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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해안가

2008.09.26 23:3609.26

   3만원에 해줄게.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두 학생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학생과 체구가 작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학생이었다. 호리호리한 학생이 언덕 위 도로변에 있는 차로 뛰어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학생들의 차가 언덕을 내려와 민박집 앞에 주차했다. 차는 렌트카였다. 학생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한 명이 방값을 남자에게 건넸다. 아무도 우산이 없었다.
   남자는 민박집 안 평상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렌트카의 뒷모습이 보였다. 비 때문인지 서서히 차가 뒤로 밀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어쩌면 사이드 브레이크가 잠기지 않아 남자가 있는 집을 들이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십 분이 지나도 차는 다가오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에는 주차한 차가 뒤로 밀려 집 벽을 들이받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진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자꾸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모든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 주에도 비가 왔었다. 그때도 방값을 3만원으로 해줬다.
   문득 모든 게 부서졌으면,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저번 주 사건 때문에 벽에 금이 갔지만, 사장은 돈을 받고도 수리를 하지 않았다. 남자는 매일 금이 간 곳을 빤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금이 더 자라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금은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몸에도 저런 금 한 두 개는 가 있을 지도 몰랐다. 언제 어디에 부딪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두 번쯤 충돌 없이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베이지색 반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배가 튀어나온 무거운 몸뚱아리만 보일 뿐이었다.
   창밖으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모두 수영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비는 소강상태였다. 남자는 지름길을 알려주려다가 학생들이 지나치자 다시 앉았다. 이미 한 달 전쯤에 정한 날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사람들은 비가 내려도 대부분 바다에 뛰어들었다. 태풍 때문에 사람 키를 넘어서는 파도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재미있는 놀이였다. 때론 거친 파도에 휩쓸려 안경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는 학생들 중에 한 명 정도는 안경을 잃어버리리라 예감했다. 그러면 저번처럼 남자는 안경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남자는 항상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일을 했다. 주차장 안내 일을 할 때도 주차를 할 곳을 알려주어야 했고, 나갈 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민박집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에는 공동 화장실 위치부터 알려주어야 했다. 방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어야 했고, 샤워는 어디서 하는지, 젖은 옷은 어디에 걸어야 하는지 알려주어야 했다. 휴지나 수건을 찾는 사람도 있었고, 값싼 횟집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모든 것에 금세 익숙해졌다. 그러자 그 모든 일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느 것을 알려주고, 어느 것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몰랐다. 남자는 이제 손님이 먼저 물어보는 것에만 대답했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하늘은 여전히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듯했다. 해변 쪽에서 학생들이 돌아왔다.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까 체구가 작고 검은 뿔테 안경을 썼던 학생만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예상대로 안경을 잃어버린 듯했다. 학생들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차를 탔다. 남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것을 기대했지만, 학생들은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떠났다.
   남자는 다시 차가 사라진 빈 공터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왠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안경을 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남자는 안경이 살아있는 생물이라 생선처럼 물에서 잡는다는 설정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바다에 가면 파도가 가져간 그 안경들이 두둥실 떠 있을 것 같았다. 남자의 상상 속에서 안경들은 이제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처럼 살아있었다. 안경들은 마침내 태어난 바다로 돌아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러다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뿜는 오징어잡이 배가 뜨고 안경들은 하나둘 그물에 걸려 올라올 것이다. 갓 잡은 안경을 눈에 끼고 폭풍이 몰려오는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면 거대한 대왕 안경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배를 두 동강 내고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해안가를 부순 다음 날이면 처참한 잔해들만이 햇살에 드러날 것이다. 사라져버린 것들은 그렇게 어김없이 부서지고 매몰될 것이었다. 안경을 쓰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부질없는 의문이었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학생들은 몇 시간 뒤에 도착했다. 남자는 유심히 학생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안경을 잃어버린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학생의 얼굴은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새로 맞춘 안경이 도수가 높은 탓에 세상이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새 안경은 갈색 뿔테였다. 남자는 문득 손을 뻗어 안경을 만져보고 싶어졌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남자는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고,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을 답했고, 원하는 것을 해줬다. 남자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여기서 일한다는 결정뿐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나 바닷가에 도착했고, 매일 바다를 보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다행히 자리를 구하기는 힘들지 않았다. 친척 중에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성수기 때만 바쁠 뿐이고, 그마저도 이렇게 비가 오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학생들은 바비큐 통에 불을 피우고 석쇠 위에 고기를 늘어놓았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소주를 마시며 흥겹게 떠들었다. 남자는 보고 있던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 외부의 소리를 차단했다. 한 학생이 남자에게 다가왔다. 처음에 봤던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학생이었다. 잔심부름을 다 하는 걸로 보아 가장 나이가 적은 모양이었다. 근처에 나이트가 어디 있나요? 남자는 차분히 나이트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학생은 감사하다고 말한 뒤에 방으로 돌아갔다.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바닷가에는 오징어잡이 배가 줄줄이 불을 켰다. 어둠 속 빛이 지독히도 눈부셨다.
