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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기억 삭제

2010.05.01 00: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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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수록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기억 삭제 중독. 이제는 성인들만이 아니라 청소년들까지도 기억 삭제 중독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에는 기억 삭제 기술을 독점한 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시내 곳곳에 지사를 설립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해 거리 광고판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탓에 사람들은 하루에 많게는 50번 기억 삭제 광고를 접하고 있습니다. 기억 삭제 기술을 독점한 기업의 광고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 느끼겠지만, 그것뿐입니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여전히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유년기! 청소년기! 그 시기에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마 기억은 안 나겠지만,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겁니다. 그 사건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면, 당신은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신은 평생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망설이지 마십시오. 기억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방치한 채 평생 좌절감을 맛보며 살지 마십시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 기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 저희에게 오십시오. 기억을 지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에 더 이상 좌절감은 없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시간 단위로 지워드립니다. 물론 요금도 시간 단위로 책정이 됩니다. 당신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면 과연 행복해질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와 이별을 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신이 싫어서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전부 지웠습니다. 물론 시간 당 요금이 책정되니 막대한 돈이 들었을 겁니다.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1년이라면 하루가 24시간에 곱하기 365일을 해야겠군요. 그러면 8,760시간이 됩니다. 시간 당 요금 곱하기 8,760을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제트 승용차 세 대 값에 육박하는 금액입니다. 얘기가 잠깐 금액 쪽으로 샛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전부 지웠습니다. 당신에게 1년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년의 삶이 통째로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기억의 신경만을 찾아서, 그 신경을 보호하는 네트를 제거하는 겁니다. 결국 당신은 그 1년 중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던 때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과연 그 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굉장히 짧을 겁니다. 1년 가운데 아주 짧은 순간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결국 1년 가운데 별 의미 없이 보낸 시간들만을 기억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게 행복한 삶일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저거 좀 끌 수 없어! 매번 똑같은 거 보는 것도 지겹다. 누가 저거 좀 꺼줬으면 좋겠는데.”
    철웅씨가 흰색 매트리스에 누운 채 손가락으로 입체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철웅씨의 말에 이번에는 종호씨가 손으로 복도 끝에 있는 간호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히 우리 마음대로 껐다가 또 간호사한테 혼나려고! 그냥 누워서 잠이나 자는 거지 뭐. 스크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처럼 눈 감고 딴 생각 해봐. 이거 의외로 시간 잘 간다.”
    “혼은 무슨. 종호씨는 역시 겁이 많아. 아니면 저 간호사를 좋아하든가. 물론 후자겠지만.”
    “조, 좋아하기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나, 저 간호사 절대 안 좋아하거든. 못 믿어? 내 말 못 믿는 거야 지금? 꺼, 꺼! 스크린 끄면 될 거 아니야! 확 꺼버려!”
    “뭐예요, 또! 왜 또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난리냐고요, 난리가! 방에 들어가고 싶어요! 지금 당장 방으로 끌고 갈까요! 한 세 시간 동안 방 안에서 꼼짝 못 하게 만들어드릴까요, 예!”
    박 간호사다. 종호씨가 손으로 가리켰던, 아니 종호씨가 좋아하는 간호사.
    걸핏하면 고함이나 지르는 저 무서운 박 간호사를 종호씨는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제일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사람은 박 간호사 자신이다. 혹시 종호씨는 소리 지르는 여자한테 매력을 느끼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해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각자의 취향이 있는 법이니까.
    종호씨가 얼른 매트리스에서 일어섰다. 종호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매트리스는 플라스틱 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종호씨가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냥 서로 의견 교환을 하다보니까 한두 마디 좀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기억 삭제 중독 이게 참 안 좋은 건데 말이죠, 그걸 좀더 강력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지 않나, 스크린에 비친 저 사람이 너무 약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걸 아는 사람들이 여기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에 오셨어요! 괜히 쓸데없이 떠들지 마시고요, 제발 저기 있는 다울씨처럼 좀 얌전히 앉아서 시청하세요. 또 한 번 시끄럽게 떠들면 바로 방으로 직행입니다.”
    박 간호사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다시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가도 될 것을 왜 나한테 미소까지 짓는지 모르겠다. 물론 진짜로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성격 괄괄한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수줍음이 많아서 절대 큰소리도 치지 못할 것 같은 여자가 좋다. 그런데도 박 간호사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니 미칠 노릇이다. 박 간호사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내가 박 간호사한테 이상형을 얘기 안 했으니 당연한 걸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의미다.
    아차, 박 간호사가 나한테 미소 짓는 걸 종호씨가 목격했다.
    “이봐, 다울씨. 다울씨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종호씨가 제법 목에 힘을 줘가면서 말했다. 덕분에 말을 하고 나서 잠깐 기침을 했다.
    “얼마 안 됐습니다. 이제 한 열흘 된 거 같은데요. 아직 이곳이 낯설 정도니까요.”
    종호씨 나이는 모른다. 하지만 얼핏 봐도 40대 초반. 나보다 한참 위다. 당연히 내가 존댓말을 써야지. 그래도 무턱대고 저렇게 상대방에게 반말을 하면 약간 기분이 상하기는 한다. 하지만 내색 같은 건 할 필요 없다. 기분이 상하면 나중에 기억을 지우면 된다.
