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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그림자 없는 아이들

2013.05.31 23:2505.31


그림자 없는 아이들

 

 

 

  아이들은 도로를 따라 달려 나간다. 세상은 여름이다. 따가운 햇살이 살갗을 그을린다. 하늘은 푸른 멍처럼 새파랗다. 습기 없는 바람이 숨을 먹는다. 아이들의 매끈한 다리가 아스팔트 위 아지랑이를 스쳐간다. 매년 세상은 조금씩 더워져서 나중에는 겨울이 사라졌다. 이제 겨울은 오지 않는다. 영원한 여름이 이어진다. 아이들은 눈을 모른다. 아이들은 눈싸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무지개조차 모른다. 아이들이 아는 건, 여름뿐이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다. 이제는 폐쇄된 도로다. 도로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이들은 궁금하다.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걸음을 옮긴다. 도로는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 너머까지 도로는 계속된다. 세상의 끝까지 연결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은 금지시킨 걸까. 사람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은 도로는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곳곳에 갈라진 틈이 보인다. 보수가 이뤄지지 않는 도로는 천천히 붕괴되는 중이다. 언제쯤 도로는 사라지게 되는 걸까. 아이들은 궁금하다. 그러나 물어볼 사람이 없다. 어른들은 도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통제에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도로 외곽에 작은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는 먼지와 녹으로 뒤덮여 있다. 아이들은 주유소 안으로 들어간다. 적막하다. 문턱에서 미세한 먼지가 인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아이들은 귀신을 모른다. 이제 그런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귀신이 무섭지 않다. 아이들이 두려운 것은 괴물이다. 돌연변이다. 주유소 안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흠칫 놀란다. 바람일까. 서늘한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괴물일까. 폐쇄된 도로를 금지시킨 것은 괴물 때물일까. 남자아이가 두려운 나머지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소매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남자아이는 울상이다. 애초에 처음 모험을 떠나자고 한 것도 여자아이였다. 남자아이는 겁이 났지만 다시는 같이 안 논다는 말에 억지로 따라왔다. 도로는 무섭지 않았다. 어른들이 무서웠다. 언제 나타나 자신들을 혼낼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디를 가는지 알 수 있었다. 하루에 화장실을 몇 번 가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학원을 빼먹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학원의 출입과 퇴실 시간이 정확하게 부모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오늘은 학교에서 정한 쉬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한 달 전부터 오늘 폐쇄된 도로에 가보기로 약속했다. 남자아이는 금방이라도 어른들이 따라올 것만 같았다. 집에 가서도 혼이 날 것만 같았다. 여자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평소처럼 학교에 있을 시간대에는 감시에 열중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주유소 안에는 깨진 거울과 부서진 컴퓨터가 있었다. 오래된 컴퓨터였다. 요즘은 이렇게 큰 컴퓨터는 보기가 힘들다. 불이 났었는지 벽에 그을음이 있다. 소파는 찢어져서 노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금전출납기가 열러 있었는데, 처음 보는 옛 화폐가 채워져 있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 남자아이는 지폐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학원에 가져가면 다들 놀라겠지. 그 순간 남자아이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남자아이는 비명을 질렀고, 여자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둘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행색이 초라했다. 검은 외투를 두 개나 껴입고 있었고, 얼굴은 며칠 씻지 않았는지 꾀죄죄했다.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웬 도둑놈이냐. 여자아이는 재빨리 도둑이 아니라 탐험가들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더니 남자아이를 내려놓았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라. 좋은 말로 할 때. 남자아이는 초록색 옛 화폐를 넣어놓았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나가. 여긴 애들이 올 데가 아니야. 탐험은 책 속에서 해라. 남자아이가 말했다. 책은 없어요. 다 컴퓨터로 배우는 걸요. 뇌에 케이블을 직결하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나이에 따라 정보 접속 권한이 달랐다. 아이들은 순차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다. 더 이상 무분별하게 책을 통해 자율적으로 자료를 입력받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책은 박물관에나 있겠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겐 생체칩이 들어 있어서 어디든 위치 추적이 가능하잖냐. 지금까지 용케 붙잡으러 안 온 게 신기하군. 아마 다들 직장에서 일하는 중이라 그렇겠지. 별다른 위험 신호는 발생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이 이상 가면 반드시 신호가 발생한다. 탐험은 끝났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남자아이가 물었다. 진짜 우리 몸에 칩이 달려 있어요? 남자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그런 것도 안 배우냐? 요즘 애들은 도대체 뭘 배우는지. 전국민이 칩을 장착한 게 얼마나 오래전 일인데 그러냐. 신원 감별뿐 아니라 범죄 충동까지도 예측이 가능해서 범죄율이 획기적으로 줄었지. 너희가 이렇게 안전하게 쏘다니는 것도 다 그 칩 덕분이야. 알겠냐?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제 허락도 없이 그런 거예요? 전 싫어요. 매일 엄마에게 어디가는지 들키고. 탐험도 할 수 없고.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 따지냐. 네 부모에게 가서 따져. 난 상관없는 일이다. 얼른 꺼지기나 해.