   학생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외출했다. 한 학생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매일 바다를 볼 수 있는 데서 살면 좋겠다. 누군가 말을 받았다. 매일 바다를 보는 사람들은 별 감흥도 없다더라. 다른 학생이 대답했다. 그런가? 그래도 아무튼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살아보고 싶지 않냐? 이런 데 집을 지어놓고, 깨끗한 공기와 매일 아침 바다를 보면서 깨어나는 거 멋지잖아.
   남자는 어떤 의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바다는 때론 낯설었고 어떨 때는 한없이 친숙했다. 바다는 매번 다른 모습을 가졌다. 지금처럼 하루 종일 비를 빨아들일 때도, 태풍이 몰려와 파도가 칠 때도, 햇살에 반짝이는 순간에도, 남자는 언제나 바다 곁에 있었지만 바다를 어떤 식으로든 소유할 수 없었다. 파도처럼 바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밀려올 뿐이었다. 저 바다 속에는 한때 자신의 몸에 있던 수분과 부모님의 육신에 깃들었던 수분,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의 수분이 한데 섞여 있을 것이었다. 남자는 그걸 노려보면서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있는 사람이 모이면 바다가 되리라는 걸 받아들였다. 모든 것은 바다로 돌아갔다. 바다는 침묵했다.
   새벽녘에 학생들은 방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보다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얇은 옷을 걸친 네 명의 여자들과 함께였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학생들은 술과 안주가 담긴 봉지를 양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술자리가 펼쳐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매일 밤 들려오는 희미한 파도소리에도 간혹 잠이 깨곤 했다. 남자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라고. 혹은 전부 바닷물에 빠트려 버리고 싶었다. 파도가 그들을 데려갈 것이다. 아직도 등불처럼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그물로 그들을 건져 올릴 터였다. 갓 잡은 여자를 옆에 끼고 폭풍이 몰려오는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면 거인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배를 두 동강 내고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해안가를 부순 다음 날이면 처참한 잔해들만이 햇살에 드러날 것이다. 사라져버린 것들은 그렇게 어김없이 부서지고 매몰될 것이었다. 새로운 만남을 가지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부질없는 의문이었다. 다시 비가 쏟아졌다.

   남자는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걷히고 있었다. 바다에 떠 있던 오징어잡이 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밤낮이 뒤바뀌는 순간, 오징어잡이 배들은 모든 환상을 잃었다. 남자는 그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초라한 몰골의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펼쳐들고 백사장으로 걸어갔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파제까지 걸어간 다음에 몰아치는 파도를 감상했다. 파도는 불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순간 남자의 몸까지 물이 튀었다. 남자는 마치 바닷물을 일부러 몸에 흩뿌리고자 작정한 사람처럼 그대로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의 옷은 젖어갔다.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바다에 빠지는 게 몸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남자는 점점 방파제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파도가 주춤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와 한 몸이 되는 순간, 어쩌면 자신은 무언가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 속으로, 끝없이 내려갈 수 있을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남자는 한 번쯤 가볼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떠날 수 있을지 남자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 이곳을 떠날 자신조차 없었다. 다시 어디론가 무작정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체일지, 안정일지 모를 무언가가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없었고 가야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시간은 결코 뒤로 가지 않으니까. 