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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카루셀

2013.12.31 22:5212.31

카루셀


그녀는 밤을 위해 태어났다.
하늘을 위해, 창공의 아득한 뭇 별과 유일무이한 달을 위해 가장 적합한 몸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이것은 마르코 펜탈로니아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새벽마다 들어온 이야기다. 두 발로 걸음마를 하기도 전부터 초록색 줄로 몸을 묶고 거꾸로 매달린 채 두 개의 장대 사이를 떠돌아 다녀야 했던 그는 바로 그 해에 자신의 영원한 단짝을 얻었다.
카루셀.
온 도시가 사랑하는 다리의 이름이며 영원히 빙글빙글 도는 나무 말들의 이름.
모포에 싸여 잠든 계집애의 뺨은 붉었고 그 조막만한 손과 다 자라지 못해 흡사 뭉쳐 놓은 솜 덩어리처럼 보이는 다리는 너무나 연약하게 보였다. 마르코는 단장인 매튜 플레이져의 품에 안긴 카루셀에게 손을 뻗었다가 채 닿기도 전에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아이는 너무나 작았고, 그 다리로는 세상을 걷느니 보다 매튜의 말대로 하늘을 유영하는 편이 어울릴 성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밤을 위해 태어났다.
별들을 위해, 천막 위에 자리 잡은 달과 북극성을 위해, 카루셀 파피타는 이 지상에 태어났다. 그녀의 다리는 천공을 걷기 위함이며 그녀의 팔은 가느다란 줄을 허공으로 잡아당기기 위함이다. 마르코는 믿었다. 스무 해가 다 되도록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카루셀은 말을 하기도 전에 웃고 숨을 쉬듯이 울며 그러나 걷는 대신 날았으므로.
카루셀은 걷지 못했다.
걸을 수 없는 그녀를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매튜 플레이져의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꽃을 뱉는 난쟁이와 공 위에서 춤추는 외눈박이 소녀와 노란 눈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꺽다리, 물구나무 선 채 사자를 부리는 쌍둥이도 걷지 못하는 카루셀을 사랑했다. 천막이 무너져 거인이 죽었을 때 장미꽃을 선물해 준 것도 카루셀이었고 먼 대학의 도시를 떠나올 적에 검은 강물 위에 사탕가루를 뿌려준 것도 카루셀이었다.

「다만 그것만으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먼 훗날 그 질문을 들을 때까지 마르코는 한 번도 카루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매튜 플레이저의 천막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임에 틀림 없다고, 마르코는 주장했다. 대학의 도시를 떠나 일곱 탑의 도시를 지나고 색유리의 도시와 차양의 도시, 운하와 곤돌라의 도시를 지났다. 천막은 때로 무너지고 때로 거대해졌으며 때로는 누덕누덕 기워지고는 했다. 매튜 플레이져의 채찍은 사자의 목덜미를 잘못 때리기도 했고 쌍둥이들은 사자의 이에 팔을 잘리기도 했으며 세 번째 거인이 던진 단검들이 난쟁이의 눈을 꿰뚫기도 했다. 불꽃들은 이따금 다 익다 못해 썩어버린 가을 사과처럼 검붉게 시들어 떨어졌고 모랫바닥에 그린 원들은 누구의 발자국도 맞아들이지 못한 채 열흘간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가끔은 스무 가지 색의 깃발과 삼백 개의 등불이 천막 주위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겨울 추위에 하얗게 질렸던 나뭇가지들도 제각기 다른 성(姓)을 가진 정령들을 불러 대표로 천막을 방문하게 하였고 그렇게 찾아온 이종족들은 아주 아름답고도 섬세한 천으로 된 띠와 베일을 걸치고 있게 마련이었다. 마르코는 허리를 숙여 자작나무의 정령과 은사시나무의 딸에게 대학의 도시에서 가져온 버터와 소시지를 대접했다. 그녀들은 모두 상냥했고 모두 어딘가 낯설었다. 아침이면 그들이 준 비단들은 녹아 사라졌지만 잠든 카루셀의 허리에 걸쳤던 것들만은 좀 더 오래 남아 반짝거렸다. 마르코는 희고, 검고, 붉거나 혹은 푸른 그 정령의 천들을 모조리 카루셀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녀는 밤과 함께 날아 올랐다가 해가 떠오를 때 저 자신이 마치 달인 양 잠들었다.

「맥주 상자와 소금 상자를 모아 스무 도시의 신문으로 덮은 침대에서?」

그녀는 밤을 위해 태어났다.
어둠은 우아한 장막이었고 달빛은 대단히 다정한 연주자였다. 음악은 흥겹고 요란하였지만 매일, 또 매일 다른 곡절을 들려 주었다. 흥성거리는 등불들이 줄줄이 내어 걸린 길을 따라 뾰족한 황금빛 첨탑들을 등지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밤의 음악은 더욱 높아지고 카루셀은 마르코의 팔뚝을 한 번 가볍게 스치며 천막 꼭대기까지 날았다. 뚫린 꼭대기로 걱정스러이 기웃거리는 건 틀림없이 달이었다.
별들이었다.
북극성에 시선을 못박은 채 마르코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는 지상에서 돋아나듯 박차고 올랐고 이윽고 다시 지상으로 끌려 내려갔다. 그의 몸을 무거웠고 그의 등에는 날개가 없었다.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마르코는 그물에 등을 맡겼다.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오히려 그를 받아 안아 주는 것 같았다. 카루셀은 허공에 집어 던져진 인형처럼 핑그르르 돌았다. 그녀의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추락하는 마르코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달처럼 그녀의 동그란 얼굴은 내내 한 방향을 향했다.
별들이 쏟아졌다. 등불들은 모두 꺼졌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카루셀은 장대 사이의 줄에 내려 앉았다. 날개를 접은 새처럼 오도카니 앉은 그녀의 가냘픈 등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에게 날개가 없다는 사실처럼 이상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마르코는 이따금 의혹을 이기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등을 쓸어보며 정령들의 허리띠를 장식해 줄 때면 매튜 플레이져가 다가와 속삭였다.