  여자아이가 말했다. 우리 칩을 빼자. 남자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야. 그걸 어떻게 빼? 몸속에 있는데. 여자아이가 말했다. 칼로 째면 되지. 가시가 박힐 때도 그렇게 하잖아. 남자아이는 덜컥 겁이 났다. 여자아이는 한다면 하는 아이였다. 진짜로 하자고 우길지 모른다. 그럼 첫 번째 대상은 당연히…… 입밖에 내지 않아도 자신이 될 터였다. 남자아이는 황급히 말했다. 피가 잔뜩 날걸. 엄청 아플 거야. 죽을지도 몰라. 들켜서 혼날 거야.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겁쟁이! 나 혼자라도 할 거야. 난 싫단 말이야! 남자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싫어? 빼면 뭘 할 건데? 여자아이가 말했다. 먼저 도로의 끝을 가볼 거야.


  남자아이는 울음이 많았다. 여자아이를 만난 것도 울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부모가 남자아이가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자식에게 말한 것이다. 그걸 들은 아이는 학교 네트워크에 그 사실을 퍼트렸다. 아이들이 남자아이에게 가서 그 사실을 갖고 놀렸다. 위로했다. 떠들었다. 남자아이는 울음이 나왔는데, 그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무릇 감정이란 말로 해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남자아이는 그냥 울었는데, 다들 더욱 놀리기만 했다. 그때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한대 쳤다. 처음 맞았다. 남을 때리면 바로 부모와 선생님에게 신호가 가기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 때리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신호가 가는 것도 무섭지 않다는 듯이 남자아이의 손을 붙잡고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폐쇄 회로 카메라도 없고 사람도 없는 자동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여기 있으면 부모님에게 연락도 안 가고, 아무도 잘 찾지 않아. 혼자 있기 딱 좋아. 남자아이가 물었다. 여긴 왜? 여자아이가 말했다. 마음껏 울어.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해. 근데 혼자 울어야 할 때도 있잖아. 딴 데는 다 찍혀서 전송되니까. 마음껏 울지도 못하잖아. 여기서 마음껏 울고 소리쳐도 돼. 소리 지르면서 울어. 남자아이는 그렇게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아이는 곧장 사라졌기 때문에 남자아이는 다시 여자아이를 찾기 위해 며칠을 소비했다. 여자아이는 툭하면 학원을 빼먹었고, 이상한 곳만 돌아다녔다. 숨겨진 골목길이나 부서진 폐건물을 찾아다녔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손을 잡혀서 함께 돌아다녔다. 집에 가서 부모에게 혼이 난 것은 당연했다.
  우리 커피 마셔볼까? 여자아이의 말에 남자아이는 당황했다. 커피? 그건 어른들만 마시잖아. 우리도 마셔도 돼? 여자아이가 말했다. 편의점에서 사면 되지. 남자아이는 죄인처럼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뭘 샀는지 다 부모님이 아시는데. 여자아이가 웃으면서 남자아이를 이끌었다. 괜찮아, 무슨 큰 죄라고. 술도 아닌데. 남자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끌려갔다. 편의점에서 여자아이는 신이 난 듯이 커피를 골랐다. 이거 마실까? 이게 달다고 하던데. 그건 쓸 거야. 이게 좀 더 달아. 남자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커피 마신 적 있어?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엄마가 마셔보라고 준 적 있어. 밤에 잠 안 온다고 한 모금만. 남자아이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그렇구나. 둘은 무인 계산대에 커피와 손을 갖다 대고 계산했다. 거리를 걸으면서 둘은 커피를 마셨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액체가 식도를 넘어갔다. 남자아이는 왠지 가슴이 마구 뛰었다. 카페인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 마셔봐서 그런가. 여자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였지만 왠지 입가에 웃음기가 진해진 듯했다.