앞은 무수한 미지일 뿐이고 남자는 그것이 두려웠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세상일까. 자신일까. 차츰 파도는 가라앉았고 비도 그쳐 갔다. 남자는 다시 민박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생들이 차에 짐을 싣고 있었고 여자들은 이미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짐을 다 싣고 모두 탑승한 뒤에 차가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석유가 아닌 가스차라 힘이 부족한 듯 타이어에서 연기가 났다. 다시 뒤로 뺐다가 한 번에 오르기 위해서 학생들의 차가 뒤로 후진했다. 쿵! 순간, 민박집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회색 르망의 뒷범퍼와 렌트카의 뒷범퍼가 충돌했다. 남자와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옆집에 있는 청년까지 전부 뛰쳐나왔다. 아니, 운전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잘 좀 보고 하지. 옆집 청년이 르망의 뒷범퍼를 살피며 말했다. 렌트카는 중형차라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세워져 있던 르망의 뒷범퍼는 금이 간 것이 확실히 보였다. 남자는 목에서 시큼한 게 넘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옆집 청년이 말했다. 이거 이 르망 범퍼 갈려면 돈 꽤 깨지는데. 앞에도 바로 어제 갈고 온 거거든요. 이거 우리차도 아니라 아는 형님이 빌려준 찬데. 어제 앞범퍼 작살내고 오늘 또 작살났으니. 이거 원. 이게 흰색이라면 몰라도 회색은 또 없어요. 범퍼 가는 거 이십 만원에 도색까지 하면 십 만원 더 붙고. 어떻게 보험으로 할 거요? 보니까, 이 차 렌트카인가 본데. 지금 겉에서 보기에는 멀쩡해도 뜯어보면 안에 다 작살 나 있다고. 걔네들한테 이 사고 말하면 돈은 돈대로 받고 걔네들은 안 뜯고 그대로 또 쓸걸. 어떻게 하실래요? 차를 운전한 학생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남자는 학생의 옷깃을 붙잡고 성을 내거나 어깨를 감싸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고함을 지르거나 울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 말을 걸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학생이 입을 열었다. 차 주인에게 전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옆집 청년이 핸드폰을 건넸고 십 분간 통화가 이어졌다. 통화가 끝난 후 다시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학생이 언덕 위로 뛰어갔다. 다시 돌아왔을 땐 학생의 손에는 몇 십 만원 어치의 돈이 쥐어있었다. 학생들은 옆집 청년에게 돈을 건넸다.
   다시 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쉽게 올라갔다. 학생들의 렌트카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옆집 청년을 바라보았다. 옆집 청년은 카센터와 가격을 협상 중이었다. 받은 돈 보다 십 만원을 줄이는데 성공한 듯했다. 처음부터 높게 불렀던 모양이다. 또다시 기시감이 몰려왔다. 이런 사고가 어제도, 저번 주에도, 그 전에도 있었던 것만 같았다. 매번 반복되는 일처럼, 모든 게 수십 번 겪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버린 것이다. 남자는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형체만 기억날 뿐 명확한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차의 번호도 외관도 모델도 기억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것이 사건인지, 세계인지, 자신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믿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학생들이 떠난 빈방의 문을 열었다. 방은 깔끔하게 정리된 편이었다. 침구류를 다시 개려고 펴보니 배게 하나에 토사물이 묻어 있었다. 새벽에 누군가 구토를 하고 나서 입가를 닦지 않고 잔 탓에 묻은 듯했다. 남자는 왠지 이유도 없이 어제 안경을 잃어버린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받은 대야에 배게 겉 천을 벗겨 적셔놓았다. 몇 시간 뒤 옆방에 한 손님이 새로 왔다. 비가 그치고 날씨도 맑은 상태라 손님이 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그 손님은 여자였고 혼자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런 손님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의아했지만 먼저 말을 붙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혼자 방에 들어가 있었다. 격리된 사람처럼. 그럴 거면 뭐하러 바닷가까지 왔는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남자는 신경을 끄고 민박집을 벗어나 산책을 하러 나갔다.
