
 정희는 말이 없었다.
 착한 정희. 오로지 내 걱정만 해주는 멍청하고 바보 같은 정희. 학과 동기들이, 선배들이, 후배들이 그렇게나 쫓아다녀도, 심지어 타과 학생들이 쑥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선물을 줘도, 정희는 결코 그들 앞에서 웃지 않았다.
 “커피나 한 잔 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같이 밥 먹자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선배가 술 한잔 사주겠다는데, 잠깐 시간 좀 내주면 되지 않나?”
 동기나 선배나 후배들의 그런 말에 정희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요” 따위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선 정희의 얼굴. 싸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그냥 휙 돌아선다. 내가 아는 한, 정희가 상대에게 보이는 최대한의 경멸이다. 자존심 강한 상대는 간혹 정희의 무표정과 행동 때문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휙 돌아선 정희의 어깨를 낚아챈다.
 “내 말이 그렇게 기분 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희는 상대방의 따귀를 때린다.
 그런 정희다.
 오로지 나에게만 한없이 착하게 구는 정희.
 “정희야, 너도 내가 배고프다고 생각한 거니? 그래서 그거 나 주려고 고른 거니?”
 “미안,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왜 미안하다는 거지.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면서 왜 미안하다는 거야?”
 “이거 그냥 진열대에 다시 놔둘게. 대신 휴게실 가서 커피나 한 잔씩 마시자. 그러고 얼른 수업 들어가자.”
 “정희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나 진짜 배 안 고파.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배에서 소리가 났어.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래서 싫어. 난 배가 안 고파. 그런데 내가 동정을 받았어. 배도 안 고픈데. 도대체 왜 내가 편의점에 온 걸까.”
 “그냥 배가 안 고파도 속이 허할 수 있지 않을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일단 초코바라도 몇 개 사가지고 가자.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나중에 내가 다 먹을게. 그러면 되잖아. 참, 그러고 보니까 아까 선생님도 초코바 어쩌고 하지 않았나?”
 “글쎄, 난 잘 못 들었는데. 그건 그렇고, 정희 너 초콜릿 싫어하잖아. 살찐다고.”
 “허우, 그거 농담이야. 나 원래 초콜릿 먹어도 살 안 쪄. 살 안 찌는 타입이야. 타고 난 거지. 밥 세 그릇 먹어도 살 안 쪄. 몸매 하나는 내가 참 신의 축복을 받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공부도 잘하는구나. 여러 모로 신의 축복을 받았네. 신은 참 불공평하시다. 나한테 너무 많은 걸 주시고.”
 “게다가 넌 얼굴도 예쁘잖아.”
 “알아. 내가 얼굴이 예뻐. 뭐니 이거, 그럼 혹시 나, 완벽한 거니?”
 “초코바는 네가 계산해라. 난 먼저 교실에 가 있을란다. 선생과 학생들 곁이 그립다. 그들은 날 동정한 게 맞아. 정희 너와 함께 있는 나를 동정한 게 맞아. 아픈 너와 함께 있는 나를 얼마나 불행한 놈이라고 생각할까. 그래도 지금은 그들의 동정을 받고 싶다. 위로받고 싶어.”
 정희는 내 말에 눈을 잔뜩 흘겼다. 그러면서 얼른 초코바를 몇 개 더 집어 계산한 뒤 쏜살같이 내 뒤를 쫓아왔다.
 교실로 가서 나는 자리를 맨 뒤로 옮겼다. 물론 정희도 교실 맨 뒤 내 옆 자리로 왔다.
 그리고 수업 1시간 30분 동안 나는 초코바를 세 개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려면 먹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덕분에 1시간 30분 동안 배에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선생의 강의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모든 신경은 배에 집중해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명치끝이 막히는 순간 초코바를 우적우적 씹어 입안으로 밀어넣으면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명치도 약간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명치끝이 막히면 또 초코바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초코바를 먹는 게 힘들었지만, 소리가 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입 안으로 집어넣은 초코바는 내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이제 1시간 후면 다른 수업을 들어야 한다.
 초코바 덕분에 나는 배가 불렀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겁이 났다. 먹지 않으면 또 배에서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 비교적 양이 적은 메뉴를 골랐다.
 아직도 내 목에는 초코바가 들어 있었다. 밥이 입 안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먹었다. 그냥 밀어넣었다. 마치 밥을 입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수저로 입안에 있는 밥을 목구멍 안으로 쑤셔넣는 기분이었다.
 비참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밥을 다 먹었다.
 그때까지 정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내 눈을 보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비참했다.
 식당에서 나와 다시 편의점으로 갔다. 그리고 초코바 세 개를 샀다. 이번에는 내 돈으로 샀다.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수중에 초코바에 없으면 불안했다. 배에서 나는 소리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실제로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소리가 나니 배가 고픈 거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상태. 이보다 더 잔인한 형벌은 없다.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지내면 상관없다. 하지만 학생인 나에게 이보다 더 잔인한 형벌은 없다.
 밥을 먹고 나서 잠깐 쉬었다가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전공 수업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정희와 나는 맨 뒷자리로 갔다.
 전공 수업만큼은 평소 늘 앞자리에 앉았던 터라, 다른 아이들이 조금 의아해했다.
 “너희 웬일이냐. 너희 앉으라고 일부러 앞자리 비워둔 건데.”
 “고마워. 그런데 오늘은 내가 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뒤에 앉으려고. 그리고 당분간은 쭉 뒤에 앉아야 할 것 같아. 아무튼 신경 써줘서 고맙다.”
 그리고 이번에도 수업 1시간 30분 동안 나는 초코바를 세 개 먹었다. 쉬는 시간에는 편의점에도 갔다. 아예 초코바 한 박스를 사기 위해서.
 “초코바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초콜릿도 은근 중독성 있다고 하던데. 손님이 그런 쪽이신가 봐요. 왠지 조금 특이해 보이세요. 초코바 중독자. 뭔가 예술적이지 않나요. 저도 걸려보고 싶습니다.”
 편의점 점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번 걸려봐라. 초코바 중독증. 침이 초콜릿이야. 침 삼킬 때 마다 엄청 달콤하다. 밥 먹을 땐 반찬으로 초코바가 생각날 정도지. 밥 한 숟가락 먹고 초코바 한 입 깨물고. 국 대신 당연히 보글보글 끓는 초콜릿. 수저로 떠서 후후 분 다음 입안으로 쏙. 환상적이지. 밥도둑이 따로 없다. 초코바가 밥도둑이지.
 초코바 중독자라, 하마터면 점원의 입에 초코바 세 개를 쑤셔넣을 뻔했다. 충동을 참느라 힘들었다.
 “마지야, 오늘은 피곤하면 그냥 도서관 들르지 말고 바로 집에 갈래? 택시 타고 가는 건 어때? 내가 택시 잡아줄게.”
 오후 4시.