  커피를 사 마신 건 부모님에게 혼나지 않았다. 무심코 지나쳤거나,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 듯했다. 오히려 학원을 빼먹을 때만 크게 혼이 났다. 처음에는 같이 빼먹은 아이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했다. 남자아이는 어차피 학원에 연락하면 알 테니, 여자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남자아이는 부모가 여자아이네 연락해서 혼낼 거라 생각했다. 다시는 같이 놀지 말라고 할 것 같았다. 남자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님은 여자아이를 검색해 보더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방에 들어가라고 했다.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네를 검색해 보고 싶었지만 권한이 없어서 불가능했다. 여자아이를 만날 때, 부모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여자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상을 한껏 찌푸렸을 뿐이다. 어른들은 싫어. 그런 질문은 더 싫어.


  아이들은 또다시 도로를 걷는다. 무한히 이어진 폐쇄된 도로.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른들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어른들도 이전 세상을 잘 모른다. 정보 접근 권한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정해진 정보만을 알고 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배우지 않으면, 직접 알아보면 되잖아. 응? 안 그래? 도로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가면 되잖아. 가보면 두 눈으로 볼 수 있잖아. 남자아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꼬리를 흐렸다. 위험하지 않을까. 다 우리가 걱정되어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걸 텐데. 여자아이가 말했다. 조심하면 되지. 위험하면 돌아오면 되고. 도로가 뭐가 위험해?
  전설 속 겨울이라면 위험할지도 모르지. 눈이 온다면 한치 앞도 볼 수 없고 기온이 내려가서 얼어 죽을 거야. 남자아이는 속으로 겨울을 생각했다. 남자아이는 사라진 계절들이 항상 궁금했다. 예전에는 여름만이 아니라 봄, 가을, 겨울도 있었다고 했다. 봄은 어떤 거였을까?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모르지. 지금보다 덜 더웠대. 그래서 평온하고 걷기 좋았다지. 벚꽃이 피어서 온 거리를 뒤덮었다는 거야. 눈처럼 말이지. 사람들은 벚꽃놀이를 갔대. 기분이 들뜨는 계절이었대. 남자아이가 물었다. 기분이 들뜨는 게 뭐야?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손을 잡아챘다. 탐험을 떠날 때 기분이랑 비슷할 거야. 아마도.


  한 달이 지났다.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허옇게 뜬 얼굴로 아이들은 도로를 걸었다. 다시금 주유소에서 멈춰 섰다. 이 뒤에는 부모에게 신호가 갈 것이다. 꼼짝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주유소까지가 한계점이었다. 햇빛이 주유소를 감쌌고 그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이들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가져온 병에서 물을 나눠 마셨다. 수분 보충은 항상 중요했다. 언제 열사병으로 쓰러질지 몰랐다. 남자아이는 칩 덕분에 쓰러져도 부모가 알아차린다고 생각했다. 칩이 없다면, 갑자기 쓰러져도, 구멍에 빠져도 부모는 모를 것이다. 남자아이는 두려웠다. 칩을 제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모와 연결이 끊긴다는 게 무서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말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알았다. 그런데 그게 사라진다니. 우주에 혼자 남겨지는 기분이었다.
