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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낙인

2013.12.31 22:4212.31

낙인



한강수 물길이 굽이 쳐 돌아가는 둔치 한 귀퉁이. 낡은 낚싯대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포 나루에서 한 시진 즈음 떨어진 곳이라 오가는 이가 드물었다. 춘삼월이라지만 녹지 않은 눈이 산을 덮고 강물은 얼음장같이 시리기만 한 계절이다.

낚싯대의 주인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벌써 여러 시진 째 입질이 없는 빈 낚시였다. 하물며 그의 시선은 그 곳에 머물지 않았다. 오롯이 강물을 바라보는 모양이 강태공 흉내라도 내려는 것인가. 그저 강 깊은 곳을 바라보는 듯,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은 듯도 보였다.

노인의 사색을 방해하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지만 깊은 수심과 하나였던 언복에겐 천둥과도 같은 소리였다.

“상학이냐. 방해하지 말라 일렀거늘.”

“…스승님. 또 서찰이 왔습니다.”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나이 어린 제자는 스승 어려워 늘 조심스러웠다. 언복의 불 같은 성질이 한 몫을 했음이다.

상학(像學). 만물의 모양을 갈고 닦아 제 것으로 만들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받지 않았어야 할 아이였다. 역시 명에 두고 왔어야 했다, 늘 자책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아이의 재주에 눈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제자가 이리 걸음을 한 연유라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손을 내밀었다.

상학이 주저하며 한 통의 서찰을 넘겼다.

“만화관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서찰은 언복의 손에서 채 펼쳐지지도 못하고 찢겼다.

“몇 번째였더냐?”

“도합 열 세 통입니다.”

“삼고초려라도 할 셈이라면 직접 오든가.”

짜증 섞인 혼잣말에 상학이 물었다.

“그리 전할까요?”

진지했다.

“미친 놈!”

상학의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동짓날 서리보다 매서운 스승의 호통이었다. 들을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고 오금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면…… 뭐라 전할까요?”

“아무 것도 하지 말거라.”

“또 올 것입니다.”

상학은 낯 모를 여인이 야속했다. 그만 보내라 벌써 수 차례 연통을 넣었건만 들은 척도 없었다. 서찰에 묻은 지분향이 처음엔 그리 좋기만 하더니, 이젠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볼 것 없다. 그냥 찢어버리, 아니다. 네가 댓바람으로 욕설을 가득 써 보내거라. 내 이름으로.”

“제, 제가 어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녀석에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너도 이제 그 정도는 처리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풀 죽은 강아지마냥 처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녀석을 보니 가슴 한 켠이 짠했다.

그릴 줄 아는 재주는 가상하지만 세상을 모르는 숙맥이었다. 스승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아이였다. 그런 무던함에 복장 터진 적도 많았지만 한 켠으로는 어여쁘다 여겼던 터라 밉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제 녀석의 잇속을 챙기고 약삭빠름도 지녔으면 했다.

언복이 다시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한 번 흐트러진 마음은 가다듬기 쉽지 않았다. 어느 듯 시간은 정중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토머리인지라 슬슬 접고 일어서는 게 낫다 싶었다.

“스승니임!”

종전과는 다른 소리였다. 밝음이 묻어났다.

언복은 낚싯대와 통발을 거두었다.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상학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중담 어르신의 서신이옵니다.”

낙양에서의 소식이란 말인가? 낙향하여 은둔했다 들었거늘.

“이리 다오.”

상학이 공손히 서신을 건네었다.

수려한 문체로 적힌 친우의 글에는 그간의 안부와 더불어 자그마한 부탁이 적혀 있었다. 만화관에서 온 서찰과 관련 있음이 놀라웠다. 당혹스러웠다. 대륙에 있을 사람이 조선의 일개 기생을 어찌 안단 말인가?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중담을 움직였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상학아. 차비를 차리거라. 만화관으로 가야겠다.”

“화구를 챙기오리까?”

“아니다. 그건 되었다.”

설령 어진을 그려달라고 한 들 자신의 마음이 움직일 것인가? 당치 않았다. 붓을 놓은 지 오래였다. 다만, 거절할 수 없는 이의 부탁이었기에 시늉이라도 내어야 했다. 직접 보리라. 호기심을 채우고 난 후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여겼을 뿐이다.