 학교 수업은 모두 끝났다.
 수업이 끝난 뒤 정희와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서관에 들렀다.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그러다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학교를 나왔다. 그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희 말대로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오늘은 그냥 집에 가야겠다. 하루 종일 너무 먹어서 피곤하다. 그렇다고 택시까지 탈 필요는 없고, 그냥 전철 타고 가지 뭐. 정희 너는 어떡할래? 도서관 들렀다 갈래?”
 “아니, 나도 그냥 오늘은 집에 갈래. 대신 마지 너 바래다주고 갈게. 그게 마음이 편해.”
 “내가 무슨 애냐. 넌 그냥 도서관 갔다 가든지 아니면 바로 집으로 가라. 바래다주기는 무슨.”
 “내 행동까지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는 없다. 난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게 오늘부터 정한 내 인생관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뭔가 자신감이 넘쳐보이지 않냐. 이거, 웬만큼 용기 있는 사람 아니면 실천 못 한다. 되게 어려운 거야.”
 “굳이 그렇게 가슴까지 쫙 펴면서 말할 필요는 없다. 가슴 없는 거 더 티나. 그래서 오히려 자신감이 더 없어 보여. 여자는 좀 가슴이 있어야 자신감도 있어 보이지. 뭔가 당당해 보이잖냐.”
 내 말에 정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윽, 그 말이 그렇게 상처였나. 그냥 농담한 건데.
 정희 너 가슴 커.
 “의사 말대로 조금 더 넣을 걸 그랬나. 너무 크면 마지 네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렇게 심하게 키우지는 않았는데. 마지야, 그럼 조금 더 넣을까? 이번에는 마지 네가 구체적으로 얘기해 줬으면 싶다. 어느 정도였으면 좋겠다, 하고 말이지. 아니면 바람 약간 빠진 풍선이라도 들고 와서, 이 정도면 좋겠네, 하고 말이지.”
 그래서 고개를 푹 숙였던 거냐. 도대체 넣긴 뭘 넣어. 바람 빠진 풍선은 또 뭐냐고. 침대에 누워도 원형 그대로인 거냐, 네 가슴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정희.
 정희는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면서 걸었다. 그런데도 걸음이 나보다 빨랐다.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정희는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면서 걷는 연습을 했을까. 도대체 왜 그런 연습을 한 걸까. 써먹을 때가 있기는 한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정희.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정희가 어느새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야, 학생이 무슨 택시냐! 그냥 전철 타고 가자니까. 기사 아저씨, 죄송해요. 실은 이 아이, 가슴 수술에 실패해서 지금 패닉 상태에 빠졌어요. 어디로든 빨리 도망치려고만 해요. 그깟 가슴 수술에 실패했다고 해서 현실을 피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가슴 수술에 실패한 여자, 그래도 제가 기꺼이 받아들여야죠. 여자의 생명은 가슴이지만, 여자의 자신감은 가슴에서 나오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전생에 지은 죄가 있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정희가 내 목덜미를 휙 잡아끌었다.
 “나 가슴 수술 안 했어! 빨리 전철역으로 가자. 창피해.”
 그리하여 우리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택시기사와 택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 놔. 같이 전철역으로 갈 테니까, 제발 목 좀 놔라. 사람들이 아직도 우릴 쳐다보잖아. 이젠 내가 창피하다고.”
 정희는 나를 이 상태로 전철역까지 끌고 갈 생각인가 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애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정희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애초에 나는 혼자 집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연히 정희와 함께 가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내가 사정까지 해가면서.
 뭐지, 이 찜찜한 기분은. 혹시 내가 또 정희한테 당한 건가.
 너, 설마 택시 잡은 것까지 다 쇼였냐. 애초에 택시 타고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거냐. 내가 택시 기사에게 가슴 얘기까지 할 거라는 것도 미리 계산해 둔 거였냐.
 너, 무서워.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너는 없는 가슴까지 파는 거냐.
 그리하여 어쨌든 우리는 함께 전철을 탔다.
 정희와 나는 집이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정희는 이렇게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많다. 그래서 함께 전철 타는 게 낯설지는 않았다.
 왠지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 하지만 상대가 정희니까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 상대가 정희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정희.
 “아무리 친구라지만, 그래도 이건 확실히 말해둬야 할 것 같다. 정희야, 나 이래봬도 남자야. 네가 가끔 그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말이지, 내가 실은 남자라고.”
 “알아. 너 남자야. 난 여자고. 가슴이 없어서 가끔 사람들이 날 남자로 착각해서 탈이지만.”
 그 정도였냐. 그래서 나도 가끔 네가 남자라고 착각했던 거였구나.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어.
 “그러니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남자잖냐. 비록 친구 사이라지만 그래도 내가 남잔데, 왜 매번 정희 네가 나를 바래다주는 거냐. 집에는 나 혼자 갈 수 있어. 전혀 위험하지 않아. 이렇게 나를 안 바래다줘도 된다고. 오히려 집까지 바래다줘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 안 드냐? 가끔은 내가 정희 너 집까지 바래다줄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정희 너는 나를 안 바래다줘도 돼. 부탁이다. 나 혼자 가게 해줘.”
 “마지야, 친구 사이고 연인 사이고를 떠나서 말이다, 상대방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 있잖냐, 남자 몫이 아니야. 그 정의부터가 틀린 거야. 남자 몫이 아니라, 더 강한 자의 몫이야. 물론 남자는 대부분 여자보다 강하지. 그래서 남녀 관계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주려는 거고. 하지만 말이다 마지야, 반드시 그런 건 아니잖냐. 여자가 더 강한 경우도 있다. 흔하진 않지만 분명히 있다. 우리처럼 말이지. 그래서 내가 너를 가끔 집까지 바래다주는 거다. 내가 더 강하니까. 네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니까.”
 정희는 이런 터무니없고 전혀 근거도 없는 얘기를 했다. 자기가 나보다 강하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 건지 모르겠다. 하마터면 욱해서 싸움을 걸 뻔했다. 정식으로 한번 붙자고 결투 신청을 할 뻔했다. 하지만 여자에게 결투 신청을 하는 것도 신사답지 않은 행동 같아서 참았다. 무서워서, 혹시라도 질까 봐, 정말로 정희가 나보다 강하다는 게 밝혀질까 봐 참은 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부터 정희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 그냥 그것대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매번 “집엔 나 혼자 갈 수 있어!” 하고 외쳐보기는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희 너를 사랑해!”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른다.
 난, 나보다 강한 여자를 좋아했던 건가. 이번 정희 생일에는 몸에 촥촥 감기는 멋진 가죽 채찍을 선물로. 고양이 가면은 증정이었던가 옵션이었던가!
 집까지는 전철로 열한 정거장이다. 삼사십 분 거리다.      