  여자아이는 한 달 동안 칩을 빼낼 방법을 궁리했다. 매일 남자아이에게 계획을 떠들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신기했다. 여자아이는 부모와 연결이 끊기는 게 삶의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부모를 미워하다못해 증오하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 답답할 때도, 미울 때도 있지만 부모는 항상 필요했다. 부모가 없는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는 먹는 것부터 해야 할 것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옷을 사주었고, 장난감도 사주었다. 남자아이는 부모 품이 좋았다. 여자아이는 달라 보였다.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성숙하게 보였고, 거침없는 행동력이 있었다. 키도 자기보다 작고 몸도 마르고 가냘퍼 보이는 인상인데, 하는 행동은 보기와 달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쇠창살을 타고 오르기도 했다. 나무를 오른 적도 있었다. 남자아이는 매번 여자아이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는 그럴 때마다 여자아이가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광채가 났다. 남자아이가 계속 여자아이와 다니는 건, 그 광채 때문이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 아저씨를 찾자. 남자아이가 말했다. 그 무서운 아저씨를 왜 찾아? 여자아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 칩을 빼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남자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알았어. 찾아보자. 여기서 사는 것 같았으니까. 두 아이는 흩어져서 주유소를 뒤진다. 주유소에는 잡동사니가 모여 있다. 부서진 텔레비전과 라디오, 체인이 끊어진 자전거, 곰팡이 핀 침대 매트, 깨진 콜라병, 바퀴 빠진 유모차, 바람 빠진 축구공. 이전 세계 물건들이 많았다. 이제는 아무도 축구를 하지 않는다. 콜라를 마시지도 않는다. 라디오를 듣지도 않는다. 라디오를 틀면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그건 마치 경고 같이 느껴졌는데, 무엇에 대한 경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은 뇌와 케이블의 직결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운동을 할 수도 있고 맛을 느낄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모든 사교와 교육은 케이블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제로 해서 근육이 손상되거나 뼈가 부러지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의 몸은 항상 철저히 관리되었다. 교육, 취업, 출산까지 통합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이 없어진 세계였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만나고 나서야 어떤 선택이든 고민이 따르고, 그 결과를 걱정하게 된다는 것을 체감했다.
  아이들은 남자를 못 찾았다. 남자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발견되지 않았다. 흔적도 없었다. 예상과 달리 남자는 주유소에서 살지 않는 듯했다. 그날 두 아이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간 걸까? 여자아이가 대꾸했다. 도로의 끝으로 간 게 아닐까?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보고 가지 말랬잖아. 여자아이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만 가고 싶었던 거야. 두고보라지. 우리도 꼭 가고 말 테니까.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라고? 남자아이는 얼른 집에 도착하고 싶었다.


  다음 달까지 여자아이는 매일같이 남자아이를 찾아왔다. 칩을 뺄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아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심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전부 관심을 가졌다. 왜 부모가 몰래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알아채고, 수업에 늦은 것까지 전부 알아채는지 깨달은 것이다. 우리에게 칩이 있었다니!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은 미리 알고 있었다며 잘난 척을 했다. 그럼 칩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냐고 물었지만, 그 아이는 대답을 회피했다. 어른이 되면 없앨 수 있겠지. 그건 추정이었고, 실제로 어른들이 칩을 없앨 수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아이는 오히려 어른들은 칩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우리 누나도 칩이 다섯 개나 된다고 했어. 남자친구가 심은 칩도 있고, 대학에서 심은 칩, 회사에서 심은 칩이 있댔어. 그렇게 칩이 많으면 죽을 걸? 아니야. 우리는 하나뿐이지만 어른이 되면 왼손에도 심고 이마에도 심는 거야. 여러 설이 분분했지만, 정답은 아무도 몰랐다.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에게 이야기해봤자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며 혼낼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혼나는 걸 두려워했다. 모임은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여자아이를 제외하고 열성적으로 칩을 빼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게 없으면 부모님이 자신을 못 찾을 거란 두려움이 팽배했다. 아이들은 칩에 길들여져 있었다.


