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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홍대 유령녀

2013.03.01 00:4503.01

홍대 유령녀

 

 

취기가 오른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을 꺼냈다. 마지막 남은 한 개피를 물고 불을 붙였다. 깊숙하게 빨아 들이자, 핑 돌았다. 취기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가늠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타 들어가는 담배가 마치 내 모습 같다. 열정은 한줌의 재가 되고, 초라한 몸뚱이는 바닥을 드러낸 채 불사르다가 결국 버리지는 신세 말이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이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인호 형의 울음 소리처럼 말이다.

- 형이 너무 힘들다.

- 미안하다, 용서해라.

- 힘들어도 다 같이 가자고 해 놓고.

- 너희들은 나처럼 패배자가 되지 말고.

마음 한 켠에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두려움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은 아닐까. 바닥에서 짓이겨지는 이 담배 꽁초처럼.

떠나겠다는 형의 마음이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이 있는 그가, 홍대 거리에서, 무명의 밴드로10년을 살아왔다. 형수님의 눈초리와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늙어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패배자라고 욕할 수만은 없다. 인호 형은 이 밤이 지나면 고향으로 떠날 것이다. 말이 환송회지, 부어라 마셔라 목구멍으로 알코올 덩어리를 털어넣으며 시대를 문화를 알아주지 않는 이를 원망하면서 밤을 새우는 것뿐이다.

늦은 밤 홍대 거리는 나처럼 흥청망청 취해 있었다. 어느 선술집에서 터져라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가 거슬렸다. 누군가는 즐거운 밤. 누군가는 울고 있는 밤. 홍대의 밤은 무수한 사연이 있고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 담배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 뭐해요? 인호 형이 찾아.”

그룹의 막내인 지후였다.

담배 피우려고 나왔지.”

뭐예요? 궁색맞게. 안에서 피면 되잖아.”

그냥, 바람도 쐴 겸.”

안이 좀 침침하긴 하죠? 인호 형은 울기만 하고. 자꾸 미안하다고만 하니.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고. 광태네도 깨졌다는데. 세상이 왜 이러는 걸까요.”

지후 말대로였다.

장기하 선배님이나 울랄라 밴드, 국가스텐처럼 유명 밴드가 되길 꿈꾸며 힘들고 긴 무명 생활을 견딘 뮤지션들이 어디 한 둘 인가. 그만큼 홍대 거리는 가난하지만 꿈꾸는 자들의 천국이었고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안다. 모든 뮤지션이 성공할 수 없으며 결국 누군간 떠나게 된다는 걸.

그래도 얼마 전까진 버틸만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

?”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나나 형이나 종대 형이나. 음악을 포기하는 일 없이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임마.”

버럭 내지른 말에 놀랐는지 지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모르는 건 아니다. 지후가 어떤 마음으로 꺼냈는지. 녀석도 불안할 거다.

단지 음악이 좋을 뿐인데. 먹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기타나 두들기고 노래나 부르면서 살 수 있는데.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뮤지션들이 바라는 삶이 그거뿐인데. 그 단순한 일이 참 힘들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후야.”

?”

너 대학 다니다가 중퇴했다고 했지.”

새삼스럽게 왜?”

. 공부 계속 해라.”

뭐라 대꾸하려다가 지후도 입을 다물었다.

손 끝에서 담뱃불이 필터를 태우고 있었다. 뜨거웠지만 꺼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이 어지러웠다.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인호 형은 떠났고 남은 우리는 결코 음악을 버리지 말자는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두통과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죽을 것 같지만 아르바이트를 빼먹을 수 없었다.일단 이 거리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홍대에 입성한 후로 야식배달부터 택배 배달, 야간 대리 운전까지 해보지 않은 일은 없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나 편의점 알바 자리가 편하고 시간 쓰기도 좋다는 건 안다. 그러나 기업형 아르바이트 자리는 시간과 업무에 정확함을 요구했다. 공연과 연습을 위해서 종종 시간을 비워야 하는 입장을 배려해주는 상사도 없었다. 작은 가게의 알바는 비록 돈이 적지만 정이라는 게 있었다. 종종 돈이 급히 필요해지면 공사장 막일을 몇 일 뛰어서 메우기도 한다. 그렇게 모은 돈에서 악기 구매나 수리비, 연습실 임대료를 지불하고 나면 몇 푼 되지 않는 생활비가 남을 뿐이다.