 낮인데도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출퇴근 시간대처럼 꽉 들어찬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이동하려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죄송합니다’ 소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 많은 전철 안에서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수업 시간 내내 온 신경을 배에 쏟고 있었다. 소리가 날 타이밍을 감지하려고 단 1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쉬지 않고 여섯 시간 동안을 한 가지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게 이토록 피곤한 건 줄 처음 알았다.
 그 후유증 탓인지 전철 안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옆에 정희가 있었지만, 정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정희가 말을 걸어도 그냥 고개만 까딱까딱 했을 뿐이다. 사실 정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감을 못 잡았다. 그냥 멍청하게 전철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더 이상 뇌에 무리를 줬다가는, 뇌에 있는 신경 한두 가닥쯤은 툭하고 끊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지경이었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내 배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겨우 세 정거장을 지났을 때였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콰르륵, 콰르륵.
 장마로 한껏 불어난 물이 한꺼번에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내장까지 다 쓸려가는 느낌까지 받았다.
 나는 허겁지겁 가방에서 초코바를 꺼냈다.
 콰르륵, 콰르륵.
 마음이 급한 탓에 초코바 껍질을 제대로 벗길 수가 없었다.
 정희가 내 손에 있던 초코바를 빼앗아 대신 껍질을 벗겨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 다시 허겁지겁 입안으로 쑤셔넣었다. 씹지도 않고 초코바 한 개를 입안으로 다 집어넣었다. 그 다음 우걱우걱 몇 번 씹고 나서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며 억지로 삼켰다.
 다시 초코바 한 개를 더 꺼냈다. 이번에는 차분하게 껍질을 벗겼다. 그러고는 크게 한 입 깨물었다.
 후,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교실에 있던 학생들과는 달랐다. 학생들은 소리가 났을 때 마치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선생을 쳐다보거나 필기를 하거나 졸거나.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말의 리듬조차 흐트러뜨리지 않고 강의를 이어나갔다. 정희 역시 아무 소리 못 들은 듯 행동했다. 그게 함께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건 분명 배려였다. 내가 창피해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 모두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두 번 다시 나와 마주칠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나한테 배려 따위를 해줄 리 없다.
 몇몇 사람이 나를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나한테 들리지 않도록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렸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걸 듣지 못한다는 거, 그것도 바로 옆에서 내 얘기를 하는데 듣지 못한다는 거, 이처럼 잔인한 폭력이 또 있을까 싶었다. 당장 곁으로 가 그들의 입을 찢고, 귀를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똑같이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고통을 느꼈다.
 “방금 그 소린 뭘까. 설마 말로만 듣던 인간 폭탄인가. 몸속에 폭탄을 지닌 채 공공장소에서 쾅. 그러면 자신도 목숨을 잃는 건데, 그러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건데, 그게 뭐지.”
 “밥이지. 밥을 달라는 거지. 몸속에 꼬르륵 소리가 나는 장치를 달고, 전철역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 마치 폭탄을 터뜨리듯 꼬르륵 소리를 꽝꽝 터뜨리면서 구걸을 하는 거지. 신종 구걸 방법인가 봐. 그런데 별로 효과는 없다. 꼬르륵이 전혀 사실적이지가 않아. 과장이 심해. 저건 완전 삼백 일 굶은 소린데, 그래서 오히려 더 굶겨보고 싶을 정도야.”
 그러니까 삼백 일 굶으면 죽는다니까.
 “저 학생은 병원에 좀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정도로 배에서 소리가 날 정도면 몸속에 회충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회충이면 그냥 병원 갈 필요 없이 회충약 먹으면 되나. 한 열 알은 먹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과민성 대장염 뭐 그런 거 아닐까. 행색을 보니 밥 굶을 정도로 가난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하긴 요즘 저 정도 소리 날 만큼 밥 굶는 사람은 없겠지. 아마 무슨 병 같은데, 그래도 그게 소리가 나는 병이니 참 본인도 난처하겠어. 우리가 다 난처할 정도니 말이야.”
 “배가, 저 사람 배가 울부짖었어. 저건 말 그대로 몸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슬픔이야. 그 슬픔이 스스로 울부짖은 거지. 하지만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슬프다는 걸 몰라. 의식은 지금 저 사람의 슬픔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어. 그래도 배는 알고 있지. 저 사람의 진짜 슬픔을 말이야. 불쌍하군. 도대체 저 사람이 갖고 있는 슬픔은 뭘까. 뭔데 의식은 저 사람의 슬픔을 잊으려고 하고, 배는 그걸 잊지 못해서 울부짖는 걸까. 만일 저 사람이 저 슬픔을 떠올리기라도 하면 아마 그 충격은 엄청날 거야. 어쩌면 간단히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지. 배는 그걸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스스로 울부짖으며 슬픔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거지. 인체의 신비라고. 놀라워.”    
 이런 얘기들이 오고갔을까!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기에 나는 혼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 폭탄이니 회충이니 배가 울부짖는다느니 하는 약간이나마 고민 섞인 얘기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는 얘기들. 그러니까 진심이 담긴 얘기들. 혹은 우스갯소리들.
 “뭐니 저거, 배 찢어지겠다.”
 “배가 성격이 좀 사납네. 며칠 굶겼다간 아주 사람 잡겠다, 야.”
 “위장이 열 갠가 봐. 소리 장난 아니다.”
 “저 사람 입은 오로지 배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역할만 하는구나. 슬프다. 아, 슬픈 입.”
 “닥쳐! 하고 배를 한대 갈겨주고 싶지 않니? 그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 소리였어.”
 “저 정도로 배가 고픈가. 돈 주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네.”
 “옆에 있는 여잔 뭐니? 귀머거린가. 가까이에서 저렇게 큰소리를 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 사람이 저럴 수는 없지.”
 “그러게 말이야. 저 여자가 더 이상하다. 남자가 저렇게 초코바를 게걸스럽게 먹는데도 못 본 척하고 있어. 저 둘 정말 수상한 커플이야.”
 “혹시 남자가 시한부 인생 아닐까. 배에서 나는 저 소리가 멈추는 날, 남자는 죽는 거지. 그래서 저 여자는 남자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아무 반응도 없는 거고. 오히려 배에서 나는 저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우리들은 이해 못 할 사랑이지. 시한부 인생인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니. 아는 순간 바로 이별이지. 하지만 저 둘은 아직 젊어. 학생 같다. 충분히 가능한 사랑이야. 아직 사랑을 모르거든.”
 “단순히 남자의 거시기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어. 저 여자, 꽤 밝힐 것같이 생겼어. 거시기가 큰데, 그까짓 소리가 문제겠니. 어차피 그 큰 거시기에도 싫증이 나면 차버릴 텐데. 저 여자, 누구든 금방 차버릴 것같이 생겼어.”
 결국 이야기의 흐름은 그런 쪽으로 가는 거냐.
 나는 옆에 있는 여자의 멱살을 잡았다.