   멀리서 비린내가 났다. 날씨가 개면서 바닷가에서 오는 냄새가 진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달갑지 않은 감정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모든 게 막막했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았다. 아무 것도 결정되어지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을 때 남자는 바다를 찾았다. 바다는 어떤 해답도 주지 않았지만, 남자는 바다 곁에 머무는 게 좋았다. 해안가는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다. 바다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아는 듯했다. 남자는 바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남기로 결심했다. 바다는 무언가 말하고 있었고 남자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곳이 오기 전에 남자는 자주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땐 부모에게 소리를 지르고 방안에 틀어박히는 게 일상이었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건 마치 세상에 패배한 느낌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었다. 삶의 모든 게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삶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옭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중한 짐이 가슴을 독소로 가득 채웠다. 속을 게워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타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토해낼 수가 없었다. 부모는 매일 남자를 욕했다. 미친놈, 버러지 같은 새끼가 그때 남자의 이름이었다. 남자는 그 이름을 사랑했었다. 왠지 강해보였으니까. 남자는 언제나 강해지고 싶으나 강해질 수 없었다. 강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꿈이며 무의미한 시도였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한때 남자는 친구들과 동해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차를 렌트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하루는 계곡에 들려 놀고 다음 날 무작정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바다로 떠났다. 비가 왔다. 이미 바다에 도착한 상태라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알았지만 한 달 전에 정한 날짜를 그때 와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들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바다에 뛰어들어 놀았다. 남자는 망설였다. 파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었다. 저 파도에 휩쓸리면 죽을 지도 모른다. 만약 땅에 발이 닿지 않아 파도에 휩쓸린다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남자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바다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여자들까지 신나게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남자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보자고 결심했다. 이번 여행도, 그 전의 삶의 방향도 항상 누군가의 말에 따라서였다. 남자는 자신을 바꾸고 싶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성인 키의 몇 배는 될 듯한 파도가 몰려왔다. 파도에 뛰어들었다. 온 몸이 물에 잠겼다.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누구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비에 잠겨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태초에 세상을 뒤덮은 홍수처럼. 남자는 그제야 안경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물놀이에 흥미가 사라졌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무시하며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불분명해진 세계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제 압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초췌해보였다. 탁한 빛깔을 띠고 끊임없이 비를 맞고 있는 바다는 지친 것 같았다. 바다도 늙을까. 남자는 바다가 왜 이처럼 처량해 보이는지 궁금했다. 알 수 없는 음울과 시련이 넘실거렸다. 바다는 침묵했다.

   남자는 손님이 없는 날에는 밤에 폭죽을 가방에 담고 해변으로 나갔다. 밖은 농밀한 어둠이 뒤덮고 있었으나, 곳곳에 설치된 조명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설치된 조명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삼삼오오 앉아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남자는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몇 시간동안 반복적으로 폭죽을 사라는 소리를 외쳤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번지점프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다 앞에 세워진 번지점프대는 어둠 속에서도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떤 외국인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해치는 흉물이라고 지적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대부분 잠시 유흥거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들은 잠시 머물다 곧 일상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비일상의 세계가 미학적 균형을 잃는다 한들 관심이 갈 리가 없었다. 그 모든 건 그들에게 한낮의 꿈과 같은 허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번지점프대에선 댄스곡이 흘러나왔다. 늦은 시각인데도 환히 밝힌 조명과 음악 때문에 밤이 깊었다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노래가 끊기고 누군가 뛰어내렸다. 번지점프 진행요원의 음성이 해안가에 울려 퍼졌다. 이 분을 바닷물에 담글까요? 말까요? 번지점프대 밑에 있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빠트리라고 외쳤다. 알겠습니다. 줄이 천천히 늘어지면서 남자는 두 번 물에 잠겼다가 나왔다. 마치 거인이 찻잔에 티백을 넣었다 빼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번은 여자였다. 십분 간 시간을 끌던 여자는 결국 뛰어내렸다. 밤바다가 눈앞으로 다가와도 무섭지 않았을까. 대개 밤에 범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여자는 한 번만 살짝 바닷물에 닿았다가 나왔다. 그 뒤로는 시간이 늦어 더 이상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텅 빈 번지점프대에 자신이 올라가는 것을 상상했다. 번지점프대에 올라가 서는 순간, 바다 속에서 갑자기 거인이 솟구칠 것 같았다. 거인은 번지점프대를 가볍게 뽑더니 낚시대처럼 바다에 던질 것 같았다. 줄에 묶인 자신은 미끼처럼 바다에 몇 번이나 담구어지고 마침내는 심연 속에 잠들어 있던 대왕 안경을 깨울 지도 몰랐다. 고대에 바다와 함께 태어난 대왕 안경은 남자를 물고 세상 밖으로 출몰할 것이다. 그리고 거인과 맞붙어 싸울 것이다. 성난 바다는 해일이 몰아치고 해안가는 남김없이 부서질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멸망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그 원인은 바로 남자이다. 남자는 자신이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태어난 의의가 세계의 멸망이라는 은밀한 비밀이었다면, 그것이 생의 의미였다면 꽤 근사할 것 같았다.