어차피 인호 형을 대신할 베이시스트를 구하기 전엔 연습도 중지다. 이렇게 시간이 될 때 작곡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지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오늘따라 유난히 배달도 바쁘다.

골목을 누비며 지름길을 찾아 돌고 돌아 상상마당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끼이익- 빵빵! 브레이크 파열음에 이은 경적 소리.

, 이 미친년아,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사곤가? 귀찮은데.

차량의 주인은 창을 열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아슬아슬 인도와 차도를 걸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구경꾼들은 그 여인을 보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아아, 그렇군. 또 그 여자다.

홍대 유령녀.

얼마 전 홍대 거리에 나타난 그녀는 현재 홍대의 명물 아닌 명물이 되었다. 어떤 이는 거리 퍼포먼스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다고도 한다.

유령녀라는 별명은 창백한 얼굴에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밤이면 흰 원피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유령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녀는 유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대부분이 무시하는 쪽이었다. 물론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세상엔 별 사람이 다 있구나 정도? 지금은 그냥 짜증이 날 뿐이었다. 배달이 밀린 상황에서 교통 체증이라도 생기면 귀찮으니까. 차가 빠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뭐지? 사고 난 자리를 지나치는 순간, 여인이 길에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았다. 차에 치인 건가? 아니다. 분명 차가 지나갈 때까지 여인은 서 있었다.

알게 뭔가? 누군가 도울 거라 생각했다. 사고 난 지점을 지나쳐 백여 미터쯤 달려갔을까. 결국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오토바이 핸들을 꺾었다. 여인은 아직 길에 쓰러져 있었고, 행인들은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려는 듯 에둘러 지나치는 모습을 보이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조심스럽게 여자를 흔들었다.

이봐요.”

어딜 다쳤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TV에서 본 것 같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의식이 없는 건가? 119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낸 순간 깜짝 놀랐다. 굉장히 차가운 무언가가 내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진 여자의 손이었다.

노래…, 노래를 찾고 있어요. 제발……”

의식이 없던 사람치고는 굉장한 악력이었다. 그녀는 초점조차 맞지 않는 눈으로 무언가를 애타게 찾듯 두리번거렸다. 그 손에서 절박함을 느꼈다.그것은 간절히 무언가를 구하는 갈망이었다.

괜찮아요?”

…?”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과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갔음을 깨달은 듯 황급히 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섰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부딪쳤어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어지러워서. 조금 어지러워서.”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뭐야 멀쩡하잖아? 사람들의 평가처럼 어딘가 모자라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창피했는지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괜찮은지 살펴봐요. 어디 다쳤으면 병원엘.”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말과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했다.

괜찮은 듯 보여 일어서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았다.

혹시, 이런 노래를 아시나요?”

라면서 시작된 노래. 나는 다 듣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말로 노래를 끊어버렸다.

모르겠는데요? 관심 없습니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저기요! 다 들으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들어주.”

, 정말! 관심 없다니까요? 그렇게 노래를 찾고 싶으면 공연장을 다니던가!”

끈질기게 애원하는 모습을 뿌리치듯 외면하고 자리를 떴다.

멀쩡하다는 말은 취소다. 뜯긴 돈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고, 집 나간 가족을 찾는 것도 아니고, 겨우 노래 한 곡, 가수 한 명 찾겠다고 거리를 헤매다니. 완전 미친 게 확실하다.

끝까지 들어볼 걸 그랬나?

이번엔 파랑새 극장 근처의 거리에서 그녀를 봤다.

병원 환자복을 걸친 모습이었다. 역시 다친 건가? 결국 병원에 간 건가?

그만 두자. 내겐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인호 형의 자리를 대신할 베이시스트를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구인 광고를 붙이던 중이었다. 연습실이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실력이 좋은 멤버는 당연하고, 벌써 3년이나 홍대서 굴렀고, 몇 개의 클럽 공연과 각종 페스티발에 빠지지 않는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비록 일류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꽤 좋은 밴드라고 생각한다.

서둘러 붙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연습실 건물 주인의 번호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했다. 연습실 임대료를 올리겠다는 말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길 바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주인 아저씨였다.

-잠깐 봤으면 하는데.

무슨 일이신데요?”

-만나서 말하지. 언제가 좋겠나? 내가 저녁에 그쪽으로 갈까?