 “난 시한부 인생을 살지도 않고, 거시기가 크지도 않아! 정희는 귀머거리도 아니고, 밝히는 여자도 아니야! 제발 그렇게 멋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그리고 여전히 여자의 멱살을 움켜쥔 채 주변을 향해 외쳤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 배가 고파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게 아니야! 그냥 먹어도 먹어도 소리가 날 뿐이야!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왜 소리가 나는지 나도 이유를 몰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먹어야 돼! 그런데 신기한 건,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들어간다는 거야! 음식이 식도까지 차오른 느낌이 들어도, 계속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 배가 안 불러! 하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아!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씨팔!”
 내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를 때마다 멱살 잡힌 여자의 목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순간 내 뺨이 옆으로 힘차게 돌아갔다. 동시에 불이 날 것처럼 뺨이 화끈거렸다. 
 “마지야, 도대체 너 왜 그래! 저 사람들이 뭘 어쨌는데 그러냐고! 저 사람들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제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혼자 흥분해서 날뛰지 마! 그 손 놓고 어서 그 여자 분에게 사과부터 드려! 제발 부탁이야, 사람들한테 사과드려. 그리고 내리자. 때려서 미안하고.”
 정희가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흘리고 있다.
 뚝, 뚝, 뚝, 뚝, 뚝…….
 전철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로 흘러간다. 흘러가는 정희의 눈물을 본다.
 전철 바닥을 따라 흐르는 정희의 눈물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옆에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나를 외면했다.
 끌끌,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정신 나간 놈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급기야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옆 칸으로 이동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전철 플랫폼에 서서 정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흘리는 정희를 보며, 나는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하나 꺼내 먹었다.
 미안해, 정희야. 네 앞에서 미친놈처럼 행동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방심하지 않을게. 항상 배에 신경을 쓰고 있을게. 너를 창피하게 만들지 않을게. 정희야, 끝까지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냥 내 바람이야.
 “정희야, 화났어? 미안하다.”
 “화 안 났어. 뺨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나, 온힘을 다해서 때렸거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몰라. 나 아무래도 능력자 같아. 문득 나도 모르는 힘이 튀어나올 때가 있어. 필요할 때 그 힘을 내 마음대로 끄집어내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까진 그 방법을 못 찾겠어. 찾아야 하는데.”
 “정희야,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러다 정희 너 사회에서 격리된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너를 잊지 않을 테지만. 면회 허락해달라고 발버둥칠 거야. 나 역시 격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그러니 사회와 격리된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내가 있잖아. 우린 격리 커플이다.
 
 한 학기가 참 길었다. 3년, 혹은 30년은 걸린 것 같았다.
 여전히 밥을 배불리 먹어도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래서 수업 시간마다 초코바를 먹었다. 물론 전철 안에서도 줄곧 초코바를 먹었다.
 줄곧 초코바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가끔은 수업을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정희 때문에 빠질 수가 없었다. 보호자처럼 나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학교에 오지 않으면 정희 본인이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항상 내 곁에 있어달라고 빌었던 걸 후회했다. 이 정도로 끈질길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정희는 격리되지도 않았다. 능력자 어쩌고 하는 얘기 자체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격리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였을까. 그 말 한 것도 역시 후회했다.
 정희는 초코바 먹느라 지친 나를 끌고 가끔 영화관에도 갔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정희가 고르는 영화의 기준은 딱 세 가지였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내용 대부분이 시끄러운 음악으로 이루어진 영화, 아니면 관객이 우리 둘밖에 없을 것 같은 독립영화. 우리 둘밖에 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면 우린 그냥 나왔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줄곧 초코바를 먹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밥을 단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매일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틈틈이 초코바도 먹었다. 하루에 많게는 20개 이상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살이 전혀 찌찌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말라갔다. 특히 눈 주위가 거멓게 변해갔다. 그렇게 음식을 집어넣어도 내 배는 만족감을 못 느끼는 걸까. 불가사의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 선생이 휴강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학기 수업 모두를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업 중에 내가 집중한 거라고는 딱 한 가지, 배였다. 선생이 하는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초코바 먹고 배에 집중하고, 초코바 먹고 배에 집중하고, 초코바 먹고 배에 집중하고. 그게 다였다. 그렇게 따지면 역시나 나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말시험. 당연히 죄다 망쳤다. 시험 역시 나는 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희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시험은 쳤다. 하지만 나는 시험지에 적힌 지문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지문을 읽다가 자칫 방심하면 소리가 날 게 뻔했다. 그러면 학생들이 동요하게 된다. 자고로 시험은 정숙하게. 나에게 시험 시간은 정말이지 최악의 지옥이었다. 지옥 중에 지옥. 그래서 모든 시험에 나는 백지를 제출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으니, 최소한 F학점은 면하리라. 정희의 의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방학.
 3년, 혹은 30년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방학을 맞았다. 안 올 줄 알았다.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온다.
 
 방학하자마자 정희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대형 병원 내과 진료실.
 진료실까지 함께 들어가겠다는 정희를 복도 의자에 억지로 앉혔다.
 “혼자 들어갈 수 있어. 정희 너는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라. 너 때문에 내가 더 겁난다. 무슨 큰병에라도 걸린 것 같잖냐. 너 자꾸 그렇게 호들갑 떨면 나 그냥 간다.”
 “호들갑 떠는 게 아니고, 너 혼자 들어가면 무서워할까 봐 그러지. 무서워서 의사 선생님 앞에서 벌벌 떨면 안 되잖아. 네 증상을 정확히 얘기해야 하는데, 벌벌 떠느라 아무 소리 못 하면 어떻게 하냐.”
 “안 떨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는 담당 의사에게 내 증상을 얘기했다.
 의사는 나를 진료실 침대에 누우라고 한 뒤, 손으로 배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손에 힘을 줘 배를 꾹꾹 누르기도 했다.
 “별 증상은 없어 보입니다. 배에 복수가 찬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같은 병원에서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웩웩거리면서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수치심을 참아가며 대장 내시경 검사도 받았다. 뭐, 그건 그것대로 그냥 넘어간다 치자. 나는 분명 어딘가 이상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먹어도 먹어도 배에서 소리가 나겠는가. 왜 먹어도 먹어도 오히려 살이 빠지겠는가. 이건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어딘가 고장이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글쎄요, 검사 결과로 봐서는 위장하고 대장 모두 아주 깨끗합니다. 지극히 건강한 편에 속합니다. 제가 따로 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콰르륵, 콰르륵.
 담당 의사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내 배에서는 소리가 났다.
 “그냥 남들보다 소화 기능이 뛰어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소화 기능이 왕성해질 수가 있냐고요. 그게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한마디로 자신은 왜 내 배에서 소리가 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전혀 모르겠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담당 의사한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내 배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대신 화를 낸 건 정희였다.
