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미로냥 채미가(采薇歌)

2014.04.30 23:0004.30

채미가(采薇歌)




소선국에 왕의 아들이 옥좌에 앉기 전, 사람은 그 시절에도 살았고 청경호는 그 시절에도 이미 맑았다. 왕이 은혜를 내리고 관을 쓴 사내들이 으스대며 초헌을 타고 오갈 때나 그러지 않을 때나 봄은 겨울 다음에 오고 가을은 여름의 꼬리를 물고 물씬 무르익듯이.
청경호에서 십 리쯤 떨어진 수양산을 흔히 서산이라고 부르는데, 거기 여우가 한 마리 살았다.
서산(西山)이 동산이거나 남산일 적부터 여우는 거기 살았다.
여우는 양지 바른 날 넓적한 돌 위에 드러눕기를 좋아했고, 지는 해를 향해 캥캥 짖기를 좋아했다. 여우는 탐스러운 제 꼬리를 자랑했고 날렵한 제 동작을 즐기었다. 건강한 짐승으로 태어나 서산을 한껏 누비는 동안 여우는 문득 산 아래 마을이 궁금해졌다. 여우는 무덤가를 맴돌았고 때로 청경호로 내려가 배를 띄우는 인간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나라가 설 때 크고 작은 전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때 여우는 질릴 만큼 많은 시체를 보고 많은 죽음의 냄새를 겪어 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짐승에 불과하였을 그가 점차 사람 꼴을 흉내 내고 선단을 빚게 된 것 역시 그럴 법한 이야기다. 소선국이 서고 호수가 청경호로 불리며 뭇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아질 즈음 여우는 저를 백호(白狐)라고 이름 붙이곤 사람들 앞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패경보(貝京保)를 만났다.
여우가 잘 나가는 기생 복색을 흉내 내어 청경호로 마실을 나갔을 때, 그는 인근 절에 공부하러 온 소년이었다. 흔한 도령들 가운데 여우가 하필 경보와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은 그저 청경호에 때마침 불어 닥친 한 줄기 봄바람 탓이었다.
한 줄기 봄바람이 버드나무들을 휘게 했고 휘어진 나뭇가지 아래 아른거리는 초록 그림자들이 물결과 함께 이지러지게 하였으며, 나아가 여우가 쓰고 있던 흑주(黑紬) 너울도 뒤흔들었다. 여우는 제 흉내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알아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경보는 젊은 여인이 곤란에 처했다고 여겨 옷을 걷어붙이고 냉큼 청경호로 뛰어 들어, 너울을 건져 주었다.


“기생이 아닌가.”
“기생도 소선의 백성일세.”
“웃는 꽃이라지.”
“꽃도 꺾이면 그저 서럽다네.”


경보가 벗들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는 여우였고, 인간 계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우는 소매로 낯을 가리고 너울을 다시 받아 들며, 슬그머니 경보를 살폈다. 젖은 의복을 툭툭 털며 경보는 벗들에게 돌아갔다.


‘내가 뉘인 줄 알구!’


여우는 심술을 부리고 싶어 그날 밤 몰래 경보를 찾아 갔다. 하늘거리는 자색 항라 적삼을 걸치고 황금 장신구를 치렁치렁 매달았다. 밤 깊어 호롱불을 앞에 두고 책장을 넘기던 경보는 갑자기 날아드는 향내에 고개를 들었다.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내 뉘인줄 그대 어찌 모르는가?”


여우는 문풍지 틈새를 파고들어 살그머니 섰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호롱불을 꺼뜨렸다. 아름다운 여인을 흉내 낸 그 희고 따뜻한 몸에서 발하는 연한 빛이 흡사 언월(偃月)마냥 어두운 방을 밝혔다.


“청경호에서 뵌 소저로군요.”


경보는 빙그레 웃었다. 여우는 뽀얀 젖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저고리를 활활 풀고 내쳐 그 앞에 앉았다.


“난 여우니라.”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자랑하여도 경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난 저 커다란 산을 누비며 너희 인간들보다 더 오래 사는 여우란 말이다.”
“여우셨군요.”
“잡아먹을 테다.”
“어찌 소생을 해친다 하십니까? 낮에는 소생이 도움을 드렸거늘.”
“너희들 무리가 나를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제가 아닙니다.”
“그래, 너를 빼고 나머지를 모조리 먹을 테다.”
“저를 보아 너그러이 눈 감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우 소저.”