  
   남자가 오래 전 친구들과 동해를 찾았을 때, 늦은 시각에 그들은 해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바닷가에도 번지점프대가 있으면 좋겠다. 바로 밑에 물이 있으니까 설치조건에 알맞잖아.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면 자연경관을 해치잖아. 다른 데도 많은데 바닷가에 또 설치할 필요도 없지. 그리고 다들 해수욕 하러 오지 여기까지 와서 번지점프를 하겠어. 다시 처음에 말했던 누군가가 말했다. 야, 그건 모르는 거지. 해수욕만 하면 심심하잖아. 물에 젖어도 되는 놀이기구 하나쯤 있으면 인기 끌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다 줄이 끊어지면 어떡해. 또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아. 그리고 끊어진다고 해도 밑이 바다잖아. 살 수 있어. 괜찮아. 누군가가 말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만약, 죽음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끝이라면 말이야. 그냥 죽어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뭐야, 그게. 난 어떻게든 장수하고 싶은데. 아니, 죽기 싫다고.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살고 싶어. 그때였다. 폭죽을 팔라고 주위를 돌아다니던 아저씨가 남자 주변에서 멈춰 섰다. 거, 듣다보니 뭐 이런 데서 심각한 얘기들을 나누고 그래요? 내가 뭐 잘 살아온 건 아니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느낀 건 그래도 인생 한 번 살아볼만 하다, 이거야. 죽지 말고, 한 번 살아봐요. 그럼 알게 될 테니까. 누군가가 말했다. 네, 살 거예요. 쟤가 괜한 소리한 거지, 정말 죽으려는 얘는 없어요. 아저씨는 씩 웃었다. 아, 목마른데 뭐 마실 거 좀 안 주나? 대신 내가 잘 살라고 폭죽 하나 줄 테니.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여기! 맥주 한 잔 드세요. 폭죽은 괜찮아요. 저희가 사드리지는 못할망정, 죄송스럽죠. 아저씨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키고는 폭죽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거 원가 얼마 안 해. 그냥 선물이야, 선물. 재미있게 놀고 있다 또 들릴게. 좋은 시간 보내. 친구들은 다 같이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폭죽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야, 이거 빨리 붙여보자. 담패를 피는 친구 하나가 라이터를 켜서 남자의 손에 들린 폭죽에 불을 붙였다. 곧 치지직 타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다. 하늘 높이 초록색 발광체가 솟구쳐 오르더니 불꽃이 터졌다. 폭죽은 30연발이었고, 아이들은 여러 발씩 돌아가면서 폭죽을 쏘아보았다. 남자는 그때 목에서 시큼한 게 넘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얼마 뒤에 폭죽을 파는 아저씨가 다시 들려서 자신의 인생역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마땅히 할 일도 의욕도 없었던 무기력한 삶. 결국 쫓기듯 바다에 와서야 민박집에서 일하게 된 경위. 또 가끔 폭죽을 팔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얼마 전에는 렌트카를 끌고 온 학생들이 민박집을 들이받은 적도 있고, 세워놓은 차 뒷범퍼를 들이받은 적도 있다고 얘기하며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남자와 친구들은 건성으로 듣고 잠시 후에 자리를 정리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번지점프대 같은 것도 없었으니, 그들에게 놀이란 폭죽 밖에 없었다. 멀리 오징어잡이배가 떠 있었고 오징어를 유인하는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 폭죽 하나만 주세요. 남자는 누군가 자신의 폭죽을 산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은 채 앉아있었다. 뼈 밖에 없는 것처럼 가늘어 보였다. 남자는 어딘가 여자를 본 기억이 있다고 생각했다. 낮에 옆방에 묵은 손님이었다. 낮에는 바닷가에 나와 보지도 않더니 사람이 적은 밤중에서야 밤바다를 보러 나온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폭죽 하나를 건넸다. 여자가 말했다. 얼마에요? 남자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얼마 안 하니까, 서비스로 드릴게요. 저희 집에 묵은 손님이니. 여자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담배 끊어서 라이타도 없네. 불 좀 붙여주시겠어요? 남자는 묵묵히 주머니에 있던 라이타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곧 치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폭죽이 발사됐다. 펑! 펑! 하는 소리가 일정 간격을 두고 들리면서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의 발광체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여자는 무심히 새까만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불꽃이 전부 터지자 여자는 모래밭에 폭죽을 거꾸로 꽂아놓고 말했다. 별로 안 팔리죠? 시간도 늦었고. 여기 잠시 앉아서 쉬세요.