  겉보기에 칩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어디선가 칩에 대한 설계도를 구해왔다. 이건 어디서 구했어? 종이는 잘 쓰이지 않았는데, 여자아이는 자기 키보다 큰 종이를 가져온 것이다. 남자아이가 계속 질문했지만, 여자아이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냥 구했어. 더 이상 묻지 마. 남자아이는 궁금증이 남았지만, 여자아이가 인상을 찡그리자 질문을 그만두었다. 저번에 부모님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도 여자아이는 성질을 부렸고 종아리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화내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자아이는 곱상하게 생겨서 가만히 있으면 인형 같았는데, 입만 열면 사내애 같이 굴었다. 남자아이는 가끔은 여자아이가 얌전해지면 귀여울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아이가 가져온 종이는 마치 보물지도 같았다. 암호로 적인 보물지도였다.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기가 한 낙서 같았다. 칩의 크기만 숫자로 적혀서 알아볼 수 있었는데, 칩은 손톱보다도 작았다. 육안으로 간신이 확인할 수 있는 크기였다. 칼로 손바닥을 헤집어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남자아이가 위험하다는 의견을 내놓자,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기에 정확히 어디에 심는지까지 나와있는 걸. 그렇게 깊숙이 심지도 않아. 유치원생도 할 수 있어. 남자아이는 유치원생은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거란 걸 지적하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넌 칼을 준비해와. 소독약이랑. 남자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내 손을 자를 걸 내가 준비해야 하다니. 여자아이가 준비해오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럼 너는 뭘 준비해 올 건데?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탐험 도구.


  약속의 날, 아이들은 도로를 걸었다. 여전히 도로는 끝없이 펼쳐졌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요소에 도착하자마자 깨끗한 천을 깔고 칩을 뺄 준비를 했다. 남자아이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여자아이는 침착하게 도구를 챙겼다. 이거 술이야. 마셔봐. 남자아이는 깜짝 놀랐다. 술이라니? 먹으면 안 되잖아. 취할 거야. 여자아이는 바투 다가갔다. 바보야. 술을 마셔야 덜 아파. 이걸로 소독도 할 거고. 어렵게 빼온 거란 말이야.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어디서 이런 술을 구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또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그저 말없이 여자아이가 건넨 술을 마셨다. 크헥! 써서 인상을 찡그렸다. 맛도 없고 냄새만 지독했다. 목이 따가웠다. 어른들은 이런 걸 마신단 말이야? 이상해. 머리가 약간 어질어질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오른손을 잡았다. 남자아이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여자아이의 악력이 강했다. 할 수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아이가 칼을 그었다. 처음에는 아프지 않았지만 눈을 뜨자 피가 배어나오는 게 보였다. 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여자아이는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피다가 핀셋으로 좁쌀만한 흰 막대를 꺼냈다. 이거야. 남자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아이가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이제 됐어. 칩을 여기다가 놔두면 이제 도로의 끝을 갈 수 있어. 반대로 여자아이도 술을 마셨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가 표시해둔 곳을 칼로 잘랐다. 피가 흘러나왔다. 휴지로 닦으면서 안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금세 칩을 찾아냈다. 역시 핀셋으로 꺼내고 약을 발랐다. 여자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아이가 말했다. 얼굴이 빨게. 여자아이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술 마셔서 그래. 원래 술 마시면 빨개지는 거야.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도 빨게?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다고 했어. 남자아이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서 평소보다 햇살이 약했다. 지근한 햇빛이 황량한 도로에 스며들었다. 수명을 다한 도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가끔 먼지바람이 불어서 입안이 텁텁했다. 아스팔트는 열기를 잔뜩 머금고 끓어올랐다. 기온이 조금만 더 올라가도 신발이 눌러 붙을 것 같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아이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말할 힘조차 아껴서 걸어야 했다. 가끔씩 준비한 물로 목을 축였다. 세 시간쯤 걸었을까. 도로변에 건물들이 나타났다. 전부 반쯤 부서져 있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천장이 없거나 벽이 무너져 있었다. 유리창도 전부 깨진 채였다. 건물 덕분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아이들은 그곳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다리가 무거웠다. 벽에 나란히 기대어서 물을 마시는데, 왼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비루한 옷을 입은 나이 많은 여자가 다가왔다. 아이들은 예의바르게 누구냐고 물었다. 여자는 이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혹시 먹을 게 있냐고 했다. 여자아이는 배낭에 들어있는 초코바를 꺼내서 주었다. 여자는 눈을 빛내며 초코바를 허겁지겁 먹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게걸스러웠다. 아이들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는데, 여자는 고맙다며 사라졌다. 남자아이가 자기도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여자아이는 배낭에서 역시 초코바를 꺼내주었다. 남자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초코바가 많냐고 물었다. 여자아이는 매 달 하나씩 초코바를 받는데,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했다. 여자아이는 그 외에도 사탕, 초콜릿, 후레시와 나침반, 비상약, 카메라를 챙겨왔다.