은근한 목소리에 여우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계집애가 아니야.”
“실례했습니다. 여우 태태(太太)께서는.”
“나는 네 어머니도 아니야. 나는 여우다. 그저 여우야.”


말하며 여우는 저 자신이 '고작' 무엇으로 지칭될 만큼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경보는 물끄러미 여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려나, 여우 나리.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소생은 패경보라고 합니다. 귀 여우께서는?”
“나는 백호(白狐)다.”
“하얀 여우라니, 그래서야 이름이 못 되지 않습니까?”
“하얀 여우면 그만이란 말이야.”
“별호를 하나 지읍시다.”
“나는 글을 몰라. 나는 그저 백호다. 네깟 인간이 살며 다른 여우를 또 만날까 보냐?”
“그도 그러하니.”


경보는 사람 좋은 웃음과 더불어 끝내 언짢은 기색도 없이 말했다.


“여우 선생이라고 불러 드려야겠군요.”
“여우 형님이라고 해라. 마음 넓게 써서 나도 그대를 경 동생이라고 불러 주마.”


여우는 그렇게 인간 사내와 한 계절을 노닐었다. 여름은 가을을 불러 오고 겨울이 가을을 몰아냈으며 소년은 청년이 되었지만, 여우에게는 눈 한 번 깜박거릴 만큼 짧은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여우는 글을 배웠고 청년이 된 소년은 누누이 벗에게 털어 놓았던 뜻을 펼치기 위해 소선국 수도로 떠났다. 여우는 경보를 기꺼이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오래 사는 짐승은 기십 해는 알뜰하게 보살펴 온 제 여우구슬을 물고 서산에 다니러 온 신령을 뵈러 갔다. 신령 앞에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그는 이만 서산을 떠나겠노라 사뢰었다.


“산을 한 번 등진 짐승이 돌아와 선적에 오른 일은 고금에 드물다. 저 홍진에서 맺은 연분이 내내 미련으로 남아 그 찌꺼기가 사라지지 않는 탓이다. 인간의 정은 그토록 두려운 것이거늘 네가 그에 몸을 맡겨 물들지 않고 정결할 수 있겠느냐?”
“여우구슬에 들인 세월이 크니 내 동생을 돕고 나면 금세 돌아오겠나이다. 내려가 깎일 공덕이 그리 크지 않을 성 싶습니다.”
“다니러 가면 지금처럼 천방지축으로 몸을 변하게는 못 할 터다. 하물며 이 신령한 산을 벗어나니 더할 나위가 없지. 내 너를 가엾게 여겨 패옥을 하나 주마.”
“망극하옵니다.”


신령이 내린 패옥은 한 번 깨뜨리면 무엇으로 둔갑했건 다시 본딧모습을 회복하게 해 주는 보물이었다. 여우는 그걸 쓸 일이 없으니 말짱하게 돌려 드리겠다고 호언하며 패옥을 지니고 서산을 떠났다.


당시 소선국의 젊은 왕은 주색에 빠져 총기를 잃었고 관리들은 범이나 이리 떼처럼 주구를 일삼아, 온 백성들이 허다하게 배를 곯았다. 경보는 절을 떠나 제 나라의 쓸쓸한 광경을 목도하며 좋은 관리가 되어 백성을 돌보리라 다짐했다.
그리하기 위해 수도 응천(應天)으로 떠나는 것이니 발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경보가 마음을 다지며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걷는 동안 여우는 참으로 한가하였다. 그는 소성(蘇城)을 지날 때 꽃 지는 봄을 누리고 머리카락에 잔뜩 버들잎을 붙이며 나뒹굴었으며 항성(恒城)을 지날 때 죽어가는 어린아이들 곁을 사뿐히 지나 썩어버린 시신의 다리를 하나 물고 와서 경보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여우는 경보 또래의 사내로 변신한 몸에 시신의 옷을 거리낌 없이 걸치고 시신의 다리를 씹어 먹으면서 경보가 왜 그리 질색하는 지도 알지 못했다.


“왜 그러느냐?”
“왜 그러긴요. 도리에 어긋나니 그렇지요.”


경보는 한숨을 쉬었다.