상학에게 만화관으로 길을 잡으라 일렀다. 놈도 사내였는지라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만화관. 만개의 꽃이 피어있는 곳.

여악에 속한 교방과는 달리 만화관은 사사로이 만들어진 기루였다. 면천받은 퇴기 월향이 주인이었다. 그네의 뒷배를 봐주는 것은 삼정승 중 하나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위세는 아래 것에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문을 지키는 왈자패의 거들먹거림 조차 당상관 못지 않았다.

상학이 말했다.

“홍련을 불러주시오.”

“이 보시오, 두 눈 뜨고 보시오. 예가 어딘지. 만화관이란 말이오, 만화관. 여기가 동네 주막집인줄 아시나. 게다가 홍련이라고? 그 꼴로? 댁네가 암행나온 임금이라도 되는 게요?”

갓 도포가 아닌 차림새를 비웃는 말이었다. 양반도 아닌 잡것들이 어디 도성 제일의 꽃을 만나려 하느냐, 분수를 알라는 으름장이었다.

상학이 분기탱천하여 대드려는 걸 언복이 만류했다.

“그럼 전해주시게나. 전갈쯤이야 어렵지 않겠지.”

“그러지요. 돈 드는 일도 아니니. 뭐라고 전할깝쇼?”

순순한 대구였지만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열 세 통의 전갈은 잘 받았다, 답을 하러 왔다고 전하게나. 그리하면 알 것이니.”

뜬금없는 전언이었다. 심상치 않다 여겼는지 서로의 눈치가 오갔다. 잠시 기다리라는 의뭉스러운 답을 남기고 한 녀석이 안으로 들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중노미 한 놈이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지을 선생이십니까?”

언복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종노미가 안내한 곳은 기방 끝자락에 위치한 방이었다. 청지기가 둘을 맞이 하였다. 그네 눈에 궁금증이 역력했다. 홍련이 누구인가? 만화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요, 당상관도 몇 일을 기다려야 얼굴을 볼까 말까 한 바쁘신 몸이었다. 그런 그네가 정색을 하고 정중히 모실 것을 청하다니, 호기심이 일 수 밖에 없었다.

“아씨께서 바로 올 수 없는 무례를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잠시 목이나 축이고 계시지요.”

말이 다하기 무섭게 산해진미가 차려진 주안상이 들어왔다.

“기다리기 적적하시면 꽃들을 부르오리까?”

언복은 됐노라 괘념치 말라 거절했다.

상학의 눈에 서운함이 스쳤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언제 이런 으리으리한 곳에 다시 와보겠는가?

청지기가 해웃값은 걱정 말라, 모두 홍련 아씨의 배려이니 받으셔도 된다 두 번 청했지만 언복의 표정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청지기 밥 숟갈 삼십 년이면 충분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짧지 않았다. 간혹 산조의 가야금 소리와 함께 간드러진 여인네의 교성이 바람을 타고 흘러 들었다. 눈 앞의 산해진미도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스승이 들지 않으니 제 놈이 감히 저분을 들 수 없었다. 입맛만 다실 뿐이다. 옥주로 목도 축이고 싶었지만 스승은 두 눈을 감고 좌정한 채 미동도 없었다. 상학은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스승만 쳐다 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비단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시방석 같았던 지루함을 끝내 줄 이의 등장이었다. 상학의 얼굴에 반색의 기색이 어리는가 했더니 절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겹겹이 두른 수 겹의 능라 비단치마, 화려한 수가 놓인 반회장 저고리에 화려한 삼작 노리개를 패용한 얹은 머리의 여인네가 사붓한 걸음으로 문지방을 넘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마른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 숙일 미모였다. 여포와 태종의 마음이 능히 짐작되었다. 송도삼절 명월이의 현생이라는 소문도 납득되었다.

홍련은 기러기가 날아 내리듯 나붓한 몸짓으로 언복을 향해 반절을 올렸다.

“천첩 홍련, 지을 선생을 뵈옵니다.”

그제야 언복이 눈을 떴다.

반달을 그린 눈썰미와 붉은 입술에 묘한 색기가 흘렀다.

상학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언복은 달랐다. 그의 목소리는 평사와 다름이 없었다.