아닙니다,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고.기다릴게.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오 만원. 홍대 내에서 이런 가격으로 방음 장치가 된 연습실을 얻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밴드에게 연습실은 곧 실력이었다.

착잡했다. 얼마나 올려 달라고 할까?제발 너무 많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십 만원? 이십 만원? 그 정도만 되도 어떻게든 마련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남은 짐을 꾸리고 시동을 걸었다.

학생, 미안해.어쩔 수가 없어. 좋은 조건으로 건물을 산다는 이가 있어서.”

잘못 짚었다. .

내가 월세 몇 푼에 이러는 사람 아니란 거 학생이 잘 알 거야.”

제가 새 주인에게 알아보면 안 될까요? 임대료도 원한다면 좀 올려드릴 수 있고요.”

나도 물어봤지. 근데, 허물고 다시 지을 생각이래. 1층은 프랜차이즈 가맹점, 그 위는 사무실로 한다더군. 지하는 주차장이고.”

월세를 올린다면 어떻게든 마련해볼 텐데,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다면 방법이 없다.

야박하다는 건 알지만. 이사 비용이랑 해서 넉넉하게 줄게. 이달 말까지 비워줬으면 좋겠어.”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 ?중요하다. 건물 주인의 입장도 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당장 갈 곳부터 알아봐야 하는 입장에 처하다 보니 원망스러울 뿐이다.

주인 아저씨도 나서서 연습실을 알아봐 주겠다면서, 자신도 우리 밴드의 팬이라며 음악을 계속 하라고 한다. 그렇게 좋아하면 건물 안 팔고 계속 연습실을 빌려주시면 되겠네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 소식을 어떻게 멤버들에게 전해야 하나 고민이다. 가진 돈으로 홍대 근처에서 연습실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일 것이다. 가뜩이나 인호 형 일로 다들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인데.

갑자기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솟구쳤다. 하나 둘 떠나간 동료들의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한 구석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점점 일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멤버들에게 알리기 전에 괜찮은 연습실이라도 구할 요량으로 여기저기 수소문 하고 다녔지만 역시나 적당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미 물가가 오른 것은 둘째치고, 이 근처는 홍대라는 특수한 문화에 편승하고자 한 장사꾼들의 좋은 먹이감이 된지 오래였다. 빌딩 임대료는 점점 더 높아져가고 30년 전통의 제과점은 결국 문을 닫았다. 하나 둘씩 익숙한 가게들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대기업의 상점들이 하나 둘 차지하는 걸 몇 년 동안 지켜봐 왔다. 괜찮은 까페나 베이커리는 모두 상수동쪽으로 옮겨갔다.

상수동이나 연남동, 창전동 쪽을 알아봐야 하려나? 조금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으니까.

실례합니다.”

깜짝이야!”

?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나 봐요?”

홍대 유령녀? 그녀가 왜?

오늘은 병원복이 아닌 흰색 무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기억하시겠어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의 그녀는 다행이라는 숨을 내쉬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례인 줄 알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노래라면 관두십시오. 알고 싶지도 않고,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르지만 관심 없어요.”

어딘가 상처 입은 표정의 그녀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금새 사라졌다.

이봐, 난 당신이 아니더라도 힘들어 죽겠거든요? 당장 연습실도 알아봐야 하고, 내가 한가롭게 당신 노래나 들어주고 아는 노래인지 누가 불렀는지 대답해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게 아니라……”

그럼 뭡니까? 빨리 말하시죠, 바쁩니다.”

도와주세요.”

뜬금없이 도와달라니. 완전 기나 도를 아십니까 수준이다. 역시 상관하는 게 아니었는데.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 정도면 될까요?”

천만 원짜리 수표였다. 지금까지 만져보지 못한 거액의 종이에 놀랐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분노였다.

그러니까. 지금. . 고용하겠다는 겁니까?”

고용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몇 일 동안 저를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왜 납니까?”

처음이었어요.”

뜬금없이 처음이라니.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은.”

분노 다음은 짜증이었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상황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빈정거리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제가 이 수표를 가지고 도망가면 어쩌실 겁니까?”

상관없어요. 그러고 싶으면 그러셔도 되요.”

뭐냐, 이 여자. 어디 가출한 재벌가 외동딸이라도 되는 건가. 기가 막혔다. 누구는 천만 원짜리 수표를 종이조각 취급하는데, 나는 한 푼의 돈에 벌벌 떨어야 하는 가난한 인생이라니.