“여우 형님은 저와 더불어 그리 오래 성현의 글월을 배우고도 아직 도리를 알지 못하십니까?”
“너 읽던 글엔 산 사람 도리만 나오던데 죽은 놈 두고 무슨 도리가 또 있느냐? 골 아프다.”
“산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산 자에게 도리가 있으면 마땅히 죽은 자에게도 도리가 있지요.”
“죽으면 썩고 썩으면 흙으로 돌아가며 이윽고 남느니 바람 한 줄기인데 내내 도리가 남으면, 그놈의 도리가 쌓이고 또 쌓여 온 세상이 자욱할 거 아니냐?”
“도리가 쌓여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우는 시신의 손가락을 문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생은 어찌 하고 싶은 게냐?”
“무덤을 만들어 주렵니다.”
“하나하나 땅을 파다간 온 천하가 무덤으로 가득할 게다. 동생은 한 걸음 편히 걷지 못할 터인데, 언제 네 군주를 모시러 가겠느냔 말이야.”
“아이들을 거두어 미음이라도 먹이렵니다.”
“한 명 한 명 먹이다간 네 목숨 일백 개여도 모자랄 게다. 동생은 두 팔로 한 아이를 한 번 안아 줄 수 있을 뿐이야. 언제 네 붓을 꺼내 먹에 담그고 흰 종이 위를 질주 하겠느냐?”
“불초 동생은…….”


흰 뼈만 남은 손가락을 퉤, 뱉어 내고 여우가 말했다.


“이렇게 하자. 동생은 올라가 얼른 시험을 치러라. 이 형님이 남아 무덤을 만들고 아이들을 먹여 주마.”
“끝이 없다고 여우 형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나는 여우다. 서산의 여우 나리란 말이다. 재주 한 번에 두 팔이니 천 번쯤 넘으면 그만이리라.”


하여, 패경보는 응천(應天)으로 떠났고 여우는 남았다.
척박한 땅에 비를 끌어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완하고, 결국 죽어 버린 육신들을 땅에 묻는 사이 세월은 금세 지났다. 여우에게 세월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그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랐다. 여우는 제 신통력이 화수분처럼 항구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가난한 집의 쌀독처럼 그의 힘은 바닥을 드러냈고, 여우는 더 이상 재주를 부려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하얀 여우는 인간 사내 두껍을 쓴 평범한 여우였다.
경보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요염한 미녀로도 더는 변할 수 없었고, 어느 집 사창(紗窓)으로 달빛인 양 새어들어 잠든 인간들을 조롱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냥 여우였다. 딱 한 겹 가죽을 가진 여우. 사람이 죽어 껍질을 벗으면 썩은 흙이 되어 스러지듯이 여우는 그 마지막 껍질을 벗으면 한 마리 늙고 병든 여우가 될 터였다.
그 사이 몇 명 아이들은 살았고 몇 명 아이들을 죽었으며 무덤들은 늘어난 만큼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때로 말발굽 소리가 사위를 어지럽혔고 무너진 성벽을 넘어 도적떼가 횡행했으며 관리들은 내려왔다가 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간난과 전쟁에 내몰렸다.


그러는 사이 응천에서 주색에 빠진 왕은 스무 겹 비단 옷에 감싸인 채 죽었고 그 아들이라 주장하는 다섯 명의 사내가 다퉜으며, 역시 그 아내라고 주장하는 몇 몇 여인들이 제각기 다른 사람을 재상으로 추대했다. 왕자들은 싸웠고 왕비들은 죽고 또 죽였으며 무수한 관이 누군가의 머리에서 또 다른 사람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여우는 계속해서 무덤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돌보고 약초를 뜯으러 천지사방을 뛰어 다녔다.
여우는 자신이 왜 그런 일들을 하는지 거의 잊을 뻔 했다. 사람으로 지내는 세월은 여우의 세월과는 사뭇 달랐다. 꽃은 똑 같이 피고 똑 같이 졌건만 여우는 더 이상 계절을 한 묶음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낱낱이 흘렀다.
곡식이 알알이 익듯이 하루와 또 다른 하루가 알알이, 같은 듯 다르게 익어 갔다.
여우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더 이상 여우에게 아이들은 한 묶음이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여우는 패경보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물었고 하나씩 기억했다. 아이들의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곡식처럼 익었다. 누렇게 물결치는 들판은 아이들 뿐 아니라 여우에게도 때로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스승님, 스승님, 누굴 기다려요?”


