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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라푼젤 - 흔한 풀

2015.05.31 23:2005.31

라푼젤 - 흔한 풀



너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숨어 우짖는 나이팅게일 같은 사랑스러운 노랫소리가, 숲을 가로지르던 네게 날아들었다고.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울울창창한 그늘도 겹겹이 침대를 뒤덮은 캐노피 같은 그 기이한 숲에서 너는 그녀를 찾아 헤맸다. 때마침 떼지어 날아 오른 까마귀들의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 쭈글쭈글한 노파를 발견했을 때 너는 그녀의 뒤를 밟았고, 이내 그 탑에 당도했다. 노파는 석양을 등지고 흡사 한 자루의 그림자를 풀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 낡고 신비로운 탑을 올려다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그 이름은 이국의 신 같기도 하고,
바다에서 나는 흔한 조개 같기도 하고,
혹은 가뭄과 전염병으로 사라진 저 남쪽 땅의 도시 같기도 했다.


노파의 부름에 답해 눈부신 밀빛 동앗줄이 보였다. 너는 동앗줄이 달빛 한 줌처럼 보였다고 말했으나, 다시 보니 그것은 그저 여인의 머리채였다. 너는 노파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탑으로 다가갔다. 마녀가 아니라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한 돌들이 차곡차곡 쌓인 탑은 유리로 된 것 같았고, 너는 손을 뻗었으나 손톱이 미끄러져 주저 앉고 말았다. 너는 노파를 흉내 내어 그 이상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저 높고 좁은 창 너머로 머리채가 떨어져 네 손에 닿았다.
너는 탑을 올랐다.
너는 그녀를 만났고, 즉시 사랑에 빠졌다.
열 다섯 살 같기도 하고 다음 순간 서른 다섯 살 같기도 한 그 아름다운 여자는 온 방을 한 바퀴 돌고도 다시 그녀 자신에게 돌아올 만큼 길고 풍성한 머리채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채를 품에 안고 그 사이로 뺨을 감췄다. 너는 그녀의 뺨이 붉다고 확신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셨나요?”


그녀는 물었다.


“노파가 부르는 소리를 훔쳐 들었습니다.”


너는 답했다. 여자는 한 쌍의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멀고 먼 동쪽 나라의 흔하디 흔한 풀 이름이랍니다. 밭에서 쉬이 나고 들에서는 더욱 흔하여, 먹을 것이 흔할 적이면 뽑아 멀리 던져 버리기도 한다지요. 허나 제 받은 명이 기박하여, 부모가 몹시도 가물 적에 저를 가졌습니다. 배를 곯아 죽어가던 어미는 남의 밭에 몇 포기 남은 풀에 손을 댔고 위대한 신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신의 딸은 어미가 낳은 저를 빼앗아 풀 이름을 붙이고는 도적의 손에 넘겼습니다. 도적은 다시 도적에게, 그 도적은 다시 도적에게 제 몫을 빼앗겼고 결국 저 마녀가 저를 가졌습니다. 마녀는 더 이상 저를 잃지 않도록 이 마법의 탑을 세우고 십 년이나 가두어 두었지요.”


너는 그녀를 동정하였다.
사랑은 무조건 한 방향으로 흘렀고, 그녀는 그 방향에서 너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당신을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흰 손을 꼭 쥐고 말하자 그녀는 네 눈에 자신의 눈을 붙이고는 상아 같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는 남의 밭에 난 한 포기 풀. 먼 나라의 가엾은 계집애. 그러니 저를 구원하시기 보다, 지금 저를 안아 주세요.”


너는 그녀를 사랑했다.
너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고 말했다.
사랑은 영구히 흐르는 강 같아서 너는 그 끝을 알지 못했다. 너는 걸을 때 사랑 안에 있었고 잠이 들 때 사랑 속에 누웠으며 웃을 때 사랑을 마셨다. 너는 그녀를 저 넓은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두 번의 만남은 세 번의 만남이 되었고 세 번의 만남은 열 번, 스무 번의 만남이 되었다. 일백 일이 되던 날 새빨간 보름달 아래 너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탑으로 갔다. 붉은 달빛에 뒤덮인 유리 탑은 녹이 슨 술잔 같이 보였고 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세 번째에도 대답이 없었다.
너는 탑에 비친 네 구겨진 얼굴을 바라 보았다. 얼간이 같구나. 너는 중얼거렸다. 얼간이. 힘주어 말하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름을 다시 외쳐 부르자, 품 안 가득 안아 힘껏 던진 무엇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머리채였다.
너는 머리채를 잡고 위로 위로 올랐다. 콧망울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높고 좁은 창 안으로 상반신을 밀어 넣은 그 순간, 새된 고함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것이 너를 덮쳤다.
너는 그때 눈을 잃었다고 했다.
장렬한 통증은 오래지 않았으나 처음도 끝도 없고 아침도 밤도 없는 어둠은 오래되었다. 너는 탑 안인지 탑 밖인지 모를 곳을 뒹굴었고 그녀인지 그녀의 머리채인지 모를 것을 껴안았으며 사라진 눈 구멍에서 흐르는 진물을 한 말이나 쏟았다.
너는 그것이 눈물이라고 말했으나,
네 손은 핏물로 가득하였다.
숨 죽인 웃음소리와 철판을 긁어내는 듯한 신음소리 사이로 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적!”