내 딱딱한 목소리와 굳어진 얼굴을 본 그녀는 무언가 눈치챈 듯 했다.

화나셨나요?”

저 그렇게 나쁜 놈 아닙니다.”

죄송해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만큼 절박했기에……”

화가 가라앉자 눈 앞에 있는 수표가 주는 의미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 정도면 새 연습실을 구하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존심은 잠깐 밀어두자.

좋습니다.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그녀와 나의 계약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저녁 몇 시간. 노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데리고 가달라는 것뿐이었다. 홍대에 언더 뮤지션은 많다. 클럽도 많다. 심지어 길거리 공연도 많다. 요구사항만 놓고 보면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무엇을 찾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라는 것과 몇 소절의 멜로디와 가사 한 줄.

그러나 듣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분명 기억해 낼 거라고 한다.

별 수 없이 홍대 밤거리에서 열리는 클럽이란 클럽은 모두 다 쑤시고 다녀야 했다. 특히 여성 싱어가 있는 밴드나 뮤지션의 공연이란 공연은 전부 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생각 좀 해봅시다.”

사연이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었다. 그러나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이젠 물어볼 때가 된 것 같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말해봐요. 정식 음반으로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길거리 공연? 아니지, 그러면 가수도 기억할 텐데.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건가요? 아는 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고. 정말 이 세상에 있기는 한 노래입니까?”

설명하기 복잡한데…… 분명히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희미해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행의 부작용 같은 건가.”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여행? 어디 멀리서 온 건가. 머리라도 다친 건가.

여행? 어디서 왔는데요?”

대답이 없었다. 슬슬 내 얼굴에 짜증이 서리기 시작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래라고 하면 믿어줄래요?”

내 얼굴에 분명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SF 영화도 아니고. 아니 영화나 소설을 너무 봐서 미친 건가?

역시 안 믿겠죠?”

당연하지. 그걸 믿으면 내가 미친 놈이게.

이름이 뭡니까?”

말해도 모를 거에요. 그래도 굳이 이름이 필요하다면……”

잠시 뜸 들이더니 말했다.

유미란. 진짜 유미란은 아니에요. 잠시 몸을 빌리고 있을 뿐.”

점입가경이다. 내가 봤던 병원이 분명 정신병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거기 정신과가 있었던가?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지금 댁이 미래에서 왔고,그것도 노래를 찾으려고 왔다는 겁니까?”

.”

그 노래가 그렇게 대단해요? , 유명한 가수의 미 발견 노래라도 되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노래가 없거든요. 나이가 많은 분들은 기억하지만 저 같이 어린 사람들은 노래를 들은 적이 없어요.”

노래가 없다니? 뭐야, 미래에는 노래가 사라진단 말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여기와는 많이 달라요. 문화라는 것이 없어요. 정부가 통제하는 세상이죠. 모두 보라는 것만 보고, 읽으라는 것만 보고, 들으라는 것만 들어요. 하루 하루가 정해져 있고 같은 것을 입고 같은 것을 먹어요. 그게 잘못인지도 몰라요. 그냥 그러라니까. 그게 당연한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노래가 발견된 거예요. 이미 음악이 사라진 시대인데, 유일하게 발견이 된 거죠. 골동품 음악기계가 그 노래를 처음 뱉어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고 해요. 노래라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구나,사람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결국 정부에서 알아 버렸고 금지시켰죠. 그걸로 충분할 줄 알았지만 그들도 예상하진 못했죠. 노래 한 곡이 그런 여파를 미칠 줄은. 노래는 이미 그들에게 희망이었던 거죠. 그것을 빼앗긴 사람들은 전부를 빼앗긴 거나 다름없다는 걸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수 천의 수 만의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어느 누구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노래를 허용해줄 수 밖에 없었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모든 이들이 궁금해했지만 하지만 어느 곳에도 정보는 남아있지 않았어요. 나는 그걸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왔고요.”

이 여자, 상상력이 뛰어나던가 아니면 정말 미친 게 확실하다. 아니면 미쳐가는 중이거나. 더는 묻지 말자.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부럽다는 것. 그 노래를 부른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는 것.