    아, 치료센터까지 왔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나는 기억 삭제 중독인 것 같다.
    종호씨는 내 대답을 듣고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초조해할 거라는 생각에서. 물론 당연히 초조하다.
    “그래,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야. 혹시 내가 여기에 언제 왔는지 다울씨한테 말한 적 있었던가?”
    “아니오, 없었습니다.”
    “오, 저런. 내가 얘기를 안 해줬구먼. 아주 중요한 건데 내가 얘기를 안 했어.”
    내가 볼 때 별로 중요한 얘기 같지는 않았지만, 종호씨가 중요한 얘기라고 하니 이상하게 긴장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어이 이봐, 철웅씨.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한참 눈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철웅씨가 인상을 쓰면서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눈 감고 생각에 잠겨 있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막 뭔가 떠오르려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종호씨가 왜 날 부른 거였지?”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냐고?”
    “아, 그렇지, 그거 물어 봤었지. 그러니까 어디 보자. 내가 여기 온 지가 벌써…….”
    “자네 말고 나 말이야.”
    “알아. 그러니까 자네보다 내가 먼저 왔으니까, 내가 언제 왔는지 계산을 해보면 자네가 언제 여기에 왔는지도 답이 나오잖아.”
    “그렇군. 나보다 자네가 여기에 먼저 왔으니까, 그렇게 계산을 하면 답이 나오겠네.”
    “그렇지. 그렇게 계산을 하면 답이 나오지. 그러니까 어디 보자. 내가 여기에 온 게 계절로 치면 늦봄이었으니까, 오, 벌써 그렇게 됐네.”
    “어떻게 됐는데.”
    “내가 여기에 온 지 벌써 두 달이나 됐어. 세월 참 빠르네, 빨라. 벌써 두 달이나 됐어.”
    “세월 참 빠르지. 그러면 나는 언제 온 거지?”
    “내가 온 뒤로 아마 한 달 정도 뒤에 왔을 걸. 그러니까 아마 자네가 여기 온 지는 한 달 됐을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 됐을 거야. 확실하게 알려면 박 간호사한테 물어보던가.”
    “아니 뭐, 박 간호사한테 물어볼 것까지는 없고. 내 생각에도 그 정도 됐을 거 같네. 한 달 정도 된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알고 싶은 건데?”
    “그렇지. 그러니까 말이야, 여기 다울씨라는 친구가 여기 온 지 겨우 열흘밖에 안 됐다잖아.”
    “그 정도 됐지. 열흘 됐을 거야. 그게 뭐 어쨌는데?”
    “아니, 그게 뭐 어쨌는데가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말은, 이제 겨우 열흘밖에 안 된 친구가 말이지, 감히 말이야 어! 혹시 내가 전에 이 얘기 한 적 있었던가?”
    “아마 안 했을 걸.”
    “들어보라고. 어이, 다울씨, 자네도 들어봐.”
    “네.”
    “아, 이거 참 되게 가슴 아픈 얘기야. 너무 가슴 아픈 얘기라서 내가 이 기억은 못 지워. 아마 내 머릿속에는 이 기억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그만큼 가슴 아픈 얘기야.”
    “사랑 얘긴가?”
    “아니야. 기껏 사랑 얘기로 내가 이렇게 가슴 아파 하지는 않지. 사랑 얘기가 아니야.”
    “친구 분 중에 누가 죽기라도 하셨나요?”
    “갑자기 분위기가 확 가라앉는군. 친구 중에 누가 죽기는 했지. 하지만 그 기억은 지워버렸어. 그 친구와 얽힌 일들 자체를 지워버렸어. 그래서 내게는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 그 친구와의 일들은 다른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들은 게 전부야. 사실 친구라는 감정도 없지. 내 기억 속에 그 친구는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 친구 죽은 얘기도 아니지. 자네들 혹시 20년 전에 있었던 전쟁 기억하는 사람 있어? 무기 제조 회사에서 세계 대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던 전쟁.”
    “지웠지. 그런 끔찍한 일을 머릿속에 남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제일 먼저 지운 기억이 그거야.”
    “저도 그 기억은 지웠습니다. 전쟁 때문에 매일 악몽을 꾸었거든요.”
    “그랬군. 아마 그 당시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대부분 그 기억들은 지웠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지울 수 없었어. 그 기억만큼은 도저히 못 지우겠더라고. 그러니까 그때가 내가 막 스무 살 되던 해였어. 아주 이른 아침이었지. 막 잠에서 깼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눈을 뜨자마자 바깥이 보고 싶더라고. 그래서 리모컨으로 벽 유리를 투명하게 작동시켰어. 그런데 이상하더라고. 분명히 유리를 투명하게 작동시켰는데도 주위가 어두운 거야. 한밤중처럼 깜깜하더라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지. 리모컨을 누르니까 오전 6시 20분이라더군. 분명히 아침이잖아. 이른 아침. 당연히 그 시간에는 밖이 환해야 하잖나. 그런데 어두운 거야. 처음에는 시스템 오류인가 싶었지. 오후 6시 20분을 오전 6시 20분이라고 알려준 거 아닌가 싶었어. 그래서 귀찮은 걸 무릅쓰고 휴대전화기를 찾아서 직접 시간을 확인했지. 오전 6시 20분이 맞더군.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란다로 나갔어.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지. 세상에, 하늘 위에 뭔가 엄청나게 큰 게 떠 있었어. 끝과 끝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떠 있었어. 그래도 모양은 대충 타원형 같더군. 타원형의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던 거야. 저게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올려다보기만 했어. 그때 갑자기 타원형의 거대한 물체에서 굉음을 내며 무언가가 땅으로 떨어지더라고. 그 개수가 엄청났지. 수백 수천 개가 굉음을 내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동시에 땅에서는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불기둥이 솟아오르자 비로소 주위가 환해지더군. 아주 뜨거울 정도로 환해졌지. 동시에 거리 곳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어디로든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하라는 거야. 미사일을 피해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말이야. 하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미사일 속에서 안전한 곳을 찾기란 어렵지. 아,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 그때 내 손을 잡은 게 우리 누나였어. 갑자기 나를 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더라고. 나야 뭐 그냥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지.”