노파였다.


“내 것을 훔치러 온 도적놈!”


노파는 너를 때리고는 잘라낸 여자의 머리채로 둘둘 감아 먼 들판에 버렸다. 너는 머리채에 휘감겨 황야를 기어 다녔다. 오늘과 내일을 모르는 채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너는 세상의 끝으로 갔다. 걷고 또 걸어 발치에 차가운 포말이 느껴질 때까지 너는 백만 걸음을 걸었고, 드디어 왕을 만났다.


너는 왕 앞에 엎드려 노파를 고발했다.
아름다운 너의 그녀와, 사랑과, 빛나는 저 황금달과 같은 머리채에 대해 털어 놓고 네 몸을 감싼 것을 증거로 들이 밀었다. 왕은 재상과 장군을 불러 귀엣말을 했고 두 사람은 다시 시인과 광대를 불러 벽력처럼 외쳤다.


“저것은 낡은 볏짚이 아니냐?”
“저것은 다 썩어빠진 멍석이 아니냐?”


너는 유리탑을 이야기하고 마녀의 목소리를 말했다.
너는 본시 환하였던 네 두 눈을 말하고 네가 보아 온 세상을, 이제는 볼 수 없는 빛을 토로하였다.
왕은 노파를 불렀다.
너는 어둠 속에서 노파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는 멜딩턴의 대공 가문을 모시는 몸으로, 두 분 대공 전하와 비 전하의 뜻을 삼가 받들어 귀한 공녀 마마를 따라 왔나이다. 공녀 마마께서는 와이트벅으로 시집을 가시던 길에 신랑 되실 분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그대로 수절하여 탑에 귀하 몸을 숨기셨나이다. 긴 세월 외로운 탑 속에서 은거하시는 그분의 시중을 들던 차에 사악한 도적을 퇴치했기로 어찌하여 이 천한 년을 불러 모욕하시나이까?”


너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침을 뱉었다.
먼 나라의 풀 이름을 가진 그녀에 대해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날아오르던 새떼들의 새카만 날개들이 오렌지색으로 물들던 서녘을 한 꺼풀씩 훔쳐가던 그 날에 너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땅히 남의 몫을 훔친 자에게서 같은 몫을 거두어야 하는 법.”


빛을 잃은 너는 빛을 향해 삿대질하고, 노파는 너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웃었다. 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왕이 돌아서고 긴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네 귓가를 지나는 사이에.
재상과 장군이 박차를 단 발을 부딪히며 너를 시인과 광대의 손에 넘기는 사이에.
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광장에는 석양이 불탔고 무더위에 지친 새들이 한 마리도 날아오르지 못한 채 층계마다 죽어 떨어졌으며 너는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와도 같은 시야에서 다만 한 줄기 밀빛을 보았다. 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긴 머리채. 황금빛으로 물든 머리채가 네 앞으로 툭 떨어져 내리자 알싸한 자스민 향 속에서 너는 말라 버린 줄 알았던 옛 사랑이 다시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는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위로 손을 뻗었다. 위로, 또 위로.
황금빛 머리채를 붙들고 너는 위로, 위로, 높고도 좁은 그 날의 그 창을 향해 기어 올랐고 너의 목을 휘감은 머리채는 뱀처럼 유유히 너의 세계를 잠식했다.
너는 사랑이란 강물 같다고 생각했다. 질식하며, 침몰하며, 익사하며 너는 넘쳐나는 물길 속에서 헤엄쳤다. 오르고 또 올라 숨이 턱에 붙을 때쯤 겨우 당도하던 그 높고 좁은 창틀 너머 한 뼘짜리 세상을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너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을 때, 먼 나라의 풀 이름을 가진 그녀를 구원하는 대신 훔쳤을 때, 한 번 훔친 것은 다시금 빼앗기게 마련이라고 너는 믿었다고. 그러니 지금 저를 안아 주세요. 그녀는 노래했다고. 너도 역시 그녀와 함께 노래했다고 말했다.


목을 조이는 머리채의 감각 속에서 너는 위로, 위로, 다시 위로 올랐고 야유와 함성은 멀어졌고 불타던 석양이 나자빠져 닳고 닳은 밤이 닥치자 더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말했다.
너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러니 황금빛 머리채를 타고 저 높고 좁은 창 너머로 너는 갔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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