“자네가 보낸 서찰은 잘 받아보았네. 미안하이. 내 그 서찰은 하나도 읽지 않았네.”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리 발걸음을 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이름이 조선에 알려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만.”

“만력제가 귀히 여겨 누구도 보여준 적 없다 하는 고명 황녀의 용모화에 찍힌 낙관을 제 어찌 모르오리까. 그림을 친다 하는 이라면 알음 알음으로 위명을 전하고 있지요. 위세 꽤나 떨치는 양반네들도 화공 어르신의 그림 한 장 얻지 못해 안달인 것도요.”

“과찬이네. 그렇다면 붓을놓은 것도 알겠군? 잘못 찾은 듯 하이.”

“잘못 찾지 않았음입니다."

홍련이 상학을 보았다. 뚫어져라 홍련을 쳐다보던 젊은 사내는 당황하여 눈 둘 곳을 찾았다.

“주위를 물려주심이.”

긴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투로 끝을 흐렸다.

“이 녀석은 내 늘그막에 얻은 제자일세.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니 괘념치 말게.”

“그리 하시면.”

알겠다, 홍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고자 한 이는 하늘 아래 최고의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 밤을 그리는 분이십니다. 열 개의 금으로 만든 붓을 가진 장인 말이지요. 이리 말씀 드리면 아시리라 여기겠습니다.”

상학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늘 아래 최고라면 지을을 뜻함은 알겠다. 그러나 제 스승은 용모화로 뛰어난 화공이었다. 밤을 그리라? 기이했다. 스승이 산수화나 풍속화를 그렸다 들은 바 없었다. 열 개의 금으로 만든 붓은 또 무엇인가? 스승의 화구에 금으로 된 붓 같은 것은 없었다. 매일 닦고 관리하는 것은 자신이기에 그것은 확실했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혹여 밤이라는 것이 춘화를 뜻함인가? 그런 거라면 대경실색할 노릇이었다. 넘겨 짚음이 틀릴까 저어 되어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의 얼굴은 굳은 채였다. 노기고 경악이었다.

“상학아, 너는 이만 돌아가보거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반문하였다.

“네, 스승님?”

“나가보라지 않았더냐!”

벽력 같은 호통소리에 엉겁결에 문을 나서긴 했지만 상학의 속은 편치 않았다. 스승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했으나 왠지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발을 돌려 마포 나루로 향했다. 복잡한 속과는 달리 내딛는 걸음은 어떤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꽃같은 얼굴에 그윽한 난향. 붉은 입술. 저고리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던 뽀얀 살품. 분탕질치는 마음을 애써 억눌러 보았지만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을 발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열 개의 금으로 만든 붓이라. 파자를 쓰다니 가상하구나.”

“문하에 둔 이에게 밤의 기예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답을 가진 물음이었다.

“젊은 날에 얻은 잔 재주일 뿐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여겼다.”

“당치 않으십니다. 하오문의 밀야화라는 별호가 쉬이 주어지는 것이오이까.”

“어디서 들었는가?”

“객년에 청국에서 조선으로 넘어왔습니다. 두어 해 낙양에 적을 두었었지요.”

“게서 중담을 만났는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웃음만 흘리는 홍련이었다.

“침필장을 수소문하였더니 모두 어르신을 꼽더이다.”

“그렇다면 나의 조건도 알겠구나?”

“발설치 말 것이 하나요. 무조건 따를 것이 둘이요. 마지막으로 금전은 한 푼도 깎을 수 없다 들었습니다.”

“북촌 와가를 달라하면 어쩔 것이냐?”

“드리지요.”

“호방하구나. 제물이 그리 많더냐?”

“천첩의 하룻밤을 사겠다는 이가 족히 백리의 줄을 이룹니다. 공께서 원하신다면 천첩이 하룻밤 모시겠습니다.”

익히 홍련에 대한 소문은 들은 바 있다. 시서화가무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기라 들었다. 장안에 내로라하는 사내가 홍련을 한번 품어보겠다 가져다 받친 전두가 북악산을 이루고 남는다 했다.

“죽고 나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에 관심 없다.”

자존심을 다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연유가 무엇이냐?”

“달리 있겠습니까?”

“오래 살다 보면 눈이 트이기 마련이지. 남의 얼굴을 그려 먹고 산 자라면 두말 할 필요 없지. 다른 년이라면 연비라도 새길 것이냐 물었을 것이다. 아니야. 네 년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진심이 없어.”

