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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의 북쪽 절반은 눈에 덮여 있었다.

 눈과 얼음의 땅 가장 가장자리에는 십이월의 별자리가 월식의 바다에 걸쳐져 있었고, 그 고요한 별들 아래 푸른 수염과 잿빛 눈을 가진 늙은 왕이 살았다. 왕은 생애의 절반을 추위와 침묵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지난 생애 내내 그러했듯 음전히 죽음을 받아 들였고 그리하여 그의 어린 아들이 왕좌를 물려 받았다.

 열 다섯 살 된 그 어린 왕자는 말끔해서 도자기 주전자의 밑동처럼 매끄러운 턱과, 하얀 이마 위 곁으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금발, 아버지를 닮은 잿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도마뱀과 나비가 새겨진 루비 왕관을 물려받아 흰 자작나무의 왕으로 불렸다.그의 죽은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작나무 왕이 된 왕자는 열 살 된 여동생과 함께 왕국을 다스렸는데, 눈과 얼음이 흔히 그러하듯 왕국은 겉보기에 지극히 평온하고 투명했으나 그 내부는 그렇지 못했다.

 왕자가 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돌아간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하들의 뜻에 따라 먼 남쪽 나라의 공주를 신부로 맞았다. 겨울이 짧고 해가 긴 나라의 외동딸이었다. 공주는 더운 나라에서 나고 더운 나라에서 자랐으되 겨울 새벽처럼 시리고 창백한 뺨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갑내기였다.

 두 사람은 제법 사이가 좋았다.

 소꿉놀이를 할 나이가 지났건만 나란히 손을 잡고 얼음 정원을 거닐었고 수정 찻잔 하나를 나누어 썼다.

 공주는 베갯머리에서 속삭였다.

 [아시나요? 별이 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답니다.]

 그 해에 공주의 나라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죽었고 더는 이름도, 금관도, 다이아몬드로 만든 셉터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공주는 울었고 사흘 만에 의연히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우러러 중얼거렸다.

 [별이 질 때 소원을 빌면…….]

 십이월의 별자리가 떠 있었어야 마땅한 먼 지평선은 새하얀 만년설만큼이나 눈부신 햇살로 가득했다. 찬란한 백야 덕분에 자작나무 왕이 다스리는 땅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한 해의 절반은 그러했다.

 공주는 남은 절반, 즉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보아 온 검고 무시무시한 밤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방문을 걸어 잠갔다. 기도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그녀를 두고 왕자였던 왕은 갑옷과 칼을 찾아 들었다. 다섯 나라가 연판장을 돌렸고 서로 군사를 내어 이미 사라진 나라를 위해 싸웠다.

 전쟁은 작은 불꽃으로 시작해 마른 들판을 태우듯 단숨에 타올랐다. 거대한 토사가 쏟아져 내리듯이 군사들이 겹겹이 내달렸으며 그 천둥 같은 발굽소리가 지천을 울리자 숲들은 시들어 사라졌다.

 [메레디스. 그녀를 부탁해.]

 왕의 여동생, 푸른 수염과 잿빛 눈의 늙은 왕의 어린 딸이었던 소녀는 오라비의 휘황한 갑옷에 자줏빛 망토를 걸쳐 주며 그 당부를 들었다.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 소리와 울려 퍼지는 향 냄새에 그녀는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았다.

 정의로운 신의 뜻을 빌어 시작된 그 전쟁은, 장장 십 년이나 이어졌다.

 절반의 백야와 절반의 낮과 밤을 거치며 메레디스 공주는 사라진 왕국의 공주와 함께 자작나무 왕의 귀환을 기다렸다.

 [떨어지는 별에 기원을 드리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사라진 왕국의 공주는 메레디스에게 말했다.

 메레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별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기원을 올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잘 해결되리라.


반의 백야 내내 빛 너머의 성좌를 그리며 두 공주는 나이 들었다.

 절반의 낮과 밤 내내 오로지 밤을 꿈꾸고 밤하늘을 샅샅이 훑으며 기도와 기원을 반복했다. 별은 잘 떨어지지 않았고 공고한 성좌란 흡사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절벽과 얼음협곡처럼 보였다.

 [믿어야 해요, 메레디스.]

 사라진 왕국의 공주는 꿈 꾸는 듯한 눈매로 하늘을 가리켰다.

 전황은 때로 좋았다가 순식간에 나빠졌으며, 그 모든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왕국은 십이월의 별자리가 걸린 월식의 바다처럼 내내 무표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의 믿음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먼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믿어야 해요, 메레디스. 나는 기원을 올렸습니다. 신께서는 답하실지어니.]