  아이들은 다시 도로 위에 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의 세기는 줄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졌지만,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다. 상처가 난 손바닥만이 가끔 따가웠다. 도로 주변은 다시 황무지로 변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밭처럼 펼쳐지기도 했다. 늙은 여자를 빼고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슬슬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낯빛은 어두웠고 표정이 사라졌다.
  남자아이는 힐끔힐끔 햇볕에 익은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여자아이는 묵묵히 걸었고,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돌아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여자아이의 짐에는 밤을 샐 도구는 없어 보여 내심 안심했다. 쉬고 싶어질 때쯤, 멀리 허름한 오두막이 한 채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집이라 어쩌면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누군가 사는 집 같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남자아이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 나가자. 여자아이는 풀썩 주저앉았다. 잠깐, 쉬고 가자. 물도 마시고. 남자아이는 할 수 없이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때 문이 열리고 웬 흉측하게 생긴 남자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은 얼굴에 칼자국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한 팔이 없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칼자국은 음흉하게 웃었다. 그 년 말이 맞았네. 외팔이가 문을 가로막았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칼자국이 아이들의 손을 살펴봤다. 정말 칩을 제거했나보군. 즐겨도 상관없겠는걸. 칼자국과 외팔이는 각자 아이들을 한 명씩 잡았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물려고 했지만,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두 아이는 아랫도리가 발가벗겨졌다. 음모가 없는 성기가 드러났다. 칼자국과 외팔이가 각자 아이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평소엔 젠장맞을 칩 때문에 누구랑 했는지 몇 번 했는지까지 다 기록된다잖아. 얼마나 짜증났는데, 알아서 제거하다니 아주 잘 됐군. 손목을 잘라버릴 필요도 없고. 칼자국의 말에 외팔이가 맞장구쳤다. 그러게, 이런 싱싱한 애들을 맛본지가 얼마만이지? 이런 날도 있군그래. 도시까지 가는 건 경계망이 심하잖아. 칼자국이 여자아이의 양발을 잡고 벌린다. 여자아이가 울부짖는다. 남자아이가 황망히 바라본다. 칼자국이 바지를 벗고 굵직한 성기를 꺼낸다. 여자아이가 몸을 비틀어댄다. 남자아이가 발버둥 친다. 외팔이가 남자아이의 뺨을 사정없이 친다. 남자아이가 잠잠해진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린다. 외팔이와 칼자국이 뒤돌아보자마자 외팔이의 가슴이 터져나간다. 남자아이는 피를 뒤집어쓴다. 칼자국이 욕을 내뱉으며 창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주유소의 남자가 창가에서 소총으로 칼자국을 조준한다. 잠시 후 총소리와 함께 푹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약속한 듯이 기절한다. 남자는 아이 둘의 옷을 입힌다.