아이들이 무릎에 매달려 그리 묻는 순간까지 여우는 제가 사립 너머 북쪽을 향해 바라기 하고 섰음을 모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서릿발처럼 시리던 시월상달, 여우는 패경보의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보수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인 성벽 너머에서 도적떼는 나날이 기승을 부렸고 먼지 묻은 깃발을 든 사내들이 자주 인근에 출몰하기 시작했건만, 경보의 소식은 전연 들리지 않았다. 그가 정녕 바라는 대로 관리가 되었을지, 아니면 여태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지, 여우는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 응천으로 가자.’


도우마고 약조하였던 아이들은 하마 다 자랐다. 무덤도 헤아릴 수 없다.
몇 번이나 길을 떠나려다가도 아이들이 붙잡는 통에 남았던 것이다. 여우의 세월은 무한하여도 사람의 세월은 그렇지 않았다. 경보는 관리가 되어 어디 먼 땅으로 떠나, 여우를 만나러 올 수 없는 지도 몰랐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나요?”
“스승님 저희를 두고 가시려나요? 왜요? 어디로 가시는 가요?”
“어째서요?”


그가 길러낸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 여우의 허리에 매달릴 즈음 그는 더 지체할 수 없어서 짐을 꾸렸다.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버린 폐허를 지나고 불에 탄 흔적 뿐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산을 넘어, 말라비틀어진 강을 건넜다. 썩어가는 시체로 뒤덮인 들판을 지나 그 피를 마시고 자란 벼논을 가로질렀고 무너진 성벽을 징검돌로 삼았다.
소선국 응천(應天)은 눈이 시리도록 화려했다.
여우는 그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것인가 잠시 착각을 일으켰다.
흥청거리는 거리에는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고 비단 옷을 입은 사내들이 사향을 풍기며 노닐었다. 여우는 높다란 담장 너머 푸른 기와들이 끝도 없는 길을 걸었다. 웃음소리가 먼 옛날 청경호의 봄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비뚜름하게 썼던 전모며 검은 너울, 미치도록 가벼웠던 그 날의 발걸음들이 전생처럼 아득하였다.


여우는 경보를 만났다.
옛날처럼 소리 없이 그림자 흉내를 낼 수 없게 된 여우는 누더기에 몸을 감싼 채 인산인해의 한 점이 되어 사흘 밤낮을 기다리고서야. 교서관 비슷한 벼슬을 얻었다는 경보를 만날 수 있었다.


“동생 뭘 하시는가?”
“때를 기다립니다.”


경보는 전처럼 공손하였고 낯이 부드러웠다. 한 점 의혹도 어지러움도 없는 그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여우는 오만하게 등을 바루었다. 경보는 그 나긋한 목소리로 웃고 명을 내리고 차를 들여 권하였다. 아이들을 구해야한다고, 가엾은 백성들을 장사 지내야 한다고 말하던 것과 똑 같은 목소리로 그는 황금과 옥으로 된 관과 유리로 만든 매화에 대해 떠들었다.


“하늘이 정한 때를 기다립니다.”
“그놈의 때를 기다리다 늙어 죽겠구만. 왜, 확 엎어 버리려고 올라온 게 아니었던가?”
“여우 형님, 저는 충의를 지키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왕은 곧 하늘이며 어버이여서 결코 등질 수 없다 하였다.
소선국의 백성 된 몸으로 소선국을 위해 몸 바치리라하였다.
절을 올리는 경보 앞에서 여우는 할 말이 궁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잘난 경서를 몇 번이나 외웠건만 경보의 말에 한 치 잘못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임금을 모시며 살뜰히 옳은 뜻을 사뢰고 아래로는 제 맡은 일을 똑바로 해 내었다.
그가 옳을 수도 있었다.
그저 눈앞의 한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는 무엇도 바뀌지 않으므로, 성벽을 방비하고 도적을 소탕하며 세상을 평정할 날을 기다림이 옳은 길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진세에서 꽃이란 뜻하지 않은 비에 지게 마련이고 사람은 돌연한 바람에도 뜻을 바꾸게 마련이었다. 뜻을 거둠보다 죽기가 쉬웠고 명예를 잊기보다 자신을 속이기가 잦은 시절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소선국의 왕은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는 관이 너무나 컸다. 많은 이가 관직을 잃었지만 경보는 제 자리를 지켰다.
새 왕의 숙부가 후견인을 자처하며 은밀히 경보를 불러 말했다.