   남자는 수동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여자의 말에 따라 앉았다. 그때서야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닌 다리의 피로가 몰려왔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아연해졌다. 처량하게 산다고만 생각했지 열심히 산다는 생각은 일생동안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열심히 살았던가. 자문해보았지만 대답은 아니었다. 남자는 열심히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고백했다. 여자는 자신은 동의하지 않으나, 남자의 대답을 존중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했다.
   여자는 번지점프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저거 말이에요? 언제부터 있던 거예요? 예전에 왔을 땐 없었는데. 한 3년 전에 왔었나. 그땐 가족끼리 왔었는데. 동아리에서 온 적도 있었고. 나 생각보다 자주 왔구나. 아무튼 그땐 저런 거 없었거든요. 저거 좀 싫지 않아요? 바닷가에 웬 번지점프대? 누구 생각인지, 머릿속에 돈만 박혀 있나 봐요. 발기한 성기처럼 보이지 않아요? 남자는 작년에 만들어졌으며 낮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탈 정도로 꽤 인기이고 대개 미관을 해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여자는 푹 고개를 숙이며 짧게 읊조렸다. 잔인해. 흉측해. 바보 같아.
   남자는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다가 자기가 떠올린 상상을 얘기해주었다. 번지점프대가 낚싯대가 되고 바다 속에는 대왕 안경이 살고 거인이 나타나 싸운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자는 흥미롭게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 결국 누가 이겼어요?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누구도 이기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세계는 멸망했으니까, 승리자는 없던 거였죠. 거인은 결국 대왕 안경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긴 했어요. 대왕 안경은 거인에게 딱 맞는 크기였고 거인은 대왕 안경을 쓰고 밤하늘을 올려다봤어요. 그때 거인은 태어나서 처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어요. 거인의 시력이 굉장히 낮았거든요. 거의 장님에 가까운 사람이 자기에게 딱 맞는 시력을 회복했다고 생각해봐요. 그건 새로운 세계를 본 것과 마찬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죠. 새로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는 소리에요. 거인은 처음으로 별들의 무리를 보았고 작은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건물을 보았어요. 그러자 거인은 외로워졌죠. 그제야 자기가 혼자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세계와 격리됐다는 소외감이 거인을 감쌌죠. 거인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어요. 은둔형 외톨이로 살자고 마음먹은 거죠. 거인이 대화를 나누던 유일한 친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속삭이던 파도, 즉 자신을 감싼 바다뿐이었으니까요.
   여자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인은 외톨이를 선택했네요. 혹시 아저씨도 저 바다가 마치 지옥도 천국도 아닌 연옥처럼 생각되진 않나요? 이렇게 밤바다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영혼이 시간조차 없는 연옥에 빠진다면 저 바다 깊이 심연 속에 빠지는 것과 같겠구나, 그런 느낌이요.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니까, 음…… 거인은 마치 로댕의 ‘지옥문’에 나온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사진으로 많이 봤죠? 지옥의 문이 조각된 거요. 지옥의 군상들을 내려다보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을 그만두고 깨어난 순간, 심판자가 된다고 해요. 그런데 거인은 심판자가 아닌 은둔자를 택했네요. 바보 같아요. 세상을 그대로 자기 잣대로 심판하면 될 텐데, 단독자로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자신의 강함을 남들에게 보여줘도 될 텐데. 약해빠졌으니까, 어리석으니까, 도망치기만 하는 거죠. 그럴 바엔 그렇게 고통 아니, 생각조차 없는 연옥에 처박혀 있는 게 낫겠죠.
   남자는 마치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모든 게 지리멸렬하다는 생각이 들고 대화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은 남자에게 민박집 한 켠에 있는 방이었다. 그 방 만이 남자에게 집으로 불리는 공간이었다. 한 발자국만 나와도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습기와 모멸감이 남자를 맞았다. 남자는 불현 듯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주먹으로 뒤통수를 내리치고 칼로 목을 긋고 피를 바다에 뿌리고 시체를 물속에 가라앉히고 싶었다. 어째서일까. 오래전부터 가슴 속을 답답하게 했던 무언가는 남자에게 충동적인 폭력성만을 가져다 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내면 속에 함께 자라온 자신의 본래 성질일지도 몰랐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 와서 그걸 알아내봤자 변하는 건 없다. 상관없는 일이다. 바람이 부는 일이나, 바다에 파도가 치는 일, 누군가 물에 뛰어들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일처럼 상관없었다. 종종 바다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날이면 시체가 해변으로 떠밀려왔다. 처음부터 자살을 꿈꿨거나,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빠졌거나, 무언가에 홀렸거나. 남자는 물에 퉁퉁 부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보면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자신은 사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그저 존재하고 있는 삶은 유령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죽은 듯 사는 것은 실재하는 삶일까. 아니면 심연 속 거인의 꿈에 불과할까.