  도로 옆에서 아이들이 깨어났다. 피 비린내가 훅 끼쳤다. 남자아이가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는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아이는 남자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희를 살려주셔서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가 내 주유소를 마음대로 하는 것까진 참았는데, 주유소를 지나가는 건 못 참지. 거긴 경계선이다. 그 뒤로는 무법천지야. 아이들이 여길 오는 건 자살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무슨 생각인 거냐? 여자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건 예상 못했지만, 저희는 도로의 끝에 가보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궁금하다고요. 뭐가 있는지. 남자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말고서는 한숨을 내쉰다. 그래, 나도 너희 나이만할 때 세계가 궁금해서 돌아다녔지. 죽을 뻔도 하고. 그때 왜 어른들이 경기를 일으켰는지 알겠군, 나참. 이제와서 죄송스러워지네. 여자아이가 말했다. 부탁해요. 다시 돌아가게 할 거죠? 저희 손 보셨잖아요. 끝까지 가게 해주시면 안 돼요? 남자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왜냐하면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계속 가겠다는 여자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참, 애가, 어린 게, 강단이 있는 건지, 정신이 없는 건지, 모르겠구나.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아이는 배낭을 뒤지더니 사탕을 꺼내서 남자에게 내밀었다. 도와주세요. 이게 선불이에요. 잘 다녀오게 해주시면 초콜릿도 드릴게요. 지금 돌아가면, 다시는 못 나올 거예요. 칩도 수십 개가 심어질 거고요. 못 빼도록.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사탕을 받았다. 칩은 하나만 심지, 여러 개 심지는 않아. 남자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친구가 그러는데 자기 누나는 세 개씩 심었다는데요. 남자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건 잘못 봤거나, 다른 칩이겠지. 기본적으로 생체칩을 두 개, 세 개씩 심는 건 비효율적이지. 어차피 하나로 모든 기능이 다 적용되는데. 액세스 권한만 대학이나 회사, 정부를 추가하면 되지. 아, 이제 정부는 없던가. 세계가 기업들로 재편 된지도 오십 년도 넘었겠군. 달 기지와의 전쟁 이후로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지. 사람들은 저마다 기업을 선택했고, 새로운 삶이 펼쳐졌지. 이전 세상보다 지금이 나은지는 아무도 몰라.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쯤은 다 죽었을 테니까. 과거의 기억에 접속할 수 있어도 우리가 그때 사람이 되어볼 수는 없으니까. 누가 행복한지는 아무도 모르지. 신만이 아실까. 남자아이는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이 뭘까? 그건 왠지 질문해봤자 답을 들을 수 없을 듯했다. 남자아이는 다른 것을 물었다.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 칩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너희가 만든 칩도 내가 만든 칩을 개량한 거야. 몇 세대일지 모르겠지만. 기술은 다 비슷하니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깊은 사고를 하지 않아. 칩이 있으니까. 칩이 시키는 대로 하지. 어디에 갈지, 뭘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무슨 일을 할지 전부 칩이 시키는 대로 하지. 칩이 곧 사람을 대체한 거야. 이전 세상의 한 과학자가 미리 예견을 했었지. 과학이 사람들을 천치로 만들 거라고. 칩이 사람인지, 사람이  칩인지 이제 누가 알겠어? 여자아이가 말했다. 저희는 칩이 아니에요. 남자는 대답이 없이 웃을 뿐이었다.
  모니터로 칩이 작동하는 걸 보면 어떤지 아니? 사람들이 별처럼 보인단다.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 같이 빛으로 표시된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지. 우리는 그 움직임을 추적해서 궤도를 만든단다. 모든 사물과 인간에게 칩이 심어져 그 정보를 통합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이 칩은 인간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고정시키기 위한 기술이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너희는 모르겠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밥이나 먹자. 배고프겠구나. 마침 통조림 몇 개가 있으니까, 나눠주마.
  두 아이와 남자는 나란히 앉아서 통조림을 먹었다. 남자는 태양열로 충전하는 바이크에 올라탔다. 자, 이제 집에 가자. 놀이는 여기까지!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아까 무서운 일도 겪었잖니. 하마터면 너흰 팔려갈 뻔한 거다. 다신 부모님도 보지 못한 채, 이 무법지대에서 노예로 살게 되었을 거야. 아니면 바로 죽었거나. 내가 너희 흔적을 발견하고 따라와서 망정이지. 남자아이는 곧장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싫어요! 아까 제가 준 사탕도 먹었잖아요. 토해내시든가요! 남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글자글한 햇살이 세 사람을 내리쬐었다. 남자아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았다. 멀리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텁텁한 공기는 한층 진해진 듯했다. 남자는 아이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자신의 어릴 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도로를 걷다가 죽은 수많은 아이들과도 겹쳐 보였다. 도로가 있는 한,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 걸음을 옮길 것이다. 목이 깔끌까끌해서 침을 삼켰다. 혓바닥에 남은 단맛이 느껴졌다. 남자는 여자아이를 들어서 바이크에 태웠다. 운임료를 받았으니까, 딱 사탕값 만큼만 태워주지. 돌아갈 때도 운임료를 받을 테니까 알아서 하고.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였고, 여자아이는 신나서 소리쳤다. 바이크는 아스팔트 위를 질주했다. 아이들은 무더운 바람을 관통하며 놀라운 속도를 체험했다. 남자는 도로의 끝까지 태워주지 않았다. 석양이 질무렵 바이크를 멈췄다. 여기부터는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배터리를 남겨놓아야 해. 이제 해가 지니까. 그러니 걸어가도록 해라. 이 부근은 안전하고 끝도 얼마 안 남았으니 괜찮을 거다. 직접 눈으로 보고 다시 돌아오도록 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상처 난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도로를 건넜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도로 너머에서 어둠이 검실검실 피어올랐다.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점점 바람은 거세졌고 도로 저편에는 어둠이 짙어졌다. 경계가 흐릿했다. 뭔가 아이들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아이들의 걸음은 가벼웠으며 빨라졌다. 시간이 가속하는 기분이었다. 남자아이는 두려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여자아이가 속삭였다. 사실 나도 무서워. 남자아이는 웃음이 나왔다. 똑같구나. 우리.