“자네, 나와 손잡고 세상을 바꿔 봄세.”


경보는 고개를 저었다.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는 부정을 볼 수 없다 선언하고 머리를 풀어 곡을 한 후, 관직을 버렸다. 여우는 사흘이 지난 후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가엾은 백성을 구하고자 세상을 바꾼다지 않았나? 동생은 왜 비로소 기회가 목전에 왔는데 그 손을 잡지 않았나?”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가 무엇이더냐? 동생은 도리를 말하며 결국 무엇을 남겼던가.”
“제 일을 하였습니다. 제 말할 것을 말했습니다. 선비로서 관을 던질 일에 관을 던졌으니, 더는 돌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자네 도리를 모르겠네.”
“여우 형님께서는 아직 사람의 도리를 모르십니다.”
“관리의 도리를 몰라도 사람 도리를 내 어찌 모르겠나.”
“부정 앞에 관을 버리고 마땅히 모실 이를 모시는 것 역시 선비된 도리인즉.”


여우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경보는 전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느새 머리에 희끗한 부분이 늘기 시작한, 더는 아이가 아닌, 젊다고도 못할, 그 의형제가 여우 앞에 한 번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동생은 서산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여우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경보는 돌아보는 일 없이 훌훌 떠났으나 여우는 몇 번이고 멈추어 섰고, 다시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지는 해를. 뜨는 달을. 매캐한 냄새를 몰고 불어 닥치는 바람의 그 싹튼 자리를. 열매가 익어 떨어지는 순간을 여우는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그의 시간을 채웠다.
서산에 먼저 당도한 경보는 이미 인간의 옷을 벗고 고사리를 캐며 오래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캐자[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不知其非矣].
신농(神農)과 우(虞), 하(夏)의 시대는 가고[神農虞夏 忽然沒兮],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我安適歸矣]?
아! 이제는 죽음 뿐이다[于嗟徂兮],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命之衰矣]!” (출전- 채미가)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노랫소리에 맞추어 여우는 신산한 저녁노을이 깔린 산 아래, 고요한 청경호와 그것을 감싸고 펼쳐진 평야를 내려다보았다. 알량한 풀과 나무껍질을 캐서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잠들 마을을. 무너진 성곽과 마른 물줄기가 가로지른 토지를.


“무엇이 도리인가?”


여우는 고사리를 캐 산 속 초막으로 돌아가는 경보와 작별을 나누지 않고,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무엇이 도리였단 말인가?”


그는 다시 여우로 돌아가지 않고 호(狐) 선생으로 살다가 죽었다.
따로 행적은 전하지 않는데 각지의 여우 이름이 붙은 지명마다 그 패옥이 묻혔다는 전설이 전한다. 항성에는 호 선생에게 배웠다는 노인이 흔한데 그들은 사람이 패옥을 손에 넣으면 반드시 여우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고 믿는다.



(終)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미로냥 요원(遼遠) 2024.01.01
미로냥 [20주년] 웨딩 데이 2023.07.01
미로냥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2022.06.01
미로냥 처음에는 프린세스가 될 예정이었다 2022.05.01
미로냥 박평수가 술법을 익히다 by 미로냥 (본문 삭제) 2019.11.01
미로냥 푸른 수염, 혹은 긍정의 증명 2016.08.31
미로냥 궁천극지(窮天極地) 2016.01.31
미로냥 라푼젤 - 흔한 풀 2015.05.31
미로냥 메두사 - 눈(目) (본문 삭제) 2015.05.31
미로냥 차마 봄이 아니거니와(春來不似春)1 2015.02.28
미로냥 그때는 귤이 없었단다 2014.05.31
미로냥 채미가(采薇歌) 2014.04.30
미로냥 페일 블루 발라드Pale blue ballad 2014.03.01
미로냥 카루셀 2013.12.31
미로냥 선화(蟬化) (본문 삭제) 2013.11.30
미로냥 화적(花賊) 2013.09.30
미로냥 망선요(望仙謠) - 본문 삭제 -6 2013.05.31
미로냥 소녀가 적당히 노는 이야기4 2012.12.28
미로냥 목하 작업 중입니다 - 본문 삭제 -3 2012.11.30
미로냥 거짓말쟁이 다이아몬드4 2012.10.20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