   침묵을 깨트리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음, 말이 없으니까. 심심하네. 이번엔 제 얘기를 해볼까요? 전 바다가 싫어요. 왜냐고 묻는다면 싫은 것에 이유는 없으니까,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아무튼 바다 보단 사막이 좋아요. 바다가 다 말라서 모조리 사막이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데 전 한 번도 사막에 가본 적은 없어요. 이집트에 가는 게 어릴 적부터 꿈이에요. 서른다섯이 되면, 이집트에 가려고 적금을 부었어요. 이집트엔 말이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와 모래가 있어요. 멋지지 않아요? 그곳엔 세상 사람들의 눈물도 땀도 금방 증발시킬 열기가 있죠. 바다는 답답하잖아요. 모든 눈물과 비를 품어버리고. 거인도, 사람도, 절망도, 환희도, 고독도 받아들이죠.
   남자가 대답했다. 여기에도 모래가 있어요. 발밑에.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충분하지 않아요. 남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충분하다는 건 어떤 거죠?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죽음 같은 거요. 남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남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찾기 힘들었다. 내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변을 가득 메울 것이다. 남자는 내일은 7만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민박집이 허름한 만큼 가격 경쟁이 살아남을 유일한 수단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제 어디로 돌아 가냐고 물었다. 여자는 모르겠다고 잠시 여기 더 머물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남자는 방세를 더 올려 받을 거라 말하자 여자는 너무 하다고 했다. 남자는 그건 어쩔 수 없는 시장논리라고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날씨를 탓하라고 했다. 여자는 언젠가 민박집에 난 금 때문에 집이 무너질 것 같다고 했다. 남자도 동의하며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고 그땐 이렇게 밖에 나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자는 안 됐다고 여기며 자신처럼 바다를 떠나 사막으로 가라고 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서서히 뱃길을 돌리고 있었다. 남자는 문득 어디선가 고래 하나가 나타나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돌아가야겠다고 느꼈지만, 여자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돌아가면, 새로운 손님이 올 것이다. 남자는 그들을 처음 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느낄 거라 예감했다. 그들 중 누구는 안경을 쓰고 있을 것이고, 파도 속에 그걸 잃어버릴 것이다. 누군가는 차 사고를 낼 것이고, 누군가는 검은 바다에 잠길 것이고, 누군가는 폭죽을 살 것이고, 누군가는 여자를 만날 것이다. 남자는 그 모든 게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고 반복된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과거는 남자에게 매일같이 나타났다. 남자는 저번 주에 온 아이도, 이번 주에 온 아이도 얼굴이 같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알면서도 잊은 척했고 무시하였다. 아이는 어릴 적 자신이었다. 아이와 자신 중 하나는 거짓이거나, 혹은 둘 다 거짓놀음에 불과할 것이었다.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린내가 났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발바닥에 닿은 까칠까칠한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입가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셀 수 없는 시간동안 이어진 파도가 다시금 거칠게 몰아쳤다. 종아리까지 찬 물이 튀었다. 그 순간 남자는 처음으로 바다의 언어를 들었다. 거인에게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바다의 목소리가 남자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수평선에서 서서히 시뻘건 해가 떠올랐다. 햇살이 해안가를 비추자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채, 파도 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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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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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shet 08.10.12 22:43 댓글 수정 삭제
    바다는 모래사장에 맨날 파도를 보내줘요. 저번에 봤던 이 파도가 저저번에도 봤을 듯 하고, 그런 기시감이 세상 사는 일 어딘가에 또 드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남자는 그런 기시'감'에서 벗어날려고 하지만 곧 이내 자신의 성질 때문에 상실'감'을 느낀 듯 해요. 웬지 허무'감'도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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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10.15 08:27 댓글 수정 삭제
    읽고 리플까지 감사합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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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11.03 03:02 댓글 수정 삭제
    안경이 물고기인 소설, 저도 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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