 메레디스는 그 파리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거짓말처럼 두 달이 지난 후 전쟁이 끝났다. 자작나무 왕은 한쪽 눈을 잃어 흑철석 투구로 머리를 가렸다. 새파란 수염이 성성한 턱만을 내놓고 그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왔다. 메레디스는 오빠의 하나 남은 잿빛 눈을 찬찬히 올려다 보았다.

 [언니가 돌아가셨어요. 오라버님, 신께서 그분을 모셔 가셨습니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염에 덮인 오빠의 입술이 웃는지 아니면 소리 없이 으르렁거리는지 공주는 알 수 없었다.

 왕은 장례를 치른 무덤으로 걸어가 오랫동안 서 있다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공주는 오빠의 품에 안긴 해골을 발견했지만 차마 그에 대해 묻지 못했다. 보고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린 공주의 등 뒤에서 왕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별에 기원하면 이루어진다 하셨어요. 언니께서는 그것이 마지막 말씀이셨을 만큼 오라버님의 안위를 염려하셔서…….]

 [떨어지는 별을 보았느냐? 메레디스.]

 [아니오. 저는 못 보았습니다.]

 [나는 보았다.]

 공주는 다소곳하게 숙였던 고개를 반짝 들어올렸다. 왕은 명백히, 메마른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나는 보았단다.]


골을 품에 안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힌 왕은 사흘 만에 창을 열었다. 신하들은 열을 지어 왕을 찾았고 새로 왕비를 맞으라 청하였다. 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레디스는 오빠의 무릎에 올라 앉은 해골에서 반사하는 빛에 눈을 감았다.

 오빠는 어찌하여 푸른 수염 아래 웃으며 날은 내도록 밝고 별은 지지 않는 것인지, 젊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과부처럼 검은 베일을 쓴 메레디스 앞에서 여자들은 제각기 다른 빛깔의 머리칼을 흰 베일로 감싸고 자작나무 홀을 손에 쥔 채 왕성에 발을 디뎠다.

 왕은 그녀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메레디스는 뻐기며, 혹은 주눅들어 왕성 식구가 된 많은 여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었다. 여자들은 금세 울었고 쉽게 죽었으며 왕성은 소란스러워진 속도대로 고요를 되찾곤 하였다. 슬픔은 거창하지 않았고 통곡소리는 창을 넘지 못했다.

 왕은 울듯이 웃었다.

 그의 검은 녹슨 채 허리춤에서 잠잤지만 해골은 점점 어렸던 그의 턱처럼 부드러운 유백색 도자기같이 변했다. 메레디스는 왕가의 식탁에서이따금 오빠가 가져다 놓은 해골의 닳아버린 부분을 볼 수 있었다.

 기름을 칠해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국은 아직 백야였다.

 왕이 제 죽은 신부를 위해 빛나는 갑옷을 입던 날의 메레디스처럼 어린 소녀들이 스무 명이나 더 왕궁으로 들어온 날, 메레디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오빠의 방을 찾았다. 방 안을 살풍경하였고 그림들은 전부 찢겨진 채 거꾸로 걸려 있었다. 자작나무 홀 서른 개가 부러지거나 혹은 먼지 낀 채 벽에 기대었고 문들은 전부 잠겼다. 메레디스는 해골 위에 손을 얹은 오빠를 마주 보며 앉았다.

 [처음이구나.]

 [무엇이 말인가요, 오라버님.]

 [네가 내 앞에 똑바로 마주 앉은 것이.]

 [오라버님을 존경하여서 그렇습니다.]

 [새 왕비를 보았니?]

 [못 보았습니다.]

 [새 귀비들은 보았니?]

 [아니오.]

 떨리는 마음을 감추듯 옷가슴을 누르며, 메레디스는 물었다.

 [오라버님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녀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각자에게 주어진 방에서 쉬고 있단다. 더러는 기도하고 더러는 별을 기다리지.]

 [백야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별이 보일 리 없습니다.]

 [별이 뜨는 밤이 찾아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릴 작정일 게야.]

 [사람이 그리할 수는…….]

 [있단다.]

 왕은 다정하게 답하였다.

 [사람은 그리할 수 있단다. 사람이 그리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메레디스. 나는 전장에서 얼마든지 보았다. 별이 지는 것도, 별이 뜨는 것도, 기원이 기원 위에 덧씌워지는 것도.]

 하나 남은 잿빛 눈이 누그러졌다. 메레디스는 기억 속의 늙은 아버지와 꼭 닮은 오빠의 수염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지는 별을 보고 무엇을 기원하셨습니까? 오라버님.]