“기생년치고 눈물 젖는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그러한 계집 중 하나일 뿐이지요.”

말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중담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없던 일로 하자 그리 마음 먹었다. 입을 떼려는 순간 언복은 보았다. 홍련의 눈에 번득인 서늘한 빛을. 금새 갈무리되어 사라져 잘 못 본 것인가 싶었지만 그것은 분명 살기였다.

언복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잔이 비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련이 잔을 채웠다.

“오늘은 이만 물러 가마. 내일 다시 찾아올 터이니. 네 재주를 보여라.”

기회를 줄 테니 언복의 마음을 움직여보란 것이다.

“천첩이 자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내기이지요.”

자신 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홍련이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언복은 만화관을 다시 찾았다.

어제와 달리 이번에 인도된 곳은 기방이 아닌 후원의 별채였다. 못 가득 연 잎이 무성했다. 여름이면 분명 흐드러지게 붉은 연꽃이 피리라 짐작되었다.

중노미가 이르길, 별채는 홍련이 청에서 오는 대가로 지어졌다 한다. 담장 하나 못 하나 심어진 꽃 하나 그네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했다.

“이름자대로 홍련이 피겠군. 화려하겠어.”

“왠 걸요. 수련입니다. 백수련.”

“흐음?”

“모두 홍련을 심으리라 믿고 구근을 구해놨더니, 백수련을 요구하더랍니다. 덕분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신기합디다. 백수련 한 가운데 홍련 아씨가 서 있는것을 보니! 모두 무릎을 치며 탄성을 했드랬지요.”

백백중홍이라. 영특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줄 아는가 싶었다.

못 너머 누각에 걸린 현판이 언복의 눈에 들어왔다.

명월당.

일필휘지로 갈겨 쓴 듯한 훌륭한 서체였다.

청의 황제가 좋아한다 하여 유행한 동기창체가 아니었다. 돈오를 중시하는 풍조는 자신과 같은 직업 화공에겐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를 무시하듯 조맹부의 송설체라니.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여겼다.

“누구의 솜씨인가?”

분명 먹물 꽤나 먹은 이가 홍련에게 바친 전두일 것이라 짐작되었지만 짐짓 모른 체 물었다. 조선에도 이런 글씨를 쓰는 자가 있다니. 그저 누군지 알아두고 싶다 생각했다.

“아씨가 손수 치신 겝니다.”

언복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은 종노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다들 놀라곤 하시지요.”

홍련이 두 발로 나와 맞이 하였다. 기생의 복식이 아닌 어염집 아녀자와 같은 행색이었다.

전날이 흐드러지게 핀 부용이라면 오늘은 백란이었다. 이슬을 머금은듯, 달을 품은 듯 아련함이 풍겨져 나왔다. 분명 같은 여인인데 어찌 이리 다른 모습이란 말인가.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시는 물론이요, 가야금은 옥랑이 울고 갈 정도였다.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바느질이라 답하는 재치까지 갖춘 이였다. 언복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홍련과의 내기는 자신이 질 것 같다 여겼다.

수삼일 후, 그것은 짐작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비록 내기에는 졌지만 홀가분했다.

내려 놓았던 침필을 다시 들게 한 이였다. 원한다면 월궁의 항아라도 새겨주리라 그리 여겼다.

“홍련을 새길 것이냐?”

하룻밤 풋정에 불과한 낭군일지라도 기억되길 원하는 것이 유녀였다. 그런 연유로 제 기명을 새겨 넣기도 한다.

홍련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어딜 봐서 자네가 정분에 몸부림칠 여인인가.”

“시구인가?”

백거이의 시를 좋아하여 일부라도 제 것으로 삼고자 한 선비들도 있었다.

홍련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꺼내어 든 것은 노리개였다. 자주빛 마노가 박힌 나비매듭 문양의 단작 노리개.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고급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노리개였다.

의아했다. 언복이 홍련을 쳐다 보았다.

“이 노리개를 이 몸에 새겨 주십시오.”

노리개를 몸에 새겨달라니? 기이한 청탁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네.”