    기억 삭제 중독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억 삭제 중독으로 인해 개인은 이미 현실 대처 능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렵거나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곧 도망치려고 합니다.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도망친 다음, 기억을 지웁니다. 도망친 자신을 원망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30년을 살았다면 그중 절반 이상의 삶은 기억 속에 없습니다. 나이는 서른이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은 열다섯일 뿐입니다. 그 이하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나이 예순에 아직도 정신연령은 10대 수준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노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뭐야, 쟤는 왜 아직도 나와서 계속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거야! 이봐, 다울씨, 얼른 저 입체 스크린 좀 꺼봐! 저것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앞으로의 얘기가 중요하거든.”
    종호씨가 잠시 얘기를 중단한 채 입체 스크린을 가리키며 인상을 썼다.
    “흠, 저게 끄고 싶어도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수동 조작은 안 되고, 음성 인식은 박 간호사님 목소리만 가능하고요. 수동 조작 전환도 박 간호사님 음성으로만 가능하고요. 그래서 박 간호사님이 전원 오프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스크린을 끄기란 불가능하잖아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뭐, 자네가 죄송해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까 나도 자네한테 하소연 한번 해본 거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누님이 손을 잡고 집밖으로 끌고 가셨다고.”
    “아 참, 그랬지. 다울씨 자네 집중력이 참 좋네. 남의 얘기 들어주는 데 소질이 있어. 아주 괜찮은 소질을 갖고 있구먼.”
    “고맙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만 휴게실을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다른 팀 사람들이 휴게실을 이용할 차례라서요.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각자 방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호명을 할 테니까요, 이름 불린 사람은 담당 의사선생님 상담을 받으시면 됩니다. 얼른 움직여주세요. 거기 할아버지도 얼른 일어나시고요.”
    박 간호사의 말에 종호씨가 입을 열려다가 멀뚱히 나와 철웅씨 얼굴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벌써 휴게실 비워줄 시간이 됐나 보네. 어차피 곧 휴게실 비워줄 시간이었으면서 아까는 왜 당장 방으로 가고 싶냐 어쩌냐 소리를 지른 거야. 하여튼 성격 마음에 안 들어. 그건 그렇고, 아쉽네. 이봐 종호씨, 종호씨 얘기는 내일 다시 듣기로 하자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저기 박 간호사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제야 종호씨도 입을 쩝쩝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는 팀별로 운영되고 있다. 팀을 짜는 기준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으로 입소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입소 시기가 비슷한 사람끼리 한 팀을 이룬다. 우리 팀은 나와 종호씨, 철웅씨, 그리고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 이렇게 네 명이다. 그리고 우리 네 명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저 성격 괄괄한 박 간호사다.
    이곳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는 규모가 상당하다. 지하 15층에 지상 20층이 넘는다. 지하에는 어떤 시설이 있는지 모르겠고, 나처럼 기억 삭제 중독을 치료받기 위해 온 사람들은 지상에서 생활한다. 치료센터 기능을 하는 것은 모두 지상에 있다. 하지만 치료센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입소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지, 모두 몇 개의 팀으로 나뉘어 있는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입소한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이곳은 기억 삭제 중독을 치료 받기 위한 곳, 그러니 모두들 기억 삭제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 괜한 것에 관심을 가졌다가 상처라도 받으면 곧바로 기억을 삭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치료 받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비슷하다. 특별한 것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저 할아버지는 통 말씀이 없으시네. 그래도 이렇게 한 팀이 된 것도 인연인데, 뭘 물어봐도 당최 대답이 없으시니 원. 우리랑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으신가. 그렇다면 굳이 이쪽에서도 애쓸 필요는 없지만.”
    철웅씨가 휴게실을 나서면서 할아버지를 한번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 사이에도 할아버지는 우리랑 함께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게 싫은지 계속 매트리스 위에 앉아 있었다.


    박 간호사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다울씨, 다울씨 차례입니다. 나오세요.”
    나는 박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담당 의사 방으로 갔다.
    나이는 50대 초반. 왜소한 체격에 머리가 시원스럽게 벗겨졌다. 대신 턱수염을 길렀다. 거기에다 알이 두꺼운 안경. 길 가다 마주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법한 외모다. 실제로도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인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의사가 됐는지 모르겠다. 정말 피눈물 나게 공부를 했으리라. 그 후유증인가, 의사가 되고 나서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다.