 [죽은 그녀가 빌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니는 오라버님의 안녕만을 기원하셨습니다.]

 [무엇을 기원하든 크게 다를 수 없을 게다.]

 [오라버님은 저와 언니를 위해 기원하셨습니까?]

 [너희들을 위해 빌었지. 그러나 다르지 않다. 무엇을 기원하든 그것은 막연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왕은 찻잔을 내밀었다. 식은 차가 담긴 잔은 해골과 똑 같은 빛깔이었다.

 [메레디스, 들어 보렴. 질 것을 바라 전쟁에 나서는 이는 없다. 혹 지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라 해도 죽으려고 검을 들지는 않는다. 죽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살기를 바라느니, 메레디스 너는 이것을 아느냐?]

 [살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나는 죽어도 좋다고 외쳤다.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섰다. 말을 달리고 검을 내지를 때 나는 상대의 목숨을 꿰뚫기를 기원하는 것과 똑 같은 무게로 내 승리를 염원하였다. 이 찰나와 다음 찰나에 살아 남는 것이 전부인 땅에서, 그 한 순간과 다음 순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는 아느냐? 내가 죽거나 그가 죽는다. 결국 이 죽음과 다른 죽음이 있을 뿐이란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 절반의 무게를 가볍게 긍정한다.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사람은 산다. 만약, 이 다음 순간에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미리 죽어 나쁠 것 없을 텐데도 악착같이 조금의 가능성에 기대어 버텨 보게 되어 있다. 메레디스, 네가 진정 그것을 아느냐?]

 공주는 의아했다.

 그녀는 다만 사라져 버린 소녀들의 안위를 염려해 오빠를 만나러 왔을 뿐, 그의 기이한 전장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소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새 왕비와 새 귀비들은 모두 별을 기다리고 있단다.]

 그는 장갑을 긴 손으로 무수한 문들을 가리켰다.

 [제가 감히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럴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메레디스.]

 쩔걱거리는 한 뭉치의 열쇠가 해골 위에 놓였다. 해골은 마치 화려한 티아라를 쓴 생전의 여인처럼 보였다. 메레디스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열쇠에 손끝이 닿자 불에 덴 듯이 떼어내고 물러나 버렸다.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가에 매달린 주름이 놀라울 만큼 늘어, 공주는 비로소 그녀 남매가 더는 어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곱 번의 낮과 밤이 더 지나는 사이 그녀는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악몽에 시달렸다. 밤에도 지지 않는 태양에서 도망치기 위해 창마다 매단 두꺼운 커튼도 뿌연 빛을 다 막아내지 못한 탓에 그녀는 연신 잠에서 깨었다. 빛은 사라진 나라의 공주가 꿈 꾸듯 말하던 것처럼 축복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십이월의 별자리가 월식의 바다에 발을 담근 채 한 해의 절반을 태양 뒤에 숨는 그 차가운 왕국에서, 백야의 빛이란 썩어버린 양젖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메레디스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눅진눅진한 침대에서 벗어났다.

 양젖 같은, 예의 그 흐리멍텅한 빛이 사위를 폭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의 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다 타고 밑동만 남은 양초 곁에 놓인 열쇠뭉치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매달린 열쇠들에 각각 일백 년씩을 보탠 것처럼 무거웠다.

 열쇠를 들고 그녀는 문들 앞을 한 바퀴 돌았다.

 태양은 지지도 뜨지도 않은 것처럼 미적지근한 빛을 줄줄 흘리며 성 주위를 맴돌고 있을 터였다. 메레디스가 문들 앞을 맴도는 것과 똑 같은 속도와 똑 같은 휘청거림으로. 그녀는 오빠를 닮은 금발을 쓸어 올리고 어느 문 앞에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하나 밀어 넣었다.

 거짓말처럼, 첫 번째 열쇠가 잠금쇠를 풀었다.

 방 안은 후텁지근했다. 그녀는 곧 벽에 매달린 관솔불이 타는 소리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불은 새것처럼 생생했다.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발치에 놓인 천 조각이 무엇인지 그녀는 곧 깨달았다.

 비명을 터뜨리는 대신 가까스로 뒤로 물러선 메레디스의 등이 열린 문에 닿았다.

 천 조각이 아니라 가죽.

 짐승이 아니라 손과 발과 성기와 머리털이 고스란히 달린 사람.

 사냥 당한 곰처럼 당당하게 사지를 벌리고 드러누운 그것 위로 갈퀴질 하듯 남은 흔적은 필시 칼과 채찍에 의한 것이었을 터였다. 메레디스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가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못 본 척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세 개의 문을 건너 뛰었고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집어 문구멍에 밀어 넣었다. 이번에도 문은 쉽게 열렸다.