 “뭐야, 저 의사! 돌팔이 아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비싼 내시경 검사는 왜 받으라고 한 거야! 그것도 두 개씩이나! 완전 돈이나 벌겠다는 심보 아니야! 가서 그 돈 돌려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진정해라. 의사라고 뭐 다 알겠냐. 모르는 것도 있겠지.”
 “넌 참 태평해서 좋겠다. 너 괴롭잖아. 아주 괴로워 미치겠잖아.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넌 화도 안 나냐고! 주머니에 그렇게 초코바를 잔뜩 넣고 다니는데 넌 화도 안 나냐고! 화나잖아! 너도 화나잖아! 그러니까 검사를 받았으면 뭔가 처방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왜 모른다는 거야, 왜!”
 병원 복도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정희를 억지로 달래서 끌고 나왔다.
 정희야, 이건 화낼 문제가 아니야. 화도 뭔가 희망이 보여야 낼 거 아니냐. 그런데 전혀 희망이 안 보여.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이건 병 같지가 않단 말이지. 어딘가 고장이 난 건 분명한데 병 같지가 않단 말이지. 세상에 이런 병 있다는 소리 못 들었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니, 세상에 이런 병이 어디에 있어. 그렇다고 실제로 배가 고픈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계속 먹어야 돼. 세상에 이런 병이 어디에 있냐고. 난 화도 안 나. 그냥 미치거나 죽고 싶을 뿐이지.
 차라리 화라도 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는 정말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우스웠다. 배에서 소리 나는 것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다니. 죽음을 생각할 정도라면, 그 이유가 조금은 그럴 듯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나는 고작 콰르륵이 이유라니.
 그러면서 나는 배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콰르륵이 아니지. 그만큼 넌 끔찍해. 너 때문에 자살을 꿈꿀 만큼 끔찍해. 타인은 비웃겠지. 고작 콰르륵 때문에 죽은 거야! 하고 비웃겠지. 그래서 끔찍한 거야. 너 때문에 나는 살아서도 비웃음 당하고 죽어서도 비웃음 당해. 그러니 어떻게 끔찍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어떻게 네가 끔찍하지 않을 수가 있어! 넌 그만큼 끔찍한 녀석이야! 
 “마지 너 무슨 생각해? 혹시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무슨 이상한 생각?”
 “이참에 학교 그만 둘까, 그런 생각! 그리고 그냥 집에만 틀어박혀 지낼까, 그런 생각!”
 “그거 괜찮겠네. 학교 그만 두고 집에서만 지내면 되겠다. 그럼 배에서 소리가 나도 상관없잖아. 지금보다 더 크게 나도 아무 문제없지.”
 게다가 죽는 것보다 나을 테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다른 병원에 가보자. 빨리 따라와.”
 
 정희와 나는 방학의 절반을 대형 병원 순례하는 데 허비했다. 진료 받고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 받고 담당 의사에게서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병원을 가나 마찬가지였다. 정희가 이 병원에 끌고 가도 결과는 똑같았다. 저 병원에 끌고 가도 마찬가지였다.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돈만 엄청 날린 셈이었다. 그나마 건진 거라고는 위장이든 대장이든 이제 내시경 검사는 초코바 먹는 것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 내시경 검사 받을 때도 더 이상 웩웩 거리지 않았다. 그냥 입 안에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뭔가가 들어오면, 아 이제 시작이구나, 했다. 대장 내시경 검사 받을 때도 항문에 뭔가가 쑥 들어오면, 이놈이 또 들어왔네, 했다. 솔직히 대장 내시경 검사 처음 받았을 때는 구토까지 했다. 뭐가 쑥 들어오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이거로라도 위안을 삼자. 유명한 대형 병원이라는 대형 병원은 다 다녔다. 이제 갈 때가 없다. 내시경 검사에 완벽히 적응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자. 설사 몇 군데 더 남았다고 해도 이제는 지쳤다. 가기가 싫다. 가봐야 결과는 똑같을 테니까. 그러니 제발 정희도 포기하면 좋을 텐데. 그러기를 빌어야 한다.
 “홧,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 정말 바본가 봐. 그렇게 내과 의사들이 병이 아니라고 했으면, 진즉에 알아차렸어야 하잖아. 그런데도 멍청하게 계속 같은 짓만 반복했어. 나 정말 바보야. 바보, 바보, 바보. 마지야, 나 한 번만 바보라고 불러줘.”
 “바보.”
 일단 정희의 부탁이니 들어줬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뭘 알아차렸다는 거야?”
 “일단 따라와. 갈 때가 있어.”
 “정희야, 너 또 설마 다른 병원 가려는 건 아니겠지? 여기에서도 의사한테 똑같은 얘기 들었잖아. 이제 병원 다니는 건 그만 포기하자.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정희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만 더 빨라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정희의 뒤를 따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정희니까.
 정희는 병원 앞 택시 승강장에 대기하고 있던 빈 택시에 올랐다.
 “마지 너 안 타고 뭐해! 빨리 타!”
 “어디 가는지 알아야 탈 거 아니냐. 무작정 그렇게 혼자 결정하고 막 가면 어쩌자는 거냐고.”
 “일단 타기나 해. 가면서 얘기해 줄 테니까.”
 정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였다. 뭔가 확신에 찬 듯한 표정. 왠지 불안했다.
 불안했지만, 일단 택시에 타야 했다. 정희는 택시에서 전혀 내릴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타는 수밖에.
 내가 택시에 타자마자 정희가 택시기사한테 목적지를 말했다.
 목적지를 듣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명치끝이 꽉 막혔다. 신호였다. 얼른 초코바를 한 개 먹었다.
 “정희야, 너 내가 이상해 보이니? 내가 좀 미친 거 같아?”
 “그런 거 아니야.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꼭 미친 사람만 가는 거 아니야. 사실, 세상사람 누구나 가벼운 정신질환 정도는 앓고 있어. 신경이 좀 예민하거나, 과거에 있었던 강렬한 사건 때문에 종종 괴로워하거나,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 말이지.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꼭 미쳐 날뛰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라고. 그냥 상담을 받으러 가는 거야.”
 “무슨 상담? 난 그곳에서 상담 받을 게 없는데.”
 “있어. 아니, 내가 볼 때는 그쪽이 맞는 것 같아. 일반 병원에서는 모두 마지 너한테 병이 없다고 했잖아. 그럼 마지 넌 병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육체적인 질병은 없다는 얘기지. 그런데도 너는 계속 초코바를 먹어야 하잖아. 소리가 나잖아. 그럼 뭐겠어.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야.”
 “난 멀쩡해. 정신에 아무 문제없어. 난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있어. 심지어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도 알고 있고.”
 “그래, 마지 넌 멀쩡해. 네가 미쳤다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그냥 가서 상담을 받아보자는 거야. 왜 소리가 나는지에 대해서. 혹시 아니! 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네 배를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걸 한번 알아보자는 거야.”
 “나도 모르는 걸 의사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넌 문창과 수업도 안 들었니? 참, 집중을 못 했겠구나. 미안.”