    “여어, 다울씨, 안색이 아주 좋아 보여. 이곳 생활이 체질인가 봐. 나도 이곳 생활이 좋아요. 아주 좋아. 집에서는 화장실도 잘 안 가게 되는데 말이지, 이곳에 오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촤르륵 나와. 그렇다면 내가 집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는 얘긴데, 도대체 왜 나는 집에서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다울씨도 이곳에서는 줄곧 촤르륵인가?”
    “촤르륵이라니요?”
    “큰 거 말이야, 큰 거. 사람은 매일 큰 거를 촤르륵 쏟아내야 건강해지는 법이거든.”
    “아, 네. 저도 촤르륵 나옵니다.”
    “거 봐, 다울씨도 이곳 생활이 체질에 맞다니까. 혹시 뭐 불편한 거라도 있으신가. 없을 거야. 불편한 게 있다면 이렇게 안색이 좋을 리가 없지. 내가 괜한 걸 물었어. 아, 어쩌면 내가 집에서 긴장하고 있는 게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게 뭔데요?”
    “아직 아이가 없어. 젊었을 때는 아이 낳지 말자고 했거든. 그래서 한 20년 동안 아이 없이 잘 지냈지. 그런데 요즘 갑자기 집사람이 아이 타령을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센터 일에만 몰두하니까 자기가 외롭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아이 하나 낳자는 거야. 아니, 아이가 무슨 외로움 달래주는 인형인가. 자기가 외로우니까 아이 하나 낳자니, 아이를 원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지, 그건.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로 외로워서 아이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가. 뭐 그건 그렇다 치자고. 문제는 또 다른 데 있지. 지금 내 나이가 몇인가. 오십이 넘었어. 집사람도 이제 곧 오십이야.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말이지, 집사람이 직접 아이를 임신하는 건 무리지. 그건 아이한테도 안 좋을 수 있어요. 정 아이를 원한다면 말이지, 베이비 뱅크에 가서 인공 자궁을 이용해도 되잖나. 굳이 그렇게 본인 배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건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말이야. 요즘 본인 배로 아이 낳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나. 없지. 아무도 없어. 그건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안 좋아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거든. 안전하게 베이비 뱅크 이용하면 되는 것을 말이야. 왜 그렇게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어. 확 그냥 집사람 뇌신경을 검사해서 아이 원하는 부분을 제거해 버릴까. 아, 중독 치료센터 담당 의사로서 참 못할 소리를 했네 그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야. 사람이 집에서 긴장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피곤하겠나. 촤르륵이 안 되니까 건강에도 안 좋고 말이지.”
    “확실히 건강에는 안 좋겠네요. 촤르륵이 안 되면 말입니다.”
    “그렇지. 안 좋아. 다울씨는 참 이해가 빨라서 좋아. 얘기할 맛이 난다니까. 그럼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모레 또 상담하면 되니까 시간은 충분하다고. 참, 다울씨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열흘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어째 담당 의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를까.
    “음, 뭐 별 다른 증상은 없고? 혹시 뭐 이상한 꿈을 꾼다거나 하는 거 말일세. 그러니까 다울씨를 힘들게 하는 꿈같은 거 꾼 적 없어?”
    “없습니다. 이상하게 이곳에 온 뒤로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잠을 푹 잔 거 같아서 좋기는 합니다.”
    “음, 그래, 그거 다행이군. 사람은 잠을 푹 자야 해. 촤르륵만큼이나 중요한 게 잠이지. 그것도 푹 자는 잠. 그러려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 푹 잘 수 있어. 하지만 살다 보면 가끔 괴로운 일도 생기지. 그러면 잠을 푹 못 자요. 괴로워서 말이야. 하지만 말일세, 실은 괴로움도 딱히 괴로움만 있는 건 아니야. 그 안에 여러 가지가 있어. 괴롭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 한 건 아니라는 얘기지. 그 안에 후련함이나 기대감 같은 게 섞여 있을 수 있거든. 괴로움 덕분에 새로운 각오도 다질 수 있을 테고. 괴로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거지. 그게 다가 아니니까. 아, 제법 의사 같은 소리를 했어.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아주 만족해. 그럼 또 보자고, 다울씨.”
    상담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한참 부족한 대화. 어쨌든 나는 담당 의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나서 다시 박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열흘. 내가 이곳에 온 지 열흘이 지났다.
    이곳은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 말 그대로 기억 삭제 중독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이다. 하지만 치료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약물 치료와 센터 소속 강사들의 기억 삭제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 지적, 정해진 시간에 자고 먹고. 그게 다다. 이곳 센터의 목적은 치료와 교육에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최소한 이곳에 있는 동안은 어쨌든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한다. 기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 달 만에 나가는 사람도 있고, 1년 뒤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이곳에서 생활하며 별 다른 기억을 갖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슬픈 일도 없고 기쁜 일도 없다. 화가 나는 일도 없다. 그냥 무의미한 일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잊힐 만한 일들만 벌어진다. 그래서 이곳 사람 누구도 진지하지 않다. 의사도 그렇고 간호사도 그렇다. 이곳에 입소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진지한 사람은 별로 없다.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대할 뿐이다. 기억에 남지 않게 대할 뿐이다. 그러면서 한동안 기억을 삭제하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을 삭제하지 않고도 별 다른 고통 없이 일정 기간 생활해 나갔다면, 그때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센터를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이곳에 온 열흘 동안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슬퍼할 일도 없었고 기뻐할 일도 없었다. 무언가를 지우고 싶어도 머릿속에 쌓인 기억이 없다. 기억할 만한 사건이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아니지,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아무튼 열흘 동안 지내면서 느낀 바로는 그렇다. 이곳에서는 기억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게 제대로 된 치료 방법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 어제 꿈을 꾸고 말았어. 별로 좋은 꿈은 아니야. 찝찝해. 확 지워버리고 싶어.”