  아이들은 도로의 끝에 다다랐다. 달빛이 은은히 어둠에 흩뿌려졌다. 도로의 끝에는 블랙홀 같은 구덩이가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절벽이었다. 아득했다. 지구 중심부까지 뚫려있는 듯했다. 어둠의 입자들이 한층 무겁게 쌓여 있다. 아이들은 숨이 막혔다. 구덩이 안에는 태어나서 본 물건 중 가장 거대한 인공 건축물이 부서져 있었다. 초고층 건물 수십 채를 합친 듯한 거대한 금속 물체였다. 대단해. 이게 어른들이 만든 물건이라니. 남자아이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이거 본 적 있어. 세대 우주선이야. 예전에 발사하려고 했던 거야. 인류가 만든 가장 거대한 우주선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탑승했지만, 원인불명으로 추락했다. 수 만 광년을 넘어서 다른 우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탑승객들은 우주선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예정이었다. 자신들은 우주선에서 삶을 마감하고 후대에게 다른 세계를 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바벨탑이 무너진 것처럼 다른 우주로의 진출은 실패했다. 학교에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위로했던 까닭은, 자신도 입양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칩을 만드는 회사의 이사인 부모는 어마어마한 부를 가졌지만, 여자아이에게는 무심했다. 칩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음에도 혼을 내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그럴수록 학원을 빼먹고, 도시를 탐험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여자아이는 자신의 부모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도시 밖에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폐쇄된 도로 너머에 살아계신 게 아닐까. 여자아이는 도로의 끝에 가기로 결심했다. 도로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도로의 끝에는 어른들의 무덤이 있었다. 수 천 만의 시체가 묻혀 있었다. 구덩이 곳곳에 별빛처럼 추모비들이 반짝였다. 로봇들이 추모비를 관리하고 있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나란히 도로의 끝에 앉아서 구덩이를 감상했다. 남자아이는 죽을 뻔했지만, 여기에 올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는 지구의 상처 같아. 이렇게 큰 구덩이는 처음 봐. 눈에 다 보이지도 않고, 저 잔해도 아찔해.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저런 게 있다니. 가까이 가면 나 같은 건 점밖에 안 되겠지. 여자아이가 웃었다. 우린 다 저 우주선에 비하면 먼지밖에 안 될 걸. 그만큼 커. 남자아이가 말했다. 또 오고 싶다. 여자아이는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을 봐도 되지 뭐. 남자아이가 액정에 찍힌 사진을 살펴보았다. 역시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른 걸. 와보기를 잘했어. 고마워.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도 고마워. 울보씨. 남자아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가 울보씨야, 자기도 울었으면서. 여자아이는 혀를 쏙 내밀었다. 남자아이는 그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카메라 가져와서 다 찍어놓을걸. 다음 탐험엔 누가 먼저 우는지 내기할까? 남자아이는 자기가 다음이라고 말한 것에 흠칫 놀랐다. 그러나 곧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야? 여자아이는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남자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엔 섬에 가고 싶어. 강 사이에 있는 섬 있잖아. 거기에 빈집이 하나 있어. 그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 다음엔? 그 다음에는 저기. 여자아이는 밤하늘을 가리켰다. 반쪽 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저 달에 가고 싶어. 예전 세상에는 저 달에 사람이 살았대. 같이 가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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