 “괜찮아.”
 “그러니까 그걸 무의식이라고 한다잖니. 그걸 한번 끄집어내 보자는 거지.”
 제길, 애초에 콰르륵의 시작도 문창과였다. 그리고 그 문창과 수업 때문에 나는 지금 정신병원에 가고 있다. 아, 그 수업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내 무의식 속에 문창과와 콰르륵에 대한 어떤 사건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어떤 사건. 도대체 무슨 사건일까. 전혀 궁금하지 않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2
 
 택시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병원.
 꽤나 유명한 정신병원이었지만, 외관은 상당히 낡았다.
 건물 크기는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 건물과 비슷했다. 별로 크지 않았다. 군데군데 벗겨진 흰색 페인트 때문에 조금 음산한 분위기도 풍겼다. 그러니까 유명한 이 정신병원은 크지도 않고, 낡았고, 음산했다. 한 마디로 별로였다.
 “정희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긴 왜 돌아가니?”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우리 동네에도 정신과 의원 있어. 그냥 상담만 받을 거면 차라리 거기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여긴 영 건물 분위기가 별로다. 국립인가 봐.”
 “외관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이왕 상담을 받기로 했으면, 처음에는 유명한 곳에서 받는 게 좋지. 여기에서 일단 한 번 상담 받아보고, 그 다음부터는 동네 정신과 의원 가면 되지. 그리고 여기 시립인 걸로 아는데.”
 그게 그거야, 인마.
 “정희야, 그건 그렇고 말이지, 이런 정신병원은 미리 전화 예약이라도 하고 와야 하는 거 아닐까? 이렇게 무작정 오면 안 될 거 같은데. 우리 아무래도 헛걸음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러면 나야 더 좋긴 하지만.”
 정희는 내 말을 무시하고 무작정 전진했다. 뒤에서 보면 마치 남편의 불륜 현장을 덮치러 가는 모습 같기도 했다. 앞뒤 안 가리고 물불 안 가리고 무작정 전진. 당장 현장을 덮쳐서 저 잡것들을 아주 묵사발로 만들어 놓으리라. 그런 비장함이 엿보였다.
 만약 병원 직원이 정희더러 “예약을 안 하고 오셔서요, 지금 당장 상담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선 예약부터 하시고요, 내일 다시 방문해 주세요”라고 했다가는 그대로 묵사발이다. 병원 직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마침내 정희가 병원 중앙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 전진했다. 그런 정희를 발견하고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병원 직원은 아무 죄가 없다고 정희에게 미리 귓속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여긴 시립이라며. 그런데도 저렇게 우리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잖냐. 원래 시립은 안 그렇지. 직원들이 아주 뻣뻣해. 분명 저 직원은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있는 거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투까지 공손했다.
 “네, 저, 저기, 그러니까 상담 좀, 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시립인데도 직원의 말투가 공손해서 정희 역시 당황한 듯했다. 말을 좀 더듬었다.
 “아, 그러세요! 혹시 처음 방문하시는 건가요?”
 “네, 처음 방문하는 거예요. 한 달 넘게 계속 일반 병원 내과만 찾아다니다가요, 그러니까 오늘도 일반 병원에 갔었거든요. 그런데 병원에서 나오다가 불현 듯 이곳이 떠오르잖아요. 아주 순간적으로 말이에요. ‘그래,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어! 내과가 아니라 정신과였던 거야! 하고 말이에요.”
 “……아, 네, 그러시군요.”
 저 말줄임표의 의미는 뭘까. 직원은 왜 저렇게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을까. 약간 뒷걸음질 친 것도 같고 말이다.
 처음 방문하는 거냐고 물으면 대부분 네, 그렇게만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희는 네, 하고 끝낼 대답을 서너 줄이나 쓰게 만들었다.
 유명한 말이 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비록 저 직원이 의사는 아니더라도, 지금 정희의 모습을 보면서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정희 네가 상담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렇다. 난 지극히 정상이거든.
 “그럼 같이 오신 분은 남동생이신가요? 남동생 분도 혹시 상담이 필요하신가요?”
 순간 어지러워서 쓰러질 뻔했다. 이제 보니 저 직원도 상태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정희와 막상막하.
 그런데 정희야, 넌 왜 그렇게 표정이 멀쩡한 거냐. 뭔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 오히려 이 상황에서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너 지금 표정이 너무 온화해 보여. 아무래도 남동생이라는 말에만 너무 집중한 거 같다. 직원은 지금 정희 네가 상담 받으러 온 줄 알고 있거든.
 “어머, 어머 아니에요. 남동생 아니에요.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호호. 제가 좀 성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야, 그러면서 가슴은 왜 쭉 펴는데. 그러면 없는 가슴 더 티 난다니까. 그리고 가슴 크면 성숙해 보이는 거냐. 정희 넌 그냥 제 나이로 보여. 내가 좀 어려 보여서 그렇지.
 “아,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일단 두 분은 오늘 처음 오신 거니까, 잠시만요, 혹시 예약은, 아, 안녕하세요.”
 뭐냐, 저 직원. 결국 정희까지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걸로 결론을 내린 거냐. 하긴 지금 정희의 상태를 봐서는 누구라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런데 잠깐, 도대체 누구한테 인사를 한 거야.
 정희와 나는 동시에 직원이 인사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디선가 본 사람인데.
 정희 역시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역시 맞네.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야. 여긴 어쩐 일들이지?”
 “혹시 아시는 분들이세요?”
 “네, 제가 출강하는 학교 학생들입니다. 제 수업 들었던 학생들이기도 하고요.”
 “아, 그러세요. 두 분 상담 받으러 오셨는데. 오늘 처음 방문하시는 거고요. 어떻게 할까요?”
 “그래요! 잘 됐네요. 안 그래도 제 방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낯이 익은 사람들이 병원 안으로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내려와 봤습니다. 제가 상담을 맡겠습니다. 마침 이 시간에는 진료 받을 환자도 없거든요.”
 “잘 됐네요. 이 분들 예약 안 하고 오신 거 같던데.”
 그리하여 우리는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그러니까 정희와 내가 듣고 있는 ‘예술과 정신분석학’ 수업 강사 선생님 뒤를.
 
 “자 들어와. 여기가 내 방이다.”
 방에 들어서자 선생은 우리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우리들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릴 여유도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선생도 우리가 어리둥절해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원래 내 본업이 이쪽이야. 정신과 의사. 여기가 내 진짜 직장이고. 학교 강의는 그쪽 학과 교수님 중 한 분과 좀 친분이 있는데, 그 분이 줄곧 부탁을 하셔서 몇 해 째 출강하고 있는 거고. 참, 그러고 보니 둘 다 타과 학생들이었지. 예술이나 정신분석학 쪽에 관심이 좀 있나 봐. 솔직히 타과 학생들이 수업 신청해서 좀 놀랐거든. 좀처럼 그런 일이 없어서 말이야. 내 강의가 재미없다는 소문이 학교 내에 파다해. 그나마 전공과목이라 폐강은 면하고 있지만, 하하.”