    철웅씨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우리 앞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종호씨와 나는 그 말에 밥을 먹다 말고 철웅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할아버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 삭제 중독이라지만 꿈까지 찝찝하다며 지우겠다는 건 좀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철웅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 종호씨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꿈에서 내가 열 살 소년이었어. 아침에 일찍 눈을 떴지. 학교 가는 날이었거든. 엄마가 스피커로 깨우기도 전에 먼저 눈을 떴더라고. 그래서 곧장 화장실로 가서 씻었지. 양치질이며 샤워며, 평소보다 아주 깔끔하게 준비를 마쳤지. 옷까지 다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어. 밥을 먹으려고 말이야. 이미 1층 식당에서는 아빠가 전자 신문을 보고 계시더라고. 내가 등 뒤로 다가가는 것도 모른 채 신문에 푹 빠져 계셨지. 엄마는 요리 준비하느라 바빴고. 그래서 내가 아빠 등을 콱 쳤지. 놀라게 해줄 작정이었거든. 그런데 아빠가 나를 보더니 정말 깜짝 놀라는 거야. 그게 말이지, 그냥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더라고. 그래서 또 나는 감탄했잖아. 와, 우리 아빠 너무 장단을 잘 맞춰주시네. 그런데 갑자기 엄마까지 깜짝 놀라는 거야. 엄마도 거의 아빠 수준으로 놀라는 거야. 엄마까지 저럴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지. 혹시 내가 너무 깔끔하게 씻어서 놀라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그런데 엄마가 깜짝 놀라고 나서 아빠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여보, 이 사람 누구예요. 왜 우리 철웅이 옷을 입고 있는 거지요?’ 그러잖아. 더 이상한 건 아빠 반응이었어. ‘당신 누구신가요?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지요? 분명 방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그리고 왜 우리 철웅이 옷을 입고 있지요? 당신 대체 누굽니까? 우리 철웅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요?’ 이러잖아. 그리고 엄마는 음식 준비 하다 말고 2층 내 방으로 뛰어가고. 뭐가 뭔지 통 모르겠더라고. ‘내가 철웅이야, 아빠.’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믿지를 않는 거야. 엄마는 또 엄마대로 우리 철웅이 없어졌다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라고. 아무리 내가 철웅이라고 말해도 두 분 다 믿지를 않아. 급기야 아빠가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됐지. 나는 얼떨결에 경찰차에 탔다니까. 태어나서 처음 타본 거야. 학교에 갈 시간에 경찰차에 타다니, 참 어이가 없었지. 그리고 경찰차 안에서도 계속 경찰들이 나한테 누구냐고 물어. 그래서 철웅이라고 했지. 물론 경찰도 안 믿더라고. 대체 철웅이라는 아이를 어떻게 했냐고 막 화를 내더라고. 엄청 무서웠어. 그러다 우연히 룸미러를 보게 된 거야. 화장실에서 씻을 때도 분명히 나는 내 얼굴을 봤거든. 그때는 분명히 나였어. 열 살짜리 철웅이. 그런데 경찰차 룸미러에 비친 내 얼굴은 그게 아니었어. 열 살짜리 철웅이가 아니었어. 사십 먹은 아저씨 얼굴이었어. 몸은 열 살짜리 철웅인데, 얼굴은 사십 먹은 아저씨. 끔찍하더라고. 내 얼굴이 아빠 엄마보다 더 늙었더라고. 무서웠어. 그냥 무서운 정도가 아니었어. 경찰이 화냈을 때 느꼈던 무서움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달랐어.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무서웠어. 도대체 룸미러에 미친 저 사람이 누굴까 싶어서 무서웠어. 정말로 내가 맞는 거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때문에 무서웠어. 그러다 잠을 깼지. 가위에 눌린 꿈. 침대 시트가 다 젖었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당장 이 꿈, 이 기억을 지우고 싶어.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아. 도대체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이 꿈의 의미가 뭐냐고!”
    철웅씨의 말에 나와 종호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음식을 먹고 있지도 않았다. 이미 식욕은 사라진 상태였다.
    철웅씨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정말로 그 꿈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고, 종호씨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데 정작 철웅씨 본인이 모르고 있을 리 없다. 그가 이런 꿈을 처음 꾸었을 리도 없다. 아마 지금까지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꾸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기억을 지웠겠지. 하지만 기억을 지워도 그 꿈의 의미는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꿈을 수없이 꾸었고 또 수없이 지웠을 것이다. 종호씨도, 할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의 의미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일들이다. 어른이 되어서의 삶 가운데 많은 것들은 지웠다. 그래서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몸은 어른이지만, 우리의 머릿속은 어린 시절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몸은 어른, 얼굴은 어린아이가 돼버린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상하게 그 반대다. 몸은 어린아이, 얼굴은 어른. 왜 그럴까.