그녀는 밤을 위해 태어났다.
하늘을 위해, 창공의 아득한 뭇 별과 유일무이한 달을 위해 가장 적합한 몸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이상할 것도 없지. 카루셀은 저 창공을 걷는 아이니까. 결코 날아오르는 게 아니야. 이 아이는 그저 걷는 거야. 너와 내가 이 땅을 걷듯이.

「아침이면 상자 위에서 잠들고 저녁이면 깨어나 흙탕물에 발을 담갔는데.」

마르코가 감히 하늘로 날아 올라 잠시 재주를 부리듯 카루셀도 가느다란 끈을 붙든 채 하늘을 떠나 잠시 지상 가까운 곳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밤을 향해 돌아간다. 걱정스러운 달이 다 여위기 전에 별들이 흩어져 모래가 되기 전에 아직 구름이 찾아 들지 않은 저 하늘로.
그녀는 돌아가야만 했다.

「그 아이는 칼을 들고.」

누구나 카루셀을 사랑했다.
밤을 위해 태어난 아이, 천막의 뚫린 천장에 가장 가깝게 날아올랐다가 인간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남은 모래판에는 한 번도 내려서지 않은 아이. 카루셀은 걷지 못했고 말할 줄 몰랐다. 벌레처럼 꿈틀대며 기는 그 하얀 몸뚱이를 마르코는 언제나 안아 올려 정령들의 허리띠로 묶어 주었다. 붉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새파란 상처가 남지 않도록. 카루셀이 어린 새처럼 삐약 거리며 울다 잠들 때 마르코는 그녀를 저 하늘로 돌려 보내 주어야만 한다고, 그리하여 매일 밤 재주 넘는 그녀를 하늘로 뛰어오르는 어린 자식을 보듯 걱정스럽게 들여다 보는 저 달이 다 여위기 전에…….

「다 여위기 전에.」
「그믐이 닥치기 전에.」

카루셀은 아름답게 웃으며 장미꽃을 내밀었다. 불운하여 채 피지 못한 꽃송이는 잎을 떨구고 난쟁이가 다루던 불꽃들처럼 흩어졌다. 난쟁이는 하나 남은 눈으로 울었고 단검은 여지 없이 날아왔다.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물감으로 칠한 나무 말에 앉아 카루셀은 제 이름과 같은 그 놀이기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노랫소리가 울리고 삐걱거리며 바퀴가 돌아가고 그리하여 풍선을 등에 매단 어릿광대가 그녀의 이름을 호명하기를, 일제히 등불들이 켜지고 박수 소리에 쫓겨 그녀 자신이 다시 하늘로 내려 서는 시간이 오기를,
카루셀은 매일 밤 기다렸다.
대학의 도시에서, 첨탑과 오렌지꽃들의 도시로.
모래 언덕의 도시에서, 상아로 된 여신상들의 도시로. 부엉이와 올빼미의 도시에서 토피어리 정원과 해시계의 도시로 천막은 떠돌았고 거인은 죽었으며 난쟁이는 두 눈을 감고서도 백발 백중 불꽃 원을 통과했다. 불꽃들은 식었고 언제나 아침이 왔다.
걱정스러이 말라가는 달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마르코는 그물에 등을 누인 채 초록색 줄에 제 허리를 처음 묶던 이십 년 전을 떠올렸다. 줄과 줄 사이를 뛰어 다니다 맨 바닥에 내려 섰을 때 느꼈던 현기증과 더러운 모포에 싸여 우유로 만든 듯이 새하얗고 흐물거리는 팔다리로 잠들었던 카루셀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카루셀은 매일 밤 기다리고 있었다.
카루셀은 매일 밤 염원하고 있었다.

결국 마르코가 땅을 걷듯 카루셀이 하늘을 걷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르코는 날개 없는 그녀를 더는 이 어지러운 허공에 매달아 놓을 수 없었다. 뭇 별과 유일무이한 달의 이름으로 카루셀은 날았고 스무 해만에 추락했다. 허공으로. 하늘로. 저편으로. 매튜 플레이져의 천막 꼭대기로 카루셀은 사라졌다.

「그러나 너는 검으로…….」

마르코는 초록색 줄을 내려다 보았다. 그물로 떨어져 내리며 짝을 잃은 제 손에 남은 온기를 꼭 쥐어 보았다. 손바닥과 손가락의 틈새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중력은 그를 붙잡아 그림자와 함께 묶어 놓았고 그는 떨어져 내릴 장미꽃들을 환상처럼 보았다.
흩어지는 피와 안개와 웃음소리들이 달과 더불어 그의 눈 안에서 부풀었다.

카루셀은 기다렸다.
매일 밤, 매일 아침, 그녀를 위해 떠오르는 달들의 저 검은 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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