 “네, 그러시군요. 아니, 그러니까 강의 내용이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요, 본래 이곳 의사 선생님이셨구나, 하는 뜻이었습니다.”
 정희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괜찮아. 이젠 그것도 익숙해져서 내성이 생겼어. 재미없다는 소리 들어도 이젠 상처 안 받아, 하하. 그런데 둘이 꽤 친한가 봐. 수업도 같이 듣고, 이렇게 병원에도 같이 오고. 이름이 정희였던가? 우리 마지를 꽤 좋아하나 보네, 하하. 보통은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라도 정신병원까지 함께 오지는 않거든. 실은 가족도 함께 오는 걸 꺼리는 경우가 있어서 말이지. 그런 거 보면 정희가 참 대단하네. 우리 마지를 참 극진히 챙겨. 아, 이거 내가 좀 짓궂은 걸 물었나, 하하.”
 “어머, 타과 학생들인데 저희 이름까지 다 기억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수업 열심히 들을 걸 그랬어요. 너무 성의 없게 들은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시험도 잘 못 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선생이 학생들 이름 기억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그래도 시험은 좀 못 보긴 했더라, 하하. 뭐,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둘 다 B학점 이상이니까. 우리 마지는 A+를 줄까 지금 고민 중이야, 하하.”
 “와, 정말이세요! 감사합니다. 역시 타과 학생들이라서 가산점이 좀 붙은 건가요. 성의가 가상해, 뭐 이런 부분을 은근히 노리기는 했습니다.”
 정희 너는 그냥 내 수강 신청서 베낀 거잖아. 성의가 가상해는 무슨.
 그건 그렇고, 정희는 뭐가 신 나서 저렇게 떠들어대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모르겠니, 정희야?
 저 선생 좀 이상하다는 거 모르겠어?
 진짜 모르는 거야?
 우린 저 선생한테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어.
 우리 가운데 누가 상담을 받으러 왔는지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고.
 안내 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오히려 정희 네가 상담을 받으러 온 거라고 짐작했지.
 그런데 저 선생, 상담을 받으러 온 게 나라는 걸 알고 있어.
 직업이 정신과 의사라서 그냥 딱 보면 누가 상담 받으러 온 건지 알 수 있다! 정신과 의사는 신이 아니야.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대신 좀 예민할 뿐이지. 그러니까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건 불가능해.
 그리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별로 기쁘지 않아. 오히려 더 기분이 나쁘다고. 저 사람은 문창과 교수도 아니야. 그냥 강사일 뿐이야. 그런데 강사가 자기 수업 듣는 타과 학생들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한다! 우린 저 선생과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그리고, 그리고 제일 이상한 건 뭔지 알아!
 저 선생, 지금 나보고 ‘우리 마지’라고 하고 있어. 소름이 돋을 정도야. 비록 내가 저 선생 수업을 듣기는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 마주보고 있는 거 처음이야. 평소에 대화 한 번 안 나눠봤잖아. 그런데 ‘우리 마지’라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선생과 정희는 여전히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참, 우리 마지는 아직도 배에서 소리가 나나. 콰르륵 하고 말이야?”
 “어머, 그것도 알고 계셨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방학하고 나서 줄곧 일반 병원 내과만 찾아다녔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아도 전부 이상 없다는 말만 들었어요. 마지 배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나는데 말이에요.”
 “정희라고 했나. 조용히 해줄래. 나는 지금 우리 마지하고 얘기를 하고 싶거든.”
 선생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까지 정희와 나누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바짝 굳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 때문에 왔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마지야, 내가 묻고 있잖니? 아직도 소리가 나니?”
 지금 선생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대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도 풍겼다. 그런 말투였다.
 “네, 여전히 소리가 납니다.”
 “아무리 먹어도 소리가 나는구나. 먹고 또 먹어도 소리가 나. 배가 고픈 게 아닌데 소리가 나.”
 알고 있다. 내 증상을 알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저 선생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고 있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보다 더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를 못하겠다.
 먹어도 먹어도 왜 허기를 느끼는가.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뭔가 공허하다. 속이 공허하다. 아무리 음식을 입 안으로 집어넣어도 공허하다.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
 그런데, 그런데 저 선생은 마치 이해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 이런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란 말인가. 이 병원에는 나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선생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신 건가요?”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감히 눈도 쳐다보지 못했다.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정희의 손을 내려다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진짜 알고 있는 거냐고, 그럼 고칠 수도 있는 거냐고,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그런 기대감까지 품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지. 그리고 네 기대대로 해결 방법 역시 알고 있어. 이제 우리 마지는 더 이상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될 거야. 허기는 곧 사라질 거야. 내가 그렇게 해줄 거니까. 지금 이곳에서 말이야.”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 얼굴에는 미소까지 번졌다.
 그런데 지금 저 선생이 뭐라고 했지.
 더 이상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해준다고 했나.
 그것도 지금 당장.
 저 선생님, 역시 소문대로 꽤 실력이 좋은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확실히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라. 우리를 보자마자 누가 상담을 받으러 온 건지 바로 눈치 챘잖아. 게다가 이름까지 기억하고. 학과 교수도 아니고 그냥 강사일 뿐인데, 게다가 우린 타과 학생들이고. 그런데도 정희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잖아. 우리 과 교수 중에는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는 교수가 있는데, 확실히 그런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달라. 아, 그러고 보니 저 분이 왜 나더러 ‘우리 마지’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정신병원이라는 델 처음 와보잖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 병원엘 가도 긴장하게 된다고. 그런데 여긴 정신병원이야. 나는 정신병원이란 델 처음 와봤고. 당연히 더 긴장이 되지. 옆에 있는 정희를 봐. 상담 받으러 온 건 난데 자기가 더 긴장하고 있잖아.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어. 나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엄청 긴장이 되기는 하지. 그래서 저 분은 나를 부를 때 ‘우리 마지’라고 부르는 거지. 최대한 긴장을 풀어주려고 말이야. 그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려는 거지. 배려심이 참 깊은 분 같다. 그래, 역시 배려심이었어. 그래서 내 병을 이해한 것처럼 말한 거였어. 그렇게 해서 일단 나를 안심시키려는 거지.
 다르구나. 확실히 달라.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어딘가 달라도 달라. 일반 사람들하고는 차이가 있어.
 콰르륵, 콰르륵.
 아차, 배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초코바 한 개를 꺼냈다.
 “훗, 역시 초코바를 선택했구나. 요즘 시대에는 그게 제일 나을 것 같더라. 휴대하기도 편하고 말이야. 나 때에는 그런 게 없었거든. 그나마 들고다니기 편한 건 떡이 고작이었으니까. 말린 고기도 있긴 했는데, 그건 형편이 여의치가 않아서 포기했지. 그때 내가 떡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나는 아직도 떡만 보면 헛구역질이 난단다, 하하. 우리 마지도 이제 초코바라면 아주 질렸겠구나.”