    만약 여기가 치료센터 식당이 아니라 일반 시내 식당이었다면, 철웅씨는 당장 기억 삭제 회사로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다. 당연히 기억 삭제 시술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기억 삭제 중독인 철웅씨가 그런 끔찍한 기억을 계속 간직하고 있기란 불가능하다. 계속 불안에 떨고 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극도의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때 갑자기 박 간호사가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뭔가 안 좋은 낌새도 눈치 챈 모양이다.
    이곳의 일상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짐작했던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순간이었다. 꿈이라는 게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꿈을 꾼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다. 악몽을. 지우고 싶은 기억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다들 왜 이렇게 표정들이 어둡지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박 간호사의 물음에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종호씨,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식사도 안 하시고 이렇게 가만히 계시는 건가요?”
    종호씨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 다울씨가 말해 보실래요? 왜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가 무거워진 거지요?”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철웅씨는 계속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고, 종호씨는 내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수저를 들었다. 물론 내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냥 다들 잠이 덜 깨서 그런 것뿐입니다. 별 일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나도 다시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밥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저런, 다들 저한테 무언가 숨기고 계시네요. 실은 저 다 알고 있거든요. 방금 전에 여러분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아무도 말씀을 안 해주시네요. 음, 이거 좀 심각한 건데.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하거든요. 지우고 싶은 기억 같은 건 절대 만들면 안 되거든요. 철웅씨, 혹시 어제 제가 저녁에 드린 약 다 드셨나요?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박 간호사의 말에 철웅씨가 얼굴 쓰다듬던 동작을 멈췄다.
    “아, 그게 그러니까, 아차, 약을 먹다가 한 알을 바닥에 떨어뜨렸거든요. 찾으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말았지요. 하지만 나머지 약은 다 먹었습니다.”
    “그러셨어요? 음, 한 알을 떨어뜨리셨단 말이지요. 그리고 결국 그 한 알은 안 드신 거고요?”
    “네.”
    “그래서 꿈을 꾸신 거네요. 알겠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마저 하세요. 그리고 제가 이따 따로 철웅씨를 부를게요. 잠깐 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식사 마치신 다음에 다른 곳에 가지 마시고 모두 방에서 쉬고 계세요. 철웅씨 상담 끝난 다음에 여러분도 부를 테니까요. 그러면 지금부터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즐겁게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참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박 간호사의 지시대로 나는 식당을 나와 곧장 방으로 향했다.
    얼마 동안 방에서 지냈을까.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박 간호사가 나를 찾았다.
    “다울씨, 잠깐 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가져야겠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죠.”
    “본래 상담은 내일 아닌가요? 담당 선생님도 어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
    “네, 원래는 내일인데요,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오늘은 일종의 특별 상담입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박 간호사의 말에 나는 애써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박 간호사를 따라 담당 의사의 방으로 갔다. 여전히 길 가다 마주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법한 외모의 담당 의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제법 체격이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담당 의사 옆에 서 있었다. 덕분에 다시 긴장감이 밀려왔다.
    “여어, 다울씨, 오늘도 안색이 아주 좋아 보여. 역시 다울씨는 이곳 체질인 거 같아.”
    “그런가요. 오늘은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기분이 별로 안 좋다니! 지우고 싶은 기억조차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지내는데, 기분 안 좋을 게 뭐가 있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당연히 매일매일 기분이 좋아야지, 안 그런가 박군?”
    담당 의사는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내는 담당 의사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참, 그건 그렇고 다울씨, 박 간호사 말을 들으니까 아침에 식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서?”
    담당 의사가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손가락이 유난히 가늘고 길었다. 꼭 주삿바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철웅씨가 좀 안 좋은 꿈을 꾸었나 봅니다. 그 꿈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법이지. 그리고 꿈 얘기를 상대방에게 할 수도 있고. 그런 건 별로 특별한 게 아니지. 그렇지 않나 박군?”
    이번에도 박군이라는 사람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말이야 다울씨, 참 희한한 게 있어. 꿈은 누구나 다 꾸는데 말이지, 그 종류가 참 다양해. 그러니까 저마다 꾸는 꿈들이 참 많아.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친한 친구에게 살해당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유명 인사와 섹스 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웅으로 변해 악당을 물리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의 삶을 바꿀 획기적인 시스템을 발명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동물과 대화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역사 속 인물과 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이와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놀이기구 타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뜬금없이 자신의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물고기로 변해 바닷속으로 잠적해 버리는 꿈을 꾸기도 하고……. 음, 또 뭐가 있을까.”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 잠을 자면서 제각각의 꿈을 꾸지요. 저도 여러 가지 꿈들을 꾸고요.”