 두리번거리며 걷던 메레디스의 이마에 거꾸로 매달린 여자의 허벅다리가 툭, 부딪혔다.

 뚝, 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양동이에 꽂힌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뼈였고, 탁자에 놓인 것인 검에 꿰인 창자였다.

 여자들의 머리 몇 개가 그 뒤편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눈과 입에 한 움큼의 머리카락과, 한 송이씩의 장미를 문 그것들은 기괴함이 지나쳐 대단히 처연하게 보였다. 메레디스는 달렸다.

 달리다 주저 앉았고,

 주저 앉았다가 기었다.

 넷, 다섯, 여섯, 일곱 번째 문은 열쇠를 꽂을 것도 없이 그냥 열렸다.

 어디에서도 여자들은 죽어 있었다. 그녀들의 온전한 몸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러나 작은 부분들은 어디에나 놓여 있었다. 메레디스의 손에서 열쇠뭉치가 떨어졌다.

 피 웅덩이에 떨어진 그것은 이내 가라앉을 것처럼 보였다.

 [메레디스.]

 그녀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오빠, 이 백야의 왕국에서 가장 신분 높은 남자가 썩어버린 한쪽 눈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다른 쪽 눈동자 가득 붉은 광채를 뿜으며, 그는 웃었다.

 [내 한쪽 눈이 불탈 때 나는 그래도 죽음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죽어가면서도, 썩어가면서도 혹 이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바랐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메레디스는 홀린 듯 몸을 숙여 피에 젖은 열쇠뭉치를 주워 건넸다.

 [오라버님 어찌하여…… 어찌하여서…….]

 [별이 지기를 기다려 보았다.]

 [네? 그 무슨 터무니 없는 말씀이십니까!]

 [말했잖니. 어떤 순간에도 그 다음 순간의 기적을 기다리게 마련이라고. 메레디스, 기원이란 그런 것이다.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불로 살갗을 태워도,
천천히 바늘을 꽂아 넣어도,
사람은 울며 비명을 지르며 견딜 수 없어야 마땅할 그 고통을 견딘다. 지극한 고통의 바로 다음 순간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메레디스는 매일 밤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벽을 긁으며 기원하는 소리를. 사슬을 쩔겅거리며 기어다니는 짐승들의 환상을 보았다. 그녀는 때로 자신의 두려운 예감들의 실체에 가까이 가기도 했으며, 잠결에 모든 것을 명징하게 꿰뚫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을 청했다. 잠들었고, 잊었다. 왕국은 아직 백야를 지내는 중이었다. 빛을 견디며 낮과 밤이 찾아오기를 천천히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므로 메레디스는 울음소리를 잊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짓누르듯 옷가슴에 한쪽 손을 얹었다. 피 묻은 열쇠뭉치를 주워들었던 탓에 붉게 변한 제 손가락들이 흔적을 남기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메레디스, 네가 정녕 아느냐? 별에 기원하는 마음을. 죽음의 바로 언저리에서 기적을, 환상을 고대하는 그 마음을 백야의 딸이며 성좌 없이도 생의 절반을 견딜 줄 아는 네가 아느냐?]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녀는 오빠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방 안을 채운 백야의 빛은 멀리서 짐승을 태운 후에 남는 연기처럼 뿌옇고 무거웠다. 빛은 아래로 아래로 깔려 그녀의 발을 휘어 감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이 기원의 본질이 아니겠느냐?]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의 구원을, 누군가 한 찰나에 기적을 가져오기를 바람이 삶의 정수가 아니겠느냐?]

 기원이, 흐느끼며 별을 기다리는 목소리가 빛에 엉켜 흘러 들어왔다. 메레디스는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박였다. 오빠의 등 뒤로 무거운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 같은 환상을 보았다.

 피냄새가 진동했다.

 아직 살아 있는 몸뚱이가, 날카로운 송곳에 꿰이며 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돌 벽을 손톱으로 긁어 내리면서 여체가 몸부림쳤다. 떨어지는 별의 그 짧은 찰나에 기원하기 위해 지새운 먼 나날들이 그녀에게 떠올랐다가 섬광처럼 흘러 사라졌다.

 그녀는 옷자락 사이에 피 묻은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왕국은 아직 백야였고, 태양빛은 무겁고 질척거려서 하얀 피처럼 지독했으므로 메레디스는 손에 쥔 검을 가누지 못하였다.

 작은 기대를.

 그녀 역시, 오빠의 말대로 그 작디작은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에 기원을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성좌 아래 박명의 나날을 견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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