 “네, 더 이상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이 세상에서 초코바를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사실 이 초코바 보기만 해도 끔찍하거든요.”
 “그래, 그 심정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하. 역시 이런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건 즐거운 일이구나. 즐거워. 아주 즐겁다, 하하.”
 선생님이 즐겁게 웃으시는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다.
 나도 곧 저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을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웃음이 참 많았는데, 어느새 나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저 분만 믿으면 되겠지. 그럼 나도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되겠지. 그 전에 우선 초코바는 한 개 먹자.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상담을 받아 보자.
 나는 초코바 껍질을 벗겼다.
 “아니다. 이제 초코바는 안 먹어도 된다. 주머니에 있는 것들도 다 버리거라. 더 이상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래도 상담 받을 때 배에서 소리가 나면 좀 웃기지 않을까요? 소리가 작은 것도 아니고요.”
 “괜찮다. 이제 우리 마지는 더 이상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버리겠습니다. 당장 버리겠습니다. 실은 저, 평생을 이렇게 주머니에 초코바를 넣고 다녀야 하나 생각했었습니다. 남은 학기 동안에도 줄곧 초코바를 먹으며 학교에 다녀야 하고, 취직을 해서도 초코바를 먹으며 일을 해야 하고. 길을 걸을 때, 전철을 탈 때, 영화를 볼 때도 계속 초코바를 먹어야 하고. 생각할수록 끔찍했습니다. 과연 내가 그런 생활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1년, 2년, 3년. 더 이상은 못 버틸지도 모르겠구나. 자살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하하, 그럴 일은 없었을 거다. 그 전에 내가 우리 마지를 찾았을 테니까. 찾아서 더 이상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해줬을 거다. 오늘 이렇게 병원에 찾아와서 나를 만난 건 우연이지만, 이 우연이 아니었더라도 우린 만났을 거다. 실제로 이번 방학이 끝나고 나면 내가 나설 생각이었다. 우리 마지를 찾을 생각이었지. 찾아서 아직도 배에서 소리가 난다는 걸 확인한 순간, 나는 우리 마지의 문제를 해결해 줬을 거다. 물론 나를 만나기 전에 우리 마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 마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만나게 된다. 내가 우리 마지를 찾기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뒤졌을 테니까, 하하.”   
 윽,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저 분은 그토록 나를 걱정하고 계셨던 건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말이야.
 “마지 너, 설마 그런 생각까지 했던 거야! 너무해.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한 거니! 내가 너 죽게 내버려뒀을 거 같아!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생각도 갖지 마! 선생님, 어서 마지를 고쳐주세요. 다시는 이상한 생각 하지 않게 지금 당장 고쳐주세요. 선생님이 정말로 우리 마지 고쳐주실 거죠? 더 이상 배에서 소리 안 나게 만들어주실 거죠?”
 여전히 정희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했잖아! 감히 하등한 인간 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거야! 어디서 함부로 우리 마지라는 거야!”
 어, 선생님이 왜 갑자기 정희에게 화를 내시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보려고 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갑자기 사라졌다. 정희에게 소리를 지르자마자 사라졌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동시에 내 얼굴에 피가 튀었다.
 나는 피가 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선생님이 있었다.
 어느새 선생님은 정희 뒤에 서 있었다.
 언제 이쪽으로 온 거지.
 의자에서 일어서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정희의 몸에는 머리가 없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정희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머리 없는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피. 정희의 피. 허기를 채워줄 정희의 달콤한 피.
 달콤한 피, 달콤한 피, 달콤한 피.
 피를 보는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달콤한 피, 달콤한 피, 달콤한 피.
 저 피를 마시지 않고는 이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당장 저 피를 마시지 않으면, 흥분 때문에 내 몸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허겁지겁 정희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쭉쭉 빨 듯이 힘 있게 들이켰다.
 차츰 허기가 사라졌다. 그토록 먹고 또 먹어도 사라지지 않던 허기. 아무리 먹어도 뭔가 공허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허함이 사라졌다. 허기가 사라졌다. 허기가 사라지고, 대신 온몸에 알 수 없는 힘이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정희의 목에서 얼굴을 들었다.
 정희의 몸에는 더 이상 피가 없었다. 아무리 힘 있게 빨아도 피가 빨려나오지 않았다.
 피가 없는 몸.
 정희의 몸은 이제 음식물 쓰레기일 뿐이었다.
 카핫!
 선생님이 뒤에서 웃고 있다.
 나는 선생님을 보았다.
 긴 손톱, 날카로운 송곳니, 창백한 피부.
 나도 내 손을 보았다.
 손톱이 두꺼워지고 길어졌다. 2센티미터 정도 길어진 것 같았다. 손가락도 길어진 것 같고.
 두 개의 송곳니도 자랐는지,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팔뚝을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나도 몸 전체가 하얗게 변했겠지. 선생님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카핫!
 어느새 웃음소리도 똑같아졌다.  
 “피부색은 줄곧 그 상태일 거다. 안 변하더라고. 하지만 창백한 피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여자들이 좋아해. 피부가 하얗다고 말이지, 카핫. 하지만 송곳니랑 손톱은 곧 원래대로 줄어든다. 그리고 마지 네 의지로 다시 자라게 할 수도 있다.”
 피부색, 손톱, 송곳니. 이런 건 상관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 나는 힘이 넘친다. 허기가 사라지고, 대신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힘은 넘치는데 몸은 한없이 가볍다. 마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다. 아무리 높은 장애물이라도 사뿐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단숨에 내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움직임, 정희의 얼굴을 손톱으로 자를 때 보여준 움직임,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움직임. 나도 가능할 것 같다.
 이런, 나는 정말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카핫!
 “그런데 선생님, 제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죠? 선생님은 언제 어떻게 해서 변하게 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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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닉네임 블랙 - 1. 키스러브 제거 2013.09.30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4. 오지아 기자와 아이스맨 2013.07.31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3. 아수라의 대활약 2012.06.29
아이 미행2 2012.03.30
아이 네 사람3 2012.02.24
아이 허기 2012.01.27
아이 쭈글 할머니의 칼1 2012.01.27
아이 칼로 푹1 2011.12.31
아이 미행1 2011.11.25
아이 기억 삭제 2010.05.01
아이 피부가 보라색 (본문 삭제)1 2009.12.26
아이 애니멀 2011 2009.10.31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1. 파이어 대 고슴도치 2009.06.26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2. 능력자이자 인간 헐크3 2009.05.29
아이 냄새5 2009.01.30
아이 황금알 먹는 인어 2009.01.30
아이 인간놀이 2004.04.30
아이 진화하는 장난감 200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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