    “그렇지. 다울씨 자네도 그동안 살면서 아주 많은 꿈들을 꾸었을 거야. 하지만 말이야 다울씨, 참 희한한 게 있어. 사람들은 그렇게 저마다 다른 꿈들을 꾸는데, 유독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똑같은 꿈을 꾸는 경우가 있어. 살아가면서 적게는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같은 꿈을 꾸는 경우가 있어. 그 사람들은 반드시 그 꿈을 꾸게 되지. 그리고 그 꿈을 꾼 뒤로는 아주 괴로워 해. 심하면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지. 다울씨 자네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너희 같은 놈들이 그 꿈을 꿔. 너희같이 기억 삭제 중독에 걸린 놈들 말이야. 정말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지. 내가 제일 경멸하는 놈들이야. 기억 삭제 중독에 걸린 놈들. 너희들은 반드시 그 꿈을 꿔. 얼굴은 어른, 몸은 어린아이. 그 반대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 한마디로 괴물이지. 너희들은 괴물이야. 얼굴은 어른, 몸은 어린아이인 괴물.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기억 삭제 중독에 걸려서 그 꿈을 꾼 건데, 그걸 알면서도 다시 그 꿈에 대한 기억을 지워. 정말 웃기는 짓이지. 그럼 결국 언젠가 또 그 꿈을 꾸게 되지. 그걸 알면서도 지우는 거야.”
    “제가 꾼 꿈이 아닙니다. 물론 꾼 적은 있지만, 그래서 그 기억을 지운 적은 있지만, 어쨌든 오늘 문제가 된 그 꿈은 제가 꾼 게 아닙니다.”
    나는 담당 의사의 말투가 갑자기 변한 것에 놀라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의 눈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그냥 고개를 숙인 채 거의 기어들어가는 말투로 말했다. 괜히 고개를 들어 담당 의사를 노려보면, 담당 의사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가 내 얼굴을 잡아 바닥에 짓이길 것 같아서였다.
    “그래, 네놈이 꾼 건 아니야. 철웅이라는 그 한심한 놈이 꾸었지. 감히 이 신성한 치료센터에서 그런 역겨운 꿈을 꾸었어. 처먹으라는 약도 제대로 처먹지 못하는 바람에 말이지. 이곳에서는 도저히 꿀 수 없는 그런 꿈을 꾸었어. 이곳에서 지내는 모든 쓰레기들은 절대 꿈을 꿀 수 없거든. 약만 제대로 처먹으면 절대 꿈을 꾸지 못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그런 역겨운 꿈을 꿀까 봐 주는 약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 한심한 철웅이라는 놈이 그 역겨운 꿈을 꾼 거야. 이렇게 신성한 곳에서 말이지. 그럼 안 봐도 뻔하지 않나. 제발 기억을 지워달라고 징징댈 게 뻔해. 미친놈처럼 발광을 하면서 꿈을 지워달라고 난리를 치지. 그걸 방치했다가는 문제가 생겨. 우리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의 명성에 금이 갈 만큼 중대한 문제가 생겨. 당연하지 않나! 그런 놈들 습성은 내가 훤히 꿰뚫고 있거든.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기억을 지워달라며 간호사나 내 목을 졸라.”
    “철웅씨가 꾼 꿈입니다. 저는 꾸지 않았습니다.”
    “알아. 안다고 했지 않나. 네놈이 꾼 게 아니야. 하지만 너도 중독자잖아. 그 꿈 얘기를 들었잖아. 철웅이 놈이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려대는 바람에 너희들도 그 꿈 얘기를 들었잖아. 그럼 너희들도 그 꿈을 꾼 거나 마찬가지야. 똑같이 괴로워하지. 그런 예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목격했거든. 어때, 네놈도 괴롭지? 괴로워 미칠 지경이지?”
    “…….”
    “그러니 네놈도 그 꿈을 꾼 거야.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놈도 미쳐 날뛰겠지. 꿈을 지워달라고 내 목을 조를 거야. 후, 정말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니까.”
    “그래서 저희 같은 사람이 이곳에 온 거 아닙니까. 중독에서 벗어나려고요. 치료 받으려고요.”
    “크하하, 치료! 무슨 치료! 기억 삭제 중독 치료! 정말 한심하다니까. 그래서 너희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거야. 애초에 그 따위 치료가 가능할 것 같나! 기억 삭제 중독이 치료 될 거 같아! 네놈은 정말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이곳에 온 거냐. 한심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주 순진하기까지 하네. 한심하고 순진한 놈이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담당 의사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칼이 잡혀 강제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이 송두리째 뽑힐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그 상태로 얌전히 선생님 말씀을 들어라.”
    사내의 목소리는 굵었다.