홍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유가 무엔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이윽고 홍련이 답했다.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연비는 아니라 하더니. 혹여 자네의 정인이 남겨준 물건인가?”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이 사람, 답답하군. 속 시원히 털어놔보게.”

머뭇거렸다. 이윽고 홍련의 입이 열렸다.

“형벌입니다.”

“누구에게 내리는 형벌인가?”

“천첩에게 내리는 것이옵니다.”

“재미있구나. 네 년이 도망 노비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랬다면 자자를 지워달라, 덧씌워달라 청했겠지. 반대로 형벌을 달라?”

입묵(入墨). 살갗을 바늘로 찔러 물감이나 먹물로 글씨나 그림을 새겨 넣는 일을 뜻한다.

주나라에서 경형을 시작한 이래로 주자의 성리학을 숭상하는 나라라면 죄를 저지른 죄인이나 도망한 노비의 팔이나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새겨 형벌로 삼는 형벌로 삼았다. 덕분에 영원히 빛이 아닌 어둠에서 활동하는 것이 바로 침필장의 숙명이었다.

“스스로 볼 수 없는 곳에 자문을 새긴다 하여 어찌 형벌이 되는가? 그런 연유라면 차라리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입묵하지 그러나?”

홍련의 앙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언복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윽고 홍련의 입이 열렸다.

“잊었다는 것 조차 잊혔을 때, 떠올리려함입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간사합니다. 좋았던 시절은 제 좋을 대로 기억하고, 아팠던 시절은 무뎌지고 잊혀져 어느 새 견딜만한 것으로 바꿔놓더이다. 생채기에서 피가 흐르고 아픔에 겨워 비명을 지를 지라도 결국 그 때뿐. 이내 새살이 돋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남의 말을 하 듯 가벼운 어투였다.

“궁금해하겠지요. 물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도 다시 기억하겠지요.”

종내는 웃으며 말을 맺었다.

하룻밤을 지낸 이들이 물을 궁금증. 그 밤을 수치로 삼겠다는 것인가?

비록 노쇠했다고나 하나 운우의 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소시적 낙양에서 풍류공자 소리를 듣던 자신이었다. 보리 한줌에 팔려와 울며 매를 맞을지언정 몸만은 팔지 않겠다 울던 아이도 결국은 육체의 기쁨에 빠지고 허울뿐인 사랑에 허우적대었다. 욕정이 그러한 것이고, 탐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쾌와 락을 거부하고 이율배반의 몸뚱이에 형벌을 주려 함이라 한다. 무서운 아이다. 살기. 그 때 자신이보았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 확신했다. 기녀가 된 사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복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이녁의 말대로 사연 없는 무덤이 어디 있던가.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을.

“노리개를 자문으로 새길 수는 없는 일. 비록 비루한 솜씨나 나 또한 그림을 치는 사람이네. 이 나비라면 어떻게 해보겠네만. 어떠신가?”

홍련은 머뭇거렸지만 이윽고 납득한 듯 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뜻대로 하시지요.”

언복은 화구 속에 감추어둔 금갑을 꺼내었다.

자문으로 쓰이는 염료는 모두 손수 만든 것들이었다. 비단에 입히는 것과는 다른 농도가 필요했기에 몇 년이고 염료장 밑에서 몰래 익혀온 것이다.

묵이 아닌 색을 입히는 자문은 입묵과는 달리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루에 두 시진 씩, 나흘마다 한번. 도합 보름여에 걸친 시술이 될 것이다. 오늘부터 술은 물론, 객을 받지 말 것이며 물이 등에 닿아도 안 된다 일러 두었다.

침을 다듬으며 지나는 말처럼 언복이 말했다.

“벗으시게.”

홍련이 뒤돌아 앉았다. 비단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옷고름이 풀리고 있음이다. 저고리가 벗겨져 내리고 매미가 허물을 벗듯 속적삼이 어깨를 타고 흘렀다. 다른 이의 손에 벗겨진 적은 있어도 스스로 벗은 적 없는 매무새였다.

먹을 갈며 무심하게 언복이 말했다.

“침의도 모두 벗게.”

치마도 벗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치마끈이 풀리고 이윽고 속잠방이 하나만 걸친 모습이 되었다.

“이가 상할 수 있네. 보하려면 무명천이라도 말아 입에 물도록 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자넬 위해서가 아니네. 고통으로 몸이 흐트러지면 침이 어긋날 수도 있음이야.”