그 후로도 공연이란 공연은 모두 찾아 다녔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차츰 노래를 기억해냈다는 것이다. 그리 뛰어난 곡은 아니었다.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노래에 가까웠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고통을 노래하고 그래도 길은 찾아야 한다는 가사가 좀 많이 닭살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노래를 녹음했다. 아는 이들을 통해 그녀의 사연을 전달(물론 미래의 이야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하고 찾는 일에 도와달라 부탁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 노래는 마치 이 세상에 없는 노래 같았다.

그 동안 그녀에 대해서 사소한 몇 가지를 알았다.

그녀가 입고 있던 병원복은 그녀가(정확히는 유미란이라고 꼭 꼬집어서 그녀는 말한다) 현재 입원해있는 병원의 옷이며, 간단한 검사와 치료 때문인지라 외출이 자유롭다는 것. 바늘 땀으로 만들어진 봉제 인형을 신기해하고, 갓 만들어진 수제 애플 파이의 잼을 뚝뚝 떨구며 먹는 것을 좋아하고 휘핑 크림이 올려진 캬라멜 마끼아또를 좋아하고 일본식 라멘은 처음 먹어봤으며 젓가락질을 못한다는 것. 웃을 때 뺨에 보조개가 생기고 즐거운 것을 발견하면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눈이 반짝거린다는 것. 의외라면 수학과 공학을 잘하고 물건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정도일까. 가끔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시간이 어떻고 차원이 어떻고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 밴드는 결국 끝나버렸다.

연습실 문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인호 형의 빈 자리가 미친 영향이 컸다. 지후는 결국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고, 평소 음악 노선이 달랐던 종대와 나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충격은 덜 했지만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지금까지 할 만큼 했다. 이제 그만둘 때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 인생은 노래처럼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건 아니구나.

그녀를 만나 이제 음악 찾기 놀이를 그만두겠다고 전했다.

그래서 홍대를 떠나려고요. 약속은 지킬게요. 노래의 정체도 궁금하고. 그러니 돈은 되었어요.”

음악을 관두실 건가요?”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만두지 마세요.”

당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이었지만 무시했다.

당신이 뭘 아는데요? 음악으로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해요? 당신처럼 한가하게 음악 찾는 여행이나 할 처지면 좋겠네, 나도. , 그렇구나. 미래에는 음악이 없어진다고 했던가? 없어질 걸 뭐하러 해요? 아니지, 어차피 나 같은 무명의 가수는 미래까지도 가지도 못할 텐데 뭔 걱정이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독설을 그녀는 잠자코 듣기만했다.

나는 홍대에서 인디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꿈을 쫓는다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내내 떠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노래를 들었을 때가 여섯 살이었어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고였고, 난 졸지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죠. 그때 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말도 할 수 없었죠. 어둡고 긴 터널에 갇힌 기분.”

사고의 후유증으로 자폐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몰래 이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노래를 듣다가 마구 울었던 기억이 나요. 터트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기분. 억울하고 무섭고 그립고…… 그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거예요. 그제야 난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노래가 저를 구해준 셈이죠.”

그래서 찾기로 결심했어요. 노래를 부른 사람이 누군지, 왜 이 노래를 남겼는지.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유치하죠?”

나는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대답으로 대신했고, 그녀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은 점점 더 믿음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노래를 찾는 마음은 분명 진짜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만두지 마세요. 당신의 음악 하나로 위안받는 이들이 세상 어딘가엔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나처럼. 그 사람도 당신의 노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노래 찾기는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녀는 초조해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입버릇처럼 되뇄다. 슬슬 지쳐갔다. 그녀도 나도.

그녀와 약속한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나 또한 홍대를 떠날 것인지, 음악을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아마도 여기가 아닌가 봐요. 대체 어디서 계산 착오가 있었던 걸까.”

계산 착오. 나도 그녀처럼 계산 착오를 한 것일까. 분명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 나의 계산 착오였을까.

오늘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딘데요?”

그녀가 가고 싶어한 곳은 벽화 골목이었다.

벽화 골목은 언제나처럼 온갖 색체의 향연으로 가득했다. 이 거리에 들어서면 밝고 경쾌한 무언가와 함께 온 몸이 따뜻해진다. 그림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 숨어있는 웃음과 해학을 찾을 수 있다. 마치 여러 가지의 삶, 그 자체를 대신한 듯한 그런 그림들.

난 여기가 좋아요. 뭐랄까, 자유분방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그런 느낌?”