    나는 겁에 질려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건 치료가 안 돼. 기억 삭제 중독은 애초에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치료가 안 된다고. 그만큼 네놈들은 약해 빠진 거야.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중독을 관장하는 네놈 뇌의 신경을 제거하면 돼. 하지만 부작용이 커. 진짜 어린아이가 돼버리거든. 그것도 지능이 아주 아주 떨어지는 어린아이. 지하에 그런 놈들이 꽤 있어. 특별 관리를 하고 있지. 평생 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놈들에게는 이 건물 지하가 세상인 거지. 지하 실험실이 그놈들에게는 세상이야. 물론 그놈들은 그런 것도 의식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오오, 그렇다고 겁먹지는 마. 네놈을 그렇게 만들겠다는 건 아니야. 아니지, 당장 그렇게 만들겠다는 건 아니야. 지하도 거의 포화 상태거든. 관리하기 쉽지 않아. 가족들 상대하기도 피곤하고. 그래서 몇 번의 기회는 주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알면서 뭘 묻고 그래. 네놈 소원대로 해주겠다는 거야. 기억을 지워주겠다는 거지. 지금 이 방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말이야. 여기에 오기 전의 상태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야. 그럼 깨끗해지잖아. 네놈 뇌가 아주 깨끗해지는 거지. 그러고 나서 그 깨끗한 뇌로 몇 달만 이곳에서 버티면 돼. 그냥 아무 일 없이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잘하면 한 달 만에 이곳을 나갈 수도 있어. 상태가 좀 심각했던 놈들은 대충 몇 년 묵히다가 내보내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대부분은 몇 달 후에 내보내지. 하지만 개중에는 꼭 철웅이 같은 놈들이 있어. 철웅이 놈처럼 그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면 이곳에 있는 기간이 좀 길어지지. 계속 반복되면 지하행이고 말이야. 알겠어? 이곳은 그런 곳이야. 지울 만한 기억을 만들지 않은 채 몇 달 버티다가 나가는 곳이야. 애초에 치료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지울 만한 기억을 만들어주지 않는 역할만 하는 곳이지. 무슨 얘긴지 알겠지? 자, 그럼 이제 여기 박군 따라 가면 돼. 그럼 네놈은 다시 깨끗한 뇌로 태어나는 거야. 그리고 이곳에 오늘 입소하게 되는 거지. 상황이 그렇게 되는 거야.”
    담당 의사의 말이 끝나자 박군이라는 사내가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참, 미리 말해둘게. 여어, 다울씨, 오늘도 안색이 아주 좋아 보여. 크하하.”



    2


    “이봐, 누가 저거 좀 끌 수 없어! 왜 매번 똑같은 걸 보여주는 거야! 정말 지겨워서 미치겠네!”
    종윤씨가 흰색 매트리스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 종윤씨를 상태씨가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나서 한마디 했다.
    “종윤씨, 좀 조용히 있어. 그러다 최 간호사한테 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저거 우리가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잖아. 최 간호사 아니면 아무도 못 꺼. 알면서 자꾸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괜히 종윤씨 때문에 우리까지 곤란해진다고. 최 간호사 깐깐한 거 알지? 한 번 화나면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간섭한단 말이야. 좀 편하게 지내자. 여기 다울씨도 새로 우리 팀에 합류했는데, 첫날부터 최 간호사한테 찍히면 곤란하잖아.”
    상태씨의 말에 종윤씨는 여전히 씩씩거리면서도 더 이상 불평하지는 않았다.
    상태씨가 종윤씨를 달래는 사이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철규씨가 불만을 토했다.
    “하긴, 좀 지겹기는 해. 매일 똑같은 것만 보고 있잖아. 거의 하루 종일 하는 일도 없이 휴게실에 앉아서 저 쓸데없는 거나 보고 있고 말이야. 그리고 때 되면 방에 들어가 있고, 그리고 때 되면 식당에 가서 밥 먹고. 매일 듣는 강의도 지겹기는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리고 또 왜 이렇게 잠은 쏟아지나 몰라.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상하게 졸려. 하루에도 몇 번씩 잠만 자는 거 같아. 휴우, 다울씨는 이제 막 들어와서 모를 거야. 내가 여기 온 지 벌써 한 달째거든. 이 팀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여기에 왔지. 아무튼 그래. 그래서 다울씨는 아직 이곳 생활이 어떤지 모를 거야. 정말 지루하다고. 기억할 만한 일들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이 어떻게 한 달을 버텼는지 모를 정도라니까.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 놀라운 일이지.”
    철규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막 기억 삭제 중독 치료센터에 들어왔으니 철규씨의 말대로 이곳 생활이 정말 지루한지 어떤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철규씨의 말대로라면 이곳 생활이 꽤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겠네요. 특별한 일 없이 하루 종일을 보내야 한다면 정말 지루하겠어요. 그래도 뭐, 치료를 받으러 왔으니 이곳 생활에 적응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 어쨌든 치료를 받으러 왔으니 적응은 해야지. 그게 현명한 거지. 다울씨는 생각이 꽤 긍정적이네. 중독자 같지가 않아.”
    “아닙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냥 가급적 주위 상황에 상처 받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도 결국 상처는 받지만요. 상처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벌써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음, 그런가. 글쎄,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또 소란스럽네요. 어째 이 팀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여러분들 때문에 괜히 오늘 온 다울씨까지 피해 보게 만들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소란스럽게 떠들면 각자 방으로 직행입니다. 다울씨까지 포함해서요.”
    어느 틈에 최 간호사가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 차갑게 한마디 쏘아붙이더니 다시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기억 삭제 중독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기억 삭제 중독으로 인해 개인은 이미 현실 대처 능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렵거나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곧 도망치려고 합니다. 힘든 상황을 헤쳐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도망친 다음, 기억을 지웁니다. 도망친 자신을 원망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30년을 살았다면 그중 절반 이상의 삶은 기억 속에 없습니다. 나이는 서른이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은 열다섯일 뿐입니다. 그 이하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나이 예순에 아직도 정신연령은 10대 수준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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