그제야 홍련이 언복의 말을 따랐다.

언복이 눈을 들자 홍련의 둥그스럼한 어깨가 보였다. 수려한 목덜미에서 어깨와 등으로 이뤄진 곡선이 아름다웠다. 겨드랑이 사이로 젖 무덤이 터질 듯 베어져 나왔다. 백옥 같은 살결이었다. 가꾼 티가 났다. 은은한 향내마저 뿜었다.

“어깨를 펴시게.”

홍련은 움츠렸던 어깨를 조심스레 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언복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일각.

이각.

시간은 무심히 흘러 갔다. 지분향이 사라지고, 여인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한 폭의 화폭만이 남았음을 깨달은 순간 언복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려야 할 지 보인 것이다. 기꺼웠다.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그 즐거움이 욕정을 넘어선 것이다.

밑그림 없이 가야 한다. 

첫 바늘을 들었다. 적당한 깊이가 중요했다. 너무 얕아도 안 되며, 너무 깊어도 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한 땀 박자 홍련의 어깨가 움찔였다.

두 번, 세 번. 쉴 새없이 침이 돌았다. 밑에서 부터 치고 올라갔다. 점점 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이 흘러나왔다. 생살을 찢고 뚫고 만든 상처다. 없을 리 없었다. 언복이 쥔 무명천은 점점 진물과 피, 그리고 묵으로 짙게 물들어갔다. 그렇게 버려진 천이 한 장이 되고 수십 장이 되었다. 둘의 몸에 흥건한 땀이 맺히고 흘러 흠뻑 젖은 모양새가 되었으나 홍련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 보름 동안 만화관 내에 낯부끄러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홍련이 늙은 놈과 배가 맞아 연희도 다 버리고 두문불출한다 했다. 둘 사이가 얼마나 뜨거운지 아무도 들이지않고 신음 소리만 담 너머로 들려온다 했다. 늙은이의 방중술이 대단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홍련이 매일같이 초주검이 되어 누워만 있다니 그럴 법도 했다.소문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지만 명월당은 아랑곳 없었다. 오롯이 둘 뿐인 세상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홍련의 어깨에 생생한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내렸다. 

색을 입히지 않은 듯 투명한 날개를 지닌 나비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나비결이 은은한 묵빛으로 빛났다. 두 날개를 반쯤 접어 꽃 위에 앉으려는 듯도 보였고 날아오르려는 듯도 보였다. 

꽃은 주인의 기명과 같은 붉은 연꽃이었다. 붉디 붉은 홍련. 만개하여 흐드러지게 핀 모양새가 주인과 꼭 닮았다. 흩어진 연꽃잎은 어찌 보면 눈물처럼도 보였다.

꽃은 때가 되면 질 것이요, 나비는 제 생이 다하면 날개를 떨구겠지만 홍련의 등에 새긴 입묵은 영원할 것이다. 그녀가 가진 한이 다하는 날까지 말이다.

언복은 명경을 비추었다.

“백모시나비이니라.”

홍련이 의아한 듯 보았다.

“세인들은 모시나비를 죽은 이의 한 맺힌 넋이라 하지. 그래서 불길하다 하는 것이고. 하지만 말이다. 나는 가엾구나. 버리지 못한 한이 무거워 저승턱을 넘지 못하는 혼백에게 주어진 짧은 생. 그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르라 천제께서 주신 49일의 여행에 잠시 빌어 쓰는 육신이라 그리 여긴다. 언젠가 너도… 아니다. 주책 맞게시리 늙은이의 말이 길었구나.”

다 맺지 못한 말이었지만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홍련의 눈가가 붉어졌으나 언복은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느냐, 좋다 라는 대답이 오가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그 밤 언복은 홍련을 품었다. 남녀의 운우지락이 아니었다. 홍련은 온 몸으로 울고 있었다. 제 몸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새긴 여인의 울음이었다. 그 의미를 아는 둘 만의 끈끈한 정이고 애달픔이었다.

 

날이 밝기도 전 언복은 잠든 이를 뒤로 하고 명월당을 떠났다.

더는 이 곳을 찾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에게 자신은 아픔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홍련이 지고 나비가 날아 언복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오길 바랬다. 그것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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