그녀가 선 벽에는 Do you have Color? 라고 선명히 적혀있다.

봐요. 난 이 그림이 좋아요. 거긴 이런 게 없거든요. 이 곳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게문화였어요. 공연장엘 가면 내 심장이 같이 두근거리고 벅차 올라요. 소리지르고 싶어지죠. 재미있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구 웃게 되요. 슬픈 노래를 들으면 어느 새인가 눈물이 고여 있어요. 이 모든걸 표현할 수 있는 시대인 게 부러워요. 좀 더 머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면 되잖아요? 급한 거 아니면 좀 더 머물러요. 곧 거리 축제 기간이니 프리 마켓도 열릴 거고. 좋아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이 한 순간 반짝인 듯 보였으나 금새 사그라졌다.

혹시 병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녀는 아니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안 아프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요. 사람을 자꾸 병자 취급하면 화 낼 거예요. 자자, 다음 그림 보러 갈래요? 아니다,배 고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녀는 급히 화제를 바꿨고 배고프다 성화를 부렸다. 말하기 싫다는 그녀의 대답이었다.

빨리요, 빨리!”

결국 그녀가 잡아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이 헤어짐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은 찾아왔다.

그녀가 부른 노래에 내 연주를 곁들여 새로 믹싱한 버전의 미디 파일을 만들었다.마지막 선물로 줄 생각이다. 지난번처럼 간이 녹음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니 오래도록 음질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찾고자 한 일은 실패했지만 적어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을 얻으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이 지났다. 결국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몇 일째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하나 없었다.

상상 마당 앞에도, 벽화 거리에도 그녀는 없었다.

아는 이들이 그녀의 안부를 물어본다. 그러나 나도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없던 것처럼 홍대서 사라졌다. 혹시 많이 아픈 건가? 아니면 정말 퇴원이라도? 연락도 없이?

무작정 병원으로 향했다.

안내데스크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4층 병동으로 올라갔다.

유미란. , 408호실 환자요?”

순간, 간호사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환자분과는 어떤 관계신가요?”

친구인데요. 여기 입원했다고 들어서.”

의외네요. 생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니. 떠나고 난 다음에야 찾아오는 사람이 다 있네.”

생전? 떠난 다음? 대체 무슨 소리지?

유미란 환자분은 어제 아침에 사망했습니다. 가족이 없다고 해서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바로 화장을. , 그러고 보니 누군가 찾아오면, 어디 있더라. 진짜로 올 줄은 몰랐는데. , 여기 있네요.”

죽었다고?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거듭거듭 물었고 유미란이 내가 아는 그 여인인지를 확인했다. 그녀였다. 이미 말기 뇌종양 환자였고, 병원에서는 고통을 덜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간호사의 말이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어떻게 병원을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정신없이 걷고서야 내 손에 한 통의 편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간호사가 말해주길, 죽기 전 날 밤에 맡겼다고 한다. 누군가 찾아오면 전해달라고.

나는 힘겹게 봉투를 뜯고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편지 안에 적힌 내용은 아주 간결했다.

- 부디 음악을 계속 해주세요. 듣는 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주세요.

단정한 필체였다. 마치 그녀처럼 또박또박 적힌.

미친 년. 고맙다는 인사나, 잘 있으라는 인사 정도는 하고 가도 되잖아. 나쁜 년. 독한 년.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현실 도피를 하기 위해서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병으로 인해 그러한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녀의 말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2012년 가을, 홍대에 불현듯 나타나 찾던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여행이었을 몇 일이 그녀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영원히 그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좋아했던 벽화 틈에 MP3P가 담긴 통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듣게 될 노래가 이 곡일지, 아니면 다른 곡일지는 모르겠다.

나는 홍대에 남기로 했다. 종대랑 지후에게 다시 한번 연락 해볼 생각이다. 연습실도 새로 구하고 거리 공연도 열 것이다. 음악을 찾는 그녀에 대한 노래도 만들 생각이다.

사소한 바람이라면 그녀가 정말 미래에서 온 사람이고, 죽은 것이 아니라 미래로 돌아간 것이며, 여섯 살의 어린 그녀가 어느 날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단지 그녀의 이야기에서처럼 음악이 없는 세상이 아닌 가득한 세상에서 말이다.

Thanks to : Johnny & Searching For Sugar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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